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민아는 고은서가 눈을 크게 뜨고 멍하니 있는 모습을 보고 걱정스러운 표정을 지었다.막 입을 열려던 찰나 민시아의 부드러운 목소리가 들려왔다.“은서 씨, 미안해요. 시후가 깨어나긴 했지만 아직 완전히 회복된 건 아니에요. 의사도 충분한 휴식이 필요하다고 해서 제가 미처 시후한테 모든 걸 설명하지 못했어요.”고은서는 충격에서 벗어나 침착함을 되찾았다.그녀도 처음 깨어났을 때 뇌진탕 때문에 사고 당시의 기억이 없었다.민시후도 같은 상황일 가능성이 컸다.“괜찮습니다.”고은서는 요동치는 감정을 억누르며 최대한 차분한 목소리로 답했다.“제가 신중하지 못했네요. 이럴 때 방해해서 죄송해요. 민시후, 푹 쉬어. 우린 먼저 가볼게.”고은서의 말이 끝나자 민시후가 미간을 찌푸리며 물었다.“잠깐, 왜 우리 두 사람이 같이 있다가 사고가 일어난 건지 아직 설명 안 했잖아.”사고라는 말에 고은서는 본능적으로 움찔했고 사고 당시의 장면이 떠올라 숨이 막혀왔다.“미안해. 다 나 때문이야.”고은서의 말을 들은 민시후의 눈가에 의심이 스쳤다.“설마 너랑 곽승재가 짜고 치는 연극은 아니지?”고은서는 순간 말문이 막혔다.역시 민시후다운 생각 방식이었다.처음 만났을 때부터 그녀의 의도를 몇 번이나 의심했던 그였다.‘정말 나를 기억하지 못하나 보네.’고은서는 복잡한 감정에 휩싸였다.실망, 허탈함과 깊은 죄책감이 그녀를 뒤덮었다.민시후가 이렇게 된 건 모두 본인 탓이라는 생각이 들었다.코끝이 시큰해진 고은서는 애써 목소리를 가다듬고 말했다.“먼저 쉬어. 나중에 다시 올게.”그렇게 말하고는 고은서는 송민아와 함께 병실을 나왔다.병실을 나와 복도를 걸어가던 고은서는 옆에 있던 의자에 힘없이 앉아버렸다.“은서야, 괜찮아?”송민아가 걱정스럽게 묻자 고은서는 고개를 저으며 답했다.“시후 상태 알고 있었어?”송민아는 미안한 듯한 표정을 지으며 솔직히 답했다.“시아 언니가 어제 민시후가 기억을 잃었다고 알려줬어. 병원에 와 보라고 해서 와서 확인했더니 최근
민승호는 형식적으로 고개를 끄덕였고 민시현은 가차 없이 물었다.“여긴 왜 오신 거죠?”고은서는 솔직히 답했다.“시후가 깨어났다는 소식을 들어서 보러 왔어요.”민시현의 목소리는 냉랭했다.“은서 씨도 시후 상태가 어떤지 잘 알겠죠. 두 사람 사이의 일은 더 이상 문제 삼지 않을 테니 앞으로는 이렇게 방해하러 오지 마세요. 완전히 인연을 끊으면 더 좋겠네요.”“아저씨! 시현 오빠!”고은서가 답하기도 전에 송민아의 목소리가 들려왔다.송민아를 보자 민시현의 태도는 조금 누그러졌고 민승호는 인자한 미소를 지었다.“민아도 시후 보러 왔니? 시후가 많은 걸 잊어도 너에 대한 기억은 또렷한 걸 보니 네가 시후 마음속 깊이 자리하고 있었던 거 아닐까?”민승호가 장난스럽게 말했다.송민아는 옆에 있던 고은서를 흘끗 보더니 짐짓 장난스러운 말투로 답했다.“아저씨, 이제 더 이상 그런 농담 하시면 안 돼요. 시후 오빠가 모든 기억을 잃은 것도 아닌데 저와 있었던 일들을 기억하는 건 당연하죠. 하지만 저는 정말 오빠를 완전히 내려놓았어요. 그러니까 절대 저희 두 사람 다시 이어주려고 하지 마세요!”민승호가 가볍게 한숨을 쉬었다.“나는 정말로 네가 마음에 들었어. 우리 막내며느리가 되면 좋겠다고 생각했는데 시후 저 녀석이...”송민아는 이에 답하지 않고 그저 웃으며 말했다.“아저씨, 시현 오빠. 저랑 은서는 처리해야 할 일이 있어서 먼저 가볼게요.”말을 마친 송민아는 고은서의 팔을 잡고 함께 엘리베이터로 향했다.“우리 집안과 민씨 가문은 원래 친분이 깊어. 아저씨도 나를 좋아해서 시후 오빠와 결혼시키고 싶어 하셨던 거야. 너를 난처하게 만들려고 한 건 아니야.”“위로하려고 그러는 거면 안 해도 돼. 뭐든지 각오하고 있었어.”“시현 오빠가 너한테 심한 말한 건 아니지?”송민아가 자책했다.“좀 더 참을 걸 그랬어. 널 병실에 바래다주고 화장실에 갔어야 했는데...”고은서는 송민아의 표정과 말투에 저도 모르게 피식 웃었다.“그게 무슨 상관이야. 화장실
송민준은 손에 들고 있던 선물을 내려놓으며 적당한 거리감을 유지한 채 말했다.“민아한테 상황은 들었어요. 시후 병문안 온 김에 겸사겸사 은서 씨도 보러 왔어요.”고은서는 감사 인사를 전한 뒤 그를 자리에 앉게 했고 참지 못하고 물었다.“민시후는 어때요? 괜찮나요?”민시후가 그녀를 기억하지 못하는 데다 민씨 가문 사람들도 그녀가 면회하는 걸 허락하지 않았기에 고은서는 지난 이틀 동안 민시후를 직접 보지 못했다.“그럭저럭 괜찮습니다. 다만 몸에 상처가 많아 손과 다리를 쓰는 걸 불편해하더라고요. 게다가 두통도 자주 와서 감정 기복도 심해졌어요.”“민준 씨는 기억하는 거죠?”고은서는 의도적으로 물었다.그녀도 당연히 송민준을 기억하고 있을 거란 걸 알고 있었다.하지만 민시후가 그에게 여전히 예전처럼 경계심을 가지는지 궁금해 직접적으로 묻는 대신 돌려서 물은 것이었다.송민준은 그녀의 의도를 눈치채고 미소를 지었다.“시후가 예전의 불편한 감정들은 잊었는지 저한테는 그럭저럭 예의를 갖추더라고요.”민시후는 이전의 사람들과 사건들을 기억하면서도 유독 그녀와 해성에서 있었던 일만 잊은 것이다.“시현 형이랑 아저씨는 시후를 해외 병원으로 옮길 계획이더라고요.”고은서가 생각을 정리하는 사이 송민준이 다시 입을 열었다.“뇌 쪽 혈종 문제가 심각해서 선진 기술을 가진 해외에 가서 전문가에게 맡길 건가 봐요. 그편이 시후한테도 좋긴 하죠.”고은서는 순간 멍해졌다.‘민씨 가문 사람들이 민시후를 해외로 보낸다고?’“언제 가요? 그리고 얼마나 있을 예정일까요?”“아마 며칠 안에 출국할 거예요. 얼마나 머물지는 정해지지 않았어요. 병원의 치료 계획과 시후의 회복 상태에 따라 달라질 것 같아요.”민씨 가문이 이렇듯 급하게 민시후를 해외로 보내려는 건 치료 목적도 있지만 그녀와의 관계를 완전히 단절하려는 의도도 있을 것이다.어쩌면 이전에 민시아가 북성으로 데려가겠다고 한 것보다 더 확실한 방법이었다.고은서는 머리로는 이 상황을 이해했지만 마음이 아려왔다.하
“하지만 민아는 예전처럼 무작정 달려들지 않아요. 자신의 감정을 조절할 줄 아는 사람이 됐으니 시후도 그런 민아를 다시 보게 될 거예요. 더구나 둘이 오랜 시간을 함께 보내게 된다면 시후가 민아에게 마음을 열 확률도 높아질 거로 생각해요.”고은서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사람은 외롭고 힘들 때일수록 자신에게 다가오는 온기에 쉽게 흔들리는 법이었다.더구나 해외라는 낯선 환경에서는 그 흔들림이 더할 것이었다.그래서 송민준이 말한 가능성은 생각보다 더 높았다.“부모님은 민아의 파혼을 받아들이긴 했지만 시후를 상당히 마음에 들어 하세요. 어릴 때부터 봐온 터라 시후가 어떤 사람인지 잘 알고 계시거든요. 우리 두 집안이 혼사를 맺는다면 모두에게 좋은 일이 될 거예요.”송민준이 말을 이었다.“은서 씨. 시후 좋아하는 거 알아요. 하지만 시후는 이제 은서 씨를 기억하지 못해요. 그리고 은서 씨도 두 사람이 이어지기 힘들다는 거 잘 알고 계시잖아요. 시후가 해외로 갈 때 민아가 가지 않더라도 아저씨는 다른 여자를 시후 곁에 둬서 두 사람이 이어지도록 할 거예요. 그럴 바에는 민아를 보내는 게 낫지 않겠어요?”“민아 생각은 물어봤나요?”송민준이 고개를 저었다.“아직이요. 그래서 은서 씨가 먼저 말해줬으면 좋겠어요.”고은서는 처음엔 황당한 제안이라고 생각했지만 그의 말을 듣다 보니 화가 줄어들고 그저 답답함만이 남았다.송민아가 민시후를 좋아하는 건 누구보다도 그녀가 잘 알고 있었다.비록 송민아가 이미 마음을 접었다고 했지만 이런 상황에서 다시 흔들릴 수도 있었다.두 사람이 함께 해외로 가 이번 기회에 가까워진다면 민시후가 그녀를 사랑하진 않더라도 그녀의 헌신과 곁을 지켜주는 모습에 감동할 가능성이 높았다.하지만 가장 큰 문제는 민시후가 기억을 되찾게 된 후였다.‘나를 위해 목숨도 내던졌는데 다른 여자를 떠밀었다는 걸 알게 되면 어떤 생각을 할까?’고은서가 복잡한 표정을 짓자 송민준은 부드럽게 웃으며 덧붙였다.“은서 씨,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만
이미 송민아가 알게 된 이상 고은서도 부정하지 않고 바로 물었다.“네 생각은 어때? 민시후랑 같이 해외 갈래?”“무슨 소리 하는 거야? 당연히 안 갈 거야!”송민아는 다소 화가 난 듯 말을 이었다.“나랑 시후 오빠는 아무 사이도 아니야. 그런데 갑자기 해외로 따라간다는 게 말이 돼?”“하지만 네 오빠는 민시후와 감정을 쌓을 좋은 기회라고 생각하는 것 같던데?”옆에 있던 박지연이 말했다.고은서도 송민준의 생각을 송민아에게 전했다.“네 오빠는 네가 민시후와 잘 되길 바라는 것 같아. 네가 민시후에게 아직 조금이라도 마음이 있다면 이번 기회가 괜찮을 수도 있겠지.”“난 그런 기회 따윈 필요 없어!”송민아는 단호했다.“시후 오빠를 좋아했던 감정이 있다고 해도 이미 지난 일이야. 내가 무슨 성녀도 아니고 한 남자의 사랑을 얻기 위해 나 자신을 그렇게까지 낮출 생각은 없어. 게다가 내가 모든 걸 바친다고 해도 그게 사랑으로 돌아올 거란 보장도 없잖아. 오히려 원망만 남을 수도 있지.”“정말 현실적이네, 송민아!”박지연은 감탄하며 그녀의 어깨를 가볍게 두드렸다.“미안해. 솔직히 말하면 나는 네가 그 사람들 말에 설득당할 거로 생각했어.”“사과할 필요 없어. 그렇게 생각하는 게 당연하지.”송민아는 쓴웃음을 지으며 말했다.“아마 다들 내가 그저 감정을 억누르고 있을 뿐 사실은 여전히 시후 오빠를 좋아한다고 생각할 거야. 하지만 난 정말로 다 놓았어.”송민아가 고은서를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언니를 원망해서 하는 말이 아니라 시후 오빠가 언니한테 보인 태도를 보고 사랑하는 것과 그렇지 않은 감정에 따르는 행동의 차이가 얼마나 큰지 확실히 깨달았어. 시후 오빠가 함께한 시간과 보살핌 때문에 나를 다르게 보기 시작했다 해도 그게 사랑이 될 리 없다는 걸 알아. 우리 오빠가 언니를 찾아온 건 언니가 나한테 죄책감을 가질 거라고 확신했기 때문이야. 언니는 줄곧 언니가 내가 좋아했던 사람을 빼앗았다고 생각하고 있었잖아. 하지만 이건 언니 잘못이 아니야.
민시아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은서 씨의 행동은 이해할 수 있어요. 다만 시후를 만나기 전에 제 말을 잠시 들어줄 수 있을까요?”고은서는 민시아가 일부러 자신을 기다리고 있었다는 걸 알았다.그녀는 송민아에게 메시지를 보내 몇 분 늦을 거라고 알린 뒤 민시아를 따라 비상구 뒤쪽 복도로 향했다.복도에는 밝은 조명이 켜져 있었고 바닥은 반짝일 정도로 깨끗했다.주변은 너무나 조용해 괜히 사람을 답답하게 만드는 분위기였다.고은서가 조용히 물었다.“시아 씨, 하실 말씀이 뭐죠?”고은서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민시아가 그녀 앞에 무릎을 꿇었다.“시아 씨, 이러지 마세요!”고은서는 다급하게 그녀를 부축하려 했지만 아직 다 낫지 않은 등의 상처가 다시 아파졌다.그녀는 순간적으로 밀려드는 통증에 얼굴을 찡그렸다.“은서 씨, 절 부축하지 말고 제 말 좀 끝까지 들어주세요.”그녀의 얼굴에는 결연함이 서려 있었고 민시후와 닮은 눈매에는 눈물이 맺혀 있었다.“시후가 은서 씨를 깊이 사랑하고 있다는 건 잘 알고 있어요. 시후는 의식을 잃은 상태에서도 은서 씨가 찾아왔을 때만 반응을 보였어요. 그건 시후가 무의식 속에서도 은서 씨를 사랑하고 있다는 증거겠죠. 하지만 두 사람은 정말 안 돼요.”민시아가 눈시울을 붉히며 말을 이었다.“시후는 의리가 깊은 사람이에요. 이미 T 국에서도 은서 씨를 위해 칼을 맞았고 이번에는 목숨까지 버리려 했어요. 앞으로도 또다시 무모한 행동을 할 가능성이 큽니다.”민시아가 계속 무릎을 꿇고 있는 것을 보니 고은서는 도저히 이 상황을 견딜 수 없었다.“시아 씨, 제발 이러지 마세요. 그냥 일어나서 말씀하시면 안 될까요?”그러나 민시아는 고개를 저었다.“은서 씨, 우리 집안이 은서 씨한테 큰 빚을 진 셈이라고 생각해 주세요. 은서 씨가 착하고 좋은 사람이라는 걸 알아요. 하지만 시후랑은 인연이 없어요. 시후는 저보다 열 살 넘게 어린 동생이에요. 저는 시후를 동생 이상으로 제 아이처럼 아끼고 있어요. 시후가 또다시 이런 일을
고은서는 심호흡을 한 번 하고서야 병실 문을 두드렸다.송민아가 복도에 나오면서 그녀를 보고 물었다.“뭐하러 갔어? 왜 이리 늦은 거야?”고은서는 애써 미소를 지어 보이며 답했다.“엘리베이터를 기다리는 사람이 너무 많아서.”송민아는 억지로 괜찮은 척하는 고은서를 보면서 그녀가 민시후가 걱정되어서 그러는 줄 알고 저도 모르게 어깨를 토닥여 주며 그녀를 위안했다.“괜찮아. 천천히 얘기 나눠. 시아 언니가 오면 다 내 생각이라고 말해둘게.”고은서는 송민아한테 자세히 설명해줄 힘도 없었는지라 나지막한 목소리로 고맙다고 말하고는 병실로 들어갔다.민시후는 머리에 붕대를 묶은 상태로 환자복을 입은 채 병상에 앉아 있었는데 약간 초췌해진 것 같았다.병실 불빛 때문인지 그의 모습이 귀공자처럼 느껴졌다.민시후도 입을 꾹 다문 채 걸어들어온 고은서를 관찰하고 있었다.가녀린 몸매와 아름다운 외모를 가진 그녀는 피부마저도 눈처럼 새하얬는데 당장이라도 깨질 것 같은 느낌을 주었다.그녀는 저도 모르게 미간을 찌푸리고 있었는데 쓸쓸한 눈빛으로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두 눈이 유독 민시후의 마음에 와닿았는데 저도 모르게 가엾다는 생각이 들면서 괴이하게도 달려가 그녀를 안아주고 싶은 충동이 들었다.“민시후, 몸은 어때? 머리는 아직도 세게 아파?”고은서가 나지막한 목소리로 먼저 입을 열었다.민시후는 고은서의 물음에 답하는 대신 그녀를 빤히 바라보면서 직설적으로 물었다.“송민아 말로는 내가 널 엄청 좋아했다고 하던데? 심지어 포기할 줄도 모른 채 널 쫓아다녔다며?”‘송민아가 일부분 일을 알려준 모양이네.’“왜? 대답하기 어려운 문제야?”민시후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있는 고은서를 보며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확실히 날 좋아한다면서 쫓아다니긴 했어. 심지어 그 일 때문에 네 가족과 불화도 생겼고. 하지만 그 모든 게 다 송민아한테 보여주기 위한 연기일 뿐이었어.”고은서가 고개를 저으며 대답했다.민시후는 눈썹을 치켜올리면서 캐물었다.“이유는?”고은서는 민
“과정은 방금전에 말했던 것보다 더 힘들긴 했어. 하지만 결과는 변함없어.”“송민아가 방금전에 내가 널 엄청 좋아한다고 강조하는 걸 보아선 나를 향한 감정을 내려놓은 지 꽤 오래된 것 같은데 왜 우리 둘 사이의 합작은 계속되고 있는 거지?”민시후가 새로운 질문을 제기했다.‘사고방식 하나는 정말 끝내주네.’고은서는 침착하게 그의 물음에 답했다.“전에 네가 송민아의 행동이 일종 너의 관심을 끌려는 새로운 방식이기라도 하면 어쩌냐고 마음이 놓이지 않는다고 조금만 더 지켜보자고 해서 지금까지 계속 합작해 왔던 거야.”민시후는 이어 이틀 전에 병실에 찾아왔을 땐 평범한 파트너인 대신 아주 친해 보였다면서 또 물음을 제기했다.고은서는 두 사람이 서로 돕는 과정에 친한 친구 사이가 되었다고 이실직고했다.“그런데 난 친한 친구를 데리고 어머니 보러 가진 않는데.”민시후가 뜬금없이 예상치도 못한 말을 했다.고은서는 순간 멈칫했다.‘송민아가 그 일까지 민시후한테 알려준 거야?’그녀는 이내 정신을 차리고 다시 얼버무리며 넘어가려고 했다.“송민아를 속이기 위해 거짓말한 거야. 그뿐만 아니라 송민아한테 우리가 엄청 다정하게 지낸다고 거짓말하면서 일부러 송민아 앞에서 나한테 잘해주는 척하기도 했어.”민시후가 확실히 그런 적이 있었기에 고은서는 아무런 부담도 없이 말을 술술 내뱉을 수 있었다.민시후도 의심하지 않았다.“그러니까 내가 널 좋아한다는 것도 다 가짜라는 거지?”고은서는 대답하는 대신 그에게 되물었다.“민시후, 너라면 곽승재 전처한테 감정이 생기겠어? 우리가 합작하는 관계 외에 뭐가 더 있겠어?”민시후는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그는 곽승재를 극도로 증오하는 사람이었다.곽승재의 일이라면 전혀 참견하는 일이 없었고 그의 전처에게도 관심이 생길 일이 없을 것이다.게다가 그가 송민아를 성가셔하면서 그녀를 떨쳐내고 싶어 했던 것도 사실이었다.‘만약 정말 약혼했던 사이라면 충분히 온갖 수단을 써가면서 파혼하려 했을 거야.’민시후는 더는 캐묻지 않고
박지연은 계속해서 불만을 터뜨렸다.“내가 보기엔 여시은은 태생이 못돼먹었어!”“이번에 그렇게 크게 당했으니 더더욱 널 원망할 거야. 너 조심 좀 해.”박지연이 걱정스럽게 당부했다.고은서는 고개를 끄덕였다.이미 각을 세우기로 마음먹었기에 여시은과 평화롭게 지낼 생각은 애초에 없었다. 앞으로는 여시은을 더 철저히 경계할 것이다.“듣자 하니 곽승재가 내내 널 감싸줬다며? 너한테 점점 마음이 가는 모양이야.”박지연이 코웃음을 쳤다.어젯밤 곽승재가 고은서를 계속 도와줬던 건 사실이었다. 증거를 공개하자고 제안한것도 곽승재의 생각이었고 마지막에 그녀를 집까지 데려다줬다. 곽승재가 고은서에게 큰 도움을 준 셈이었다.하지만 고은서는 곽승재에 대한 이야기를 박지연과 깊이 나누지 않았다.잠시 다른 이야기를 하던 중 박지연이 고은서에게 뜬금없는 소문 하나를 전했다.“우리 과장님한테서 들었는데, 어제 혜린 씨가 다니는 병원에 조 여사님이 찾아가서 난리를 쳤대. 혜린 씨 남자관계가 복잡하다고, 다른 남자랑 팔짱 낀 사진까지 들고 와서 공개하면서 혜린 씨랑 그 자리에서 머리끄덩이 잡고 싸움 났대!”고은서는 지난번 소동 이후 손자를 중시하는 조수연이 한동안은 조용할 거라 생각했었다. 그런데 고작 며칠 만에 또 난리를 친 거였다. 조수연의 전투력은 엄청 대단했다.“아니, 그러다 혜린 씨 혹시라도 애를 지우기라도 하면 어떡하려고 그래?”고은서가 물었다.박지연은 말했다.“조 여사님 말로는 혜린 씨 뱃속 애가 자기 아들 애가 아닐 수도 있다고 의심해서 혜린 씨를 끌고 가서 친자 확인하자고 했대. 그래서 둘이 몸싸움까지 벌어져서 이미지도 최악이라 혜린 씨는 한 달 정직당했어.”“혜린 씨 배속에 애가 온승준 씨 애가 아니라고? 그럼 도대체 왜 그렇게까지 그 집에 들어가려고 애쓰는 거야? 그냥 진짜 애 아빠랑 결혼하면 될걸...”고은서는 도무지 납득이 가지 않았다.“소문엔 그 남자가 유부남에 애까지 있다고 하더라. 자세한 건 나도 몰라. 그냥 과장님이 흘린 얘기야.”
여시은은 여전히 여재훈의 다리를 붙잡고 불쌍한 표정을 지으며 물었다.“그럼, 아빠가 생각하시는 해결 방법은 뭐예요?”여재훈은 여시은에게 홍보팀을 통해 자신이 저지른 잘못에 대해 공개 사과하고, 개인적으로 고은서에게 직접 진심으로 사과한 뒤 집에서 2주 동안 자숙하라고 말했다.“제 회사는 아직 개업식도 제대로 안 했는데 공개 사과를 하라뇨? 그럼 모든 사람들이 저를 웃음거리로 볼 거 아니에요!”여시은은 눈이 퉁퉁 부은 채 애원했다.“아빠, 저 은서한테 개인적으로 사과만 하면 안 돼요? 저도 아직 경험이 부족해서 사람들을 이끌기 힘든데, 공개적으로 사과하면 앞으로 누가 저를 믿고 따르겠어요?”“안 된다.” 여재훈은 단호하게 말했다.“이 일은 이미 파장이 커졌고 많은 사람들이 너를 지켜보고 있어. 그러니 모든 사람에게 확실하게 해명해야 한다.”“시은아, 잘못을 저지른 건 무서운 일이 아니야. 진심으로 뉘우치고 성실하게 사과하면 은서 씨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들도 너에게 다시 기회를 줄 거다.”여재훈은 계속해서 말했다.“사람은 자기가 저지른 잘못에 책임질 줄 알아야 한다. 네가 잘못했는데 내가 덮어주면 그건 너를 망치는 거야. 그러니까 이 일은 이렇게 결정된 거다!”여시은은 그 말을 듣자 속으로 분노가 치밀었다.‘고은서를 그저 연못에 좀 빠지게 했을 뿐인데 이게 뭐 그렇게 큰일이라고 이렇게까지 일을 키운단 말인가?’‘공개 사과라니, 이제 예전처럼 모두에게 존경받고 칭찬받던 모습은 끝이라는 거잖아.비록 인터넷의 영상은 지워지더라도 사람들이 나에 대한 나쁜 인상은 지워지지 않을 거란 말이야!’오늘 밤 그렇게 많은 부유층과 정재계 인사들이 있는 자리에서 그녀는 그들에게 최악의 인상을 남겼을 것이다. 해성에서 쌓아온 그녀의 완벽한 이미지가 단번에 무너진 셈이다.예전엔 그녀가 울기만 하면 여재훈은 안쓰러워하며 뭐든지 다 용서해 줬었다.‘지금은 무릎까지 꿇었는데도 아빠는 고은서 때문에 자신의 딸을 벌하려 한다니, 정말 나를 딸로 생각하긴 하는 걸까?’
여시은은 그 말을 듣자 눈이 시뻘게지면서 큰 소리로 외쳤다.“아빠, 제가 한 게 아니라니까요! 고은서가 일부러 저를 함정에 빠뜨린 거예요. 왜 저를 믿지 않으세요!”“시은아!”여재훈이 의자에서 벌떡 일어나며 난생처음으로 이토록 차가운 눈빛으로 딸에게 화를 냈다.“너는 어쩌다 이렇게 뻔뻔하게 거짓말만 하는 사람이 됐니!”“내가 사람을 시켜서 확인해 봤어. 연회장 CCTV 꺼놓은 거, 그거 네가 시킨 거더라.”여재훈은 딸을 억울하게 만들까 걱정돼 CCTV 관련 내용을 직접 조사했다.그런데 정말로 여시은이 꺼놓았던 것이었다.“네가 정말 은서 씨를 해치려는 의도가 없었다면 왜 CCTV를 미리 꺼놓은 거냐?”여재훈은 냉정한 태도로 물었다.여시은은 자신이 고은서의 계략에 걸려든 것을 그제야 깨달았다.고은서는 일부러 도발적인 눈빛으로 여시은을 자극했고 곧바로 테라스로 이끌어냈던 것이다. 모두 여시은한테 엿 먹이려는 행동이었다!여시은은 고은서가 쿠아가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격동적으로 행동해 자신을 밀칠 거라 확신했었다.왜냐하면 고은서는 지난번엔 쿠아를 다치게 한 일로도 크게 충격을 받았었기 때문이다.하지만 이번엔 반전이 생겼다.고은서는 오히려 침착하게 반격했고 지난번 농장에서의 ‘물에 빠진 사건’ 증거까지 들고나왔다.일이 이렇게 커져 버린 이상 여시은은 더 이상 변명할 여지가 없다는 걸 알았다.그녀는 결국 울음을 터뜨리며 여재훈을 향해 소리쳤다.“맞아요! 저 고은서가 너무 꼴 보기 싫었어요! 왜 아빠는 맨날 걔만 칭찬하세요? 이러니깐 제가 질투 나서 그런 거 아니에요? 그냥 고은서한테 꼽 주고 싶었어요!”“어차피 이미 벌어진 일이에요. 전 잘못한 거 없어요! 후회도 안 해요!”“너!”여재훈은 손을 번쩍 들어 여시은의 뺨을 때리려 했지만, 그녀의 눈물범벅이 된 얼굴을 보고는 차마 때릴 수가 없었다.“시은아, 아빠가 평소에 너를 어떻게 가르쳤니? 사람은 자기 양심에 떳떳해야 하고 올곧게 살아야 한다고 했잖아! 근데 너는 어떻게 질투심에 눈이
이미숙은 유튜브 영상을 보고 있었는데, 바로 여시은이 고은서 머리끄덩이를 잡아당겨 연못 가까이로 끌어당기는 장면이 재생되고 있었다.그 영상은 누군가가 휴대전화로 촬영해 올린 것 같았고 화질이 너무 좋은 건 아니지만 전반 상황을 알아보는 데에는 충분했다.영상의 끝에는 고은서와 여시은의 얼굴을 비춘 장면도 담겨 있었다.다소 초라해진 고은서는 곽승재의 부축을 받으며 옆에 서 있었다. 여시은은 얼굴이 벌겋게 달아오르고 눈빛엔 분노와 원망으로 가득했다.그 와중에 영상의 제목이 더욱 눈길을 끌었다.[재벌가 아가씨, 두 얼굴의 진실!]“사모님, 저 여자는 어쩜 저리 독하대요. 이렇게 심하게 괴롭히다니. 누가 폭로해 줘서 다행이지! 이제 세상 사람들 다 그 여자 피해서 다니겠어요!”이미숙은 화가 난 듯 말했다.고은서는 이번 일이 오래 퍼지지는 않을 거라고 생각했다. 여시은 뒤에는 여재훈이 있기 때문이다.하지만 이번 일로 여시은이 보기 좋게 망신을 당했고, 여재훈 역시 자신의 딸이 그렇게 순진하지 않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을 테니, 이번 목적은 어느 정도 달성되었다.고은서는 이미숙의 휴대전화 영상에 대뜸 ‘좋아요'를 눌렀다.한편, 여씨 가문에서.여시은 역시 유튜브 영상을 확인했다. 분노에 찬 그녀는 휴대전화를 바닥에 내던졌다.밖에 서 있는 박미화가 조심스럽게 말을 전했다.“시은 아가씨, 회장님께서 지금 바로 서재로 오시래요. 할 말씀이 있으시답니다.”이번이 박미화가 세 번째로 말을 전하러 온 것이었다.여시은은 곧바로 얼굴에 드리워진 분노와 짜증을 숨기고는 일부러 슬프고 억울한 표정을 지으며 방문을 열었다.박미화는 방안에서 반응이 없자 방문을 열려고 하였다. 때마침 여시은이 문을 열고 나오는 것을 보고 급히 손을 거두며 사과했다.여시은은 박미화의 손을 움켜쥐었다. 조금 전에 분노로 인해 물어뜯은 날카로운 손톱이 그녀의 살을 깊이 파고들었다. 그리고는 여시은은 울먹이는 말투로 물었다.“미화 언니, 아빠가 나한테 화 많이 나신 거야? 나 어떻게 해야
얼마 지나지 않아 운전기사가 차를 라이트문 아파트 앞에 세웠다.고은서와 곽승재는 위층으로 올라갔다. 고은서는 샤워하기 위해 자신의 방으로 직행했고 곽승재는 거실에 남았다.샤워를 마치고 나온 고은서는 의외의 광경을 목격했다. 곽승재가 거실 소파에 앉아 있었고 테이블 위에는 김이 모락모락 나는 차 한 잔이 놓여 있었다.“왜 또 왔어? 할 말 있어?”고은서가 물었다.곽승재는 태연하게 대답했다.“논의할 게 있어서. 그전에 이 콜라 생강차부터 마셔. 아주머니께서 특별히 준비하신 거야.”“사모님, 콜라 생강차는 감기 예방에도 효과적이거든요. 어서 드세요!”이미숙이 차를 가져오며 말했다.고은서는 감기에 걸릴까 봐 걱정하고 있던 참이었다. 그녀는 잔을 들어 올리더니 이상한 듯 물었다.“아줌마, 제가 방금 들어온 걸 보지도 못하셨을 텐데 어떻게 제가 감기 걸릴 줄 아시고 미리 차를 준비하셨어요?”이미숙의 눈가에는 잠시 당황한 기색이 스쳤다.곽승재가 자연스럽게 말을 이었다.“내가 알려줬어. 일단 마셔.”고은서는 고개를 숙여 생강차를 내려다 볼뿐 이미숙의 표정 변화를 주의 깊게 보지 못했다.물론 곽승재의 눈에 비친 기대감도 보지 못했다.생강차의 냄새를 맡아보니 생강 향이 꽤 진했다.고은서는 생강차를 조심스럽게 한 모금 마셨다. 콜라의 단맛과 생강의 톡 쏘는 맛이 어우러져 생각보다 맛이 나쁘지 않았다.“맛이 어때요?”이미숙이 물었다.“좋네요. 그런데 오늘은 생강을 좀 많이 넣으신 것 같네요. 예전에 만드신 것보다 더 매운데요.”이미숙은 잠시 망설이다가 급히 대답했다.“생강 양을 조절하지 못했네요. 주의할게요.”고은서는 더는 따지지 않고 다시 마시려던 참이었는데 곽승재가 말을 건넸다.“맛이 별로면 안 마셔도 돼.”고은서는 그를 흘겨보았다.“누가 맛없다고 했어? 아줌마가 정성스럽게 준비해주신 건데 끝까지 마셔야지.”“사모님, 도련님과 얘기 나누세요. 저는 할 일이 남아서 먼저 가보겠습니다.”이미숙은 두 사람의 언쟁을 피하려는 듯 급히 자
고은서는 고개를 끄덕이며 곽승재에게 사실대로 털어놓았다. 그녀는 친구에게 부탁해 적절한 시기에 감시 카메라를 끊어놓도록 준비해두었다.하지만 여시은이 먼저 참지 못하고 로비의 카메라를 꺼버린 것이다.고은서가 감히 감시 카메라의 확인을 제안한 데는 이유가 있었다. 그녀는 자신만의 준비를 했을 뿐만 아니라 여시은 역시 감시 카메라를 조작할 것이라는 점까지 예측했다.“만약 여시은이 참고 끝까지 널 찾지 않았다면 어떻게 할 작정이었어?”곽승재가 물었다.고은서는 피식 웃으며 대답했다.“개업식이 끝난 후 대형 스크린에 공개할 계획이었어.”곽승재가 눈썹을 추켜세웠다.“네가 앞서 백스테이지 주위를 둘러본 것도 동영상을 공개할 준비를 했던 거야?”고은서는 고개를 끄덕였다.“여시은이 일부러 나를 물에 빠뜨리고 향수로 나를 함정에 빠뜨렸을 뿐만 아니라 쿠아까지 학대했어. 내가 당연히 가만히 있을 수 없지! 그리고 시은이가 인내심을 가졌다고 해도 난 개업식이 끝날 때까지 기다렸을 거야. 하지만 결과적으로 그러지 못했지. 시은이는 결국 참지 못하고 테라스에서 쿠아의 죽음을 언급하며 나를 자극했고 다시 같은 수법을 쓸 참이었던 거지. 나는 그저 시은이가 파려던 함정을 그대로 돌려준 것뿐이야.”곽승재는 고은서가 준비를 해왔을 거라 예상했지만 이런 고육지계를 공개적인 자리에서 펼칠 줄은 몰랐다.게다가 그녀의 연기는 너무나도 실감 났다.고은서가 바닥에 넘어져 흐트러진 모습을 보는 순간 곽승재는 정말로 여시은의 소행일 것으로 생각할 정도였다.고은서는 곽승재의 생각을 읽었는지 피식 웃으며 입을 열었다.“가여운 척 한 거 아니야. 백유미와 여시은이라는 고수들 덕분에 나도 한 수 배웠을 뿐이지.”백유미의 과거 행동을 떠올린 곽승재는 가슴을 죄는 듯한 자책감이 밀려왔다.곽승재는 진지하게 사과했다.“은서야, 미안해.”무심코 흘린 말에 곽승재가 사과하는 모습을 본 고은서는 잠시 당황했다.“사과할 필요는 없어. 당신도 백유미 씨에게 속았을 뿐이잖아. 어쨌든 ‘목숨의 은인'
“시은아!”영상 속 장면에 충격을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여재훈은 걱정된 목소리로 딸을 불렀다. 그리고 뒤이어 멀리 있는 부하들에게 명령했다.“어서 따라가서 시은이를 보호해! 무슨 일이라도 생기게 해서는 안 돼!”부하들이 여시은의 뒤를 쫓아 나간 뒤 여재훈은 스크린을 힐끗 바라보더니 진지한 표정으로 고은서에게 사과했다.“제가 딸을 제대로 가르치지 못했습니다. 이 일은 제가 시은에게 직접 확인한 뒤 여은서 씨께 해명해 드리겠습니다.”고은서는 목적을 달성했으니 더는 그곳에 머물 생각이 없었다. 그녀는 옷을 갈아입어야 한다는 이유로 자리를 떠나려 했다.“여 대표님, 제가 은서 씨를 모셔다드리겠습니다.”곽승재가 말했다.송민준 역시 함께 가겠다고 전했다.여재훈은 당연히 거절하지 않았다. 개업식에서 이런 소동을 일으킨 이상 누구라도 축하할 마음이 없을 터였다.고은서 일행이 떠나자 여재훈은 참석자들에게 직접 사과하며 홍보팀에 현장 수습을 지시했다.호텔 앞 광장에서 곽승재와 송민준의 운전기사들이 각각 차를 대기시켜 놓고 기다리고 있었다.송민준은 고은서를 배웅하려는 태도를 보였으나 곽승재가 고은서를 부축하면서 예의를 갖추어 말했다.“번거로울 텐데 제가 은서 씨를 모시고 가겠습니다.”송민준은 자기가 고은서의 파트너로 왔기 때문에 그녀를 집까지 모셔다드리는 것이 당연하다고 설득했다.곽승재는 송민준의 이런 친근한 태도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는 억지로 고은서를 안아 들어 자신의 차에 태우고 싶었지만 고은서가 화를 낼 것을 잘 알고 있었다.그는 입을 오므리다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선택권을 고은서에게 넘겼다.고은서는 당연히 송민준과 함께 갈 생각이 없었다.“오빠, 오늘은 고마웠어. 오늘 승재 오빠의 차를 타고 갈게. 어차피 길도 같으니까. 내일 다시 연락할게.”고은서의 반응에 송민준은 고개를 끄덕이는 수밖에 없었다.“알겠어. 집에 도착하면 연락해.”곽승재는 고은서를 차에 태운 뒤 트렁크에서 깨끗한 외투를 꺼냈다.차 안에 앉자 곽승재는 고은서의 어깨
여시은은 고은서의 말에 더욱 어리둥절해졌다.‘갑자기 왜 또 농장 일을 다시 꺼내는 거지?’여시은은 속으로 불길한 예감이 들기 시작했다. 그녀는 생각할수록 점점 더 억울하고 분했다.“은서야, 왜 나를 이렇게 모함하는 거야? 내가 언제 너를 물에 빠뜨렸다고 그래? 네가 나를 밀었잖아! 내가 우리 아빠를 생각해서 참고 넘어갔는데 이제 와서 또 나에게 뒤집어씌우다니!”여시은은 여재훈을 바라보며 눈시울을 붉혔다.“아빠, 저는 항상 사람을 보는 안목이 없는 것 같아요... 은서가 이런 사람일 줄은 정말 몰랐어요... 너무 속상해요...”여시은의 슬프고 안쓰러운 모습에 여재훈은 점차 진지해졌고 고은서를 보며 물었다.“고은서 씨, 시은이가 은서 씨를 물에 빠뜨렸다는 증거라도 있어요?”“물론 있죠.”고은서는 이미 곽승재의 부축을 받아 일어난 상태였다. 그녀는 휴대폰을 꺼내 송민준이 보낸 영상을 찾았다.현장에 있던 사람들 모두 다가가지는 않았지만 적당한 거리를 유지하며 상황을 지켜보고 있었다. 그러다가 고은서가 진짜 증거를 가지고 있다는 소식을 듣더니 그들의 호기심을 더욱 자극했다.이때 곽승재가 제안했다.“여 대표님, 모두가 보는 앞에서 영상을 공개하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모두가 직접 보면 진실이 명백해질 테니 나중에 왜곡되는 일도 없을 겁니다. 어떻게 생각하세요?”여시은은 고은서가 미리 준비한 듯한 태도를 보이자 불안감이 더욱 커졌다.고은서가 이렇게 계획적으로 행동할 수 있었던 것은 어쩌면 증거를 손에 넣었을지도 모른다.여시은이 고은서를 과소평가했던 것이다.여시은은 붉어진 눈으로 소리쳤다.“도대체 무슨 짓을 하려는 거에요! 이미 개업식 시간이 다 됐는데 계속 이러쿵저러쿵하며 일을 벌이다니! 고의로 우리 개업식을 방해하는 거 아니에요?”“아빠, 오늘 이분들은 분명히 좋은 의도로 온 게 아닌 것 같아요. 그냥 쫓아내는 게 낫겠어요!”“여시은 씨, 말씀이 참 지나치군요. 우리는 단지 진실을 알고 싶을 뿐입니다.”송민준이 여재훈보다 먼저 입을 열
구경하는 사람들도 송민준을 쳐다보았다. 그들은 도대체 왜 그의 여자 파트너가 곽승재의 품에 안겨 있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송민준은 사람들의 의문스러운 시선을 받고 있었지만 태연하게 입을 열었다.“여시은 씨, 저는 단지 사실을 말했을 뿐입니다. 은서와 여시은 씨의 사이에 아무런 원한도 없는데 은서가 왜 그런 행동을 하겠습니까?”“아빠, 정말 제가 한 게 아니에요! 저 사람들은 같은 편이라서 일부러 저를 괴롭히려는 거예요!”여시은은 억울함을 참지 못하고 그녀의 아버지에게 도움을 청했다.여재훈은 눈물 글썽이는 딸을 바라보더니 온몸이 흐트러진 고은서를 향해 물었다.“고은서 씨, 사실대로 말해보세요. 방금 무슨 일이 있었는지.”고은서는 감정을 어느 정도 추스렸지만 이런 일을 당하면 당연히 난처할 수밖에 없었다. 그녀는 최대한 평온한 어조로 대답했다.“여 대표님, 제가 뭘 말해도 소용없을 겁니다. 시은이와 저는 각자 주장이 다르기 때문에 누구도 판단하기 어려울 겁니다.”고은서는 로비 주위를 둘러보며 말을 이었다.“여기 곳곳에 감시 카메라가 설치되어 있어요. 직원들을 시켜 감시 카메라를 확인해보시는 게 좋을 것 같아요. 그러면 진실도 드러나겠죠.”이 말을 듣자 여시은의 얼굴색이 확 변했다.고은서가 여시은보다 먼저 바닥에 넘어졌는데 감시 카메라의 확인까지 제안하다니!‘설마 은서가 이 시간대에 감시 카메라를 꺼뒀다는 걸 알고 있는 건 아니겠지?’“시은아, 너의 생각은 어때?”고은서는 고개를 들어 여시은에게 물었다.여시은은 분노를 꾹 참고는 여전히 억울하고 순진한 표정으로 대답했다.“좋아! 하지만 개업식 시간이 다가오고 있는데 감시 카메라는 확인하는 동안 내가 먼저 개업식을 진행하고 나중에 이 문제를 논의하는 게 어때?”“안 돼.”고은서의 작은 얼굴에는 단호한 표정이 담겨있었다.“이 사건은 반드시 바로 조사되어야 한다고 봐.”고은서는 다시 여재훈을 바라보며 말했다.“여 대표님, 폐를 끼쳐 죄송합니다. 제가 시은이 만큼 귀하지는 않지만 이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