"야, 순정아. 물 좀 가져와."방문이 벌컥 열리며 들려온 목소리에, 순정은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팬티 차림으로 문가에 삐딱하게 기대선 강태오.씻고 나온 듯 물기가 덜 마른 머리를 대충 넘기며, 순정의 방을 제 집 안방처럼 드나드는 저 낯짝.순정은 그 얼굴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서른 해 가까이 함께 살면서도, 단 한 번도 순정에게 미안하다는 말을 제대로 해본 적 없던 얼굴이었다."어, 목마르다니까. 얼음 잔뜩 넣어서 시원한 걸로 가져다 줘. 빨리."강태오가 늘어진 팬티 차림 그대로 순정의 침대에 벌러덩 드러눕더니, 옆구리를 긁적이며 리모컨을 찾았다.그러더니 화장대 위에 놓인 순정의 작은 지갑으로 자연스럽게 손을 뻗었다.제 주머니라도 되는 것처럼 지갑을 열어 지폐를 꺼내 세어보는 손길에 망설임이라곤 없었다."야, 근데 너 지갑에 현금 이거밖에 없어? 나 오늘 형들 만나기로 했는데, 몇만 원만 더 줘 봐."순정이 기가 차서 가만히 바라보자, 강태오는 도리어 당연하다는 듯 핀잔을 늘어놓았다."너 나 못 믿냐? 인맥이 별거 아닌 것 같아도 다 나중에 사업 밑천이라니까?"그 뻔뻔한 몸짓과 말 한마디에, 순정의 머릿속으로 지난 삶의 장면들이 스쳐 지나갔다.젊을 적부터 그랬다.결혼하고 몇 년은 그럭저럭 다니던 회사를 그만두더니, 치킨집을 한다며 순정의 적금을 몽땅 털어 넣었다.반년 만에 문을 닫았다.그다음엔 중고차 매매를 한다고 대출을 끌어다 썼고, 그다음엔 지인의 꾐에 넘어가 이름도 모르는 투자에 손을 댔다가 통째로 날려 먹었다.때마다 남은 빚은 고스란히 순정의 몫이었다. 순정의 이름으로, 순정의 신용으로, 순정의 앞으로.순정이 새벽마다 파출부 일을 나가고 밤늦도록 반찬가게를 지키는 동안, 남편은 안방에 드러누워 텔레비전 채널이나 돌리고 있었다.지붕에서 비가 새도, 명절 제사상을 차려야 해도 그의 손은 늘 비어 있었다.설거지 한번, 걸레질 한번 제 손으로 해본 적 없는 사람이었다. 순정이 몸살로 앓아누운 날에도, 밥은 어디 있냐고 묻
Last Updated : 2026-08-26 Read mor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