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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화

Author: 차차
“누가 나한테 약을 먹였어. 원래는 그쪽한테 사람을 불러달라고 하려고 했는데 전화를 계속 안 받더라고…… 당신이 왔을 때는 이미 참을 수 없는 상태였고.”

허태준은 응당한 일을 했다는 듯이 말했다. 그의 얼굴에는 미안한 마음이 코빼기도 보이지 않았다.

심유진은 너무나 당당한 그의 말투에 순간할 말을 잃었다.

허태준은 마주 보는 그녀의 시선에 일말의 양심의 가책이라도 느꼈는지 빠르게 고개를 돌렸다.

그가 협탁 서랍을 열었다. 그리고 그 안에서 지갑을 꺼내들더니 카드 한 장을 빼냈다.

“내 명의로 된 카드야. 금액 제한 없이 마음대로 긁어도 돼.”

그가 카드를 그녀한테 건넸다.

“어젯밤 일에 대한 보상이라고 해두지.”

남자는 그 말을 하면서 그녀를 똑바로 쳐다보지 못했다. 그저 침대 한쪽 끝을 바로 보고 있을 뿐이었다.

심장이 평소보다 훨씬 빠르게 뛰는 것 같았다. 그는 숨을 죽인 채 심유진의 다음 행동을 기다리고 있었다.

심유진은 진즉 그의 이상함을 눈치챘었다. 그와 함께 밤을 보낸 건 스스로의 선택이었다.

하지만 방금 그가 내뱉은 말은 그녀의 화를 돋우기 충분했다.

도대체 그는 그녀를 어떻게 생각했던 걸까?

“대표님께서는 씀씀이가 참으로 호탕하시네요.”

그녀가 조롱하듯이 입꼬리를 올렸다.

“하지만 우리 두 사람 모두 다 큰 성인인데 함께 밤을 보낸 것 정도는 큰일도 아니잖아요. 하물며 어디 허 대표님과 같은 남자와 아무나 밤을 보낼 수 있나요? 따지고 보면 저는 손해 본 게 아니라 오히려 이득을 본 거죠. 그러니까……”

그녀가 잠깐 말을 멈추었다.

“이 카드는 넣어두세요. 저는 필요 없으니까.”

허태준의 알 수 없는 눈빛을 받으며 심유진이 이불로 몸을 가린 채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녀는 당장이라도 터질 것 같은 분노를 용기로 삼고 그의 턱을 잡아올렸다. 그리고 경박스러운 말투로 입을 열었다.

“만약 허 대표님께서 정말로 저에게 뭔가를 보상하려고 한다면, 저랑 몇 번 더 자던가요.”

그녀는 허태준이 화를 낼 거라고 생각했다. 어쩌면 화가 머리 꼭대기까지 난 그가 당장 그녀를 해고할 수도 있었다. 그런데……

뜻밖의 그녀의 행동에 그가 잠깐 멍해졌다. 곧바로 그의 한쪽 눈썹이 꿈틀거리더니 재밌다는 듯이 씩 웃었다.

“좋아.”

그가 이어서 말했다.

“당신이 원하면 언제든지 함께해 주지.”

**

당황한 심유진은 도망치다시피 그곳을 빠져나왔다.

그녀는 감히 자신이 뻔뻔함으로 그를 이길 수 있을 거라고 자만했던 것이다.

급히 ‘8888’호 방에서 나오던 그녀는 하마터면 누군가와 부딪칠뻔했다.

“죄송합니다!”

그녀가 황급히 사과했다.

“어라?”

상대방의 말투에서 흥분과 호기심이 느껴졌는데 유독 불만은 느껴지지 않았다.

심유진은 그제야 눈앞의 남자가 그저께 허태준과 함께 체크인 한 남자임을 알아보았다.

핸섬하게 생긴 얼굴이었다. 눈매는 허태준보다 부드러웠는데 쉽게 사람과 친해질 법한 인상이었다. 오뚝한 콧날 위로 금테 안경을 끼고 있었는데 전체적으로 고상한 분위기를 풍기고 있었다. 그에게서 전문적인 엘리트 기질이 느껴졌다.

“지난번에는 태준이가 재촉해서 인사도 제대로 못했네요. 안녕하세요.”

남자가 주동적으로 그녀에게 악수를 건넸다.

“여형민입니다. 변호사에요. 이혼 전문 변호사죠.”

그가 유독 ‘이혼’이라는 단어를 강조하며 말했다. 심유진은 순간 솔깃했다.

지금 그녀가 허태준의 커다란 셔츠를 입고 있지만 않았다면, 목에 울긋불긋한 어젯밤의 흔적이 남아있지 않았다면, 당장 여형민을 잡아두고 자리에 앉아 차근차근 이야기를 나눴을 것이다.

“안녕하세요 여 변호사님.”

그녀가 여형민의 손을 마주 잡았다가 2초 후 다시 놓아주었다.

“그럼 저는 볼 일이 있어서 이만 가보겠습니다.”

“잠깐만요.”

여형민이 그녀를 불러 세웠다.

심유진이 걸음을 멈췄다.

여형민이 정장 바지 호주머니에서 연고를 꺼내 그녀에게 건넸다.

“이거 드릴게요.”

“화상 연고?”

심유진이 이해가 안 가는 표정으로 되물었다.

“이걸 왜 저한테 주시는 거죠?”

여형민이 그녀의 오른쪽 발목을 가리켰다.

“화상 입으셨잖아요. 이거 바르면 빨리 아물 겁니다.”

그저께 밤 화상을 입었던 발목에서는 이미 통증이 느껴지지 않았다. 그 대신 검붉은 상처가 남아있었다.

심유진은 여형민이 그 상처를 주시하고 있었을 줄은 몰랐다. 그들은 그저 호텔 로비에서 짧은 만남을 가졌을 뿐이었다. 그런데 일부러 그녀를 위해 약을 사 왔을 줄이야.

“고마워요 여 변호사님.”

그녀는 뜻밖의 호의에 얼떨떨한 기분이었다.

여형민이 말을 이었다.

“인사는 허 대표한테 하세요. 그 연고는 걔가 어제 산 건데 제 차에 두고 내렸더라고요. 마침 허 대표한테 볼 일이 있어서 온김에 가져다주러 온 것뿐이에요.”

놀란 심유진이 멍한 표정으로 서있었다.

허태준이 그녀를 위해 약을 샀다고? 왜?

심유진은 연고를 손에 쥐고 얼떨떨한 기분으로 자신의 휴게실로 돌아왔다.

그녀는 샤워를 마치고 새로운 정장 스커트를 갈아입었다. 긴 머리는 깔끔하게 올려 고정하고 당황스러운 어젯밤의 흔적이 보이지 않을 때까지 목 위에 컨실러를 몇 번이고 덧발랐다. 그렇게 하면 마치 어젯밤의 일들이 전부 가려지기라도 할 것처럼.

허태준의 셔츠와 화상 연고는 침대 위에 무심하게 던져두었다.

그녀는 그것들을 한참이나 바라보며 저 물건들을 어떻게 처리하면 좋을까 고민했다.

그때 휴대폰 벨 소리가 울렸다.

어젯밤의 교훈이 있었기에 심유진은 지체하지 않고 바로 전화를 받았다.

휴대폰 너머로 프런트 직원 소미의 당황스럽고도 다급한 목소리가 들렸다.

“심 매니저님 빨리 내려와 보셔야 할 것 같아요!”

“무슨 일이에요?”

심유진은 신경이 곤두섰다.

“매니저님의 시부모님이라고 자칭하는 사람들이 매니저님을 찾고 있어요. 서 매니저님이 확인을 할 테니까 잠깐만 기다려달라고 했는데도 막무가내에요. 억지로 들어오려고 하셔서 지금 보안팀과 싸우고 있어요……”

저쪽에서 누군가가 싸우는 듯한 소리가 희미하게 들려왔다.

이런 행동을 할 사람들이라면…… 자신의 괴짜 시부모님들이 틀림없었다.

그녀는 다급하게 아래층으로 향했다.

로비는 무척 혼란스러웠다. 몇몇 사람들이 한데 뒤엉켜 있었다. 아니 몇몇 호텔 보안 요원들이 나이 지긋한 두 노인한테 붙들려 맞고 있다는 말이 더 정확할 것이다.

두 사람은 보안 요원들을 때리며 욕하고 있었다.

“망할 놈들! 문이나 지키는 잡것들 주제에! 자기 주제를 알아야지! 감히 내 앞을 막아!”

로비 매니저인 서연지가 어린 직원 두 명을 데리고 곁에서 싸움을 말리고 있었다.

“아저씨 아주머니 그만 때리세요. 제가 이미 심 매니저한테 연락했어요. 곧 내려올 거예요!”

심유진이 걸음을 빨리했다.

“아버님 어머님.”

그녀가 그들을 불렀다.

조건웅의 부모는 그제야 행동을 멈췄다.

조건웅의 어머니가 방금 자신이 때렸던 보안 요원을 노려보며 마저 욕했다.

“뭘 봐? 당장 꺼지지 못해! 평생 남의 집 문지기나 할 놈!”

욕을 먹은 보안 요원은 혈기왕성한 젊은 남자였다. 그가 그녀의 말에 벌컥 화를 냈다.

“말 가려서 하세요 할머니!”

“왜? 그렇게 보면 내가 못 욕할 것 같아?”

그녀가 앞으로 한 걸음 나서며 악에 받쳐 소리쳤다.

“이 남의 집 문이나 지키는 개놈! 내가 아주 끝까지 욕할 거야! 죽을 때까지 욕할 거야!”

젊은 보안 요원이 손을 들어 올렸다.

“왜 때리려고?”

조건웅의 어머니는 얼굴을 남자 앞에 들이대며 소리쳤다.

“자신 있으면 때려! 때릴 수 있나 없나 내가 똑똑히 지켜볼 거야!”

젊은 보안 요원의 얼굴이 뻘겋게 달아올랐다. 너무나 화가 나 입술이 다 부르르 떨렸다.

그의 동료가 얼른 그를 잡아당기며 낮은 목소리로 달랬다.

“됐어 그만해. 때리면 일만 더 복잡해져.”

심유진이 그들 사이를 가로막으며 물었다.

“어머님, 아버님과 여기까지 어쩐 일이세요?”

조건웅의 어머니는 군말하지 않고 눈을 부릅 뜨더니 그녀의 뺨을 후려쳤다.

“뻔뻔스럽게 그걸 물어?”

어찌나 세게 때렸는지 심유진의 얼굴이 옆으로 휙 돌아갔다. 그에 따라 가냘픈 그녀의 몸도 휘청거렸다.

머리가 어지러웠다. 귓가에 ‘윙윙’거리는 이명 빼고는 아무것도 들리지 않았다.

방금 전까지 비정상적으로 시끄럽던 호텔 로비가 순식간에 괴이할 정도로 조용해졌다.

모든 사람들이 그 둘을 주시하고 있었다. 자리를 벗어나려던 보안 요원들 마저도.

심유진은 겨우 정신을 차리고 애써 평정심을 유지한 채 말했다.

“어머님 하실 말씀 있으시면 제 사무실로 가서 얘기하시죠.”

그녀가 손을 뻗어 조건웅의 어머니를 잡으려 했지만 시어머니는 모질게 그녀의 손을 뿌리쳤다.

“왜? 네가 저지른 악랄한 일들이 다른 사람들한테 알려질까 겁이라도 나?”

조건웅 어머니의 얼굴에 잔인한 미소가 걸렸다. 표독스러운 눈빛이 잔인한 칼날이 되어 유진의 몸에 박히는 것 같았다.

“네 사무실 따위 갈 생각 없다. 난 여기서 말할 거야! 네 동료들한테 네가 어떤 인간인지 똑똑히 알려줄 거야!”

심유진은 억지로 분노를 삼키고 있는 중이었다. 어쨌든 상대는 자신의 웃어른이었고 이런 일로 다른 사람의 웃음거리가 되고 싶지도 않았었다. 그랬기 때문에 지금껏 정중한 태도로 그들을 대하고 있었다.

하지만 조건웅의 어머니는 결국 그녀를 완전히 화나게 만들었다. 그녀는 자포자기한 심정으로 입을 열었다.

“좋습니다. 그러면 모든 사람들이 들을 수 있게 여기서 말씀하시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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