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hare

제1020화

Author: 류한나
고은서는 자신이 곽승재를 이용하고 있음을 인정하는 바였다.

하지만 여시은은 분명 곽승재 때문에 생긴 골칫덩어리였고 애꿎은 고은서만 속앓이했던 터라 고은서도 큰 죄책감 같은 건 없었다.

문자를 보낸 지 한참이 지나도 곽승재에게서 돌아오는 대답은 없었다.

그날 절에서의 만남 이후로 고은서는 요 며칠 라이트문 아파트에서 곽승재를 보지 못했다.

출장을 간 것인지 마재경과 함께 시간을 보내느라 그러는 것인지는 몰라도 은근히 신경 쓰이는 것만은 사실이었다.

‘설마 그날 절에서 몇 마디 쏘아붙였다고 화나서 답장 안 하는 건가?’

이런저런 생각을 하던 고은서는 더는 신경 쓰지 않기로 하고 박지연에게 자신의 일정을 말해준 뒤 미리 준비해둔 녹음펜을 넣은 가방을 챙기고 운전 기사에게 여시은의 집으로 가달라고 했다.

여시은의 집으로 가는 길에 고은서의 핸드폰이 울렸다.

다름 아닌 여시은의 집에는 왜 가냐는 내용의 곽승재가 보낸 문자였다.

고은서는 향수를 전해주러 간다고 곽승재에게 솔직하게 알려주었다.

곽승재는 급한 일만 처리하고 가겠다고 답장을 주었다.

한가지 문제가 있다면 고은서는 여시은이 자신에게 무슨 짓을 할지 모른다는 것이었다. 만약 단순히 향수를 시향하려고 부른 것이라면 곽승재가 여시은의 집에 도착했을 때 고은서는 어쩌면 이미 그 집에서 진작에 나오고도 남았을 것이다.

결국 고은서는 향수만 전해주고 바로 돌아갈 것이니 굳이 무리하지 않아도 된다고 곽승재에게 문자를 보냈다.

그 이후로 곽승재는 답장이 없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고은서가 탄 차는 여시은의 별장에 도착했다.

차에서 내린 고은서는 도우미의 안내하에 뒷마당으로 향했다.

마당에는 바비큐 그릴이 놓여있었고 또 다른 도우미가 불을 피우며 식자재들을 정리하고 있었다.

캐주얼한 차림과 슬리퍼를 신은 여시은이 한쪽에 서 있었다. 슬리퍼를 신은 탓에 붕대를 감은 왼쪽 엄지발가락이 적나라하게 드러났다. 아마 여시은이 말했던 다친 발가락인 것 같았다.

여시은은 쿠아를 품에 안은 채 도우미들에게 일을 지시하고 있었다.

“은서 왔구
Continue to read this book for free
Scan code to download App
Locked Chapter

Related chapters

  • 어게인, 비긴   제1021화

    쓸데없는 여시은의 질문에 고은서는 대답하고 싶지 않았지만 최대한 참고 물었다.“여시은, 불만이라도 있어?”“아니.”여시은이 웃음을 터뜨렸다.“그냥 떠본 거야, 난 꽤 만족해!”고은서는 속으로 생각했다.‘여시은, 매일 이렇게 연기하는 거, 안 힘들어?’“잠시 후 향기 지속력 좀 보자, 문제없으면 이걸로 결정하면 될 것 같아!”여시은은 기분 좋게 말했다.수정할 필요가 없다는 건 이 일이 일단락될 수 있다는 뜻이었지만 고은서는 경계를 늦추지 않았다.여시은이 일부러 그녀에게 직접 향수를 조제하게 했다면 분명 무슨 일이 있었을 것이기에 반드시 경계해야 했다.“은서야, 어차피 시간도 많으니까 같이 고기를 구워 먹을래?”여시은이 초대했다.쿠아는 도우미가 실내로 데려간 상태였다. 고은서는 앉아 있기엔 조금 지루했지만 그렇다고 여시은의 제안을 받아들일 생각이 없었기에 배가 고프지 않다는 이유로 여시은에게 가까이 가지 않았다.앞에는 구운 고기의 맛을 확실히 살려주는 숯불 바비큐 그릇이 놓여 있었다.만약 여시은이 화상을 입거나 넘어지기라도 한다면 해명하기 어려울 것 같아 그냥 조용히 앉아 있는 게 상책이었다.고은서가 신경을 곤두세우는 게 사실 오버하는 것은 아니었다.지난번 농장에서 물에 빠진 일로 트라우마가 남았기 때문이었다.그날 조금 전까지 천진난만하게 이야기하던 여시은이 어느새 그녀를 끌고 연못에 빠뜨렸다.머릿속에 복잡한 생각으로 가득 차 있을 때 점잖은 남자의 모습이 다가왔다.여재훈이었다.고은서는 자리에서 일어나며 예의 바르게 ‘여재훈 씨’라고 불렀다.그녀를 발견한 약간 놀란 듯했다.“은서 씨가 놀러 왔네요?”“은서가 맞춤형 향수를 가져다주러 왔어요.”고은서가 대답하기 전에 여시은이 여재훈 곁으로 다가가며 애교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아빠, 왜 이제야 오셨어요. 아까부터 기다렸는데.”여재훈이 여시은의 발을 내려다보며 걱정스럽게 물었다.“발가락은 좀 괜찮아졌니?”여시은이 어린아이처럼 투정을 부렸다.“아직도 아파요. 예전에

  • 어게인, 비긴   제1022화

    “아악!”갑자기 여시은이 고통스러운 비명을 질렀다.고개를 든 고은서는 쿠아가 여시은을 할퀸 뒤 심하게 손목을 물고 있는 것을 발견했다.여시은이 쿠아를 떼어내자 쿠아는 등을 둥글게 말며 공격 자세를 취했다. 마치 무언가에 자극을 받아 공포에 질린 채 방어적인 모습이었다.도우미들은 혹시라도 여시은이 다칠까 봐 걱정되어 쿠아를 잡으려 했다. 하지만 온몸으로 화를 내고 있는 쿠아는 이를 드러내 으르렁거리며 누구도 가까이 오지 못하게 했다!“시은아!”여재훈이 급히 여시은에게 달려갔다.한편 쿠아는 그 틈에 빠르게 실내로 도망쳐 들어갔다.여재훈은 고양이를 쫓을 겨를도 없이 여시은의 손을 잡으며 말했다.“피도 나네! 빨리 의사를 불러!”여시은이 간신히 말을 이었다.“아빠, 괜찮아요. 의사 부를 필요 없어요. 약만 바르면 금방 나을 거예요.”“그게 무슨 소리야! 고양이에게 물렸으면 광견병 백신을 맞아야 해!”여재훈은 여시은의 말을 듣지 않은 채 도우미에게 의사를 집으로 부르라고 했다.이 상황을 지켜보던 고은서는 왠지 우연이 아니라는 느낌이 들었다. 하지만 여시은은 왜 일부러 쿠아에게 물린 것일까?10분 만에 의료 가방을 들고 도착한 의사는 이내 여시은의 손목에 난 상처를 처리했다.여시은이 쿠아가 예방접종을 모두 마쳤다고 말했지만 여재훈은 의사에게 광견병 백신을 놓으라고 했다.주사를 맞고 상처 처리가 끝난 후 의사는 여시은에게 이상 반응이 없는지 관찰하기 위해 집에 있다가 정해진 시간에 나머지 주사를 놓기로 했다.모든 것이 정리된 후 여재훈이 도우미에게 물었다.“고양이가 왜 갑자기 사람을 물었어?”도우미가 두려운 듯이 대답했다.“쿠아는 평소에 온순해서 사람을 물지 않아요.여시은 씨가 평소에 계속 안고 다닐 때까지 아무 일도 없었는데 고은서 씨가 온 이후로 실내에 있다가 나오더니 갑자기 사람을 물었어요. 왜 그런지는 모르겠어요.”의사가 적절한 타이밍에 말을 꺼냈다.“어린 고양이는 자극을 받으면 그렇게 될 수 있어요. 소리, 물건, 혹은 특

  • 어게인, 비긴   제1023화

    여시은이 이렇게 말할수록, 주변 사람들에게는 그녀가 억울함을 참고 사태를 무마하려는 것처럼 느껴졌다.고은서도 오늘 이 일을 제대로 해결하지 않으면 자신이 누명을 쓸 수도 있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여재훈 씨, 부탁드려도 될까요?”고은서는 차분하게 여재훈에게 물었다.“그럴 필요 없어!”차가운 남성의 목소리와 함께, 키가 크고 잘생긴 곽승재의 모습이 보였다.고은서는 약간 놀랐다.‘곽승재에게 오지 말라고 했는데 왜 온 거지?’곽승재는 방에 들어오자마자 고은서를 바라봤다. 고은서는 꼿꼿이 서 있었고 표정은 담담했지만 곽승재를 보는 눈에는 약간의 놀라움이 비쳤다.곽승재는 고은서와 말을 나누지 않은 채 방 안의 다른 사람들을 둘러보았다.소파에 앉아 있는 여시은은 손등과 손목에 상처가 나 있었으며 눈가가 약간 붉어진 것만 봐도 조금 전 무슨 일을 겪은 것을 알 수 있었다.여시은 옆에 앉아 있는 여재훈은 얼굴에 걱정이 가득했다.의사와 도우미들은 조심스러운 표정이었다.“승재야, 여긴 어쩐 일이야?”여재훈이 놀란 얼굴로 묻자 곽승재는 고은서에 대해 언급하지 않고 예의를 지키며 말했다.“아버지의 부탁으로 아저씨를 만나러 왔어요. 그러다가 마침 고은서가 자신의 결백을 증명하려는 말을 들었습니다. 여 대표님, 고은서는 다른 사람을 해칠 행동을 하지 않아요.”곽승재의 말을 들은 고은서는 묘한 감정에 사로잡혔다.예전에는 곽승재가 백유미를 위해 성급하게 그녀를 비난했지만 이제는 그녀의 편을 들어주고 있었다.여재훈이 고개를 끄덕였다.“나도 오해라고 생각해. 아마도 고양이가 먹이를 지키려고 문 것일 거야.”“쿠아는 먹이를 지키지 않아요. 제가 먹이를 입 앞에서 가져가도 소리조차 안 내요.”유은수가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유은수, 그게 무슨 말이야!”여시은이 화를 내며 말했다.“쿠아가 먹이를 지킨 게 아니라면 은서가 나를 해치려 했다는 거야? 그럴 사람이 아니잖아!”유은수는 ‘사람은 겉만 보고 알 수 없다’는 어조로 중얼거리며 더 이상 말하지 않

  • 어게인, 비긴   제1024화

    미간을 살짝 찌푸린 여재훈은 도우미를 바라보며 물었다.“이 향수가 정말 고은서 씨가 가져온 거야? 다른 것으로 가져온 건 아니야?”도우미는 확신에 찬 목소리로 대답했다.“분명히 이거예요.”고은서도 말을 이었다.“여재훈 씨, 향수에 무슨 문제라도 있나요?”여재훈은 별다른 설명 없이 향수를 고은서에게 건넸다.“고은서 씨가 직접 맡아보시오.”향수를 받아 냄새를 맡은 고은서는 향수 안에 복잡한 시트러스 향이 추가되어 있는 것을 발견했다.“제 기억이 맞다면 시트러스 계열 향은 고양이에게 큰 자극을 줍니다. 가벼운 스트레스 반응에서부터 심하면 중독 증상을 일으킬 수도 있죠.”여재훈이 고은서를 바라보며 말했다.“역시 고은서 씨였군요!”유은수가 자신감 가득한 얼굴로 말했다.“고은서 씨, 우리 시은 씨가 은서 씨를 얼마나 믿었는데 어떻게 이럴 수가 있어요? 평소에도 은서 씨를 친한 친구라고 그랬는데 왜 이런 짓을 한 거예요?”“사실도 제대로 확인하지 않고 벌써 결론을 내리는 것은 아닌 것 같은데요?”곽승재가 낮은 목소리로 물었다.“뭘 더 확인할 게 있어요? 이렇게 명백한데!”유은수가 비웃듯 말했다.“고은서 씨, 작전을 잘 세웠네요. 여시은이 고양이를 좋아하는 걸 알고 일부러 향수에 독성을 넣어 고양이를 자극하게 한 거죠!”“유은수, 말도 안 되는 소리 하지 마!”여시은이 엄숙하게 말했다.“나는 은서를 믿어. 은서는 책임감 있는 사람이야. 절대 나를 해치지 않아. 분명 뭔가 오해가 있는 거야!”고은서가 여시은을 바라보았다.하얗게 질린 얼굴, 초조한 표정, 확신에 찬 목소리...분명 ‘피해자’임에도 불구하고 이렇게나 당당하게 고은서의 혐의를 벗겨주고 있었다.누구라도 ‘착하다’고 감탄할 정도였다.“시은 씨, 무슨 오해가 있다는 거예요?”유은수가 마음 아픈 듯 말했다.“시은 씨는 남을 너무 믿어서 탈이에요. 고양이에게 할퀸 사람은 본인이잖아요!”“향수에 고양이를 자극하는 성분이 있다고 해서 고은서와 관련이 있다는 증거가 있나요?”

  • 어게인, 비긴   제1025화

    여재훈의 질문에 따라 여시은은 며칠 전 고은서와 식사 중 곽승재와 마재경을 만난 일을 설명했다.“그때 제가 실수로 탕을 엎질러 마재경 씨와 은서를 데였어요.”여시은은 자책하는 듯한 목소리로 말했다.“이 일 때문에 곽 대표는 제가 고의로 한 거라고 의심하셨고 은서도 저를 오해해서 더 이상 친구로 대해주지 않으려 해요. 지난번 농장에서 은서가 아직도 이 일로 화가 나 있더라고요. 그래서 물고기에게 밥을 주다가 먼저 가버렸어요. 따라가서 설명하려 했지만 은서가 듣기 싫어해서...”여시은은 말을 이어가지 않고 오히려 여재훈을 바라보며 말했다.“아빠, 내가 시작한 일이에요. 그래서 은서를 탓할 수 없어요. 전혜라 아줌마에게도 설명했어요. 다 끝난 일이었는데 유은수가 그날 엿듣고 아빠에게 함부로 말하다니...”여시은이 유은수를 노려보며 화를 냈다.“앞으로 함부로 말하지 마! 그리고 아빠와 상관없는 일을 전하지도 마!”고개를 숙인 유은수는 더 이상 말하지 못했다.하지만 여재훈의 얼굴은 잔뜩 상기되어 있었다.“말도 안 돼! 이런 일을 왜 나에게 숨겼어? 왜 그때 사실대로 말하지 않은 거야?”여시은은 아버지에게 애교를 부리며 말했다.“별일도 아니잖아요. 내가 너무 성가시게 구는 바람에 은서가 화를 낸 거예요. 은서도 절 밀 의도는 없었어요. 다리 위에 서 있어서 일이 커진 거죠.”여재훈은 여시은의 애교에도 기분이 상한 듯 고은서와 곽승재를 향해 시선을 돌렸다.“고은서 씨, 곽 대표님. 시은은 평소에 덜렁대고 다른 사람의 감정을 잘 살피지 못하는 면이 있지만 고의로 누군가를 해치려는 아이는 아닙니다. 고은서 씨가 시은에게 화낸 건 이해해요. 그리고 일부러 시은을 밀었을 리 없다는 것도 믿어요. 시은이 말한 대로 그날 일은 넘어가겠지만 향수 문제에 대해서는 고은서 씨가 정확히 설명해주길 바랍니다.”고은서는 여시은이 향수를 이용해 그녀를 모함할 거라고 예상했지만 지난번 물에 빠진 일까지 다시 꺼낼 줄은 몰랐다.고의가 아니지만 여시은을 연못에 빠뜨리고도

  • 어게인, 비긴   제1026화

    여재훈이 고개를 끄덕였다.“기억해요. 은서 씨가 각종 향 조합하는 데 독특한 견해를 가지고 있어서 인상 깊었어요.”고은서가 말을 이었다.“그럼 저희가 시트러스 향을 추가하는 것에 대해 논의한 것도 기억하시죠? 하지만 조제해보니 시은의 요구사항과 맞지 않을 것 같아서 사용하지 않았고요.”여재훈은 실제로 고은서와 향 조합 등에 대해 논의한 바 있었다.시트러스뿐만 아니라 다른 향들의 조합도 시도해본 적이 있었다.“적합하지 않다는 걸 알면서 제가 왜 계속 사용했겠어요?”고은서는 또 자신이 조제한 향수가 에센셜 오일을 임시로 혼합한 것이 아니라 증류와 침전 등 일련의 공정을 거쳤다고 설명했다.“방금 도우미가 가져온 이 병에는 시트러스 계열 오일이 나중에 추가된 게 분명해요. 양도 너무 많아 향이 강렬하게 나는데 정상적인 조향사라면 이런 초보적인 실수를 절대 하지 않아요.”“완성된 향수에 일부러 넣었을 수도 있잖아요. 어차피 아무도 모르는데.”유은수가 의심을 제기하자 고은서가 웃음을 지었다.“그럴 가능성도 없진 않죠. 하지만 시은에게 시향하기 전에 먼저 시향지에 뿌려서 맡아본 후에 시은이가 손목에 뿌렸죠.”고은서는 가방에서 시향지를 꺼내며 말을 이었다.“여재훈 씨, 차이가 나는지 확인해 보시겠어요? 시향지는 제가 여씨 저택에 도착한 후에 사용했고 주위에 사람들이 다 있었어요. 게다가 여시은의 지문도 남아있죠. 이건 제가 조작할 수 없어요. 믿기지 않으시면 경찰에 연락해 검증해보시죠.”고은서에게서 시향지를 받은 여재훈이 가볍게 냄새를 맡았다. 확실히 시트러스 계열의 향기는 없었다.“이게 대체 어떻게 된 거야?”여재훈이 여시은을 바라보았다.“이 향에는 자극성분이 없는데 쿠아가 왜 너를 물었어? 향수병의 향기는 또 왜 다른 거야?”여시은은 충격을 받은 듯 눈을 동그랗게 떴다.“아빠, 저도 모르겠어요. 대체 누가 이런 짓을 한 거야? 쿠아가 나를 물게 했을 뿐만 아니라 은서에게 책임을 전가하려고 하다니!”여시은이 화난 목소리로 현장의 도우미들

  • 어게인, 비긴   제1027화

    화가 난 여시은은 눈이 빨개졌다.“너 왜 계속 은서에게 책임을 전가하려고 했는지 알겠다! 네 실수를 감추려는 거였어! 이번 일은 절대 용서할 수 없어! 너 해고야!”이 말을 들은 유은수는 더욱 비통하게 울며 다시는 그러지 않을 테니 한 번만 기회를 달라고 여재훈에게 애걸복걸하기 시작했다.진상이 이미 밝혀진 이상 이렇게 소란을 계속 피울 수도 없는 노릇이었기에 여재훈은 유은수를 일단 방으로 데려가라고 한 후 나중에 결정을 내리겠다고 했다.울며 사과하던 유은수가 떠난 뒤 여재훈은 방 안에 있던 다른 사람들도 내보냈다.드디어 조용해졌다.여재훈은 고은서를 바라보며 사과했다.“고은서 씨, 정말 미안해요. 평소에 집안일을 소홀히 했고 시은이도 도우미들을 관리한 경험이 없어서 이런 일이 벌어졌네요. 하마터면 누명을 쓸 뻔했네요.”고은서는 여재훈이 아직도 속고 있다는 걸 알았다.여시은의 수법은 그야말로 대단했다. 처음부터 끝까지 유은수만 나서게 했고 자신은 전혀 관여하지 않은 척하며 오히려 고은서를 변호하는 척했다.여재훈의 입장에서 자기 딸을 믿는 건 당연한 일이었다.고은서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저는 괜찮아요. 윗물이 맑으면 아랫물도 맑은 법이겠죠. 시은이가 쿠아에게 물려서 고생하겠네요.”여시은은 고은서 말에 담긴 비꼬는 뜻을 못 들은 듯 빨개진 눈으로 말했다.“정말 생각도 못 했어, 만나는 도우미들마다 다 이렇게 나쁜 마음을 품고 있을 줄이야! 평소엔 항상 웃으며 잘 대해주고 나를 특별히 챙겨주더니 뒤에서는 이렇게 무서운 짓을 하다니...”여시은이 여재훈의 소매를 잡으며 서운해했다.“아빠, 내가 너무 무능한 거 같아요. 도우미에게까지 이렇게 속다니...”여재훈이 여시은의 어깨를 토닥였다.“네 탓이 아니야. 강성의 집사님을 여기로 오라고 할게. 그분이 관리하면 이런 일이 없을 거야.”여시은은 여전히 자책하는 얼굴로 고은서에게 사과했다.“은서야, 정말 미안해. 오늘은 같이 앉아서 바비큐도 먹으며 오해를 풀려고 했는데 이런 일이 생겨서..

  • 어게인, 비긴   제1028화

    “결국 고은서 씨가 억울함을 당한 건 사실이니 고은서 씨를 만나면 대신 사과의 말도 전해줘.”담담한 표정의 곽승재는 대답 대신 말을 돌렸다.“여 대표님, 판주는 GS 그룹의 하나의 투자은행일 뿐이고 업무도 비교적 단순해 여시은이 배울 게 많지 않습니다. 여 대표님이 여시은 씨를 단련시키고 싶으시다면 더 좋은 곳으로 보내시는 게 좋을 겁니다.”곽승재의 뜻을 알아차린 여재훈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고려해 볼게.”곽승재가 떠난 후에야 여재훈이 엄숙한 표정으로 딸을 바라보았다.“시은아, 솔직히 말해 봐. 오늘 일은 유은수가 네 지시에 따라 일부러 그렇게 한 거지?”도우미 한 명이 꾸지람을 듣고 벌금을 부과했다고 원한을 품고 이런 방법으로 복수할 계획을 세웠다는 게 여재훈에게는 도저히 믿기지 않았다.하지만 아까는 사람들이 많았기에 딸을 공개적으로 의심할 수는 없었다.“아빠, 어떻게 나를 의심할 수 있어요!”여재훈의 말을 들은 여시은은 천추의 한을 품은 듯 눈물을 비 오듯 흘리며 높은 목소리로 말했다.“어떻게 이럴 수 있어요? 은서와 곽 대표님이 나를 안 믿으시는 건 그렇다 쳐도 아빠까지 저를 의심하다니! 그럼 아까 경찰을 부르지 그랬어요? 진상을 조사해서 내가 유은수를 부추겼는지, 유은수가 저를 해치려고 계획한 건지 알아보게요!”여재훈은 딸의 반응에 약간 죄책감을 느꼈다.일이 바빠 딸이 대부분 혼자 집에서 지내다 보니 성격이 오만하긴 했지만 그래도 대체로 사려 깊고 분별력 있는 아이였고 말과 행동을 함에 있어서도 분수를 알았다.그런데 어떻게 이런 식으로 의심할 수 있을까?여재훈은 딸에게 휴지를 건네며 말했다.“아빠가 잘못했어, 화내지 마. 그냥 유은수라는 도우미가 어떻게 고양이를 자극할 수 있는 향을 알고 짧은 시간에 이렇게 계획적으로 일을 꾸민 게 이해가 안 가서 그래.”“그러니까 아빠는 여전히 나를 의심하시는 거네요!”여시은이 휴지를 내팽개쳤다.“유은수가 하면 이상하고 내가 시켰다고 하면 정상이란 말이에요? 아빠, 저는 향에 대

Latest chapter

  • 어게인, 비긴   제1116화

    곽승재의 말을 들은 마재경의 얼굴에 두려운 기색이 살짝 감돌았다.하지만 문득 뭔가를 떠올린 듯 그녀는 콧방귀를 뀌며 말했다.“협박하지 마세요. 가벼운 부상에 불과하니 유능한 변호사를 선임하면 기껏해야 3년 감옥에 있고 나올 거예요. 당신들이 주는 기회 따위는 필요 없어요.”마재경은 인정하지 않겠다고 마음 먹은 것이 확실했다. 3년 감옥살이로 거액의 돈을 바꾸는 것이 나쁘지 않다는 판단이었다.이로 미루어 보면, 마재경은 정말 누군가의 사주를 받은 것이다.고은서가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3년 청춘을 돈과 바꾸는 것이 이익이라고 생각해? 영원히 지워지지 않는 오점이 생겨 네가 어디 가든 따라다닐 텐데.”“게다가 그렇게 큰돈이 어디서 생겼는지 출처를 밝히지 못하면 경찰이 가만둘 것 같아? 일단 경찰이 알아내면 너의 공범도 잡히고 너는 비호죄까지 추가될 텐데. 정말 그럴 만한 가치가 있을까?”고은서의 말에 마재경은 약간 망설였지만 여전히 자기가 혼자 한 것이라고 고집했다. 돈도 어디서 입금됐는지 모르겠고, 어쩌면 팬 중 한 명이 보낸 것일 수도 있다고 둘러댔다.다소 김빠진 고은서는 곽승재와 함께 밖에 나가 마재경의 약점을 찾아보려 했다.그때 곽승재가 입을 열었다.“죄를 지었다는 것이 너의 고향에 알려지면 돈을 들고 금의환향하려는 생각이 실현될 수 있을까?”이 말에 마재경은 허를 찔린 듯 눈에 공포가 감돌았고 몸도 미세하게 떨리기 시작했다.잠시 후, 곽승재의 얼음장 같은 시선 속에서 마재경은 철저히 무너졌다.“말할게요. 전부 다 털어놓을게요...”...여씨 저택.여시은이 수액을 다 맞고 여재훈도 약을 먹은 뒤였다.가정의가 떠나자, 여시은은 여재훈의 옆에 앉았다.“아빠, 왜 그러세요? 계속 미간을 찌푸리고 계시는데, 상처 부위가 많이 아프신 거예요?”여재훈은 순하고 사리에 밝은 딸을 바라보며 결국 참지 못하고 물었다.“시은아, 네가 주워 온 길고양이가 너랑 그리 친하지 않은 것 같더구나?”여시은은 순진무구한 눈빛을 한 채 고개를 끄

  • 어게인, 비긴   제1115화

    마재경은 잠깐 멍하니 있더니 곧바로 사주한 사람이 없다고, 그냥 미워서 괴롭히고 싶었다고 말했다.그러자 고은서는 코웃음을 쳤다.“변명이 너무 억지스럽다는 생각이 안 들어?”“너와 곽승재가 단순히 금전적 관계였던 건 말할 것도 없고, 설령 진심으로 좋아하는 감정이 생겨서 잘해보고 싶은데 외면당했다고 해도 곽승재한테 화풀이해야 하는 거 아닌가?”고은서의 질문에 마재경은 얼굴이 부자연스럽게 일그러졌다.“나는 곽 대표님을 존경했을 뿐 다른 마음은 없었어.”“그런데 너는 나와 곽 대표님의 스캔들 때문에 나를 질투했고, 나의 팬을 돈으로 매수해 나를 반죽음으로 만들었어. 이런 짓을 한 너에게 복수하면 안 되나?”‘흉기 난동 사건까지 내 탓으로 돌리려 하다니?’고은서는 더욱 어이없었다.“마재경, 머리는 장식품으로 달고 다니나? 내가 곽승재를 어떻게 생각하는지 누구나 다 알아. 내가 질투심 때문에 돈으로 사람을 매수해 너를 해칠 이유가 없잖아.”“그리고 정말 나를 의심했다면 왜 경찰에 신고하지 않았어? 나를 경찰서에 넘겨서 죄를 묻는 게 더 나았을 텐데.”마재경은 얼굴이 빨개졌지만 여전히 우겼다.“너는 돈도 많고 옆에 힘 있는 남자들도 많은데, 내가 어떻게 증거를 찾을 수 있겠어?”고은서는 다시 한번 어이없어 웃었다.“증거도 없다는 거네. 그러면 무슨 근거로 나를 의심해? 나한테 피를 뿌린 것도 모자라 잔인하게 죽이려고까지 했잖아.”“‘눈에는 눈, 이에는 이’라고 내가 칼에 찔려 과다 출혈로 죽을 뻔했으니 같은 방식으로 너한테 되갚아주고 싶었어.”마재경은 고은서가 정말 자기를 해치기라도 한 것처럼 원한을 쏟아냈다.고은서는 더 이상 그녀와 논쟁을 이어갈 생각이 없다는 듯 손을 내저었다.“사주한 사람이 없다고 계속 우기면 너의 남은 인생은 감옥에서 썩게 될 거야. 인플루언서로 돌아갈 수 없는 것은 물론 자유도 잃게 되겠지.”“너!”“협박으로 들릴지 모르지만, 네 말대로 나에겐 돈도 많고 곁에 힘 있는 남자들도 많아.”이 말을 들은 마재경은

  • 어게인, 비긴   제1114화

    “집에서 모시러 오셨으니 저는 이만 가보겠습니다. 경찰서에 상황을 알아보러 가야 해서요.”그녀가 식사 자리에서 여시은을 용서할 수 없다고 분명히 밝혔기 때문에 여재훈은 크게 놀라지 않았고 더 이상 설득도 하지 않았다.“고은서 씨, 이번 일은 저와도 상관이 있으니 같이 가도록 해요.”하지만 고은서는 완곡하게 거절했다.“아닙니다. 상대가 저를 노린 것이니 제가 가면 됩니다. 다치셨으니 일찍 들어가 쉬십시오.”그녀의 단호한 태도에 여재훈은 더 이상 고집하지 않았다. 다만 소식이 있으면 알려달라고 했다.고은서가 인사하고 자리를 뜨려는 순간, 여씨 가문의 가정의가 진료실에서 나오더니 호들갑을 떨었다.“여 대표님, 앞으로 이런 무모한 행동은 삼가세요. 이번에는 동맥을 다치지 않아서 다행이지만, 혈액형도 특이한데 대량 출혈이라도 발생하면 이 작은 병원에서 혈액을 공급받지 못했을 거예요.”‘혈액형이 특이하다고?’고은서도 희귀한 혈액형이었다. 그녀가 여재훈의 혈액형을 물어보려 할 때 여시은이 애교 섞인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그러게요. 아빠, 몸을 좀 아끼세요. 너무 걱정되고 무서워요...”이 광경을 본 고은서는 말없이 떠나갔다....마재경이 뿌린 피가 그녀의 몸을 명중하지 못했는데도 여기저기 피가 튀어 불쾌한 냄새가 났다.곽승재가 경찰서에 같이 가자고 했기 때문에 고은서는 먼저 라이트문 아파트로 돌아가 꼼꼼히 씻은 후 깨끗한 옷으로 갈아입었다.곽승재는 빛의 속도로 달려왔다. 고은서가 대충 차려입고 경찰서에 도착한 지 얼마 안 돼서 허둥지둥 달려오는 그의 모습이 보였다.곽승재는 얇은 미디엄 코트를 입고 있었는데, 매끈한 핏 덕분에 더 훤칠해 보였다. 그의 잘생긴 얼굴에는 걱정하는 기색이 살짝 감돌았다.그는 고은서를 보자마자 상처부터 확인했다.곽승재의 따뜻한 손이 피부에 닿자, 고은서는 약간 불편한 듯 그의 손을 살짝 밀어냈다.“정말 괜찮아. 살짝 긁혔을 뿐이고, 이미 약도 발랐어.”곽승재는 손을 거두어들였지만 눈은 그녀를 떠나지 않았다.말쑥

  • 어게인, 비긴   제1113화

    지난번 여씨 저택에서 여시은이 쿠아에게 할퀴어 상처를 입었을 때 이 의사를 본 적이 있었다.여시은은 아버지가 다쳤다는 소식을 듣고 자기 몸 상태도 생각할 겨를이 없이 병원으로 달려온 모양이다. 가정의도 걱정돼서 따라나섰을 것이다.“시은아, 왜 여기까지 왔어? 괜찮다고, 금방 돌아갈 거라고 말했잖아.”여재훈이 나무라듯 말했다.“아가씨께서는 대표님이 병원에 계신다는 소식을 듣자마자 수액을 뽑아버리고 운전기사에게 빨리 병원으로 데려다 달라고 하셨어요.”가정의가 설명을 보탰다.역시 그랬다. 여시은은 눈이 빨갛게 충혈되고 예쁜 얼굴에 긴장과 걱정이 가득했다.“아빠, 대체 어떻게 된 거예요? 어쩌다 다치셨어요?”여재훈은 고은서의 말을 듣고 딸에 대한 의심이 생겼지만, 그녀의 걱정스러운 모습을 보고 사람들 앞에서 추궁하지는 않았다.여재훈이 부드러운 목소리로 대답했다.“작은 사고가 있었어. 이제 괜찮아.”여시은은 조금 안심된 듯했다. 그제야 진료실에 다른 사람이 있다는 것을 알아챈 그녀는 의사와 간호사에게 인사한 뒤 고은서에게로 시선을 돌렸다.리셉션이 끝난 지 며칠 지났지만 두 사람의 대면은 이번이 처음이었다.리셉션 때보다 여시은은 확연히 풀이 죽은 상태였다. 창백한 얼굴에 화장기 하나 없었고, 입술에도 각질이 일어나 있었다.게다가 여재훈에게 무슨 일이라도 생길까 봐 전전긍긍하는 모습은 살짝 건드리면 깨지는 도자기 인형처럼 취약해 보였다.도대체 어떻게 이런 완벽한 연기를 펼칠 수 있는 건지?민시후의 부하들이 여시은에게 조현병이 없다는 걸 알아내지 못했더라면, 여시은이 이중인격을 가진 게 아닌지 의심했을 정도였다. 순진무구한 인격과 잔인하고 변태적인 인격 말이다.하지만 여시은은 조현병 환자가 아닌 게 분명했다. 왜냐하면 그녀의 눈가에 차가운 기운이 스쳐 지나갔기 때문이다.비록 순간적으로 스쳐 지나간 것이었지만 고은서는 정확히 포착했다.“고은서, 너 때문에 아빠가 다치신 거야?”여시은은 예전처럼 친한 척하지 않고 화난 목소리로 물었다.고은서가

  • 어게인, 비긴   제1112화

    의사가 여재훈의 상처를 처치하는 사이, 고은서의 휴대폰이 울렸다.번호를 보니 곽승재였다.고은서는 여재훈에게 말하고 복도로 나가 전화를 받았다.“은서야, 너 사고를 당했다며? 너와 여 대표님이 모두 다쳤다고?”곽승재가 다급히 물었다.임신 오해 사건 이후, 두 사람이 모든 것을 터놓고 얘기한 뒤로 그녀를 몰래 보호하던 인원을 철수한 상태였다.하지만 운전기사는 여전히 주민기가 배치한 인원이어서 고은서에게 무슨 일이 생기면 바로 알 수 있었다.고은서는 어디서 들었는지 캐묻지 않았다.“괜찮아. 마재경이 갑자기 유일 투자은행 주차장에서 나를 습격했어. 여재훈 씨가 막아주다가 팔을 다치셨고.”“나는 지금 출장 중이라 경찰서 쪽에 다른 사람을 보냈어.”곽승재는 무거운 목소리로 말했다.“지금 바로 해성으로 돌아갈게.”고은서는 급히 돌아올 필요가 없다고 말했다.“여긴 별일 없으니까 일에 집중해. 여재훈 씨의 상처 처치가 끝나면 경찰서로 가서 마재경을 만날 거야.”“이쪽 일은 거의 마무리됐어. 내가 돌아가면 같이 경찰서에 가자.”곽승재는 설명을 이어갔다.“지난번 마재경이 다쳤을 때 병원을 방문해 더 이상 협조가 필요 없다고 통보하고 충분한 보상금도 지급했어.”“다시는 네 앞에 나타나 존재감을 과시하지 말라고 몇 번 경고했는데 갑자기 나타난 걸 보면 배후에 조종자가 있는 게 아닌지 의심스러워.”곽승재는 차분한 목소리로 분석을 이어갔고, 고은서도 어느 정도 수긍했다.따져보면, 마재경은 돈 때문에 곽승재와 손잡은 것이고 그녀와 깊은 원한이 없었다.협력 관계가 끝났으면 적당한 선에서 물러나야 정상이지, 이렇게 위험한 방식으로 그녀에게 복수할 이유가 없지 않은가?하지만 마재경이 진심으로 곽승재를 좋아하게 됐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천천히 사랑을 키워나가고 싶었는데 곽승재가 갑자기 관계를 끊자고 하니 그 분노를 고은서에게 쏟아냈을 수도 있다.고은서가 이 가능성을 말하려는 순간, 간호사가 문을 열고 나오더니 안에 있는 환자분의 부탁이라며 그녀의 상처

  • 어게인, 비긴   제1111화

    ‘분명 넘어뜨렸는데.’고은서는 마재경이 이렇게 빨리 일어날 줄은 몰랐고, 가위를 들고 달려들 줄은 더욱 생각지 못했다.피하기엔 이미 늦은 상황이었다. 고은서는 다급한 마음에 전기충격기를 꺼내 마재경의 몸에 들이댔다.“조심해요.”고은서와 마재경이 전기충격기와 가위를 손에 들고 서로 공격하려는 순간, 우람한 체구의 남성이 황급히 달려왔다. 여재훈이었다.그는 고은서를 확 끌어당기고 마재경을 밀쳐냈다.쨍그랑! 전기충격기가 땅에 떨어지며 마재경의 몸에 닿았고, 감전된 마재경은 비명을 질렀다.잠시 비틀거리던 마재경은 눈에 핏발을 세우고 다시 가위를 휘두르며 덤벼들었다.고은서가 마재경을 걷어차려고 다리를 뻗는 순간, 여재훈이 자기 팔로 가위를 막아 그녀를 보호했다.그의 넓은 어깨는 웅대한 산처럼 든든해 보였고, 어린 시절 외할아버지 품에 안겼을 때처럼 피난처 같은 안정감을 주었다.짝! 가위가 여재훈의 팔을 찌르며 옷이 찢어지는 소리가 들렸다. 여재훈은 잽싸게 마재경을 발로 걷어찼다.“여재훈 씨, 괜찮으세요?”정신을 차린 고은서가 다급한 목소리로 물었다.여재훈은 평온한 표정으로 대답했다.“괜찮아요.”이때 경비원 몇 명이 달려와 마재경을 제압했다.고은서는 여재훈의 팔을 살펴보았다. 재킷과 셔츠가 찢기고 기다란 상처에서 피가 흘러나오고 있었다.고은서는 가슴이 아려와 다급히 말했다.“다치셨네요. 빨리 병원 가서 싸매야 해요.”“고은서 씨도 다쳤으니 같이 가요.”여재훈이 고은서의 쇄골 부위를 가리키며 말했다.아무 느낌도 없었는데, 여재훈의 말을 듣고 나니 쇄골 근처 어깨죽지 부위에서 얼얼한 통증이 느껴졌다.손으로 만져보니 피는 나지 않는 듯했다. 오늘 카라 없는 캐주얼 셔츠를 입은 까닭에 마재경이 가위를 휘두를 때 살짝 긁힌 듯하다.“저는 연고만 바르면 될 것 같아요. 어서 병원 가요.”고은서는 경비원에게 마재경을 경찰서에 넘기라고 말했다.그러고는 기사를 불러오고 여재훈과 함께 뒷좌석에 탔다.여재훈의 팔뚝에 번진 핏자국을 보며 고은서는

  • 어게인, 비긴   제1110화

    여재훈도 자리에서 일어났다.“제가 은서 씨를 회사까지 모셔다드리겠습니다.”이 식사는 여재훈이 초대한 자리였으니 끝까지 책임지고 고은서를 안전하게 회사까지 돌려보내는 게 맞다고 생각했다.돌아가는 길에 두 사람은 거의 말을 하지 않아 분위기가 조금 무거웠다.고은서는 여재훈이 자기 딸이 고양이를 학대했을 수도 있다는 사실을 받아들이기 힘들어한다는 걸 알기에 여재훈한테 혼자 생각할 시간을 줬다.얼마 지나지 않아 그들은 유일 투자은행의 주차장에 도착했다.“은서 씨, 곽승재 씨랑 현재 무슨 사이이신가요?”여재훈이 물었다.고은서는 사실대로 답했다.“그냥 평범한 친구 사이예요.”여재훈은 고개를 끄덕이더니 말했다.“승재 씨는 은서 씨를 많이 신경 쓰는 것 같더군요.”연회 때 곽승재가 고은서를 적극적으로 감싸는 모습을 모두가 똑똑히 봤다.이에 대해 고은서도 부정하지 않았다.“그건 곽승재 씨의 일방적인 감정이에요. 저는 그 사람한테 이성적인 감정은 없어요.”“시은이가 승재 씨를 꽤 마음에 들어 하더라고요. 저한테도 말한 적 있어요. 그와 결혼하고 싶다고.”여재훈은 말을 이었다.“아마 시은이의 질투심도 여기서 시작된 것 같아요. 그래서 은서 씨를 해하려 했던 걸지도 모르죠. 하지만 쿠아는 시은이가 가장 아끼던 반려동물이에요. 시은이가 이유 없이 해칠 리는 없을 겁니다.”고은서는 그 말의 속뜻을 곧바로 이해했다.여재훈의 말은 여시은이 고은서를 향한 질투 때문에 공격적으로 나왔을 수는 있어도, 쿠아는 여시은이 키우는 반려동물이기에 쿠아를 해칠 사람은 아니라고 믿는다는 것 같았다.고은서는 그저 씁쓸하게 웃었다.가족이라는 필터는 쉽게 사라지지 않는다. 하지만 언젠가는 여재훈도 여시은의 본모습을 보게 될 날이 올 것이라 믿었다.고은서는 더 말해봤자 의미가 없다는 걸 알기에 여재훈한테 간단히 인사를 하고 차에서 내렸다.차에서 내린 고은서는 어디선가 여자 하나가 스쳐 지나가는 듯한 그림자를 본 것 같았고, 공기 중에서 약간의 피비린내도 느꼈다.그녀는 주

  • 어게인, 비긴   제1109화

    여재훈은 고은서를 바라보며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을 하고는 물었다.“시은이가 또 무슨 일을 했다는 거죠?”마침 노 사장님이 식전 반찬을 가져다주며 주문한 대표 요리도 곧 준비된다고 알렸다.고은서는 계속해서 말했다.“재훈 씨, 저희 먼저 식사부터 하고 이야기할까요?”고은서는 몹시 배가 고팠다. 만약 지금 이 이야기를 꺼내면 두 사람 모두 식사할 마음이 사라질 것 같았다.여재훈은 고은서의 제안에 동의했다.이 개인 요리 식당의 음식은 색다른 풍미가 있었고, 고은서는 배부르게 먹었다.반면, 여재훈은 거의 먹지 않았다. 마치 그는 고은서를 동반하기 위해 자리를 함께한 것처럼 보였다.식사 중에는 가끔 일상적이고 가벼운 이야기를 나누기도 했다.약 삼십 분 후, 고은서는 젓가락을 내려놓으며 배가 너무 부르다고 말했다.아직 못다 한 이야기가 남아있지만, 여재훈은 배부른 고은서를 보며 묘한 만족감을 느꼈다.여재훈은 그녀가 배부르게 먹는 모습을 보는 것만으로도 기뻤다.여재훈은 고은서의 찻잔에 물을 따라주며 물었다.“우리 시은이가 또 무슨 잘못을 저질렀던 거죠?”고은서는 찻물을 한 모금 마신 뒤 숨을 깊이 들이쉬고는 여시은이 고양이를 학대한 일에 대해 털어놓았다.“저번에 제가 쿠아 때문에 경찰에 신고를 했었잖아요?”고은서가 말했다.“전 정말 시은이에게 누명을 씌운 게 아니에요. 여시은이 제 눈앞에서 쿠아의 입술을 다치게 했어요. 그리고 평소에도 쿠아를 자주 괴롭혔어요.”고은서의 말을 들은 여재훈은 자신의 귀를 의심했다.“시은이는 쿠아를 그렇게 아꼈어요. 집에서도 항상 품에 안고 다녔고, 쿠아가 뭐라도 먹고 싶어 하면 직접 손으로 먹여줬다니까요. 시은이가 어떻게 그런 짓을 했겠어요?”여재훈은 믿지 못하겠다는 듯이 물었다.“은서 씨, 혹시 오해가 있는 건 아니에요? 뭔가 착각하신 거 아닐까요?”평소 여시은은 얌전한 딸의 이미지를 잘 연기해 왔기에 여재훈은 그녀를 철석같이 믿고 있었다.“재훈 씨가 믿기 힘든 거 알아요. 아버지 입장에서야 딸이 그

  • 어게인, 비긴   제1108화

    지난번 숙모에게 가방을 선물했을 때, 숙모가 엄청나게 기뻐했던 모습이 순간 떠올랐다.그래서 이번엔 삼촌에게도 뭔가를 사서 드리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고은서는 노 사장님에게 코담배병을 어디서 샀는지 물어봤다. 그리고 가족에게 드릴 선물로 하나 사고 싶다고 말을 덧붙였다.“이건 친구가 선물한 거라 어디서 샀는지는 나도 잘 모르겠네.”노 사장님은 미안한 듯 말했다.고은서는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괜찮아요, 그냥 예뻐서 한번 여쭤본 거예요. 나중에 백화점 가서 한번 골라볼게요.”“아가씨는 참 효심이 깊구먼.”노 사장님은 칭찬을 몇 마디 건넨 뒤, 주문한 메뉴를 주방으로 가져갔다.“은서 씨 아버님께서 코담배병을 좋아하시나요? 선물하시려고요?”여재훈이 부드럽게 물었다.고은서는 고개를 저었다.“전 아버지가 없어요. 삼촌께 드리려는 거예요.”여재훈은 조금 놀란 표정이었다.그는 고은서를 몇 번밖에 만나지 못했기에 그녀의 가정사에 대해서는 잘 알지 못했다. 그래서 그녀에게 아버지가 없다는 사실도 오늘 처음 들었다.“죄송합니다. 그런 줄도 모르고...”여재훈은 곧바로 사과했다.고은서는 별일 아니라는 듯 웃었다.“괜찮아요. 저희 가족끼리도 잘 지내고 있어요.”착각일지도 모르지만, 여재훈은 고은서의 그 미소는 어딘가 익숙하다는 느낌을 받았다.그때 여재훈의 휴대전화 벨 소리가 울렸다.전화번호를 확인한 그는 곧바로 정신을 차리고 전화를 받았다.“시은아, 왜 그래... 주사 맞는 게 당연히 좀 아프지. 하지만 주사를 안 맞으면 어떻게 낫겠어... 알겠으니깐 떼쓰지 말고, 의사 말 잘 들어.”전화를 끊고 나서 여재훈은 고은서에게 간단히 상황을 설명했다.“시은이가 아픈데 주사 맞기 싫다고 하네요.”고은서는 여시은의 이름에 반응이 컸다. 예전에 여시은에게 학대받다 죽은 쿠아가 떠올랐다. 그 기억 때문에 속이 불쾌해지고 분노가 스멀스멀 올라왔다.그녀는 말없이 찻잔을 들어 한 모금 마셨다.여재훈은 고은서의 반감을 눈치채지 못할 리 없었다.그는 조심

Explore and read good novels for free
Free access to a vast number of good novels on GoodNovel app. Download the books you like and read anywhere & anytime.
Read books for free on the app
SCAN CODE TO READ ON APP
DMCA.com Protection Statu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