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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85화

Author: 류한나
곽승재는 고은서의 말에 대답하지 않고 차갑게 말을 이었다.

“두 시간 내로 다시 돌아가. 그렇지 않으면 아까 말한 돈은 못 줘.”

고은서는 곽승재의 거만한 태도가 거슬렸고 어이가 없어서 피식 웃었다.

“안 줘도 돼. 난 돈을 좋아하지만 너랑 부부로 묶여있는 게 조건이라면 절대 안 가질 거야. 나 스스로 벌 수 있으니 굳이 네 돈을 쓰지 않아도 돼.”

곽승재는 울화가 치밀어 올랐다.

“며칠 전에 있었던 사고를 벌써 잊은 거야?”

고은서가 잊을 리 없었다.

“서인수는 잡혔으니 다시는 그럴 일 없을 거야. 그리고 사고당할까 봐 무서워서 예원 별장에만 있을 수 없잖아?”

“고은서, 내가 돌아올 때까지만... 두 주일 정도만 집에 있어 주면 돼. 돌아가서 다시 얘기하면 안 될까?”

곽승재는 한결 부드럽게 말했지만 고은서는 단호했다.

“아니, 하루도 그곳에 있기 싫어.”

만약 이사하기 전에 이 조건을 들었다면 며칠 동안 집에 있었겠지만 이미 집을 나와서 자유를 만끽하는데 다시 돌아가라면 절대 가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곽승재는 냉철하고 똑똑한 상인이라 손해 보는 장사는 절대 하지 않았다.

출장을 마치고 돌아와서 위자료에 대해 말할지, 아니면 고은서더러 정신 손해배상금과 고용인 월급을 내놓으라 할지 모르는 일이다. 고은서는 남의 돈을 욕심내지 않고 스스로 돈을 벌 생각이었다.

고은서가 단호하게 말하자 곽승재는 인내심의 한계를 느꼈다.

“그래, 고은서 네 마음대로 해! 내가 귀국하면 그날로 이혼하는 거야. 네가 후회해도 소용없어!”

곽승재가 전화를 끊으려고 하자 고은서가 입을 열었다.

“잠깐만!”

곽승재의 화가 누그러들었지만 말투는 여전히 딱딱했다.

“무슨 말이 하고 싶은데!”

“아까 한 말 다시 한번 해줄래? 그때 가서 말 바꾸면...”

뚝.

고은서가 다 말하기도 전에 곽승재가 전화를 끊었고 휴대폰을 사무실 책상에 내리쳤다. 휴대폰 액정이 나갔고 더는 쓸 수 없는 형체가 되었다. 업무 보고를 위해 기다리고 있던 주민기는 수명을 다한 휴대폰이 안쓰러웠다.

고은서의 위력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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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어게인, 비긴   제286화

    민시후의 등장은 사람들의 시선을 사로잡았고 호텔로 드나드는 여자들은 고은서를 힐끔 쳐다보았다. 평범한 옷차림의 여자가 왜 이런 남자 곁에 있는지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을 짓더니 이내 부러워서 눈을 떼지 못했다.고은서는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민시후의 차에 타기 싫었기에 모르는 사람처럼 스쳐 지나서 밖으로 걸어 나가려 했다. “은서 씨!”민시후가 손을 흔들면서 미소를 지었다.“여기예요!”고은서는 어이가 없었고 차가운 표정을 지은 채 민시후 곁으로 다가가 차에 올라탔다. 민시후는 싱글벙글 웃으면서 차 문을 닫아주었고 운전석에 앉았다. 두 사람이 떠나기 전까지 많은 사람의 주목을 받았다. 이때 고은서가 불쾌한 어조로 물었다.“민 도련님, 지금 이게 뭐 하는 짓이에요? 술집에 가는 것뿐인데 왜 이렇게 차려입고 왔어요?”민시후가 반문했다.“이 정도는 입어야 하는 거 아닌가요? 꾸며도 뭐라고 하네요.”고은서는 한숨을 내쉬었다.“민 도련님, 잘 차려입은 도련님과 같이 가려니까 민망해요. 다음부터 편한 차림으로 오면 안 돼요?”민시후는 사악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당연히 안 되죠. 비록 은서 씨는 보는 눈이 없지만 예쁘잖아요. 예쁜 여자를 만나러 가는데 응당 잘 차려입고 멋진 모습을 보여줘야죠.”고은서는 어이가 없었다.“쪽팔리는 것 말고는 하나도 모르겠는데요.”민시후는 고은서를 훑어보더니 말을 이었다.“은서 씨 T예요? 다른 여자들은 남자가 신경 쓴 티가 나면 좋아하던데, 은서 씨는 어쩐지 더 싫어하네요.”고은서는 민시후의 말을 무뚝뚝하게 받아쳤다.“그렇게 생각하시든 말든 마음대로 하세요. 신경 쓸 필요 없으니까요. 그리고 저번에 우리 별로 친하지 않다면서요, 그러니까 굳이 꾸미지 않아도 돼요.”고은서는 의심스러운 눈빛으로 쳐다보며 물었다.“설마 이거 수작 부리는 건가요?”“저는 은서 씨 재능을 높게 사서 직접 보고 싶어서 그런 건데 왜 제 마음을 의심하세요? 제가 일말의 믿음조차 저버린 건가요?”민시후가 시무룩한 표정을 짓고 말하자

  • 어게인, 비긴   제287화

    사람들이 박수치자 고은서는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숙여 인사했다. 고은서가 테이블로 돌아왔고 민시후는 박수치면서 말했다.“조회수가 높게 나올 만했네요! 원래부터 실력자인 건 알고 있었는데 현장에서 들어보니 더 벅차요.”고은서가 자신감 넘치는 표정을 짓고 말했다.“그럼요!”고은서는 드럼 선생님이 특별히 아끼던 제자였다. 이때 민시후가 술잔을 들면서 말했다.“자, 은서 씨를 위해서 건배!”마침 술집 매니저가 고은서한테 칵테일을 만들어 주었다.“고은서 씨 연주 잘 봤어요. 이건 가게 새 메뉴인데 고은서 씨께 드리고 싶어서요.”고은서는 칵테일 잔을 건네받고 말했다.“고마워요.”칵테일은 달콤한 맛이 일품이었고 목 넘김이 부드러워서 알코올 향이 나지 않았다. 칵테일을 마신 뒤, 고은서는 시간을 확인하더니 민시후한테 물었다.“민 도련님, 임무도 완성했고 시간도 늦었는데 이만 가봐도 될까요?”민시후가 자리에서 일어나며 말했다.“그럼요, 같이 가요.”민시후는 고은서에게 차 열쇠를 건네면서 말했다.“난 많이 마셨으니 은서 씨가 운전해요.”고은서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기사님을 부르세요, 저는 콜택시를 부를 거니까요.”민시후는 손을 내저으면서 말했다.“은서 씨를 데려온 사람이 저니까 호텔까지 데려다주어야죠. 저는 신사다운 남자잖아요.”고은서는 더 이상 말싸움하기 싫었고 빨리 호텔로 돌아가고 싶다는 생각에 차 열쇠를 가지고 민시후와 주차장으로 향했다. 호텔 앞에 도착한 뒤, 고은서는 민시후더러 기사를 불러라고 재촉하면서 안전벨트를 풀었다. 그러자 민시후도 안전벨트를 풀면서 미간을 주물렀다.“어지러워서 저도 오늘 여기서 자야겠어요.”고은서는 두 눈을 커다랗게 뜨고 물었다.“민시후 도련님, 지금 이게 뭐 하는 짓이에요?”민시후는 고은서를 흘겨보더니 입을 열었다.“오해한 것 같은데, 저는 유부녀한테 관심 없어요.”고은서가 인상을 찌푸린 채 물었다.“요즘 따라 왜 이러는 거죠?”어제 식당에 갈 때부터 어딘가 이상했고 오늘은 지나치게

  • 어게인, 비긴   제288화

    사진을 확인한 백유미는 하얀 정장 차림을 한 남자가 민시후라는 것을 눈치챘다. 고은서가 민시후한테 기대서 호텔로 들어서는 모습에 적잖이 놀랐다. 민시후는 예쁜 여자라면 사족을 못 쓰지만 원수처럼 싫어했던 곽승재의 아내 고은서와 가까이 지낼 줄 몰랐다. 민시후는 곽승재의 지인들과 말도 섞지 않는 사람이었다.백유미는 예전에 고은서가 민시후의 병문안을 간 모습을 본 적이 있었고 명운과 연관된 일로 합작한 건 알고 있었지만 두 사람이 이 정도로 친밀한 사이가 될 줄 몰랐다.‘고은서가 화가 나서 곽승재한테 복수하려고 일부러 민시후를 유혹한 거야, 아니면 민시후가 고은서를 유혹해서 곽승재의 심기를 건드리려는 거야?’[백유미: 잘했어, 호텔 안으로 들어가지 마. 오늘 지훈 씨는 아무것도 못 본 거야.]백유미가 원지훈한테 문자를 보냈다. 이 사진이 곽승재 손에 들어가게 되면 어떻게 된 일인지 샅샅이 조사할 것이 분명했기에 원지훈이 찍었다는 것을 들켜서는 안 되었다.[원지훈: 걱정하지 마세요, 아무한테도 말 안 해요.]원지훈의 답장을 확인한 백유미는 휴대폰을 내려놓았다. 지금 당장 곽승재한테 사진을 보내지는 않았지만 때가 되면 사진을 보여줄 것이다. 그러면 고은서가 아무리 설명해도 곽승재 마음에 단단히 꽂힌 가시가 되어 떠올릴 때마다 아플 것이다.한편, 호텔 로비로 들어간 민시후는 고은서와 같은 층에 있는 방을 잡았다. 민시후는 고은서를 부축한 채로 고은서의 방까지 들어갔고 문을 닫자마자 고은서는 팔을 뿌리쳤다.“당장 방으로 돌아가세요, 지금 기분이 상당히 나쁘거든요.”민시후는 고은서를 힐끗 쳐다보더니 입을 삐죽 내밀었다.“제가 실수한 것처럼 말하네요. 은서 씨는 유부녀고 저는 솔로거든요? 따지고 보면 제가 더 손해 본 것 같은데요.”고은서를 인상을 찌푸린 채 말했다.“네, 민 도련님 말이 다 맞아요. 위대한 솔로 민 도련님, 연기가 끝났으면 당장 나가주세요.”민시후는 소파에 눕더니 눈을 감고 말했다.“두 시간 뒤에 갈게요.”고은서가 고개를 갸웃거리

  • 어게인, 비긴   제289화

    고은서는 민시후를 흘겨보면서 말했다.“저의 사적인 일보다는 송민아부터 걱정해야 하는 거 아닌가요? 오해하게 생겼는데, 만약 포기하지 않고 저부터 치우려고 하면 어떡하죠?”민시후는 사악한 미소를 지었다.“은서 씨가 알아서 잘 해결하겠죠.”고은서가 한숨을 내쉬었지만 민시후는 여전히 덤덤했다.“두 시간으로 오늘 밤 혹은 더 많은 날 동안 잠잠해질 텐데, 은서 씨가 조금만 참아요.”고은서가 민시후의 처사 방식이 어떤지 알게 되었다. 민시후는 어디로 튈지 몰라서 무서운 남자였다. “그런데 왜 굳이 두 시간 뒤에 나가는 거예요?”고은서는 질문하고 나서 곰곰이 생각해 보더니 후회했다. 민시후는 피식 웃더니 물었다.“곽승재가 두 시간도 못 하던가요?”“민 도련님, 선 넘지 마세요!”고은서는 얼굴이 빨갛게 달아올랐고 재빨리 안방으로 들어가서 문을 잠갔다. 그러고는 곽승재가 예전에 했던 말이 떠올랐다. 곽승재는 민시후가 겉보기에 단순한 것 같지만 그 모습에 속으면 되레 당할 수 있다면서 경고했었고 고은서는 그 말이 이제야 실감 났다.칵테일을 마셔서인지 술기운이 올라온 고은서는 그대로 침대에 누웠다. 이미 벌어진 일을 돌이킬 수 없었기에 민시후 말대로 곽승재가 빨리 이혼해 주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고은서는 도통 잠에 들지 못해서 인스타를 보다가 곽승재가 올린 게시물을 보게 되었다. 게시물을 한 번도 올린 적 없는 곽승재가 출장한 곳에서 먹은 점심을 찍어 올렸다.[곽승재: 맛없어.]그 밑에는 육현석이 댓글을 달았다.[육현석: 승재 형, 해외로 간 거야? 그런데 밥이 왜 이래, 좀 좋은 식당에 가서 먹어. 형수님이 보면 마음 아파하실 거란 말이야.]입맛에 맞지 않았는지 곽승재가 육현석의 댓글에 대답했다.[곽승재: 그럴 시간 없어.][육현석: 그럼 형수님한테 전화해서 위로해달라고 부탁해 봐. 형한테는 형수님밖에 없잖아.]곽승재라면 육현석의 댓글이 오글거려서 무시할 것이 뻔했기에 고은서는 다른 게시물을 보려고 했다. 그런데 손가락이 미끄러져서 그 페

  • 어게인, 비긴   제290화

    고은서의 목소리를 듣고 대답한 건 외할아버지가 아니라 성아연이었다.“은서야, 왔어?”성아연은 절반쯤 깎은 사과를 들고 나왔고 고은서는 눈썹을 치켜세웠다.“네가 왜 여기에 있어?”성아연은 미소를 지으면서 말했다.“할아버지를 뵈러 온 지도 오래되었으니 왔을 뿐이야.”성아연은 고씨 가문 저택에 자주 놀러 왔기에 고준석과 친하게 지냈다. 2년 동안 감감무소식이다가 갑자기 나타난 걸 보면 단순히 고준석을 만나러 온 것이 아닐 것이다.“우리 은서 왔어?”고준석이 걸어 나오면서 말했다.“아연이도 방금 왔단다. 내가 심심할까 봐 시간 내어서 왔다는구나.”고은서는 고준석의 기분이 좋아 보여서 성아연을 내쫓지 않고 함께 방 안으로 들어갔다. 그러고는 오면서 산 간식을 전해주었고 입을 열었다.“외할아버지, 천천히 드세요. 저는 아연이랑 할 얘기가 있어서요.”고은서는 성아연과 함께 정원으로 향했다.“외할아버지를 만나러 온 목적이 무엇인지 당장 말해.”성아연은 시무룩한 표정을 짓고 말했다.“할아버지가 날 예뻐해 주셨는데 만나러 오면 안 돼? 은서야, 내가 예전에 잘못한 게 있으면 미안해. 계속 반성하고 있고 앞으로 네 말만 들을게. 네가 하자는 대로 할 테니까 화 풀어, 응?”성아연이 화해하고 싶어 했지만 고은서는 여전히 차가운 표정을 짓고 있었다.“은서야, 난 진심이야. 이번에 국성 삼촌이랑 향신료 계약을 하기 위해서 아빠한테 며칠 동안 빌었거든. 그래서 삼촌이랑 계약하게...”“계약했어?”고은서가 성아연의 말을 끊더니 계속해서 물었다.“언제 계약했는데?”성아연은 계약과 연관된 말을 꺼낼 때마다 예민하게 반응하는 고은서가 이해되지 않았다. 지난번에 처음 계약을 제안할 때도 이런 반응이었다. 성아연은 고은서가 무언가를 눈치챈 줄 알았다.“어제 오후에 계약했어.”성아연이 고개를 갸웃거리면서 물었다.“은서야, 무슨 문제라도 있어? 표정이 안 좋은걸.”고은서는 성아연을 무시한 채 위층으로 올라갔고 삼촌 고국성한테 전화를 걸어 향신료 계약에 관

  • 어게인, 비긴   제291화

    고은서는 민시후가 그녀의 팔을 잡고 호텔 로비로 함께 들어가는 사진을 접수했다.발송인은 원지훈이었다. 이어서 그는 문자까지 보내왔다.[누나, 이 사진을 누나 남편이 본다면 어떨 거 같아요?]송민아의 경고가 먼저일 줄 알았는데 생각 밖으로 원지훈이 앞섰다.고은서는 차갑게 웃고 답장을 보냈다.[그래서 어쩌자는 건데?][누나, 걱정하지 말아요, 난 원래부터 입이 무거운 데다가 또 누나가 은혜 씨의 사촌 언니인데 함부로 터뜨리지 않을 테니깐. 사진을 보내는 의도는 보는 눈도 많은데 드나들 때 특히 조심 좀 하시라고 귀띔 드리는 겁니다.][시간 나면 같이 커피나 한잔해.]원지훈의 속셈을 그녀가 모를 리가 없다. 그는 고은서가 곽승재한테 냉대를 받아 이런 방식으로 보복하는 거로 알고 이참에 돈을 뜯으려 하는 것이다. 그는 그녀가 돈 많고 호락호락 한 여자로만 보였기 때문이다.원지훈이 그녀의 약점을 잡았다고 생각한 모양인데, 차라리 이참에 그를 접근하면 나중에 일이 많이 쉬워질 것 같아서 친한 척했다.[좋아요. 지금은 제가 회사 일로 정신없으니, 며칠 후에 누나에게 연락할게요.]원지훈은 예상한 대로 시원하게 대답했다.원지훈을 대처하고 나서 이내 도아름에게 연락하여 계약서에 관련한 자기의 걱정을 말해주었다. 도아름은 잠깐 생각을 하고 나서 그녀에게 분석해 주었다.“상대방이 진짜 함정을 파려고 한다면, 설령 협의서에 문제가 없더라도 화물접수 등등의 방면에서 명예에 훼손하는 수단은 많고도 많아요.”“물론 품질과 납기를 엄격하게 지키고 도중에 오차가 발생하지 않으면 별문제 없을 거 같은데요.”“너무 걱정하지 말고 좋게 생각해요. 어쨌든 큰 오던데 잘되면 이름도 날리고 돈도 벌 수 있고 좋은 일이지요.”도아름은 괜찮으니 너무 걱정하지 말라고 위로해 주었다.일이 이렇게 된 이상, 별다른 방법은 없었다.외삼촌은 원래부터 듬직하지 못하기에 하루라도 빨리 믿음직한 부사장감을 물색하여 옆에서 그를 보조해줘야 한다고 생각한 고은서는 이 일을 도아름에게 부탁했다

  • 어게인, 비긴   제292화

    두 사람은 몇 마디 더 주고받고 통화를 끝냈다.전화를 끊고 난 고은서는 눈살을 찌푸렸다.만약 납치사건이 진짜 누군가가 뒤에서 부추긴 거라면 아마도 백유미가 혐의에서 벗어나지 못할 것이다.고은서한테 제일 큰 원한이 있는 사람은 백유미 밖에 없기 때문이었다.하마터면 능욕을 당할 뻔했다고 생각한 그녀는 화가 나서 두 주먹을 발끈 쥐었다.그녀는 받은 이 모든 것들을 하나하나씩 배유미에게 돌려주기로 맹세했다.그녀는 애써 흥분된 마음을 가라앉히면서 객실에 들어갔다.“은서야, 네가 좋아하는 과일 접시와 과일 샐러드를 만들어봤어, 어서 와서 먹어봐.”성아연이 과일 접시를 내오면서 인사했다.“성아연, 분명히 충고했다, 여기에서 헛수고하지 말라고. 이제는 너의 가식에 넘어갈 내가 아니거든!”그녀가 쌀쌀맞게 말하면서 내쫓았다.“부인하지도 말고 억울한 척도 하지 마.”고은서는 성아연의 연기를 중단시키면서 말했다.“내가 이 정도까지 말한 이상 네가 부린 수작을 다 알아버렸다는 뜻이니 그만 연기하고 꺼져줄래?”그녀의 말을 듣고 있던 성아연의 얼굴은 새파랗게 질려있었다.“고은서! 나한테 고작 옷 몇 벌 사주고, 밥 몇 번 샀다고 유세 떠는 거니? 넌 우리의 우정을 헌 걸레짝 취급하는구나!”“앞으로 네가 시키는 대로만 하고 네가 쓴 돈도 다 돌려주겠다고 했잖아, 근데 무슨 불만이야!”이런 말들은 ‘쓰남어록에’만 있는가 했더니 가식녀들도 쓰네.고은서는 싸늘하게 웃으면서 약 올렸다.“돈은 돌려주면 받겠는데 우정은 관두자. 난 너 같은 가식녀는 딱 질색이니깐.”“너! 그만 나대!”성아연은 끝내 참지 못하고 폭발했다.“너야말로 강을 건너 다리를 헐든 가식녀야! 너네 고씨 가문은 방금 우리 아버지를 통해 계약했는데 벌써 얼굴을 바꾸니깐.”고은서의 말투는 더한층 차가워졌다.“난 너더러 이 다리 놓아달라 한 적 없어. 네가 기어이 이 다리를 놓아주는 척하면서 기회를 노려 또 그것을 무너뜨리려고 하는 건 아니고?” 고은서의 침착한 표정을 보고 성아연은 왠지

  • 어게인, 비긴   제293화

    어제 오전에 그는 화가 나서 전화를 끊었었다. 돌아오면 이혼하겠다면서 그녀에게 후회하지 말라고 경고까지 했다.이 상황에 그가 돌아오기 전까지 그들은 다시 연락할 일이 없을 텐데, 왜 갑자기 전화하는 건지 이해가 안 갔지만, 전화를 받았다.“여보세요?”하지만 전화기 너머는 조용했다.“승재씨?”고은서는 의아한 듯 한 번 더 불렀다.상대방은 여전히 응답하지 않는다.“신호가 없나? 대답하지 않으면 끊는다?”“콜록콜록...”귓가에 곽승재의 기침 소리가 들려왔다.“은서야, 나 배고파.”뒤이어 곽승재의 쉰 듯한 목소리가 귓속으로 파고들었다.곽승재가 올린 모멘트를 머릿속에 떠올린 그녀는 어이가 없어서 말했다.“배가 고프면 먹을 걸 사러 가야지 왜 나한테 전화하는 건데?”곽승재는 또 연달아 기침을 둬 번 하고 나서 쉰 듯한 목소리로 말했다.“네가 예전부터 가문 위에서부터 전해 내려온 죽 쑤는 비법이 있는데, 그 비법대로 하면 끓인 죽이 찰지고 걸쭉해서 맛있다고 나한테 자랑했잖아.”‘자랑은 무슨, 그렇다고 알려주는 건데.’ 하지만 반박은 하지 않았다.“그래서?”“그 비방을 좀 전수해달라고, 내가 지금 막 당겨서.”‘내가 따끈따끈하게 쒀서 가져다 바칠 때는 거들떠보지도 않더니, 지금은 왜 비굴하게 굴어?' 그러나 곽승재의 목소리는 허약하고 맥없이 들려오기에 배가 매우 고파서 전화한 것이 분명하다.곽승재는 입이 몹시 까다롭다. 자기가 손수 만들어 먹으려는 정도면 그쪽 음식이 얼마나 그의 입맛에 안 맞는지 알 수가 있다.그녀는 과거의 일로 그와 옴니암니 따지기 싫었다.“알았어, 죽 끓이는 방법을 편집하여 문자로 넣어줄게.”곽승재는 또 침묵을 지키고 있다.고은서는 그가 죽 끓이는 일이 번거로워 하는가 싶어서 말했다.“걱정 마, 아주 쉬워, 손만 있으면 누구나 다 할 수 있어.”“은서야.”그녀가 재차 전화를 끊으려 할 무렵, 그가 또 그녀의 이름을 불렀다.“또 무슨 일 있어?”전화기 건너에서 대답 대신 평소보다 더 무거운 숨소리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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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어게인, 비긴   제1116화

    곽승재의 말을 들은 마재경의 얼굴에 두려운 기색이 살짝 감돌았다.하지만 문득 뭔가를 떠올린 듯 그녀는 콧방귀를 뀌며 말했다.“협박하지 마세요. 가벼운 부상에 불과하니 유능한 변호사를 선임하면 기껏해야 3년 감옥에 있고 나올 거예요. 당신들이 주는 기회 따위는 필요 없어요.”마재경은 인정하지 않겠다고 마음 먹은 것이 확실했다. 3년 감옥살이로 거액의 돈을 바꾸는 것이 나쁘지 않다는 판단이었다.이로 미루어 보면, 마재경은 정말 누군가의 사주를 받은 것이다.고은서가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3년 청춘을 돈과 바꾸는 것이 이익이라고 생각해? 영원히 지워지지 않는 오점이 생겨 네가 어디 가든 따라다닐 텐데.”“게다가 그렇게 큰돈이 어디서 생겼는지 출처를 밝히지 못하면 경찰이 가만둘 것 같아? 일단 경찰이 알아내면 너의 공범도 잡히고 너는 비호죄까지 추가될 텐데. 정말 그럴 만한 가치가 있을까?”고은서의 말에 마재경은 약간 망설였지만 여전히 자기가 혼자 한 것이라고 고집했다. 돈도 어디서 입금됐는지 모르겠고, 어쩌면 팬 중 한 명이 보낸 것일 수도 있다고 둘러댔다.다소 김빠진 고은서는 곽승재와 함께 밖에 나가 마재경의 약점을 찾아보려 했다.그때 곽승재가 입을 열었다.“죄를 지었다는 것이 너의 고향에 알려지면 돈을 들고 금의환향하려는 생각이 실현될 수 있을까?”이 말에 마재경은 허를 찔린 듯 눈에 공포가 감돌았고 몸도 미세하게 떨리기 시작했다.잠시 후, 곽승재의 얼음장 같은 시선 속에서 마재경은 철저히 무너졌다.“말할게요. 전부 다 털어놓을게요...”...여씨 저택.여시은이 수액을 다 맞고 여재훈도 약을 먹은 뒤였다.가정의가 떠나자, 여시은은 여재훈의 옆에 앉았다.“아빠, 왜 그러세요? 계속 미간을 찌푸리고 계시는데, 상처 부위가 많이 아프신 거예요?”여재훈은 순하고 사리에 밝은 딸을 바라보며 결국 참지 못하고 물었다.“시은아, 네가 주워 온 길고양이가 너랑 그리 친하지 않은 것 같더구나?”여시은은 순진무구한 눈빛을 한 채 고개를 끄

  • 어게인, 비긴   제1115화

    마재경은 잠깐 멍하니 있더니 곧바로 사주한 사람이 없다고, 그냥 미워서 괴롭히고 싶었다고 말했다.그러자 고은서는 코웃음을 쳤다.“변명이 너무 억지스럽다는 생각이 안 들어?”“너와 곽승재가 단순히 금전적 관계였던 건 말할 것도 없고, 설령 진심으로 좋아하는 감정이 생겨서 잘해보고 싶은데 외면당했다고 해도 곽승재한테 화풀이해야 하는 거 아닌가?”고은서의 질문에 마재경은 얼굴이 부자연스럽게 일그러졌다.“나는 곽 대표님을 존경했을 뿐 다른 마음은 없었어.”“그런데 너는 나와 곽 대표님의 스캔들 때문에 나를 질투했고, 나의 팬을 돈으로 매수해 나를 반죽음으로 만들었어. 이런 짓을 한 너에게 복수하면 안 되나?”‘흉기 난동 사건까지 내 탓으로 돌리려 하다니?’고은서는 더욱 어이없었다.“마재경, 머리는 장식품으로 달고 다니나? 내가 곽승재를 어떻게 생각하는지 누구나 다 알아. 내가 질투심 때문에 돈으로 사람을 매수해 너를 해칠 이유가 없잖아.”“그리고 정말 나를 의심했다면 왜 경찰에 신고하지 않았어? 나를 경찰서에 넘겨서 죄를 묻는 게 더 나았을 텐데.”마재경은 얼굴이 빨개졌지만 여전히 우겼다.“너는 돈도 많고 옆에 힘 있는 남자들도 많은데, 내가 어떻게 증거를 찾을 수 있겠어?”고은서는 다시 한번 어이없어 웃었다.“증거도 없다는 거네. 그러면 무슨 근거로 나를 의심해? 나한테 피를 뿌린 것도 모자라 잔인하게 죽이려고까지 했잖아.”“‘눈에는 눈, 이에는 이’라고 내가 칼에 찔려 과다 출혈로 죽을 뻔했으니 같은 방식으로 너한테 되갚아주고 싶었어.”마재경은 고은서가 정말 자기를 해치기라도 한 것처럼 원한을 쏟아냈다.고은서는 더 이상 그녀와 논쟁을 이어갈 생각이 없다는 듯 손을 내저었다.“사주한 사람이 없다고 계속 우기면 너의 남은 인생은 감옥에서 썩게 될 거야. 인플루언서로 돌아갈 수 없는 것은 물론 자유도 잃게 되겠지.”“너!”“협박으로 들릴지 모르지만, 네 말대로 나에겐 돈도 많고 곁에 힘 있는 남자들도 많아.”이 말을 들은 마재경은

  • 어게인, 비긴   제1114화

    “집에서 모시러 오셨으니 저는 이만 가보겠습니다. 경찰서에 상황을 알아보러 가야 해서요.”그녀가 식사 자리에서 여시은을 용서할 수 없다고 분명히 밝혔기 때문에 여재훈은 크게 놀라지 않았고 더 이상 설득도 하지 않았다.“고은서 씨, 이번 일은 저와도 상관이 있으니 같이 가도록 해요.”하지만 고은서는 완곡하게 거절했다.“아닙니다. 상대가 저를 노린 것이니 제가 가면 됩니다. 다치셨으니 일찍 들어가 쉬십시오.”그녀의 단호한 태도에 여재훈은 더 이상 고집하지 않았다. 다만 소식이 있으면 알려달라고 했다.고은서가 인사하고 자리를 뜨려는 순간, 여씨 가문의 가정의가 진료실에서 나오더니 호들갑을 떨었다.“여 대표님, 앞으로 이런 무모한 행동은 삼가세요. 이번에는 동맥을 다치지 않아서 다행이지만, 혈액형도 특이한데 대량 출혈이라도 발생하면 이 작은 병원에서 혈액을 공급받지 못했을 거예요.”‘혈액형이 특이하다고?’고은서도 희귀한 혈액형이었다. 그녀가 여재훈의 혈액형을 물어보려 할 때 여시은이 애교 섞인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그러게요. 아빠, 몸을 좀 아끼세요. 너무 걱정되고 무서워요...”이 광경을 본 고은서는 말없이 떠나갔다....마재경이 뿌린 피가 그녀의 몸을 명중하지 못했는데도 여기저기 피가 튀어 불쾌한 냄새가 났다.곽승재가 경찰서에 같이 가자고 했기 때문에 고은서는 먼저 라이트문 아파트로 돌아가 꼼꼼히 씻은 후 깨끗한 옷으로 갈아입었다.곽승재는 빛의 속도로 달려왔다. 고은서가 대충 차려입고 경찰서에 도착한 지 얼마 안 돼서 허둥지둥 달려오는 그의 모습이 보였다.곽승재는 얇은 미디엄 코트를 입고 있었는데, 매끈한 핏 덕분에 더 훤칠해 보였다. 그의 잘생긴 얼굴에는 걱정하는 기색이 살짝 감돌았다.그는 고은서를 보자마자 상처부터 확인했다.곽승재의 따뜻한 손이 피부에 닿자, 고은서는 약간 불편한 듯 그의 손을 살짝 밀어냈다.“정말 괜찮아. 살짝 긁혔을 뿐이고, 이미 약도 발랐어.”곽승재는 손을 거두어들였지만 눈은 그녀를 떠나지 않았다.말쑥

  • 어게인, 비긴   제1113화

    지난번 여씨 저택에서 여시은이 쿠아에게 할퀴어 상처를 입었을 때 이 의사를 본 적이 있었다.여시은은 아버지가 다쳤다는 소식을 듣고 자기 몸 상태도 생각할 겨를이 없이 병원으로 달려온 모양이다. 가정의도 걱정돼서 따라나섰을 것이다.“시은아, 왜 여기까지 왔어? 괜찮다고, 금방 돌아갈 거라고 말했잖아.”여재훈이 나무라듯 말했다.“아가씨께서는 대표님이 병원에 계신다는 소식을 듣자마자 수액을 뽑아버리고 운전기사에게 빨리 병원으로 데려다 달라고 하셨어요.”가정의가 설명을 보탰다.역시 그랬다. 여시은은 눈이 빨갛게 충혈되고 예쁜 얼굴에 긴장과 걱정이 가득했다.“아빠, 대체 어떻게 된 거예요? 어쩌다 다치셨어요?”여재훈은 고은서의 말을 듣고 딸에 대한 의심이 생겼지만, 그녀의 걱정스러운 모습을 보고 사람들 앞에서 추궁하지는 않았다.여재훈이 부드러운 목소리로 대답했다.“작은 사고가 있었어. 이제 괜찮아.”여시은은 조금 안심된 듯했다. 그제야 진료실에 다른 사람이 있다는 것을 알아챈 그녀는 의사와 간호사에게 인사한 뒤 고은서에게로 시선을 돌렸다.리셉션이 끝난 지 며칠 지났지만 두 사람의 대면은 이번이 처음이었다.리셉션 때보다 여시은은 확연히 풀이 죽은 상태였다. 창백한 얼굴에 화장기 하나 없었고, 입술에도 각질이 일어나 있었다.게다가 여재훈에게 무슨 일이라도 생길까 봐 전전긍긍하는 모습은 살짝 건드리면 깨지는 도자기 인형처럼 취약해 보였다.도대체 어떻게 이런 완벽한 연기를 펼칠 수 있는 건지?민시후의 부하들이 여시은에게 조현병이 없다는 걸 알아내지 못했더라면, 여시은이 이중인격을 가진 게 아닌지 의심했을 정도였다. 순진무구한 인격과 잔인하고 변태적인 인격 말이다.하지만 여시은은 조현병 환자가 아닌 게 분명했다. 왜냐하면 그녀의 눈가에 차가운 기운이 스쳐 지나갔기 때문이다.비록 순간적으로 스쳐 지나간 것이었지만 고은서는 정확히 포착했다.“고은서, 너 때문에 아빠가 다치신 거야?”여시은은 예전처럼 친한 척하지 않고 화난 목소리로 물었다.고은서가

  • 어게인, 비긴   제1112화

    의사가 여재훈의 상처를 처치하는 사이, 고은서의 휴대폰이 울렸다.번호를 보니 곽승재였다.고은서는 여재훈에게 말하고 복도로 나가 전화를 받았다.“은서야, 너 사고를 당했다며? 너와 여 대표님이 모두 다쳤다고?”곽승재가 다급히 물었다.임신 오해 사건 이후, 두 사람이 모든 것을 터놓고 얘기한 뒤로 그녀를 몰래 보호하던 인원을 철수한 상태였다.하지만 운전기사는 여전히 주민기가 배치한 인원이어서 고은서에게 무슨 일이 생기면 바로 알 수 있었다.고은서는 어디서 들었는지 캐묻지 않았다.“괜찮아. 마재경이 갑자기 유일 투자은행 주차장에서 나를 습격했어. 여재훈 씨가 막아주다가 팔을 다치셨고.”“나는 지금 출장 중이라 경찰서 쪽에 다른 사람을 보냈어.”곽승재는 무거운 목소리로 말했다.“지금 바로 해성으로 돌아갈게.”고은서는 급히 돌아올 필요가 없다고 말했다.“여긴 별일 없으니까 일에 집중해. 여재훈 씨의 상처 처치가 끝나면 경찰서로 가서 마재경을 만날 거야.”“이쪽 일은 거의 마무리됐어. 내가 돌아가면 같이 경찰서에 가자.”곽승재는 설명을 이어갔다.“지난번 마재경이 다쳤을 때 병원을 방문해 더 이상 협조가 필요 없다고 통보하고 충분한 보상금도 지급했어.”“다시는 네 앞에 나타나 존재감을 과시하지 말라고 몇 번 경고했는데 갑자기 나타난 걸 보면 배후에 조종자가 있는 게 아닌지 의심스러워.”곽승재는 차분한 목소리로 분석을 이어갔고, 고은서도 어느 정도 수긍했다.따져보면, 마재경은 돈 때문에 곽승재와 손잡은 것이고 그녀와 깊은 원한이 없었다.협력 관계가 끝났으면 적당한 선에서 물러나야 정상이지, 이렇게 위험한 방식으로 그녀에게 복수할 이유가 없지 않은가?하지만 마재경이 진심으로 곽승재를 좋아하게 됐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천천히 사랑을 키워나가고 싶었는데 곽승재가 갑자기 관계를 끊자고 하니 그 분노를 고은서에게 쏟아냈을 수도 있다.고은서가 이 가능성을 말하려는 순간, 간호사가 문을 열고 나오더니 안에 있는 환자분의 부탁이라며 그녀의 상처

  • 어게인, 비긴   제1111화

    ‘분명 넘어뜨렸는데.’고은서는 마재경이 이렇게 빨리 일어날 줄은 몰랐고, 가위를 들고 달려들 줄은 더욱 생각지 못했다.피하기엔 이미 늦은 상황이었다. 고은서는 다급한 마음에 전기충격기를 꺼내 마재경의 몸에 들이댔다.“조심해요.”고은서와 마재경이 전기충격기와 가위를 손에 들고 서로 공격하려는 순간, 우람한 체구의 남성이 황급히 달려왔다. 여재훈이었다.그는 고은서를 확 끌어당기고 마재경을 밀쳐냈다.쨍그랑! 전기충격기가 땅에 떨어지며 마재경의 몸에 닿았고, 감전된 마재경은 비명을 질렀다.잠시 비틀거리던 마재경은 눈에 핏발을 세우고 다시 가위를 휘두르며 덤벼들었다.고은서가 마재경을 걷어차려고 다리를 뻗는 순간, 여재훈이 자기 팔로 가위를 막아 그녀를 보호했다.그의 넓은 어깨는 웅대한 산처럼 든든해 보였고, 어린 시절 외할아버지 품에 안겼을 때처럼 피난처 같은 안정감을 주었다.짝! 가위가 여재훈의 팔을 찌르며 옷이 찢어지는 소리가 들렸다. 여재훈은 잽싸게 마재경을 발로 걷어찼다.“여재훈 씨, 괜찮으세요?”정신을 차린 고은서가 다급한 목소리로 물었다.여재훈은 평온한 표정으로 대답했다.“괜찮아요.”이때 경비원 몇 명이 달려와 마재경을 제압했다.고은서는 여재훈의 팔을 살펴보았다. 재킷과 셔츠가 찢기고 기다란 상처에서 피가 흘러나오고 있었다.고은서는 가슴이 아려와 다급히 말했다.“다치셨네요. 빨리 병원 가서 싸매야 해요.”“고은서 씨도 다쳤으니 같이 가요.”여재훈이 고은서의 쇄골 부위를 가리키며 말했다.아무 느낌도 없었는데, 여재훈의 말을 듣고 나니 쇄골 근처 어깨죽지 부위에서 얼얼한 통증이 느껴졌다.손으로 만져보니 피는 나지 않는 듯했다. 오늘 카라 없는 캐주얼 셔츠를 입은 까닭에 마재경이 가위를 휘두를 때 살짝 긁힌 듯하다.“저는 연고만 바르면 될 것 같아요. 어서 병원 가요.”고은서는 경비원에게 마재경을 경찰서에 넘기라고 말했다.그러고는 기사를 불러오고 여재훈과 함께 뒷좌석에 탔다.여재훈의 팔뚝에 번진 핏자국을 보며 고은서는

  • 어게인, 비긴   제1110화

    여재훈도 자리에서 일어났다.“제가 은서 씨를 회사까지 모셔다드리겠습니다.”이 식사는 여재훈이 초대한 자리였으니 끝까지 책임지고 고은서를 안전하게 회사까지 돌려보내는 게 맞다고 생각했다.돌아가는 길에 두 사람은 거의 말을 하지 않아 분위기가 조금 무거웠다.고은서는 여재훈이 자기 딸이 고양이를 학대했을 수도 있다는 사실을 받아들이기 힘들어한다는 걸 알기에 여재훈한테 혼자 생각할 시간을 줬다.얼마 지나지 않아 그들은 유일 투자은행의 주차장에 도착했다.“은서 씨, 곽승재 씨랑 현재 무슨 사이이신가요?”여재훈이 물었다.고은서는 사실대로 답했다.“그냥 평범한 친구 사이예요.”여재훈은 고개를 끄덕이더니 말했다.“승재 씨는 은서 씨를 많이 신경 쓰는 것 같더군요.”연회 때 곽승재가 고은서를 적극적으로 감싸는 모습을 모두가 똑똑히 봤다.이에 대해 고은서도 부정하지 않았다.“그건 곽승재 씨의 일방적인 감정이에요. 저는 그 사람한테 이성적인 감정은 없어요.”“시은이가 승재 씨를 꽤 마음에 들어 하더라고요. 저한테도 말한 적 있어요. 그와 결혼하고 싶다고.”여재훈은 말을 이었다.“아마 시은이의 질투심도 여기서 시작된 것 같아요. 그래서 은서 씨를 해하려 했던 걸지도 모르죠. 하지만 쿠아는 시은이가 가장 아끼던 반려동물이에요. 시은이가 이유 없이 해칠 리는 없을 겁니다.”고은서는 그 말의 속뜻을 곧바로 이해했다.여재훈의 말은 여시은이 고은서를 향한 질투 때문에 공격적으로 나왔을 수는 있어도, 쿠아는 여시은이 키우는 반려동물이기에 쿠아를 해칠 사람은 아니라고 믿는다는 것 같았다.고은서는 그저 씁쓸하게 웃었다.가족이라는 필터는 쉽게 사라지지 않는다. 하지만 언젠가는 여재훈도 여시은의 본모습을 보게 될 날이 올 것이라 믿었다.고은서는 더 말해봤자 의미가 없다는 걸 알기에 여재훈한테 간단히 인사를 하고 차에서 내렸다.차에서 내린 고은서는 어디선가 여자 하나가 스쳐 지나가는 듯한 그림자를 본 것 같았고, 공기 중에서 약간의 피비린내도 느꼈다.그녀는 주

  • 어게인, 비긴   제1109화

    여재훈은 고은서를 바라보며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을 하고는 물었다.“시은이가 또 무슨 일을 했다는 거죠?”마침 노 사장님이 식전 반찬을 가져다주며 주문한 대표 요리도 곧 준비된다고 알렸다.고은서는 계속해서 말했다.“재훈 씨, 저희 먼저 식사부터 하고 이야기할까요?”고은서는 몹시 배가 고팠다. 만약 지금 이 이야기를 꺼내면 두 사람 모두 식사할 마음이 사라질 것 같았다.여재훈은 고은서의 제안에 동의했다.이 개인 요리 식당의 음식은 색다른 풍미가 있었고, 고은서는 배부르게 먹었다.반면, 여재훈은 거의 먹지 않았다. 마치 그는 고은서를 동반하기 위해 자리를 함께한 것처럼 보였다.식사 중에는 가끔 일상적이고 가벼운 이야기를 나누기도 했다.약 삼십 분 후, 고은서는 젓가락을 내려놓으며 배가 너무 부르다고 말했다.아직 못다 한 이야기가 남아있지만, 여재훈은 배부른 고은서를 보며 묘한 만족감을 느꼈다.여재훈은 그녀가 배부르게 먹는 모습을 보는 것만으로도 기뻤다.여재훈은 고은서의 찻잔에 물을 따라주며 물었다.“우리 시은이가 또 무슨 잘못을 저질렀던 거죠?”고은서는 찻물을 한 모금 마신 뒤 숨을 깊이 들이쉬고는 여시은이 고양이를 학대한 일에 대해 털어놓았다.“저번에 제가 쿠아 때문에 경찰에 신고를 했었잖아요?”고은서가 말했다.“전 정말 시은이에게 누명을 씌운 게 아니에요. 여시은이 제 눈앞에서 쿠아의 입술을 다치게 했어요. 그리고 평소에도 쿠아를 자주 괴롭혔어요.”고은서의 말을 들은 여재훈은 자신의 귀를 의심했다.“시은이는 쿠아를 그렇게 아꼈어요. 집에서도 항상 품에 안고 다녔고, 쿠아가 뭐라도 먹고 싶어 하면 직접 손으로 먹여줬다니까요. 시은이가 어떻게 그런 짓을 했겠어요?”여재훈은 믿지 못하겠다는 듯이 물었다.“은서 씨, 혹시 오해가 있는 건 아니에요? 뭔가 착각하신 거 아닐까요?”평소 여시은은 얌전한 딸의 이미지를 잘 연기해 왔기에 여재훈은 그녀를 철석같이 믿고 있었다.“재훈 씨가 믿기 힘든 거 알아요. 아버지 입장에서야 딸이 그

  • 어게인, 비긴   제1108화

    지난번 숙모에게 가방을 선물했을 때, 숙모가 엄청나게 기뻐했던 모습이 순간 떠올랐다.그래서 이번엔 삼촌에게도 뭔가를 사서 드리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고은서는 노 사장님에게 코담배병을 어디서 샀는지 물어봤다. 그리고 가족에게 드릴 선물로 하나 사고 싶다고 말을 덧붙였다.“이건 친구가 선물한 거라 어디서 샀는지는 나도 잘 모르겠네.”노 사장님은 미안한 듯 말했다.고은서는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괜찮아요, 그냥 예뻐서 한번 여쭤본 거예요. 나중에 백화점 가서 한번 골라볼게요.”“아가씨는 참 효심이 깊구먼.”노 사장님은 칭찬을 몇 마디 건넨 뒤, 주문한 메뉴를 주방으로 가져갔다.“은서 씨 아버님께서 코담배병을 좋아하시나요? 선물하시려고요?”여재훈이 부드럽게 물었다.고은서는 고개를 저었다.“전 아버지가 없어요. 삼촌께 드리려는 거예요.”여재훈은 조금 놀란 표정이었다.그는 고은서를 몇 번밖에 만나지 못했기에 그녀의 가정사에 대해서는 잘 알지 못했다. 그래서 그녀에게 아버지가 없다는 사실도 오늘 처음 들었다.“죄송합니다. 그런 줄도 모르고...”여재훈은 곧바로 사과했다.고은서는 별일 아니라는 듯 웃었다.“괜찮아요. 저희 가족끼리도 잘 지내고 있어요.”착각일지도 모르지만, 여재훈은 고은서의 그 미소는 어딘가 익숙하다는 느낌을 받았다.그때 여재훈의 휴대전화 벨 소리가 울렸다.전화번호를 확인한 그는 곧바로 정신을 차리고 전화를 받았다.“시은아, 왜 그래... 주사 맞는 게 당연히 좀 아프지. 하지만 주사를 안 맞으면 어떻게 낫겠어... 알겠으니깐 떼쓰지 말고, 의사 말 잘 들어.”전화를 끊고 나서 여재훈은 고은서에게 간단히 상황을 설명했다.“시은이가 아픈데 주사 맞기 싫다고 하네요.”고은서는 여시은의 이름에 반응이 컸다. 예전에 여시은에게 학대받다 죽은 쿠아가 떠올랐다. 그 기억 때문에 속이 불쾌해지고 분노가 스멀스멀 올라왔다.그녀는 말없이 찻잔을 들어 한 모금 마셨다.여재훈은 고은서의 반감을 눈치채지 못할 리 없었다.그는 조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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