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GIN『오늘 일정: 12월 7일 토요일, 주원 씨 집에서 신년 행사 준비』
현관 앞에서 가방끈을 고쳐 잡았다. 초인종 옆에 내 얼굴이 비쳤다. 나는 손을 들었다가 코트 소매부터 내렸다.
어제 석진 앞에서 접어 쥐었던 손수건이 주머니 안에 있었다. 집에 돌아가서 빨았는데도 다림질할 틈이 없었다. 손수건 모서리를 밀어 넣고 초인종을 눌렀다.
안에서 냄비 뚜껑 떨어지는 소리가 났다.
“잠깐만요.”
주원이 문을 열었다. 셔츠 위에 앞치마를 두르고 있었다. 끈 한쪽이 풀려 무릎 아래까지 내려와 있었다.
“생각보다 일찍 왔네.”
“약속한 시간인데요.”
주원이 벽에 걸린 시계를 돌아봤다.
“그러네. 들어와요. 슬리퍼는 거기.”
현관에 여자 구두는 없었다. 신발장 위에는 검정 휴대폰과 열쇠가 놓여 있었다. 나는 구두를 벗어 나란히 붙이고 갈색 가방을 들었다.
“코트 줘요.”
“제가 걸게요.”
주원이 옷장 문을 열어 줬다. 빈 옷걸이에 코트를 걸고 돌아서자 탄 냄새가 났다.
주원도 코를 찡그렸다.
“아, 불.”
주원이 주방으로 뛰어갔다. 나는 가방을 식탁 의자에 놓고 따라갔다.
◈
프라이팬 한쪽에서 연기가 올라왔다. 주원은 불을 끄고 뒤집개로 계란을 들어 올렸다. 밑면이 검게 붙어 떨어지지 않았다.
“이거 원래 이렇게 빨리 타요?”
“불이 너무 셌어요.”
“영상에서는 센 불로 시작하던데.”
“계란 붓기 전에 줄여야 해요.”
주원은 싱크대 옆에 세워 둔 휴대폰을 봤다. 멈춘 화면에는 모양 좋은 계란말이가 놓여 있었다. 흰 휴대폰이었다.
“중간을 건너뛰었나.”
나는 창문 쪽을 가리켰다.
“저기 열어도 돼요?”
“네. 손잡이 위로 올리면 돼요.”
창문을 조금 열자 주원이 환풍기 세기를 높였다. 팬 손잡이를 잡고 싱크대로 옮기려기에 내가 말했다.
“그냥 식혀 두세요. 물 부으면 튀어요.”
주원이 팬을 다시 내려놓았다.
식탁에는 뚜껑 덮인 밥그릇 두 개와 포장 용기에 담긴 반찬이 있었다. 접시만 꺼내 놓은 건 아니었다. 숟가락도 두 벌 놓여 있었다.
“점심 안 먹었죠?”
“아직이요.”
“나도. 준비 다 해 놓고 기다리려고 했는데.”
주원이 앞치마 자락으로 손을 닦으려다 멈췄다. 싱크대 옆에서 수건을 집었다.
“밖에서 먹자. 냄새 배겠네.”
나는 조리대에 남은 계란을 봤다.
“다시 하면 돼요. 팬 하나 더 있어요?”
“내가 할게.”
주원이 서랍을 열었다. 크기가 다른 팬 두 개가 포개져 있었다. 위에 든 것을 꺼내다 손잡이가 부딪혔다.
나는 옆으로 비켜 기다렸다. 주원은 팬을 조리대에 내려놓고 내 쪽으로 밀었다.
“한 번만 보여 줘요. 다음에는 안 태우게.”
◈
손을 씻고 그릇에 계란을 깼다. 주원이 소금을 꺼냈다. 뚜껑을 열고 기울이기에 그릇을 잠깐 옆으로 옮겼다.
“조금만요.”
“이 정도?”
“네. 거기까지요.”
젓가락으로 흰자를 풀었다. 주원은 내 손을 보다가 풀린 앞치마 끈을 뒤로 돌려 묶었다.
“책 고치는 손으로 이런 것도 잘하네.”
“계란말이는 손보다 불을 봐야 해요.”
“그건 방금 알았어요.”
주원이 불을 줄였다. 나는 기름을 펴고 계란물을 얇게 부었다. 가장자리가 익을 때까지 기다렸다가 뒤집개를 넣었다.
주원은 빈 그릇을 들고 내 옆에 섰다.
“지금 마는 거예요?”
“아직이요. 여기 덜 익었어요.”
“급하게 했네, 내가.”
계란을 접어 한쪽으로 밀고 남은 물을 부었다. 주원은 그릇을 내려놓고 식탁에서 반찬 용기를 가져왔다. 뚜껑을 열다가 국물이 손등에 튀었다.
나는 불에서 눈을 떼지 않고 휴지 위치를 알려 줬다.
“바로 뒤에 있어요.”
“이 집에서 나보다 뭘 잘 찾네.”
“아까 봤어요.”
주원이 휴지를 뽑아 손을 닦았다. 반찬을 접시에 옮기고 용기를 겹쳐 놓았다. 내가 계란을 꺼낼 때는 도마를 가져다 뒀다.
끝을 잘라 맛을 봤다. 소금이 조금 적었지만 더 넣을 정도는 아니었다.
“됐어요.”
“내가 자를게.”
주원에게 칼을 건네고 한 발 물러났다. 주원은 두께를 맞추려고 칼날을 대 봤다. 처음 자른 것은 얇았고, 다음 것은 두꺼웠다.
주원이 두 조각을 접시 뒤쪽에 놓았다.
“안 보이는 데 두면 되지. 그치?”
나는 밥그릇 뚜껑을 열었다.
“먹으면 더 안 보이겠네요.”
주원이 웃었다. 뒤쪽에 둔 두 조각을 자기 밥 위에 올렸다.
◈
식탁 너머 창문으로 건물 옥상이 보였다. 나는 가방에서 수첩을 꺼내려다가 주원이 건넨 물부터 받았다.
“먼저 먹어요. 서류는 그다음에.”
“오늘 정할 게 많아요?”
“신년 행사 순서하고 사진. 호텔 쪽에서 자꾸 답 달라고 해서.”
주원이 밥을 한술 뜨고 계란말이를 집었다. 씹는 동안 휴대폰이 울렸다. 신발장에 있던 검정 휴대폰이었다.
주원은 가지 않았다.
“전화 받으셔도 돼요.”
“밥 먹을 때는 좀 놔두려고.”
진동이 멎었다. 주원은 반찬 접시를 내 쪽으로 밀었다.
“어제 아버지 만났어요?”
숟가락을 내려놓았다.
“전략기획실에 갔다가요.”
“나한테 먼저 연락 왔어요. 네 약혼녀 일 열심히 하더라고.”
나는 물을 한 모금 마셨다. 주원은 밥그릇 가장자리에 붙은 쌀알을 떼고 있었다.
“제가 거기 간 게 불편하셨어요?”
“나 말고 아버지가?”
“주원 씨요.”
주원은 숟가락을 든 손을 멈췄다.
“견적서 주러 갔다면서요.”
“네.”
“그러면 됐지.”
나는 주원 앞에 놓인 계란말이를 봤다. 얇은 조각이 벌어져 단면이 드러나 있었다.
“그렇게 말씀드려 주세요. 아버님께도.”
“무슨 말씀 들었구나.”
“해윤 일은 담당자에게 물으라고 하셨어요.”
주원이 숟가락을 내려놓았다. 웃던 입이 다물렸다.
“틀린 말은 아닌데.”
“확인할 서류를 안 주면 다른 데 물을 수밖에 없어요.”
“내가 전달할게요. 담당자한테 자료 내주라고.”
“제 연락처도 같이 전해 주세요. 제가 직접 요청할게요.”
주원은 잠깐 나를 보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알았어요.”
나는 다시 숟가락을 들었다. 주원도 더 묻지 않았다.
◈
식사가 끝나자 주원이 그릇을 싱크대로 옮겼다. 나는 행주로 식탁을 닦았다. 탄 팬은 물에 담가 두었고, 남은 계란말이는 주원이 뚜껑 있는 그릇에 넣었다.
“버리게 되면 아까우니까 가져갈래요?”
“주원 씨가 드세요. 저녁에 데워서요.”
“그럼 저녁까지 해결됐네.”
주원이 냉장고에 그릇을 넣었다. 나는 식탁 끝으로 의자를 옮겼다. 주원이 맞은편에 앉아 행사 안내문을 펼쳤다.
『신년 초청 행사 참석자 확인』
우리 이름이 나란히 적혀 있었다. 입장, 사진 촬영, 인사 순서마다 같은 표시가 붙어 있었다.
“전부 같이 해야 해요?”
“사진 찍을 때하고 인사할 때만. 나머지는 앉아 있으면 돼요.”
“작업실 일이 있어서 너무 늦게까지는 못 있어요.”
“몇 시에 가야 하는데?”
“끝나는 시간을 먼저 알려 주세요. 그날 작업은 제가 조정할게요.”
주원이 펜을 들고 안내문 위에 선을 그었다.
“끝나는 시간 확인. 차량 따로. 이건 내가 얘기할게.”
나는 수첩을 펼쳤다. 주원이 종이를 내 쪽으로 밀다가 내 왼손 약지를 봤다. 반지가 없었다.
“반지는요?”
옷깃 안쪽에서 실을 꺼냈다. 백금 반지가 실에 꿰인 채 나왔다.
“작업할 때는 빼요.”
“잃어버린 줄.”
“여기 걸고 다녀요.”
반지를 다시 옷 안에 넣었다. 주원은 실이 들어간 자리를 보다가 펜 뚜껑을 닫았다.
“행사 때만 끼면 돼요.”
그때 가방 안에서 내 휴대폰이 울렸다.
주원은 안내문을 넘겼다. 나는 화면을 확인했다.
『어제는 잘 들어갔어요? 형님이 한 말은 나중에 들을게요.』
이헌이었다. 잠금 화면에 뜬 글을 읽고 휴대폰을 무릎에 내려놓았다. 답장을 쓰려다 손가락을 멈췄다.
식탁 너머 주원의 펜 소리가 끊겼다.
“답해도 돼요. 나 보고 있어서 못 하는 거면.”
“그런 건 아니에요.”
나는 화면을 끄지 않았다. 주원은 내 휴대폰 대신 안내문을 보고 있었다. 나는 짧게 답을 썼다.
『네. 지금은 약속이 있어서 나중에 연락드릴게요.』
전송한 뒤 휴대폰을 가방에 넣었다.
주원은 종이 모서리를 맞췄다.
“우리, 이런 건 정해 둘까.”
◈
“어떤 거요?”
주원이 의자 등받이에 기대려다 다시 몸을 앞으로 숙였다. 펜을 굴리지 않고 식탁에 놓았다.
“누구한테 연락하는지, 누구 만나는지 서로 묻지 않기.”
나는 수첩에 올린 손을 뗐다.
“주원 씨한테 만나는 분 있는 건 알아요.”
“알죠.”
주원은 창문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가 돌아왔다.
“약혼식 전날도 봤고.”
내가 묻기 전에 주원이 말을 이었다.
“호텔에서 봤어요. 나경 씨가 돌아서는 거.”
나는 수첩을 덮었다. 그날 객실 앞에서 들었던 웃음소리까지 말하지는 않았다.
“그런데 다음 날 아무 말씀도 안 하셨네요.”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랐어요.”
주원은 물컵을 들었다가 내려놓았다.
“미안하다고 하면, 그만 만날 거냐고 물을 것 같아서.”
“계속 만나실 거예요?”
주원의 시선이 식탁 위에 머물렀다.
“지금 대답해도 지킬 자신은 없어요.”
나는 의자에 놓은 가방을 당겨 세웠다. 손잡이가 쓰러지지 않게 안쪽으로 접었다.
“그럼 약속 못 하는 건 약속하지 마세요.”
“그래서 정하자는 거예요.”
주원이 안내문을 내 쪽으로 밀었다.
“이런 자리에서는 서로 곤란하지 않게 해 주기. 그 밖에서는 간섭하지 않기. 결혼 전까지.”
“제 일이나 작업실 일정도요.”
“그것도.”
“누가 제 얘기를 해도 먼저 저한테 확인해 주세요.”
주원이 고개를 들었다.
“아버지한테 들어도?”
“누구한테 듣든요.”
주원은 손끝으로 펜을 밀어 안내문 옆에 붙였다.
“좋아요. 대신 나도 똑같이.”
“그렇게 해요.”
나는 수첩을 다시 열었다. 행사 날짜 옆에 준비할 것을 적었다. 옷, 반지, 종료 시간. 마지막 줄에 주원에게 요청한 서류도 적었다.
주원은 내가 다 쓸 때까지 기다렸다.
“사인까지 할까?”
“이건 서류로 정할 일이 아니잖아요.”
“하긴.”
주원이 안내문을 반으로 접었다. 웃지는 않았다.
“말로 한 것도 지키면 되는 거지.”
◈
컵을 치우려는데 주원이 먼저 일어났다.
“그냥 둬요. 밥도 해 줬는데.”
“다음에는 불부터 줄이세요.”
“이제 알아요. 중간을 안 넘겨야 하는 것도.”
주원이 조리대의 흰 휴대폰을 집었다. 화면을 끄고 주머니에 넣었다. 나는 수첩과 안내문을 가방에 챙겼다.
검정 휴대폰이 다시 울렸다. 이번에는 주원이 신발장으로 가서 화면을 봤다. 받지는 않았다.
“아버지세요?”
“네.”
주원이 휴대폰을 뒤집어 놓았다.
“내가 바래다줄게요.”
“작업실 들러야 해서요. 혼자 갈게요.”
“토요일에도 일해요?”
“눌러 둔 책을 확인해야 해요.”
주원이 옷장을 열어 내 코트를 꺼냈다. 나는 받아 입고 머리카락을 옷깃 밖으로 뺐다. 주원은 현관문을 열려다 손을 멈췄다.
“나경 씨.”
구두에 발을 넣던 나는 고개를 들었다.
주원이 문손잡이를 놓고 내 코트 소매를 봤다. 접혀 들어간 끝을 내가 펴자 그제야 시선을 올렸다.
“아까 연락, 일 얘기예요?”
나는 가방을 어깨에 걸었다.
“서로 묻지 않기로 했잖아요.”
주원은 입을 다물었다. 나는 손잡이 쪽으로 손을 뻗었다. 주원이 옆으로 비켜섰다.
문을 열자 복도에서 승강기 도착음이 들렸다. 바로 나가지 않고 돌아봤다.
“행사 끝나는 시간 확인되면 알려 주세요.”
“네. 서류도 연락 줄게요.”
주원은 현관 안에 서 있었다. 앞치마 끈을 풀어 손에 감고 있었다. 나는 가볍게 고개를 숙였다.
문이 닫히기 전에 주원이 불렀다.
“삼촌 조심해. 그 사람, 원하는 건 꼭 가져. 그치?”
(26화 끝)
『오늘 일정: 12월 18일 수요일 오전, 본가 회장님 장부 원본 수선』『수요일, 회장님 장부 원본 볼 수 있어요.』수요일 아침, 본가 현관 앞에서 문자를 다시 읽고 화면을 껐다. 가방 안에는 얇은 종이와 붓, 실을 나눠 넣은 상자가 있었다. 금속 도구는 천으로 감쌌다.문이 열리자 이헌이 안쪽에 서 있었다.“추웠죠.”“오래 안 기다렸어요.”이헌의 눈이 내 가방으로 내려갔다. 나는 손잡이를 고쳐 잡았다.“도구가 있어서 제가 들게요.”“네. 계단 앞에서 미끄러지지 않게 조심해요.”현관 바닥에 녹은 눈이 묻어 있었다. 이헌이 발로 매트를 당겨 물기를 가렸다. 나는 그 위에서 신발을 벗었다.코트를 벗자 목에 건 실이 옷깃에 걸렸다. 반지가 나오기 전에 손가락으로 눌러 넣었다. 이헌은 외투를 받아 옷걸이에 걸었다.“회장님 혼자 계세요?”“지금은요. 서재에 계십니다.”복도 끝에 문이 열려 있었다. 이헌이 먼저 걸음을 옮겼다.서재 안에서 종이를 넘기는 소리가 났다.회장은 책상에 앉아 있었다. 앞에 놓인 신문 한쪽이 접혀 있었고, 안경은 그 위에 벗어 뒀다. 내 인사를 받은 회장이 가방부터 봤다.“그 안에 다 들었나.”“장부 상태를 보고 더 필요한 건 말씀드리겠습니다.”“뜯어서 새로 만드는 건 싫어.”“기존 실을 살릴 수 있으면 살리겠습니다. 새 종이도 필요한 자리에만 붙이고요.”회장이 신문을 밀어 놓았다.“앉아서 기다리게.”나
『오늘 일정: 12월 14일 토요일, 저녁 성탄 장터』다은은 벌린 입을 다물지 못한 채 우리 손을 봤다. 나는 이헌의 손에서 손가락을 뺐다. 다은이 붕어빵 봉투를 접었다.“나경아.”“응.”“이분, 내가 아는 그분 맞아?”이헌이 먼저 고개를 숙였다.“강이헌입니다.”“서진그룹 실장님이요?”“네.”다은이 내 왼손을 봤다. 회색 장갑이 끼워져 있었다. 이헌의 오른손에도 같은 장갑이 있었다. 나는 손을 주머니에 넣지 않았다.뒤에서 사람들이 밀려왔다. 다은이 천막 기둥 옆으로 비켰다. 나도 따라갔다. 이헌은 지나가는 사람을 먼저 보내고 우리 옆에 섰다.“나경이랑 할 얘기가 있는데요.”다은이 이헌에게 말했다. 평소 거래처 전화를 받을 때보다 목소리가 낮았다.“오늘은 제가 데려가도 되죠?”이헌은 나를 봤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다은이랑 갈게요.”“알겠어요.”이헌이 별 장식 봉투를 내밀었다. 받으려는데 다은이 손을 뻗었다.“그건 제가 들게요.”봉투가 다은에게 넘어갔다. 나는 이헌의 오른손을 가리켰다.“장갑은요.”이헌이 장갑을 벗어 내게 줬다. 나는 빈 장갑을 접어 가방에 넣었다. 손바닥이 닿았던 안쪽이 아직 따뜻했다.다은은 그걸 보고 입술을 눌렀다.“차는 안 타도 돼요. 저희 집 가까워요.”“네. 조심히 가세요.”이헌은
『오늘 일정: 12월 14일 토요일, 오후 작업 마감, 저녁 성탄 장터』코트 소매를 펴다가 작업실 문손잡이에서 손을 뗐다. 주원이 문 앞에서 했던 말이 일주일째 걸렸다.원하는 건 꼭 갖는 사람.나는 가방 안쪽에 넣어 둔 휴대폰을 꺼냈다. 이헌이 보낸 문자가 떠 있었다.『입구에서 기다릴게요. 늦어도 괜찮아요.』답을 쓰려는데 문자가 하나 더 왔다.『작업 끝내고 와요.』나는 작업실 불을 끄고 문을 잠갔다.장터 입구에는 사람들이 줄을 서 있었다. 목도리를 고쳐 매는 동안 앞에 선 아이가 아버지에게 안겼다. 아이 어깨 너머로 이헌이 보였다.검은 코트 차림이었다. 휴대폰을 내려다보다가 내가 손을 들자 바로 고개를 들었다. 나는 손을 내리고 줄 바깥으로 걸었다.“많이 기다리셨어요?”“방금 왔어요.”“얼마나 방금인데요?”이헌이 휴대폰 화면을 확인했다.“8분이요.”“그건 방금 아닌데요.”“그럼 조금 기다렸어요.”이헌이 내 가방 쪽으로 손을 내밀었다. 나는 끈을 어깨 위로 당겼다.“제가 들게요. 오늘 도구는 안 가져왔어요.”“알겠어요.”손이 곧 내려갔다. 나는 빈손이 된 이헌의 손등을 보다가 입구 쪽으로 몸을 돌렸다.지난번에는 시집을 사이에 두고 앉았고, 그 전에는 서류를 펼쳐 놓았다. 오늘은 꺼낼 종이가 없었다.“어디부터 볼까요?”이헌이 안내판을 봤다.“윤나경 씨 가고 싶은 데요.”“이런 데 자주
『오늘 일정: 12월 7일 토요일, 주원 씨 집에서 신년 행사 준비』현관 앞에서 가방끈을 고쳐 잡았다. 초인종 옆에 내 얼굴이 비쳤다. 나는 손을 들었다가 코트 소매부터 내렸다.어제 석진 앞에서 접어 쥐었던 손수건이 주머니 안에 있었다. 집에 돌아가서 빨았는데도 다림질할 틈이 없었다. 손수건 모서리를 밀어 넣고 초인종을 눌렀다.안에서 냄비 뚜껑 떨어지는 소리가 났다.“잠깐만요.”주원이 문을 열었다. 셔츠 위에 앞치마를 두르고 있었다. 끈 한쪽이 풀려 무릎 아래까지 내려와 있었다.“생각보다 일찍 왔네.”“약속한 시간인데요.”주원이 벽에 걸린 시계를 돌아봤다.“그러네. 들어와요. 슬리퍼는 거기.”현관에 여자 구두는 없었다. 신발장 위에는 검정 휴대폰과 열쇠가 놓여 있었다. 나는 구두를 벗어 나란히 붙이고 갈색 가방을 들었다.“코트 줘요.”“제가 걸게요.”주원이 옷장 문을 열어 줬다. 빈 옷걸이에 코트를 걸고 돌아서자 탄 냄새가 났다.주원도 코를 찡그렸다.“아, 불.”주원이 주방으로 뛰어갔다. 나는 가방을 식탁 의자에 놓고 따라갔다.◈프라이팬 한쪽에서 연기가 올라왔다. 주원은 불을 끄고 뒤집개로 계란을 들어 올렸다. 밑면이 검게 붙어 떨어지지 않았다.“이거 원래 이렇게 빨리 타요?”“불이 너무 셌어요.”“영상에서는 센 불로 시작하던데.”“계란 붓기 전에 줄여야 해요.”주원은 싱크대 옆에 세워 둔 휴대폰을
『오늘 일정: 12월 6일 금요일, 전략기획실 시집 견적서 전달』이헌이 내 의자 옆에서 손을 내렸다.“주원이 약혼녀입니다, 형님.”나는 가방 손잡이를 고쳐 잡았다. 무릎 위 파일이 기울어 견적서 모서리가 밖으로 나왔다. 집게를 눌러 종이를 밀어 넣었다.석진은 이헌을 보다가 내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금색 손목시계 위로 셔츠 끝을 당겼다.“알지. 내가 말을 잘못했구나. 식사 중이었니?”“마쳤습니다.”나는 일어나 고개를 숙였다. 이헌은 탁자에 남은 서류를 모았다. 내 휴대폰은 화면을 아래로 향한 채 놓여 있었다.석진이 문 쪽으로 비켜섰다.“나가는 길이면 잠깐 이야기 좀 하자. 주원이한테 듣는 것보다 직접 듣고 싶은 게 있어서.”“여기서 하셔도 됩니다.”이헌이 말했다.석진은 손목을 내린 채 웃었다. 열린 문 밖으로 조현석의 책상이 보였다.나는 휴대폰을 집어 가방에 넣었다.“괜찮아요. 말씀 듣고 갈게요.”이헌이 나를 봤다. 나는 가방 안에 파일을 세워 넣고 지퍼를 끝까지 닫았다. 의자와 탁자 사이를 빠져나오려는데 이헌이 길을 비켜 줬다.손등 사이가 10cm쯤 남았다. 나는 그 손을 지나 문으로 갔다.◈조현석이 옷걸이에서 내 겉옷을 꺼냈다.“견적서는 받으셨습니까?”“네. 감사합니다.”나는 겉옷을 입고 가방끈을 어깨에 걸었다. 조현석은 내 방문증을 보고는 회수함 쪽을 가리켰다.“내려가실 때 저기에 넣으시면 됩니다.”“잠깐 이야기하고 내려갈게요
『오늘 일정: 12월 6일 금요일, 전략기획실 시집 견적서 전달』사진을 더 키우자 서명의 테두리가 깨졌다. 나는 화면을 원래 크기로 돌리고 납품 확인서를 옆에 놓았다. 창가에서 다시 봐도 펜이 들어간 자리는 달랐다.“그렇게 보면 눈 아파.”다은이 작업대에 빈 찻잔을 내려놓았다. 나는 휴대폰을 거치대에 세웠다.“원본을 봐야겠어. 복사하면서 없어진 부분도 있을 테니까.”“어제 그 서류?”“응. 아버지가 안 썼다는 거.”다은은 확인서가 구겨지지 않게 찻잔을 멀리 옮겼다.“혼자 가서 따지지는 말고.”“오늘은 물어보러 가.”나는 시집 견적서를 출력했다. 표지 보강과 책등 수선, 본문 세척을 나눠 적은 종이였다. 아래쪽에 작업 전 확인이 필요하다는 문장을 넣고 서명했다.다은이 출력물을 보다가 내 가방을 봤다.“그런데 견적서는 보내도 되잖아.”파일 집게를 누르던 손을 멈췄다.“사진을 직접 보여 주려고.”“사진도 보낼 수는 있고.”나는 집게를 닫았다. 다은은 더 묻지 않고 파일 모서리를 맞춰 줬다.휴대폰에는 아침에 받은 이헌의 답장이 있었다.『점심 무렵에 오면 됩니다. 조 비서에게 말해 둘게요.』그 아래에 내가 보낸 답이 붙어 있었다.『시집 견적서 가지고 갈게요.』나는 화면을 끄고 납품 확인서를 별도 파일에 넣었다. 견적서와 섞이지 않게 가방 안쪽에 세워 넣은 뒤 앞치마를 벗었다.◈전략기획실 앞에서 방문증을 다시 확인했다. 이름 아래에 방문 목적이 적혀 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