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시후의 말을 들은 고은서는 저도 모르게 마음이 찔렸다.그러나 민시후에게 굳이 설명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한 그녀는 얼버무리며 넘어가려고 했다.“나 지금 바쁘니까 나중에 회사에서 봐.”그녀가 전화를 끊고 고개를 돌려보니 곽승재는 이미 병실 밖으로 나갔고 주민기 혼자 그녀를 기다리고 있었다.“사모님, 어제 호텔 블랙박스를 확인해 봤는데 폰을 방에 두고 오신 것 같은데 사람 시켜 가져오라고 할까요?”“네, 수고해주세요. 그리고 저 이젠 그쪽 대표님 아내가 아니니까 사모님이라고 부르지 말아 주세요.”고은서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주민기는 입을 꾹 다물고 더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그는 두 사람이 이혼한 사실을 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호칭을 바꿀 용기가 나지 않았다. 잘못하면 곽승재 눈 밖에 나면서 다음 달 보너스까지 잃게 될 수 있는 일이었으니까 말이다.‘정말 먹고 살기 힘드네.’곽승재의 비서 자리가 겉으로는 엄청 훌륭한 직위 같아 보이지만 사실 시시각각 그의 눈치를 봐야 했다. 주민기는 속으로 눈물을 머금었다.고은서와 주민기가 병원에서 나왔을 때 곽승재는 이미 차 안에 앉아있었다.주민기가 자연스럽게 조수석에 앉는 바람에 고은서 어쩔 수 없이 곽승재와 함께 뒷좌석에 앉게 되었다.곽승재는 아이패드로 이메일을 확인하고 있었다.“의사 선생님이 전에 다쳐서 푹 쉬어야 한다고 했잖아. 왜 따라가려고 그래?”곽승재는 그녀를 힐끔 보고는 말했다.“나한테 아무런 감정도 없다며. 왜 갑자기 날 관심하는 건데?”‘내가 걱정을 하지 말았어야 했어.’“혹시 더 심하게 다치면서 내 책임이라고 트집이라도 잡을까 봐 무서워 그래.”곽승재는 순간 말문이 막혔다.경찰서.곽승재가 경찰서까지 찾아온 이유를 전해 들은 책임자가 직접 마중하러 나왔다.그들이 서로 인사를 나누고 있을 때 고은서는 피해자로서 규정대로 경찰 조사에 협조했다.그녀가 조사를 끝마치고 나올 때 마침 강인한 태도로 심문을 거부하는 성아연을 보았다.“변호사가 오기 전까지 당신들의 물음에 한
“물론이죠.”상대방은 곽승재의 요구를 아주 흔쾌히 받아줬다.아직 간단한 심문 단계이기 때문에 단독으로 대화할 수 없을 정도는 아니었다.이를 본 성아연은 더 긴장되었다.“난 저 사람이랑 할 얘기가 없어요. 내가 시킨 일이 아니라니까요. 저는 억울하다고요! 저 사람 저를 해치려 하는 게 분명해요. 경찰로서 제 안전을 보장할 의무가 있잖아요!”“곽 대표님은 법과 규칙에 어긋나는 일을 하지 않는 정직한 사업가입니다. 성아연 씨를 해칠 일도 없고요. 그저 어제저녁에 있었던 일로 몇 가지 확인할 게 있다고 하셔서 그러는 거예요. 걱정하지 마세요.”“가시죠, 성아연 씨.”곽승재가 덤덤하게 입을 열었다.성아연은 어쩔 수 없이 방으로 다시 들어갔고 고은서와 곽승재도 그녀를 따라 들어갔다.안에 있던 직원은 자리를 비켜주면서 문밖을 지키고 있었다.심문실은 아주 깔끔했는데 책상 외에 티 테이블과 소파도 있었다.주민기는 옆에서 대기하고 있었고 곽승재는 고은서를 끌고 함께 소파에 앉았다.“성아연 씨도 앉으시죠.”성아연은 곽승재가 무슨 속셈인지 모르고 있었기에 쉽게 경각심을 풀지 않았고 앉으려고도 하지 않았다.곽승재는 그녀를 강요하지 않았다.“성아연 씨, 말해보시죠. 왜 사람 찾아 고은서를 해치려 했는지.”그의 담담한 목소리에서 무언의 위압감이 느껴졌다.성아연은 애써 긴장되는 마음을 진정시키며 모르는 일이라고 시치미를 뗐다.“내가 지시한 일이 아니에요. 그 두 사람이 저를 모함하려고 거짓말하는 거라고요!”“계좌 이체 기록이 없다고 우리가 널 조사해내지 못할 거라고 생각했나 봐?”고은서가 냉소를 흘리며 말했다.“새 번호로 두 사람한테 연락하고 현금으로 거래를 했다며? 그 두 사람 이미 거래장소까지 다 자백했어. 네가 아무리 모자랑 마스크를 쓰고 갔다고 해도 소용없어. 경찰들의 조사능력을 농락하는 것도 아니고. 너 이젠 빠져나갈 곳이 없단 말이야.”사실 이 모든 건 주민기한테서 들은 것이다. 경찰들이 이 모든 걸 조사하고 결론을 내리기에는 시간이 너무
성아연은 눈물을 흘리며 말했다.“내 순간 정신이 나갔었나 봐. 난 두 사람한테 그저 너에게 겁만 주라고 시켰어. 절대 널 해칠 생각은 없었어.”그녀의 말을 들은 고은서는 콧방귀를 뀌었다.“그때 당시 두 사람을 모습을 보아서는 나한테 겁만 주는 데서 그치지 않을 것 같았는데.”“은서야, 난 진짜 너에게 겁만 주라고 했어. 그냥 너한테 쌓인 화를 풀고 싶었을 뿐이야. 요즘 더러 날 전처럼 친하게 대해주지 않은 데다가 네 할아버지랑 얘기 나누는 것조차 못하게 했잖아. 그래서 네 숙모가 우리 집까지 찾아와서 난동을 부린 게 다 네 아이디어인 줄 알고 오해했던 거야. 나도 네 숙모 시달림에서 벗어나기 위해 이런 계획을 세운 거야.”성아연은 붉어진 눈시울을 하고 아련한 눈빛으로 고은서를 바라보며 말했다.“은서야, 사과하라면 하고 보상금도 얼마든지 줄게. 전에 내가 무슨 일을 해도 용서해준다고 했잖아. 다시는 안 그럴게. 그러니까 한 번만 용서해줘...”고은서는 자신을 향해 손이 발이 되도록 비는 성아연의 비참한 모습을 보며 약간 속이 불편했다.전에 그녀는 성아연을 베프라고 생각하면서 뭐든지 그녀에게 공유했었다. 비록 욕심이 많긴 했으나 다 이해하고 받아줄 수 있었다.특히 그녀가 곽승재의 마음을 사로잡을 수 있도록 도움을 주면서 곽승재와 백유미를 대신 욕해줄 때 감동 받기도 했다. 심지어 성아연이 그 어떤 일을 해도 다 용서해줄 수 있다고까지 생각했었다.그러나 이번 생에 다시 눈을 뜬 후, 고은서는 성아연의 모든 모습이 다 거짓이라는 걸 알게 되었고 그녀가 자신을 이용하면서 해치려 했다는 걸 깊이 깨달았다.고은서는 성아연의 각종 행위가 너무 혐오스러웠으나 그녀와 인연만 끊고 살려고 했지 절대 그녀를 해치려고 한 적은 없었다.그러나 성아연은 도를 넘는 행위를 계속 지속해왔다.GS 그룹 연회에서 성아연은 일부러 그녀를 여론의 중심으로 몰아넣었고 또 MQ를 모함하기 위해 고준석을 온갖 감언이설로 홀리려고 했다가 실패하자 이내 타깃을 단은숙으로 바꾸었다.
“네가 싫으니까!”성아연의 원망이 담긴 목소리가 방에 울려 퍼졌다. 그러나 그녀는 이내 곽승재가 눈살을 찌푸린 걸 발견했다.성아연은 자신의 속마음을 너무 직설적으로 드러냈다는 걸 깨달았다. 하지만 이미 이 말을 내뱉은 이상 더는 돌아설 길이 없었다.“내가 널 좋아해서 너랑 친구 한 줄 알아? 다 아빠가 강요한 거야! 네 할아버지가 널 제일 아낀다고 너한테만 잘해주면 할아버지가 나한테도 잘해줄 거라고 날 강요한 탓이라고!”성아연이 분노가 들끓은 눈빛으로 고은서를 쏘아보며 말했다.“같은 여자인데 왜 넌 항상 공주 대우를 받고 난 마치 하인처럼 네 시중을 들어야 하는 건데? 무슨 일이든 네가 했다면 다들 칭찬하기 일쑤였고 난 그저 너의 배경판처럼 네 뒤에 서 있을 수밖에 없었어. 그런데 나한테 돌아오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고!”“내가 너보다 못난 곳이 어딘데? 능력도 너보다 차하지 않잖아. 그런데 학교에 있는 남자애들은 네 연락처를 얻기 위해 나한테 다가올 뿐 날 좋아해서 다가오는 사람은 거의 없었어! 나한테 호감을 갖고 있던 남자애들도 너만 보면 다 너한테로 몰려들잖아. 네가 나였어 봐. 어떤 느낌인지!”고은서는 눈을 부라리고 자신을 향해 호통치는 성아연을 보며 무슨 해야 할지 몰랐다. 그녀는 성아연이 자신을 이토록 미워할 거라고는 생각 못 했다.“고작 그까짓 일로 나와 우리 집안을 망치려 했던 거야?”고은서가 물었다.“그래!”성아연은 일이 이렇게 된 이상 더는 변명하고도 싶지 않았다.“고은서, 넌 네가 얼마나 혐오스러운지 모를 거야. 난 시시각각 널 짓밟아버리고 싶었다고. 너도 나처럼 그 누구의 관심도 받지 못하고 혼자 고독하게 아등바등하는 걸 느껴봐야 한다고!”성아연은 갑자기 피식 웃으면서 말을 이어갔다.“네가 곽승재 때문에 자존심을 꺾을 때마다 내가 속으로 얼마나 좋아했는지 모르지? 너도 더는 도도한 공주가 아니라 수단을 가리지 않고 남자의 사랑을 갈망하는 사람이라고, 그런데 그 남자는 너한테 눈길조차 주지 않는다고 내가 얼마나 속 시
고은서는 성아연의 비아냥거리는 말을 듣고서도 별다른 감정이 느껴지지 않았다.그녀는 성아연이 왜 백유미랑 손을 잡고 자신을 해치려 하는지 이해가 되지 않았었다. 성씨 집안도 꽤 괜찮은 집안이어서 돈이 모자랄 리는 없었다. 그 말인즉슨 금전 때문에 그녀를 해치려 할 일도 없다는 것이다.게다가 성아연이 백유미와 손을 잡았다고 해도 고은서한테서 얻은 것보다 더 얻을 수는 없었다.‘처음부터 날 싫어하면서 나를 친구라고 생각한 적이 없구나. 전생에 날 보러 정신병원에 단 한 번도 오지 않는 것도 다 이유가 있었던 거야.’“당신 인생은 당신 스스로 망친 거예요.”고은서가 아무 말도 하지 않자 옆에 있던 곽승재가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고씨 집안이 가져다주는 이득을 탐내지 않았으면 고은서한테 잘 보일 필요 없고 고은서랑 가까이 지낼 필요도 없잖아요. 그런데 고은서 곁에서 누릴 건 다 누리면서 다른 한 면으로는 고은서를 원망한다고? 너무 어이없지 않나요?”곽승재는 아주 담담하게 사실을 콕 집어 말했다.“게다가 방금전에는 고은서보다 못한 곳이 없다면서요. 그런데 왜 사람들은 그쪽보다 고은서를 더 좋아하는 걸까요? 한 사람뿐이 아니잖아요. 안 그래요? 그렇다고 모든 사람들이 다 보는 눈이 없는 건 아닐 거 아니예요.”성아연이 순간 말문이 막혔다.그녀는 곽승재가 고은서를 대하는 태도가 변했다는 걸 전해 들은 적이 있다. 그러나 지금처럼 고은서를 위해 자신을 반박할 정도로 변해 있을 줄은 생각도 못 했다.고은서도 약간 놀랐다. 평소에 자신과 상관없는 일이라면 입 한 번 뻥긋하지 않던 사람이 자신을 위해 나서준다는 게 차마 믿기지 않았다.“고은서가 그렇게 우수해 보인다면 설마 그때 당시 결혼한 것도 고은서를 사랑해서예요?”성아연이 일부러 물었다.그녀는 곽승재가 고은서를 좋아한 적이 없고 결혼도 고은서가 강요해서 한 것이라는 걸 빤히 알고 있었다. 지금 저 물음을 물어보는 건 일부러 고은서를 난감하게 만들기 위해서이다.“네.”고은서가 성아연에게 닥치라고 말
기사는 이미 밖에서 기다리고 있었고 고은서가 호텔에 두고 온 폰도 이미 사람 시켜 가져온 상태였다.그녀는 폰을 받아들고 고장 나지 않았는지 확인했다.“상처가 아직 다 낫지도 않았는데 병원에 돌아가 있어. 난 볼 일이 있어서 먼저 가볼게.”고은서는 옆에 있는 곽승재에게 말했다.“내가 다 나을 때까지 날 간병해주기로 했잖아. 어딜 가려는 거야?”“그냥 외상만 입었을 뿐이잖아. 주의하면서 푹 쉬면 곧 나을 거야. 굳이 옆에서 간병해줄 필요 없는 거 당신도 잘 알고 있잖아.”고은서는 자신보다 키가 훨씬 큰 곽승재를 올리 쳐다보면서 답했다.“그럼 계속 네 눈앞에 나타나도 된다는 뜻이지?”곽승재의 눈에서 약간의 기대가 보이는 듯했다.“그런 뜻은 아니야. 볼일 보고 병원으로 갈게. 약속대로 오늘 저녁까지는 간병해 줄 거야. 그런데 내일 퇴원하고 예원 별장으로 돌아갈 땐 혼자 가도록 해. 난 더는 따라가지 않을 테니까. 그리고 당신도 약속 지켜줬으면 좋겠어.”“고은서!”고은서가 한창 말하고 있을 때 갑자기 뒤에서 민시후의 목소리가 들려왔다.그는 오늘은 직접 운전하지 않았는지 뒷좌석에서 차창 밖으로 머리를 내밀고 그녀의 이름을 불렀다.그녀도 마침 ZY 그룹으로 가야 했기에 곽승재에게 먼저 간다고 인사하고는 민시후가 있는 차를 향해 걸어갔다.기사가 내려 자연스럽게 뒷좌석 문을 열어주었다. 고은서도 별다른 생각 없이 차에 올랐다.주차장을 나가면서 민시후는 백미러로 곽승재를 보면서 장난스러운 말투로 말했다.“네가 내 차에 오르는 걸 막지 않다니. 인내심이 점점 더 강해지는 것 같네.”고은서도 그의 말을 듣고 백미러로 곽승재를 보았는데 그는 차 옆에 한참 동안 서 있었는데 다쳐서일까, 약간 외로워 보였다.“경찰서에는 왜 온 거야?”고은서가 시선을 돌리고 민시후에게 물었다.“왜겠니? 당연히 네가 걱정되어서 온 거지.”민시후가 건들건들하게 말했다.고은서는 그의 속셈을 알아보고 어이없다는 듯 말했다.“너무 유치하다는 생각이 안 들어? 날 곽승재를
“성아연과 백아연이 어떤 사이든 이번 일을 쉽게 넘어가서는 안 돼.”곽승재가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알겠습니다, 대표님.”주민기가 공손하게 대답했다.곽승재는 방금전 고은서의 무덤덤해 하는 모습을 떠올릴 때마다 마음이 불편했다.분명 아무런 죄도 없는 무고한 사람인데 저런 깊은 악의를 겪어야 했다니.심지어 그는 전에 성아연을 지시한 사람이 고은서라고 굳게 믿고 있었다. 전에 고은서에게 변명할 기회조차 주지 않은 채 그녀를 비난했던 자신을 생각하면 할수록 가슴이 답답해 났다.주민기가 떠난 후, 곽승재는 육현석에게 연락했다.“여자들은 보통 어떤 선물을 좋아해?”육현석은 번호를 다시 한번 확인하고 의심하는 말투로 물었다.“승재 형? 승재 형 맞아? 혹시 납치라도 된 건 아니지?”곽승재는 그와 장난칠 기분이 아니었다.“쓸데없는 소리 그만하고 대답이나 해. 전에 여자 마음을 엄청 잘 안다고 잘난체하고 다녔잖아.”그러나 곽승재의 생각과 달리 육현석은 쉽게 입을 열지 않았다.“전에는 내가 방법을 알려줘도 들은 체도 하지 않았잖아. 한 번 잃은 기회가 다시 오지 않는다는 말이 있듯이 이번에는 안 알려줄 거야.”그의 말을 들은 곽승재는 의미심장하게 말했다.“전에 네 아버지가 나한테 네 결혼 상대를 알아봐달라고 부탁하셔서 이미 괜찮은 사람 한 분이랑 얘기 나눠봤는데 널 꽤 마음에 들어 하더라고. 내일쯤 시간 찾아서 네 아버지랑 얘기해 볼 생각인데, 괜찮겠어?”육현석은 그의 말을 듣자마자 불만을 토로했다.“형, 그거 협박이야! 나한테 지금 부탁하는 입장이잖아. 그러면 부탁하는 사람다운 태도를 보여야지. 왜 나를 협박하고 그러는 거야!”“그럼 내일 아버지랑 얘기 나눠 보도록 할게.”곽승재가 말하고 전화를 끊으려고 할 때 육현석이 큰소리로 다급하게 그를 말렸다.“곽승재! 그래 항복할게. 도와주면 될 거 아니야.”곽승재는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덤덤하게 말했다.“얼른 말해.”육현석은 심호흡을 하면서 흥분했던 마음을 가라앉히고 다시 입을 열었다.
육현석은 곽승재를 대신해 방법을 생각해주었다.“이름 있는 판다 기지로 가보는 건 어때? 아기 판다도 만져볼 수 있다던데. 비록 소비가 높고 시간제한도 있긴 하지만 형한텐 별문제가 아니잖아. 그러면 형수님도 판다를 보게 되어서 기뻐할 거고 형도 형수님이랑 데이트할 수 있는 기회가 생기게 되잖아. 안 그래? 어릴 적에 이루지 못한 소원을 지금 대신 이뤄주는 것과 같은데 형한테 고마워하지 않을까? 그렇게 되면 형한테도 새로운 기회가 생기게 되는 거지.”곽승재는 육현석의 아이디어가 꽤 마음에 들었다. 그런데 평소에 만나기만 해도 기분 나빠하는 그녀가 그와 함께 나가는 걸 원하는지가 제일 큰 문제였다.“형, 내 아이디어는 여기까지야. 형수님을 어떻게 설득하는가는 형이 생각할 문제고. 그런데 또 자존심 세우면서 명령하는 식으로 말하지 마. 형수님 그런 거 질색하는 거 알지? 부드럽게 같이 가자고 설득해봐. 언젠간 받아들일지도 모르잖아.”전화를 끊은 후, 육현석은 너무 대견하다는 생각이 들었다.‘형이 형수님을 관심해주면서 선물까지 준비해주려고 하다니. 너무 대견해.’육현석은 박지연에게 이 희소식을 전하려고 그녀에게 전화를 걸었다....민시후는 고은서와 함께 ZY 그룹으로 돌아가는 대신 단온 별장을 향했다.“여긴 왜 온 거야?”고은서가 어리둥절해 하며 물었다.“오늘 집 보러 온다고 어제 약속했잖아. 여기 보안이 좋아서 집주인이 아니고는 거의 들어오지 못해. 미리 이사 왔으면 어제 같은 사고를 당할 일도 없었잖아.”민시후는 콧방귀를 뀌고 말했다.어젯밤에 겪은 일이 이미 결론이 났음에도 불구하고 고은서는 여전히 떠올릴 때마다 가슴이 두근거리며 저도 모르게 무서워 났다.“상대가 날 해치려고 굳게 마음을 먹거든 나로서도 어쩔 수 없는 일이야.”그녀의 말을 들은 민시후는 어이없다는 듯 툴툴거렸다.“넌 왜 사람 보는 눈이 그렇게도 없냐. 친구를 사귀어도 하필 성아연처럼 종일 상대방 뒤통수를 치는 사람을 사귀냐.”틀린 말이 아니었다. 고은서가 성아연에게 당
지난번 숙모에게 가방을 선물했을 때, 숙모가 엄청나게 기뻐했던 모습이 순간 떠올랐다.그래서 이번엔 삼촌에게도 뭔가를 사서 드리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고은서는 노 사장님에게 코담배병을 어디서 샀는지 물어봤다. 그리고 가족에게 드릴 선물로 하나 사고 싶다고 말을 덧붙였다.“이건 친구가 선물한 거라 어디서 샀는지는 나도 잘 모르겠네.”노 사장님은 미안한 듯 말했다.고은서는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괜찮아요, 그냥 예뻐서 한번 여쭤본 거예요. 나중에 백화점 가서 한번 골라볼게요.”“아가씨는 참 효심이 깊구먼.”노 사장님은 칭찬을 몇 마디 건넨 뒤, 주문한 메뉴를 주방으로 가져갔다.“은서 씨 아버님께서 코담배병을 좋아하시나요? 선물하시려고요?”여재훈이 부드럽게 물었다.고은서는 고개를 저었다.“전 아버지가 없어요. 삼촌께 드리려는 거예요.”여재훈은 조금 놀란 표정이었다.그는 고은서를 몇 번밖에 만나지 못했기에 그녀의 가정사에 대해서는 잘 알지 못했다. 그래서 그녀에게 아버지가 없다는 사실도 오늘 처음 들었다.“죄송합니다. 그런 줄도 모르고...”여재훈은 곧바로 사과했다.고은서는 별일 아니라는 듯 웃었다.“괜찮아요. 저희 가족끼리도 잘 지내고 있어요.”착각일지도 모르지만, 여재훈은 고은서의 그 미소는 어딘가 익숙하다는 느낌을 받았다.그때 여재훈의 휴대전화 벨 소리가 울렸다.전화번호를 확인한 그는 곧바로 정신을 차리고 전화를 받았다.“시은아, 왜 그래... 주사 맞는 게 당연히 좀 아프지. 하지만 주사를 안 맞으면 어떻게 낫겠어... 알겠으니깐 떼쓰지 말고, 의사 말 잘 들어.”전화를 끊고 나서 여재훈은 고은서에게 간단히 상황을 설명했다.“시은이가 아픈데 주사 맞기 싫다고 하네요.”고은서는 여시은의 이름에 반응이 컸다. 예전에 여시은에게 학대받다 죽은 쿠아가 떠올랐다. 그 기억 때문에 속이 불쾌해지고 분노가 스멀스멀 올라왔다.그녀는 말없이 찻잔을 들어 한 모금 마셨다.여재훈은 고은서의 반감을 눈치채지 못할 리 없었다.그는 조심
여재훈의 말을 들은 고은서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고은서는 여시은이 아픈 시기가 참으로 절묘하다고 생각했다. 아마도 밖의 여론이 여시은에게 불리해서 고은서를 만나고 싶지 않았을 뿐일 것이다.요 며칠, 인터넷에서는 여시은과 관련된 뉴스가 아직 완전히 사라지지 않았다.고은서가 KK한테 도움을 요청한 것 외에도, 아마 곽승재도 뒤에서 힘을 써준 것 같았다.“원래 연회 다음 날에 시은이를 데리고 직접 사과드리려고 했는데, 며칠간 일이 좀 많아서 오늘로 미뤄졌어요.”여재훈은 이어 말했다.“오늘 아침에 갑자기 시은이가 열이 나서, 제가 혼자 찾아오게 됐습니다.”“은서 씨, 지난 일은 전부 시은이의 잘못입니다. 제가 대신 사과드리겠습니다.”여재훈은 미안한 표정으로 말했다.고은서는 담담하게 웃으며 대꾸했다.“재훈 씨의 사과는 저한테 너무 과분해요. 다만 저를 나쁜 사람으로 오해하지 않으셨으면 좋겠어요.”고은서가 지난번 여씨 가문에서 있었던 일을 언급하고 있다는 걸 알아챈 여재훈은 마음이 더욱 불편해져났다.“제가 도우미와 시은이의 말만 믿었네요. 시은이에게는 그 일에 대해 이미 훈계했고, 요 며칠 집에서 반성하고 있습니다.”고은서는 여시은이 그저 여재훈에게 보여주기 위해 반성하는 척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녀는 결코 자기 잘못을 인정하지 않았을 것이다.그러나 여재훈은 여시은을 여전히 굳게 믿고 있었고 그녀의 이중적인 모습에도 크게 실망하지 않은 듯했다.고은서가 더 이상 말을 잇지 않자, 운전 중이던 여재훈도 잠시 침묵을 지켰다.얼마 지나지 않아, 두 사람은 한적한 곳에 있는 개인 요리 식당에 도착했다.그 식당은 규모가 너무 크지는 않았지만 분위기는 엄청 좋았다.정원에는 다양한 희귀한 꽃들과 식물들이 놓여 있었고 작은 인공 폭포와 휴식용 테이블과 의자들도 마련되어 있었다.입구 쪽의 돌 테이블 위에는 하얀색의 통통한 고양이 두 마리가 게으르게 햇볕을 쬐고 있었다.잔잔하게 흘러나오는 음악을 들으니 고은서의 마음이 한결 차분해지는 것을 느꼈다.
송민아가 입을 삐죽이며 말했다.“저번에 네가 너무 진지하게 말하길래, 나 진짜 겁먹었잖아.”고은서가 다시 한번 웃으며 잡담하듯 물었다.“민아야, 너 예전에 말했잖아. 너랑 네 오빠는 엄마가 다르다고. 그럼 네 아빠랑 네 오빠 엄마는 이혼하신 거야?”송민아는 사무실 밖을 슬쩍 확인했다. 그리고 아무도 없는 걸 확인하고 조용히 말했다.“몰래 엄마한테 물어봤는데, 우리 오빠 엄마는 아빠랑 혼인신고도 안 했대. 둘이 약혼까진 했는데, 무슨 이유인진 모르겠지만 오빠 엄마가 아빠랑 결혼하길 거절했대.”고은서는 눈썹을 찌푸렸다.‘설마 송민준의 엄마도 결혼 안 하고 그를 낳은 걸까?’지난번 고은서가 송민준과 함께 바에서 우연히 만났을 때, 그가 그녀를 집까지 데려다주면서 송민준은 어릴 때부터 보호만 받고 자라서 사람에 대한 경계심이 없다고 고은서한테 말한 기억이 있다.그때 그의 말투는 평소의 부드러운 말투가 아니라 약간의 조롱 섞인 느낌이었다. 마치 그의 어린 시절이 순탄치 않았다는 듯이.‘혹시 송민준의 어머니가 결혼도 안 하고 그를 낳아서 상처를 받은 탓일까?’“은서야, 이건 진짜 너한테만 말한 거니까, 절대 우리 오빠한테 묻지 마!”송민아가 신신당부하면서 말했다.“오빠는 이 얘기를 누구한테도 한 적 없어. 분명히 신경 쓰고 있다는 거야. 우리 엄마가 말하는 데 이 사실을 아는 사람은 거의 없더래.”“오빠는 혼자 살긴 해도 우리 엄마한테는 되게 예의 바른 거 있지. 나도 이 비밀 듣기 전까진 우리 둘이 같은 엄마 뱃속에서 태어난 줄 알았어.”고은서는 절대 이 비밀을 다른 사람에게 말하지도, 송민준에게 묻지도 않겠다고 약속했다.“민아야, 혹시 너희 엄마가 네 아빠의 다른 연애 상대에 대해 말한 적 있어?”고은서는 궁금한 것이 있으면 참지 못하고 묻는 성격이었다.혹시라도 송민아의 어머니가 송민준 부모의 관계에 끼어든 거라면 송민아의 어머니가 뭔가 알고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한 것이다.“그냥 어른들 옛날 연애사에 호기심이 생긴 거야. 만약 불쾌했
송민준의 단어 사용은 꽤 신박했다.그는 “어젯밤 그 일은, 네가 의도한 거야?”라고 물었다. “어젯밤 무슨 일이 있었던 거야?”가 아니라.그러니까 송민준의 말뜻은 그가 어젯밤 일이 여시은을 고의로 함정에 빠뜨리려고 한 고은서의 계획이었음을 알고 있다는 건가?하지만 그 테라스는 비교적 한적했고 로마식 기둥이 시야를 가려 일반적으로는 사람들이 잘 알아채기 어려운 장소였다.고은서가 로비에서 넘어졌을 때 여시은은 빈 와인잔을 들고 그녀 앞에 서 있었다. 이 상황을 봤을 때 대부분의 사람들은 여시은이 고은서를 민 것으로 생각했을 것이다.그런데 어떻게 송민준은 고은서가 여시은을 속이기 위해 고육지계를 쓴 걸 알아챈 걸까?고은서는 아예 직설적으로 물었다.“민준 오빠, 왜 그렇게 물어보는 거야? 설마 어젯밤 내가 넘어졌던 게 자작극이라고 생각한 거야?”그 말을 듣자 송민준은 웃으며 물었다.“은서야, 그런 뜻이 아니야. 난 그냥 그 농장 영상 말이야, 그걸 일부러 어젯밤 그 시점에 터뜨린 건지 궁금해서 물어본 거야.”알고 보니 송민준은 농장 영상을 묻고 있었던 것이다.그날 송민준의 컴퓨터에서 영상을 확인하고 난 후, 송민아가 고은서에게 이 영상을 바로 여재훈에게 전달할 거냐고 물었을 때, 고은서는 송민준을 경계해 일부러 연회 이후에 결정하겠다고 말했었다.하지만 실제로는 연회 그 자리에서 바로 그 영상을 공개해 버렸다.송민준이 의심하는 것도 정상이다.“맞아.” 고은서는 고개를 끄덕였다.“원래는 어젯밤이 지나고 여재훈 씨를 따로 찾아가려고 했는데, 그 상황에서는 여시은이 그런 행동을 할 만한 동기를 증명하려면 그걸 꺼낼 수밖에 없었어.”송민준은 고개를 끄덕였다.“다른 뜻은 없었어. 그냥 궁금해서 물어본 거야. 네 선택이 맞아, 난 항상 널 지지할 거니깐.”그의 표정을 본 고은서는 확신했다. 송민준은 고은서가 아직 그를 경계하고 있다는 걸 눈치챘을 것이다.그의 성격상, 어젯밤 그녀가 계획적으로 움직였다는 것쯤은 쉽게 짐작했을 테니까. 하지만 송민준
박지연은 계속해서 불만을 터뜨렸다.“내가 보기엔 여시은은 태생이 못돼먹었어!”“이번에 그렇게 크게 당했으니 더더욱 널 원망할 거야. 너 조심 좀 해.”박지연이 걱정스럽게 당부했다.고은서는 고개를 끄덕였다.이미 각을 세우기로 마음먹었기에 여시은과 평화롭게 지낼 생각은 애초에 없었다. 앞으로는 여시은을 더 철저히 경계할 것이다.“듣자 하니 곽승재가 내내 널 감싸줬다며? 너한테 점점 마음이 가는 모양이야.”박지연이 코웃음을 쳤다.어젯밤 곽승재가 고은서를 계속 도와줬던 건 사실이었다. 증거를 공개하자고 제안한것도 곽승재의 생각이었고 마지막에 그녀를 집까지 데려다줬다. 곽승재가 고은서에게 큰 도움을 준 셈이었다.하지만 고은서는 곽승재에 대한 이야기를 박지연과 깊이 나누지 않았다.잠시 다른 이야기를 하던 중 박지연이 고은서에게 뜬금없는 소문 하나를 전했다.“우리 과장님한테서 들었는데, 어제 혜린 씨가 다니는 병원에 조 여사님이 찾아가서 난리를 쳤대. 혜린 씨 남자관계가 복잡하다고, 다른 남자랑 팔짱 낀 사진까지 들고 와서 공개하면서 혜린 씨랑 그 자리에서 머리끄덩이 잡고 싸움 났대!”고은서는 지난번 소동 이후 손자를 중시하는 조수연이 한동안은 조용할 거라 생각했었다. 그런데 고작 며칠 만에 또 난리를 친 거였다. 조수연의 전투력은 엄청 대단했다.“아니, 그러다 혜린 씨 혹시라도 애를 지우기라도 하면 어떡하려고 그래?”고은서가 물었다.박지연은 말했다.“조 여사님 말로는 혜린 씨 뱃속 애가 자기 아들 애가 아닐 수도 있다고 의심해서 혜린 씨를 끌고 가서 친자 확인하자고 했대. 그래서 둘이 몸싸움까지 벌어져서 이미지도 최악이라 혜린 씨는 한 달 정직당했어.”“혜린 씨 배속에 애가 온승준 씨 애가 아니라고? 그럼 도대체 왜 그렇게까지 그 집에 들어가려고 애쓰는 거야? 그냥 진짜 애 아빠랑 결혼하면 될걸...”고은서는 도무지 납득이 가지 않았다.“소문엔 그 남자가 유부남에 애까지 있다고 하더라. 자세한 건 나도 몰라. 그냥 과장님이 흘린 얘기야.”
여시은은 여전히 여재훈의 다리를 붙잡고 불쌍한 표정을 지으며 물었다.“그럼, 아빠가 생각하시는 해결 방법은 뭐예요?”여재훈은 여시은에게 홍보팀을 통해 자신이 저지른 잘못에 대해 공개 사과하고, 개인적으로 고은서에게 직접 진심으로 사과한 뒤 집에서 2주 동안 자숙하라고 말했다.“제 회사는 아직 개업식도 제대로 안 했는데 공개 사과를 하라뇨? 그럼 모든 사람들이 저를 웃음거리로 볼 거 아니에요!”여시은은 눈이 퉁퉁 부은 채 애원했다.“아빠, 저 은서한테 개인적으로 사과만 하면 안 돼요? 저도 아직 경험이 부족해서 사람들을 이끌기 힘든데, 공개적으로 사과하면 앞으로 누가 저를 믿고 따르겠어요?”“안 된다.” 여재훈은 단호하게 말했다.“이 일은 이미 파장이 커졌고 많은 사람들이 너를 지켜보고 있어. 그러니 모든 사람에게 확실하게 해명해야 한다.”“시은아, 잘못을 저지른 건 무서운 일이 아니야. 진심으로 뉘우치고 성실하게 사과하면 은서 씨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들도 너에게 다시 기회를 줄 거다.”여재훈은 계속해서 말했다.“사람은 자기가 저지른 잘못에 책임질 줄 알아야 한다. 네가 잘못했는데 내가 덮어주면 그건 너를 망치는 거야. 그러니까 이 일은 이렇게 결정된 거다!”여시은은 그 말을 듣자 속으로 분노가 치밀었다.‘고은서를 그저 연못에 좀 빠지게 했을 뿐인데 이게 뭐 그렇게 큰일이라고 이렇게까지 일을 키운단 말인가?’‘공개 사과라니, 이제 예전처럼 모두에게 존경받고 칭찬받던 모습은 끝이라는 거잖아.비록 인터넷의 영상은 지워지더라도 사람들이 나에 대한 나쁜 인상은 지워지지 않을 거란 말이야!’오늘 밤 그렇게 많은 부유층과 정재계 인사들이 있는 자리에서 그녀는 그들에게 최악의 인상을 남겼을 것이다. 해성에서 쌓아온 그녀의 완벽한 이미지가 단번에 무너진 셈이다.예전엔 그녀가 울기만 하면 여재훈은 안쓰러워하며 뭐든지 다 용서해 줬었다.‘지금은 무릎까지 꿇었는데도 아빠는 고은서 때문에 자신의 딸을 벌하려 한다니, 정말 나를 딸로 생각하긴 하는 걸까?’
여시은은 그 말을 듣자 눈이 시뻘게지면서 큰 소리로 외쳤다.“아빠, 제가 한 게 아니라니까요! 고은서가 일부러 저를 함정에 빠뜨린 거예요. 왜 저를 믿지 않으세요!”“시은아!”여재훈이 의자에서 벌떡 일어나며 난생처음으로 이토록 차가운 눈빛으로 딸에게 화를 냈다.“너는 어쩌다 이렇게 뻔뻔하게 거짓말만 하는 사람이 됐니!”“내가 사람을 시켜서 확인해 봤어. 연회장 CCTV 꺼놓은 거, 그거 네가 시킨 거더라.”여재훈은 딸을 억울하게 만들까 걱정돼 CCTV 관련 내용을 직접 조사했다.그런데 정말로 여시은이 꺼놓았던 것이었다.“네가 정말 은서 씨를 해치려는 의도가 없었다면 왜 CCTV를 미리 꺼놓은 거냐?”여재훈은 냉정한 태도로 물었다.여시은은 자신이 고은서의 계략에 걸려든 것을 그제야 깨달았다.고은서는 일부러 도발적인 눈빛으로 여시은을 자극했고 곧바로 테라스로 이끌어냈던 것이다. 모두 여시은한테 엿 먹이려는 행동이었다!여시은은 고은서가 쿠아가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격동적으로 행동해 자신을 밀칠 거라 확신했었다.왜냐하면 고은서는 지난번엔 쿠아를 다치게 한 일로도 크게 충격을 받았었기 때문이다.하지만 이번엔 반전이 생겼다.고은서는 오히려 침착하게 반격했고 지난번 농장에서의 ‘물에 빠진 사건’ 증거까지 들고나왔다.일이 이렇게 커져 버린 이상 여시은은 더 이상 변명할 여지가 없다는 걸 알았다.그녀는 결국 울음을 터뜨리며 여재훈을 향해 소리쳤다.“맞아요! 저 고은서가 너무 꼴 보기 싫었어요! 왜 아빠는 맨날 걔만 칭찬하세요? 이러니깐 제가 질투 나서 그런 거 아니에요? 그냥 고은서한테 꼽 주고 싶었어요!”“어차피 이미 벌어진 일이에요. 전 잘못한 거 없어요! 후회도 안 해요!”“너!”여재훈은 손을 번쩍 들어 여시은의 뺨을 때리려 했지만, 그녀의 눈물범벅이 된 얼굴을 보고는 차마 때릴 수가 없었다.“시은아, 아빠가 평소에 너를 어떻게 가르쳤니? 사람은 자기 양심에 떳떳해야 하고 올곧게 살아야 한다고 했잖아! 근데 너는 어떻게 질투심에 눈이
이미숙은 유튜브 영상을 보고 있었는데, 바로 여시은이 고은서 머리끄덩이를 잡아당겨 연못 가까이로 끌어당기는 장면이 재생되고 있었다.그 영상은 누군가가 휴대전화로 촬영해 올린 것 같았고 화질이 너무 좋은 건 아니지만 전반 상황을 알아보는 데에는 충분했다.영상의 끝에는 고은서와 여시은의 얼굴을 비춘 장면도 담겨 있었다.다소 초라해진 고은서는 곽승재의 부축을 받으며 옆에 서 있었다. 여시은은 얼굴이 벌겋게 달아오르고 눈빛엔 분노와 원망으로 가득했다.그 와중에 영상의 제목이 더욱 눈길을 끌었다.[재벌가 아가씨, 두 얼굴의 진실!]“사모님, 저 여자는 어쩜 저리 독하대요. 이렇게 심하게 괴롭히다니. 누가 폭로해 줘서 다행이지! 이제 세상 사람들 다 그 여자 피해서 다니겠어요!”이미숙은 화가 난 듯 말했다.고은서는 이번 일이 오래 퍼지지는 않을 거라고 생각했다. 여시은 뒤에는 여재훈이 있기 때문이다.하지만 이번 일로 여시은이 보기 좋게 망신을 당했고, 여재훈 역시 자신의 딸이 그렇게 순진하지 않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을 테니, 이번 목적은 어느 정도 달성되었다.고은서는 이미숙의 휴대전화 영상에 대뜸 ‘좋아요'를 눌렀다.한편, 여씨 가문에서.여시은 역시 유튜브 영상을 확인했다. 분노에 찬 그녀는 휴대전화를 바닥에 내던졌다.밖에 서 있는 박미화가 조심스럽게 말을 전했다.“시은 아가씨, 회장님께서 지금 바로 서재로 오시래요. 할 말씀이 있으시답니다.”이번이 박미화가 세 번째로 말을 전하러 온 것이었다.여시은은 곧바로 얼굴에 드리워진 분노와 짜증을 숨기고는 일부러 슬프고 억울한 표정을 지으며 방문을 열었다.박미화는 방안에서 반응이 없자 방문을 열려고 하였다. 때마침 여시은이 문을 열고 나오는 것을 보고 급히 손을 거두며 사과했다.여시은은 박미화의 손을 움켜쥐었다. 조금 전에 분노로 인해 물어뜯은 날카로운 손톱이 그녀의 살을 깊이 파고들었다. 그리고는 여시은은 울먹이는 말투로 물었다.“미화 언니, 아빠가 나한테 화 많이 나신 거야? 나 어떻게 해야
얼마 지나지 않아 운전기사가 차를 라이트문 아파트 앞에 세웠다.고은서와 곽승재는 위층으로 올라갔다. 고은서는 샤워하기 위해 자신의 방으로 직행했고 곽승재는 거실에 남았다.샤워를 마치고 나온 고은서는 의외의 광경을 목격했다. 곽승재가 거실 소파에 앉아 있었고 테이블 위에는 김이 모락모락 나는 차 한 잔이 놓여 있었다.“왜 또 왔어? 할 말 있어?”고은서가 물었다.곽승재는 태연하게 대답했다.“논의할 게 있어서. 그전에 이 콜라 생강차부터 마셔. 아주머니께서 특별히 준비하신 거야.”“사모님, 콜라 생강차는 감기 예방에도 효과적이거든요. 어서 드세요!”이미숙이 차를 가져오며 말했다.고은서는 감기에 걸릴까 봐 걱정하고 있던 참이었다. 그녀는 잔을 들어 올리더니 이상한 듯 물었다.“아줌마, 제가 방금 들어온 걸 보지도 못하셨을 텐데 어떻게 제가 감기 걸릴 줄 아시고 미리 차를 준비하셨어요?”이미숙의 눈가에는 잠시 당황한 기색이 스쳤다.곽승재가 자연스럽게 말을 이었다.“내가 알려줬어. 일단 마셔.”고은서는 고개를 숙여 생강차를 내려다 볼뿐 이미숙의 표정 변화를 주의 깊게 보지 못했다.물론 곽승재의 눈에 비친 기대감도 보지 못했다.생강차의 냄새를 맡아보니 생강 향이 꽤 진했다.고은서는 생강차를 조심스럽게 한 모금 마셨다. 콜라의 단맛과 생강의 톡 쏘는 맛이 어우러져 생각보다 맛이 나쁘지 않았다.“맛이 어때요?”이미숙이 물었다.“좋네요. 그런데 오늘은 생강을 좀 많이 넣으신 것 같네요. 예전에 만드신 것보다 더 매운데요.”이미숙은 잠시 망설이다가 급히 대답했다.“생강 양을 조절하지 못했네요. 주의할게요.”고은서는 더는 따지지 않고 다시 마시려던 참이었는데 곽승재가 말을 건넸다.“맛이 별로면 안 마셔도 돼.”고은서는 그를 흘겨보았다.“누가 맛없다고 했어? 아줌마가 정성스럽게 준비해주신 건데 끝까지 마셔야지.”“사모님, 도련님과 얘기 나누세요. 저는 할 일이 남아서 먼저 가보겠습니다.”이미숙은 두 사람의 언쟁을 피하려는 듯 급히 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