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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518화

Author: 류한나
‘난 그런 의미로 말한 게 아니었는데...’

박지연은 순간 말문이 막혔다.

...

주차장.

기사는 운전석 밖에서 대기하고 있었고 곽승재는 뒷좌석에 앉아 조수석에 앉아있는 백유미가 입을 열길 기다렸다.

그녀는 티슈로 물을 닦고 있었는데 매우 낭패해 보였다.

“이후로 고은서 건들 생각은 접는 게 좋을 거야.”

곽승재가 차가운 목소리로 경고했다.

백유미는 흠칫하더니 이내 눈시울이 붉히면서 억울하다는 듯 말했다.

“승재야, 너도 지금 이게 다 내 탓이라고 생각하는 거야?”

곽승재는 덤덤한 표정으로 되물었다.

“할 말이 있다며?”

백유미는 마음속의 쓸쓸함을 애써 억누르면서 말했다.

“우리 아빠가 누굴 건드렸는지 요즘 집안 회사가 거의 벼랑 끝에 서 있게 되었어. 혹시 우리 집 회사 좀 도와주면 안 될까?”

“버티지 못하겠거든 그냥 제때 포기하는 게 더 좋다고 생각하는데. 아저씨도 연세가 있으신데 이젠 쉴 때도 되지 않았어?”

곽승재가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

“우리 집 회사가 네 도움을 많이 받았다고는 하지만 우리 아빠도 많은 심혈을 기울였어. 진짜 이대로 파산하게 내버려 두면서 우리 아빠가 속상해하는 모습을 보고만 있을 거야?”

백유미가 아련한 눈빛으로 그를 바라보며 말했다.

그러나 곽승재는 여전히 별다른 감정이 없어 보였다.

“진짜 파산할 경지에 이른 거 맞아?”

백유미는 순간 흠칫했다.

“그게 무슨 말이야? 지금 내가 거짓말이라도 하고 있다는 거야? 이번엔 진짜 쉬운 상대가 아니어서 이러는 거야. 계속 우리 집 회사만 타깃으로 삶고 있다니까.”

백유미가 곽승재를 향해 애원했다.

“승재야, 나도 더는 어쩔 수가 없어서 널 찾아온 거야. 우리 아빠가 어릴 적부터 널 친아들로 생각하면서 챙겨준 걸 보아서라도 한 번만 도와주면 안 될까?”

곽승재는 무표정한 얼굴을 하고 거절했다.

“아저씨 은혜는 이미 오래전에 다 갚은 거로 알고 있어. 이후로도 더는 너희 집 회사를 도와주는 일이 없을 거야.”

백유미는 그의 말을 듣자마자 눈물을 흘렸다.

“그럼 우리 사이도 내가 실수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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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어게인, 비긴   제519화

    박지연의 말을 들은 온승준은 순간 멈칫했다.“지연아, 나 오늘 야근 안 해도 되니까 저녁에 만나서 잘 얘기해보자.”온승준이 이렇게 차근차근 그녀를 달래려고 하는 건 이번이 처음이었다. 전에는 항상 바쁘다는 이유로 용건만 간단하게 말하는 게 일쑤였다.지금 먼저 얘기를 나누자고 한 것만으로 그에게 있어서는 아주 크게 양보한 것과 마찬가지였다.그러나 박지연은 한참 동안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오래된 친구로서 고은서는 이내 박지연이 망설이고 있다는 걸 알고 그녀의 폰을 빼앗아 전화 너머에 있는 온승준을 향해 소리쳤다.“더는 그쪽이랑 할 말이 없거든요. 그리고 지연이 이미 저랑 살기로 했으니까 그쪽 집으로 돌아가는 일도 없을 거예요.”고은서는 씩씩거리며 온승준이 입을 열기도 전에 전화를 뚝 끊어버리고는 박지연을 향해 엄숙하게 말했다.“지연아, 마음이 약해져서는 안 돼. 전에 네 시어머니가 너한테 했던 말들을 생각해봐. 그리고 네가 괴롭힐 당할 때 온승준이 뭐 하고 있었는지도 잘 돌이켜봐. 아직도 정신 못 차렸어? 평생 그 집 사람들 괴롭힘을 받으며 살 생각이야?”“아니.”박지연은 고개를 저으며 답했다.“그럼 더는 망설일 필요도 없잖아. 네가 아직도 온승준을 사랑하고 있다는 거 나도 알고 있어. 그런데 말로만 이혼하지 않겠다는 사람을 어떻게 믿어. 적어도 그 집안에서 마땅한 태도를 표해야 다시 고려해볼 거 아니야. 절대 온승준의 말에 쉽게 넘어가서는 안 돼.”고은서가 말을 보태었다.사실 박지연은 자신을 대하는 시댁의 태도가 변할 리가 없다는 걸 잘 알고 있었다. 그들을 친부모님처럼 모시는 박지연과 달리 그들은 항상 그녀를 하녀 취급을 했다. 이번 일로 그들의 생각을 바꾼다는 건 거의 불가능한 일이었다.온승준의 마음속에는 항상 일이 먼저였고 집안일에는 전혀 관심이 없었다. 그리고 그녀가 기뻐하든 슬퍼하든 눈길조차 주지 않았다.유혜린이 아니었더라도 두 사람의 결혼생활은 오래 지속되지 못했을 것이다.‘그냥 빨리 이혼하는 게 더 나아. 더 끌 필요

  • 어게인, 비긴   제520화

    “알겠어, 알겠어. 명심할 테니까 걱정하지마. 나 먼저 일하러 갈게.”박지연이 말했다.고은서도 아침을 챙겨 먹고 ZY 그룹으로 갔다.송민아는 그녀가 출근하자마자 그녀를 따라 사무실로 들어갔다.“어제는 왜 출근하지 않았어요?”“볼 일이 좀 있어서요. 저한테 할 말이라도 있으세요?”송민아는 입술을 삐죽거리며 머뭇머뭇 말했다.“어제 데이터 분석하는 거 가르쳐준다고 했잖아요.”‘아, 그 일 때문에 온 거였구나. 송민준이랑 비기면 완전 애네.’송민준이 그 누구에게도 자신의 속마음을 들키지 않을 정도로 위험한 존재와 같았다.반면 송민아는 오만하기는 하나 도움이 필요할 때면 제때 꼬리를 내리는 본성은 착한 사람이었다.“전에는 회사에 나보다 경험이 풍부한 사람들이 많다고 하지 않았나요? 그분들 찾아가면 되잖아요.”송민아는 콧방귀를 뀌면서 고집부렸다.“그분들한테 민폐 끼치기 싫어서 그래요. 난 딱 은서 씨만 못살게 굴 거예요. 그러니까 누가 시후 오빠 마음을 함부로 빼앗으라고 했어요?”“진짜 제가 민시후의 마음을 빼앗았다고 생각하는 거예요?”고은서가 되물었다.송민아는 고은서가 그러지 않았다는 걸 잘 알고 있었다.속마음을 들킨 그녀는 얼굴이 화끈 달아올랐다.“일에 몰두하라면서요. 그래서 지금 배워달라고 직접 찾아까지 왔는데 왜 거절할 것처럼 그래요? 설마 일부러 날 놀리려고 이러는 거예요?”“아니요, 그럴 리가요. 일하겠다는데 전면적으로 지지해줘야죠. 나중에 자신의 사업을 가꿔나가는 게 남자한테 구애하는 것보다 더 소중하다는 걸 깨닫게 될 거예요.”고은서가 웃으면서 말했다.“어제 준 서류들은 다 봤어요? 투자할만한 프로젝트가 있던가요?”“모르겠어요. 저는 다 괜찮아 보이던데요.”송민아의 얼굴이 점점 더 빨개졌다.계획서에는 다 프로젝트의 우점과 프로젝트를 칭찬하는 말들만 있었기에 누가 좋고 누가 나쁜지를 구분하기 어려웠다.고은서도 이 상황을 알고 있었기에 그녀를 비웃는 대신 간단한 데이터 분석법을 알려주면서 연관된 전공 책들까지 추천해

  • 어게인, 비긴   제521화

    갑자기 만나자고 하는 성아연의 제안에 고은서는 꽤나 당황스러웠다.지난번 경찰서에서 성아연은 고은서를 지독히 미워한다고 했기 때문이었다.“민아야, 너는 먼저 회사로 돌아가. 나는 잠시 볼일 있어.”고은서가 송민아에게 말했다.송민아가 물었다.“급한 일이야? 같이 가줄까?”고은서가 고개를 저으며 답했다.“아니야. 개인적인 일이라서 그래. 맞아. 이제 친구로 지내기로 했으니 하나만 물어봐도 돼?”송민아가 고개를 끄덕이며 답했다.“뭔데?”“당시 넌 어떻게 그렇게 빨리 내가 임신했다는 사실을 안 거야?”고은서는 조금 의아했다.병원에서 임신 사실을 확인하고 호텔로 돌아오기까지 기껏해야 두 시간 남짓이었다.하지만 송민아가 어떻게 그 소식을 알게 된 것인지 너무 궁금했다.그 말을 듣고 송민아는 약간 민망한 표정을 지었다.“누가 나한테 문자로 네가 병원 산부인과에 갔다고 알려줬어. 반신반의하면서 사람을 시켜 알아봤는데 정말 병원에 간 게 맞더라고. 임신 3주라는 사실까지 확인돼서 화도 나고 무서워서 호텔로 찾아가서 아이를 지우라고 협박했지.”말을 끝낼 무렵 송민아의 목소리는 점점 더 작아졌다.“비록 진숙희가 너를 해친 게 내 의도는 아니었지만 내 책임도 있다고 생각해. 집에 가서 큰 소리를 지르며 화냈는데 아주머니가 내 편을 들어줫어. 하지만 난 절대로 아주머니가 너를 직접 해칠 줄은 생각지도 못했어.”고은서는 그 부분에 대해서는 따지지 않고 물었다.“누가 너한테 그 문자를 보냈는지 알아봤어? 번호는 있어?”송민아가 고개를 끄덕였다.“번호는 있는데 전화를 걸었을 때는 이미 없는 번호라고 되어있더라고.”“그 문자를 보낸 사람이 누구인지 무슨 목적으로 그 문자를 보냈는지는 의심해 보지 않았어?”“시후 오빠를 좋아하는 어떤 여자가 산부인과에서 너를 보고 나한테 알린 것 같아. 시후 오빠를 좋아하는 여자가 워낙 많아서 그들 중 몇몇은 다른 여자들을 몰아내려고 나를 이용하거든.”고은서는 말문이 막혔다.“너 말고는 나랑 민시후 사이를 오해한 사

  • 어게인, 비긴   제522화

    “특별히 날 보자고 했다던데 무슨 일이야?”고은서가 싸늘하게 물었다.성아연이 답했다.“엄마가 꽃에 물을 주다가 실수로 넘어져서 머리를 다쳐서 지금 병원에 있어. 병원에 가서 돌봐주고 싶지만 지금은 나갈 수가 없어. 고소를 취하해 주면 안 될까? 경제적인 보상도 좋고 부탁하고 싶은 일이 있다면 그것도 좋아. 네가 원하는 대로 해줄게.”고은서가 콧방귀를 뀌었다.“성아연, 나한테 이런 부탁 한다는 게 우습다고는 생각 안 해? 네가 나한테 한 짓을 생각해 봐. 내가 용서할 것 같아?”그 말을 들은 성아연이 뭔가를 떠올린 몸을 떨고는 다시 간청했다.“은서야. 내가 잘못했어! 이번 한 번만 나를 용서해 줘. 앞으로 절대 너를 건드리지 않을게. 네 말만 들을게. 네가 무릎 꿇으라면 꿇고 발등에 키스하라고 하면 그것도 할게. 네가 하라는 대로 할게.”“난 부하도 내 말만 듣는 사람도 필요 없어. 할 말이 이것뿐이라면 이만 가볼게.”말을 마친 고은서가 자리를 뜨려 했다.“고은서!”성아연이 황급히 그녀를 불러 세웠다.“나도 너나 고씨 가문은 건드리고 싶지 않았어. 하지만 어쩔 수 없었어.”“뭐가 어쩔 수 없었는데? 백유미가 칼을 네 목에 들이대기라도 했어?”고은서가 싸늘하게 되물었다.성아연이 고개를 저으며 답했다.“은서야, 도와줘. 부탁이야. 정말 다시는 그러지 않을게...”“성아연, 내가 널 도와줄 리 없잖아. 네가 백유미와 손을 잡기로 했으면 끝까지 자존심을 지키든지 아니면 문제가 생기면 그 여자를 찾아가야지. 내가 아무리 만만해 보인다고 해도 네 멋대로 좌지우지할 수 있는 사람은 아니야.”말을 마친 고은서는 인내심을 잃고 자리에서 일어섰다.“백유미가 우리 아빠의 불법 행위 증거를 가지고 있어.”성아연이 크게 외쳤다.고은서는 걸음을 멈추고 성아연을 돌아보았다.성아연은 얼굴을 감싸 쥔 채 말을 이었다.“아빠가 다른 사람이 금융 업계에서 돈을 버는 것을 보고 친구들과 의논해 업종을 바꿨는데 잘되지 않았어. 마지막에는 다른 사람의 말만 듣

  • 어게인, 비긴   제523화

    “은서야, 제발 날 좀 도와줘. 내가 정말 잘못했어. 다시는 이런 짓 하지 않을게.”성아연은 떨리는 목소리로 빌었다.그녀는 미세하게 몸을 떨었고 눈에는 두려움이 가득했다.“은서야, 널 배신하고 사람을 시켜 널 납치하게 한 건 정말 내 잘못이야. 이번 한 번만 날 용서해 줘. 마지막이야. 다시는 이런 일이 없을 거야. 정말 맹세할게!”고은서는 성아연의 반응이 이해되지 않았다.“대체 뭘 그렇게 무서워하는 거야? 누가 널 이렇게 만들어서 나한테 와서 이러는 거야?”‘백유미는 아닐 거야. 백유미가 협박했다면 성아연이 두 사람의 관계까지 나한테 털어놓지는 않았겠지.’그 말을 들은 성아연은 더는 숨길 수 없다는 듯 울면서 말했다“며칠 전에 곽승재가 사람을 보내 나한테 경고했어. 사실을 밝히지 않으면 엄청난 대가를 치르게 될 거라고. 그리고 단 이틀 만에 엄마가 다쳤어.”“그래서 네 말은 곽승재가 시켰다는 거야?”고은서가 놀라며 물었다.성아연이 고개를 저으며 답했다.“나한테 구체적으로 어떻게 하라고는 하지 않았어. 하지만 곽승재가 그러는 게 널 위해서라는 건 알아.”성아연은 고은서에 대한 곽승재의 태도가 변했다는 사실을 오래전부터 알고 있었다.하지만 몇 년 전 일을 생각하면 성아연은 그 사실을 믿을 수 없었다.지난번에 곽승재가 좋아해서 결혼했다고 말했을 때도 반신반의했다.좋아한다면서 몇 년 동안 냉담하게 굴고 심지어 결혼하고도 따로 방을 썼기 때문이다.하지만 성아연의 아버지가 아무리 인맥을 동원해도 그녀를 빼내지 못한다고 했을 때, 또한 이번 판결로 평생 감옥에서 살아야 할지도 모른다는 말을 들었을 때 그녀는 그제야 곽승재가 정말 화났음을 알 수 있었다.오늘 어머니의 예상치 못한 사고를 듣고 성아연은 더 확실히 알게 되었다.곽승재가 고은서를 대신해 처벌을 내리고 있음을 말이다.그녀에게 제일 가혹한 대가를 치르게 하리라는 것을 말이다.그래서 성아연은 고은서에게 빌 수밖에 없었다.고은서가 얘기해야 곽승재가 그만둘 것 같았다.“은서야,

  • 어게인, 비긴   제524화

    “그리고 고씨 가문은 너희들 때문에 치명타를 입을 뻔했어!”고은서가 싸늘하게 일갈했다.“네 아빠에게 불법 행위를 자수하라고 설득하는 게 좋을 거야. 그러면 너희가 관용을 받을 기회가 생길지도 모르지.”“우리더러 죽으라는 거랑 뭐가 달라!”성아연이 울며 외쳤다.“집안이 망하면 우린 앞으로 어떻게 살라고!”고은서가 답했다.“사람은 자신이 저지른 일에 대한 대가를 치러야 해. 처음에 그 길을 선택했을 때부터 이런 결과도 예상했어야지.”“무슨 대가! 무슨 결과!”성아연의 눈시울이 붉어졌다.“고은서! 여기서 잘난 척하며 설교하지 마. 곽승재가 아니었으면 너희 고씨 가문이 뭐라도 될 것 같아? 지난 2년 동안 너희 가문에서 곽승재 덕을 봤다는 거 모르는 사람 있어? 네가 뭔데! 네가 무슨 자격으로 다른 사람보다 우월한 척해? 우리는 너보다 운이 나빴을 뿐이야!”성아연의 독설을 들으면서도 고은서는 화내지 않았다.그녀는 차분하게 웃으며 답했다.“운도 내 시력이야. 너도 반성해 봐. 왜 하늘은 너에게 그 운을 주지 않았을지 말이야.”“너!”“성아연, 앞으로 날 찾지 마. 다시 널 만나는 일은 없을 거야.”말을 마친 고은서가 자리를 떴다.성아연은 뒤에서 소리 질렀다.“고은서! 이 못된 계집애야! 네가 곽승재를 부추켜 엄마를 괴롭게 만들었으니 너도 그 대가를 치르게 될 거야.”고은서는 고개를 돌리지 않고 답했다.“증거 있으면 신고해. 경찰은 악행을 두고 보지만은 않을 거니 나한테 죄가 있다면 그에 따른 처벌을 받겠지.”“건방지게 굴지 마! 내가 널 어쩔 수 없다고 해서 백유미가 너를 가만두지 않을 테니까!”성아연은 여전히 악에 받친 목소리로 외쳤다.“너는 나보다 천 배, 만 배 더 비참해질 거야! 하하하!”누군가 들어와 성아연을 제지했고 고은서는 발걸음을 멈추지 않고 경찰서를 나섰다.밖에는 여전히 밝은 햇살이 비치고 있었지만 고은서의 마음 한구석에는 묘한 쓸쓸함이 스며들었다.10년간의 우정이 한낱 거짓에 불과했음을 깨달은 것이다.차

  • 어게인, 비긴   제525화

    회의실 밖으로 나온 곽승재가 연락을 받으며 담담히 물었다.“이 시간에 무슨 일이야?”그의 목소리는 평소와 다를 바 없는 것 같았지만 자세히 들어보면 어딘가 설렘이 묻어 있었다.고은서가 먼저 그에게 전화를 거는 일은 그녀와 한 번 만나기보다 어려웠다.그런 사람에게 연락을 받았으니 곽승재의 기분은 좋지 않을 리 없었다.“성아연한테 사람을 보냈어?”전화 너머에서 고은서가 물었다.곽승재는 대답 대신 되물었다.“만났어?”“그래. 엄마가 다쳤다던데 그것도 당신이 한 일이야?”곽승재가 차분히 답했다.“나는 준법정신이 투철한 사업가야. 대화하러 사람을 보낸 건 맞지만 그 외의 일은 나랑 상관없어.”잠시 생각을 마친 고은서가 그 일에 집착하는 대신 물었다.‘곽승재의 행보를 떠올려 봐도 그래. 직접 나서서 성아연의 어머니에게 해를 끼칠 만한 일은 하지 않았을 거야.”“언제부터 성아연과 백유미가 고씨 가문을 상대로 뭔가 꾸미고 있다는 걸 알았어?”“나도 최근에 알게 된 거야.”곽승재가 목소리를 낮추며 덧붙였다.“고은서, 네 말이 맞았어. 성아연과 백유미는 계속해서 연락을 이어 왔고 전에는 내가 널 오해했어.”곽승재의 말을 듣고 고은서는 드디어 병원에서 곽승재가 왜 주민기에게 그녀를 납치한 사람이 백유미와 관련되었는지 물었던 이유를 알 수 있었다.또한 어제 중국집에서도 고은서가 백유미에게 물을 뿌린 뒤 평소와는 달리 자신을 걱정하며 백유미를 무시했던 곽승재도 이해할 수 있었다.‘곽승재는 이미 백유미와 성아연의 비밀스러운 관계를 알아차렸던 거야. 그리고 백유미가 나에게 적대적인 의도를 가지고 있다는 사실도.’“곽승재, 오해했다는 말 이제 무슨 의미가 있을까?”고은서가 싸늘하게 웃으며 말을 이었다.“성아연에 했던 일로 나를 얼마나 몰아세웠었는지는 잊었어? 내가 괜한 문제를 일으키며 백유미를 괴롭힌다고 했지. 아무리 성아연의 행동이 나와는 관련 없다고 해도 믿지 않았잖아. 네가 보기에는 성아연은 내 절친이었고 그녀가 하는 모든 일은 내 의도에서

  • 어게인, 비긴   제526화

    고은서에게서 먼저 온 연락이 좋은 시작인 줄 알았지만 지금 상황을 보니 그다지 좋지도 않은 듯했다.‘하아... 이번 달 보너스는 물 건너갔구나.’곽승재는 직접 운전해서 육현석의 집에 도착했다.육현석은 캐주얼한 운동복으로 갈아입고 거울 앞에서 헤어스타일을 정리하고 있었다.그를 보자 육현석은 놀란 얼굴로 말했다.“형이 여긴 어쩐 일이야?”곽승재는 육현석 집 소파에 앉으며 꽃단장한 그를 흘끗 쳐다보고는 물었다.“어디 가려고?”육현석은 머리를 뒤로 넘기며 더 활동적이고 밝고 멋지게 보이도록 했다.“지연이가 얘기했는데 다음 주에 시내 병원 몇 군데에서 배구 혼성 경기를 한다더라고. 그런데 지연이네 병원에 배구 잘하는 사람이 별로 없어서 외부에서 지원할 수 있는 사람을 찾고 있대. 마침 시간도 있고 해서 구경도 할 겸 참여하려고.”곽승재는 그의 말을 듣고 미간을 찌푸리며 물었다.“지연이? 네가 언제 지연 씨랑 그렇게 친했냐?”육현석은 손을 휙휙 휘저으며 웃었다.“그냥 평범한 호칭일 뿐이야! 지연이가 친구 사이에 굳이 지연 씨 하면서 생소하게 부를 필요 없대. 그래서 서로 이름 부르기로 했어.”“그래서 성까지 빼고 부르냐?”“성까지 붙이면 딱딱해 보이잖아.”육현석은 말하며 곽승재를 향해 불평하기 시작했다.“형, 형은 늘 형수님 이름을 성까지 붙여서 부르는데 좀 더 애정이 담긴 호칭으로 부를 수는 없는 거야?”곽승재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지난번 숙부가 주최한 집안 연회에서 친척들의 칭찬에 답하며 그는 고은서를 은서야라고 불렀었다.고은서는 겉으로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 남몰래 눈을 흘기며 몹시 싫어하는 기색을 보였다.그 후로 그는 호칭에 대해 더는 고민하지 않기로 했다.어차피 고은서도 그를 이름으로만 부르고 있으니 말이다.육현석은 곽승재의 생각을 눈치채곤 말했다.“형, 이건 자존심을 세울 일이 아니야. 친근하게 부르다 보면 형수님도 익숙해지실 거야.”곽승재는 그를 흘끗 쳐다보며 말했다.“너한테 가르침을 받고 싶진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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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어게인, 비긴   제1124화

    “집까지 데려다줘서 고마워. 이만 가볼 테니까 오빠도 조심히 들어가.”말을 마친 고은서가 차에서 내리려고 할 때 송민준이 입을 열었다.“은서야, 잠시만 기다려 봐.”고은서가 고개를 돌리자 그가 말을 이었다.“부모님이 민아를 보러 곧 해성에 올 것 같아. 민아가 부모님께 네가 평소에 많이 도와준다고 말한 적이 있어서 이번에 같이 식사하고 싶다고 하셨어. 혹시 그때 시간이 되면 오지 않을래?”고은서는 송민아의 부모님과 같이 식사하는 자리라는 말에 바로 거절하려고 했다. 하지만 그녀의 어머니가 북성에서 지냈었고 송민아의 아버지와 아는 사이일 수도 있었다.고은서는 어머니와 송민아의 아버지가 아는 사이인지 궁금해서 직접 물어보고 싶었다.작은 정보라도 얻을 기회였기에 놓칠 수 없었다.그녀는 미소를 지으며 천천히 입을 열었다.“내가 민아를 도와준 게 뭐가 있다고 그래. 친구끼리 서로 도와주면서 사는 거지.”송민준은 부모님이 고은서를 만나고 싶어 한다면서 시간이 되면 꼭 와달라고 부탁했다. 고은서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내일 민아랑 얘기해 보고 결정할게.”송민준이 고개를 끄덕였다.고은서는 집으로 돌아가자마자 씻고 잠에 들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곽승재가 전화를 걸어왔다. 휴대폰 벨 소리에 잠이 깬 그녀는 발신자를 확인하고는 전화를 받았다.“무슨 일로 연락했어?”“은서야, 설마 자고 있었던 거야? 안 자는 줄 알고 전화했어.”곽승재는 고은서가 이 시간에 자고 있을 줄 몰랐다. 평소에 그녀는 자주 밤을 새웠기 때문이었다.고은서는 눈을 감은 채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피곤해서 일찍 누웠어.”그녀의 목소리가 곽승재의 귀를 간지럽혔다. 고은서가 무방비한 상태에서 전화를 받아서 그런지 목소리가 유난히 달콤하게 들렸다.곽승재는 지난번에 호텔에서 고은서와 같이 중독된 날을 떠올렸다. 두 번 정도 하고 나니 고은서는 기진맥진해서 침대에 쓰러졌다.이마에 땀이 송골송골 맺혔고 볼이 빨갛게 달아올라 있었다. 그날도 고은서는 애교 섞인 목소리로 곽승재를

  • 어게인, 비긴   제1123화

    송민준은 고은서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잘 알고 있었다.“감정은 원래 저도 모르게 생겨나는 거야. 나도 언제부터 너한테 호감을 느끼게 되었는지 모르겠어. 네가 나랑 만난 적이 없다고 해서 술집에서 있었던 일을 얘기한 거지. 정확히 그날부터 좋아했다는 건 아니야.”고은서가 고개를 끄덕이고는 솔직하게 대답했다.“오빠는 나한테 있어서 그저 친구의 오빠일 뿐이야. 미안하지만 오빠를 남자로 생각해 본 적이 없어. 오빠가 더 좋은 사람을 만나길 바랄게.”송민준이 씁쓸하게 웃었다.“은서야, 나한테 너무 차갑게 구는 거 아니야? 혹시 내가 잘못한 거라도 있어?”고은서의 말이 비수가 되어 그의 가슴에 꽂혔다. 그러나 송민준이 갑자기 호감을 느낀다고 말했을 때부터 고은서는 선을 그어야겠다고 마음먹었다.그녀가 정색하면서 입을 열었다.“민준 오빠, 해성과 북성에서 오빠랑 결혼하고 싶어 하는 여자가 얼마나 많은지 알아? 하지만 나는 오빠가 남자로 보이지 않더라. 앞으로도 그럴 일은 없을 거야.”송민준이 부드러운 어조로 물었다.“혹시 곽 대표 때문에 그러는 거야? 아니면 민시후 때문인가?”고은서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다른 사람과 상관없는 일이야. 오로지 내 생각이니까 이해해 줘.”송민준이 차분하게 말했다.“은서야, 내가 갑자기 호감 있다고 해서 많이 놀랐지? 네가 나를 그저 민아의 오빠로만 보니까 답답해서 그랬던 거야. 나는 아무 감정도 없는 기계가 아니라 사랑을 꿈꾸는 남자라는 걸 알려주고 싶었어. 지금 말해봤자 의미 없긴 하지만 그래도 너한테 얘기하니까 마음이 편안해졌어.”그가 말을 이었다.“너한테 잘 보이고 싶어서 하는 말이 아니라 누구라도 너랑 친하게 지내다 보면 호감을 느끼게 될 거야. 만약 내가 부담스럽게 굴었다면 오늘 일은 없었던 일로 하자. 예전처럼 계속 너랑 친하게 지내고 싶어.”고은서는 송민준을 쳐다보면서 생각에 잠겼다. 송민준은 너무 완벽한 사람이었고 무서울 정도로 침착했다.그녀가 단호하게 거절해도 화내거나 욕하지 않고 이 상황

  • 어게인, 비긴   제1122화

    곽승재가 피식 웃더니 입을 열었다.“송 대표님은 온화하지만 늘 다른 사람과 거리를 둔다고 들었는데 아닌가 봐요? 고은서한테 특별히 신경 쓰는 것 같아서요.”그가 대놓고 적대감을 드러냈지만 송민준은 여전히 미소를 지은 채 말했다.“아름다운 여자를 마다할 남자가 어디 있겠어요? 곽 대표님 말대로 은서를 특별한 사람이라고 생각하고 있어요.”그의 말에 곽승재의 표정이 급격히 어두워졌다. 고은서는 깜짝 놀라서 두 눈을 크게 뜨고 송민준을 쳐다보았다.송민준이 이런 상황에서 그녀한테 호감이 있다고 솔직하게 말할 줄 몰랐던 것이다.예전에 송민아와 박지연이 비슷한 얘기를 한 적이 있었지만 송민준이 명확하게 말한 적이 없어서 그런 마음을 품고 있다고 생각하지 않았다.그래서 고은서는 송민준이 평소에 잘해줄 때마다 동생의 친구여서 챙겨주는 줄 알았다.오늘 송민준이 갑자기 그녀한테 호감이 있다고 말하니 귀를 의심할 수밖에 없었다.“민준 오빠, 그런 장난은 재미없어요. 나처럼 한번 갔다 온 여자가 어떻게 송씨 가문의 며느리를 꿈꾸겠어요?”고은서가 자신을 비꼬자 송민준이 다정하게 말했다.“은서야, 너는 충분히 좋은 사람이니까 그렇게 말하지 마. 곽 대표님과 민시후가 너를 너무 좋아해서 내가 낄 자리가 없어.”“낄 자리가 없으면 마음을 접어야죠.”곽승재가 차갑게 말했다.“그리고 고은서는 송 대표님 같은 남자를 별로 좋아하지 않아요.”송민준이 고개를 돌리며 씩 웃었다.“곽 대표님, 사람 일은 어떻게 될지 아무도 몰라요. 곽 대표님이라고 해서 은서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다 아는 것도 아니고요.”송민준이 말을 이었다.“은서가 나를 좋아하지 않는 건 제가 적극적으로 표현하지 않아서 그래요. 저 같은 남자를 좋아하는지 아닌지 아직 모르는 거잖아요.”곽승재는 어이가 없다는 듯이 웃었다. 고은서는 두 사람이 유치하게 말싸움하는 모습을 지켜보다가 곽승재를 향해 말했다.“바쁘니까 먼저 가 봐. 나중에 다시 연락할게.”곽승재는 떠나기 싫었지만 이곳에 남아있어도 할 수

  • 어게인, 비긴   제1121화

    곽승재의 말을 들은 고은서는 무언가 이상하다는 것을 눈치챘다.“들어보니 확실히 여시은답지 않은 것 같아. 여재훈이 강박해서 어쩔 수 없이 온 건 아닐까?”여재훈은 여시은의 뒷배가 되어주었기에 그의 말에 무조건 복종해야만 할 것이다. 곽승재가 곰곰이 생각해 보더니 천천히 입을 열었다.“그런 가능성도 있는 것 같아. 오늘 마재경을 너무 쉽게 설득해서 그런지 찝찝한 기분이 들어.”그의 말에 고은서의 표정이 점점 굳어졌다.“그러면 여시은이 지시한 게 아니라 마재경이 우리를 속이려고 그랬다는 거야? 마재경의 목적이 무엇인지 알아내야 해.”고은서가 불안해하자 곽승재가 부드러운 어조로 말했다.“추측일 뿐이니 걱정하지 않아도 돼. 경찰 측에서 조사하고 있지만 나도 비밀리에 사람을 보내서 알아볼 생각이야. 해외 아이디를 추적하려면 시간이 좀 걸릴 것 같아.”고은서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알겠어.”“시간이 늦었으니 집까지 데려다줄게.”곽승재와 고은서가 같이 걷고 있을 때 그의 휴대폰 벨 소리가 울려 퍼졌다. 그는 휴대폰을 꺼내더니 미간을 찌푸렸다.고은서는 그의 휴대폰 화면을 힐끔 쳐다보았다. 발신자는 곽승재의 아버지 곽현수였다.곽현수는 Y 국에 가서 업무를 처리하느라 여씨 가문의 개업 파티에 참석하지 않았다. 아마 귀국했거나 최근에 일어난 일을 듣게 되어서 곽승재의 책임을 물으려고 전화를 걸었을 것이다.고은서가 차분하게 말했다.“나는 괜찮으니까 전화 받아.”곽승재는 굳은 표정을 하고 전화를 받았다. 전화 한 편에서 곽현수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그는 몇 분 지나지 않아서 전화를 끊어버렸다.고은서는 곽승재의 눈치를 살피다가 입을 열었다.“나는 기사님한테 연락하면 되니까 먼저 가 봐.”곽승재가 아무 말도 하지 않자 고은서가 말을 이었다.“나를 도와주는 건 고맙지만 그래도 아버지한테 가보는 게 어때? 괜히 나 때문에 네가 정신을 차리지 못한다고 할까 봐 그래.”곽승재는 입술을 깨물며 고개를 숙였다. 그는 마음이 놓이지 않아서 고은서를 혼자

  • 어게인, 비긴   제1120화

    고은서가 누가 사주했는지 밝히면 책임을 추궁하지 않겠다고 약속했지만, 마재경은 아직 경찰서를 떠날 수 없었다.경찰 조사에 협조해야 했고, 명확한 결론이 나온 후에야 책임 감경 가능성을 논의할 수 있기 때문이다.곽승재는 변호사를 불러 진전 상황을 체크하도록 했다. 나머지 일은 경찰에 맡기고 그들은 결과만 기다리면 된다.한바탕 분주히 보낸 후, 곽승재가 변호사와 얘기를 나누는 사이에 고은서가 먼저 밖으로 나왔다.정문에 도착한 고은서는 마침 경찰서에 온 여시은과 마주쳤다.그녀는 이전과 같은 실내복 차림에 창백한 얼굴로, 집사처럼 보이는 중년 남성과 함께 걸어오고 있었다.그녀는 고은서를 발견한 순간 분노를 쏟아냈다.“고은서, 아빠를 다치게 한 것도 책임을 묻지 않았는데, 오히려 나를 모함해?”“허튼소리로 아빠를 현혹시켜 결국 여기까지 오게 만들다니!”고은서는 살짝 놀랐다. 물론 여시은의 발악이 아니라 여재훈의 처사 때문이었다.그녀가 마재경의 말을 녹음해 여재훈에게 보내긴 했지만, 여재훈이 직접 여시은을 경찰서에 보낼 만큼 정의로운 선택을 할 줄은 생각지 못했다.고은서는 여재훈에게 약간의 존경심이 생겼다.외할아버지라면 이런 결단을 내리지 못했을 거라 생각했다.“고은서, 이번 이간질은 너무 지나쳤어.”여시은이 억울하다는 듯 울분을 토했다.“지난번 리셉션에서도 일부러 나를 모함하고. 대체 무슨 심보야?”이 순간까지도 억울한 척하는 여시은, 그녀를 바라보던 고은서는 쓴웃음을 지으며 말없이 주차장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잠깐만.”여시은은 곁에 있던 중년 남자에게 뭐라고 말한 뒤, 헐떡이며 고은서를 쫓아왔다.“똑바로 말해봐. 나한테 왜 이러는지?”여시은은 병이 완전히 낫지 않은 상태라 가슴을 움켜잡고 있는 모습이 더 연약하고 무력해 보였다.고은서는 역겨운 표정을 지으며 미간을 찌푸렸다.“매일 이러면 지치지도 않아? 머리에 문제가 있으면 정신과에 가서 제대로 치료를 받아. 여기서 미친 사람처럼 사실을 왜곡하지 말고.”여시은은 여전히 가슴을

  • 어게인, 비긴   제1119화

    이전에는 여시은이 이렇게 억울해하고 화를 내면 쫓아가서 좋은 말로 달랬다. 하지만 이번에는 마치 온몸의 기운이 빠진 듯 소파에 지친 몸을 던졌다.팔뚝의 상처가 욱신거렸지만 그는 꼼짝도 하지 않고 앉아 있었다.말을 잘 듣고 사랑스럽던 딸의 모습이 계속 눈앞에 아른거렸다. 그렇게 순진하고 세상 물정을 모르던 아이가, 먹고 노는 것이 가장 큰 취미였던 아이가 어쩌다 이렇게 잔인한 일을 벌였을까?잠시 후, 여시은이 캐리어를 들고 계단을 내려왔다.“어디 가려고?”여재훈이 미간을 찌푸리며 물었다.여시은은 서운하고 답답하고 슬픈 표정이었다.“남의 말 한두 마디로 저에게 사형 선고를 내렸는데, 더 이상 여기에 머물러 있을 의미가 없잖아요. 전혜라 아줌마를 찾아갈 거예요.”여재훈은 여전히 실망 가득한 표정을 지으며 지친 목소리로 말했다.“어디도 갈 수 없어. 내가 널 경찰서로 보낼 거니까.”“아빠, 그게...”여시은은 또 한 번 놀라며 눈을 동그랗게 떴고 심지어 몸도 휘청였다.“남의 이간질에 넘어가 저를 의심하는 것도 모자라 직접 경찰서로 보내시겠다고요?”갈라진 목소리, 붉어진 눈시울, 떨리는 입술, 누가 봐도 연약하고 불쌍해 보이는 모습이었다.여재훈은 마음이 약해질까 봐 눈을 감았다.“시은아, 잘못을 저질렀으면 벌을 받는 게 마땅해.”여시은은 캐리어 손잡이를 꽉 잡고 서 있었다. 마치 그렇게 하지 않으면 쓰러지기라도 할 것처럼.“아빠, 저는 고은서를 습격하라고 사주한 적 없어요. 정말 제가 한 일이 아니라고요. 제발 믿어주시면 안 돼요?”여재훈은 떨리는 목소리로 묻는 여시은을 외면했다.“나는 증거를 믿어. 네가 아니라면 경찰은 죄 없는 사람을 잡아두지 않을 거야.”“그냥 저를 겁주는 거죠? 사실은 저를 믿는 거 맞죠?”여시은은 그 자리에 선 채 소파에 앉아 있는 여재훈을 바라보며 말했다.“정말 아니에요. 요 며칠 집에만 있었고 어디도 가지 않았어요. 집에 있는 모든 사람이 증인이 될 수 있어요...”여재훈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집

  • 어게인, 비긴   제1118화

    음성 파일을 여니 울먹이는 여자 목소리가 흘러나왔다.[말할게. 다 말할게... 여시은 측 사람들이 너를 습격하라고 시켰어... 그쪽에서 연락이 와서 큰돈을 주겠다며 너를 따끔하게 혼내주라고 했어. 피를 보면 더 높은 보수를 주겠다고...][최고의 변호사를 선임해주겠다고도 했어... 그들은 내게 ‘이미 인플루언서로는 살 수 없으니 이 돈을 받고 새로운 삶을 살라’고 설득햇어...][내가 돈에 눈이 멀어서 그만... 평생 벌어도 손에 쥘 수 없는 금액이었어... 잠시 머리가 어떻게 됐었나 봐. 한 번만 용서해 줘...]음성은 여기서 끊겼다.여재훈이 직접 스피커폰 모드로 음성을 틀었기 때문에 옆에 있던 여시은도 모든 내용을 똑똑히 들었다.음성이 끝나자, 워낙 얼어붙은 모습이던 여시은은 얼굴이 하얗게 질린 채 눈이 동그래졌다.“아빠, 이건...”찰싹!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얼굴에 짜릿한 통증이 밀려왔다. 여재훈이 사정없이 따귀를 때린 것이다.“시은아, 네가 언제부터 이렇게 악랄한 아이가 됐어?”여재훈은 소파에서 벌떡 일어났다. 다친 손에 너무 힘을 줘서인지 그녀를 가리키는 손이 떨리고 있었다.“아빠, 손에...”여시은도 여재훈의 팔에 피가 스며 나온 것을 발견했다. 그녀는 서러움을 잊은 채 여재훈의 상태를 확인하려 했다.하지만 그녀가 다가가자, 여재훈은 몸을 뒤로 피하며 호통쳤다.“고은서 씨를 모함하고 고양이를 학대하고 도우미를 괴롭힌 것도 모자라 이제는 살인 청부까지 해? 너 정말 무법천지구나.”여시은의 한쪽 뺨은 빨갛게 부어올랐고, 눈빛은 놀라움에서 두려움으로 갔다가 다시 걱정으로 바뀌었고 지금은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이다.여재훈은 그녀에게 화를 내는 일이 거의 없었고, 엄하게 꾸짖는 경우조차 드물었다. 손찌검은 상상도 못 할 일이었고, 이번이 처음이었다.실망으로 싸늘해진 여재훈의 얼굴을 바라보며, 여시은은 닭똥 같은 눈물을 뚝뚝 떨구었다.“아빠, 지금 제가 무슨 말을 해도 믿어주지 않을 거죠? 다 거짓말로만 들리겠죠?”여시은은

  • 어게인, 비긴   제1117화

    도우미가 여재훈의 질문에 대답하기도 전에 여시은이 걱정스럽게 물었다.“그러네. 미화언니, 손이 왜 그래?”박미화는 손을 살짝 움츠리더니 고개를 숙인 채 대답했다.“걱정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정원에서 일하다가 부주의로 나뭇가지에 긁혔습니다.”“어제는 누군가가 할퀸 거라고 했잖아?”옆에 있던 다른 도우미가 의아한 듯 입을 열었다.박미화는 고개를 숙인 채 동료에게 경고의 눈빛을 보냈고, 이내 눈치를 알아챈 그 도우미는 급히 입을 다물었다.“대체 어떻게 된 거야?”두 사람이 눈빛을 교환하는 것을 감지한 여재훈이 엄숙하게 물었다.“집사는? 직원이 다른 사람과 싸워서 상처를 입은 것도 모르고 있단 말이야?”“집사님과 상관없는 일입니다.”집사에게 혼날까 봐 겁에 질린 박미화는 더 이상 거짓말하지 못했다.“사실 누구랑 싸운 것도, 할큄 당한 것도 아닙니다. 며칠 전, 아가씨를 부르러 올라갔을 때, 부주의로 아가씨 손톱에 긁힌 것입니다.”“아, 미화언니 손등을 그렇게 만든 게 나였어요?”여시은은 급히 일어나 박미화의 상처를 확인하더니 손등을 호호 불어주기까지 했다.“아팠겠다. 정말 내가 그랬어? 나는 왜 기억나지 않지?”박미화는 억지로 웃음을 지어 보이며 말했다.“그때 아가씨는 감정이 많이 격해져 있었어요. 무슨 억울한 일이 있는지 줄곧 울고 있었죠. 제가 아가씨의 손을 잡고 달래던 중에 아가씨의 손톱에 긁힌 거예요. 사소한 일이라 아가씨가 걱정할까 봐 말씀드리지 않았어요.”“그랬구나.”여시은은 머리를 탁 치며 후회스럽게 말했다.“난 정말 몰랐어. 진작에 말하지 그랬어? 이제야 알게 되니 너무 미안하잖아.”박미화는 고개를 저었다.“아가씨가 요즘 기분이 안 좋고 아프기도 하니 신경 쓰이게 하고 싶지 않았어요.”여재훈이 눈살을 찌푸리며 물었다.“다친 지 2~3일이나 지났는데 약을 바르지 않았어?”박미화는 약을 발랐지만 자꾸 일을 하니 상처가 빨리 낫지 않는 것 같다고 대답했다.하지만 여재훈은 그녀의 말을 믿지 않고 의심 어린 눈빛으로

  • 어게인, 비긴   제1116화

    곽승재의 말을 들은 마재경의 얼굴에 두려운 기색이 살짝 감돌았다.하지만 문득 뭔가를 떠올린 듯 그녀는 콧방귀를 뀌며 말했다.“협박하지 마세요. 가벼운 부상에 불과하니 유능한 변호사를 선임하면 기껏해야 3년 감옥에 있고 나올 거예요. 당신들이 주는 기회 따위는 필요 없어요.”마재경은 인정하지 않겠다고 마음 먹은 것이 확실했다. 3년 감옥살이로 거액의 돈을 바꾸는 것이 나쁘지 않다는 판단이었다.이로 미루어 보면, 마재경은 정말 누군가의 사주를 받은 것이다.고은서가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3년 청춘을 돈과 바꾸는 것이 이익이라고 생각해? 영원히 지워지지 않는 오점이 생겨 네가 어디 가든 따라다닐 텐데.”“게다가 그렇게 큰돈이 어디서 생겼는지 출처를 밝히지 못하면 경찰이 가만둘 것 같아? 일단 경찰이 알아내면 너의 공범도 잡히고 너는 비호죄까지 추가될 텐데. 정말 그럴 만한 가치가 있을까?”고은서의 말에 마재경은 약간 망설였지만 여전히 자기가 혼자 한 것이라고 고집했다. 돈도 어디서 입금됐는지 모르겠고, 어쩌면 팬 중 한 명이 보낸 것일 수도 있다고 둘러댔다.다소 김빠진 고은서는 곽승재와 함께 밖에 나가 마재경의 약점을 찾아보려 했다.그때 곽승재가 입을 열었다.“죄를 지었다는 것이 너의 고향에 알려지면 돈을 들고 금의환향하려는 생각이 실현될 수 있을까?”이 말에 마재경은 허를 찔린 듯 눈에 공포가 감돌았고 몸도 미세하게 떨리기 시작했다.잠시 후, 곽승재의 얼음장 같은 시선 속에서 마재경은 철저히 무너졌다.“말할게요. 전부 다 털어놓을게요...”...여씨 저택.여시은이 수액을 다 맞고 여재훈도 약을 먹은 뒤였다.가정의가 떠나자, 여시은은 여재훈의 옆에 앉았다.“아빠, 왜 그러세요? 계속 미간을 찌푸리고 계시는데, 상처 부위가 많이 아프신 거예요?”여재훈은 순하고 사리에 밝은 딸을 바라보며 결국 참지 못하고 물었다.“시은아, 네가 주워 온 길고양이가 너랑 그리 친하지 않은 것 같더구나?”여시은은 순진무구한 눈빛을 한 채 고개를 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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