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지연이 폰을 들고 확인해 보니 온승준한테서 온 문자였다.[지연아, 나 전에 만났던 카페에 있는데. 우리 얘기 좀 나누면 안 될까?]옆에 있던 고은서도 그 문자를 보았다.“만나러 갈 거야?”박지연은 고민하더니 고개를 끄덕였다.“가서 얘기 해보는 게 좋을 것 같아.”‘할 말은 이미 다 했지만 온승준한테 확실하게 재혼할 생각이 없다고 더는 온씨 집안 사람들과 엮이고 싶지 않다고 말해줘야지.’“내가 같이 가줄까?”고은서가 걱정하면서 물었다.“혼자 가도 괜찮아.”박지연이 고개를 저으며 답했다.온승준은 워낙 성격이 냉담한 편이어서 먼저 시비를 걸면서 그녀를 난감하게 만들지는 않을 것이다.박지연은 외투를 하나 걸치고 온승준이 말한 카페로 갔는데 그는 이미 자리에 앉아서 그녀를 기다리고 있었다.“지연아.”온승준이 그녀를 향해 먼저 인사했다.박지연은 고개를 끄덕이면서 그의 맞은편 자리에 앉았다.“커피랑 디저트 시켰는데 얼른 먹어 봐.”온승준이 어색해하며 말했다.박지연은 전과 똑같은 커피와 디저트를 보면서 이상한 느낌이 들었다.‘자세한 부분을 관찰할 줄 모르는 것도 아니고 사람을 보살필 줄도 모르는 게 아니었어. 그저 나한테 시간 낭비하기 싫었던 거야.’“지연아, 오늘에 있었던 일은 내가 대신 사과할게. 또 너랑 다툴 줄은 생각 못 했어...”온승준이 피곤하다는 듯이 말했다.온범준은 분명히 그에게 박지연한테 사과하려고 그녀를 부른 것이라고 하면서 그가 그녀와 재혼하는 걸 더는 막지 않겠다고 했었다.그러나 병원에 도착하자마자 그런 광경을 목격하게 될 줄은 생각도 못 했다.박지연이 고개를 들고 온승준을 살펴보았는데 그의 머리카락은 이리저리 흐트러져 있었고 옷도 구깃구깃해진 데다가 무척 피곤해 보였다.이토록 낭패한 그의 모습은 이번이 처음이었다.평소의 그는 옷차림을 아주 신경 쓰면서 사람들에게 쉽게 다가갈 수 없는 인상을 주곤 했었는데 지금은 마치 타락한 천사 같은 면모를 한 채 안절부절못하고 있었다.과거의 박지연이라면 아마 마음 아
온승준이 황급히 답했다.“어머니 정서가 안정되면 너한테 사과하라고 내가 잘 얘기해볼게.”“필요 없어.”박지연이 사양했다.“온승준, 내가 원하는 건 너와 너희 가족들이랑 거리를 두면서 조용히 지내는 거야. 이렇게 나한테 집착하는 걸 원한 게 아니라고. 내가 했던 여러 가지 행동들 때문에 다들 네가 재혼하겠다고 말만 꺼내면 내가 쉽게 돌아설 거라고 오해한 것 같은데 난 너에게 목맬 생각이 없어. 나에 대해 잘 모르고 있는 것 같은데 난 한 번 결정 내리면 절대 마음을 바꾸지 않아. 사랑할 땐 내 전부를 퍼줄 수 있지만 손 놓겠다고 마음먹기만 하면 절대 뒤돌아보지 않아.”“지연아...”“자책할 필요 없어. 적어도 난 후회 없이 널 사랑했었으니까.”‘비록 내가 일방적으로 사랑한 거지만.’박지연은 커피를 한 모금 마시고 말을 이어갔다.“온승준, 이런 의미 없는 일은 더는 하지 않는 게 좋을 거야. 난 너랑 재혼할 생각 없어. 너랑 더는 엮이고도 싶지 않아. 넌 좋은 의사가 맞지만 좋은 남편은 아니었어.”“지연아, 이후로 선물도 사주고 네 친구들과 함께 밥도 먹고 이모 집도 같이 가줄게. 또 따로 요구하는 게 있어? 얼마든지 말해. 내가 다 고칠게.”온승준이 다급하게 말했다.종래로 자신의 감정을 표달하지 않던 온승준치고는 아주 드문 일이었다.“아무것도 요구하는 게 없어. 날 위해 고칠 필요도 없어.”박지연이 피식 웃으며 말했다.“넌 아무것도 잘못한 게 없어. 네 성격 자체가 사랑에 대해 큰 욕망이 없고 담담한 편이잖아. 하지만 난 내 마음을 알아주고 나와 함께 기뻐해 주고 슬퍼해 줄 사람이 필요해. 네가 아무리 고친다고 해도 내 요구에 도달할 수 없단 말이야. 난 너와의 결혼 생활을 유지해 가기 위해 내 모든 열정과 진심을 퍼부었어. 더는 네가 개변할 때까지 기다려줄 생각 없어. 네 가족들의 비위를 맞춰줄 생각도 없고.”“그럴 필요 없어. 우리끼리 지내면서 더는 우리 부모님 눈치 보지 않아 돼. 만나기 싫으면 만나지 않아도 돼. 응?”온승준
곽승연이 아주 나지막한 목소리로 고은서를 향해 언니라고 불렀다.고은서는 이곳에서 곽승연과 마주칠 줄을 생각 못 했는지 약간 의아해했다.곽승연 옆에는 서연정도 함께 있었는데 방금전에 그녀와 민시후가 장난치는 모습을 본 듯했다.고은서는 저도 모르게 어색해 났다.곽승재와 민시후가 서로 아는 사이였기에 그녀는 민시후를 따로 소개하지 않고 곽승연과 서연정이 있는 곳으로 걸어갔다.“어머니, 동물원엔 어쩐 일로 오셨어요?”“승연이가 아기 동물들을 보고싶어 해서 바람도 쐴 겸 온 거야.”서연정이 온화하게 웃으며 말했다.“그런데 오늘 친구랑 함께 와서 같이 돌진 못할 것 같아요. 여기 환경도 꽤 괜찮고 한데 승연이랑 좋은 시간 보내다 가세요.”고은서가 뒤돌아 민시후를 한 번 보고는 서연정에게 말했다.“알겠어.”서연정이 고개를 끄덕였다.“승연아, 언니가 오늘은 일이 있어서 가봐야 할 것 같아. 며칠 후에 향도 갖다 줄 겸 본가에 들를 건데 그때 다시 게임하면서 같이 놀자.”“응.”곽승연은 아쉬워하면서 고개를 끄덕였다.이를 본 고은서는 며칠 전에 산 옥토끼를 꺼내 건네주면서 그녀를 달랬다.“이건 언니가 너한테 주려고 산 선물이야.”곽승연은 이내 옥토끼를 쥐고 이리저리 만져보면서 좋아했다.“은서야, 얼른 친구한테로 가 봐. 승연이는 걱정하지 않아도 돼.”옆에 있던 서연정이 입을 열었다.“네.”고은서는 그제서야 민시후와 함께 다른 곳으로 향했다.“나 아무 사람한테 화낼 정도로 옹졸한 사람이 아니야.”민시후가 찌뿌둥해 하며 말했다.‘설마 어머니랑 승연이한테 자신을 소개해주지 않았다고 삐진 거야?’고은서는 저도 모르게 웃음이 나왔다.“이미 누군지 알고 있는데 굳이 소개해줄 필요 있어?”“의미가 다르잖아.”민시후가 콧방귀를 뀌면서 말했다.“아직 멀리 가지 않았을 거야. 지금이라도 다시 가서 소개시켜줄게.”“됐어. 나중에 신분이 더 레벨업 되면 널 데리고 직접 곽씨 가문에 방문하러 갈 거야.”고은서는 그 광경이 차마 상상이 되지 않았다
고은서는 민시후의 얼굴을 밀어내면서 답했다.“아직 더 고찰이 필요해.”“들었죠. 이게 지금 저의 상황이에요.”민시후가 여시은을 향해 난감하다는 듯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여시은이 피식 웃으면서 장난스러운 말투로 고은서를 향해 말했다.“곽 대표님이 많이 상심해 하겠네요.”고은서는 약간 어리둥절했다.‘왜 아직도 내가 곽승재랑 재결합할 거라고 생각하는 거지? 곽씨 가문이랑 사돈 관계를 맺기로 한 거 아니었어? 곽현수 태도를 보아서는 여씨 집안에서도 이미 동의한 것 같던데. 곽승재만 동의하면 되는 일이 아니었어? 그렇다고 딸바보 여재훈이 여시은을 강요할 일은 없을 테고. 그런데 여시은도 동의한 일이라면 지금 이 태도가 말이 안 되는데.’민시후는 고은서가 대답하기 난감해하는 줄 알고 콧방귀를 뀌면서 대신 대답해줬다.“곽승재 그 인간이 상심할 만도 하죠.”여시은과 별로 친하지 않았기에 굳이 그녀의 앞에서 세 사람 사이의 원한 관계에 관해 언급할 필요가 없었는지라 고은서는 민시후를 쏘아보면서 입을 다물라고 눈짓했다.“알겠어. 안 말하면 되잖아.”민시후는 이내 사그라들었다.“먼저 들어가서 돌아보고 있어. 나 시은 씨랑 얘기 좀 나누다가 갈게.”고은서가 민시후를 쫓았다.“정자에 민시후 씨랑 비슷한 남자 손님들이 계시는데 가서 얘기 나눠 보세요.”여시은이 웃으면서 민시후에게 길을 안내해줄 하인 한 명을 붙여주면서 말했다.“전에는 곽 대표님이 이길 줄 알았는데 민시후 씨가 은서 씨 마음에 더 들었나 봐요?”민시후가 하인 따라 떠난 후 여시은이 웃으면서 고은서에게 말을 걸었다.“인테리어가 너무 이뻐요.”고은서는 나긋한 미소를 지으면서 자연스럽게 화제를 돌렸다.“우리 아빠랑 제가 다 이런 고풍적인 인테리어를 좋아하는데 해성에 꽤 오래 머물 것 같아서 이 별장으로 선택한 거예요. 이렇게 되면 나중에 또 해성에 와도 지낼 곳이 있게 되잖아요.”여시은이 눈에 띄게 기뻐하면서 말했다.“그런데 오늘 집들이에 온 사람들은 대부분 제 친구들이랑 그 친구들
고은서와 다른 사람들의 시선도 자연스럽게 문밖을 향했다.잘 보이지는 않았지만 정원에서 곽 대표님, 곽 도련님이라고 부르는 소리와 그에게 인사하는 소리가 들려왔는데 마치 여시은이 아닌 그가 진짜 집주인인 듯한 느낌을 주었다.“어머, 곽 도련님께서 오셨나 봐. 시은 씨, 곧 곽 도련님이랑 약혼한다면서요. 오늘 특별히 시은 씨가 새집으로 이사 온 걸 축하해주러 왔나 봐요.”여자 한 명이 부럽다는 듯 말했다.“당연하죠. 시은 씨가 이사했는데 약혼자로서 축하해주러 온 게 당연한 일이 아니에요? 나중에 두 분이 결혼하게 되면 우리랑 점점 멀어지는 건 아니죠?”다른 여자 한 명이 맞장구를 치면서 말했다.“그러게요. 집안 배경은 말할 것도 없고 두 분 엄청 어울리지 않나요? 완전히 천생연분이라니까요.”나머지 사람들도 아양을 떨기 시작했다.“그만 하세요.”여시은이 난감해하며 말했다.“저랑 곽 대표님은 결혼할 생각이 없어요. 그저 함께 식사하는 자리에서 다른 분들이 우연하게 저희 아빠랑 곽 회장님한테 왜 사돈 맺지 않냐고 하면서 장난 삶아 꺼낸 얘기일 뿐인데 곽 회장님께서 좋은 생각이라고 함께 장난치실 줄은 누가 알았겠어요. 우리 아빤 그저 곽 대표님이 능력이 출중한 인재라고 칭찬만 했는데 날짜까지 잡으라면서 떠들어 대실 줄은 생각도 못 했다니까요.”여시은은 이내 고은서의 팔짱을 끼면서 말을 이어갔다.“그저 술자리에서 한 농담일 뿐인데 이렇게 소문이 퍼질 줄은 누가 알았겠어요. 게다가 곽 대표님께서 좋아하시는 분은 여기 있는 은서 씨에요. 그러니까 다들 소문만 믿고 함부로 얘기하지 말아요.”그러자 사람들의 시선이 고은서한테로 쏠렸다.마치 다들 옷차림이 수수한 데다가 다른 사람을 위해 퍼퓸 제작까지 직접 도맡아 하는 여자가 곽승재의 마음을 빼앗아 간 사람이라는 게 믿기지 않는 모양이었다.고은서도 여시은이 이 많은 사람들 앞에서 곽승재가 그녀를 좋아한다는 말을 서슴없이 내뱉을 줄은 생각 못 했다.사람들은 너도나도 할 것 없이 고은서를 다시 훑어보기 시작
“마실 것 가져다드릴게요.”여시은은 눈치 있게 두 사람을 위해 자리를 피해주었다.“안 추워? 숄이라도 가져다줄까?”곽승재가 고은서의 얇은 옷차림을 보고 물었다.고은서는 약간 의외였다.곽승재의 질책을 기다리고 있었던 그녀는 갑자기 그가 자신을 향해 춥냐고 물을 줄은 생각도 못 했다.낮에는 비교적 따뜻해서 외투를 입지 않아도 됐다.해가 진 후에는 기온이 상대적으로 낮긴 했으나 추울 정도는 또 아니었다.“필요 없어.”고은서가 고개를 저으며 사양했다.“사적으로 여시은 씨와 만난 적이 없어. 날 초대할 때도 네가 온다고 해서 받아들인 거야.”곽승재가 덤덤하게 말했다.“설명하지 않아도 돼. 나랑 상관없는 일이니까.”고은서가 담담하게 답했다.곽승재가 입술을 달싹이면서 무언갈 더 말하려고 할 때 민시후의 목소리가 들려왔다.“은서야, 여기 네가 좋아하는 거 있어.”고은서는 이내 그를 향해 미소를 지어 보이며 답했다.“알겠어. 금방 갈게.”그러자 옆에 있던 곽승재의 얼굴빛이 약간 어두워졌다.“내가 데려온 거야. 싫으면 지금이라도 돌아가. 다른 사람들 기분 망치지 말고.”고은서는 말하고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민시후를 향해 걸어갔다.곽승재는 선 자리에서 그녀의 뒷모습을 뚫어지라 바라보기만 했다.“여긴 또 왜 온 거야. 기분 나쁘게.”민시후가 불쾌하다는 듯 고은서를 향해 투덜거렸다.“두 집안끼리 협력하는 사이잖아.”고은서가 그를 달랬다.“협력은 무슨. 널 보러 온 거겠지.”민시후가 콧방귀를 뀌면서 말했다.“됐어. 그냥 무시해. 내가 좋아하는 물건 있다며? 뭔데?”“오늘 파티에 분위기 메이커 역할을 하는 밴드가 왔는데 네가 좋아하는 드럼도 있대. 내가 이미 말해뒀으니까 조금 이따 올라가서 한 곡 쳐 봐.”민시후가 흥분해 하며 말했다.드럼 광팬으로서 고은서는 그의 말을 듣자마자 손이 근질거리기 시작했다.그러나 방금전 많은 여자들의 부러움과 질투를 받은 그녀는 더는 사람들의 눈에 띄기 싫었다.“고마워. 그런데 나 더는 눈에 띄는
곽승재는 자신이 다가가 보았자 방금전처럼 고은서의 기분만 망칠 거라는 걸 잘 알고 있었다.민시후를 향해 환하게 웃어 보이는 모습과 달리 방금전의 그녀는 엄숙한 표정을 지으며 민시후한테 시비 걸지 말라고 곽승재에게 경고의 눈빛을 보내곤 했다.무대에서 내려온 고은서는 아직도 방금전의 흥분 속에서 벗어나오지 못한 듯했다.“드럼을 이 정도로 좋아할 줄은 몰랐는데. 내 바에도 밴드가 있는데 합류할 생각 없어? 시간 날 때면 가서 드럼 치면서 놀면 좋을 것 같은데.”민시후가 그녀에게 물을 건네주면서 말했다.“혹시 전에 경호원들을 데리고 와서 나한테 혼쭐내주겠다고 하던 바를 말하는 거야?”“...”고은서의 물음에 민시후는 순간 할 말을 잃었다.‘뒤끝이 너무 심한 거 아니야?’“당시에 곽승재가 제때 오지 않았더라면 날 어떻게 처리할 생각이었어? 설마 진짜 날 납치해서 감금시킬 생각이었어?”민시후는 저도 모르게 찔렸다.“그럴 리가. 나처럼 착한 시민을 본 적 있어? 난 불법적인 일은 안 한다고. 기껏해야 겁만 주고 말겠지.”“나 말고도 얼마나 많은 사람들한테 겁을 준 거야?”고은서가 의심하는 눈빛으로 그를 빤히 쳐다보며 물었다.“그런 눈길로 나 보지마. 나 다른 사람 괴롭히고 다니는 양아치 아니야.”민시후가 억울하다는 듯 말했다.“마침 판주에서 서인수를 처리했다는 흉흉한 소문도 돌고 있는 와중에 갑자기 찾아와서 나랑 합작하겠다고 큰소리치는데 어떻게 의심하지 않을 수가 있어. 게다가 지금 밴드 얘기를 하고 있잖아. 왜 갑자기 아무런 연관도 없는 일을 따지는 거야.”사실 고은서는 일부러 민시후를 난감하게 만들기 위해 그러는 것이 아니었다.그저 갑자기 억울해서 이유라도 듣고 싶어서 말을 꺼낸 것이었다.그러나 긴장해 하면서도 후회하는 그의 반응을 보고 나니 또 깊이 따지고 싶지 않아졌다.“밴드는 됐어. 음악 하고 싶다는 헛된 꿈을 꿀 나이는 이미 지났어. 지금은 그저 소소하게 큰돈만 벌고 싶거든.”“모르는 사람이 들었으면 나이가 엄청 많은 줄 알
여자는 블랙 튜브톱 드레스를 입고 있었는데 가녀린 허리와 힙업된 엉덩이, 그리고 풍만한 가슴이 유독 도드라져 보였다.섹시하지만 속되어 보이지 않는 아주 요염한 여자였다.남자들의 시선도 자연스레 그녀에게로 쏠렸다.반면 민시후는 아주 냉담한 표정을 하고 있었다.“누구?”“민 도련님, 전에 저랑 자주 밥도 같이 먹고 술도 같이 마셨잖아요. 벌써 저를 잊으신 거예요?”여자가 억울하다는 듯 입술을 삐죽거리며 말했다.“내가 굳이 기억해야 할 필요가 있을까? 성가시게 굴지 말고 저리 가.”민시후는 그녀의 체면을 챙겨주는 대신 아주 차가운 목소리로 경고했다.여자는 난감한 기색을 드러내며 더는 집착하지 않고 술잔을 들고 다른 곳으로 갔다.다들 이 작은 에피소드를 너무 마음에 두지 않았다.여씨 집안의 파티에 초대받은 사람들을 새겨보면 거의 다 재벌가 출신이었는데 그 때문에 그들의 눈에 들려고 일부러 아는 척하면서 다가오는 여자들이 적지 않게 있었다.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민시후는 고은서한테 다가가 직접 설명했다.“오해하지마. 나 진짜 저 여자랑 모르는 사이야.”“원래도 여자들한테 인기가 많기로 유명하잖아. 운전하다가도 갑자기 튀어나와 차에 치이면서까지도 네 눈에 들려고 하는 여자들이 얼만데. 게다가 술집에 갈 때마다 이 여자 저 여자랑 함께 노는데 간혹 아는 여자를 만날 수도 있지. 나 때문에 일부러 모른 척하지 않아도 돼.”고은서가 일부러 그를 놀리려고 말했다.“진짜 모르는 여자야.”민시후가 조급해하며 설명했다.“전에도 그저 같이 앉아서 술만 마시다가 내보곤 했어.”고은서는 방금전 여자를 힐끗 보더니 말했다.“아까 말한 거 못 들었어? 자주 밥도 같이 먹고 술도 같이 마시곤 했다잖아. 그런데 기억 안 난다고?”민시후는 당장이라도 시간을 되돌려 고은서 앞에서 이 여자 저 여자를 다 건들며 다녔던 과거의 자신을 한 대 치고 싶었다.“정말 기억 안 나. 다 비슷비슷하게 생겨서 전혀 기억나지도 않는다니까.”고은서는 긴장해 하는 민시후를 보면
박지연은 계속해서 불만을 터뜨렸다.“내가 보기엔 여시은은 태생이 못돼먹었어!”“이번에 그렇게 크게 당했으니 더더욱 널 원망할 거야. 너 조심 좀 해.”박지연이 걱정스럽게 당부했다.고은서는 고개를 끄덕였다.이미 각을 세우기로 마음먹었기에 여시은과 평화롭게 지낼 생각은 애초에 없었다. 앞으로는 여시은을 더 철저히 경계할 것이다.“듣자 하니 곽승재가 내내 널 감싸줬다며? 너한테 점점 마음이 가는 모양이야.”박지연이 코웃음을 쳤다.어젯밤 곽승재가 고은서를 계속 도와줬던 건 사실이었다. 증거를 공개하자고 제안한것도 곽승재의 생각이었고 마지막에 그녀를 집까지 데려다줬다. 곽승재가 고은서에게 큰 도움을 준 셈이었다.하지만 고은서는 곽승재에 대한 이야기를 박지연과 깊이 나누지 않았다.잠시 다른 이야기를 하던 중 박지연이 고은서에게 뜬금없는 소문 하나를 전했다.“우리 과장님한테서 들었는데, 어제 혜린 씨가 다니는 병원에 조 여사님이 찾아가서 난리를 쳤대. 혜린 씨 남자관계가 복잡하다고, 다른 남자랑 팔짱 낀 사진까지 들고 와서 공개하면서 혜린 씨랑 그 자리에서 머리끄덩이 잡고 싸움 났대!”고은서는 지난번 소동 이후 손자를 중시하는 조수연이 한동안은 조용할 거라 생각했었다. 그런데 고작 며칠 만에 또 난리를 친 거였다. 조수연의 전투력은 엄청 대단했다.“아니, 그러다 혜린 씨 혹시라도 애를 지우기라도 하면 어떡하려고 그래?”고은서가 물었다.박지연은 말했다.“조 여사님 말로는 혜린 씨 뱃속 애가 자기 아들 애가 아닐 수도 있다고 의심해서 혜린 씨를 끌고 가서 친자 확인하자고 했대. 그래서 둘이 몸싸움까지 벌어져서 이미지도 최악이라 혜린 씨는 한 달 정직당했어.”“혜린 씨 배속에 애가 온승준 씨 애가 아니라고? 그럼 도대체 왜 그렇게까지 그 집에 들어가려고 애쓰는 거야? 그냥 진짜 애 아빠랑 결혼하면 될걸...”고은서는 도무지 납득이 가지 않았다.“소문엔 그 남자가 유부남에 애까지 있다고 하더라. 자세한 건 나도 몰라. 그냥 과장님이 흘린 얘기야.”
여시은은 여전히 여재훈의 다리를 붙잡고 불쌍한 표정을 지으며 물었다.“그럼, 아빠가 생각하시는 해결 방법은 뭐예요?”여재훈은 여시은에게 홍보팀을 통해 자신이 저지른 잘못에 대해 공개 사과하고, 개인적으로 고은서에게 직접 진심으로 사과한 뒤 집에서 2주 동안 자숙하라고 말했다.“제 회사는 아직 개업식도 제대로 안 했는데 공개 사과를 하라뇨? 그럼 모든 사람들이 저를 웃음거리로 볼 거 아니에요!”여시은은 눈이 퉁퉁 부은 채 애원했다.“아빠, 저 은서한테 개인적으로 사과만 하면 안 돼요? 저도 아직 경험이 부족해서 사람들을 이끌기 힘든데, 공개적으로 사과하면 앞으로 누가 저를 믿고 따르겠어요?”“안 된다.” 여재훈은 단호하게 말했다.“이 일은 이미 파장이 커졌고 많은 사람들이 너를 지켜보고 있어. 그러니 모든 사람에게 확실하게 해명해야 한다.”“시은아, 잘못을 저지른 건 무서운 일이 아니야. 진심으로 뉘우치고 성실하게 사과하면 은서 씨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들도 너에게 다시 기회를 줄 거다.”여재훈은 계속해서 말했다.“사람은 자기가 저지른 잘못에 책임질 줄 알아야 한다. 네가 잘못했는데 내가 덮어주면 그건 너를 망치는 거야. 그러니까 이 일은 이렇게 결정된 거다!”여시은은 그 말을 듣자 속으로 분노가 치밀었다.‘고은서를 그저 연못에 좀 빠지게 했을 뿐인데 이게 뭐 그렇게 큰일이라고 이렇게까지 일을 키운단 말인가?’‘공개 사과라니, 이제 예전처럼 모두에게 존경받고 칭찬받던 모습은 끝이라는 거잖아.비록 인터넷의 영상은 지워지더라도 사람들이 나에 대한 나쁜 인상은 지워지지 않을 거란 말이야!’오늘 밤 그렇게 많은 부유층과 정재계 인사들이 있는 자리에서 그녀는 그들에게 최악의 인상을 남겼을 것이다. 해성에서 쌓아온 그녀의 완벽한 이미지가 단번에 무너진 셈이다.예전엔 그녀가 울기만 하면 여재훈은 안쓰러워하며 뭐든지 다 용서해 줬었다.‘지금은 무릎까지 꿇었는데도 아빠는 고은서 때문에 자신의 딸을 벌하려 한다니, 정말 나를 딸로 생각하긴 하는 걸까?’
여시은은 그 말을 듣자 눈이 시뻘게지면서 큰 소리로 외쳤다.“아빠, 제가 한 게 아니라니까요! 고은서가 일부러 저를 함정에 빠뜨린 거예요. 왜 저를 믿지 않으세요!”“시은아!”여재훈이 의자에서 벌떡 일어나며 난생처음으로 이토록 차가운 눈빛으로 딸에게 화를 냈다.“너는 어쩌다 이렇게 뻔뻔하게 거짓말만 하는 사람이 됐니!”“내가 사람을 시켜서 확인해 봤어. 연회장 CCTV 꺼놓은 거, 그거 네가 시킨 거더라.”여재훈은 딸을 억울하게 만들까 걱정돼 CCTV 관련 내용을 직접 조사했다.그런데 정말로 여시은이 꺼놓았던 것이었다.“네가 정말 은서 씨를 해치려는 의도가 없었다면 왜 CCTV를 미리 꺼놓은 거냐?”여재훈은 냉정한 태도로 물었다.여시은은 자신이 고은서의 계략에 걸려든 것을 그제야 깨달았다.고은서는 일부러 도발적인 눈빛으로 여시은을 자극했고 곧바로 테라스로 이끌어냈던 것이다. 모두 여시은한테 엿 먹이려는 행동이었다!여시은은 고은서가 쿠아가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격동적으로 행동해 자신을 밀칠 거라 확신했었다.왜냐하면 고은서는 지난번엔 쿠아를 다치게 한 일로도 크게 충격을 받았었기 때문이다.하지만 이번엔 반전이 생겼다.고은서는 오히려 침착하게 반격했고 지난번 농장에서의 ‘물에 빠진 사건’ 증거까지 들고나왔다.일이 이렇게 커져 버린 이상 여시은은 더 이상 변명할 여지가 없다는 걸 알았다.그녀는 결국 울음을 터뜨리며 여재훈을 향해 소리쳤다.“맞아요! 저 고은서가 너무 꼴 보기 싫었어요! 왜 아빠는 맨날 걔만 칭찬하세요? 이러니깐 제가 질투 나서 그런 거 아니에요? 그냥 고은서한테 꼽 주고 싶었어요!”“어차피 이미 벌어진 일이에요. 전 잘못한 거 없어요! 후회도 안 해요!”“너!”여재훈은 손을 번쩍 들어 여시은의 뺨을 때리려 했지만, 그녀의 눈물범벅이 된 얼굴을 보고는 차마 때릴 수가 없었다.“시은아, 아빠가 평소에 너를 어떻게 가르쳤니? 사람은 자기 양심에 떳떳해야 하고 올곧게 살아야 한다고 했잖아! 근데 너는 어떻게 질투심에 눈이
이미숙은 유튜브 영상을 보고 있었는데, 바로 여시은이 고은서 머리끄덩이를 잡아당겨 연못 가까이로 끌어당기는 장면이 재생되고 있었다.그 영상은 누군가가 휴대전화로 촬영해 올린 것 같았고 화질이 너무 좋은 건 아니지만 전반 상황을 알아보는 데에는 충분했다.영상의 끝에는 고은서와 여시은의 얼굴을 비춘 장면도 담겨 있었다.다소 초라해진 고은서는 곽승재의 부축을 받으며 옆에 서 있었다. 여시은은 얼굴이 벌겋게 달아오르고 눈빛엔 분노와 원망으로 가득했다.그 와중에 영상의 제목이 더욱 눈길을 끌었다.[재벌가 아가씨, 두 얼굴의 진실!]“사모님, 저 여자는 어쩜 저리 독하대요. 이렇게 심하게 괴롭히다니. 누가 폭로해 줘서 다행이지! 이제 세상 사람들 다 그 여자 피해서 다니겠어요!”이미숙은 화가 난 듯 말했다.고은서는 이번 일이 오래 퍼지지는 않을 거라고 생각했다. 여시은 뒤에는 여재훈이 있기 때문이다.하지만 이번 일로 여시은이 보기 좋게 망신을 당했고, 여재훈 역시 자신의 딸이 그렇게 순진하지 않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을 테니, 이번 목적은 어느 정도 달성되었다.고은서는 이미숙의 휴대전화 영상에 대뜸 ‘좋아요'를 눌렀다.한편, 여씨 가문에서.여시은 역시 유튜브 영상을 확인했다. 분노에 찬 그녀는 휴대전화를 바닥에 내던졌다.밖에 서 있는 박미화가 조심스럽게 말을 전했다.“시은 아가씨, 회장님께서 지금 바로 서재로 오시래요. 할 말씀이 있으시답니다.”이번이 박미화가 세 번째로 말을 전하러 온 것이었다.여시은은 곧바로 얼굴에 드리워진 분노와 짜증을 숨기고는 일부러 슬프고 억울한 표정을 지으며 방문을 열었다.박미화는 방안에서 반응이 없자 방문을 열려고 하였다. 때마침 여시은이 문을 열고 나오는 것을 보고 급히 손을 거두며 사과했다.여시은은 박미화의 손을 움켜쥐었다. 조금 전에 분노로 인해 물어뜯은 날카로운 손톱이 그녀의 살을 깊이 파고들었다. 그리고는 여시은은 울먹이는 말투로 물었다.“미화 언니, 아빠가 나한테 화 많이 나신 거야? 나 어떻게 해야
얼마 지나지 않아 운전기사가 차를 라이트문 아파트 앞에 세웠다.고은서와 곽승재는 위층으로 올라갔다. 고은서는 샤워하기 위해 자신의 방으로 직행했고 곽승재는 거실에 남았다.샤워를 마치고 나온 고은서는 의외의 광경을 목격했다. 곽승재가 거실 소파에 앉아 있었고 테이블 위에는 김이 모락모락 나는 차 한 잔이 놓여 있었다.“왜 또 왔어? 할 말 있어?”고은서가 물었다.곽승재는 태연하게 대답했다.“논의할 게 있어서. 그전에 이 콜라 생강차부터 마셔. 아주머니께서 특별히 준비하신 거야.”“사모님, 콜라 생강차는 감기 예방에도 효과적이거든요. 어서 드세요!”이미숙이 차를 가져오며 말했다.고은서는 감기에 걸릴까 봐 걱정하고 있던 참이었다. 그녀는 잔을 들어 올리더니 이상한 듯 물었다.“아줌마, 제가 방금 들어온 걸 보지도 못하셨을 텐데 어떻게 제가 감기 걸릴 줄 아시고 미리 차를 준비하셨어요?”이미숙의 눈가에는 잠시 당황한 기색이 스쳤다.곽승재가 자연스럽게 말을 이었다.“내가 알려줬어. 일단 마셔.”고은서는 고개를 숙여 생강차를 내려다 볼뿐 이미숙의 표정 변화를 주의 깊게 보지 못했다.물론 곽승재의 눈에 비친 기대감도 보지 못했다.생강차의 냄새를 맡아보니 생강 향이 꽤 진했다.고은서는 생강차를 조심스럽게 한 모금 마셨다. 콜라의 단맛과 생강의 톡 쏘는 맛이 어우러져 생각보다 맛이 나쁘지 않았다.“맛이 어때요?”이미숙이 물었다.“좋네요. 그런데 오늘은 생강을 좀 많이 넣으신 것 같네요. 예전에 만드신 것보다 더 매운데요.”이미숙은 잠시 망설이다가 급히 대답했다.“생강 양을 조절하지 못했네요. 주의할게요.”고은서는 더는 따지지 않고 다시 마시려던 참이었는데 곽승재가 말을 건넸다.“맛이 별로면 안 마셔도 돼.”고은서는 그를 흘겨보았다.“누가 맛없다고 했어? 아줌마가 정성스럽게 준비해주신 건데 끝까지 마셔야지.”“사모님, 도련님과 얘기 나누세요. 저는 할 일이 남아서 먼저 가보겠습니다.”이미숙은 두 사람의 언쟁을 피하려는 듯 급히 자
고은서는 고개를 끄덕이며 곽승재에게 사실대로 털어놓았다. 그녀는 친구에게 부탁해 적절한 시기에 감시 카메라를 끊어놓도록 준비해두었다.하지만 여시은이 먼저 참지 못하고 로비의 카메라를 꺼버린 것이다.고은서가 감히 감시 카메라의 확인을 제안한 데는 이유가 있었다. 그녀는 자신만의 준비를 했을 뿐만 아니라 여시은 역시 감시 카메라를 조작할 것이라는 점까지 예측했다.“만약 여시은이 참고 끝까지 널 찾지 않았다면 어떻게 할 작정이었어?”곽승재가 물었다.고은서는 피식 웃으며 대답했다.“개업식이 끝난 후 대형 스크린에 공개할 계획이었어.”곽승재가 눈썹을 추켜세웠다.“네가 앞서 백스테이지 주위를 둘러본 것도 동영상을 공개할 준비를 했던 거야?”고은서는 고개를 끄덕였다.“여시은이 일부러 나를 물에 빠뜨리고 향수로 나를 함정에 빠뜨렸을 뿐만 아니라 쿠아까지 학대했어. 내가 당연히 가만히 있을 수 없지! 그리고 시은이가 인내심을 가졌다고 해도 난 개업식이 끝날 때까지 기다렸을 거야. 하지만 결과적으로 그러지 못했지. 시은이는 결국 참지 못하고 테라스에서 쿠아의 죽음을 언급하며 나를 자극했고 다시 같은 수법을 쓸 참이었던 거지. 나는 그저 시은이가 파려던 함정을 그대로 돌려준 것뿐이야.”곽승재는 고은서가 준비를 해왔을 거라 예상했지만 이런 고육지계를 공개적인 자리에서 펼칠 줄은 몰랐다.게다가 그녀의 연기는 너무나도 실감 났다.고은서가 바닥에 넘어져 흐트러진 모습을 보는 순간 곽승재는 정말로 여시은의 소행일 것으로 생각할 정도였다.고은서는 곽승재의 생각을 읽었는지 피식 웃으며 입을 열었다.“가여운 척 한 거 아니야. 백유미와 여시은이라는 고수들 덕분에 나도 한 수 배웠을 뿐이지.”백유미의 과거 행동을 떠올린 곽승재는 가슴을 죄는 듯한 자책감이 밀려왔다.곽승재는 진지하게 사과했다.“은서야, 미안해.”무심코 흘린 말에 곽승재가 사과하는 모습을 본 고은서는 잠시 당황했다.“사과할 필요는 없어. 당신도 백유미 씨에게 속았을 뿐이잖아. 어쨌든 ‘목숨의 은인'
“시은아!”영상 속 장면에 충격을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여재훈은 걱정된 목소리로 딸을 불렀다. 그리고 뒤이어 멀리 있는 부하들에게 명령했다.“어서 따라가서 시은이를 보호해! 무슨 일이라도 생기게 해서는 안 돼!”부하들이 여시은의 뒤를 쫓아 나간 뒤 여재훈은 스크린을 힐끗 바라보더니 진지한 표정으로 고은서에게 사과했다.“제가 딸을 제대로 가르치지 못했습니다. 이 일은 제가 시은에게 직접 확인한 뒤 여은서 씨께 해명해 드리겠습니다.”고은서는 목적을 달성했으니 더는 그곳에 머물 생각이 없었다. 그녀는 옷을 갈아입어야 한다는 이유로 자리를 떠나려 했다.“여 대표님, 제가 은서 씨를 모셔다드리겠습니다.”곽승재가 말했다.송민준 역시 함께 가겠다고 전했다.여재훈은 당연히 거절하지 않았다. 개업식에서 이런 소동을 일으킨 이상 누구라도 축하할 마음이 없을 터였다.고은서 일행이 떠나자 여재훈은 참석자들에게 직접 사과하며 홍보팀에 현장 수습을 지시했다.호텔 앞 광장에서 곽승재와 송민준의 운전기사들이 각각 차를 대기시켜 놓고 기다리고 있었다.송민준은 고은서를 배웅하려는 태도를 보였으나 곽승재가 고은서를 부축하면서 예의를 갖추어 말했다.“번거로울 텐데 제가 은서 씨를 모시고 가겠습니다.”송민준은 자기가 고은서의 파트너로 왔기 때문에 그녀를 집까지 모셔다드리는 것이 당연하다고 설득했다.곽승재는 송민준의 이런 친근한 태도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는 억지로 고은서를 안아 들어 자신의 차에 태우고 싶었지만 고은서가 화를 낼 것을 잘 알고 있었다.그는 입을 오므리다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선택권을 고은서에게 넘겼다.고은서는 당연히 송민준과 함께 갈 생각이 없었다.“오빠, 오늘은 고마웠어. 오늘 승재 오빠의 차를 타고 갈게. 어차피 길도 같으니까. 내일 다시 연락할게.”고은서의 반응에 송민준은 고개를 끄덕이는 수밖에 없었다.“알겠어. 집에 도착하면 연락해.”곽승재는 고은서를 차에 태운 뒤 트렁크에서 깨끗한 외투를 꺼냈다.차 안에 앉자 곽승재는 고은서의 어깨
여시은은 고은서의 말에 더욱 어리둥절해졌다.‘갑자기 왜 또 농장 일을 다시 꺼내는 거지?’여시은은 속으로 불길한 예감이 들기 시작했다. 그녀는 생각할수록 점점 더 억울하고 분했다.“은서야, 왜 나를 이렇게 모함하는 거야? 내가 언제 너를 물에 빠뜨렸다고 그래? 네가 나를 밀었잖아! 내가 우리 아빠를 생각해서 참고 넘어갔는데 이제 와서 또 나에게 뒤집어씌우다니!”여시은은 여재훈을 바라보며 눈시울을 붉혔다.“아빠, 저는 항상 사람을 보는 안목이 없는 것 같아요... 은서가 이런 사람일 줄은 정말 몰랐어요... 너무 속상해요...”여시은의 슬프고 안쓰러운 모습에 여재훈은 점차 진지해졌고 고은서를 보며 물었다.“고은서 씨, 시은이가 은서 씨를 물에 빠뜨렸다는 증거라도 있어요?”“물론 있죠.”고은서는 이미 곽승재의 부축을 받아 일어난 상태였다. 그녀는 휴대폰을 꺼내 송민준이 보낸 영상을 찾았다.현장에 있던 사람들 모두 다가가지는 않았지만 적당한 거리를 유지하며 상황을 지켜보고 있었다. 그러다가 고은서가 진짜 증거를 가지고 있다는 소식을 듣더니 그들의 호기심을 더욱 자극했다.이때 곽승재가 제안했다.“여 대표님, 모두가 보는 앞에서 영상을 공개하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모두가 직접 보면 진실이 명백해질 테니 나중에 왜곡되는 일도 없을 겁니다. 어떻게 생각하세요?”여시은은 고은서가 미리 준비한 듯한 태도를 보이자 불안감이 더욱 커졌다.고은서가 이렇게 계획적으로 행동할 수 있었던 것은 어쩌면 증거를 손에 넣었을지도 모른다.여시은이 고은서를 과소평가했던 것이다.여시은은 붉어진 눈으로 소리쳤다.“도대체 무슨 짓을 하려는 거에요! 이미 개업식 시간이 다 됐는데 계속 이러쿵저러쿵하며 일을 벌이다니! 고의로 우리 개업식을 방해하는 거 아니에요?”“아빠, 오늘 이분들은 분명히 좋은 의도로 온 게 아닌 것 같아요. 그냥 쫓아내는 게 낫겠어요!”“여시은 씨, 말씀이 참 지나치군요. 우리는 단지 진실을 알고 싶을 뿐입니다.”송민준이 여재훈보다 먼저 입을 열
구경하는 사람들도 송민준을 쳐다보았다. 그들은 도대체 왜 그의 여자 파트너가 곽승재의 품에 안겨 있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송민준은 사람들의 의문스러운 시선을 받고 있었지만 태연하게 입을 열었다.“여시은 씨, 저는 단지 사실을 말했을 뿐입니다. 은서와 여시은 씨의 사이에 아무런 원한도 없는데 은서가 왜 그런 행동을 하겠습니까?”“아빠, 정말 제가 한 게 아니에요! 저 사람들은 같은 편이라서 일부러 저를 괴롭히려는 거예요!”여시은은 억울함을 참지 못하고 그녀의 아버지에게 도움을 청했다.여재훈은 눈물 글썽이는 딸을 바라보더니 온몸이 흐트러진 고은서를 향해 물었다.“고은서 씨, 사실대로 말해보세요. 방금 무슨 일이 있었는지.”고은서는 감정을 어느 정도 추스렸지만 이런 일을 당하면 당연히 난처할 수밖에 없었다. 그녀는 최대한 평온한 어조로 대답했다.“여 대표님, 제가 뭘 말해도 소용없을 겁니다. 시은이와 저는 각자 주장이 다르기 때문에 누구도 판단하기 어려울 겁니다.”고은서는 로비 주위를 둘러보며 말을 이었다.“여기 곳곳에 감시 카메라가 설치되어 있어요. 직원들을 시켜 감시 카메라를 확인해보시는 게 좋을 것 같아요. 그러면 진실도 드러나겠죠.”이 말을 듣자 여시은의 얼굴색이 확 변했다.고은서가 여시은보다 먼저 바닥에 넘어졌는데 감시 카메라의 확인까지 제안하다니!‘설마 은서가 이 시간대에 감시 카메라를 꺼뒀다는 걸 알고 있는 건 아니겠지?’“시은아, 너의 생각은 어때?”고은서는 고개를 들어 여시은에게 물었다.여시은은 분노를 꾹 참고는 여전히 억울하고 순진한 표정으로 대답했다.“좋아! 하지만 개업식 시간이 다가오고 있는데 감시 카메라는 확인하는 동안 내가 먼저 개업식을 진행하고 나중에 이 문제를 논의하는 게 어때?”“안 돼.”고은서의 작은 얼굴에는 단호한 표정이 담겨있었다.“이 사건은 반드시 바로 조사되어야 한다고 봐.”고은서는 다시 여재훈을 바라보며 말했다.“여 대표님, 폐를 끼쳐 죄송합니다. 제가 시은이 만큼 귀하지는 않지만 이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