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hare

제417화

Author: 류한나
분노와 한기로 가득 찬 곽승재의 눈빛을 보며 고은서는 아무런 감정도 느껴지지 않았다. 그녀는 이미 이 결과를 예상하고 있었다.

박지연은 아이에 관한 사실을 곽승재에게 알려주면 모든 일이 좋게 끝날 것이라고 믿었지만 현실은 전혀 그렇지 않았다.

“곽승재, 우리 그냥 이혼하자. 더는 끌지 말고.”

고은서는 다리 하나를 가드 밖으로 내밀면서 담담하게 말을 이어갔다.

“그렇지 않으면 여기서 뛰어내릴 거야.”

“고은서, 지금 또 뛰어내리겠다면서 날 협박하는 거야?”

이를 악물고 말하는 곽승재의 얼굴빛은 섬뜩할 정도로 어두웠다. 심지어 그로부터 차가운 한기가 느껴질 정도였다.

“네가 뛰어내리면 민시후도 마찬가지로 대가를 치르게 할 거야.”

그의 말을 들은 고은서는 입꼬리를 살짝 올리더니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뛰어내렸다.

“스읍!”

그러나 뛰어내리는 순간 고은서는 팔로부터 오는 고통을 느꼈다. 다름이 아니라 곽승재가 뛰어와 그녀를 잡았던 것이다.

하지만 관성 때문에 고은서는 여전히 밑으로 떨어지려고 했다. 곽승재는 허리 굽혀 그녀의 다른 한쪽 손까지 잡고 화를 내며 말했다.

“손 놓지 말고 꽉 잡아!”

반쯤 거의 떨어지려고 하는 고은서의 귓가에는 윙윙거리는 바람 소리밖에 들리지 않았다. 사실 그녀는 자신을 잡고 있는 곽승재를 보며 아무런 감정도 느껴지지 않았다.

전에 그의 사랑과 관심을 얻으려고 이 층에서 뛰어내린 적이 있었는데 지금은 그에게서 벗어나려고 또다시 테라스에서 뛰어내리게 될 줄은 그녀 자신도 생각 못 했다.

‘이 결혼을 강구한 대가를 치르는 셈이네.’

“널 끌어올릴 테니까 내 손 꽉 잡아!”

곽승재의 목소리를 들은 고은서는 마지못해 고개를 들었다.

그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는데 아마 거꾸로 봐서였을까, 고은서는 그의 눈빛으로부터 분노뿐만이 아니라 조급함도 보아낼 수 있었다.

그녀가 그에게 소중한 사람이라도 되는 것처럼 걱정하는 듯했다.

그러나 고은서는 중력 때문에 팔이 점점 더 아파왔고 눈도 깔깔해져 곽승재의 모습이 희미해지기 시작했다. 그녀가 곽승재의 손을
Continue to read this book for free
Scan code to download App
Locked Chapter

Related chapters

  • 어게인, 비긴   제418화

    고은서가 깨어났을 땐 이미 침실 안이었다.고준석과 오춘식이 그녀의 곁을 지키고 있었는데 백발이 성성한 고준석은 침대 옆에 있는 의자에 앉아 근심 걱정으로 가득 찬 표정을 하고 있었는데 많이 피곤해 보였다.오춘식은 그에게 약과 물을 챙겨다 주면서 그를 달랬다.“어르신,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의사 선생님께서 너무 흥분하는 바람에 정신을 잃은 거라고 했으니 괜찮을 거예요. 곧 깨어날 겁니다. 그리고 어르신도 몸 주의하셔야죠. 방금전처럼 은서한테 뛰어가시다가 넘어지기라도 하시면 어쩌려고 그러세요.”“나 그렇게 쉽게 넘어질 사람이 아니야. 내 몸은 내가 더 잘 알아.”고준석은 약을 건네받고 삼키면서 말했다.방금전 화단으로 떨어질 때 비틀거리는 걸음걸이로 자신을 향해 달려오는 고준석의 모습과 그의 고함소리를 떠올린 고은서는 저도 모르게 코가 찡해 나더니 눈물을 흘렸다.“은서야, 깼어?”눈을 뜬 고은서를 발견한 오춘식은 흥분한 목소리로 말했다.그 소리를 들은 고준석도 이내 고은서를 향해 시선을 돌렸다. 고준석은 정신을 차린 그녀를 보자마자 순간 얼굴빛이 환해졌다.“은서야, 괜찮아? 어디 아픈 곳은 없어?”“할아버지...”고은서는 자신을 걱정하는 고준석을 바라보더니 순간 울먹이면서 그의 품에 와락 안겼다.“울지마, 울지 마. 할아버지 여기 있어.”고준석은 눈물을 흘리는 고은서를 보고 있자니 마음이 미어지는 듯했다. 그는 그녀의 등을 토닥이면서 그녀를 달랬다.“이 계집애야, 힘든 일이 있으면 할아버지한테 말했어야지. 이런 위험한 행동은 이번이 마지막이야, 알겠어? 네가 잘못되기라도 하면 할아버지는 어쩌라는 거야?”“할아버지, 미안해요. 또 걱정하게 만들어서 정말 미안해요...”고은서는 흐느끼면서 말했다.“괜찮아, 할아버지한테 뭐가 미안할 게 있다고...”고준석도 순간 눈시울이 붉어졌다.“그까짓 이혼 할아버지가 지지해줄게. 다른 건 중요치 않아. 그저 은서 네가 건강하고 무사하면 돼.”고준석은 무슨 일이 일어나도 항상 고은서 편이었다.

  • 어게인, 비긴   제419화

    “고은서, 모든 일을 확실하게 짚고 넘어가지 않는 이상 이혼은 절대 동의 못 해.”“곽승재!”고은서는 눈살을 찌푸리며 화내려고 했다.“이놈의 자식!”전미자는 지팡이로 곽승재를 내리치며 호통했다.“아직도 계속 은서를 화나게 할 예정이야? 네가 은서를 어느 궁지까지 몰아갔으면 은서가 저런 극단적인 선택을 하겠어?”곽승재는 입술을 꽉 깨물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은서야, 승재랑 얘기 한 번 더 나눠보는 건 어떻니?”전미자가 고은서에게 말했다.“걱정하지 마. 할머니가 네 시어머니랑 여기까지 온 게 다 너희 두 사람 이혼 문제를 해결해주기 위해서야. 네가 무슨 결정을 내리든 우리는 다 널 지지할 거니까 걱정하지 않아도 돼.”“은서야, 얘기하기 싫으면 하지 않아도 돼. 할아버지는 더는 네가 속상해하는 모습을 못 보겠어.”고준석이 말했다.고은서는 순간 마음이 따뜻해지는 것 같았다.‘누군가가 내 편을 들어준다는 게 이런 느낌이구나.’“할아버지, 저 곽승재랑 얘기 나눠볼게요.”고은서는 전미자를 거절하고 싶지 않았다. 게다가 곽승재가 이혼하지 않겠다고 고집부리는 이상 그 누구도 그의 생각을 바꾸지 못할 것이다.고준석은 당연하게도 고은서의 선택을 존중했다.“그럼 할아버지가 밖에서 기다리고 있을게.”“네.”어른들이 밖으로 나간 후 곽승재는 고은서 곁으로 다가갔다.고은서는 그제서야 그의 옷에 진흙 자국이 있는 걸 발견했다. 심지어 다치기라도 했는지 걸으면서 눈에 띄게 미간을 찌푸리곤 했다. 그러나 다 그녀랑 상관없는 일이었다.고은서는 차가운 눈길로 곽승재를 바라보며 물었다.“하고 싶은 얘기가 뭔데?”“아까 그 아이가 내 아이라고 했었잖아. 사실이야?”조명 때문인지 곧게 서 있는 그의 이목구비가 더 뚜렷해 보였다. 그의 눈에서는 알 수 없는 감정이 일렁이고 있는 듯했다.고은서는 헛웃음을 치며 말했다.“계속 물어본다 한들 아무런 의미가 없잖아. 내가 무슨 답을 하든 당신은 믿지 않을 테니까.”“고은서, 나는 네가 하는 말이 어디까지가

  • 어게인, 비긴   제420화

    “이후에 서로 아무 관계가 없는 낯선 사이가 된다고 해도 상관없어?”곽승재가 계속 캐물었다.‘이혼 한 마당에 무슨 관계를 계속 유지하겠다는 거야?’고은서는 아주 단호하게 답했다.“상관없어.”“고은서, 우리가 결혼한 지 벌써 오 년이야. 그런데 어떻게 이혼이라는 한 마디로 모든 걸 부정하려고 할 수가 있어?”곽승재는 순간 화가 났다. 그러나 고은서 눈에는 이 상황이 너무도 어이가 없었다.“정확히 말하자면 오 년 동안 당신이 나한테 퍼부은 감정이 얼마나 된다고 그래? 우리 사이엔 원래부터 아무런 감정이 없었잖아.”“감정이 있었는지 없었는지 네가 어떻게 알아?”곽승재가 이를 악물고 말했다.“전에 없었다고 해도 지금 생겼다잖아. 나도 널 좋아하게 됐다고. 그런데 왜 자꾸 날 거절하려고 하는 건데?”“왜 거절하면 안 되는 건데?”고은서가 되물었다.“전에 내가 당신을 좋아할 때는 내가 당신 눈앞에 더는 나타나지 않았으면 할 정도로 날 싫어했잖아. 그런데 내가 더는 좋아하지 않는다니까 갑자기 날 곁에 잡아두려고 하는 이유가 뭐야? 내가 당신 감정을 꼭 받아줘야 하는 법은 없잖아.”“왜 갑자기 날 좋아하지 않게 된 건데? 적어도 내가 받아들일 수 있는 이유는 알려줘야 할 거 아니야!”곽승재는 화를 가라앉힐 수가 없었다.고은서는 헛웃음을 치며 말했다.“좋아하지 않는 데 무슨 이유가 필요해? 오 년 동안 나를 극혐해 하다가 내가 이혼하려고 하니까 날 좋아하게 되었다고? 너무 어이없지 않아?”곽승재는 무슨 답을 해야 할지 몰랐다. 그러나 이혼하기 싫다는 것만은 확신할 수 있었다. 심지어 시간이 지날수록 이혼하기 점점 더 싫어졌다. 이젠 이혼이라는 두 글자만 들어도 역겨울 정도였다.“사실 따지고 보면 당신은 단 한 번도 날 존중해준 적이 없어.”고은서가 그를 대신해 답해줬다.“당신은 내가 평생 당신 곁에 붙어서 안 떠날 거라고 믿고 있는 거지? 당신이 날 좋아하지 않는 건 모든 게 다 내 탓이고 내가 마땅히 감당해야 할 일이고 당신이 날 좋아하

  • 어게인, 비긴   제421화

    이혼 증명서를 들고 구청 문 앞에 선 고은서는 마치 꿈을 꾸고 있는 것만 같았다.‘곽승재가 진짜 사인해주다니. 우리 정말 이혼한 거야? 나 이젠 자유의 몸인 거야?’“시그니엘 집문서와 열쇠야.”곽승재는 서류를 그녀에게 건네주며 말했다. 지난번에 그가 병원에 이 서류들을 놓고 가는 바람에 고은서는 퀵 서비스를 불러 그에게 돌려준 적이 있었다.그러나 여전히 그녀에게 주겠다고 고집부릴 줄은 미처 생각 못 했다.“안에 금액을 기입하지 않은 수표 한 장도 넣었어. 너랑 할아버지는 아무 재산도 필요 없다고 하는데 그래도 오 년 동안 함께 결혼생활을 해온 보상이라고 생각하고 받아.”곽승재가 담담하게 말했다. 그는 무표정한 얼굴을 하고 있었는데 다시 예전의 차갑고 거리감이 느껴지는 모습으로 돌아왔다.“나한테 빚진 것도 없는 데 필요 없어.”고은서는 그의 호의를 거절했다.그녀가 이 결혼을 강요하지 않았더라면 곽승재는 그녀에게 시달릴 필요도 없었다. 지금 그저 모든 걸 원점으로 돌려놓는 것뿐이다.이혼하기 전에는 곽승재한테서 백억 정도는 떼내야 속이 시원할 것 같았지만 이혼 증명서를 손에 쥐고 나니 너무 홀가분한 나머지 그에게서 아무것도 가지고 싶지 않았다. 그저 최대한 그와 멀리하고 싶었다.그녀의 생각을 알아차린 곽승재는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누군가가 곽씨 집안에서 널 홀대했다는 소릴 듣기 싫어서 그러는 거야.”고은서가 반박했다.“돈은 나 스스로 벌면 돼. 나도 우리 고씨 집안에서 딸을 판다는 소릴 듣기 싫어.”곽승재는 이를 악물고 더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는 뒤돌아보지도 않고 성큼성큼 걸어가 차에 올랐다.고은서는 곽승재가 자신한테 거절당한 것 때문에 불쾌해하고 있다는 걸 알고 있었다. 그러나 더는 그녀와 상관없는 일이었다. 그녀는 현재 자유의 몸이 되었다.푸른 하늘 아래 서 있는 그녀는 공기가 이토록 상큼하고 햇살이 이토록 밝은 적이 있었던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삶의 행복 지수가 순간 높아진 것 같았다.‘마침내 이혼했어! 지금부터

  • 어게인, 비긴   제422화

    고은서는 길옆에 주차하고 자신을 기다리는 고준석을 향해 걸어갔다.“수속 다 끝났어?”고준석이 물었다.“네.”이혼 증명서를 들고 있는 고은서는 기분이 너무 좋았다.고준석은 웃으면서 고개를 저었다.“이혼하고서도 결혼할 때처럼 환하게 웃으며 좋아하는 사람은 너밖에 없을 거다.”고은서는 부끄럽다는 듯 고준석의 어깨에 기대며 말했다.“제가 또 말썽부려서 미안해요, 할아버지.”고준석은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어주면서 답했다.“미안해하지 않아도 돼. 네가 결혼생활을 하면서 상처만 받는 것보다 나으니까. 할아버지는 네가 말썽을 부려도 행복하기만 하다면 다 괜찮아.”“고마워요, 할아버지.”마음이 따뜻해 난 고은서는 고준석의 품에 안겨 애교를 부렸다.“아, 할아버지, 오늘 예원 별장은 왜 오신 거예요?”고은서의 물음을 들은 고준석은 순간 표정이 엄숙해졌다.고준석은 오전에 MQ에 관한 소식을 접하고 친구한테 연락했는데 우연히 곽승재와 고은서에 관해 묻기에 조사해보니 두 사람 사이에 관한 소문이 자자한 걸 발견했다고 말했다.“은서야, 이렇게 많은 일들이 있었는데 왜 할아버지한테 얘기하지 않았어?”고준석이 그녀를 꾸짖었다.“그리고 입원했다는 건 대체 어떻게 된 일이야? 동영상에서 네 친구가 네가 피투성이가 되었다고 하던데 어디 다치기라도 한 거야?”고은서는 이미 지나간 일로 고준석을 속상하게 만들고 싶지 않았다. 그녀는 미소를 지어 보이며 애교 섞인 말투로 답했다.“별로 크게 다치지도 않았는데 지연이가 과장해서 말한 거예요.”그러나 고준석은 의미심장한 표정으로 계속 캐물었다.“너랑 곽승재 사이에 진짜 제삼자가 존재하는 거야? 이혼하겠다고 고집부리고 그 여자를 호수로 밀어 넣은 것도 그 이유 때문이야?”고은서는 순간 표정이 굳었다.“전부는 아니지만 그 이유도 있어요.”그녀의 말을 들은 고준석은 이내 자초지종을 깨달았다. 그는 전부터 곽승재라면 환장하는 고은서가 왜 갑자기 이혼하겠다고 고집을 부리는지 이해가 되지 않았었는데 그제야 그 의문이 풀렸

  • 어게인, 비긴   제423화

    박지연은 한참 지나서야 전화를 받았다.“은서야.”고은서는 눈에 띄게 시무룩한 박지연의 목소리를 듣고 걱정이 되었다.“지연아, 왜 그래? 전화는 왜 이렇게 늦게 받아? 무슨 일 있어?”“내가 무슨 일이 있겠어. 연락 못 해서 미안해. 본가에 가자마자 시어머니가 편찮으시다고 해서 먼저 나왔어. 그리고 이것저것 하면서 분주히 보내다 보니까 미처 너한테 연락하지도 못했고.”“미안할 게 뭐가 있어. 당연히 네 일을 먼저 처리해야지. 맞다, 좋은 소식 하나 있는데 나 오늘 이혼했어!”고은서가 그녀에게 마음에 두지 말라고 말했다.“진짜 이혼했어?”박지연은 깜짝 놀랐다.“응!”고은서는 이혼한 얘기를 꺼낼 때마다 올라가는 입꼬리를 주체할 수가 없었다.“이혼 증명서도 금방 가졌는데 아직도 따끈따끈하다. 다 네가 본가로 가서 할머니한테 소식을 전해준 덕분이야. 그렇지 않으면 이렇게 순리롭게 이혼도 못 했을 거야.”비록 곽승재가 스스로 동의한 일이지만 전미자가 옆에서 그녀를 지지해주지 않았더라면 오늘처럼 일이 쉽게 풀리지는 않았을 것이다.“사실 내가 오늘 찾아가지 않아도 할머니랑 사모님께서 예원 별장으로 갔을 거야. 내가 본가에 도착했을 때 이미 나갈 준비를 하고 있었거든.”고은서는 순간 의아했다. 그녀는 전미자가 박지연이 본가까지 찾아간 덕분에 예원 별장으로 온 거라고 생각했었다. 전에 이미 찾아가리라고 마음먹었다고는 미처 생각도 못 했다.‘아줌마가 곽승재를 타이르다가 도무지 방법이 없어서 할머니를 찾아가신 건가? 이러고 보면 아줌마가 약속을 어긴 게 아니네. 며칠 쉬다가 직접 가서 감사하다고 인사해야겠어.’“지연아, 나 먼저 할아버지 집에 가서 쉬고 있을게. 시어머님 몸도 괜찮아지고 하면 우리 만나서 축하파티라도 열자.”“그래, 알겠어.”박지연이 답했다.고은서는 박지연과 통화를 마친 후 민시후에게 메시지를 보냈다.[아버지는 괜찮으셔? 아직도 북제에 있는 거야?]메시지가 발송된 지 몇 초도 되지 않아 민시후한테서 전화가 걸려왔다.고은서가 전

  • 어게인, 비긴   제424화

    똑똑.곽현수가 손가락으로 책상을 두드리면서 말했다.“승재야, 내가 말하는 거 들었어?”곽승재는 그제야 고개를 들고 무표정한 얼굴로 자신의 아버지를 쳐다보았다. 그는 담배를 끄고 담담한 목소리로 물었다.“무슨 일이세요?”“할머니가 말씀하시길 고은서랑 이혼했다며?”곽현수가 물었다. 곽승재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피곤하다는 듯 미간을 어루만졌다.“왜 이러는 거야? 멍 때리며 피우지 않던 담배도 피우고. 사내가 그까짓 이혼을 했다고 이렇게 기죽어 있어서 쓰겠니?”“지금 절 훈계하러 들어오신 거예요?”곽승재가 물었다.“너...”곽현수는 잠깐 말문이 막혀 하다가 이내 말을 이어갔다.“허 교수가 개발한 약품 대리권은 왜 유미한테 주지 않은 거야? 그리고 융자에 관한 일은 왜 유미가 아닌 다른 사람에게 맡긴 거지?”곽승재는 미간을 어루만지던 손을 내려놓고 무표정한 얼굴로 자신의 아버지를 바라보며 답했다.“백 이사가 요즘 몸이 안 좋아서 이런 일을 책임질 여력이 되지 않아요. 이처럼 중요한 일을 맡기기에는 적절하지 않다고요.”“뭐가 적절하지 않다는 거야? 융자에 관한 일을 고은서에게 맡기고 유미를 밀어내려고 그러는 거지?”곽현수는 불만만 점점 더 쌓여갔다. 그러나 곽승재는 부인하지 않고 낯선 사람과 대화하는 듯 말했다.“아버지. 회사 일을 저한테 전적으로 맡기셨으면 저도 마찬가지로 최선을 다해 운영하도록 할 테니 제 결정에 간섭하시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곽승재, 너 지금 그 자리에 앉으니까 눈에 뵈는 게 없지? 아버지한테 무슨 말버릇이야?”곽현수의 얼굴빛이 순간 어두워졌다.“너 요즘 고은서 때문에 골탕을 먹은 게 한두 번이야? 심지어 GS그룹 주식까지 영향받게 했잖아. 내가 제때 귀국하고 이사회에서 네 편을 들어주지 않았으면 넌 지금 이 자리에 못 있어!”곽현수는 점점 더 흥분해 했다.“그런데 나한테 감사하기는커녕 내가 안배한 일까지 거역하려는 거야?”곽승재는 이마를 짚고 담담하게 말했다.“귀국하시지 않아도 이사회 주주들은 제가

  • 어게인, 비긴   제425화

    폰을 들고 확인해 보니 육현석한테서 걸려온 전화였다.아마 이혼했다는 소식을 듣고 상황 파악을 하려고 전화를 건 모양인 것 같았다.그러나 그녀는 육현석이 자신의 기쁨을 함께 공감해 줄 적합한 상대라고 생각하지 않았기에 그냥 무시하기로 했다.그녀가 전화를 끊고 다시 자려고 할 때 육현석한테서 또 전화가 걸려왔다.‘웬 고집이래?’요즘 육현석의 태도가 꽤 마음에 들었던 고은서는 고민하다가 끝내는 전화를 받았다.“육현석 씨, 무슨 급한 일이라도 있어요?”수화기 너머로 시끄러운 소리가 들려왔다.“형수님, 형이랑 다퉜어요? 형이 오늘따라 좀 이상해 보여서 걱정되는데 혹시 형한테 전화 한 통만 걸어줄 수 있을까요?”‘아직 이혼한 사실을 모르는 건가?’“죄송하지만 저 곽승재랑 이혼했어요. 더는 곽승재 일로 저한테 연락하지 않았으면 좋겠네요. 저랑 아무런 상관없는 일이니까요.”육현석은 고은서의 말에 순간 어안이 벙벙했다. 그는 이내 조용한 곳을 찾아 그녀에게 자세히 물었다.“형수님, 거짓말이죠? 이혼했다뇨? 형이 왜 형수님이랑 이혼해요? 지금 장난치는 거죠?”육현석은 믿을 수 없다는 듯 반복해서 물었다. 그도 마찬가지로 요 며칠 두 사람에 관한 기사를 보았었다. 그러나 기사의 여론이 곽승재에게 불리한 방향으로 나아가는 걸 확인한 그는 이내 기사를 퍼뜨린 사람이 고은서라는 걸 깨달았다.그 누구의 편을 들어도 합당하지 않은 타이밍이었기에 그는 그저 모르는 척하고 넘어가려고 했다. 그런데 기사가 올라온 지 삼일 정도밖에 되지 않았는데 두 사람이 벌써 이혼했다는 게 도무지 믿기지 않았다.“제가 이런 일로 장난칠 이유가 없잖아요. 그리고 저 이젠 육현석 씨 형수가 아니니까 호칭을 바꿔줬으면 좋겠어요. 이후로 은서 씨라고 편하게 불러주세요.”“형...”육현석은 차마 은서 씨라는 말이 입 밖으로 나오지 않았다.“대체 어떻게 된 일이에요? 왜 갑자기 이혼한 거예요? 설마 배 속의 아이 때문이에요?”전에 박지연한테서 곽승재가 고은서의 아이를 강제로 없애려고 한

Latest chapter

  • 어게인, 비긴   제1116화

    곽승재의 말을 들은 마재경의 얼굴에 두려운 기색이 살짝 감돌았다.하지만 문득 뭔가를 떠올린 듯 그녀는 콧방귀를 뀌며 말했다.“협박하지 마세요. 가벼운 부상에 불과하니 유능한 변호사를 선임하면 기껏해야 3년 감옥에 있고 나올 거예요. 당신들이 주는 기회 따위는 필요 없어요.”마재경은 인정하지 않겠다고 마음 먹은 것이 확실했다. 3년 감옥살이로 거액의 돈을 바꾸는 것이 나쁘지 않다는 판단이었다.이로 미루어 보면, 마재경은 정말 누군가의 사주를 받은 것이다.고은서가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3년 청춘을 돈과 바꾸는 것이 이익이라고 생각해? 영원히 지워지지 않는 오점이 생겨 네가 어디 가든 따라다닐 텐데.”“게다가 그렇게 큰돈이 어디서 생겼는지 출처를 밝히지 못하면 경찰이 가만둘 것 같아? 일단 경찰이 알아내면 너의 공범도 잡히고 너는 비호죄까지 추가될 텐데. 정말 그럴 만한 가치가 있을까?”고은서의 말에 마재경은 약간 망설였지만 여전히 자기가 혼자 한 것이라고 고집했다. 돈도 어디서 입금됐는지 모르겠고, 어쩌면 팬 중 한 명이 보낸 것일 수도 있다고 둘러댔다.다소 김빠진 고은서는 곽승재와 함께 밖에 나가 마재경의 약점을 찾아보려 했다.그때 곽승재가 입을 열었다.“죄를 지었다는 것이 너의 고향에 알려지면 돈을 들고 금의환향하려는 생각이 실현될 수 있을까?”이 말에 마재경은 허를 찔린 듯 눈에 공포가 감돌았고 몸도 미세하게 떨리기 시작했다.잠시 후, 곽승재의 얼음장 같은 시선 속에서 마재경은 철저히 무너졌다.“말할게요. 전부 다 털어놓을게요...”...여씨 저택.여시은이 수액을 다 맞고 여재훈도 약을 먹은 뒤였다.가정의가 떠나자, 여시은은 여재훈의 옆에 앉았다.“아빠, 왜 그러세요? 계속 미간을 찌푸리고 계시는데, 상처 부위가 많이 아프신 거예요?”여재훈은 순하고 사리에 밝은 딸을 바라보며 결국 참지 못하고 물었다.“시은아, 네가 주워 온 길고양이가 너랑 그리 친하지 않은 것 같더구나?”여시은은 순진무구한 눈빛을 한 채 고개를 끄

  • 어게인, 비긴   제1115화

    마재경은 잠깐 멍하니 있더니 곧바로 사주한 사람이 없다고, 그냥 미워서 괴롭히고 싶었다고 말했다.그러자 고은서는 코웃음을 쳤다.“변명이 너무 억지스럽다는 생각이 안 들어?”“너와 곽승재가 단순히 금전적 관계였던 건 말할 것도 없고, 설령 진심으로 좋아하는 감정이 생겨서 잘해보고 싶은데 외면당했다고 해도 곽승재한테 화풀이해야 하는 거 아닌가?”고은서의 질문에 마재경은 얼굴이 부자연스럽게 일그러졌다.“나는 곽 대표님을 존경했을 뿐 다른 마음은 없었어.”“그런데 너는 나와 곽 대표님의 스캔들 때문에 나를 질투했고, 나의 팬을 돈으로 매수해 나를 반죽음으로 만들었어. 이런 짓을 한 너에게 복수하면 안 되나?”‘흉기 난동 사건까지 내 탓으로 돌리려 하다니?’고은서는 더욱 어이없었다.“마재경, 머리는 장식품으로 달고 다니나? 내가 곽승재를 어떻게 생각하는지 누구나 다 알아. 내가 질투심 때문에 돈으로 사람을 매수해 너를 해칠 이유가 없잖아.”“그리고 정말 나를 의심했다면 왜 경찰에 신고하지 않았어? 나를 경찰서에 넘겨서 죄를 묻는 게 더 나았을 텐데.”마재경은 얼굴이 빨개졌지만 여전히 우겼다.“너는 돈도 많고 옆에 힘 있는 남자들도 많은데, 내가 어떻게 증거를 찾을 수 있겠어?”고은서는 다시 한번 어이없어 웃었다.“증거도 없다는 거네. 그러면 무슨 근거로 나를 의심해? 나한테 피를 뿌린 것도 모자라 잔인하게 죽이려고까지 했잖아.”“‘눈에는 눈, 이에는 이’라고 내가 칼에 찔려 과다 출혈로 죽을 뻔했으니 같은 방식으로 너한테 되갚아주고 싶었어.”마재경은 고은서가 정말 자기를 해치기라도 한 것처럼 원한을 쏟아냈다.고은서는 더 이상 그녀와 논쟁을 이어갈 생각이 없다는 듯 손을 내저었다.“사주한 사람이 없다고 계속 우기면 너의 남은 인생은 감옥에서 썩게 될 거야. 인플루언서로 돌아갈 수 없는 것은 물론 자유도 잃게 되겠지.”“너!”“협박으로 들릴지 모르지만, 네 말대로 나에겐 돈도 많고 곁에 힘 있는 남자들도 많아.”이 말을 들은 마재경은

  • 어게인, 비긴   제1114화

    “집에서 모시러 오셨으니 저는 이만 가보겠습니다. 경찰서에 상황을 알아보러 가야 해서요.”그녀가 식사 자리에서 여시은을 용서할 수 없다고 분명히 밝혔기 때문에 여재훈은 크게 놀라지 않았고 더 이상 설득도 하지 않았다.“고은서 씨, 이번 일은 저와도 상관이 있으니 같이 가도록 해요.”하지만 고은서는 완곡하게 거절했다.“아닙니다. 상대가 저를 노린 것이니 제가 가면 됩니다. 다치셨으니 일찍 들어가 쉬십시오.”그녀의 단호한 태도에 여재훈은 더 이상 고집하지 않았다. 다만 소식이 있으면 알려달라고 했다.고은서가 인사하고 자리를 뜨려는 순간, 여씨 가문의 가정의가 진료실에서 나오더니 호들갑을 떨었다.“여 대표님, 앞으로 이런 무모한 행동은 삼가세요. 이번에는 동맥을 다치지 않아서 다행이지만, 혈액형도 특이한데 대량 출혈이라도 발생하면 이 작은 병원에서 혈액을 공급받지 못했을 거예요.”‘혈액형이 특이하다고?’고은서도 희귀한 혈액형이었다. 그녀가 여재훈의 혈액형을 물어보려 할 때 여시은이 애교 섞인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그러게요. 아빠, 몸을 좀 아끼세요. 너무 걱정되고 무서워요...”이 광경을 본 고은서는 말없이 떠나갔다....마재경이 뿌린 피가 그녀의 몸을 명중하지 못했는데도 여기저기 피가 튀어 불쾌한 냄새가 났다.곽승재가 경찰서에 같이 가자고 했기 때문에 고은서는 먼저 라이트문 아파트로 돌아가 꼼꼼히 씻은 후 깨끗한 옷으로 갈아입었다.곽승재는 빛의 속도로 달려왔다. 고은서가 대충 차려입고 경찰서에 도착한 지 얼마 안 돼서 허둥지둥 달려오는 그의 모습이 보였다.곽승재는 얇은 미디엄 코트를 입고 있었는데, 매끈한 핏 덕분에 더 훤칠해 보였다. 그의 잘생긴 얼굴에는 걱정하는 기색이 살짝 감돌았다.그는 고은서를 보자마자 상처부터 확인했다.곽승재의 따뜻한 손이 피부에 닿자, 고은서는 약간 불편한 듯 그의 손을 살짝 밀어냈다.“정말 괜찮아. 살짝 긁혔을 뿐이고, 이미 약도 발랐어.”곽승재는 손을 거두어들였지만 눈은 그녀를 떠나지 않았다.말쑥

  • 어게인, 비긴   제1113화

    지난번 여씨 저택에서 여시은이 쿠아에게 할퀴어 상처를 입었을 때 이 의사를 본 적이 있었다.여시은은 아버지가 다쳤다는 소식을 듣고 자기 몸 상태도 생각할 겨를이 없이 병원으로 달려온 모양이다. 가정의도 걱정돼서 따라나섰을 것이다.“시은아, 왜 여기까지 왔어? 괜찮다고, 금방 돌아갈 거라고 말했잖아.”여재훈이 나무라듯 말했다.“아가씨께서는 대표님이 병원에 계신다는 소식을 듣자마자 수액을 뽑아버리고 운전기사에게 빨리 병원으로 데려다 달라고 하셨어요.”가정의가 설명을 보탰다.역시 그랬다. 여시은은 눈이 빨갛게 충혈되고 예쁜 얼굴에 긴장과 걱정이 가득했다.“아빠, 대체 어떻게 된 거예요? 어쩌다 다치셨어요?”여재훈은 고은서의 말을 듣고 딸에 대한 의심이 생겼지만, 그녀의 걱정스러운 모습을 보고 사람들 앞에서 추궁하지는 않았다.여재훈이 부드러운 목소리로 대답했다.“작은 사고가 있었어. 이제 괜찮아.”여시은은 조금 안심된 듯했다. 그제야 진료실에 다른 사람이 있다는 것을 알아챈 그녀는 의사와 간호사에게 인사한 뒤 고은서에게로 시선을 돌렸다.리셉션이 끝난 지 며칠 지났지만 두 사람의 대면은 이번이 처음이었다.리셉션 때보다 여시은은 확연히 풀이 죽은 상태였다. 창백한 얼굴에 화장기 하나 없었고, 입술에도 각질이 일어나 있었다.게다가 여재훈에게 무슨 일이라도 생길까 봐 전전긍긍하는 모습은 살짝 건드리면 깨지는 도자기 인형처럼 취약해 보였다.도대체 어떻게 이런 완벽한 연기를 펼칠 수 있는 건지?민시후의 부하들이 여시은에게 조현병이 없다는 걸 알아내지 못했더라면, 여시은이 이중인격을 가진 게 아닌지 의심했을 정도였다. 순진무구한 인격과 잔인하고 변태적인 인격 말이다.하지만 여시은은 조현병 환자가 아닌 게 분명했다. 왜냐하면 그녀의 눈가에 차가운 기운이 스쳐 지나갔기 때문이다.비록 순간적으로 스쳐 지나간 것이었지만 고은서는 정확히 포착했다.“고은서, 너 때문에 아빠가 다치신 거야?”여시은은 예전처럼 친한 척하지 않고 화난 목소리로 물었다.고은서가

  • 어게인, 비긴   제1112화

    의사가 여재훈의 상처를 처치하는 사이, 고은서의 휴대폰이 울렸다.번호를 보니 곽승재였다.고은서는 여재훈에게 말하고 복도로 나가 전화를 받았다.“은서야, 너 사고를 당했다며? 너와 여 대표님이 모두 다쳤다고?”곽승재가 다급히 물었다.임신 오해 사건 이후, 두 사람이 모든 것을 터놓고 얘기한 뒤로 그녀를 몰래 보호하던 인원을 철수한 상태였다.하지만 운전기사는 여전히 주민기가 배치한 인원이어서 고은서에게 무슨 일이 생기면 바로 알 수 있었다.고은서는 어디서 들었는지 캐묻지 않았다.“괜찮아. 마재경이 갑자기 유일 투자은행 주차장에서 나를 습격했어. 여재훈 씨가 막아주다가 팔을 다치셨고.”“나는 지금 출장 중이라 경찰서 쪽에 다른 사람을 보냈어.”곽승재는 무거운 목소리로 말했다.“지금 바로 해성으로 돌아갈게.”고은서는 급히 돌아올 필요가 없다고 말했다.“여긴 별일 없으니까 일에 집중해. 여재훈 씨의 상처 처치가 끝나면 경찰서로 가서 마재경을 만날 거야.”“이쪽 일은 거의 마무리됐어. 내가 돌아가면 같이 경찰서에 가자.”곽승재는 설명을 이어갔다.“지난번 마재경이 다쳤을 때 병원을 방문해 더 이상 협조가 필요 없다고 통보하고 충분한 보상금도 지급했어.”“다시는 네 앞에 나타나 존재감을 과시하지 말라고 몇 번 경고했는데 갑자기 나타난 걸 보면 배후에 조종자가 있는 게 아닌지 의심스러워.”곽승재는 차분한 목소리로 분석을 이어갔고, 고은서도 어느 정도 수긍했다.따져보면, 마재경은 돈 때문에 곽승재와 손잡은 것이고 그녀와 깊은 원한이 없었다.협력 관계가 끝났으면 적당한 선에서 물러나야 정상이지, 이렇게 위험한 방식으로 그녀에게 복수할 이유가 없지 않은가?하지만 마재경이 진심으로 곽승재를 좋아하게 됐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천천히 사랑을 키워나가고 싶었는데 곽승재가 갑자기 관계를 끊자고 하니 그 분노를 고은서에게 쏟아냈을 수도 있다.고은서가 이 가능성을 말하려는 순간, 간호사가 문을 열고 나오더니 안에 있는 환자분의 부탁이라며 그녀의 상처

  • 어게인, 비긴   제1111화

    ‘분명 넘어뜨렸는데.’고은서는 마재경이 이렇게 빨리 일어날 줄은 몰랐고, 가위를 들고 달려들 줄은 더욱 생각지 못했다.피하기엔 이미 늦은 상황이었다. 고은서는 다급한 마음에 전기충격기를 꺼내 마재경의 몸에 들이댔다.“조심해요.”고은서와 마재경이 전기충격기와 가위를 손에 들고 서로 공격하려는 순간, 우람한 체구의 남성이 황급히 달려왔다. 여재훈이었다.그는 고은서를 확 끌어당기고 마재경을 밀쳐냈다.쨍그랑! 전기충격기가 땅에 떨어지며 마재경의 몸에 닿았고, 감전된 마재경은 비명을 질렀다.잠시 비틀거리던 마재경은 눈에 핏발을 세우고 다시 가위를 휘두르며 덤벼들었다.고은서가 마재경을 걷어차려고 다리를 뻗는 순간, 여재훈이 자기 팔로 가위를 막아 그녀를 보호했다.그의 넓은 어깨는 웅대한 산처럼 든든해 보였고, 어린 시절 외할아버지 품에 안겼을 때처럼 피난처 같은 안정감을 주었다.짝! 가위가 여재훈의 팔을 찌르며 옷이 찢어지는 소리가 들렸다. 여재훈은 잽싸게 마재경을 발로 걷어찼다.“여재훈 씨, 괜찮으세요?”정신을 차린 고은서가 다급한 목소리로 물었다.여재훈은 평온한 표정으로 대답했다.“괜찮아요.”이때 경비원 몇 명이 달려와 마재경을 제압했다.고은서는 여재훈의 팔을 살펴보았다. 재킷과 셔츠가 찢기고 기다란 상처에서 피가 흘러나오고 있었다.고은서는 가슴이 아려와 다급히 말했다.“다치셨네요. 빨리 병원 가서 싸매야 해요.”“고은서 씨도 다쳤으니 같이 가요.”여재훈이 고은서의 쇄골 부위를 가리키며 말했다.아무 느낌도 없었는데, 여재훈의 말을 듣고 나니 쇄골 근처 어깨죽지 부위에서 얼얼한 통증이 느껴졌다.손으로 만져보니 피는 나지 않는 듯했다. 오늘 카라 없는 캐주얼 셔츠를 입은 까닭에 마재경이 가위를 휘두를 때 살짝 긁힌 듯하다.“저는 연고만 바르면 될 것 같아요. 어서 병원 가요.”고은서는 경비원에게 마재경을 경찰서에 넘기라고 말했다.그러고는 기사를 불러오고 여재훈과 함께 뒷좌석에 탔다.여재훈의 팔뚝에 번진 핏자국을 보며 고은서는

  • 어게인, 비긴   제1110화

    여재훈도 자리에서 일어났다.“제가 은서 씨를 회사까지 모셔다드리겠습니다.”이 식사는 여재훈이 초대한 자리였으니 끝까지 책임지고 고은서를 안전하게 회사까지 돌려보내는 게 맞다고 생각했다.돌아가는 길에 두 사람은 거의 말을 하지 않아 분위기가 조금 무거웠다.고은서는 여재훈이 자기 딸이 고양이를 학대했을 수도 있다는 사실을 받아들이기 힘들어한다는 걸 알기에 여재훈한테 혼자 생각할 시간을 줬다.얼마 지나지 않아 그들은 유일 투자은행의 주차장에 도착했다.“은서 씨, 곽승재 씨랑 현재 무슨 사이이신가요?”여재훈이 물었다.고은서는 사실대로 답했다.“그냥 평범한 친구 사이예요.”여재훈은 고개를 끄덕이더니 말했다.“승재 씨는 은서 씨를 많이 신경 쓰는 것 같더군요.”연회 때 곽승재가 고은서를 적극적으로 감싸는 모습을 모두가 똑똑히 봤다.이에 대해 고은서도 부정하지 않았다.“그건 곽승재 씨의 일방적인 감정이에요. 저는 그 사람한테 이성적인 감정은 없어요.”“시은이가 승재 씨를 꽤 마음에 들어 하더라고요. 저한테도 말한 적 있어요. 그와 결혼하고 싶다고.”여재훈은 말을 이었다.“아마 시은이의 질투심도 여기서 시작된 것 같아요. 그래서 은서 씨를 해하려 했던 걸지도 모르죠. 하지만 쿠아는 시은이가 가장 아끼던 반려동물이에요. 시은이가 이유 없이 해칠 리는 없을 겁니다.”고은서는 그 말의 속뜻을 곧바로 이해했다.여재훈의 말은 여시은이 고은서를 향한 질투 때문에 공격적으로 나왔을 수는 있어도, 쿠아는 여시은이 키우는 반려동물이기에 쿠아를 해칠 사람은 아니라고 믿는다는 것 같았다.고은서는 그저 씁쓸하게 웃었다.가족이라는 필터는 쉽게 사라지지 않는다. 하지만 언젠가는 여재훈도 여시은의 본모습을 보게 될 날이 올 것이라 믿었다.고은서는 더 말해봤자 의미가 없다는 걸 알기에 여재훈한테 간단히 인사를 하고 차에서 내렸다.차에서 내린 고은서는 어디선가 여자 하나가 스쳐 지나가는 듯한 그림자를 본 것 같았고, 공기 중에서 약간의 피비린내도 느꼈다.그녀는 주

  • 어게인, 비긴   제1109화

    여재훈은 고은서를 바라보며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을 하고는 물었다.“시은이가 또 무슨 일을 했다는 거죠?”마침 노 사장님이 식전 반찬을 가져다주며 주문한 대표 요리도 곧 준비된다고 알렸다.고은서는 계속해서 말했다.“재훈 씨, 저희 먼저 식사부터 하고 이야기할까요?”고은서는 몹시 배가 고팠다. 만약 지금 이 이야기를 꺼내면 두 사람 모두 식사할 마음이 사라질 것 같았다.여재훈은 고은서의 제안에 동의했다.이 개인 요리 식당의 음식은 색다른 풍미가 있었고, 고은서는 배부르게 먹었다.반면, 여재훈은 거의 먹지 않았다. 마치 그는 고은서를 동반하기 위해 자리를 함께한 것처럼 보였다.식사 중에는 가끔 일상적이고 가벼운 이야기를 나누기도 했다.약 삼십 분 후, 고은서는 젓가락을 내려놓으며 배가 너무 부르다고 말했다.아직 못다 한 이야기가 남아있지만, 여재훈은 배부른 고은서를 보며 묘한 만족감을 느꼈다.여재훈은 그녀가 배부르게 먹는 모습을 보는 것만으로도 기뻤다.여재훈은 고은서의 찻잔에 물을 따라주며 물었다.“우리 시은이가 또 무슨 잘못을 저질렀던 거죠?”고은서는 찻물을 한 모금 마신 뒤 숨을 깊이 들이쉬고는 여시은이 고양이를 학대한 일에 대해 털어놓았다.“저번에 제가 쿠아 때문에 경찰에 신고를 했었잖아요?”고은서가 말했다.“전 정말 시은이에게 누명을 씌운 게 아니에요. 여시은이 제 눈앞에서 쿠아의 입술을 다치게 했어요. 그리고 평소에도 쿠아를 자주 괴롭혔어요.”고은서의 말을 들은 여재훈은 자신의 귀를 의심했다.“시은이는 쿠아를 그렇게 아꼈어요. 집에서도 항상 품에 안고 다녔고, 쿠아가 뭐라도 먹고 싶어 하면 직접 손으로 먹여줬다니까요. 시은이가 어떻게 그런 짓을 했겠어요?”여재훈은 믿지 못하겠다는 듯이 물었다.“은서 씨, 혹시 오해가 있는 건 아니에요? 뭔가 착각하신 거 아닐까요?”평소 여시은은 얌전한 딸의 이미지를 잘 연기해 왔기에 여재훈은 그녀를 철석같이 믿고 있었다.“재훈 씨가 믿기 힘든 거 알아요. 아버지 입장에서야 딸이 그

  • 어게인, 비긴   제1108화

    지난번 숙모에게 가방을 선물했을 때, 숙모가 엄청나게 기뻐했던 모습이 순간 떠올랐다.그래서 이번엔 삼촌에게도 뭔가를 사서 드리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고은서는 노 사장님에게 코담배병을 어디서 샀는지 물어봤다. 그리고 가족에게 드릴 선물로 하나 사고 싶다고 말을 덧붙였다.“이건 친구가 선물한 거라 어디서 샀는지는 나도 잘 모르겠네.”노 사장님은 미안한 듯 말했다.고은서는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괜찮아요, 그냥 예뻐서 한번 여쭤본 거예요. 나중에 백화점 가서 한번 골라볼게요.”“아가씨는 참 효심이 깊구먼.”노 사장님은 칭찬을 몇 마디 건넨 뒤, 주문한 메뉴를 주방으로 가져갔다.“은서 씨 아버님께서 코담배병을 좋아하시나요? 선물하시려고요?”여재훈이 부드럽게 물었다.고은서는 고개를 저었다.“전 아버지가 없어요. 삼촌께 드리려는 거예요.”여재훈은 조금 놀란 표정이었다.그는 고은서를 몇 번밖에 만나지 못했기에 그녀의 가정사에 대해서는 잘 알지 못했다. 그래서 그녀에게 아버지가 없다는 사실도 오늘 처음 들었다.“죄송합니다. 그런 줄도 모르고...”여재훈은 곧바로 사과했다.고은서는 별일 아니라는 듯 웃었다.“괜찮아요. 저희 가족끼리도 잘 지내고 있어요.”착각일지도 모르지만, 여재훈은 고은서의 그 미소는 어딘가 익숙하다는 느낌을 받았다.그때 여재훈의 휴대전화 벨 소리가 울렸다.전화번호를 확인한 그는 곧바로 정신을 차리고 전화를 받았다.“시은아, 왜 그래... 주사 맞는 게 당연히 좀 아프지. 하지만 주사를 안 맞으면 어떻게 낫겠어... 알겠으니깐 떼쓰지 말고, 의사 말 잘 들어.”전화를 끊고 나서 여재훈은 고은서에게 간단히 상황을 설명했다.“시은이가 아픈데 주사 맞기 싫다고 하네요.”고은서는 여시은의 이름에 반응이 컸다. 예전에 여시은에게 학대받다 죽은 쿠아가 떠올랐다. 그 기억 때문에 속이 불쾌해지고 분노가 스멀스멀 올라왔다.그녀는 말없이 찻잔을 들어 한 모금 마셨다.여재훈은 고은서의 반감을 눈치채지 못할 리 없었다.그는 조심

Explore and read good novels for free
Free access to a vast number of good novels on GoodNovel app. Download the books you like and read anywhere & anytime.
Read books for free on the app
SCAN CODE TO READ ON APP
DMCA.com Protection Statu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