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자는 의식 시작을 알렸고 밴드는 음악을 연주하며 현장에서 불꽃놀이와 예포를 발사했다.관중들은 힘찬 박수를 보냈다.그 후 사회자는 중요한 손님들을 소개한 후 다음 절차로 넘어갔다.고은서는 주최자이자 창립자로서 당당하게 무대에 올라 모든 손님에게 감사의 인사를 전했다.리본 커팅식에서는 미리 정해진 사람들 외에도 현장의 한 지도자가 여재훈을 무대 초대하며 센터로 안내했다.고은서는 여재훈 옆에 배치되었고 빨간색의 실크 리본을 자르자 현장에서는 더욱 힘찬 박수가 이어졌다.고은서의 착각일지도 모르지만 리본을 자른 후 여재훈과 악수하던 중 여시은의 미소가 어딘지 모르게 차가운 듯한 느낌을 받았다.고은서가 고개를 돌려 자세히 보자 여시은은 여전히 전처럼 달콤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리본 커팅이 끝난 후 고은서와 도아름은 손님들에게 사무실을 안내해 주었다.식사와 선물 증정 등 모든 절차가 끝나자 이미 오후가 되어있었다.손님들을 배웅한 후 고은서는 송민아 사무실에 남아있는 송민준에게 향했다.송민준은 예비 정장을 갈아입었는데 이전의 어두운 회색 대신 검은색 정장을 입은 그는 더 우아하고 차분해 보였다.“민준 씨, 오늘 도와주셔서 감사합니다. 이런 일에 휘말리게 해서 죄송하고요.”송민준은 옅은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저었다.“아닙니다. 도울 수 있어서 도왔을 뿐입니다. 너무 예의 차리지 않으셔도 됩니다.”비록 도울 수 있어서 도왔다고는 하지만 고은서가 페인트를 정통으로 맞았다면 그녀는 개업식에 맞춰 발언하지 못했거나 의식이 연기되었을 수도 있었다.어떤 결과가 되었든 이번 개업식에 영향을 미쳤을 것이다.“어쨌든 민준 씨 덕분에 일이 쉽게 풀렸어요.”고은서가 다시 진지한 모습으로 인사를 전했다.송민준이 웃으며 답했다.“너무 그러지 않으셔도 돼요. 은서 씨가 우리 민아 많이 도와주고 계시는데 이 정도는 아무것도 아니죠. 누가 은서 씨를 겨냥했는지 경찰 쪽에서 소식이 있었나요?”송민준이 화제를 바꾸자 고은서도 솔직히 답했다.“방금 민시후에게서 연락이
민시후는 송민준을 신경 쓰지 않았지만 고은서는 마음이 불편해서 뒤돌아보며 송민준에게 말했다. “민준 씨, 같이 가시겠어요?”송민준은 아무렇지 않게 고개를 끄덕이며 답했다.“좋아요.”경찰서로 들어가는 길에 고은서는 민시후에게 오늘 자신에게 페인트를 뿌린 사람의 배후가 성아연의 아버지라는 사실을 들었다.성동욱은 성아연이 구속되고 곽승재의 기분을 상하게 하여 안 그래도 크지 않던 사업마저 망하게 되고 빚까지 지고 세무서 등에서 조사까지 받았는데 고은서는 새로운 회사를 개업한다는 소식에 분노하여 개업식을 망치려고 사람을 보냈다고 했다.범인은 돈을 받고 일을 행한 사람으로 경찰서에 오자마자 심문을 받고 범행을 자백했다.성동욱도 경찰서에 끌려와 사실을 시인했다.이내 고은서는 성아연의 아버지를 마주했다.예전과 달리 성동욱은 기세가 꺾여 훨씬 초라하고 풀이 죽은 모습이었다.하지만 고은서를 마주한 그는 전혀 반성하는 기색 없이 말했다.“난 그저 사람을 시켜 페인트를 뿌리라고 했을 뿐이야. 류산도 아니고 너한테 직접적인 피해를 준 것도 아닌데 아연이한테 한 것처럼 그렇게 해야겠니?”성동욱의 말에 고은서는 참을 수 없는 분노를 느꼈다.“성아연은 자기가 잘못해서 고소당하고 판결을 받은 거예요. 제가 그렇게 손쉽게 세상을 움직일 수 있을 리 없잖아요.”고은서가 싸늘한 말투로 말을 이었다.“회사가 조사받고 문을 닫게 된 것도 다 본인이 자초한 결과인데 저랑 무슨 상관이죠? 왜 사람을 보내 저를 귀찮게 하냐고요!”성동욱이 크게 외쳤다.“왜 너랑 상관이 없어! 너랑 아연이 옛날에 그렇게 친했잖아. 아연이가 조금 실수했다고 해서 너희 집안이 어떻게 완전히 등을 돌릴 수 있어? 네 외숙모는 우리 집에 와서 행패를 부릴 뿐만 아니라 아연이한테 직접 찾아가서 행패를 부리기까지 했어! 아연이는 화가 나서 너한테 겁을 주려고 했을 뿐 정말 납치한 것도 아니잖아! 너는 아무 부상도 입지 않았는데 왜 그런 이유로 아연이가 그렇게 오랫동안 감옥에 있어야 해?”성동욱의 이기
“이전에 집안끼리 사이가 좋았던 걸 봐서라도 이 삼촌을 한 번만 용서해 줄 수 없을까? 삼촌이 잠시 정신이 나갔던 거야. 다시는 이런 짓 하지 않을게...”성동욱의 머리에는 이미 흰머리가 꽤 섞여 있었고 그의 목소리는 한없이 비굴하고 애처로웠다.아무리 가여워 보이는 사람이라도 미워할 구석은 있기 마련이었다.고은서는 성동욱이 진심으로 자신의 잘못을 깨우치고 있다고 생각하지 않았다.그는 단지 결과가 이렇게 심각할 줄 예상치 못했을 뿐이었다.만약 단순한 경범죄 처벌 정도에서 끝났다면 아마 그는 여전히 기세등등했을 것이다.한 번 용서해 주면 다음번에는 더 악랄한 짓을 저지를 게 뻔했다.그래서 고은서는 흔들리지 않았다. 그는 마땅한 벌을 받아야 했다.그 후 고은서와 송민준은 경찰서에서 간단한 진술을 마쳤다.회사에 돌아가 다른 일을 처리하려고 하는데 마침 박지연에게서 연락이 와 그녀를 데리러 오겠다 했다.하여 고은서는 민시후의 제안을 거절했다.민시후도 굳이 고집부리지 않고 송민준을 바라보며 말했다.“송 가주, 오늘 은서 도와줘서 고마워. 차 한잔 살게.”송민준이 옅게 웃으며 말했다.“신경 쓰지 마. 별로 한 것도 없는데 뭐.”“그래도 한잔하자. 마침 할 얘기도 있어.”민시후가 말하자 송민준은 한 번 웃더니 고개를 끄덕였다.“그렇다면 사양하지 않고 받아들이지.”고은서는 민시후가 송민준과 무슨 이야기를 하려는지 몰랐지만 적어도 그가 분별력 있는 사람이라는 것은 믿었다.그때 박지연이 도착했다는 메시지를 보냈고 고은서는 두 사람에게 인사를 건넨 뒤 밖으로 향했다....조용한 찻집.송민준은 직접 정성스레 차를 우리고 있었다.그는 평소에도 차 마시는 것을 즐겼기에 차를 우리는 그의 모습에서 여유로운 분위기가 흘러나왔다.“시후야, 무슨 얘기 하려고?”송민준이 여유롭게 물었다.민시후는 겉으로는 평온해 보이는 송민준을 바라보며 싸늘한 기색을 띠었다.“오늘 은서한테 페인트를 부린 일, 네가 사주한 거지?”송민준은 그 말을 듣고는 마치 우스
민시후가 송민준을 바라보며 말했다.“송 가주. 네 말은 이제 내게 신뢰를 잃었어. 내가 아는 너라면 평소에 절대 먼저 나서서 관계를 맺으려 하지 않아. 그런데 왜 굳이 그 사람들이랑 함께 여재훈 씨를 만나러 갔고 왜 은서랑 그렇게 가까운 곳에 서 있었던 거야?”민시후의 질문에 송민준은 찻잔을 들어 한 모금 가볍게 마셨다.“시후야, 넌 날 너무 과대평가하네. 나는 어디까지나 해성에서 겨우 자리 잡은 사업가일 뿐이야. 여재훈 씨처럼 배경이 탄탄한 사람과 인맥을 쌓고 싶은 건 누구나 마찬가지 아닌가? 나도 예외는 아니야. 그리고 은서 씨랑 얼마나 가까운 위치에 서 있었는지는 전혀 신경 쓰지 않았어.”송민준은 여전히 여유로운 태도를 유지하며 말을 이었다.“은서 씨가 위협받는 걸 본 순간 다른 생각할 겨를 없이 본능적으로 도왔을 뿐이야.”“우리 송 가주가 언제부터 그렇게 다정한 사람이었지?”민시후는 비웃듯이 말했다.“내가 기억하기로는 예전에 한 여자가 네 앞에서 기절했을 때도 손 하나 까딱하지 않았잖아.”송민준은 북성에서 손에 꼽히는 일등 신랑감으로 외출할 때마다 여자들의 접근을 피할 수 없었다.그날도 순진하면서도 요염한 분위기를 풍기는 한 여자가 엘리베이터에 올랐다.그러다 갑자기 저혈당이 온 건지 아니면 일부러 그랬는지 모를 일이지만 곧장 송민준을 향해 쓰러졌다.그러나 송민준은 조금의 연민도 보이지 않고 오히려 무심하게 한 발짝 물러났다.같은 엘리베이터에 있던 누군가가 도와주지 않았다면 그녀는 얼굴은 땅에 처박혔을지도 몰랐다.이 장면을 직접 목격한 민시후는 그때부터 송민준은 여자에게 전혀 관심이 없는 인간이라는 결론을 내렸다.또한 그에겐 평범한 감정조차 없다고 생각했다.민시후의 비꼬는 말에도 송민준은 신경 쓰지 않고 미소를 지었다.“그 여자들이랑 은서 씨는 다르지.”그 말을 들은 민시후의 눈빛이 한층 차가워졌다.“너 정말 은서한테 다른 마음을 품은 거야?”“시후야, 오해야.”송민준은 온화하고 담담하게 말했다.“내 말은 은서 씨랑
송민준은 담담하게 민시후를 몇 초간 바라보더니 손에 들고 있던 찻잔을 내려놓았다.“시후야, 너는 너무 예민하게 반응하고 있어. 내가 말했잖아. 은서 씨가 훌륭한 사람인 건 맞지만 다른 감정을 품지는 않았어. 할 말은 다 했고 차도 마셨으니 난 이만 가볼게.”그렇게 말하며 송민준은 자리에서 일어섰다.“송 가주. 앞으로 은서에게서 멀리 떨어져. 그리고 송민아를 빌미로 은서에게 다가가지도 마.”민시후가 다시 한번 경고했다.송민준의 입가에는 미소가 걸려있었지만 눈가는 싸늘하기 그지없었다.“시후야, 아저씨랑 형을 봐서라도 네 태도는 문제 삼지 않겠지만 앞으로는 근거 없이 나한테 죄를 뒤집어씌우지 마.”송민준은 흔들림 없는 목소리로 말을 마치고 찻집을 떠났다....고은서는 박지연과 함께 차를 타고 유일 투자은행으로 돌아가고 있었다.운전은 육현석이 맡았다.차 안에서 고은서는 성동욱이 페인트를 뿌린 사건에 관해 이야기했다.박지연이 놀라며 말했다.“성동욱 짓이었어? 나는 백승엽이 시킨 줄 알았지!”육현석이 얼른 말했다.“승재 형이 있는 이상 백승엽이 함부로 나서지는 못하지. 전에 T 국에서도 승재 형이 경고했고 게다가 백유미 일까지 터졌으니 백승엽도 정신없을걸?”박지연이 콧방귀를 뀌었다.“백승엽의 뒤에 곽승재 아버지가 있으니 곽승재의 경고는 무시하지 않겠어?”육현석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맞아. 백승엽은 결국 외부인에 불과하지. 아버님이 아무리 그래도 백승엽을 위해서 승재 형이랑 계속 대립하지는 않을 거야.”“정말?”박지연이 여전히 불신의 눈초리를 비췄다.“전에 T 국에서도 백유미를 위해서 급히 갔잖아. 지금은 그룹에서 곽승재에게 압력을 넣고 있고. 그렇게 보면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가 그렇게 좋은 것 같지 않은데?”박지연의 말에 육현석이 헛기침했다.“아버님 성격이 좀 세시긴 하지만 이번에 승재 형에게 압박을 가한 건 백씨 가문 때문이 아니야.”박지연은 육현석의 말을 바로 이해했다.“그렇다고 해도 곽승재 아버지도 참 웃기네. 백
육현석이 곽승재와 백유미의 관계를 해명하자 박지연은 그의 의도를 금세 파악했다.“곽승재가 백유미를 그렇게 챙기는 게 그냥 감정적으로 고마워서 그런 거라고?”박지연은 육현석의 설명을 믿지 않는 듯 바로 반박했다.“곽승재는 백유미를 판주 투자은행의 이사로 임명하고 백씨 가문 산업도 많이 도왔어. 그것만으로도 보답이라고 할 수 있지. 하지만 곽승재는 백유미에게 무슨 일이 생길 때마다 민감하게 반응하고 백유미가 다치면 병원에 데려가고 또 백유미 때문에 은서를 의심했어. 이건 감사한 마음을 넘어선 거잖아.”육현석도 박지연의 말을 듣고 좋지 않은 느낌이 들었다.그는 고은서 앞에서 곽승재를 좋게 말하려던 의도였으나 오히려 상황이 잘못된 방향으로 흐르는 것 같았다.박지연이 말한 부분들이 고은서가 계속 마음속으로 신경 쓰고 있었던 문제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제일 큰 문제는 곽승재의 행동에 확실히 문제가 있었다는 점이었다.이렇게까지 말이 나온 이상 더 큰 오해를 방지하기 위해 육현석은 끝까지 대화를 나눠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결국 육현석은 차를 도로 옆에 세우고 진지한 얼굴로 말했다.“지연아, 은서야. 나는 형을 변호하려는 게 아니야. 하지만 형에게 백유미는 단지 형을 도와준 사람일 뿐이었어. 형은 처음부터 백유미의 의도를 의심한 적이 없었지. 그리고 억지로 한 결혼 때문에 은서 네 마음을 부정하고 너를 밀어냈던 거야. 게다가 백유미가 일부러 너에게 불리한 상황을 만들었기에 여러 상황이 맞물려서 그렇게 반응한 것뿐이야.”육현석이 말을 이었다.“형도 너 때문에 속상해하며 나에게 몇 번이나 찾아왔어. 형은 단지 일을 처리하려 했을 뿐인데 너는 왜 계속 형에게 거리를 두는지 이해할 수 없어서 괴로워했지. 은서야, 형이 적절한 대처를 못 한 건 맞지만 백유미에게는 이성적인 감정이 전혀 없었어. 형이 좋아한 사람은 너뿐이야. 전에는 자존심 때문에 그걸 부인했지만 천천히 마음을 인정했지. 하지만 그때 네가 마음을 접었어.”육현석이 고은서를 바라보며 말했다.
고은서가 회의실에 도착했을 때 곽승재는 여전히 소파에 앉아 있었다.그러나 그는 소파 등받이에 기대어 잠들어 있었고 손에는 처리하지 못한 메시지가 담긴 스마트폰을 쥐고 있었다.그의 얼굴은 고된 일정을 나타내듯 미간은 찌푸려지고 얼굴에는 짙은 피로감이 묻어 있었다.고은서는 육현석에게서 곽승재가 제인 제약 프로젝트로 인해 주주들의 압박을 받고 있으며 이를 보완하기 위해 GS 그룹 다음 분기 실적의 상승을 약속했다고 들었다.그로 인해 최근 거의 매일 같이 야근하고 있다고 했다.“은서야, 볼일은 다 끝났어?”고은서가 잠시 생각에 잠겨 있던 중 곽승재가 눈을 떴다.시선이 마주치자 곽승재의 검은 눈동자에 또렷한 눈이 반짝였고 목소리에는 낮고 유혹적인 톤이 섞여 있었다.고은서가 시선을 피하며 말했다.“왜 아직 안 갔어? 할 말이라도 있어?”“저녁 안 먹었지? 옆에 가서 뭐라도 좀 먹을래?”곽승재가 소파에서 일어나며 제안했다.고은서도 저녁을 먹지 않았지만 처리해야 할 일이 남아 있어 밖에 나갈 시간이 없었다.“괜찮아. 배 안 고파.”하지만 곽승재는 굽히지 않았다.“그럼 음식 좀 배달시킬게.”곽승재는 다른 사람에게 전화를 걸어 음식을 많이 보내라고 지시했다.“직원들도 아직 저녁 못 먹었을 거 아니야. 다 같이 먹자.”곽승재가 말을 덧붙였다.고은서는 이미 주문된 음식이었으므로 더 이상 거절하지 않았다.“얼마야? 송금해 줄게.”곽승재가 깊은 눈동자로 고은서를 바라보며 말했다.“은서야, 나랑 그렇게 내외하지 않아도 돼.”“나눌 건 나눠야지. 우리가 무슨 가까운 사이도 아닌데 네게 빚질 수는 없잖아.”곽승재는 고은서의 목소리에서 불쾌함과 짜증을 느꼈다.하지만 곽승재는 화내지 않고 오히려 그게 좋은 신호라 생각했다.그는 고은서가 그에게 무관심하고 냉정하게 반응하는 것보다 차라리 이 정도 불만을 가지는 것이 더 나았다고 느꼈다.하여 곽승재는 진지하게 말했다.“그럼 현금으로 줘. 지난번에 준 치료비랑 합쳐서 적금하면 되겠다.”고은서는 잠시
곽승재는 고은서를 바라보며 속에 있는 실망감을 감추며 차분하게 말했다.“은서야, 널 돕는 건 시간 낭비가 아니야.”고은서는 갑자기 짜증 내며 답했다.“곽승재, 정말 이럴 필요 없어. 난 당신한테 감정이 식었어.”곽승재는 잠시 침묵한 후 단호하게 말했다“알아. 네 선택을 존중할 거라고 말했잖아. 네 결정에도 간섭하지 않을 거야. 하지만 너를 좋아하고 널 위해 움직이는 건 내 선택이고 내 권리야. 그걸 네가 막을 수는 없어.”고은서는 말로 다 하지 못할 느낌을 받았다.복잡한 감정이 밀려왔다.곽승재는 근처 미슐랭 레스토랑에서 음식을 주문했는데 직원들은 음식을 보고 고은서에 대한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대표님 정말 통이 크시네.”직원들은 모두 큰 책상에 둘러 앉아 함께 음식을 먹기 시작했고 곽승재도 자연스럽게 그들 사이에 앉았다. 자리에 있는 사람들은 모두 곽승재를 알고 있었고 고은서와의 관계에 대해서도 어느 정도 알고 있었기에 자연스럽게 고은서 옆자리를 그에게 양보했다.곽승재는 고은서가 좋아하는 음식을 집어주며 말했다.“많이 먹어. 요즘 살이 많이 빠졌더라.”고은서가 그를 경고하듯이 바라보자 곽승재는 더 이상 음식을 집지 않고 대신 고은서에게 물과 휴지를 건넸다.“대표님, 곽 대표님 정말 다정하시네요.”한 직원이 부러움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두 분 정말 너무 보기 좋으세요. 저도 모르게 응원하게 되네요.”곽승재의 외모도 자신감 있는 분위기는 다른 사람들이 다가가기 어렵게 했다.하지만 그런 사람이 고은서에게 다정한 모습을 보이자 사람들은 부러움을 감추지 못했다.고은서가 말한 여직원을 바라보며 말했다.“보는 사람마다 응원하다가는 큰코다칠 거예요.”“몰라요. 너무 보기 좋은 걸 어떡해요! 곽 대표님, 힘내세요! 저희가 열심히 응원해 드릴게요.”곽승재는 고은서를 향해 말했다.“노력할게요.”“와!”곽승재의 대답에 사람들은 환호성을 질렀고 고은서의 반응을 기대했다.“다들 그만 떠들고 밥이나 먹어요.”고은서는 직원들의 호들갑을
고은서가 누가 사주했는지 밝히면 책임을 추궁하지 않겠다고 약속했지만, 마재경은 아직 경찰서를 떠날 수 없었다.경찰 조사에 협조해야 했고, 명확한 결론이 나온 후에야 책임 감경 가능성을 논의할 수 있기 때문이다.곽승재는 변호사를 불러 진전 상황을 체크하도록 했다. 나머지 일은 경찰에 맡기고 그들은 결과만 기다리면 된다.한바탕 분주히 보낸 후, 곽승재가 변호사와 얘기를 나누는 사이에 고은서가 먼저 밖으로 나왔다.정문에 도착한 고은서는 마침 경찰서에 온 여시은과 마주쳤다.그녀는 이전과 같은 실내복 차림에 창백한 얼굴로, 집사처럼 보이는 중년 남성과 함께 걸어오고 있었다.그녀는 고은서를 발견한 순간 분노를 쏟아냈다.“고은서, 아빠를 다치게 한 것도 책임을 묻지 않았는데, 오히려 나를 모함해?”“허튼소리로 아빠를 현혹시켜 결국 여기까지 오게 만들다니!”고은서는 살짝 놀랐다. 물론 여시은의 발악이 아니라 여재훈의 처사 때문이었다.그녀가 마재경의 말을 녹음해 여재훈에게 보내긴 했지만, 여재훈이 직접 여시은을 경찰서에 보낼 만큼 정의로운 선택을 할 줄은 생각지 못했다.고은서는 여재훈에게 약간의 존경심이 생겼다.외할아버지라면 이런 결단을 내리지 못했을 거라 생각했다.“고은서, 이번 이간질은 너무 지나쳤어.”여시은이 억울하다는 듯 울분을 토했다.“지난번 리셉션에서도 일부러 나를 모함하고. 대체 무슨 심보야?”이 순간까지도 억울한 척하는 여시은, 그녀를 바라보던 고은서는 쓴웃음을 지으며 말없이 주차장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잠깐만.”여시은은 곁에 있던 중년 남자에게 뭐라고 말한 뒤, 헐떡이며 고은서를 쫓아왔다.“똑바로 말해봐. 나한테 왜 이러는지?”여시은은 병이 완전히 낫지 않은 상태라 가슴을 움켜잡고 있는 모습이 더 연약하고 무력해 보였다.고은서는 역겨운 표정을 지으며 미간을 찌푸렸다.“매일 이러면 지치지도 않아? 머리에 문제가 있으면 정신과에 가서 제대로 치료를 받아. 여기서 미친 사람처럼 사실을 왜곡하지 말고.”여시은은 여전히 가슴을
이전에는 여시은이 이렇게 억울해하고 화를 내면 쫓아가서 좋은 말로 달랬다. 하지만 이번에는 마치 온몸의 기운이 빠진 듯 소파에 지친 몸을 던졌다.팔뚝의 상처가 욱신거렸지만 그는 꼼짝도 하지 않고 앉아 있었다.말을 잘 듣고 사랑스럽던 딸의 모습이 계속 눈앞에 아른거렸다. 그렇게 순진하고 세상 물정을 모르던 아이가, 먹고 노는 것이 가장 큰 취미였던 아이가 어쩌다 이렇게 잔인한 일을 벌였을까?잠시 후, 여시은이 캐리어를 들고 계단을 내려왔다.“어디 가려고?”여재훈이 미간을 찌푸리며 물었다.여시은은 서운하고 답답하고 슬픈 표정이었다.“남의 말 한두 마디로 저에게 사형 선고를 내렸는데, 더 이상 여기에 머물러 있을 의미가 없잖아요. 전혜라 아줌마를 찾아갈 거예요.”여재훈은 여전히 실망 가득한 표정을 지으며 지친 목소리로 말했다.“어디도 갈 수 없어. 내가 널 경찰서로 보낼 거니까.”“아빠, 그게...”여시은은 또 한 번 놀라며 눈을 동그랗게 떴고 심지어 몸도 휘청였다.“남의 이간질에 넘어가 저를 의심하는 것도 모자라 직접 경찰서로 보내시겠다고요?”갈라진 목소리, 붉어진 눈시울, 떨리는 입술, 누가 봐도 연약하고 불쌍해 보이는 모습이었다.여재훈은 마음이 약해질까 봐 눈을 감았다.“시은아, 잘못을 저질렀으면 벌을 받는 게 마땅해.”여시은은 캐리어 손잡이를 꽉 잡고 서 있었다. 마치 그렇게 하지 않으면 쓰러지기라도 할 것처럼.“아빠, 저는 고은서를 습격하라고 사주한 적 없어요. 정말 제가 한 일이 아니라고요. 제발 믿어주시면 안 돼요?”여재훈은 떨리는 목소리로 묻는 여시은을 외면했다.“나는 증거를 믿어. 네가 아니라면 경찰은 죄 없는 사람을 잡아두지 않을 거야.”“그냥 저를 겁주는 거죠? 사실은 저를 믿는 거 맞죠?”여시은은 그 자리에 선 채 소파에 앉아 있는 여재훈을 바라보며 말했다.“정말 아니에요. 요 며칠 집에만 있었고 어디도 가지 않았어요. 집에 있는 모든 사람이 증인이 될 수 있어요...”여재훈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집
음성 파일을 여니 울먹이는 여자 목소리가 흘러나왔다.[말할게. 다 말할게... 여시은 측 사람들이 너를 습격하라고 시켰어... 그쪽에서 연락이 와서 큰돈을 주겠다며 너를 따끔하게 혼내주라고 했어. 피를 보면 더 높은 보수를 주겠다고...][최고의 변호사를 선임해주겠다고도 했어... 그들은 내게 ‘이미 인플루언서로는 살 수 없으니 이 돈을 받고 새로운 삶을 살라’고 설득햇어...][내가 돈에 눈이 멀어서 그만... 평생 벌어도 손에 쥘 수 없는 금액이었어... 잠시 머리가 어떻게 됐었나 봐. 한 번만 용서해 줘...]음성은 여기서 끊겼다.여재훈이 직접 스피커폰 모드로 음성을 틀었기 때문에 옆에 있던 여시은도 모든 내용을 똑똑히 들었다.음성이 끝나자, 워낙 얼어붙은 모습이던 여시은은 얼굴이 하얗게 질린 채 눈이 동그래졌다.“아빠, 이건...”찰싹!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얼굴에 짜릿한 통증이 밀려왔다. 여재훈이 사정없이 따귀를 때린 것이다.“시은아, 네가 언제부터 이렇게 악랄한 아이가 됐어?”여재훈은 소파에서 벌떡 일어났다. 다친 손에 너무 힘을 줘서인지 그녀를 가리키는 손이 떨리고 있었다.“아빠, 손에...”여시은도 여재훈의 팔에 피가 스며 나온 것을 발견했다. 그녀는 서러움을 잊은 채 여재훈의 상태를 확인하려 했다.하지만 그녀가 다가가자, 여재훈은 몸을 뒤로 피하며 호통쳤다.“고은서 씨를 모함하고 고양이를 학대하고 도우미를 괴롭힌 것도 모자라 이제는 살인 청부까지 해? 너 정말 무법천지구나.”여시은의 한쪽 뺨은 빨갛게 부어올랐고, 눈빛은 놀라움에서 두려움으로 갔다가 다시 걱정으로 바뀌었고 지금은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이다.여재훈은 그녀에게 화를 내는 일이 거의 없었고, 엄하게 꾸짖는 경우조차 드물었다. 손찌검은 상상도 못 할 일이었고, 이번이 처음이었다.실망으로 싸늘해진 여재훈의 얼굴을 바라보며, 여시은은 닭똥 같은 눈물을 뚝뚝 떨구었다.“아빠, 지금 제가 무슨 말을 해도 믿어주지 않을 거죠? 다 거짓말로만 들리겠죠?”여시은은
도우미가 여재훈의 질문에 대답하기도 전에 여시은이 걱정스럽게 물었다.“그러네. 미화언니, 손이 왜 그래?”박미화는 손을 살짝 움츠리더니 고개를 숙인 채 대답했다.“걱정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정원에서 일하다가 부주의로 나뭇가지에 긁혔습니다.”“어제는 누군가가 할퀸 거라고 했잖아?”옆에 있던 다른 도우미가 의아한 듯 입을 열었다.박미화는 고개를 숙인 채 동료에게 경고의 눈빛을 보냈고, 이내 눈치를 알아챈 그 도우미는 급히 입을 다물었다.“대체 어떻게 된 거야?”두 사람이 눈빛을 교환하는 것을 감지한 여재훈이 엄숙하게 물었다.“집사는? 직원이 다른 사람과 싸워서 상처를 입은 것도 모르고 있단 말이야?”“집사님과 상관없는 일입니다.”집사에게 혼날까 봐 겁에 질린 박미화는 더 이상 거짓말하지 못했다.“사실 누구랑 싸운 것도, 할큄 당한 것도 아닙니다. 며칠 전, 아가씨를 부르러 올라갔을 때, 부주의로 아가씨 손톱에 긁힌 것입니다.”“아, 미화언니 손등을 그렇게 만든 게 나였어요?”여시은은 급히 일어나 박미화의 상처를 확인하더니 손등을 호호 불어주기까지 했다.“아팠겠다. 정말 내가 그랬어? 나는 왜 기억나지 않지?”박미화는 억지로 웃음을 지어 보이며 말했다.“그때 아가씨는 감정이 많이 격해져 있었어요. 무슨 억울한 일이 있는지 줄곧 울고 있었죠. 제가 아가씨의 손을 잡고 달래던 중에 아가씨의 손톱에 긁힌 거예요. 사소한 일이라 아가씨가 걱정할까 봐 말씀드리지 않았어요.”“그랬구나.”여시은은 머리를 탁 치며 후회스럽게 말했다.“난 정말 몰랐어. 진작에 말하지 그랬어? 이제야 알게 되니 너무 미안하잖아.”박미화는 고개를 저었다.“아가씨가 요즘 기분이 안 좋고 아프기도 하니 신경 쓰이게 하고 싶지 않았어요.”여재훈이 눈살을 찌푸리며 물었다.“다친 지 2~3일이나 지났는데 약을 바르지 않았어?”박미화는 약을 발랐지만 자꾸 일을 하니 상처가 빨리 낫지 않는 것 같다고 대답했다.하지만 여재훈은 그녀의 말을 믿지 않고 의심 어린 눈빛으로
곽승재의 말을 들은 마재경의 얼굴에 두려운 기색이 살짝 감돌았다.하지만 문득 뭔가를 떠올린 듯 그녀는 콧방귀를 뀌며 말했다.“협박하지 마세요. 가벼운 부상에 불과하니 유능한 변호사를 선임하면 기껏해야 3년 감옥에 있고 나올 거예요. 당신들이 주는 기회 따위는 필요 없어요.”마재경은 인정하지 않겠다고 마음 먹은 것이 확실했다. 3년 감옥살이로 거액의 돈을 바꾸는 것이 나쁘지 않다는 판단이었다.이로 미루어 보면, 마재경은 정말 누군가의 사주를 받은 것이다.고은서가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3년 청춘을 돈과 바꾸는 것이 이익이라고 생각해? 영원히 지워지지 않는 오점이 생겨 네가 어디 가든 따라다닐 텐데.”“게다가 그렇게 큰돈이 어디서 생겼는지 출처를 밝히지 못하면 경찰이 가만둘 것 같아? 일단 경찰이 알아내면 너의 공범도 잡히고 너는 비호죄까지 추가될 텐데. 정말 그럴 만한 가치가 있을까?”고은서의 말에 마재경은 약간 망설였지만 여전히 자기가 혼자 한 것이라고 고집했다. 돈도 어디서 입금됐는지 모르겠고, 어쩌면 팬 중 한 명이 보낸 것일 수도 있다고 둘러댔다.다소 김빠진 고은서는 곽승재와 함께 밖에 나가 마재경의 약점을 찾아보려 했다.그때 곽승재가 입을 열었다.“죄를 지었다는 것이 너의 고향에 알려지면 돈을 들고 금의환향하려는 생각이 실현될 수 있을까?”이 말에 마재경은 허를 찔린 듯 눈에 공포가 감돌았고 몸도 미세하게 떨리기 시작했다.잠시 후, 곽승재의 얼음장 같은 시선 속에서 마재경은 철저히 무너졌다.“말할게요. 전부 다 털어놓을게요...”...여씨 저택.여시은이 수액을 다 맞고 여재훈도 약을 먹은 뒤였다.가정의가 떠나자, 여시은은 여재훈의 옆에 앉았다.“아빠, 왜 그러세요? 계속 미간을 찌푸리고 계시는데, 상처 부위가 많이 아프신 거예요?”여재훈은 순하고 사리에 밝은 딸을 바라보며 결국 참지 못하고 물었다.“시은아, 네가 주워 온 길고양이가 너랑 그리 친하지 않은 것 같더구나?”여시은은 순진무구한 눈빛을 한 채 고개를 끄
마재경은 잠깐 멍하니 있더니 곧바로 사주한 사람이 없다고, 그냥 미워서 괴롭히고 싶었다고 말했다.그러자 고은서는 코웃음을 쳤다.“변명이 너무 억지스럽다는 생각이 안 들어?”“너와 곽승재가 단순히 금전적 관계였던 건 말할 것도 없고, 설령 진심으로 좋아하는 감정이 생겨서 잘해보고 싶은데 외면당했다고 해도 곽승재한테 화풀이해야 하는 거 아닌가?”고은서의 질문에 마재경은 얼굴이 부자연스럽게 일그러졌다.“나는 곽 대표님을 존경했을 뿐 다른 마음은 없었어.”“그런데 너는 나와 곽 대표님의 스캔들 때문에 나를 질투했고, 나의 팬을 돈으로 매수해 나를 반죽음으로 만들었어. 이런 짓을 한 너에게 복수하면 안 되나?”‘흉기 난동 사건까지 내 탓으로 돌리려 하다니?’고은서는 더욱 어이없었다.“마재경, 머리는 장식품으로 달고 다니나? 내가 곽승재를 어떻게 생각하는지 누구나 다 알아. 내가 질투심 때문에 돈으로 사람을 매수해 너를 해칠 이유가 없잖아.”“그리고 정말 나를 의심했다면 왜 경찰에 신고하지 않았어? 나를 경찰서에 넘겨서 죄를 묻는 게 더 나았을 텐데.”마재경은 얼굴이 빨개졌지만 여전히 우겼다.“너는 돈도 많고 옆에 힘 있는 남자들도 많은데, 내가 어떻게 증거를 찾을 수 있겠어?”고은서는 다시 한번 어이없어 웃었다.“증거도 없다는 거네. 그러면 무슨 근거로 나를 의심해? 나한테 피를 뿌린 것도 모자라 잔인하게 죽이려고까지 했잖아.”“‘눈에는 눈, 이에는 이’라고 내가 칼에 찔려 과다 출혈로 죽을 뻔했으니 같은 방식으로 너한테 되갚아주고 싶었어.”마재경은 고은서가 정말 자기를 해치기라도 한 것처럼 원한을 쏟아냈다.고은서는 더 이상 그녀와 논쟁을 이어갈 생각이 없다는 듯 손을 내저었다.“사주한 사람이 없다고 계속 우기면 너의 남은 인생은 감옥에서 썩게 될 거야. 인플루언서로 돌아갈 수 없는 것은 물론 자유도 잃게 되겠지.”“너!”“협박으로 들릴지 모르지만, 네 말대로 나에겐 돈도 많고 곁에 힘 있는 남자들도 많아.”이 말을 들은 마재경은
“집에서 모시러 오셨으니 저는 이만 가보겠습니다. 경찰서에 상황을 알아보러 가야 해서요.”그녀가 식사 자리에서 여시은을 용서할 수 없다고 분명히 밝혔기 때문에 여재훈은 크게 놀라지 않았고 더 이상 설득도 하지 않았다.“고은서 씨, 이번 일은 저와도 상관이 있으니 같이 가도록 해요.”하지만 고은서는 완곡하게 거절했다.“아닙니다. 상대가 저를 노린 것이니 제가 가면 됩니다. 다치셨으니 일찍 들어가 쉬십시오.”그녀의 단호한 태도에 여재훈은 더 이상 고집하지 않았다. 다만 소식이 있으면 알려달라고 했다.고은서가 인사하고 자리를 뜨려는 순간, 여씨 가문의 가정의가 진료실에서 나오더니 호들갑을 떨었다.“여 대표님, 앞으로 이런 무모한 행동은 삼가세요. 이번에는 동맥을 다치지 않아서 다행이지만, 혈액형도 특이한데 대량 출혈이라도 발생하면 이 작은 병원에서 혈액을 공급받지 못했을 거예요.”‘혈액형이 특이하다고?’고은서도 희귀한 혈액형이었다. 그녀가 여재훈의 혈액형을 물어보려 할 때 여시은이 애교 섞인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그러게요. 아빠, 몸을 좀 아끼세요. 너무 걱정되고 무서워요...”이 광경을 본 고은서는 말없이 떠나갔다....마재경이 뿌린 피가 그녀의 몸을 명중하지 못했는데도 여기저기 피가 튀어 불쾌한 냄새가 났다.곽승재가 경찰서에 같이 가자고 했기 때문에 고은서는 먼저 라이트문 아파트로 돌아가 꼼꼼히 씻은 후 깨끗한 옷으로 갈아입었다.곽승재는 빛의 속도로 달려왔다. 고은서가 대충 차려입고 경찰서에 도착한 지 얼마 안 돼서 허둥지둥 달려오는 그의 모습이 보였다.곽승재는 얇은 미디엄 코트를 입고 있었는데, 매끈한 핏 덕분에 더 훤칠해 보였다. 그의 잘생긴 얼굴에는 걱정하는 기색이 살짝 감돌았다.그는 고은서를 보자마자 상처부터 확인했다.곽승재의 따뜻한 손이 피부에 닿자, 고은서는 약간 불편한 듯 그의 손을 살짝 밀어냈다.“정말 괜찮아. 살짝 긁혔을 뿐이고, 이미 약도 발랐어.”곽승재는 손을 거두어들였지만 눈은 그녀를 떠나지 않았다.말쑥
지난번 여씨 저택에서 여시은이 쿠아에게 할퀴어 상처를 입었을 때 이 의사를 본 적이 있었다.여시은은 아버지가 다쳤다는 소식을 듣고 자기 몸 상태도 생각할 겨를이 없이 병원으로 달려온 모양이다. 가정의도 걱정돼서 따라나섰을 것이다.“시은아, 왜 여기까지 왔어? 괜찮다고, 금방 돌아갈 거라고 말했잖아.”여재훈이 나무라듯 말했다.“아가씨께서는 대표님이 병원에 계신다는 소식을 듣자마자 수액을 뽑아버리고 운전기사에게 빨리 병원으로 데려다 달라고 하셨어요.”가정의가 설명을 보탰다.역시 그랬다. 여시은은 눈이 빨갛게 충혈되고 예쁜 얼굴에 긴장과 걱정이 가득했다.“아빠, 대체 어떻게 된 거예요? 어쩌다 다치셨어요?”여재훈은 고은서의 말을 듣고 딸에 대한 의심이 생겼지만, 그녀의 걱정스러운 모습을 보고 사람들 앞에서 추궁하지는 않았다.여재훈이 부드러운 목소리로 대답했다.“작은 사고가 있었어. 이제 괜찮아.”여시은은 조금 안심된 듯했다. 그제야 진료실에 다른 사람이 있다는 것을 알아챈 그녀는 의사와 간호사에게 인사한 뒤 고은서에게로 시선을 돌렸다.리셉션이 끝난 지 며칠 지났지만 두 사람의 대면은 이번이 처음이었다.리셉션 때보다 여시은은 확연히 풀이 죽은 상태였다. 창백한 얼굴에 화장기 하나 없었고, 입술에도 각질이 일어나 있었다.게다가 여재훈에게 무슨 일이라도 생길까 봐 전전긍긍하는 모습은 살짝 건드리면 깨지는 도자기 인형처럼 취약해 보였다.도대체 어떻게 이런 완벽한 연기를 펼칠 수 있는 건지?민시후의 부하들이 여시은에게 조현병이 없다는 걸 알아내지 못했더라면, 여시은이 이중인격을 가진 게 아닌지 의심했을 정도였다. 순진무구한 인격과 잔인하고 변태적인 인격 말이다.하지만 여시은은 조현병 환자가 아닌 게 분명했다. 왜냐하면 그녀의 눈가에 차가운 기운이 스쳐 지나갔기 때문이다.비록 순간적으로 스쳐 지나간 것이었지만 고은서는 정확히 포착했다.“고은서, 너 때문에 아빠가 다치신 거야?”여시은은 예전처럼 친한 척하지 않고 화난 목소리로 물었다.고은서가
의사가 여재훈의 상처를 처치하는 사이, 고은서의 휴대폰이 울렸다.번호를 보니 곽승재였다.고은서는 여재훈에게 말하고 복도로 나가 전화를 받았다.“은서야, 너 사고를 당했다며? 너와 여 대표님이 모두 다쳤다고?”곽승재가 다급히 물었다.임신 오해 사건 이후, 두 사람이 모든 것을 터놓고 얘기한 뒤로 그녀를 몰래 보호하던 인원을 철수한 상태였다.하지만 운전기사는 여전히 주민기가 배치한 인원이어서 고은서에게 무슨 일이 생기면 바로 알 수 있었다.고은서는 어디서 들었는지 캐묻지 않았다.“괜찮아. 마재경이 갑자기 유일 투자은행 주차장에서 나를 습격했어. 여재훈 씨가 막아주다가 팔을 다치셨고.”“나는 지금 출장 중이라 경찰서 쪽에 다른 사람을 보냈어.”곽승재는 무거운 목소리로 말했다.“지금 바로 해성으로 돌아갈게.”고은서는 급히 돌아올 필요가 없다고 말했다.“여긴 별일 없으니까 일에 집중해. 여재훈 씨의 상처 처치가 끝나면 경찰서로 가서 마재경을 만날 거야.”“이쪽 일은 거의 마무리됐어. 내가 돌아가면 같이 경찰서에 가자.”곽승재는 설명을 이어갔다.“지난번 마재경이 다쳤을 때 병원을 방문해 더 이상 협조가 필요 없다고 통보하고 충분한 보상금도 지급했어.”“다시는 네 앞에 나타나 존재감을 과시하지 말라고 몇 번 경고했는데 갑자기 나타난 걸 보면 배후에 조종자가 있는 게 아닌지 의심스러워.”곽승재는 차분한 목소리로 분석을 이어갔고, 고은서도 어느 정도 수긍했다.따져보면, 마재경은 돈 때문에 곽승재와 손잡은 것이고 그녀와 깊은 원한이 없었다.협력 관계가 끝났으면 적당한 선에서 물러나야 정상이지, 이렇게 위험한 방식으로 그녀에게 복수할 이유가 없지 않은가?하지만 마재경이 진심으로 곽승재를 좋아하게 됐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천천히 사랑을 키워나가고 싶었는데 곽승재가 갑자기 관계를 끊자고 하니 그 분노를 고은서에게 쏟아냈을 수도 있다.고은서가 이 가능성을 말하려는 순간, 간호사가 문을 열고 나오더니 안에 있는 환자분의 부탁이라며 그녀의 상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