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ome / 로맨스 / 약혼자의 삼촌 / 25화. 부회장실 앞 복도

Share

25화. 부회장실 앞 복도

Author: Jino
last update publish date: 2026-10-20 18:00:00

『오늘 일정: 12월 6일 금요일, 전략기획실 시집 견적서 전달』

이헌이 내 의자 옆에서 손을 내렸다.

“주원이 약혼녀입니다, 형님.”

나는 가방 손잡이를 고쳐 잡았다. 무릎 위 파일이 기울어 견적서 모서리가 밖으로 나왔다. 집게를 눌러 종이를 밀어 넣었다.

석진은 이헌을 보다가 내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금색 손목시계 위로 셔츠 끝을 당겼다.

“알지. 내가 말을 잘못했구나. 식사 중이었니?”

“마쳤습니다.”

나는 일어나 고개를 숙였다. 이헌은 탁자에 남은 서류를 모았다. 내 휴대폰은 화면을 아래로 향한 채 놓여 있었다.

석진이 문 쪽으로 비켜섰다.

“나가는 길이면 잠깐 이야기 좀 하자. 주원이한테 듣는 것보다 직접 듣고 싶은 게 있어서.”

“여기서 하셔도 됩니다.”

이헌이 말했다.

석진은 손목을 내린 채 웃었다. 열린 문 밖으로 조현석의 책상이 보였다.

나는 휴대폰을 집어 가방에 넣었다.

“괜찮아요. 말씀 듣고 갈게요.”

이헌이 나를 봤다. 나는 가방 안에 파일을 세워 넣고 지퍼를 끝까지 닫았다. 의자와 탁자 사이를 빠져나오려는데 이헌이 길을 비켜 줬다.

손등 사이가 10cm쯤 남았다. 나는 그 손을 지나 문으로 갔다.

◈

조현석이 옷걸이에서 내 겉옷을 꺼냈다.

“견적서는 받으셨습니까?”

“네. 감사합니다.”

나는 겉옷을 입고 가방끈을 어깨에 걸었다. 조현석은 내 방문증을 보고는 회수함 쪽을 가리켰다.

“내려가실 때 저기에 넣으시면 됩니다.”

“잠깐 이야기하고 내려갈게요.”

조현석이 고개를 끄덕였다. 이헌은 열린 문 안에 서 있었다. 나는 인사를 하려다 입을 다물었다. 석진이 먼저 복도로 나갔다.

복도 벽에는 계열사 건물 사진이 걸려 있었다. 서진호텔 사진 아래를 지날 때 내 구두 소리와 석진의 구두 소리가 겹쳤다.

석진은 앞서 걷다가 부회장실 표지가 붙은 문 앞에서 멈췄다. 문 옆에는 앉아서 기다리는 의자가 있었다.

석진이 금색 시계를 확인했다.

“앉을래?”

“서서 듣겠습니다.”

가방을 몸 앞쪽으로 옮겼다. 석진은 내 가방에서 방문증으로 시선을 내렸다. 나는 목에 건 줄을 바로 폈다.

“제본소는 잘되고? 재단에서 맡긴 일이 까다롭다고 들었는데.”

“확인하면서 하고 있습니다.”

“이헌이한테도 따로 맡은 게 있니?”

“시집 수선 견적서를 드리러 왔어요.”

석진이 고개를 끄덕였다.

“견적서를 직접 가져오는구나.”

“작업 범위를 설명드려야 해서요.”

나는 가방끈을 어깨 위로 올렸다. 아까 견적서에 이헌이 쓴 이름이 떠올랐다. 잉크가 마르기를 기다린 일까지 말할 필요는 없었다.

석진은 내 대답을 듣고도 곧장 자리를 옮기지 않았다.

“주원이는 네가 여기 온 거 아니?”

“제 일정을 전부 말씀드리지는 않아요.”

대답하고 가방끈에서 손을 뗐다. 석진의 눈이 내 손을 따라 내려왔다.

◈

복도 끝에서 바퀴 구르는 소리가 났다. 청소 도구를 실은 수레가 다가오다 방향을 틀었다. 직원이 우리를 보고 고개를 숙였다.

석진은 직원에게 자리를 내주며 벽 쪽으로 붙었다.

“둘이 알아서 잘하겠지. 그래도 집안 어른을 만날 때는 서로 알고 있는 게 좋지 않겠니.”

“다음에 주원 씨 만나면 말씀드릴게요.”

내 대답을 듣는 동안 석진은 부회장실 손잡이에 손을 얹었다가 놓았다. 안으로 들어오라는 말은 하지 않았다.

석진이 물었다.

“아버님은 좀 어떠셔?”

“공장에 계세요.”

“요즘 잠은 잘 주무시고?”

나는 목에 건 방문증을 손바닥으로 눌렀다.

“직접 여쭤보셔야 할 것 같습니다.”

석진은 안경을 올렸다.

“지난번 식사 때 안색이 안 좋아 보이셨어. 공장 일까지 직접 하시니 힘드시겠지. 그 연세에는 무리하면 안 되는데.”

“그래서 직원분들과 나눠서 하세요.”

“빚이 있으면 쉬어도 쉬는 게 아니야.”

시계를 확인한 석진이 말을 이었다.

“상환 날짜 하나 바뀌는 데도 도장이 몇 개나 필요한지 아니? 네 약혼 덕분에 그걸 미뤄 둔 거야.”

나는 가방 안에 넣은 파일 윗부분을 손으로 눌렀다. 납품 확인서는 견적서 뒤에 끼워 두었다.

“약혼할 때 들었습니다.”

“그럼 아버님한테 도움이 되는 쪽으로 움직여야지. 괜히 여기저기 묻고 다니다가 담당자들한테 다른 말이 들어가면 곤란하잖아.”

“어떤 말이요?”

석진이 내 얼굴을 봤다. 나는 대답을 기다렸다.

“해윤에서 약속을 바꾸려 한다는 말. 약속대로 갈 생각인데 왜 서류를 자꾸 들여다보느냐고 물을 수 있지.”

“확인하지 말라는 뜻인가요?”

“틀린 게 있으면 담당자에게 물으면 돼.”

석진은 고개를 조금 기울였다.

“이헌이 일이 아니잖니.”

“제가 부탁드린 겁니다.”

내 목소리가 커지지 않게 입술을 다물었다가 뗐다.

“제 아버지 회사 일이니까요.”

◈

수레가 뒤로 밀리는 소리가 났다. 청소 직원이 의자 밑으로 밀대를 넣으려다가 수레 옆 물통을 건드렸다.

물통이 옆으로 넘어졌다. 물이 의자 다리를 지나 우리 발 앞까지 흘렀다. 직원이 급히 물통을 세웠다.

“죄송합니다. 제가 바로 닦겠습니다.”

석진이 한쪽 발을 뒤로 뺐다. 구두 앞에 물방울이 묻어 있었다.

직원은 허리를 숙이고 수레 아래 칸에서 걸레를 찾았다. 손에 든 장갑 한 짝이 젖은 바닥에 떨어졌다.

나는 벽 쪽으로 옮겨 서며 의자를 당겼다. 직원이 밀대를 넣을 자리를 비워 줬다.

“가방은 안 젖으셨어요?”

직원이 나를 올려다봤다.

“괜찮아요. 여기 먼저 닦으세요.”

나는 바퀴가 젖은 쪽으로 굴러가지 않게 수레 손잡이를 잡았다. 직원은 걸레를 펴서 물부터 눌렀다.

“괜찮아요.”

석진이 웃는 얼굴로 직원을 내려다봤다. 직원은 걸레를 든 채 한 번 더 고개를 숙였다.

“죄송합니다, 부회장님.”

석진은 다시 웃었다.

“다친 사람 없으면 됐죠. 다른 분들 미끄러지지 않게 해 주세요.”

직원이 곧바로 일어나 수레에서 안내판을 꺼냈다. 노란 판을 펴려는데 손잡이가 접혀 들어갔다. 나는 수레를 놓고 판의 반대쪽을 잡았다.

“여기가 걸렸어요.”

맞물린 부분을 빼자 판이 벌어졌다. 직원은 내 손에서 판을 받아 복도 가운데 세웠다.

“감사합니다.”

“장갑 여기 있어요.”

나는 바닥에 떨어진 장갑을 집어 수레 가장자리에 놓았다. 직원이 마른 걸레를 새로 꺼냈다. 석진의 구두 앞을 닦을 때는 무릎을 더 굽혔다.

나는 들고 있던 의자를 벽 쪽으로 붙였다. 석진은 웃는 얼굴을 그대로 두고 있었다. 직원이 괜찮다는 말을 듣고도 연달아 사과하는 동안 나는 가방끈을 다시 잡았다.

석진이 내 쪽으로 몸을 돌렸다.

“손 씻고 갈래?”

“내려가서 씻겠습니다.”

“그럼 조금만 더 이야기하자.”

나는 방금 닦은 곳을 피해 섰다. 직원은 고개를 들지 않고 걸레를 접었다. 목에 건 명찰 끝이 물에 젖어 이름 글씨가 번져 있었다.

나는 가방에서 휴지 두 장을 꺼내 건넸다.

“명찰부터 눌러 두세요. 그대로 마르면 글씨가 더 퍼져요.”

직원이 휴지를 받아 명찰을 앞뒤로 눌렀다. 석진은 그동안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기다렸다.

◈

석진은 부회장실 반대쪽 벽으로 옮겨 섰다. 나도 안내판을 돌아갔다. 직원과는 의자 하나를 사이에 두게 됐다.

시계를 본 석진이 목소리를 낮췄다.

“아까 하던 이야기 말이다. 우리 며느릿감은 똑똑하니까.”

나는 방문증 줄을 겉옷 안으로 넣으려다 말았다. 출입증 모서리가 단추에 걸려 있었다.

“어떤 말씀인지 정확히 해 주세요.”

“이헌이한테 해윤 이야기를 자꾸 가져갈 필요가 없다는 거야. 그 애도 맡은 일이 많아. 도와주고 싶어도 자기 일까지 틀어지면 오래 못 도와.”

나는 걸린 방문증을 빼서 옷 위에 놓았다.

“업무에 지장이 되는지는 실장님이 판단하실 겁니다.”

석진은 잠깐 웃지 않다가 다시 웃었다. 안경다리를 손가락으로 눌렀다.

“실장님. 그렇게 부르는구나.”

“일 때문에 뵈니까요.”

내가 대답하자 석진은 전략기획실 쪽을 봤다. 나는 따라 보지 않았다. 문이 열려 있는지 닫혔는지 여기서는 알 수 없었다.

“우리 집에서는 삼촌이지. 네가 주원이하고 약혼한 건 밖에서도 다 아는 일이고.”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이 꼭 일만 보고 말하진 않아.”

석진이 손목을 내렸다. 나는 가방끈을 쥔 손에 힘을 풀었다.

“제가 견적서를 가져온 일로 다른 말을 할 사람이 있나요?”

복도에서 걸레 짜는 소리가 났다. 석진은 그쪽을 한 번 봤다.

“없게 해야지. 그래서 어른이 미리 알려 주는 거야.”

“제 일에 필요한 설명은 제가 할게요.”

말이 짧아졌다. 나는 숨을 들이마시고 덧붙였다.

“서류 확인도 계속하겠습니다. 아버지가 모르는 내용이면 알아야 하니까요.”

석진은 대답 대신 재킷 앞섶을 폈다. 단추 아래에 물방울이 하나 붙어 있었다. 손끝으로 털어 냈다.

“아버님이 그걸 바라시니?”

“제가 여쭤볼게요.”

“네가 나서서 일이 커지는 건 바라지 않으실 텐데.”

“그것도 아버지께 듣겠습니다.”

청소 직원이 걸레를 수레에 얹었다. 복도 한쪽은 다 말랐고, 의자 아래에만 물기가 남아 있었다. 직원은 우리를 비켜 먼 쪽으로 수레를 밀었다.

석진은 직원이 멀어질 때까지 기다렸다. 나는 가방에서 손수건을 꺼내 손가락을 닦았다. 젖은 장갑을 집었던 손끝에 먼지가 묻어 있었다.

손수건을 접어 주머니에 넣을 때 석진이 말했다.

“아버님 건강부터 챙겨. 돈 문제는 집안에서 정리할 수 있어도 몸 상하면 네가 대신 아플 수는 없잖니.”

나는 손을 주머니에서 뺐다.

“아버지 걱정하시는 말씀은 전해 드릴게요.”

나는 고개를 숙였다.

“말씀 끝나셨으면 가 보겠습니다.”

◈

복도 끝 승강기 표시등에 불이 들어왔다. 직원 둘이 내리다 우리를 보고 인사했다. 나는 옆으로 물러서 길을 비웠다.

석진도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직원들이 전략기획실 쪽으로 걸어갔다.

문이 닫히기 전에 들어갈 수 있었지만 나는 발을 떼지 않았다. 석진의 말이 끝나지 않았다. 가방 안 휴대폰이 짧게 울렸다.

손잡이를 벌려 확인했다. 다은이었다.

『점심 먹었어? 접수한 책은 창가 작업대에 놨어.』

나는 답장을 쓰지 않고 화면을 껐다. 석진이 내 손에서 시선을 거뒀다.

석진이 물었다.

“주원이니?”

“작업실 연락입니다.”

“기다리는 사람이 많네.”

나는 가방을 닫았다.

“맡은 책이 있어서요.”

석진은 부회장실 쪽으로 한 걸음 옮겼다. 나는 이제 돌아서도 되는지 기다렸다. 방문증 줄이 가방끈 아래 눌려 있었다.

석진이 고개를 돌렸다. 전략기획실 쪽에서 문 닫히는 소리가 들렸다.

나는 그쪽을 보지 않고 석진을 봤다.

“해윤 일은 담당자에게 정식으로 요청하겠습니다. 확인한 내용도 기록으로 남길 거예요.”

석진이 내 가방을 봤다.

“네가 그러겠다면 해야지.”

나는 가볍게 고개를 숙이고 승강기 쪽으로 돌아섰다.

뒤에서 구두 밑창이 바닥을 끄는 소리가 났다. 석진은 부회장실로 들어가지 않았다. 문손잡이에 손을 얹은 채 나를 보고 있었다.

시계를 확인한 석진이 나를 불렀다.

“우리 며느릿감.”

나는 멈춰 섰다. 가방끈에서 눌린 방문증 줄을 빼냈다. 석진은 웃고 있었다.

“우리 집안 남자들은 한 여자를 두고 싸우진 않아.”

(25화 끝)

Continue to read this book for free
Scan code to download App

Latest chapter

  • 약혼자의 삼촌   29화. 회장 서재 금고

    『오늘 일정: 12월 18일 수요일 오전, 본가 회장님 장부 원본 수선』『수요일, 회장님 장부 원본 볼 수 있어요.』수요일 아침, 본가 현관 앞에서 문자를 다시 읽고 화면을 껐다. 가방 안에는 얇은 종이와 붓, 실을 나눠 넣은 상자가 있었다. 금속 도구는 천으로 감쌌다.문이 열리자 이헌이 안쪽에 서 있었다.“추웠죠.”“오래 안 기다렸어요.”이헌의 눈이 내 가방으로 내려갔다. 나는 손잡이를 고쳐 잡았다.“도구가 있어서 제가 들게요.”“네. 계단 앞에서 미끄러지지 않게 조심해요.”현관 바닥에 녹은 눈이 묻어 있었다. 이헌이 발로 매트를 당겨 물기를 가렸다. 나는 그 위에서 신발을 벗었다.코트를 벗자 목에 건 실이 옷깃에 걸렸다. 반지가 나오기 전에 손가락으로 눌러 넣었다. 이헌은 외투를 받아 옷걸이에 걸었다.“회장님 혼자 계세요?”“지금은요. 서재에 계십니다.”복도 끝에 문이 열려 있었다. 이헌이 먼저 걸음을 옮겼다.서재 안에서 종이를 넘기는 소리가 났다.회장은 책상에 앉아 있었다. 앞에 놓인 신문 한쪽이 접혀 있었고, 안경은 그 위에 벗어 뒀다. 내 인사를 받은 회장이 가방부터 봤다.“그 안에 다 들었나.”“장부 상태를 보고 더 필요한 건 말씀드리겠습니다.”“뜯어서 새로 만드는 건 싫어.”“기존 실을 살릴 수 있으면 살리겠습니다. 새 종이도 필요한 자리에만 붙이고요.”회장이 신문을 밀어 놓았다.“앉아서 기다리게.”나

  • 약혼자의 삼촌   28화. 다은의 방

    『오늘 일정: 12월 14일 토요일, 저녁 성탄 장터』다은은 벌린 입을 다물지 못한 채 우리 손을 봤다. 나는 이헌의 손에서 손가락을 뺐다. 다은이 붕어빵 봉투를 접었다.“나경아.”“응.”“이분, 내가 아는 그분 맞아?”이헌이 먼저 고개를 숙였다.“강이헌입니다.”“서진그룹 실장님이요?”“네.”다은이 내 왼손을 봤다. 회색 장갑이 끼워져 있었다. 이헌의 오른손에도 같은 장갑이 있었다. 나는 손을 주머니에 넣지 않았다.뒤에서 사람들이 밀려왔다. 다은이 천막 기둥 옆으로 비켰다. 나도 따라갔다. 이헌은 지나가는 사람을 먼저 보내고 우리 옆에 섰다.“나경이랑 할 얘기가 있는데요.”다은이 이헌에게 말했다. 평소 거래처 전화를 받을 때보다 목소리가 낮았다.“오늘은 제가 데려가도 되죠?”이헌은 나를 봤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다은이랑 갈게요.”“알겠어요.”이헌이 별 장식 봉투를 내밀었다. 받으려는데 다은이 손을 뻗었다.“그건 제가 들게요.”봉투가 다은에게 넘어갔다. 나는 이헌의 오른손을 가리켰다.“장갑은요.”이헌이 장갑을 벗어 내게 줬다. 나는 빈 장갑을 접어 가방에 넣었다. 손바닥이 닿았던 안쪽이 아직 따뜻했다.다은은 그걸 보고 입술을 눌렀다.“차는 안 타도 돼요. 저희 집 가까워요.”“네. 조심히 가세요.”이헌은

  • 약혼자의 삼촌   27화. 성탄 장터

    『오늘 일정: 12월 14일 토요일, 오후 작업 마감, 저녁 성탄 장터』코트 소매를 펴다가 작업실 문손잡이에서 손을 뗐다. 주원이 문 앞에서 했던 말이 일주일째 걸렸다.원하는 건 꼭 갖는 사람.나는 가방 안쪽에 넣어 둔 휴대폰을 꺼냈다. 이헌이 보낸 문자가 떠 있었다.『입구에서 기다릴게요. 늦어도 괜찮아요.』답을 쓰려는데 문자가 하나 더 왔다.『작업 끝내고 와요.』나는 작업실 불을 끄고 문을 잠갔다.장터 입구에는 사람들이 줄을 서 있었다. 목도리를 고쳐 매는 동안 앞에 선 아이가 아버지에게 안겼다. 아이 어깨 너머로 이헌이 보였다.검은 코트 차림이었다. 휴대폰을 내려다보다가 내가 손을 들자 바로 고개를 들었다. 나는 손을 내리고 줄 바깥으로 걸었다.“많이 기다리셨어요?”“방금 왔어요.”“얼마나 방금인데요?”이헌이 휴대폰 화면을 확인했다.“8분이요.”“그건 방금 아닌데요.”“그럼 조금 기다렸어요.”이헌이 내 가방 쪽으로 손을 내밀었다. 나는 끈을 어깨 위로 당겼다.“제가 들게요. 오늘 도구는 안 가져왔어요.”“알겠어요.”손이 곧 내려갔다. 나는 빈손이 된 이헌의 손등을 보다가 입구 쪽으로 몸을 돌렸다.지난번에는 시집을 사이에 두고 앉았고, 그 전에는 서류를 펼쳐 놓았다. 오늘은 꺼낼 종이가 없었다.“어디부터 볼까요?”이헌이 안내판을 봤다.“윤나경 씨 가고 싶은 데요.”“이런 데 자주

  • 약혼자의 삼촌   26화. 주원의 펜트하우스

    『오늘 일정: 12월 7일 토요일, 주원 씨 집에서 신년 행사 준비』현관 앞에서 가방끈을 고쳐 잡았다. 초인종 옆에 내 얼굴이 비쳤다. 나는 손을 들었다가 코트 소매부터 내렸다.어제 석진 앞에서 접어 쥐었던 손수건이 주머니 안에 있었다. 집에 돌아가서 빨았는데도 다림질할 틈이 없었다. 손수건 모서리를 밀어 넣고 초인종을 눌렀다.안에서 냄비 뚜껑 떨어지는 소리가 났다.“잠깐만요.”주원이 문을 열었다. 셔츠 위에 앞치마를 두르고 있었다. 끈 한쪽이 풀려 무릎 아래까지 내려와 있었다.“생각보다 일찍 왔네.”“약속한 시간인데요.”주원이 벽에 걸린 시계를 돌아봤다.“그러네. 들어와요. 슬리퍼는 거기.”현관에 여자 구두는 없었다. 신발장 위에는 검정 휴대폰과 열쇠가 놓여 있었다. 나는 구두를 벗어 나란히 붙이고 갈색 가방을 들었다.“코트 줘요.”“제가 걸게요.”주원이 옷장 문을 열어 줬다. 빈 옷걸이에 코트를 걸고 돌아서자 탄 냄새가 났다.주원도 코를 찡그렸다.“아, 불.”주원이 주방으로 뛰어갔다. 나는 가방을 식탁 의자에 놓고 따라갔다.◈프라이팬 한쪽에서 연기가 올라왔다. 주원은 불을 끄고 뒤집개로 계란을 들어 올렸다. 밑면이 검게 붙어 떨어지지 않았다.“이거 원래 이렇게 빨리 타요?”“불이 너무 셌어요.”“영상에서는 센 불로 시작하던데.”“계란 붓기 전에 줄여야 해요.”주원은 싱크대 옆에 세워 둔 휴대폰을

  • 약혼자의 삼촌   25화. 부회장실 앞 복도

    『오늘 일정: 12월 6일 금요일, 전략기획실 시집 견적서 전달』이헌이 내 의자 옆에서 손을 내렸다.“주원이 약혼녀입니다, 형님.”나는 가방 손잡이를 고쳐 잡았다. 무릎 위 파일이 기울어 견적서 모서리가 밖으로 나왔다. 집게를 눌러 종이를 밀어 넣었다.석진은 이헌을 보다가 내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금색 손목시계 위로 셔츠 끝을 당겼다.“알지. 내가 말을 잘못했구나. 식사 중이었니?”“마쳤습니다.”나는 일어나 고개를 숙였다. 이헌은 탁자에 남은 서류를 모았다. 내 휴대폰은 화면을 아래로 향한 채 놓여 있었다.석진이 문 쪽으로 비켜섰다.“나가는 길이면 잠깐 이야기 좀 하자. 주원이한테 듣는 것보다 직접 듣고 싶은 게 있어서.”“여기서 하셔도 됩니다.”이헌이 말했다.석진은 손목을 내린 채 웃었다. 열린 문 밖으로 조현석의 책상이 보였다.나는 휴대폰을 집어 가방에 넣었다.“괜찮아요. 말씀 듣고 갈게요.”이헌이 나를 봤다. 나는 가방 안에 파일을 세워 넣고 지퍼를 끝까지 닫았다. 의자와 탁자 사이를 빠져나오려는데 이헌이 길을 비켜 줬다.손등 사이가 10cm쯤 남았다. 나는 그 손을 지나 문으로 갔다.◈조현석이 옷걸이에서 내 겉옷을 꺼냈다.“견적서는 받으셨습니까?”“네. 감사합니다.”나는 겉옷을 입고 가방끈을 어깨에 걸었다. 조현석은 내 방문증을 보고는 회수함 쪽을 가리켰다.“내려가실 때 저기에 넣으시면 됩니다.”“잠깐 이야기하고 내려갈게요

  • 약혼자의 삼촌   24화. 전략기획실

    『오늘 일정: 12월 6일 금요일, 전략기획실 시집 견적서 전달』사진을 더 키우자 서명의 테두리가 깨졌다. 나는 화면을 원래 크기로 돌리고 납품 확인서를 옆에 놓았다. 창가에서 다시 봐도 펜이 들어간 자리는 달랐다.“그렇게 보면 눈 아파.”다은이 작업대에 빈 찻잔을 내려놓았다. 나는 휴대폰을 거치대에 세웠다.“원본을 봐야겠어. 복사하면서 없어진 부분도 있을 테니까.”“어제 그 서류?”“응. 아버지가 안 썼다는 거.”다은은 확인서가 구겨지지 않게 찻잔을 멀리 옮겼다.“혼자 가서 따지지는 말고.”“오늘은 물어보러 가.”나는 시집 견적서를 출력했다. 표지 보강과 책등 수선, 본문 세척을 나눠 적은 종이였다. 아래쪽에 작업 전 확인이 필요하다는 문장을 넣고 서명했다.다은이 출력물을 보다가 내 가방을 봤다.“그런데 견적서는 보내도 되잖아.”파일 집게를 누르던 손을 멈췄다.“사진을 직접 보여 주려고.”“사진도 보낼 수는 있고.”나는 집게를 닫았다. 다은은 더 묻지 않고 파일 모서리를 맞춰 줬다.휴대폰에는 아침에 받은 이헌의 답장이 있었다.『점심 무렵에 오면 됩니다. 조 비서에게 말해 둘게요.』그 아래에 내가 보낸 답이 붙어 있었다.『시집 견적서 가지고 갈게요.』나는 화면을 끄고 납품 확인서를 별도 파일에 넣었다. 견적서와 섞이지 않게 가방 안쪽에 세워 넣은 뒤 앞치마를 벗었다.◈전략기획실 앞에서 방문증을 다시 확인했다. 이름 아래에 방문 목적이 적혀 있

More Chapters
Explore and read good novels for free
Free access to a vast number of good novels on GoodNovel app. Download the books you like and read anywhere & anytime.
Read books for free on the app
SCAN CODE TO READ ON APP
DMCA.com Protection Statu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