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10화. 작가 총각, 방 꼴이 이게 뭐야며칠 뒤, 순정은 이현의 방문 앞에서 코를 틀어막았다."총각, 안에 있어요?"대답이 없었다. 순정은 슬쩍 문을 열었다가 그대로 얼어붙었다.방 안은 그야말로 난장판이었다.빈 배달 용기가 책상 위에 산더미처럼 쌓여 있었고, 바닥에는 벗어둔 옷가지와 콘티 스케치가 어지럽게 널브러져 있었다. 창문은 며칠째 닫혀 있었는지 퀴퀴한 냄새까지 배어 있었다.이현은 그 한복판, 태블릿 앞에 엎드려 곤히 잠들어 있었다.헝클어진 검은 머리칼 사이로 창백한 옆얼굴이 드러났는데, 그 와중에도 이목구비만은 흐트러짐 없이 반듯했다."어머, 세상에. 사람이 어떻게 이런 데서……"순정은 팔을 걷어붙였다.마당에서 빗자루와 고무장갑, 커다란 쓰레기봉투를 챙겨 온 순정은 곧바로 방으로 쳐들어갔다. 지나가던 도경이 그 기세를 보고 슬쩍 고개를 들이밀었다."무슨 일이에요.""어, 도경 총각. 이 총각 방 좀 봐요. 사람 사는 데가 아니야."도경이 방문 안을 들여다보더니 미간을 찌푸렸다."이건 방이 아니라 창고네요.""그렇지? 그러니까 좀 도와줘요. 무거운 거 옮기는 것만.""알겠어요."도경이 순순히 팔을 걷어붙이고 들어왔다.순정은 그 모습에 흐뭇하게 웃으며 다시 청소에 열을 올렸다.부스럭거리는 소리에 이현이 눈을 비비며 몸을 일으켰다.헝클어진 머리칼이 이마를 반쯤 가리고 있었다."뭐, 뭐 하세요……""뭐 하긴, 청소하지! 총각, 이 방에서 어떻게 숨을 쉬고 살았대?""내 작업 창작 공간 건들지 마세요. 저 나름의 질서가 있는 겁니다."이현이 예민하게 눈을 치켜뜨며 말했지만, 순정은 들은 척도 안 하고 빈 용기부터 쓰레기봉투에 쓸어 담기 시작했다.그 손놀림이 어찌나 빠르고 능숙한지, 이현은 말릴 틈도 없이 지켜만 볼 수밖에 없었다."질서는 무슨. 이건 그냥 어질러 놓은 거지!""그거 나름의 배치가 있는 거라니까요.""그럼 저 컵라면 그릇도 나름의 배치야? 곰팡이가 필 지경인데?"이현이 말문이 막힌 듯 입을 다물었다.순정은 그 틈을 놓치지 않고 빠른
Last Updated: 2026-08-27
Chapter: 9화. 월세 열 배 내겠습니다이현이 하숙집에 짐을 옮긴 지 사흘째 되던 날, 순정은 이상한 낌새를 느꼈다.작업실로 돌아가야 할 이현이 좀처럼 짐을 챙기지 않았다.옷가지 몇 벌과 노트북만 들고 왔다던 처음 말과 달리, 어느새 방 안에는 태블릿과 펜, 참고 서적들까지 조금씩 늘어나 있었다.순정이 청소하러 방문을 열 때마다, 이현의 짐은 매번 조금씩 더 늘어 있었다."어머, 이거 언제 다 옮겼대."순정은 혀를 내두르면서도, 그 모습이 은근히 귀엽게 느껴져 굳이 캐묻지 않았다."총각, 작업실은 안 가도 돼요?"아침상을 차리던 순정이 묻자, 이현이 젓가락을 든 채 순간 멈칫했다.헐렁한 검은 후드티 소매 아래로 드러난 손목이 며칠 전보다는 조금 살이 오른 듯했지만, 여전히 가늘고 여려 보였다."여기가 작업이 잘돼서요."창백하던 얼굴에 옅게 혈색이 돌아온 이현이었다.다크서클도 며칠 사이 조금은 옅어져 있었고, 마르고 긴 손가락으로 젓가락을 쥐는 손놀림에도 힘이 붙어 보였다.서늘하게 처져 있던 눈매도 예전만큼 날카롭지 않았다.순정은 그 변화가 내심 뿌듯했지만, 겉으로는 아무렇지 않은 척 내색하지 않았다."그래요, 편한 대로 해요."이현이 잠시 젓가락을 내려놓고, 신기하다는 듯 순정을 바라보았다."저 사실…… 삼 년 가까이 하루에 두세 시간도 제대로 못 잤어요. 약을 먹어도 안 되고, 병원에 가도 그때뿐이고. 근데 여기 온 첫날부터 열네 시간을 내리 잤잖아요. 그날 이후로 매일 밤 열 시만 되면 눈이 저절로 감겨요. 이런 건 처음이에요.""그게 뭐 대수라고. 사람이 배부르고 마음 편하면 다 그런 거야.""저한테는 대수예요. 마법 같아요, 진짜로...누나, 아무래도 이 집…… 일반 하숙집이 아니라 'HP/MP 완전 회복 마법 스팟' 같은 거 아니에요? 누나가 해준 밥 먹으면 무슨 힐링 포션 먹은 것처럼 몸에 전율이 돈다니까요.“이현이 숟가락을 들고 대단한 진리라도 깨달은 듯 눈을 반짝이자, 순정은 주걱을 든 채 멍하니 이현을 바라보았다.에이치피? 엠피? 힐링 포...
Last Updated: 2026-08-27
Chapter: 8화. 어디를 함부로다음 날 아침, 순정은 평소보다 일찍 일어나 부엌을 분주히 오갔다.머리는 뒤로 대충 말아 올려 집게핀으로 고정했고, 앞머리 몇 가닥만 흘러내리게 둔 채였다.헐렁한 맨투맨에 청바지 차림 위로는 알록달록한 잔꽃무늬 앞치마를 둘렀다.162cm의 작은 몸이 커다란 냄비 앞에서 국자를 휘두르는 모습은 얼핏 보면 그저 여리여리한 아가씨 같았지만, 뚝배기를 번쩍 들어 옮기는 손놀림에는 예사롭지 않은 힘이 실려 있었다."어이구, 도경 총각. 벌써 나와 있었어?"마당에서는 도경이 벌써 사다리를 세워두고 대문 경첩을 살펴보고 있었다.소매를 걷어붙인 팔뚝에 아침 햇살이 내려앉아, 단단하게 잡힌 근육 선이 도드라져 보였다.목에는 어제 그대로 줄자를 걸고 있었고, 발치에는 드라이버와 펜치가 가지런히 놓여 있었다."아침부터 소음 내면 다른 분들 깨실까 봐요.""우리 도경이 은근히 배려심 있네."순정이 국자를 든 채로 다가가 도경의 팔뚝을 툭 쳤다.그 팔뚝이 순정의 손바닥 아래에서 단단하게 느껴져, 순정은 속으로 감탄했다. 노동으로 다져진 몸이 확실히 눈으로 보는 것보다 더 실했다."우리, 라고 하지 마십시오. 저희 어제 처음 보지않았나요?.""어허, 하숙집 식구가 됐으면 다 우리지. 까칠하게 굴지 마요."도경은 대꾸 대신 다시 경첩으로 시선을 돌렸다.귀 끝이 살짝 붉어진 것 같기도 했지만, 순정은 굳이 캐묻지 않았다.대신 대문 기둥에 손을 짚고 도경이 일하는 모습을 물끄러미 지켜보았다.드라이버를 쥔 손놀림이 꽤나 야무졌다. 확실히 눈썰미도, 손끝도 예사롭지 않은 총각이었다."오늘 아침은 뭐 드십니까.""콩나물국이랑 계란말이 그리고 제육볶음. 총각도 이제 이 집 식구니까 얼른 씻고 와요.""저는 원래 아침을 잘 안 먹습니다.""그런 게 어딨어. 아침을 안 먹으니까 그렇게 예민하고 까칠한 거야. 사람이 배가 든든해야 마음도 너그러워지는 법이라고."도경이 뭐라 반박하려다, 순정의 단호한 눈빛에 그만 입을 다물었다.그 모습이 마치 잔소리 앞에서 슬쩍
Last Updated: 2026-08-27
Chapter: 7화. 망치 가방을 든 남자밥상을 물린 이현은 방으로 올라가려다 말고 마루 끝에 우두커니 섰다."저기, 사장님.""사장님은 무슨. 그냥 누나라고 해요."순정이 설거지를 하며 대수롭지 않게 대꾸했다. 이현은 잠시 머뭇거리다 입을 열었다."저 여기서 지내도 될까요. 월세는…… 부르시는 대로 드릴게요.""어머, 총각. 하숙집이 무슨 경매도 아니고, 부르는 대로가 어딨어. 원래 방값에 밥값 얹은 만큼만 받을 거야."이현은 그 대답이 이상하게 마음에 남았다.지금껏 이현 주변의 사람들은 늘 값을 매기고 조건을 따졌다.본가 사람들은 이현을 서자라는 값으로 매겼고, 업계 사람들은 이현의 웹툰 조회수로 값을 매겼다.그런데 이 여자는 이현에게서 아무것도 재려 들지 않았다. 그저 밥그릇 하나를 더 놓을 뿐이었다."그럼…… 오늘부터 여기서 지내겠습니다.""그래요, 잘 생각했어. 짐은 내일 옮겨 와요."이현이 고개를 꾸벅 숙이고 이층으로 올라간 그때, 대문 밖에서 묵직한 발소리가 들렸다.철제 공구함이 부딪히는 소리가 짤랑 울렸다.순정은 그 소리에 잠시 손을 멈췄다. 오늘 하루에만 벌써 두 번째 낯선 발소리였다.순정은 앞치마에 젖은 손을 문지르며 피식 웃었다.전생 같으면 이런 소란이 성가시게 느껴졌을 텐데, 이상하게도 지금은 이 대문 밖의 인기척들이 하나같이 반가웠다.순정이 젖은 손을 앞치마에 닦으며 마당으로 나가보니, 대문 앞에 낯선 청년이 서 있었다.어깨에 커다란 공구 가방을 둘러멘 채, 목에는 줄자를 걸고 있었다.큰 키에 균형 잡힌 체형에, 팔뚝은 노동으로 다져진 듯 단단한 잔근육이 실하게 잡혀 있었다.짙은 애쉬빛이 도는 브라운 머리칼 아래로 뚜렷한 이마와 콧날이 곧게 뻗어 있었고, 밝은갈색으로 반짝이는 눈동자가 서늘하면서도 시원한 인상을 풍겼다.무뚝뚝하게 다문 입매와 살짝 찌푸린 미간이 잘생긴 얼굴에 은근한 까칠함을 더했다. 소매를 걷어붙인 체크 셔츠 아래로 팔뚝의 핏줄이 얼핏 도드라져 보였다.순정은 속으로 혀를 내둘렀다. 오늘 대체 무슨 날인가, 잘생긴 총각들이
Last Updated: 2026-08-27
Chapter: 6화. 열네 시간의 잠6화. 열네 시간의 잠이현은 얼떨결에 입안에 들어온 전을 씹었다. 고소하고 짭조름한 맛이 입안 가득 퍼졌다.이상했다. 목구멍으로 넘어가는 순간, 뭔가 뜨거운 게 명치 밑에서부터 올라왔다.며칠째 아무것도 넘기지 못했던 위장이 갑자기 요란하게 반응하기 시작했다.이현은 저도 모르게 접시로 손을 뻗었다.이현은 스스로도 낯설었다.평소라면 낯선 사람이 주는 음식 따위 입에 대지도 않았을 텐데, 순정이 내민 전 한 조각에 삼 일간의 경계심이 순식간에 무너져 내렸다.씹을수록 고소한 기름 냄새와 짭조름한 간이 입안 가득 퍼졌고, 그 익숙한 듯 낯선 온기에 눈시울이 뜨끈해질 뻔했다."어머, 총각 배가 많이 고팠구나."순정이 흐뭇한 얼굴로 귤을 까서 이현의 손에 쥐여주었다.이현은 뭔가에 홀린 사람처럼 순정이 건네는 대로 받아먹었다.낯선 사람의 손에서 받아먹는 음식이 이렇게 자연스러울 수 있다는 게, 이현 자신도 이해가 되지 않았다."저기…… 사실 저 마감이 코앞이라서요. 삼 일째 거의 못 잤고……""그러니까 얼굴이 그 모양이지. 방은 있으니까 오늘부터 여기서 지내요.""네? 아직 계약도……""계약은 이따 하고, 일단 씻고 좀 자요. 사람이 삼 일을 굶고 밤을 새우면 죽어요, 죽어. 젊다고 몸이 안 상하는 줄 알지?"이현은 뭐라 반박하려다, 순정의 눈빛에 그대로 말문이 막혔다.다정한데 단호한, 묘하게 거스를 수 없는 눈빛이었다. 이현은 결국 순순히 고개를 끄덕이고 말았다.순정의 말투에 이현은 순간 말문이 막혔다.지금껏 이현의 주변에는 이렇게 다짜고짜 챙겨주는 사람이 없었다.부유한 본가에서는 이현을 첩의 자식이라는 이유로 늘 뒷전에 두었고, 명절이라고 얼굴을 비쳐도 곁에 앉히기는커녕 문간에서 인사만 시켰다.작업실에서는 담당 편집자가 마감만 재촉할 뿐, 이현이 밥을 먹었는지 안 먹었는지 궁금해하는 사람조차 없었다.그런데 초면인 이 여자는, 이현의 얼굴빛만 보고도 대뜸 밥부터 먹였다.이현은 순정의 얼굴을 슬쩍 훔쳐보았다.자신과 비슷한 또래로
Last Updated: 2026-08-26
Chapter: 5화. 흙빛 얼굴의 총각5화. 흙빛 얼굴의 총각순정은 마당을 쓸다 말고 대문 쪽을 향해 걸어갔다."네, 여기 맞아요. 들어와요."대문을 열자, 청년이 비틀거리며 마당으로 들어섰다. 순정은 순간 숨을 삼켰다.며칠은 못 잔 듯 다크서클이 짙게 내려앉아 있었지만, 그 그늘 아래로도 이목구비는 감출 수 없을 만큼 또렷했다.짙은 눈썹 아래 서늘하게 깊은 눈매, 날렵하게 뻗은 콧대, 핏기 없이 창백한데도 도드라지는 붉은 입술선.큰 키에 어깨는 넓은데 몸은 야위어서, 셔츠 안의 골격이 그대로 드러날 지경이었다.헝클어진 검은 머리칼 몇 가닥이 이마에 아무렇게나 흘러내려 있는데도, 그마저 화보처럼 보였다.앳된 얼굴에 어울리지 않는 서늘한 분위기가 감돌았고, 등에 짊어진 백팩 하나가 그의 마른 몸을 더 위태로워 보이게 했다.순정은 속으로 혀를 내둘렀다.아니, 이렇게 잘생긴 총각이 왜 이 몰골로 돌아다니나.굶어 죽기 직전인 얼굴로 저렇게 이목구비가 반듯할 일인가.콧대는 조각한 듯 곧게 뻗었고, 옅게 마른 입술 색조차 묘하게 시선을 붙드는 구석이 있었다.저러다 며칠만 더 안 먹으면 그대로 쓰러져도 이상하지 않을 낯빛인데, 얼굴만은 화보에서 걸어 나온 듯했다.전생 같으면 그냥 지나쳤을지 몰라도, 지금 순정의 눈에는 저 얼굴이 아니라 저 낯빛이 먼저 들어왔다."강이현이라고 합니다. 근처에 조용한 하숙집 있다고 해서……"이현은 입술을 바짝 말리며 마당을 둘러보았다.본가에서 쫓겨나다시피 나와 작은 작업실 골목을 기웃거릴 때도, 세상은 온통 그를 재촉하는 사람들뿐이었다.마감을 독촉하는 편집자, 본가의 눈치를 보며 은근히 거리를 두는 친척들.사흘 동안 맹물로 배를 채우며 그림을 그리다 보니 시야가 노랗게 번지고 있었다.순정은 그런 이현의 기운을 단번에 알아채고 혀를 쯧쯧 찼다.오십 년 평생 별의별 사람을 다 겪어본 순정의 눈에 저건 단순한 피로가 아니라 완벽한 영양실조이자 제 몸을 방치한 자의 몰골이었다."거기, 마지막으로 따뜻한 밥 구경한 게 언제야? 빵이나 라면 같은 걸
Last Updated: 2026-08-2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