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들이 공손한 태도에서 여재훈의 지위를 어렵지 않게 알 수 있었다.그들은 여시은이 수중에 든 물건들을 건네받으며 함께 밖으로 향했다.“곽 대표님, 우연이네요. 야식 사서 오시는 거예요?”여시은은 눈치 빠르게 곽승재를 발견하고 먼저 인사를 건넸다.곽승재는 차분히 물었다.“여시은 씨는 어디 가시는 길입니까?”여시은은 여재훈과의 통화를 간단히 설명했다.“곽 대표님. 오늘 정말 죄송합니다. 너무 많은 폐를 끼쳤네요. 그리고 조금 전에는 제가 조금 겁이 나서 은서 씨를 잡아 뒀는데 혹시 대표님 상처 회복에 영향을 드렸다면 다시 한번 사과드릴 수밖에 없겠네요.”여시은은 솔직하면서도 사랑스럽게 말했다.곽승재는 고은서를 한 번 바라보고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그럼 먼저 가볼게요. 안녕히 계세요.”여시은은 손을 흔들며 반짝이는 차 뒷좌석에 올라탔다.차가 떠나자 고은서는 참지 못하고 물었다.“여시은 씨 아버지는 높은 권력을 지니신 분인가요?”곽승재는 간결하게 답했다.“상당히 강한 실력을 갖춘 가문의 후계자야. 정치적 배경도 있긴 한데 더 깊게는 몰라. 나도 스쳐 가며 한번 만난 게 전부라서.”고은서가 고개를 끄덕였다.‘어쩐지 전화로 여기 상황을 파악하고 바로 사람을 보내 여시은을 데려가더라니.’“아직 아프다더니 왜 나갔어?”고은서가 물었다.곽승재는 손에 든 여러 봉투를 살짝 흔들며 말했다.“간식 좀 사 왔어. 배고프지는 않아? 근처에서 꼬치랑 간식 좀 샀는데 같이 먹을래?”곽승재가 고은서를 초대했다.‘도도하기로는 남한테 뒤지지 않는 사람이 이렇게 서민적인 면모를 보인다고? 지난번에는 호텔 밖에서 아침을 사다 주더니 오늘은 야식이네.’고은서는 곽승재가 일부러 그러는 것임을 알고 있었다.‘이런 음식은 절대 손대지 않으면서 순전히 나를 유혹하려고 산 게 분명해.’저녁을 대충 때웠던 고은서였기에 고소한 냄새가 풍기자 그녀는 입에 군침이 돌았다.“샀으니 버릴 수는 없잖아.”그렇게 말하며 고은서는 봉투 하나를 받아 들고 즉시 옥수수를
고은서의 이상함을 눈치챈 곽승재가 그녀를 잡으며 물었다.“왜 그래?”고은서는 곽승재의 손을 뿌리치며 경계심 가득한 눈빛으로 그를 쳐다보았다.“날 속인 거 아니야? 이 과일주 사실은 도수가 높은 거지?”곽승재는 차분히 답했다.“이거 파는 사장님이 도수가 높지 않아 마시기 좋다고 했어. 특히 여자들이 좋아한다고 해서 산 건데 못 믿겠으면 병에 적힌 도수를 확인해 봐.”고은서는 병을 잡으려고 손을 뻗었지만 손이 빗나가 허공만 휘저었다.곽승재는 그녀를 놀리지 않고 빈 병을 하나 들어 올려 그녀에게 건네며 말했다.“자, 봐봐. 10도에서 15도 사이야. 높은 도수는 아닌데 너무 빨리 마셔서 그런가보다.”음료수처럼 벌컥벌컥 마셨으니 어지럽지 않을 리가 없었다.고은서는 여전히 자신이 멀쩡하다고 느끼며 관자놀이를 톡톡 두드렸다.“얼른 방으로 돌아가. 난 씻고 자야겠어.”곽승재가 말했다.“너 취한 것 같아. 화장실에서 무슨 일이 생길지도 모르니까 네가 나올 때까지 기다렸다가 돌아갈게.”고은서는 눈을 가늘게 뜨고 그를 유심히 살폈다.담담한 표정과 침착한 말투를 한 곽승재는 그녀를 단순히 걱정하는 것 같았다.“괜찮아. 나 안 취했어. 아무 일도 없을 거야.”고은서가 단호히 말했다.“취하지 않았더라도 혼자 두면 안 돼. 호텔 3층에 피부과를 겸한 스파관이 있어. 여러 가지 서비스가 있던데 전신 스파도 받을 수 있대. 같이 가 줄까?”고은서는 최근 며칠간 피곤했던 터라 목욕도 하고 마사지를 받는 편이 방에서 곽승재와 함께 있는 것보다 나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그녀는 결국 그의 제안을 받아들이고 함께 3층으로 향했다.스파관은 남겨 구역이 나뉘어 있었다.고은서는 따뜻한 욕조에 편안히 몸을 담그고 미용사가 등을 마사지하는 것을 느꼈다.미용사의 숙련된 손길과 따뜻하고 향기로운 방 안에서 그녀는 점점 졸음에 빠져들었다.얼마나 지났을까 고은서는 누군가에게 들리는 느낌에 눈을 뜨려 했지만 어지럽고 무거운 머리로 인해 제대로 눈을 뜰 수가 없었다.
“은서야, 물 좀 마실래?”곽승재의 손이 고은서의 이마에 닿았다.고은서는 고개를 끄덕이려다가 곽승재가 이혼 합의서에 서명하라고 차갑게 말하던 모습이 문득 떠올랐다.‘왜 갑자기 나한테 잘해주나 했어! 달콤한 말로 속여서 사인하게 만들려고 그러는 거야!’고은서는 곽승재의 손을 홱 밀쳐내며 몸을 뒤로 물렸다.“일부러 속여가며 잘해주는 척할 필요 없어! 난 사인하지 않을 거야! 이혼 안 해!”순간 멍해진 곽승재가 침대에 앉으며 물었다.“은서야, 우리 지금 이혼했어? 안 했어?”그 말을 듣자 고은서는 눈물을 흘리며 흥분한 목소리로 외쳤다.“안 해! 나 이혼 안 해! 할머니 만날 거야! 할머니는 우리가 이혼하는 걸 허락하지 않을 거야! 날 강제로 사인하게 할 수는 없어!”곽승재는 눈앞의 고은서를 바라보았다.그녀의 얼굴은 술기운에 의해 붉어져 있었고 두 눈에는 긴장감과 혼란이 가득했다.눈물이 그녀의 뺨을 타고 흘렀고 그녀는 두 손을 자신의 등 뒤로 감췄다.마치 그가 억지로 그녀의 손을 잡고 사인하게 할까 두려워하는 듯했다.그녀의 모습에 곽승재의 마음은 저도 모르게 아파졌다.“은서야...”“나가! 난 사인 안 할 거야! 그건 내가 한 게 아니야! 이혼 못 해!”곽승재가 뭐라 하기도 전에 고은서는 침대 끝으로 가 몸을 움츠리고 고개를 베개 아래에 숨기며 울부짖었다.곽승재는 급히 고은서를 품에 안으며 부드러운 목소리로 달랬다.“흥분하지 마. 억지로 사인하라고 하지 않을게. 우리 이혼 안 해.”고은서는 곽승재의 품속에서 몸을 떨며 웅크렸다.그녀는 마치 자신만의 세계에 갇힌 듯 슬픔에 빠져 울었다.“승재 오빠, 그 방화 사건은 정말 내가 한 게 아니야. 제발 나 믿어줘...”고은서의 눈물이 곽승재의 팔에 닿자 그의 심장은 뜨겁게 달아오르며 아파졌다.곽승재는 그녀의 여린 몸을 꼭 안으며 그녀의 머리카락에 입을 맞췄다.“울지 마. 너 믿어.”...고은서는 목이 말라 깼다.흐릿한 정신으로 물을 마시려 몸을 일으켰지만 욱신거리는 두통이 찾
고은서의 질문에 곽승재는 평온한 표정을 유지하며 말했다.“취해서 계속 나한테 승재 오빠라고 부르면서 가지 못하게 했어.”고은서는 그 말을 듣고 미간을 찌푸렸다.피곤했던 그녀는 어젯밤 마사지를 받으며 깊이 잠 들었고 그 이후 어떻게 방에 돌아왔는지 무슨 말을 했는지 전혀 기억나지 않았다.“난 취했으니까 네 말이 맞는 걸로 할게.”고은서가 콧방귀를 뀌며 말을 이었다.“곽승재, 일부러 과일주 사서 마시게 하고 스파까지 데려간 거지? 그렇게 해서 내가 방심한 틈을 타서 뭐라도 하려고 한 거야?”곽승재는 화도 내지 않고 차분히 답했다.“너한테 무슨 짓 하려는 생각은 없었어. 너는 어젯밤 날 못 가게 했을 뿐만 아니라 계속해서 이혼은 안 된다고 하면서 강제로 사인시킬 수는 없다고 하더라. 고은서, 이혼은 분명히 네가 먼저 얘기했고 나한테 사인하라고 강요한 것도 너였잖아. 내가 언제 널 강제로 사인하게 한 적 있어?”고은서는 그 말을 듣고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또 환생한 걸 깜빡했나 보네. 정신병원에 있었던 걸로 착각했나...’전생에서 곽승재의 변호사가 이혼 합의서를 가지고 와서 강압적으로 사인하라고 했던 기억이 떠올랐다.그때 고은서는 거절하며 곽승재에게 직접 만나서 물어보겠다고 했지만 변호사는 싸늘한 어조로 곽승재가 바빠서 만날 시간이 없다고 했다.또한 사인하지 않으면 소송으로도 빠르게 판결을 받아내겠다고 협박하기도 서슴지 않았다.고은서는 울며 변호사에게 곽승재를 만나게 해달라고 부탁했지만 변호사는 그녀에게 짜증 내며 두 명의 간호사를 데리고 그녀를 강제로 사인하게 했다.“고은서, 방화 사건은 어떻게 된 거야? 나한테 진실을 밝히라고 했는데 무슨 진실을 얘기하는 거야?”곽승재가 물었다.고은서가 환각제를 먹었을 당시에도 곽승재를 보고 승재 오빠라고 부르며 사건의 진상을 밝혀달라고 했었다.어젯밤에도 마찬가지로 술에 취한 고은서는 억울하고 절망적인 어조로 방화 사건은 그녀가 한 일이 아니라고 믿어달라고 했다.처음에는 고은서가 환각 상태라서
“너와 단둘이 해외로 가서 마지막으로 한 번 더 노력해 보겠다고 할머니한테 부탁했어. 하지만 해외로 가기 전날 백유미 집에 누군가가 들어와 집을 털고 방화까지 했다고 했어. 범인이 잡히자 그 사람은 내가 시킨 거라고 했어. 너는 내 말을 믿지 않았고 나를 정신병원에 2년이 넘는 시간 동안 가둬놨어. 심지어 너는 백유미랑 결혼하려고 변호사를 보내 이혼 계약서에 사인하라고 강요했잖아!”고은서가 말하며 눈시울을 붉혔다.“나는 정신병원에서 인간답지 못한 삶을 살았어. 밥도 제대로 먹지 못해서 위암까지 걸렸어. 나는 내가 오래 살지 못할 걸 알았기에 외할아버지에게 마지막 인사라도 드리려고 했어. 할머니가 준 팔찌를 팔아서라도 너와 한 번만이라도 만나려고 했지만 내가 아무리 부탁하고 빌어도 너는 나를 내보내 주지 않았어. 내가 너와 백유미의 결혼을 방해할까 봐 두려워서.”곽승재가 정신병원에서 보였던 냉담한 표정과 그녀가 빨리 죽어버렸으면 좋겠다는 듯한 싸늘한 시선이 떠오르자 고은서는 목이 막힌 듯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환생한 지 몇 달 지났고 곽승재가 이전보다 그녀에게 잘해주고는 있지만 그 기억은 여전히 고은서를 분노와 절망으로 몰아넣었다.곽승재는 그 자리에 얼어붙은 듯 멈췄다.그는 여러 가능성을 떠올렸었지만 고은서가 꿈 때문에 한순간에 태도를 바꿀 줄은 생각지도 못했다.“곽승재, 비록 꿈에 불과하지만 내가 예전처럼 너에게 매달리면 꿈에서처럼 일이 진행되지 않았을까?”곽승재의 생각을 읽은 고은서는 갈라지는 목소리로 말했다.“너는 나를 한 번이라도 믿어본 적 있어? 전에 GS 그룹 프런트에 있는 직원이 나를 모함해도 너는 나를 믿지 않았는데 죽마고우 백유미의 말은 어떻겠어.”곽승재는 반박하려고 했지만 입이 두 개라도 할 말이 없다는 걸 깨닫고 이내 고개를 저었다.예전의 고은서는 그의 마음속에서 고집스럽고 성격이 궂은 사람으로만 여겨졌기 때문이다.고은서와 얽힌 일이 생기면 그는 저도 모르게 고은서가 문제를 일으켰다고 생각했다.“하지만 난 한 번도
곽승재는 기념일을 함께 보내지 않아서 화가 나서 뛰어내렸다고만 생각하며 이혼을 요구한다고 생각했다.그는 고은서가 방법을 바꿔서 매달린다고 여기고 결국은 후회할 거라고 믿고 있었다.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고은서의 결심은 더 확고해졌고 고은서는 여러 이유를 들었지만 곽승재는 여전히 그 이유를 이해할 수 없었다.하지만 고은서가 꿈에 관해 얘기하자 곽승재는 고은서가 꿈속에서 겪은 비참함을 떠올리며 마음이 아파졌다....고은서가 세안 후 방을 나왔을 때 곽승재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고은서는 그가 어디 갔는지 신경 쓰지 않고 짐을 정리한 후 기지를 들러 귀여운 아기판다들을 보고 오후 비행기를 타고 해성으로 돌아갔다.이륙 전 고은서는 늦게 온 곽승재를 다시 마주하게 되었다.곽승재는 그녀 옆에 앉아 작은 보석함을 건넸다.“은서야, 선물이야.”보석함을 열어보니 안에는 판다 모양의 금팔찌가 들어있었다. 팔찌 참들은 하나같이귀여운 판다 모양을 하고 있었는데 정교하고 특별했다.곽승재가 아침 내내 보이지 않았던 이유가 이 팔찌를 제작하느라 그랬다는 것을 고은서는 바로 눈치챘다.“이전에는 제대로 선물 준 적이 없잖아. 네가 판다를 좋아한다고 해서 특별히 주문 제작한 거야.”곽승재는 아침에 아무런 대화를 한 적도 없다는 듯이 차분히 말을 이었다.“금은 재물을 불러들인다고 해. 네가 좋아하는 판다와 함께 착용하면 일석이조라고 하더라.”다른 보석이라면 거절했겠지만 판다 모양의 팔찌는 처음 본 것이기도 했고 아래 이니셜이 각인되어 있어 고은서는 차마 거절할 수 없었다.“얼마야? 이체해 줄게.”고은서가 말했다.“은서야, 이건 선물이야. 날 너무 밀어내지 마.”고은서는 팔찌를 꺼내며 말을 이었다.“그럼 네가 재혼할 때 축의금 많이 내줄게.”“다른 사람이랑 결혼할 생각 없어.”고은서가 팔찌를 착용하려고 하자 곽승재가 나섰다.“내가 도와줄게.”“괜찮아.”고은서가 곽승재의 손을 피하며 팔찌를 착용했다.“그러면 이 팔찌는 내 재혼 선물을 미리 받은 걸로 할
고은서는 곽승재의 모습을 보고 화내지 않고 말했다“결혼 선물은 미리 고마워.”말을 마친 고은서는 팔찌를 잠시 감상하다가 핸드폰을 들고 앨범을 정리했다.두 시간 정도 지나자 비행기는 해성에 도착했다.고은서가 착륙하자 민시후에게서 연락이 와 공항에서 기다리고 있다고 했다.곽승재는 비행기에서 내리자마자 그를 알아본 사람에게 잡혀 한참 인사를 나눴다.고은서는 그 틈에 먼저 밖으로 향했다.주차장에 다다르자 민시후는 정말로 그녀를 기다리고 있었다.그는 여느 때처럼 눈에 띄는 스포츠카를 몰고 하얀색 바지를 입은 채 선글라스를 착용하고 있었다.차 옆에 기대 서 있는 민시후는 자유분방하면서도 멋진 모습이었다.“은서야, 여기!”그녀를 보자 민시후는 선글라스를 벗으며 손짓했고 그녀 쪽으로 걸어왔다.고은서는 민시후 쪽으로 가려고 했으나 갑자기 큰 손이 그녀의 손을 잡아끌었다.뒤돌아보니 어느새 따라 나온 곽승재가 불만스러운 표정을 하고 있었다.“왜 나 안 기다렸어? 운전기사가 우리 기다리고 있어. 내 차 타.”고은서가 답하기도 전에 민시후가 이미 그녀 곁으로 다가왔다.“곽 대표, 자꾸 나랑 은서가 같이 있는 걸 방해하는데 내가 매번 참을 거로 생각하는 건 아니겠지?”곽승재의 눈빛이 즉시 어두워졌다.고은서는 공항 라운지에서의 상황이 재현되는 것을 원치 않아 곽승재의 손을 뿌리치고 민시후의 소매를 잡아끌며 말했다.“가자.”“은서를 봐서라도 오늘은 그냥 넘어간다.”민시후는 곽승재를 향해 냉소적으로 말했다.차에 올라탄 고은서는 안전벨트를 매고 민시후에게 빨리 가자고 재촉했다. 그녀는 더 이상 주목받고 싶지 않았다.민시후도 망설이지 않고 엑셀을 밟았다.“곽 대표, 먼저 갈게.”곽승재 옆을 지나갈 때 민시후는 일부러 그에게 손을 흔들며 인사했다.곽승재의 표정은 더욱 어두워졌다.이를 본 고은서는 참지 못하고 민시후를 째려보며 말했다.“민 도련님. 제발 유치하게 굴지 않으면 안 돼?”민시후가 콧방귀를 뀌며 답했다.“곽승재가 나를 집으로 쫓아낸
고은서는 단호히 거절했다.민시후도 굳이 고집하지 않고 말했다.“그러면 내일 시간 내서 우리 형 좀 만나줘.”고은서는 어리둥절했다.“내가 왜 너희 형을 만나야 해? 만나서 뭐 하게.”고은서가 놀라서 물었지만 민시후는 느긋하게 답했다.“어떤 여자가 내 마음을 훔쳤는지 궁금해서 직접 만나보고 싶다는 거겠지.”고은서는 말문이 막혔다.“민시후, 너희 형을 만나는 건 절대 안 돼. 네가 적당한 이유 만들어서 거절해.”고은서가 단호히 말했다.“내가 왜 널 도와야 하지?”고은서는 할 말을 잃었다.“이게 날 돕는 거야? 우리 둘 사이에 아무 일도 없다는 거 네가 제일 잘 알잖아. 그런데 왜 해명 한마디도 안 하고 직접 거절하지도 않아?”민시후가 귀를 파며 답했다.“우리 스캔들이 퍼지지 않은 건 우리 형 덕분이기도 하거든. 내가 해명하면 믿을 것 같아?”고은서는 기가 막혔다.“그건 네가 자초한 일이잖아. 굳이 내 방에서 두 시간씩이나 붙어 있었으니 말이야. 민씨 가문 체면이 문제가 아니라 너는 내 체면을 깍고 싶은 거겠지!”“나도 민씨 가문 체면을 좀 깎아내리고 싶은데 그 집 사람들이 원치 않으니 어쩔 수 없잖아.”민시후가 능청스럽게 말을 이었다.“게다가 내가 그러지 않았으면 네가 무사히 곽승재랑 이혼할 수 있었겠어? 됐어. 이번엔 내가 한 번 도와줄게. 혼자 형 만나러 가면 되지 뭐. 대신 조건이 있어. 내가 너랑 사촌 동생 집까지 바래다줄게.”고은서는 의심스러운 눈길로 민시후를 바라보며 물었다.“왜 이렇게까지 적극적으로 날 데려다주겠다는 거야? 또 무슨 속셈이 있는 거 아니야?”빨간불 때문에 앞 차가 멈춰서자 민시후도 브레이크를 밟으며 장난스럽게 고은서를 보며 말했다.“그냥 너희 집사람들이 네 옆에 나 같은 사람이 있다는 걸 알게 하고 싶어서.”“알면 뭐가 달라지기라도 해?”고은서가 물었다.앞차가 천천히 움직이기 시작하자 민시후는 고개를 돌리며 답했다.“고은서, 네 EQ는 외모에 몰빵된 거야? 가족들이 알게 되면 그때 가서 다
“집까지 데려다줘서 고마워. 이만 가볼 테니까 오빠도 조심히 들어가.”말을 마친 고은서가 차에서 내리려고 할 때 송민준이 입을 열었다.“은서야, 잠시만 기다려 봐.”고은서가 고개를 돌리자 그가 말을 이었다.“부모님이 민아를 보러 곧 해성에 올 것 같아. 민아가 부모님께 네가 평소에 많이 도와준다고 말한 적이 있어서 이번에 같이 식사하고 싶다고 하셨어. 혹시 그때 시간이 되면 오지 않을래?”고은서는 송민아의 부모님과 같이 식사하는 자리라는 말에 바로 거절하려고 했다. 하지만 그녀의 어머니가 북성에서 지냈었고 송민아의 아버지와 아는 사이일 수도 있었다.고은서는 어머니와 송민아의 아버지가 아는 사이인지 궁금해서 직접 물어보고 싶었다.작은 정보라도 얻을 기회였기에 놓칠 수 없었다.그녀는 미소를 지으며 천천히 입을 열었다.“내가 민아를 도와준 게 뭐가 있다고 그래. 친구끼리 서로 도와주면서 사는 거지.”송민준은 부모님이 고은서를 만나고 싶어 한다면서 시간이 되면 꼭 와달라고 부탁했다. 고은서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내일 민아랑 얘기해 보고 결정할게.”송민준이 고개를 끄덕였다.고은서는 집으로 돌아가자마자 씻고 잠에 들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곽승재가 전화를 걸어왔다. 휴대폰 벨 소리에 잠이 깬 그녀는 발신자를 확인하고는 전화를 받았다.“무슨 일로 연락했어?”“은서야, 설마 자고 있었던 거야? 안 자는 줄 알고 전화했어.”곽승재는 고은서가 이 시간에 자고 있을 줄 몰랐다. 평소에 그녀는 자주 밤을 새웠기 때문이었다.고은서는 눈을 감은 채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피곤해서 일찍 누웠어.”그녀의 목소리가 곽승재의 귀를 간지럽혔다. 고은서가 무방비한 상태에서 전화를 받아서 그런지 목소리가 유난히 달콤하게 들렸다.곽승재는 지난번에 호텔에서 고은서와 같이 중독된 날을 떠올렸다. 두 번 정도 하고 나니 고은서는 기진맥진해서 침대에 쓰러졌다.이마에 땀이 송골송골 맺혔고 볼이 빨갛게 달아올라 있었다. 그날도 고은서는 애교 섞인 목소리로 곽승재를
송민준은 고은서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잘 알고 있었다.“감정은 원래 저도 모르게 생겨나는 거야. 나도 언제부터 너한테 호감을 느끼게 되었는지 모르겠어. 네가 나랑 만난 적이 없다고 해서 술집에서 있었던 일을 얘기한 거지. 정확히 그날부터 좋아했다는 건 아니야.”고은서가 고개를 끄덕이고는 솔직하게 대답했다.“오빠는 나한테 있어서 그저 친구의 오빠일 뿐이야. 미안하지만 오빠를 남자로 생각해 본 적이 없어. 오빠가 더 좋은 사람을 만나길 바랄게.”송민준이 씁쓸하게 웃었다.“은서야, 나한테 너무 차갑게 구는 거 아니야? 혹시 내가 잘못한 거라도 있어?”고은서의 말이 비수가 되어 그의 가슴에 꽂혔다. 그러나 송민준이 갑자기 호감을 느낀다고 말했을 때부터 고은서는 선을 그어야겠다고 마음먹었다.그녀가 정색하면서 입을 열었다.“민준 오빠, 해성과 북성에서 오빠랑 결혼하고 싶어 하는 여자가 얼마나 많은지 알아? 하지만 나는 오빠가 남자로 보이지 않더라. 앞으로도 그럴 일은 없을 거야.”송민준이 부드러운 어조로 물었다.“혹시 곽 대표 때문에 그러는 거야? 아니면 민시후 때문인가?”고은서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다른 사람과 상관없는 일이야. 오로지 내 생각이니까 이해해 줘.”송민준이 차분하게 말했다.“은서야, 내가 갑자기 호감 있다고 해서 많이 놀랐지? 네가 나를 그저 민아의 오빠로만 보니까 답답해서 그랬던 거야. 나는 아무 감정도 없는 기계가 아니라 사랑을 꿈꾸는 남자라는 걸 알려주고 싶었어. 지금 말해봤자 의미 없긴 하지만 그래도 너한테 얘기하니까 마음이 편안해졌어.”그가 말을 이었다.“너한테 잘 보이고 싶어서 하는 말이 아니라 누구라도 너랑 친하게 지내다 보면 호감을 느끼게 될 거야. 만약 내가 부담스럽게 굴었다면 오늘 일은 없었던 일로 하자. 예전처럼 계속 너랑 친하게 지내고 싶어.”고은서는 송민준을 쳐다보면서 생각에 잠겼다. 송민준은 너무 완벽한 사람이었고 무서울 정도로 침착했다.그녀가 단호하게 거절해도 화내거나 욕하지 않고 이 상황
곽승재가 피식 웃더니 입을 열었다.“송 대표님은 온화하지만 늘 다른 사람과 거리를 둔다고 들었는데 아닌가 봐요? 고은서한테 특별히 신경 쓰는 것 같아서요.”그가 대놓고 적대감을 드러냈지만 송민준은 여전히 미소를 지은 채 말했다.“아름다운 여자를 마다할 남자가 어디 있겠어요? 곽 대표님 말대로 은서를 특별한 사람이라고 생각하고 있어요.”그의 말에 곽승재의 표정이 급격히 어두워졌다. 고은서는 깜짝 놀라서 두 눈을 크게 뜨고 송민준을 쳐다보았다.송민준이 이런 상황에서 그녀한테 호감이 있다고 솔직하게 말할 줄 몰랐던 것이다.예전에 송민아와 박지연이 비슷한 얘기를 한 적이 있었지만 송민준이 명확하게 말한 적이 없어서 그런 마음을 품고 있다고 생각하지 않았다.그래서 고은서는 송민준이 평소에 잘해줄 때마다 동생의 친구여서 챙겨주는 줄 알았다.오늘 송민준이 갑자기 그녀한테 호감이 있다고 말하니 귀를 의심할 수밖에 없었다.“민준 오빠, 그런 장난은 재미없어요. 나처럼 한번 갔다 온 여자가 어떻게 송씨 가문의 며느리를 꿈꾸겠어요?”고은서가 자신을 비꼬자 송민준이 다정하게 말했다.“은서야, 너는 충분히 좋은 사람이니까 그렇게 말하지 마. 곽 대표님과 민시후가 너를 너무 좋아해서 내가 낄 자리가 없어.”“낄 자리가 없으면 마음을 접어야죠.”곽승재가 차갑게 말했다.“그리고 고은서는 송 대표님 같은 남자를 별로 좋아하지 않아요.”송민준이 고개를 돌리며 씩 웃었다.“곽 대표님, 사람 일은 어떻게 될지 아무도 몰라요. 곽 대표님이라고 해서 은서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다 아는 것도 아니고요.”송민준이 말을 이었다.“은서가 나를 좋아하지 않는 건 제가 적극적으로 표현하지 않아서 그래요. 저 같은 남자를 좋아하는지 아닌지 아직 모르는 거잖아요.”곽승재는 어이가 없다는 듯이 웃었다. 고은서는 두 사람이 유치하게 말싸움하는 모습을 지켜보다가 곽승재를 향해 말했다.“바쁘니까 먼저 가 봐. 나중에 다시 연락할게.”곽승재는 떠나기 싫었지만 이곳에 남아있어도 할 수
곽승재의 말을 들은 고은서는 무언가 이상하다는 것을 눈치챘다.“들어보니 확실히 여시은답지 않은 것 같아. 여재훈이 강박해서 어쩔 수 없이 온 건 아닐까?”여재훈은 여시은의 뒷배가 되어주었기에 그의 말에 무조건 복종해야만 할 것이다. 곽승재가 곰곰이 생각해 보더니 천천히 입을 열었다.“그런 가능성도 있는 것 같아. 오늘 마재경을 너무 쉽게 설득해서 그런지 찝찝한 기분이 들어.”그의 말에 고은서의 표정이 점점 굳어졌다.“그러면 여시은이 지시한 게 아니라 마재경이 우리를 속이려고 그랬다는 거야? 마재경의 목적이 무엇인지 알아내야 해.”고은서가 불안해하자 곽승재가 부드러운 어조로 말했다.“추측일 뿐이니 걱정하지 않아도 돼. 경찰 측에서 조사하고 있지만 나도 비밀리에 사람을 보내서 알아볼 생각이야. 해외 아이디를 추적하려면 시간이 좀 걸릴 것 같아.”고은서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알겠어.”“시간이 늦었으니 집까지 데려다줄게.”곽승재와 고은서가 같이 걷고 있을 때 그의 휴대폰 벨 소리가 울려 퍼졌다. 그는 휴대폰을 꺼내더니 미간을 찌푸렸다.고은서는 그의 휴대폰 화면을 힐끔 쳐다보았다. 발신자는 곽승재의 아버지 곽현수였다.곽현수는 Y 국에 가서 업무를 처리하느라 여씨 가문의 개업 파티에 참석하지 않았다. 아마 귀국했거나 최근에 일어난 일을 듣게 되어서 곽승재의 책임을 물으려고 전화를 걸었을 것이다.고은서가 차분하게 말했다.“나는 괜찮으니까 전화 받아.”곽승재는 굳은 표정을 하고 전화를 받았다. 전화 한 편에서 곽현수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그는 몇 분 지나지 않아서 전화를 끊어버렸다.고은서는 곽승재의 눈치를 살피다가 입을 열었다.“나는 기사님한테 연락하면 되니까 먼저 가 봐.”곽승재가 아무 말도 하지 않자 고은서가 말을 이었다.“나를 도와주는 건 고맙지만 그래도 아버지한테 가보는 게 어때? 괜히 나 때문에 네가 정신을 차리지 못한다고 할까 봐 그래.”곽승재는 입술을 깨물며 고개를 숙였다. 그는 마음이 놓이지 않아서 고은서를 혼자
고은서가 누가 사주했는지 밝히면 책임을 추궁하지 않겠다고 약속했지만, 마재경은 아직 경찰서를 떠날 수 없었다.경찰 조사에 협조해야 했고, 명확한 결론이 나온 후에야 책임 감경 가능성을 논의할 수 있기 때문이다.곽승재는 변호사를 불러 진전 상황을 체크하도록 했다. 나머지 일은 경찰에 맡기고 그들은 결과만 기다리면 된다.한바탕 분주히 보낸 후, 곽승재가 변호사와 얘기를 나누는 사이에 고은서가 먼저 밖으로 나왔다.정문에 도착한 고은서는 마침 경찰서에 온 여시은과 마주쳤다.그녀는 이전과 같은 실내복 차림에 창백한 얼굴로, 집사처럼 보이는 중년 남성과 함께 걸어오고 있었다.그녀는 고은서를 발견한 순간 분노를 쏟아냈다.“고은서, 아빠를 다치게 한 것도 책임을 묻지 않았는데, 오히려 나를 모함해?”“허튼소리로 아빠를 현혹시켜 결국 여기까지 오게 만들다니!”고은서는 살짝 놀랐다. 물론 여시은의 발악이 아니라 여재훈의 처사 때문이었다.그녀가 마재경의 말을 녹음해 여재훈에게 보내긴 했지만, 여재훈이 직접 여시은을 경찰서에 보낼 만큼 정의로운 선택을 할 줄은 생각지 못했다.고은서는 여재훈에게 약간의 존경심이 생겼다.외할아버지라면 이런 결단을 내리지 못했을 거라 생각했다.“고은서, 이번 이간질은 너무 지나쳤어.”여시은이 억울하다는 듯 울분을 토했다.“지난번 리셉션에서도 일부러 나를 모함하고. 대체 무슨 심보야?”이 순간까지도 억울한 척하는 여시은, 그녀를 바라보던 고은서는 쓴웃음을 지으며 말없이 주차장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잠깐만.”여시은은 곁에 있던 중년 남자에게 뭐라고 말한 뒤, 헐떡이며 고은서를 쫓아왔다.“똑바로 말해봐. 나한테 왜 이러는지?”여시은은 병이 완전히 낫지 않은 상태라 가슴을 움켜잡고 있는 모습이 더 연약하고 무력해 보였다.고은서는 역겨운 표정을 지으며 미간을 찌푸렸다.“매일 이러면 지치지도 않아? 머리에 문제가 있으면 정신과에 가서 제대로 치료를 받아. 여기서 미친 사람처럼 사실을 왜곡하지 말고.”여시은은 여전히 가슴을
이전에는 여시은이 이렇게 억울해하고 화를 내면 쫓아가서 좋은 말로 달랬다. 하지만 이번에는 마치 온몸의 기운이 빠진 듯 소파에 지친 몸을 던졌다.팔뚝의 상처가 욱신거렸지만 그는 꼼짝도 하지 않고 앉아 있었다.말을 잘 듣고 사랑스럽던 딸의 모습이 계속 눈앞에 아른거렸다. 그렇게 순진하고 세상 물정을 모르던 아이가, 먹고 노는 것이 가장 큰 취미였던 아이가 어쩌다 이렇게 잔인한 일을 벌였을까?잠시 후, 여시은이 캐리어를 들고 계단을 내려왔다.“어디 가려고?”여재훈이 미간을 찌푸리며 물었다.여시은은 서운하고 답답하고 슬픈 표정이었다.“남의 말 한두 마디로 저에게 사형 선고를 내렸는데, 더 이상 여기에 머물러 있을 의미가 없잖아요. 전혜라 아줌마를 찾아갈 거예요.”여재훈은 여전히 실망 가득한 표정을 지으며 지친 목소리로 말했다.“어디도 갈 수 없어. 내가 널 경찰서로 보낼 거니까.”“아빠, 그게...”여시은은 또 한 번 놀라며 눈을 동그랗게 떴고 심지어 몸도 휘청였다.“남의 이간질에 넘어가 저를 의심하는 것도 모자라 직접 경찰서로 보내시겠다고요?”갈라진 목소리, 붉어진 눈시울, 떨리는 입술, 누가 봐도 연약하고 불쌍해 보이는 모습이었다.여재훈은 마음이 약해질까 봐 눈을 감았다.“시은아, 잘못을 저질렀으면 벌을 받는 게 마땅해.”여시은은 캐리어 손잡이를 꽉 잡고 서 있었다. 마치 그렇게 하지 않으면 쓰러지기라도 할 것처럼.“아빠, 저는 고은서를 습격하라고 사주한 적 없어요. 정말 제가 한 일이 아니라고요. 제발 믿어주시면 안 돼요?”여재훈은 떨리는 목소리로 묻는 여시은을 외면했다.“나는 증거를 믿어. 네가 아니라면 경찰은 죄 없는 사람을 잡아두지 않을 거야.”“그냥 저를 겁주는 거죠? 사실은 저를 믿는 거 맞죠?”여시은은 그 자리에 선 채 소파에 앉아 있는 여재훈을 바라보며 말했다.“정말 아니에요. 요 며칠 집에만 있었고 어디도 가지 않았어요. 집에 있는 모든 사람이 증인이 될 수 있어요...”여재훈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집
음성 파일을 여니 울먹이는 여자 목소리가 흘러나왔다.[말할게. 다 말할게... 여시은 측 사람들이 너를 습격하라고 시켰어... 그쪽에서 연락이 와서 큰돈을 주겠다며 너를 따끔하게 혼내주라고 했어. 피를 보면 더 높은 보수를 주겠다고...][최고의 변호사를 선임해주겠다고도 했어... 그들은 내게 ‘이미 인플루언서로는 살 수 없으니 이 돈을 받고 새로운 삶을 살라’고 설득햇어...][내가 돈에 눈이 멀어서 그만... 평생 벌어도 손에 쥘 수 없는 금액이었어... 잠시 머리가 어떻게 됐었나 봐. 한 번만 용서해 줘...]음성은 여기서 끊겼다.여재훈이 직접 스피커폰 모드로 음성을 틀었기 때문에 옆에 있던 여시은도 모든 내용을 똑똑히 들었다.음성이 끝나자, 워낙 얼어붙은 모습이던 여시은은 얼굴이 하얗게 질린 채 눈이 동그래졌다.“아빠, 이건...”찰싹!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얼굴에 짜릿한 통증이 밀려왔다. 여재훈이 사정없이 따귀를 때린 것이다.“시은아, 네가 언제부터 이렇게 악랄한 아이가 됐어?”여재훈은 소파에서 벌떡 일어났다. 다친 손에 너무 힘을 줘서인지 그녀를 가리키는 손이 떨리고 있었다.“아빠, 손에...”여시은도 여재훈의 팔에 피가 스며 나온 것을 발견했다. 그녀는 서러움을 잊은 채 여재훈의 상태를 확인하려 했다.하지만 그녀가 다가가자, 여재훈은 몸을 뒤로 피하며 호통쳤다.“고은서 씨를 모함하고 고양이를 학대하고 도우미를 괴롭힌 것도 모자라 이제는 살인 청부까지 해? 너 정말 무법천지구나.”여시은의 한쪽 뺨은 빨갛게 부어올랐고, 눈빛은 놀라움에서 두려움으로 갔다가 다시 걱정으로 바뀌었고 지금은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이다.여재훈은 그녀에게 화를 내는 일이 거의 없었고, 엄하게 꾸짖는 경우조차 드물었다. 손찌검은 상상도 못 할 일이었고, 이번이 처음이었다.실망으로 싸늘해진 여재훈의 얼굴을 바라보며, 여시은은 닭똥 같은 눈물을 뚝뚝 떨구었다.“아빠, 지금 제가 무슨 말을 해도 믿어주지 않을 거죠? 다 거짓말로만 들리겠죠?”여시은은
도우미가 여재훈의 질문에 대답하기도 전에 여시은이 걱정스럽게 물었다.“그러네. 미화언니, 손이 왜 그래?”박미화는 손을 살짝 움츠리더니 고개를 숙인 채 대답했다.“걱정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정원에서 일하다가 부주의로 나뭇가지에 긁혔습니다.”“어제는 누군가가 할퀸 거라고 했잖아?”옆에 있던 다른 도우미가 의아한 듯 입을 열었다.박미화는 고개를 숙인 채 동료에게 경고의 눈빛을 보냈고, 이내 눈치를 알아챈 그 도우미는 급히 입을 다물었다.“대체 어떻게 된 거야?”두 사람이 눈빛을 교환하는 것을 감지한 여재훈이 엄숙하게 물었다.“집사는? 직원이 다른 사람과 싸워서 상처를 입은 것도 모르고 있단 말이야?”“집사님과 상관없는 일입니다.”집사에게 혼날까 봐 겁에 질린 박미화는 더 이상 거짓말하지 못했다.“사실 누구랑 싸운 것도, 할큄 당한 것도 아닙니다. 며칠 전, 아가씨를 부르러 올라갔을 때, 부주의로 아가씨 손톱에 긁힌 것입니다.”“아, 미화언니 손등을 그렇게 만든 게 나였어요?”여시은은 급히 일어나 박미화의 상처를 확인하더니 손등을 호호 불어주기까지 했다.“아팠겠다. 정말 내가 그랬어? 나는 왜 기억나지 않지?”박미화는 억지로 웃음을 지어 보이며 말했다.“그때 아가씨는 감정이 많이 격해져 있었어요. 무슨 억울한 일이 있는지 줄곧 울고 있었죠. 제가 아가씨의 손을 잡고 달래던 중에 아가씨의 손톱에 긁힌 거예요. 사소한 일이라 아가씨가 걱정할까 봐 말씀드리지 않았어요.”“그랬구나.”여시은은 머리를 탁 치며 후회스럽게 말했다.“난 정말 몰랐어. 진작에 말하지 그랬어? 이제야 알게 되니 너무 미안하잖아.”박미화는 고개를 저었다.“아가씨가 요즘 기분이 안 좋고 아프기도 하니 신경 쓰이게 하고 싶지 않았어요.”여재훈이 눈살을 찌푸리며 물었다.“다친 지 2~3일이나 지났는데 약을 바르지 않았어?”박미화는 약을 발랐지만 자꾸 일을 하니 상처가 빨리 낫지 않는 것 같다고 대답했다.하지만 여재훈은 그녀의 말을 믿지 않고 의심 어린 눈빛으로
곽승재의 말을 들은 마재경의 얼굴에 두려운 기색이 살짝 감돌았다.하지만 문득 뭔가를 떠올린 듯 그녀는 콧방귀를 뀌며 말했다.“협박하지 마세요. 가벼운 부상에 불과하니 유능한 변호사를 선임하면 기껏해야 3년 감옥에 있고 나올 거예요. 당신들이 주는 기회 따위는 필요 없어요.”마재경은 인정하지 않겠다고 마음 먹은 것이 확실했다. 3년 감옥살이로 거액의 돈을 바꾸는 것이 나쁘지 않다는 판단이었다.이로 미루어 보면, 마재경은 정말 누군가의 사주를 받은 것이다.고은서가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3년 청춘을 돈과 바꾸는 것이 이익이라고 생각해? 영원히 지워지지 않는 오점이 생겨 네가 어디 가든 따라다닐 텐데.”“게다가 그렇게 큰돈이 어디서 생겼는지 출처를 밝히지 못하면 경찰이 가만둘 것 같아? 일단 경찰이 알아내면 너의 공범도 잡히고 너는 비호죄까지 추가될 텐데. 정말 그럴 만한 가치가 있을까?”고은서의 말에 마재경은 약간 망설였지만 여전히 자기가 혼자 한 것이라고 고집했다. 돈도 어디서 입금됐는지 모르겠고, 어쩌면 팬 중 한 명이 보낸 것일 수도 있다고 둘러댔다.다소 김빠진 고은서는 곽승재와 함께 밖에 나가 마재경의 약점을 찾아보려 했다.그때 곽승재가 입을 열었다.“죄를 지었다는 것이 너의 고향에 알려지면 돈을 들고 금의환향하려는 생각이 실현될 수 있을까?”이 말에 마재경은 허를 찔린 듯 눈에 공포가 감돌았고 몸도 미세하게 떨리기 시작했다.잠시 후, 곽승재의 얼음장 같은 시선 속에서 마재경은 철저히 무너졌다.“말할게요. 전부 다 털어놓을게요...”...여씨 저택.여시은이 수액을 다 맞고 여재훈도 약을 먹은 뒤였다.가정의가 떠나자, 여시은은 여재훈의 옆에 앉았다.“아빠, 왜 그러세요? 계속 미간을 찌푸리고 계시는데, 상처 부위가 많이 아프신 거예요?”여재훈은 순하고 사리에 밝은 딸을 바라보며 결국 참지 못하고 물었다.“시은아, 네가 주워 온 길고양이가 너랑 그리 친하지 않은 것 같더구나?”여시은은 순진무구한 눈빛을 한 채 고개를 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