곽승연의 말을 들은 곽승재는 순간 가슴이 철렁했다.곽승연은 나이는 많지 않았지만 촉이 아주 예민한 사람이었는데 지금 그녀가 고은서가 자신을 자주 보러 못 오는 거 아니냐고 걱정한다는 건 민시후와 고은서의 사이가 범상치 않다는 걸 느꼈다는 걸 의미했다.고은서가 다른 남자와 남은 생을 약속할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든 곽승재는 저도 모르게 마음이 아파왔다.그는 곽승연을 위안하고 있을 때 마침 주민기한테서 연락이 오는 바람에 다시 방 밖으로 나갔다.“곽 대표님, 해찬시에서 오토바이를 타면서 고준석 어르신을 치려고 했던 두 남자에 관한 새로운 소식을 찾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사고가 발생하기 이틀 전에 두 사람의 계좌로 불명의 거금이 이체된 걸 조사해냈습니다.”주민기가 단도직입적으로 말했다.“그런데 두 사람이 오토바이 경주 클럽 회원인 데다가 금액을 이체한 계좌도 클럽 계좌여서 제때 발견하지 못했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다시 조사해본 결과 오토바이 경주에 관심이 있는 사장 한 명이 두 사람에게 준 특별 상금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그 사장은 상금만 제공하고 계좌 이체는 클럽에 대신 맡긴 것 같습니다. 클럽에서 제공한 서류에 따라 더 자세히 조사해보았는데 북성 송씨 가문과 연관 있는 걸 확인했습니다.”곽승재는 이내 눈살을 찌푸리면서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반 시간 후, 회사 사무실에서 봐.”“네, 대표님.”...파티는 점점 절정으로 달리고 있었다.술을 마시면서 사업 얘기를 나누는 사람들이 있는가 하면 일상적인 수다를 떠는 사람들도 있었고 함께 춤추면서 서로를 향한 호감을 표달하는 사람들도 있었다.민시후는 파티에 온 남자 손님들과 술을 마시고 있었는데 그중 누군가가 카드 게임을 하러 가자고 제안했는데 그는 고은서가 한창 바삐 보내고 있는 걸 확인하고는 고민 끝에 함께 게임하러 가기로 했다.반면 고은서는 거실에서 만난 여자들한테 향수에 관한 얘기를 해주고 있었다.진짜 향수에 관해 흥취가 있어서 그러는 건지 아니면 그녀의 사랑 이야기에 흥미를 느껴서 그
여자의 머리는 이리저리 흐트러져 있었고 입술에 바른 립스틱도 거의 지워져 있었으며 목에는 누군가에게 물린 듯한 이빨 자국이 있었다.민시후는 술에 취한 탓인지 미간을 어루만지면서 정신을 차리려고 애썼다.그의 상의는 이미 사라졌고 입술은 여자가 바른 립스틱과 똑같은 색을 띠고 있었고 가슴 쪽에는 손톱에 할퀸 자국들로 가득했다.여자가 이불 전체를 자기 쪽으로 끌어당기는 바람에 이리저리 뒤엉킨 침대 시트와 침대 위에 널브러져 있는 여자의 드레스, 섹시한 속옷, 그리고 민시후의 셔츠와 바지가 그대로 드러났다.여자의 드레스와 속옷은 누군가가 강제로 벗긴 듯 볼품없이 찢겨져 있었는데 현장 상황을 보아서는 아주 격렬한 일이 발생한 듯했다.시간이 늦어서 많은 손님들이 돌아가긴 했으나 방금전 비명소리를 들은 나머지 사람들이 우르르 몰려들었다.그들은 방 안의 광경을 보고 서로 놀라움을 머금지 못했는데 심지어 흥분해 하며 폰을 꺼내 사진 찍으려는 사람도 있었다.여시은은 이내 정신을 차리고 하인들한테 손님을 데리고 아래로 내려가라고 지시하면서 자신의 동의 없이는 누구도 올려보내지 말라고 신신당부했다.체구는 작았으나 그녀의 말을 거역하는 사람은 없었다.다들 호기심이 만발하긴 했으나 집주인의 말을 따르면서 고분고분 아래로 내려갔다.수군거리는 소리와 여자의 흐느끼는 울음소리를 들은 민시후는 그제야 이상함을 감지하고 고개를 들었다.그의 눈에 처음으로 들어온 건 무표정한 얼굴을 하고 있는 고은서와 놀라운 기색을 띤 여시은이었다.이어 그는 자신이 알몸으로 흐느끼고 있는 여자 옆에 앉아있는 걸 발견했다.민시후는 당황해하며 고은서를 바라보았다.“옷 입고 나와. 밖에서 기다릴게.”고은서는 말하고는 문을 닫고 나갔다.“은서 씨, 괜찮아요? 다 오해일 거예요. 시후 씨가 은서 씨를 얼마나 좋아하는데요. 절대 다른 여자랑 저런 일을 할 리가 없어요.”여시은이 나지막한 목소리로 고은서를 위안했다.그러나 고은서는 차가운 얼굴빛을 한 채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여시은도 더는
민시후의 목소리는 한없이 차가웠고 그의 표정에서는 살기가 느껴졌다.여자는 얼굴을 막고 있던 손을 내리면서 억울하다는 표정을 지으며 겁에 질린 목소리로 훌쩍이면서 말했다.“민 도련님, 저 정말 억울해요. 오늘 도련님한테 술도 권한 적이 없는데 제가 무슨 약을 먹였다는 거예요. 저는 도련님께서 제대로 서 있지 못할 정도로 취해 있기에 부축만 했을 뿐이라고요. 그런데 누가 방에 들어서자마자... 책임지기 싫으시면 저도 그냥 없던 일로 치고 넘어갈게요...”여자는 말하면서 고개를 더 빳빳이 쳐들었는데 그 때문에 목에 있는 이빨 자국이 더 선명히 드러났다.마치 억울하게 괴롭힘이라도 당한 듯한 모습과 겁에 질려 덜덜 떨리는 목소리까지 아마 민시후가 아닌 다른 남자였다면 이미 마음이 녹아내렸을 것이다.“책임?”그러나 민시후는 그녀의 속임수에 넘어갈 리가 없었다.“그 목적으로 나한테 일부러 접근한 거였어?”그는 말하면서 냉소를 흘렸다.여자는 계속 고개를 저으면서 자신은 그저 친구랑 함께 온 거라며 우연하게 그를 만난 거라고 목적을 품고 그에게 고의로 접근한 게 아니라고 자신의 억울함을 호소했다.“민 도련님, 제가 도련님처럼 출중한 사람이 아니란 건 잘 알고 있어요. 그러나 저를 좋아하는 남자도 적지 않게 있는데 제가 왜 이런 모험을 하겠어요.”여자가 통곡하면서 말했다.“저는 걱정되는 마음에 방까지 부축해 준 것뿐인데 도련님께서 술김에 저를 아래에 깔고 제 옷을 찢었잖아요.”“닥쳐!”민시후가 그녀를 향해 소리쳤다.정녕 그녀와 잠자리를 가지지 않았다고 해도 민시후는 고은서가 이런 얘기를 반복해서 듣는 걸 원하지 않았다.그의 흉악한 모습에 여자는 더는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혼자 훌쩍이면서 불쌍한 척했다.이내 하인이 깨끗한 새 옷을 가지고 나타났는데 민시후는 새 옷으로 갈아입지 않았다.하인은 어쩔 수 없이 옷을 방 안에 여자한테 다 건네주었다.“나도 어떻게 된 일인지 잘 모르겠어.”민시후가 참담한 표정으로 고은서에게 말했다.그는 카드 게임을
민시후는 이내 시선을 돌려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있는 고은서를 빤히 바라보았다.“은서야, 난 아직 처리할 일이 남아서 너 먼저 돌아가 있어. 기사한테 데려다주라고 말해 둘게.”고은서는 고개를 끄덕였다.민시후가 일 처리를 재빠르게 했지만 이튿날 그에 관한 스캔들은 여전히 많은 사람들의 귀에 들어갔다.그와 여자가 같은 침대에 누워있는 모습을 목격한 사람이 한둘이 아니어서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여자는 그다지 이름 있진 않았지만 엄연한 연예계 사람이었고 또 민시후는 ZY그룹의 대표이자 북성 민씨 가문의 둘째 도련님이었기에 두 사람의 스캔들은 유독 많은 사람들의 이목을 끌었다.곽승재는 육현석의 전화를 받기 전까지 아무것도 모른 채 부하의 사업보고를 들으면서 블랙커피를 마시고 있었다.그는 어제 집도 돌아가지 않고 회사에서 새벽까지 일했는데 아침에 주간 회의까지 여는 바람에 무척 피곤했다.전화를 받자마자 육현석의 흥분해 하는 목소리가 들려왔다.“형, 어제저녁에 있었던 일 들었어?”“무슨 일?”곽승재는 그와 쓸데없는 얘기를 나누기 싫었는지라 지금이라도 전화를 뚝 끊고 싶었다.“민시후에 관한 일 있잖아. 어떤 여배우랑 잤다고 하던데.”육현석은 곽승재의 찐친으로서 예전부터 민시후를 원수처럼 여겨왔다.그래서 그는 민시후의 스캔들을 전해 듣자마자 참지 못하고 곽승재에게 전화했던 것이다.“친구한테서 들었는데 어제 여시은 씨 집들이 파티에서 그 여배우랑 술 마시고 같이 방에 들어가서 잤대. 그런데 하필 그 상황을 모르고 있던 하인이 실수로 방에 들어가는 바람에 그 현장에 있던 사람들이 다 알게 된 거지.”육현석이 흥미진진해 하며 말했다.“두 사람이 발각되었을 때 알몸 상태로 있었대. 그리고 현장을 봐서는 아주 격렬하게 한 것 같다던데.”곽승재는 눈살을 찌푸렸다.어제 파티 현장에 반 시간 밖에 있지 않았지만 고은서는 분명히 그에게 자신이 민시후를 데려온 것이라고 말했었다.‘두 사람이 다정하게 웃으면서 드럼도 치더니만 그 상황에서 민시후가 다른 여자랑
곽승재는 순간 주민기가 잘못 들었다는 생각이 들었다.고은서는 이혼하기 전에 한 번 찾아온 이후로 GS그룹에 찾아온 적이 단 한 번도 없었다.‘이 시간에 여긴 무슨 일로 온 거지?’“호성에서 있었던 일을 조사해준다는 걸 알고 감사 인사하러 온 건 아닐까요?”주민기는 내색하지 않고 아첨하는 듯한 말을 내뱉었다.‘요즘 종일 눈살을 찌푸리고 다니시는데 사모님을 보고 제발 기분 풀었으면. 대표님께서 기분이 좋으면 우리 직원들도 회사 생활이 그나마 편해지는데.’“사모님께서 몇 번이고 호성 경찰 측에 연락해 사건 조사 상황에 관해 물으셨다고 합니다. 그 두 남자를 꼭 잡고 싶어 하는 것 같습니다. 대표님, 조금 이따 사모님께서 물어보시면 다 조사하고 난 후에 모든 걸 알려드릴 생각이신가요 아니면 지금까지 조사해낸 상황을 먼저 알려드릴 생각이신가요?”주민기가 자연스럽게 말을 이어갔다.‘만약 미리 알려드릴 생각이면 사모님한테 보여줄 서류들을 다시 정리해 놓아야 하는데.’“아직 무슨 상황인지 확실하지 않으니까 나중에 다 조사하고 난 후에 알려주도록 하자.”“네, 알겠습니다.”주민기는 나가기 전에 한 마디 더 보탰다.“지금쯤 곧 엘리베이터에서 내리실 것 같은데 커피 내갈까요?”‘사모님을 만나고 나면 피곤도 곧 풀릴 것 같은데 커피를 그만 마셔도 되지 않나?’그의 뜻을 알아차린 곽승재는 차가운 눈빛으로 그를 힐끗 쏘아보았다.그러나 곽승재는 그와 따지지 않고 신선한 과일을 준비해 오라고 말했다.주민기가 나간 후 곽승재는 옷을 단정히 하고 앉아있는 자세도 바르게 하면서 자신의 제일 완벽한 모습을 보여주려고 애썼다.이내 밖에서 고 매니저님이라고 부르는 주민기의 목소리가 들려왔다.“곽 대표님은 사무실 안에 계십니다. 어제 밤새 일하시느라 제대로 쉬지도 못했습니다.”주민기가 눈치 있게 한 마디 더 보탰다.고은서는 그를 향해 냉소를 흘리고는 사무실 문을 두드리고 안으로 들어갔다.그녀는 어제저녁보다 더 캐쥬얼한 옷차림을 하고 있었는데 위에는 간단한 흰색 티
고은서의 날카로운 지적에 곽승재는 저도 모르게 헛웃음이 나왔다.그의 눈빛은 절망감으로 가득 차 있었다.“또 다른 할 말 있어?”곽승재는 평소의 차가운 모습으로 돌아왔다.고은서는 눈살을 살짝 찌푸렸다.“더 할 말 없으면 이만 가 봐. 나 바쁘니까.”고은서는 곽승재의 씁쓸한 눈빛을 보며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민시후는 당신을 싫어한다고 해도 단 한 번도 뒤돌아 당신에 관한 험담을 한 적이 없어. 백유미가 정신병원에서 당했던 일도 민시후가 알려준 거야. 심지어 당신이 나 대신 화풀이 해주기 위해 범가온이 백유미를 때리는 걸 암암리에 동의했다고 분석까지 해줬어. 굳이 나한테 당신 미담까지 해줄 필요는 없었는데 말이야. 민시후는 당신처럼 수단 가리지 않는 사람이 아니야. 당신보다 훨씬 착하고 정의로운 사람이야.”고은서는 말하고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사무실을 나갔다.사무실의 방음 효과가 꽤 좋긴 했으나 고은서가 들어가면서 문을 제대로 닫지 않는 바람에 밖에 있던 주민기는 모든 대화를 하나도 빠짐없이 듣게 되었다.그는 고민 끝에 어두운 얼굴빛을 하고 있는 고은서한테로 다가가 입을 열었다.“고 매니저님, 대표님을 오해하고 계신 것 같은데 대표님은 어젯밤에 저랑 사무실에서 밤새 더 중요한 일을 처리하면서 민 대표님에 관한 일은 전혀 모르고 있었어요.”그러나 고은서는 콧방귀를 뀌면서 반박했다.“주민기 씨, 역시 곽승재가 가장 중용하는 직원답게 일 잘하시네요. 그런데 대신 설명해주지 않아도 돼요. 저도 보는 눈이 있어서 곽승재가 무슨 일을 하고 다니는지 직접 볼 줄 알아요.”주민기는 순간 할 말을 잃었디.사무실에 있던 곽승재는 또 한 번 가슴이 찢기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심지어 이미 산산조각이 나 피투성이 된 것 같았다....그날 오후.고은서는 참지 못하고 민시후에게 전화를 걸었다.민시후는 어젯밤부터 지금까지 아무런 연락도 없었는데 일이 어떻게 처리되었는지도 그녀에게 얘기해주지 않았다.얼마 후, 민시후 대신 그의 비서가 전화를 받았다.비서
‘단순히 보복하기 위해서 이런 일을 꾸몄다고? 게다가 민시후는 태도만 쌀쌀했을 뿐 인신공격을 하는 말은 내뱉은 적이 없는데 그까짓 작은 일로 앙심을 품고 이런 일을 꾸몄다는 게 말이 돼?’“민시후는 어떻게 생각한대요?”고은서가 물었다.“대표님께서도 믿지 않는 듯합니다. 그러나 그 여성분께서 대표님을 창피당하게 만들기 위해 그런 거라고 잘라 말하고 있는 바람에 어디서부터 손을 대야 할지 지금 고민 중이신 것 같습니다. 그리고 여씨 집안의 하인도 자신이 그 여성의 돈을 받고 그런 거라고 자백했습니다.”고은서의 얼굴빛이 더 어두워졌다.‘우리 모르는 무언가가 더 있는 것 같은데.’마침 박지연한테서 전화가 오는 바람에 고은서는 비서와 간단히 인사하고 전화를 끊었다.박지연은 육현석한테서 민시후 스캔들을 전해 듣고는 시간이 나자마자 고은서한테 전화를 걸었다.“대체 어떻게 된 일이야? 민시후가 네가 있는 장소에서 다른 여자랑 함부로 몸을 섞는 사람은 아닐 것 같은데. 육현석이 과장해서 말한 거 아니야? 진짜 오전에 바쁘지만 않았으면 이미 육현석이랑 한 판 싸웠을 거야.”박지연은 민시후가 그럴 사람이라는 걸 전혀 믿지 않았다.고은서가 집으로 돌아갔을 땐 이미 새벽이어서 박지연과 미처 얘기 나눌 새가 없었다. 그리고 박지연이 출근하러 나갈 땐 한창 자고 있었던지라 그녀에게 어젯밤에 있었던 일을 지금까지 얘기해주지 못했다.고은서는 그제서야 박지연에게 자초지종을 얘기해주면서 민시후가 조사해낸 결과까지 보태어 알려주었다.“거절 한 번 당했다고 이런 극단적인 수단으로 복수를 한다는 게 말이 돼?”“세상엔 별의별 사람들이 다 있잖아. 난 심지어 어떤 부부가 5억짜리 로또에 당첨되면 그 돈을 어떻게 쓰겠냐고 의논하다가 의견이 맞지 않아서 서로 칼부림하다가 응급실로 실려 온 것도 본 적이 있어. 그 여자 연예인이라며? 아마 복수할 겸 대중들의 이목을 끌기 위해서 그런 건 아닐까?”고은서는 박지연의 생각이 그나마 성립이 된다고 생각했다.근래 사람들의 이목을 끌기 위
“게다가 한 번쯤 오해한 게 뭐가 어때서. 곽승재도 널 몇 번이고 믿지 않으면서 나무랐잖아.”박지연이 곽승재를 향한 불만을 토로했다.“백유미 말만 들으면서 네 말은 들어주지도 않았잖아. 그리고 백유미가 다칠 때마다 네 탓이라면서 널 비난한 게 한두 번이야? 생각만 해도 짜증이 난다니까. 곽승재도 한 번쯤 억울한 일을 당해봐야지. 그저 벌 받는 거라고 생각해.”고은서는 일부러 곽승재한테 벌을 주려고 그런 것이 아니었다.어젯밤 민시후가 여자랑 같이 누워있는 모습을 보자마자 저도 모르게 곽승재의 불쾌하다는 듯한 표정이 떠오르면서 자연스럽게 그를 의심하게 된 것이다.그리고 아침에 민시후에 관한 스캔들이 갑자기 퍼지기 시작한 데다가 또 곽승재가 어젯밤에 집에 돌아가지 않았다는 소식을 이미숙한테서 전해 듣게 되면서 이내 그가 배후에서 여론을 조종하고 있다는 틀린 판단을 내리게 되었다.이어 분노에 눈이 먼 고은서는 자신이 곽승재를 오해한 건 아닌지를 단 한 번도 고려해보지 않고 GS그룹으로 달려가 그를 비난했던 것이다....송민준의 새 사무실.민시후는 어두운 표정을 하고 그의 맞은편에 있는 소파에 앉아있었다.“시후야, 무슨 일인데 그렇게 화나 있어?”송민준은 태연자약하게 그에게 차를 따라주었다.“어젯밤 그 여자랑 아는 사이지?”민시후는 송민준을 향해 사진 몇 장을 던지면서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송민준은 사진을 힐끗 보고는 덤덤하게 답했다.“모르는 사람이야.”“정말 모르는 사람이야?”민시후는 새 사진 몇 장을 더 보여주면서 차가운 목소리로 캐물었다.“그럼 이건 뭔데?”찻집 로비 CCTV 동영상에서 캡처한 사진들이었는데 그중에는 찻집으로 들어가는 송민준의 모습과 얼마 지나지 않아 똑같은 찻집에 들어선 그 여자의 모습이 담겨 있었다.“사진에 무슨 문제라도 있어? 어제 사업 파트너 만나러 찻집에 들른 건데. 내가 카페나 술집보다 상대적으로 조용한 찻집을 더 선호한다는 거 너도 잘 알고 있잖아...”“말 돌리지 마.”민시후가 짜증을 내며 송민
박지연은 계속해서 불만을 터뜨렸다.“내가 보기엔 여시은은 태생이 못돼먹었어!”“이번에 그렇게 크게 당했으니 더더욱 널 원망할 거야. 너 조심 좀 해.”박지연이 걱정스럽게 당부했다.고은서는 고개를 끄덕였다.이미 각을 세우기로 마음먹었기에 여시은과 평화롭게 지낼 생각은 애초에 없었다. 앞으로는 여시은을 더 철저히 경계할 것이다.“듣자 하니 곽승재가 내내 널 감싸줬다며? 너한테 점점 마음이 가는 모양이야.”박지연이 코웃음을 쳤다.어젯밤 곽승재가 고은서를 계속 도와줬던 건 사실이었다. 증거를 공개하자고 제안한것도 곽승재의 생각이었고 마지막에 그녀를 집까지 데려다줬다. 곽승재가 고은서에게 큰 도움을 준 셈이었다.하지만 고은서는 곽승재에 대한 이야기를 박지연과 깊이 나누지 않았다.잠시 다른 이야기를 하던 중 박지연이 고은서에게 뜬금없는 소문 하나를 전했다.“우리 과장님한테서 들었는데, 어제 혜린 씨가 다니는 병원에 조 여사님이 찾아가서 난리를 쳤대. 혜린 씨 남자관계가 복잡하다고, 다른 남자랑 팔짱 낀 사진까지 들고 와서 공개하면서 혜린 씨랑 그 자리에서 머리끄덩이 잡고 싸움 났대!”고은서는 지난번 소동 이후 손자를 중시하는 조수연이 한동안은 조용할 거라 생각했었다. 그런데 고작 며칠 만에 또 난리를 친 거였다. 조수연의 전투력은 엄청 대단했다.“아니, 그러다 혜린 씨 혹시라도 애를 지우기라도 하면 어떡하려고 그래?”고은서가 물었다.박지연은 말했다.“조 여사님 말로는 혜린 씨 뱃속 애가 자기 아들 애가 아닐 수도 있다고 의심해서 혜린 씨를 끌고 가서 친자 확인하자고 했대. 그래서 둘이 몸싸움까지 벌어져서 이미지도 최악이라 혜린 씨는 한 달 정직당했어.”“혜린 씨 배속에 애가 온승준 씨 애가 아니라고? 그럼 도대체 왜 그렇게까지 그 집에 들어가려고 애쓰는 거야? 그냥 진짜 애 아빠랑 결혼하면 될걸...”고은서는 도무지 납득이 가지 않았다.“소문엔 그 남자가 유부남에 애까지 있다고 하더라. 자세한 건 나도 몰라. 그냥 과장님이 흘린 얘기야.”
여시은은 여전히 여재훈의 다리를 붙잡고 불쌍한 표정을 지으며 물었다.“그럼, 아빠가 생각하시는 해결 방법은 뭐예요?”여재훈은 여시은에게 홍보팀을 통해 자신이 저지른 잘못에 대해 공개 사과하고, 개인적으로 고은서에게 직접 진심으로 사과한 뒤 집에서 2주 동안 자숙하라고 말했다.“제 회사는 아직 개업식도 제대로 안 했는데 공개 사과를 하라뇨? 그럼 모든 사람들이 저를 웃음거리로 볼 거 아니에요!”여시은은 눈이 퉁퉁 부은 채 애원했다.“아빠, 저 은서한테 개인적으로 사과만 하면 안 돼요? 저도 아직 경험이 부족해서 사람들을 이끌기 힘든데, 공개적으로 사과하면 앞으로 누가 저를 믿고 따르겠어요?”“안 된다.” 여재훈은 단호하게 말했다.“이 일은 이미 파장이 커졌고 많은 사람들이 너를 지켜보고 있어. 그러니 모든 사람에게 확실하게 해명해야 한다.”“시은아, 잘못을 저지른 건 무서운 일이 아니야. 진심으로 뉘우치고 성실하게 사과하면 은서 씨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들도 너에게 다시 기회를 줄 거다.”여재훈은 계속해서 말했다.“사람은 자기가 저지른 잘못에 책임질 줄 알아야 한다. 네가 잘못했는데 내가 덮어주면 그건 너를 망치는 거야. 그러니까 이 일은 이렇게 결정된 거다!”여시은은 그 말을 듣자 속으로 분노가 치밀었다.‘고은서를 그저 연못에 좀 빠지게 했을 뿐인데 이게 뭐 그렇게 큰일이라고 이렇게까지 일을 키운단 말인가?’‘공개 사과라니, 이제 예전처럼 모두에게 존경받고 칭찬받던 모습은 끝이라는 거잖아.비록 인터넷의 영상은 지워지더라도 사람들이 나에 대한 나쁜 인상은 지워지지 않을 거란 말이야!’오늘 밤 그렇게 많은 부유층과 정재계 인사들이 있는 자리에서 그녀는 그들에게 최악의 인상을 남겼을 것이다. 해성에서 쌓아온 그녀의 완벽한 이미지가 단번에 무너진 셈이다.예전엔 그녀가 울기만 하면 여재훈은 안쓰러워하며 뭐든지 다 용서해 줬었다.‘지금은 무릎까지 꿇었는데도 아빠는 고은서 때문에 자신의 딸을 벌하려 한다니, 정말 나를 딸로 생각하긴 하는 걸까?’
여시은은 그 말을 듣자 눈이 시뻘게지면서 큰 소리로 외쳤다.“아빠, 제가 한 게 아니라니까요! 고은서가 일부러 저를 함정에 빠뜨린 거예요. 왜 저를 믿지 않으세요!”“시은아!”여재훈이 의자에서 벌떡 일어나며 난생처음으로 이토록 차가운 눈빛으로 딸에게 화를 냈다.“너는 어쩌다 이렇게 뻔뻔하게 거짓말만 하는 사람이 됐니!”“내가 사람을 시켜서 확인해 봤어. 연회장 CCTV 꺼놓은 거, 그거 네가 시킨 거더라.”여재훈은 딸을 억울하게 만들까 걱정돼 CCTV 관련 내용을 직접 조사했다.그런데 정말로 여시은이 꺼놓았던 것이었다.“네가 정말 은서 씨를 해치려는 의도가 없었다면 왜 CCTV를 미리 꺼놓은 거냐?”여재훈은 냉정한 태도로 물었다.여시은은 자신이 고은서의 계략에 걸려든 것을 그제야 깨달았다.고은서는 일부러 도발적인 눈빛으로 여시은을 자극했고 곧바로 테라스로 이끌어냈던 것이다. 모두 여시은한테 엿 먹이려는 행동이었다!여시은은 고은서가 쿠아가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격동적으로 행동해 자신을 밀칠 거라 확신했었다.왜냐하면 고은서는 지난번엔 쿠아를 다치게 한 일로도 크게 충격을 받았었기 때문이다.하지만 이번엔 반전이 생겼다.고은서는 오히려 침착하게 반격했고 지난번 농장에서의 ‘물에 빠진 사건’ 증거까지 들고나왔다.일이 이렇게 커져 버린 이상 여시은은 더 이상 변명할 여지가 없다는 걸 알았다.그녀는 결국 울음을 터뜨리며 여재훈을 향해 소리쳤다.“맞아요! 저 고은서가 너무 꼴 보기 싫었어요! 왜 아빠는 맨날 걔만 칭찬하세요? 이러니깐 제가 질투 나서 그런 거 아니에요? 그냥 고은서한테 꼽 주고 싶었어요!”“어차피 이미 벌어진 일이에요. 전 잘못한 거 없어요! 후회도 안 해요!”“너!”여재훈은 손을 번쩍 들어 여시은의 뺨을 때리려 했지만, 그녀의 눈물범벅이 된 얼굴을 보고는 차마 때릴 수가 없었다.“시은아, 아빠가 평소에 너를 어떻게 가르쳤니? 사람은 자기 양심에 떳떳해야 하고 올곧게 살아야 한다고 했잖아! 근데 너는 어떻게 질투심에 눈이
이미숙은 유튜브 영상을 보고 있었는데, 바로 여시은이 고은서 머리끄덩이를 잡아당겨 연못 가까이로 끌어당기는 장면이 재생되고 있었다.그 영상은 누군가가 휴대전화로 촬영해 올린 것 같았고 화질이 너무 좋은 건 아니지만 전반 상황을 알아보는 데에는 충분했다.영상의 끝에는 고은서와 여시은의 얼굴을 비춘 장면도 담겨 있었다.다소 초라해진 고은서는 곽승재의 부축을 받으며 옆에 서 있었다. 여시은은 얼굴이 벌겋게 달아오르고 눈빛엔 분노와 원망으로 가득했다.그 와중에 영상의 제목이 더욱 눈길을 끌었다.[재벌가 아가씨, 두 얼굴의 진실!]“사모님, 저 여자는 어쩜 저리 독하대요. 이렇게 심하게 괴롭히다니. 누가 폭로해 줘서 다행이지! 이제 세상 사람들 다 그 여자 피해서 다니겠어요!”이미숙은 화가 난 듯 말했다.고은서는 이번 일이 오래 퍼지지는 않을 거라고 생각했다. 여시은 뒤에는 여재훈이 있기 때문이다.하지만 이번 일로 여시은이 보기 좋게 망신을 당했고, 여재훈 역시 자신의 딸이 그렇게 순진하지 않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을 테니, 이번 목적은 어느 정도 달성되었다.고은서는 이미숙의 휴대전화 영상에 대뜸 ‘좋아요'를 눌렀다.한편, 여씨 가문에서.여시은 역시 유튜브 영상을 확인했다. 분노에 찬 그녀는 휴대전화를 바닥에 내던졌다.밖에 서 있는 박미화가 조심스럽게 말을 전했다.“시은 아가씨, 회장님께서 지금 바로 서재로 오시래요. 할 말씀이 있으시답니다.”이번이 박미화가 세 번째로 말을 전하러 온 것이었다.여시은은 곧바로 얼굴에 드리워진 분노와 짜증을 숨기고는 일부러 슬프고 억울한 표정을 지으며 방문을 열었다.박미화는 방안에서 반응이 없자 방문을 열려고 하였다. 때마침 여시은이 문을 열고 나오는 것을 보고 급히 손을 거두며 사과했다.여시은은 박미화의 손을 움켜쥐었다. 조금 전에 분노로 인해 물어뜯은 날카로운 손톱이 그녀의 살을 깊이 파고들었다. 그리고는 여시은은 울먹이는 말투로 물었다.“미화 언니, 아빠가 나한테 화 많이 나신 거야? 나 어떻게 해야
얼마 지나지 않아 운전기사가 차를 라이트문 아파트 앞에 세웠다.고은서와 곽승재는 위층으로 올라갔다. 고은서는 샤워하기 위해 자신의 방으로 직행했고 곽승재는 거실에 남았다.샤워를 마치고 나온 고은서는 의외의 광경을 목격했다. 곽승재가 거실 소파에 앉아 있었고 테이블 위에는 김이 모락모락 나는 차 한 잔이 놓여 있었다.“왜 또 왔어? 할 말 있어?”고은서가 물었다.곽승재는 태연하게 대답했다.“논의할 게 있어서. 그전에 이 콜라 생강차부터 마셔. 아주머니께서 특별히 준비하신 거야.”“사모님, 콜라 생강차는 감기 예방에도 효과적이거든요. 어서 드세요!”이미숙이 차를 가져오며 말했다.고은서는 감기에 걸릴까 봐 걱정하고 있던 참이었다. 그녀는 잔을 들어 올리더니 이상한 듯 물었다.“아줌마, 제가 방금 들어온 걸 보지도 못하셨을 텐데 어떻게 제가 감기 걸릴 줄 아시고 미리 차를 준비하셨어요?”이미숙의 눈가에는 잠시 당황한 기색이 스쳤다.곽승재가 자연스럽게 말을 이었다.“내가 알려줬어. 일단 마셔.”고은서는 고개를 숙여 생강차를 내려다 볼뿐 이미숙의 표정 변화를 주의 깊게 보지 못했다.물론 곽승재의 눈에 비친 기대감도 보지 못했다.생강차의 냄새를 맡아보니 생강 향이 꽤 진했다.고은서는 생강차를 조심스럽게 한 모금 마셨다. 콜라의 단맛과 생강의 톡 쏘는 맛이 어우러져 생각보다 맛이 나쁘지 않았다.“맛이 어때요?”이미숙이 물었다.“좋네요. 그런데 오늘은 생강을 좀 많이 넣으신 것 같네요. 예전에 만드신 것보다 더 매운데요.”이미숙은 잠시 망설이다가 급히 대답했다.“생강 양을 조절하지 못했네요. 주의할게요.”고은서는 더는 따지지 않고 다시 마시려던 참이었는데 곽승재가 말을 건넸다.“맛이 별로면 안 마셔도 돼.”고은서는 그를 흘겨보았다.“누가 맛없다고 했어? 아줌마가 정성스럽게 준비해주신 건데 끝까지 마셔야지.”“사모님, 도련님과 얘기 나누세요. 저는 할 일이 남아서 먼저 가보겠습니다.”이미숙은 두 사람의 언쟁을 피하려는 듯 급히 자
고은서는 고개를 끄덕이며 곽승재에게 사실대로 털어놓았다. 그녀는 친구에게 부탁해 적절한 시기에 감시 카메라를 끊어놓도록 준비해두었다.하지만 여시은이 먼저 참지 못하고 로비의 카메라를 꺼버린 것이다.고은서가 감히 감시 카메라의 확인을 제안한 데는 이유가 있었다. 그녀는 자신만의 준비를 했을 뿐만 아니라 여시은 역시 감시 카메라를 조작할 것이라는 점까지 예측했다.“만약 여시은이 참고 끝까지 널 찾지 않았다면 어떻게 할 작정이었어?”곽승재가 물었다.고은서는 피식 웃으며 대답했다.“개업식이 끝난 후 대형 스크린에 공개할 계획이었어.”곽승재가 눈썹을 추켜세웠다.“네가 앞서 백스테이지 주위를 둘러본 것도 동영상을 공개할 준비를 했던 거야?”고은서는 고개를 끄덕였다.“여시은이 일부러 나를 물에 빠뜨리고 향수로 나를 함정에 빠뜨렸을 뿐만 아니라 쿠아까지 학대했어. 내가 당연히 가만히 있을 수 없지! 그리고 시은이가 인내심을 가졌다고 해도 난 개업식이 끝날 때까지 기다렸을 거야. 하지만 결과적으로 그러지 못했지. 시은이는 결국 참지 못하고 테라스에서 쿠아의 죽음을 언급하며 나를 자극했고 다시 같은 수법을 쓸 참이었던 거지. 나는 그저 시은이가 파려던 함정을 그대로 돌려준 것뿐이야.”곽승재는 고은서가 준비를 해왔을 거라 예상했지만 이런 고육지계를 공개적인 자리에서 펼칠 줄은 몰랐다.게다가 그녀의 연기는 너무나도 실감 났다.고은서가 바닥에 넘어져 흐트러진 모습을 보는 순간 곽승재는 정말로 여시은의 소행일 것으로 생각할 정도였다.고은서는 곽승재의 생각을 읽었는지 피식 웃으며 입을 열었다.“가여운 척 한 거 아니야. 백유미와 여시은이라는 고수들 덕분에 나도 한 수 배웠을 뿐이지.”백유미의 과거 행동을 떠올린 곽승재는 가슴을 죄는 듯한 자책감이 밀려왔다.곽승재는 진지하게 사과했다.“은서야, 미안해.”무심코 흘린 말에 곽승재가 사과하는 모습을 본 고은서는 잠시 당황했다.“사과할 필요는 없어. 당신도 백유미 씨에게 속았을 뿐이잖아. 어쨌든 ‘목숨의 은인'
“시은아!”영상 속 장면에 충격을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여재훈은 걱정된 목소리로 딸을 불렀다. 그리고 뒤이어 멀리 있는 부하들에게 명령했다.“어서 따라가서 시은이를 보호해! 무슨 일이라도 생기게 해서는 안 돼!”부하들이 여시은의 뒤를 쫓아 나간 뒤 여재훈은 스크린을 힐끗 바라보더니 진지한 표정으로 고은서에게 사과했다.“제가 딸을 제대로 가르치지 못했습니다. 이 일은 제가 시은에게 직접 확인한 뒤 여은서 씨께 해명해 드리겠습니다.”고은서는 목적을 달성했으니 더는 그곳에 머물 생각이 없었다. 그녀는 옷을 갈아입어야 한다는 이유로 자리를 떠나려 했다.“여 대표님, 제가 은서 씨를 모셔다드리겠습니다.”곽승재가 말했다.송민준 역시 함께 가겠다고 전했다.여재훈은 당연히 거절하지 않았다. 개업식에서 이런 소동을 일으킨 이상 누구라도 축하할 마음이 없을 터였다.고은서 일행이 떠나자 여재훈은 참석자들에게 직접 사과하며 홍보팀에 현장 수습을 지시했다.호텔 앞 광장에서 곽승재와 송민준의 운전기사들이 각각 차를 대기시켜 놓고 기다리고 있었다.송민준은 고은서를 배웅하려는 태도를 보였으나 곽승재가 고은서를 부축하면서 예의를 갖추어 말했다.“번거로울 텐데 제가 은서 씨를 모시고 가겠습니다.”송민준은 자기가 고은서의 파트너로 왔기 때문에 그녀를 집까지 모셔다드리는 것이 당연하다고 설득했다.곽승재는 송민준의 이런 친근한 태도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는 억지로 고은서를 안아 들어 자신의 차에 태우고 싶었지만 고은서가 화를 낼 것을 잘 알고 있었다.그는 입을 오므리다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선택권을 고은서에게 넘겼다.고은서는 당연히 송민준과 함께 갈 생각이 없었다.“오빠, 오늘은 고마웠어. 오늘 승재 오빠의 차를 타고 갈게. 어차피 길도 같으니까. 내일 다시 연락할게.”고은서의 반응에 송민준은 고개를 끄덕이는 수밖에 없었다.“알겠어. 집에 도착하면 연락해.”곽승재는 고은서를 차에 태운 뒤 트렁크에서 깨끗한 외투를 꺼냈다.차 안에 앉자 곽승재는 고은서의 어깨
여시은은 고은서의 말에 더욱 어리둥절해졌다.‘갑자기 왜 또 농장 일을 다시 꺼내는 거지?’여시은은 속으로 불길한 예감이 들기 시작했다. 그녀는 생각할수록 점점 더 억울하고 분했다.“은서야, 왜 나를 이렇게 모함하는 거야? 내가 언제 너를 물에 빠뜨렸다고 그래? 네가 나를 밀었잖아! 내가 우리 아빠를 생각해서 참고 넘어갔는데 이제 와서 또 나에게 뒤집어씌우다니!”여시은은 여재훈을 바라보며 눈시울을 붉혔다.“아빠, 저는 항상 사람을 보는 안목이 없는 것 같아요... 은서가 이런 사람일 줄은 정말 몰랐어요... 너무 속상해요...”여시은의 슬프고 안쓰러운 모습에 여재훈은 점차 진지해졌고 고은서를 보며 물었다.“고은서 씨, 시은이가 은서 씨를 물에 빠뜨렸다는 증거라도 있어요?”“물론 있죠.”고은서는 이미 곽승재의 부축을 받아 일어난 상태였다. 그녀는 휴대폰을 꺼내 송민준이 보낸 영상을 찾았다.현장에 있던 사람들 모두 다가가지는 않았지만 적당한 거리를 유지하며 상황을 지켜보고 있었다. 그러다가 고은서가 진짜 증거를 가지고 있다는 소식을 듣더니 그들의 호기심을 더욱 자극했다.이때 곽승재가 제안했다.“여 대표님, 모두가 보는 앞에서 영상을 공개하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모두가 직접 보면 진실이 명백해질 테니 나중에 왜곡되는 일도 없을 겁니다. 어떻게 생각하세요?”여시은은 고은서가 미리 준비한 듯한 태도를 보이자 불안감이 더욱 커졌다.고은서가 이렇게 계획적으로 행동할 수 있었던 것은 어쩌면 증거를 손에 넣었을지도 모른다.여시은이 고은서를 과소평가했던 것이다.여시은은 붉어진 눈으로 소리쳤다.“도대체 무슨 짓을 하려는 거에요! 이미 개업식 시간이 다 됐는데 계속 이러쿵저러쿵하며 일을 벌이다니! 고의로 우리 개업식을 방해하는 거 아니에요?”“아빠, 오늘 이분들은 분명히 좋은 의도로 온 게 아닌 것 같아요. 그냥 쫓아내는 게 낫겠어요!”“여시은 씨, 말씀이 참 지나치군요. 우리는 단지 진실을 알고 싶을 뿐입니다.”송민준이 여재훈보다 먼저 입을 열
구경하는 사람들도 송민준을 쳐다보았다. 그들은 도대체 왜 그의 여자 파트너가 곽승재의 품에 안겨 있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송민준은 사람들의 의문스러운 시선을 받고 있었지만 태연하게 입을 열었다.“여시은 씨, 저는 단지 사실을 말했을 뿐입니다. 은서와 여시은 씨의 사이에 아무런 원한도 없는데 은서가 왜 그런 행동을 하겠습니까?”“아빠, 정말 제가 한 게 아니에요! 저 사람들은 같은 편이라서 일부러 저를 괴롭히려는 거예요!”여시은은 억울함을 참지 못하고 그녀의 아버지에게 도움을 청했다.여재훈은 눈물 글썽이는 딸을 바라보더니 온몸이 흐트러진 고은서를 향해 물었다.“고은서 씨, 사실대로 말해보세요. 방금 무슨 일이 있었는지.”고은서는 감정을 어느 정도 추스렸지만 이런 일을 당하면 당연히 난처할 수밖에 없었다. 그녀는 최대한 평온한 어조로 대답했다.“여 대표님, 제가 뭘 말해도 소용없을 겁니다. 시은이와 저는 각자 주장이 다르기 때문에 누구도 판단하기 어려울 겁니다.”고은서는 로비 주위를 둘러보며 말을 이었다.“여기 곳곳에 감시 카메라가 설치되어 있어요. 직원들을 시켜 감시 카메라를 확인해보시는 게 좋을 것 같아요. 그러면 진실도 드러나겠죠.”이 말을 듣자 여시은의 얼굴색이 확 변했다.고은서가 여시은보다 먼저 바닥에 넘어졌는데 감시 카메라의 확인까지 제안하다니!‘설마 은서가 이 시간대에 감시 카메라를 꺼뒀다는 걸 알고 있는 건 아니겠지?’“시은아, 너의 생각은 어때?”고은서는 고개를 들어 여시은에게 물었다.여시은은 분노를 꾹 참고는 여전히 억울하고 순진한 표정으로 대답했다.“좋아! 하지만 개업식 시간이 다가오고 있는데 감시 카메라는 확인하는 동안 내가 먼저 개업식을 진행하고 나중에 이 문제를 논의하는 게 어때?”“안 돼.”고은서의 작은 얼굴에는 단호한 표정이 담겨있었다.“이 사건은 반드시 바로 조사되어야 한다고 봐.”고은서는 다시 여재훈을 바라보며 말했다.“여 대표님, 폐를 끼쳐 죄송합니다. 제가 시은이 만큼 귀하지는 않지만 이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