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자의 머리는 이리저리 흐트러져 있었고 입술에 바른 립스틱도 거의 지워져 있었으며 목에는 누군가에게 물린 듯한 이빨 자국이 있었다.민시후는 술에 취한 탓인지 미간을 어루만지면서 정신을 차리려고 애썼다.그의 상의는 이미 사라졌고 입술은 여자가 바른 립스틱과 똑같은 색을 띠고 있었고 가슴 쪽에는 손톱에 할퀸 자국들로 가득했다.여자가 이불 전체를 자기 쪽으로 끌어당기는 바람에 이리저리 뒤엉킨 침대 시트와 침대 위에 널브러져 있는 여자의 드레스, 섹시한 속옷, 그리고 민시후의 셔츠와 바지가 그대로 드러났다.여자의 드레스와 속옷은 누군가가 강제로 벗긴 듯 볼품없이 찢겨져 있었는데 현장 상황을 보아서는 아주 격렬한 일이 발생한 듯했다.시간이 늦어서 많은 손님들이 돌아가긴 했으나 방금전 비명소리를 들은 나머지 사람들이 우르르 몰려들었다.그들은 방 안의 광경을 보고 서로 놀라움을 머금지 못했는데 심지어 흥분해 하며 폰을 꺼내 사진 찍으려는 사람도 있었다.여시은은 이내 정신을 차리고 하인들한테 손님을 데리고 아래로 내려가라고 지시하면서 자신의 동의 없이는 누구도 올려보내지 말라고 신신당부했다.체구는 작았으나 그녀의 말을 거역하는 사람은 없었다.다들 호기심이 만발하긴 했으나 집주인의 말을 따르면서 고분고분 아래로 내려갔다.수군거리는 소리와 여자의 흐느끼는 울음소리를 들은 민시후는 그제야 이상함을 감지하고 고개를 들었다.그의 눈에 처음으로 들어온 건 무표정한 얼굴을 하고 있는 고은서와 놀라운 기색을 띤 여시은이었다.이어 그는 자신이 알몸으로 흐느끼고 있는 여자 옆에 앉아있는 걸 발견했다.민시후는 당황해하며 고은서를 바라보았다.“옷 입고 나와. 밖에서 기다릴게.”고은서는 말하고는 문을 닫고 나갔다.“은서 씨, 괜찮아요? 다 오해일 거예요. 시후 씨가 은서 씨를 얼마나 좋아하는데요. 절대 다른 여자랑 저런 일을 할 리가 없어요.”여시은이 나지막한 목소리로 고은서를 위안했다.그러나 고은서는 차가운 얼굴빛을 한 채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여시은도 더는
민시후의 목소리는 한없이 차가웠고 그의 표정에서는 살기가 느껴졌다.여자는 얼굴을 막고 있던 손을 내리면서 억울하다는 표정을 지으며 겁에 질린 목소리로 훌쩍이면서 말했다.“민 도련님, 저 정말 억울해요. 오늘 도련님한테 술도 권한 적이 없는데 제가 무슨 약을 먹였다는 거예요. 저는 도련님께서 제대로 서 있지 못할 정도로 취해 있기에 부축만 했을 뿐이라고요. 그런데 누가 방에 들어서자마자... 책임지기 싫으시면 저도 그냥 없던 일로 치고 넘어갈게요...”여자는 말하면서 고개를 더 빳빳이 쳐들었는데 그 때문에 목에 있는 이빨 자국이 더 선명히 드러났다.마치 억울하게 괴롭힘이라도 당한 듯한 모습과 겁에 질려 덜덜 떨리는 목소리까지 아마 민시후가 아닌 다른 남자였다면 이미 마음이 녹아내렸을 것이다.“책임?”그러나 민시후는 그녀의 속임수에 넘어갈 리가 없었다.“그 목적으로 나한테 일부러 접근한 거였어?”그는 말하면서 냉소를 흘렸다.여자는 계속 고개를 저으면서 자신은 그저 친구랑 함께 온 거라며 우연하게 그를 만난 거라고 목적을 품고 그에게 고의로 접근한 게 아니라고 자신의 억울함을 호소했다.“민 도련님, 제가 도련님처럼 출중한 사람이 아니란 건 잘 알고 있어요. 그러나 저를 좋아하는 남자도 적지 않게 있는데 제가 왜 이런 모험을 하겠어요.”여자가 통곡하면서 말했다.“저는 걱정되는 마음에 방까지 부축해 준 것뿐인데 도련님께서 술김에 저를 아래에 깔고 제 옷을 찢었잖아요.”“닥쳐!”민시후가 그녀를 향해 소리쳤다.정녕 그녀와 잠자리를 가지지 않았다고 해도 민시후는 고은서가 이런 얘기를 반복해서 듣는 걸 원하지 않았다.그의 흉악한 모습에 여자는 더는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혼자 훌쩍이면서 불쌍한 척했다.이내 하인이 깨끗한 새 옷을 가지고 나타났는데 민시후는 새 옷으로 갈아입지 않았다.하인은 어쩔 수 없이 옷을 방 안에 여자한테 다 건네주었다.“나도 어떻게 된 일인지 잘 모르겠어.”민시후가 참담한 표정으로 고은서에게 말했다.그는 카드 게임을
민시후는 이내 시선을 돌려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있는 고은서를 빤히 바라보았다.“은서야, 난 아직 처리할 일이 남아서 너 먼저 돌아가 있어. 기사한테 데려다주라고 말해 둘게.”고은서는 고개를 끄덕였다.민시후가 일 처리를 재빠르게 했지만 이튿날 그에 관한 스캔들은 여전히 많은 사람들의 귀에 들어갔다.그와 여자가 같은 침대에 누워있는 모습을 목격한 사람이 한둘이 아니어서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여자는 그다지 이름 있진 않았지만 엄연한 연예계 사람이었고 또 민시후는 ZY그룹의 대표이자 북성 민씨 가문의 둘째 도련님이었기에 두 사람의 스캔들은 유독 많은 사람들의 이목을 끌었다.곽승재는 육현석의 전화를 받기 전까지 아무것도 모른 채 부하의 사업보고를 들으면서 블랙커피를 마시고 있었다.그는 어제 집도 돌아가지 않고 회사에서 새벽까지 일했는데 아침에 주간 회의까지 여는 바람에 무척 피곤했다.전화를 받자마자 육현석의 흥분해 하는 목소리가 들려왔다.“형, 어제저녁에 있었던 일 들었어?”“무슨 일?”곽승재는 그와 쓸데없는 얘기를 나누기 싫었는지라 지금이라도 전화를 뚝 끊고 싶었다.“민시후에 관한 일 있잖아. 어떤 여배우랑 잤다고 하던데.”육현석은 곽승재의 찐친으로서 예전부터 민시후를 원수처럼 여겨왔다.그래서 그는 민시후의 스캔들을 전해 듣자마자 참지 못하고 곽승재에게 전화했던 것이다.“친구한테서 들었는데 어제 여시은 씨 집들이 파티에서 그 여배우랑 술 마시고 같이 방에 들어가서 잤대. 그런데 하필 그 상황을 모르고 있던 하인이 실수로 방에 들어가는 바람에 그 현장에 있던 사람들이 다 알게 된 거지.”육현석이 흥미진진해 하며 말했다.“두 사람이 발각되었을 때 알몸 상태로 있었대. 그리고 현장을 봐서는 아주 격렬하게 한 것 같다던데.”곽승재는 눈살을 찌푸렸다.어제 파티 현장에 반 시간 밖에 있지 않았지만 고은서는 분명히 그에게 자신이 민시후를 데려온 것이라고 말했었다.‘두 사람이 다정하게 웃으면서 드럼도 치더니만 그 상황에서 민시후가 다른 여자랑
곽승재는 순간 주민기가 잘못 들었다는 생각이 들었다.고은서는 이혼하기 전에 한 번 찾아온 이후로 GS그룹에 찾아온 적이 단 한 번도 없었다.‘이 시간에 여긴 무슨 일로 온 거지?’“호성에서 있었던 일을 조사해준다는 걸 알고 감사 인사하러 온 건 아닐까요?”주민기는 내색하지 않고 아첨하는 듯한 말을 내뱉었다.‘요즘 종일 눈살을 찌푸리고 다니시는데 사모님을 보고 제발 기분 풀었으면. 대표님께서 기분이 좋으면 우리 직원들도 회사 생활이 그나마 편해지는데.’“사모님께서 몇 번이고 호성 경찰 측에 연락해 사건 조사 상황에 관해 물으셨다고 합니다. 그 두 남자를 꼭 잡고 싶어 하는 것 같습니다. 대표님, 조금 이따 사모님께서 물어보시면 다 조사하고 난 후에 모든 걸 알려드릴 생각이신가요 아니면 지금까지 조사해낸 상황을 먼저 알려드릴 생각이신가요?”주민기가 자연스럽게 말을 이어갔다.‘만약 미리 알려드릴 생각이면 사모님한테 보여줄 서류들을 다시 정리해 놓아야 하는데.’“아직 무슨 상황인지 확실하지 않으니까 나중에 다 조사하고 난 후에 알려주도록 하자.”“네, 알겠습니다.”주민기는 나가기 전에 한 마디 더 보탰다.“지금쯤 곧 엘리베이터에서 내리실 것 같은데 커피 내갈까요?”‘사모님을 만나고 나면 피곤도 곧 풀릴 것 같은데 커피를 그만 마셔도 되지 않나?’그의 뜻을 알아차린 곽승재는 차가운 눈빛으로 그를 힐끗 쏘아보았다.그러나 곽승재는 그와 따지지 않고 신선한 과일을 준비해 오라고 말했다.주민기가 나간 후 곽승재는 옷을 단정히 하고 앉아있는 자세도 바르게 하면서 자신의 제일 완벽한 모습을 보여주려고 애썼다.이내 밖에서 고 매니저님이라고 부르는 주민기의 목소리가 들려왔다.“곽 대표님은 사무실 안에 계십니다. 어제 밤새 일하시느라 제대로 쉬지도 못했습니다.”주민기가 눈치 있게 한 마디 더 보탰다.고은서는 그를 향해 냉소를 흘리고는 사무실 문을 두드리고 안으로 들어갔다.그녀는 어제저녁보다 더 캐쥬얼한 옷차림을 하고 있었는데 위에는 간단한 흰색 티
고은서의 날카로운 지적에 곽승재는 저도 모르게 헛웃음이 나왔다.그의 눈빛은 절망감으로 가득 차 있었다.“또 다른 할 말 있어?”곽승재는 평소의 차가운 모습으로 돌아왔다.고은서는 눈살을 살짝 찌푸렸다.“더 할 말 없으면 이만 가 봐. 나 바쁘니까.”고은서는 곽승재의 씁쓸한 눈빛을 보며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민시후는 당신을 싫어한다고 해도 단 한 번도 뒤돌아 당신에 관한 험담을 한 적이 없어. 백유미가 정신병원에서 당했던 일도 민시후가 알려준 거야. 심지어 당신이 나 대신 화풀이 해주기 위해 범가온이 백유미를 때리는 걸 암암리에 동의했다고 분석까지 해줬어. 굳이 나한테 당신 미담까지 해줄 필요는 없었는데 말이야. 민시후는 당신처럼 수단 가리지 않는 사람이 아니야. 당신보다 훨씬 착하고 정의로운 사람이야.”고은서는 말하고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사무실을 나갔다.사무실의 방음 효과가 꽤 좋긴 했으나 고은서가 들어가면서 문을 제대로 닫지 않는 바람에 밖에 있던 주민기는 모든 대화를 하나도 빠짐없이 듣게 되었다.그는 고민 끝에 어두운 얼굴빛을 하고 있는 고은서한테로 다가가 입을 열었다.“고 매니저님, 대표님을 오해하고 계신 것 같은데 대표님은 어젯밤에 저랑 사무실에서 밤새 더 중요한 일을 처리하면서 민 대표님에 관한 일은 전혀 모르고 있었어요.”그러나 고은서는 콧방귀를 뀌면서 반박했다.“주민기 씨, 역시 곽승재가 가장 중용하는 직원답게 일 잘하시네요. 그런데 대신 설명해주지 않아도 돼요. 저도 보는 눈이 있어서 곽승재가 무슨 일을 하고 다니는지 직접 볼 줄 알아요.”주민기는 순간 할 말을 잃었디.사무실에 있던 곽승재는 또 한 번 가슴이 찢기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심지어 이미 산산조각이 나 피투성이 된 것 같았다....그날 오후.고은서는 참지 못하고 민시후에게 전화를 걸었다.민시후는 어젯밤부터 지금까지 아무런 연락도 없었는데 일이 어떻게 처리되었는지도 그녀에게 얘기해주지 않았다.얼마 후, 민시후 대신 그의 비서가 전화를 받았다.비서
‘단순히 보복하기 위해서 이런 일을 꾸몄다고? 게다가 민시후는 태도만 쌀쌀했을 뿐 인신공격을 하는 말은 내뱉은 적이 없는데 그까짓 작은 일로 앙심을 품고 이런 일을 꾸몄다는 게 말이 돼?’“민시후는 어떻게 생각한대요?”고은서가 물었다.“대표님께서도 믿지 않는 듯합니다. 그러나 그 여성분께서 대표님을 창피당하게 만들기 위해 그런 거라고 잘라 말하고 있는 바람에 어디서부터 손을 대야 할지 지금 고민 중이신 것 같습니다. 그리고 여씨 집안의 하인도 자신이 그 여성의 돈을 받고 그런 거라고 자백했습니다.”고은서의 얼굴빛이 더 어두워졌다.‘우리 모르는 무언가가 더 있는 것 같은데.’마침 박지연한테서 전화가 오는 바람에 고은서는 비서와 간단히 인사하고 전화를 끊었다.박지연은 육현석한테서 민시후 스캔들을 전해 듣고는 시간이 나자마자 고은서한테 전화를 걸었다.“대체 어떻게 된 일이야? 민시후가 네가 있는 장소에서 다른 여자랑 함부로 몸을 섞는 사람은 아닐 것 같은데. 육현석이 과장해서 말한 거 아니야? 진짜 오전에 바쁘지만 않았으면 이미 육현석이랑 한 판 싸웠을 거야.”박지연은 민시후가 그럴 사람이라는 걸 전혀 믿지 않았다.고은서가 집으로 돌아갔을 땐 이미 새벽이어서 박지연과 미처 얘기 나눌 새가 없었다. 그리고 박지연이 출근하러 나갈 땐 한창 자고 있었던지라 그녀에게 어젯밤에 있었던 일을 지금까지 얘기해주지 못했다.고은서는 그제서야 박지연에게 자초지종을 얘기해주면서 민시후가 조사해낸 결과까지 보태어 알려주었다.“거절 한 번 당했다고 이런 극단적인 수단으로 복수를 한다는 게 말이 돼?”“세상엔 별의별 사람들이 다 있잖아. 난 심지어 어떤 부부가 5억짜리 로또에 당첨되면 그 돈을 어떻게 쓰겠냐고 의논하다가 의견이 맞지 않아서 서로 칼부림하다가 응급실로 실려 온 것도 본 적이 있어. 그 여자 연예인이라며? 아마 복수할 겸 대중들의 이목을 끌기 위해서 그런 건 아닐까?”고은서는 박지연의 생각이 그나마 성립이 된다고 생각했다.근래 사람들의 이목을 끌기 위
“게다가 한 번쯤 오해한 게 뭐가 어때서. 곽승재도 널 몇 번이고 믿지 않으면서 나무랐잖아.”박지연이 곽승재를 향한 불만을 토로했다.“백유미 말만 들으면서 네 말은 들어주지도 않았잖아. 그리고 백유미가 다칠 때마다 네 탓이라면서 널 비난한 게 한두 번이야? 생각만 해도 짜증이 난다니까. 곽승재도 한 번쯤 억울한 일을 당해봐야지. 그저 벌 받는 거라고 생각해.”고은서는 일부러 곽승재한테 벌을 주려고 그런 것이 아니었다.어젯밤 민시후가 여자랑 같이 누워있는 모습을 보자마자 저도 모르게 곽승재의 불쾌하다는 듯한 표정이 떠오르면서 자연스럽게 그를 의심하게 된 것이다.그리고 아침에 민시후에 관한 스캔들이 갑자기 퍼지기 시작한 데다가 또 곽승재가 어젯밤에 집에 돌아가지 않았다는 소식을 이미숙한테서 전해 듣게 되면서 이내 그가 배후에서 여론을 조종하고 있다는 틀린 판단을 내리게 되었다.이어 분노에 눈이 먼 고은서는 자신이 곽승재를 오해한 건 아닌지를 단 한 번도 고려해보지 않고 GS그룹으로 달려가 그를 비난했던 것이다....송민준의 새 사무실.민시후는 어두운 표정을 하고 그의 맞은편에 있는 소파에 앉아있었다.“시후야, 무슨 일인데 그렇게 화나 있어?”송민준은 태연자약하게 그에게 차를 따라주었다.“어젯밤 그 여자랑 아는 사이지?”민시후는 송민준을 향해 사진 몇 장을 던지면서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송민준은 사진을 힐끗 보고는 덤덤하게 답했다.“모르는 사람이야.”“정말 모르는 사람이야?”민시후는 새 사진 몇 장을 더 보여주면서 차가운 목소리로 캐물었다.“그럼 이건 뭔데?”찻집 로비 CCTV 동영상에서 캡처한 사진들이었는데 그중에는 찻집으로 들어가는 송민준의 모습과 얼마 지나지 않아 똑같은 찻집에 들어선 그 여자의 모습이 담겨 있었다.“사진에 무슨 문제라도 있어? 어제 사업 파트너 만나러 찻집에 들른 건데. 내가 카페나 술집보다 상대적으로 조용한 찻집을 더 선호한다는 거 너도 잘 알고 있잖아...”“말 돌리지 마.”민시후가 짜증을 내며 송민
그러나 민시후는 송민준의 말에 아랑곳하지 않았다.“쓸데없는 말로 얼버무릴 생각하지마.”민시후의 목소리가 한없이 차가웠다.“얼마 전에 고은서랑 밥 먹을 때도 송민아를 데리고 우리 앞에 나타났잖아. 그리고 이번에 날 모함하려고 든 이 여자도 십분 간격을 두고 당신이랑 똑같은 찻집에 나타났어. 그리고 전에 고은서랑 옥방에서도 만났다며. 이 많은 일이 다 우연이라고? 그게 말이 돼?”“시후야, 다 아주 일상적인 일이잖아. 대체 어디에 문제가 있다는 거야?”송민준은 단아한 자세로 자리에 앉은 채 나긋한 미소를 지어 보이며 물었다.“그리고 자꾸 고은서 씨 얘기를 하는데 설마 내가 고은서 씨를 좋아한다고 오해하고 있는 거야? 예쁘게 생긴 건 인정할게. 민아를 친구로 사귀면서 잘 지내는 걸 봐서는 의리도 있고 사람도 꽤 괜찮아 보였어. 하지만 우리가 서로 알고 지낸지 하루 이틀도 아니고 게다가 하마터면 네 매형이 될 뻔한 사람인데 내가 왜 네가 좋아하는 여자를 넘보겠어.”송민준이 차근차근 설명했다.“레스토랑에서 만나고 옥방에서 만난 건 정말 다 우연이야. 어제도 진짜 파트너 만나러 간 거고. 이런 이유로 날 의심한다는 게 너무 어이없다는 생각이 들지 않아?”민시후는 더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어젯밤의 일은 여러모로 이상하기 그지없었다.그래서 민시후는 그 여자가 송민준이랑 같은 찻집에 나타났다는 걸 조사해내자마자 순간 송민준이 꾸민 일이라는 직감이 들었다.평소에 만나기도 어려웠던 사람이 갑자기 시도 때도 없이 자신의 눈앞에 나타난다는 게 너무 의심스러웠다.그 여자가 자신의 행적을 숨김없이 말했더라면 그저 사람들의 이목을 끌기 위해 그런 거라고 생각하면서 넘어갔을 것이다.그러나 그녀가 행적을 숨기려 하는 바람에 일이 범상치 않다는 게 수면 위로 드러났다.“어젯밤 일 나도 전해 들었어. 그런데 내가 널 해칠 이유가 없잖아. 민아도 이젠 널 좋아하지 않는다고 하는데 내가 굳이 손해를 보면서 이런 모험을 해야 했을까? 그리고 은서 씨도 명석한 분이어서 널
의사가 여재훈의 상처를 처치하는 사이, 고은서의 휴대폰이 울렸다.번호를 보니 곽승재였다.고은서는 여재훈에게 말하고 복도로 나가 전화를 받았다.“은서야, 너 사고를 당했다며? 너와 여 대표님이 모두 다쳤다고?”곽승재가 다급히 물었다.임신 오해 사건 이후, 두 사람이 모든 것을 터놓고 얘기한 뒤로 그녀를 몰래 보호하던 인원을 철수한 상태였다.하지만 운전기사는 여전히 주민기가 배치한 인원이어서 고은서에게 무슨 일이 생기면 바로 알 수 있었다.고은서는 어디서 들었는지 캐묻지 않았다.“괜찮아. 마재경이 갑자기 유일 투자은행 주차장에서 나를 습격했어. 여재훈 씨가 막아주다가 팔을 다치셨고.”“나는 지금 출장 중이라 경찰서 쪽에 다른 사람을 보냈어.”곽승재는 무거운 목소리로 말했다.“지금 바로 해성으로 돌아갈게.”고은서는 급히 돌아올 필요가 없다고 말했다.“여긴 별일 없으니까 일에 집중해. 여재훈 씨의 상처 처치가 끝나면 경찰서로 가서 마재경을 만날 거야.”“이쪽 일은 거의 마무리됐어. 내가 돌아가면 같이 경찰서에 가자.”곽승재는 설명을 이어갔다.“지난번 마재경이 다쳤을 때 병원을 방문해 더 이상 협조가 필요 없다고 통보하고 충분한 보상금도 지급했어.”“다시는 네 앞에 나타나 존재감을 과시하지 말라고 몇 번 경고했는데 갑자기 나타난 걸 보면 배후에 조종자가 있는 게 아닌지 의심스러워.”곽승재는 차분한 목소리로 분석을 이어갔고, 고은서도 어느 정도 수긍했다.따져보면, 마재경은 돈 때문에 곽승재와 손잡은 것이고 그녀와 깊은 원한이 없었다.협력 관계가 끝났으면 적당한 선에서 물러나야 정상이지, 이렇게 위험한 방식으로 그녀에게 복수할 이유가 없지 않은가?하지만 마재경이 진심으로 곽승재를 좋아하게 됐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천천히 사랑을 키워나가고 싶었는데 곽승재가 갑자기 관계를 끊자고 하니 그 분노를 고은서에게 쏟아냈을 수도 있다.고은서가 이 가능성을 말하려는 순간, 간호사가 문을 열고 나오더니 안에 있는 환자분의 부탁이라며 그녀의 상처
‘분명 넘어뜨렸는데.’고은서는 마재경이 이렇게 빨리 일어날 줄은 몰랐고, 가위를 들고 달려들 줄은 더욱 생각지 못했다.피하기엔 이미 늦은 상황이었다. 고은서는 다급한 마음에 전기충격기를 꺼내 마재경의 몸에 들이댔다.“조심해요.”고은서와 마재경이 전기충격기와 가위를 손에 들고 서로 공격하려는 순간, 우람한 체구의 남성이 황급히 달려왔다. 여재훈이었다.그는 고은서를 확 끌어당기고 마재경을 밀쳐냈다.쨍그랑! 전기충격기가 땅에 떨어지며 마재경의 몸에 닿았고, 감전된 마재경은 비명을 질렀다.잠시 비틀거리던 마재경은 눈에 핏발을 세우고 다시 가위를 휘두르며 덤벼들었다.고은서가 마재경을 걷어차려고 다리를 뻗는 순간, 여재훈이 자기 팔로 가위를 막아 그녀를 보호했다.그의 넓은 어깨는 웅대한 산처럼 든든해 보였고, 어린 시절 외할아버지 품에 안겼을 때처럼 피난처 같은 안정감을 주었다.짝! 가위가 여재훈의 팔을 찌르며 옷이 찢어지는 소리가 들렸다. 여재훈은 잽싸게 마재경을 발로 걷어찼다.“여재훈 씨, 괜찮으세요?”정신을 차린 고은서가 다급한 목소리로 물었다.여재훈은 평온한 표정으로 대답했다.“괜찮아요.”이때 경비원 몇 명이 달려와 마재경을 제압했다.고은서는 여재훈의 팔을 살펴보았다. 재킷과 셔츠가 찢기고 기다란 상처에서 피가 흘러나오고 있었다.고은서는 가슴이 아려와 다급히 말했다.“다치셨네요. 빨리 병원 가서 싸매야 해요.”“고은서 씨도 다쳤으니 같이 가요.”여재훈이 고은서의 쇄골 부위를 가리키며 말했다.아무 느낌도 없었는데, 여재훈의 말을 듣고 나니 쇄골 근처 어깨죽지 부위에서 얼얼한 통증이 느껴졌다.손으로 만져보니 피는 나지 않는 듯했다. 오늘 카라 없는 캐주얼 셔츠를 입은 까닭에 마재경이 가위를 휘두를 때 살짝 긁힌 듯하다.“저는 연고만 바르면 될 것 같아요. 어서 병원 가요.”고은서는 경비원에게 마재경을 경찰서에 넘기라고 말했다.그러고는 기사를 불러오고 여재훈과 함께 뒷좌석에 탔다.여재훈의 팔뚝에 번진 핏자국을 보며 고은서는
여재훈도 자리에서 일어났다.“제가 은서 씨를 회사까지 모셔다드리겠습니다.”이 식사는 여재훈이 초대한 자리였으니 끝까지 책임지고 고은서를 안전하게 회사까지 돌려보내는 게 맞다고 생각했다.돌아가는 길에 두 사람은 거의 말을 하지 않아 분위기가 조금 무거웠다.고은서는 여재훈이 자기 딸이 고양이를 학대했을 수도 있다는 사실을 받아들이기 힘들어한다는 걸 알기에 여재훈한테 혼자 생각할 시간을 줬다.얼마 지나지 않아 그들은 유일 투자은행의 주차장에 도착했다.“은서 씨, 곽승재 씨랑 현재 무슨 사이이신가요?”여재훈이 물었다.고은서는 사실대로 답했다.“그냥 평범한 친구 사이예요.”여재훈은 고개를 끄덕이더니 말했다.“승재 씨는 은서 씨를 많이 신경 쓰는 것 같더군요.”연회 때 곽승재가 고은서를 적극적으로 감싸는 모습을 모두가 똑똑히 봤다.이에 대해 고은서도 부정하지 않았다.“그건 곽승재 씨의 일방적인 감정이에요. 저는 그 사람한테 이성적인 감정은 없어요.”“시은이가 승재 씨를 꽤 마음에 들어 하더라고요. 저한테도 말한 적 있어요. 그와 결혼하고 싶다고.”여재훈은 말을 이었다.“아마 시은이의 질투심도 여기서 시작된 것 같아요. 그래서 은서 씨를 해하려 했던 걸지도 모르죠. 하지만 쿠아는 시은이가 가장 아끼던 반려동물이에요. 시은이가 이유 없이 해칠 리는 없을 겁니다.”고은서는 그 말의 속뜻을 곧바로 이해했다.여재훈의 말은 여시은이 고은서를 향한 질투 때문에 공격적으로 나왔을 수는 있어도, 쿠아는 여시은이 키우는 반려동물이기에 쿠아를 해칠 사람은 아니라고 믿는다는 것 같았다.고은서는 그저 씁쓸하게 웃었다.가족이라는 필터는 쉽게 사라지지 않는다. 하지만 언젠가는 여재훈도 여시은의 본모습을 보게 될 날이 올 것이라 믿었다.고은서는 더 말해봤자 의미가 없다는 걸 알기에 여재훈한테 간단히 인사를 하고 차에서 내렸다.차에서 내린 고은서는 어디선가 여자 하나가 스쳐 지나가는 듯한 그림자를 본 것 같았고, 공기 중에서 약간의 피비린내도 느꼈다.그녀는 주
여재훈은 고은서를 바라보며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을 하고는 물었다.“시은이가 또 무슨 일을 했다는 거죠?”마침 노 사장님이 식전 반찬을 가져다주며 주문한 대표 요리도 곧 준비된다고 알렸다.고은서는 계속해서 말했다.“재훈 씨, 저희 먼저 식사부터 하고 이야기할까요?”고은서는 몹시 배가 고팠다. 만약 지금 이 이야기를 꺼내면 두 사람 모두 식사할 마음이 사라질 것 같았다.여재훈은 고은서의 제안에 동의했다.이 개인 요리 식당의 음식은 색다른 풍미가 있었고, 고은서는 배부르게 먹었다.반면, 여재훈은 거의 먹지 않았다. 마치 그는 고은서를 동반하기 위해 자리를 함께한 것처럼 보였다.식사 중에는 가끔 일상적이고 가벼운 이야기를 나누기도 했다.약 삼십 분 후, 고은서는 젓가락을 내려놓으며 배가 너무 부르다고 말했다.아직 못다 한 이야기가 남아있지만, 여재훈은 배부른 고은서를 보며 묘한 만족감을 느꼈다.여재훈은 그녀가 배부르게 먹는 모습을 보는 것만으로도 기뻤다.여재훈은 고은서의 찻잔에 물을 따라주며 물었다.“우리 시은이가 또 무슨 잘못을 저질렀던 거죠?”고은서는 찻물을 한 모금 마신 뒤 숨을 깊이 들이쉬고는 여시은이 고양이를 학대한 일에 대해 털어놓았다.“저번에 제가 쿠아 때문에 경찰에 신고를 했었잖아요?”고은서가 말했다.“전 정말 시은이에게 누명을 씌운 게 아니에요. 여시은이 제 눈앞에서 쿠아의 입술을 다치게 했어요. 그리고 평소에도 쿠아를 자주 괴롭혔어요.”고은서의 말을 들은 여재훈은 자신의 귀를 의심했다.“시은이는 쿠아를 그렇게 아꼈어요. 집에서도 항상 품에 안고 다녔고, 쿠아가 뭐라도 먹고 싶어 하면 직접 손으로 먹여줬다니까요. 시은이가 어떻게 그런 짓을 했겠어요?”여재훈은 믿지 못하겠다는 듯이 물었다.“은서 씨, 혹시 오해가 있는 건 아니에요? 뭔가 착각하신 거 아닐까요?”평소 여시은은 얌전한 딸의 이미지를 잘 연기해 왔기에 여재훈은 그녀를 철석같이 믿고 있었다.“재훈 씨가 믿기 힘든 거 알아요. 아버지 입장에서야 딸이 그
지난번 숙모에게 가방을 선물했을 때, 숙모가 엄청나게 기뻐했던 모습이 순간 떠올랐다.그래서 이번엔 삼촌에게도 뭔가를 사서 드리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고은서는 노 사장님에게 코담배병을 어디서 샀는지 물어봤다. 그리고 가족에게 드릴 선물로 하나 사고 싶다고 말을 덧붙였다.“이건 친구가 선물한 거라 어디서 샀는지는 나도 잘 모르겠네.”노 사장님은 미안한 듯 말했다.고은서는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괜찮아요, 그냥 예뻐서 한번 여쭤본 거예요. 나중에 백화점 가서 한번 골라볼게요.”“아가씨는 참 효심이 깊구먼.”노 사장님은 칭찬을 몇 마디 건넨 뒤, 주문한 메뉴를 주방으로 가져갔다.“은서 씨 아버님께서 코담배병을 좋아하시나요? 선물하시려고요?”여재훈이 부드럽게 물었다.고은서는 고개를 저었다.“전 아버지가 없어요. 삼촌께 드리려는 거예요.”여재훈은 조금 놀란 표정이었다.그는 고은서를 몇 번밖에 만나지 못했기에 그녀의 가정사에 대해서는 잘 알지 못했다. 그래서 그녀에게 아버지가 없다는 사실도 오늘 처음 들었다.“죄송합니다. 그런 줄도 모르고...”여재훈은 곧바로 사과했다.고은서는 별일 아니라는 듯 웃었다.“괜찮아요. 저희 가족끼리도 잘 지내고 있어요.”착각일지도 모르지만, 여재훈은 고은서의 그 미소는 어딘가 익숙하다는 느낌을 받았다.그때 여재훈의 휴대전화 벨 소리가 울렸다.전화번호를 확인한 그는 곧바로 정신을 차리고 전화를 받았다.“시은아, 왜 그래... 주사 맞는 게 당연히 좀 아프지. 하지만 주사를 안 맞으면 어떻게 낫겠어... 알겠으니깐 떼쓰지 말고, 의사 말 잘 들어.”전화를 끊고 나서 여재훈은 고은서에게 간단히 상황을 설명했다.“시은이가 아픈데 주사 맞기 싫다고 하네요.”고은서는 여시은의 이름에 반응이 컸다. 예전에 여시은에게 학대받다 죽은 쿠아가 떠올랐다. 그 기억 때문에 속이 불쾌해지고 분노가 스멀스멀 올라왔다.그녀는 말없이 찻잔을 들어 한 모금 마셨다.여재훈은 고은서의 반감을 눈치채지 못할 리 없었다.그는 조심
여재훈의 말을 들은 고은서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고은서는 여시은이 아픈 시기가 참으로 절묘하다고 생각했다. 아마도 밖의 여론이 여시은에게 불리해서 고은서를 만나고 싶지 않았을 뿐일 것이다.요 며칠, 인터넷에서는 여시은과 관련된 뉴스가 아직 완전히 사라지지 않았다.고은서가 KK한테 도움을 요청한 것 외에도, 아마 곽승재도 뒤에서 힘을 써준 것 같았다.“원래 연회 다음 날에 시은이를 데리고 직접 사과드리려고 했는데, 며칠간 일이 좀 많아서 오늘로 미뤄졌어요.”여재훈은 이어 말했다.“오늘 아침에 갑자기 시은이가 열이 나서, 제가 혼자 찾아오게 됐습니다.”“은서 씨, 지난 일은 전부 시은이의 잘못입니다. 제가 대신 사과드리겠습니다.”여재훈은 미안한 표정으로 말했다.고은서는 담담하게 웃으며 대꾸했다.“재훈 씨의 사과는 저한테 너무 과분해요. 다만 저를 나쁜 사람으로 오해하지 않으셨으면 좋겠어요.”고은서가 지난번 여씨 가문에서 있었던 일을 언급하고 있다는 걸 알아챈 여재훈은 마음이 더욱 불편해져났다.“제가 도우미와 시은이의 말만 믿었네요. 시은이에게는 그 일에 대해 이미 훈계했고, 요 며칠 집에서 반성하고 있습니다.”고은서는 여시은이 그저 여재훈에게 보여주기 위해 반성하는 척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녀는 결코 자기 잘못을 인정하지 않았을 것이다.그러나 여재훈은 여시은을 여전히 굳게 믿고 있었고 그녀의 이중적인 모습에도 크게 실망하지 않은 듯했다.고은서가 더 이상 말을 잇지 않자, 운전 중이던 여재훈도 잠시 침묵을 지켰다.얼마 지나지 않아, 두 사람은 한적한 곳에 있는 개인 요리 식당에 도착했다.그 식당은 규모가 너무 크지는 않았지만 분위기는 엄청 좋았다.정원에는 다양한 희귀한 꽃들과 식물들이 놓여 있었고 작은 인공 폭포와 휴식용 테이블과 의자들도 마련되어 있었다.입구 쪽의 돌 테이블 위에는 하얀색의 통통한 고양이 두 마리가 게으르게 햇볕을 쬐고 있었다.잔잔하게 흘러나오는 음악을 들으니 고은서의 마음이 한결 차분해지는 것을 느꼈다.
송민아가 입을 삐죽이며 말했다.“저번에 네가 너무 진지하게 말하길래, 나 진짜 겁먹었잖아.”고은서가 다시 한번 웃으며 잡담하듯 물었다.“민아야, 너 예전에 말했잖아. 너랑 네 오빠는 엄마가 다르다고. 그럼 네 아빠랑 네 오빠 엄마는 이혼하신 거야?”송민아는 사무실 밖을 슬쩍 확인했다. 그리고 아무도 없는 걸 확인하고 조용히 말했다.“몰래 엄마한테 물어봤는데, 우리 오빠 엄마는 아빠랑 혼인신고도 안 했대. 둘이 약혼까진 했는데, 무슨 이유인진 모르겠지만 오빠 엄마가 아빠랑 결혼하길 거절했대.”고은서는 눈썹을 찌푸렸다.‘설마 송민준의 엄마도 결혼 안 하고 그를 낳은 걸까?’지난번 고은서가 송민준과 함께 바에서 우연히 만났을 때, 그가 그녀를 집까지 데려다주면서 송민준은 어릴 때부터 보호만 받고 자라서 사람에 대한 경계심이 없다고 고은서한테 말한 기억이 있다.그때 그의 말투는 평소의 부드러운 말투가 아니라 약간의 조롱 섞인 느낌이었다. 마치 그의 어린 시절이 순탄치 않았다는 듯이.‘혹시 송민준의 어머니가 결혼도 안 하고 그를 낳아서 상처를 받은 탓일까?’“은서야, 이건 진짜 너한테만 말한 거니까, 절대 우리 오빠한테 묻지 마!”송민아가 신신당부하면서 말했다.“오빠는 이 얘기를 누구한테도 한 적 없어. 분명히 신경 쓰고 있다는 거야. 우리 엄마가 말하는 데 이 사실을 아는 사람은 거의 없더래.”“오빠는 혼자 살긴 해도 우리 엄마한테는 되게 예의 바른 거 있지. 나도 이 비밀 듣기 전까진 우리 둘이 같은 엄마 뱃속에서 태어난 줄 알았어.”고은서는 절대 이 비밀을 다른 사람에게 말하지도, 송민준에게 묻지도 않겠다고 약속했다.“민아야, 혹시 너희 엄마가 네 아빠의 다른 연애 상대에 대해 말한 적 있어?”고은서는 궁금한 것이 있으면 참지 못하고 묻는 성격이었다.혹시라도 송민아의 어머니가 송민준 부모의 관계에 끼어든 거라면 송민아의 어머니가 뭔가 알고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한 것이다.“그냥 어른들 옛날 연애사에 호기심이 생긴 거야. 만약 불쾌했
송민준의 단어 사용은 꽤 신박했다.그는 “어젯밤 그 일은, 네가 의도한 거야?”라고 물었다. “어젯밤 무슨 일이 있었던 거야?”가 아니라.그러니까 송민준의 말뜻은 그가 어젯밤 일이 여시은을 고의로 함정에 빠뜨리려고 한 고은서의 계획이었음을 알고 있다는 건가?하지만 그 테라스는 비교적 한적했고 로마식 기둥이 시야를 가려 일반적으로는 사람들이 잘 알아채기 어려운 장소였다.고은서가 로비에서 넘어졌을 때 여시은은 빈 와인잔을 들고 그녀 앞에 서 있었다. 이 상황을 봤을 때 대부분의 사람들은 여시은이 고은서를 민 것으로 생각했을 것이다.그런데 어떻게 송민준은 고은서가 여시은을 속이기 위해 고육지계를 쓴 걸 알아챈 걸까?고은서는 아예 직설적으로 물었다.“민준 오빠, 왜 그렇게 물어보는 거야? 설마 어젯밤 내가 넘어졌던 게 자작극이라고 생각한 거야?”그 말을 듣자 송민준은 웃으며 물었다.“은서야, 그런 뜻이 아니야. 난 그냥 그 농장 영상 말이야, 그걸 일부러 어젯밤 그 시점에 터뜨린 건지 궁금해서 물어본 거야.”알고 보니 송민준은 농장 영상을 묻고 있었던 것이다.그날 송민준의 컴퓨터에서 영상을 확인하고 난 후, 송민아가 고은서에게 이 영상을 바로 여재훈에게 전달할 거냐고 물었을 때, 고은서는 송민준을 경계해 일부러 연회 이후에 결정하겠다고 말했었다.하지만 실제로는 연회 그 자리에서 바로 그 영상을 공개해 버렸다.송민준이 의심하는 것도 정상이다.“맞아.” 고은서는 고개를 끄덕였다.“원래는 어젯밤이 지나고 여재훈 씨를 따로 찾아가려고 했는데, 그 상황에서는 여시은이 그런 행동을 할 만한 동기를 증명하려면 그걸 꺼낼 수밖에 없었어.”송민준은 고개를 끄덕였다.“다른 뜻은 없었어. 그냥 궁금해서 물어본 거야. 네 선택이 맞아, 난 항상 널 지지할 거니깐.”그의 표정을 본 고은서는 확신했다. 송민준은 고은서가 아직 그를 경계하고 있다는 걸 눈치챘을 것이다.그의 성격상, 어젯밤 그녀가 계획적으로 움직였다는 것쯤은 쉽게 짐작했을 테니까. 하지만 송민준
박지연은 계속해서 불만을 터뜨렸다.“내가 보기엔 여시은은 태생이 못돼먹었어!”“이번에 그렇게 크게 당했으니 더더욱 널 원망할 거야. 너 조심 좀 해.”박지연이 걱정스럽게 당부했다.고은서는 고개를 끄덕였다.이미 각을 세우기로 마음먹었기에 여시은과 평화롭게 지낼 생각은 애초에 없었다. 앞으로는 여시은을 더 철저히 경계할 것이다.“듣자 하니 곽승재가 내내 널 감싸줬다며? 너한테 점점 마음이 가는 모양이야.”박지연이 코웃음을 쳤다.어젯밤 곽승재가 고은서를 계속 도와줬던 건 사실이었다. 증거를 공개하자고 제안한것도 곽승재의 생각이었고 마지막에 그녀를 집까지 데려다줬다. 곽승재가 고은서에게 큰 도움을 준 셈이었다.하지만 고은서는 곽승재에 대한 이야기를 박지연과 깊이 나누지 않았다.잠시 다른 이야기를 하던 중 박지연이 고은서에게 뜬금없는 소문 하나를 전했다.“우리 과장님한테서 들었는데, 어제 혜린 씨가 다니는 병원에 조 여사님이 찾아가서 난리를 쳤대. 혜린 씨 남자관계가 복잡하다고, 다른 남자랑 팔짱 낀 사진까지 들고 와서 공개하면서 혜린 씨랑 그 자리에서 머리끄덩이 잡고 싸움 났대!”고은서는 지난번 소동 이후 손자를 중시하는 조수연이 한동안은 조용할 거라 생각했었다. 그런데 고작 며칠 만에 또 난리를 친 거였다. 조수연의 전투력은 엄청 대단했다.“아니, 그러다 혜린 씨 혹시라도 애를 지우기라도 하면 어떡하려고 그래?”고은서가 물었다.박지연은 말했다.“조 여사님 말로는 혜린 씨 뱃속 애가 자기 아들 애가 아닐 수도 있다고 의심해서 혜린 씨를 끌고 가서 친자 확인하자고 했대. 그래서 둘이 몸싸움까지 벌어져서 이미지도 최악이라 혜린 씨는 한 달 정직당했어.”“혜린 씨 배속에 애가 온승준 씨 애가 아니라고? 그럼 도대체 왜 그렇게까지 그 집에 들어가려고 애쓰는 거야? 그냥 진짜 애 아빠랑 결혼하면 될걸...”고은서는 도무지 납득이 가지 않았다.“소문엔 그 남자가 유부남에 애까지 있다고 하더라. 자세한 건 나도 몰라. 그냥 과장님이 흘린 얘기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