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준 씨, 주인혁이 원래 이렇게 충동적으로 구는 사람이 아니거든요. 제가 추측하건대 다른 사람한테 모함당한 것 같아요.”송민준은 술을 한 모금 마시고는 덤덤한 표정으로 물었다.“은서 씨가 보건데는 주인혁 씨를 모함한 사람이 누구인 것 같나요?”고은서는 입술을 깨물고 고민하는가 싶더니 이내 답했다.“아마 저 때문일 거예요. 그래서 빨리 결백하다는 걸 증명해주고 싶어요.”송민준은 고은서의 뜻을 단번에 알아차렸다.“제가 친구한테 말해둘 테니까 너무 조급해하지 않아도 돼요.”그가 나긋하게 웃으면서 답했다.“오빠, 지금 도와주겠단 뜻이지?”송민아가 순간 흥분해 하며 물었다.그런 송민준은 그녀의 말을 무시한 채 비서한테 연락해 주인혁에 관한 일을 조사해보라고 지시를 내렸다.그리고 이내 시선을 고은서한테로 돌리면서 말했다.“은서 씨, 우리도 이만하면 이젠 친구 사이인데 나중에 또 도움이 필요하신 곳이 있으면 언제든지 찾아오세요. 딱히 도움이 될진 모르겠지만 그래도 같이 해결방법을 의논해 볼 수도 있잖아요.”“고마워요, 민준 씨.”고은서가 고개를 살짝 끄덕이면서 답했다.잠시 후, 고은서는 화장실에 가고 자리에는 송민아와 송민준만 남게 되었다.“취했어? 주량도 안 되면서 왜 억지로 마시는 거야?”송민준이 술잔을 흔들면서 송민아를 향해 말했다.그녀는 사실 예전부터 주량이 별로였는데 프로젝트를 이어감에 있어서 빠질 수 없는 게 술자리였다. 그래서 틈만 나면 주량을 단련하곤 했다.하지만 중요한 건 그녀의 주량이 아니었다.송민아는 송민준한테 다가가 물었다.“오빠, 은서 좋아하지?”송민준은 술을 한 모금 마시더니 그녀에게 되물었다.“왜 그렇게 생각하는 거야?”“그냥 은서한테 아주 인내심 있게 잘해주는 것 같아서. 전에는 이런 모습을 보인 적이 없었잖아. 내가 도와달라고 부탁해도 쉽게 들어주지 않았으면서.”“내가 다른 사람 부탁을 쉽게 들어주지 않는다는 걸 알면서 오늘은 왜 날 여기까지 부른 거야?”송민준이 또다시 되물었다.“자꾸 대답을
고은서는 고개를 돌리자마자 송민준과 시선이 마주쳤다.잘생긴 얼굴은 어두운 밤하늘 때문에 희미하게 보였다.고은서는 순간 그가 주인혁 일에 관해 묻는 건지 아니면 송민아를 보살핀 일에 관해 묻는 건지 짐작이 가지 않았다.“제 친구들도 이만큼 저를 잘 대해주니까요.”그녀가 나긋한 미소를 지어 보이며 답했다.술을 마신 탓인지 송민준의 말투가 여느 때보다 더 편하게 다가왔다. 그리고 말도 평소보다 더 많아진 것 같았다.“저도 은서 씨 친구에 속하나요?”그가 이런 물음을 제기할 거라곤 생각 못 했던 고은서는 순간 멈칫하다가 완곡하게 답했다.“제가 감사한 마음으로 대해야 하는 존재이죠.”송민준은 그녀가 아직 자신을 친구로 생각하지 않는다는 포인트를 단번에 잡아냈다.그는 웃으면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송민아는 술주사가 좋은 편이었다. 잠을 자는 것 외에는 아무런 소란도 피우지 않았다.반 시간 후, 차는 송민아의 집 앞에 멈춰 섰다.고은서는 어깨를 가볍게 두드리면서 그녀를 깨웠다.“민아야, 집 도착했어.”비몽사몽하게 눈을 뜬 송민아는 고은서를 보자마자 그녀의 팔을 끌어안고 애교부리기 시작했다.“은서야, 나 머리가 너무 어지러워. 나 부축해줘...”고은서도 술을 마시긴 했으나 적당하게 맥주 두 잔만 한 덕에 별로 취하지 않았다.그녀는 송민준과 함께 문어처럼 자신의 팔을 꼭 붙잡고 안 떨어지는 송민아를 부축해서 집까지 데려다주었다.송민준이 노크하자 도우미가 문을 열고 나타났다.그녀는 만취 상태인 송민아를 황급히 대신 부축하면서 자신이 잘 돌보겠다고 말했다.문이 닫히면서 복도는 순간 조용해졌다.“은서 씨, 수고했어요. 제가 집까지 데려다줄게요.”송민준이 예의 있게 말했다.“고맙지만 사양할게요. 저 혼자 택시 불러서 가면 돼요.”고은서는 말하면서 송민준과 함께 엘리베이터 쪽으로 걸어갔다.“은서 씨, 계속 저를 경계하는 것 같은데 혹시 시후 때문인가요?”송민준이 문뜩 입을 열었다.고은서는 또 한 번 멈칫했다.민시후는 전에 몇 번이고
고은서는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그러니까 민준 씨가 제가 민시후의 아이를 가졌다는 걸 알고 민아를 위해 그 도우미랑 손잡고 저를 해치려 했다는 거죠?”송민준은 고은서를 보면서 약간 씁쓸한 표정을 지었다.“저는 은서 씨를 데리고 직접 도우미를 만나고 또 백씨 집안 기업까지 도와 망가뜨린 거로 충분히 저의 성의를 표했다고 생각하는데요.”고은서는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날 유산하게 만든 게 자신이 꾸민 일이라고 백유미가 직접 인정했는데. 만약 진희숙이 송민준의 지시를 받은 거라면 송민준도 백유미랑 연관되어 있단 소린데 왜 날 도와 백씨 집안 기업을 망가뜨린 거지? 그리고 백유미가 이토록 처참한 지경에 이르기까지 왜 아무런 도움도 주지 않은 걸까?’띵.고은서는 엘리베이터 소리를 듣고서야 정신을 차리고 밖으로 걸어 나갔다.송민준은 아무 말도 없이 그녀의 뒤를 따라갔다.“은서 씨, 시간도 늦었는데 혼자 돌아가시기에는 위험할 것 같아요. 은서 씨한테 사고라도 생기면 민아가 분명히 저를 원망할 거예요. 그러니까 기사한테 집까지 모셔다드리라고 할게요.”송민준이 온화한 목소리로 말했다.“만약 저랑 같은 차에 타는 게 불편하다면 은서 씨가 먼저 가고 저는 따로 갈게요.”더 거절해 보았자 무례하게만 보일 것 같다는 생각이 든 고은서는 더는 사양하지 않았다.“그럼 집까지 부탁드릴게요.”송민준은 이내 고은서를 위해 뒷좌석 문을 열어주었다.그녀가 차에 오른 후 그는 눈치 있게 조수석에 올랐다.두 사람은 가는 길 내내 아무런 대화도 하지 않았다.라이트문에 도착한 후 고은서는 고맙다고 간단히 인사한 후 차에서 내렸다.“은서 씨.”송민준도 따라 차에서 내리면서 그녀에게 다가갔다.밤바람이 약간 차갑게 느껴졌다.고은서는 어리둥절한 눈길로 송민준을 바라보았다.“은서 씨, 제가 아무리 이익을 중요시하는 사업가라고는 하지만 옳고 그름을 가리지 않을 만큼 나쁜 사람은 아니에요. 민아가 은서 씨를 얼마나 좋아하는지 저도 잘 알고 있어요. 그리고 민아가 이렇게 우수한
고은서는 낮에 연락이 닿지 않던 곽승재를 본 순간 화가 치밀어 올랐다그녀는 당장이라도 달려가 그를 욕하고 싶었지만 다퉈 보았자 일만 더 시끄러워질 뿐, 게다가 이미 송민준이 도와주겠다고 약속한 이상 굳이 그와 모순을 일으키고 싶지 않았다.고은서는 이내 화를 억누르고 곽승재를 무시한 채 지나가려고 했다.그러나 일이 그녀가 소원하는 대로 될 리가 없었다.곽승재가 그녀의 손목을 붙잡으면서 차가운 목소리로 화난 듯한 말투로 캐물었다.“아침까지 그 연예인 일로 바삐 돌아 채더니 이 늦은 시간엔 왜 송민준과 함께 있는 거지?”그와 말을 섞고 싶지 않았던 고은서는 입을 꾹 다문 채 자신의 손을 빼내고 엘리베이터를 향해 성큼성큼 걸어갔다.그러나 엘리베이터 버튼을 누르기도 전에 곽승재가 그녀의 손을 다시 붙잡더니 계단 쪽으로 끌고 가 벽에 밀쳤다.“고은서, 송민준이랑 너무 가까이 지내지 말라고 내가 경고했지.”곽승재가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고은서는 그의 말에 답하는 대신 속박에서 벗어나려고 발버둥 쳤지만 곽승재의 힘이 하도 세서 아무런 소용이 없었다.그녀는 이내 이를 악물고 무릎을 들면서 곽승재를 공격하려 했다.그러나 곽승재는 그녀의 마음을 꿰뚫고 있는 마냥 뒤로 한발 물러서면서 그녀의 공격을 피했다.그리고 이내 그녀의 다리까지 속박하면서 꼼짝 못 하게 만들었다.“나쁜 자식, 얼른 이거 놔. 정말 머리에 문제라도 있는 거 아니야?”고은서가 끝내 참지 못하고 화냈다.“술까지 마셨어?”곽승재는 그녀의 입에서 술 냄새를 맡았다.그는 고은서의 턱을 치켜올리면서 분노 섞인 눈빛으로 그녀를 노려보았다.“언제부터 송민준이랑 술 마실 정도로 친해진 거야? 심지어 집까지 바래다주고 말이야.”짜증이 솟구친 고은서는 그를 째려보면서 반박했다.“당신이랑 무슨 상관인데? 곽승재, 대체 왜 또 이러는 거야? 왜 자꾸 내 일에 참견하는 건데?”“나한테 전화하고 문자 보낸 사람이 누군데?”곽승재가 차가운 목소리로 되물었다.고은서는 그의 말을 듣자마자 화가 머리
불편함을 느낀 고은서는 얼굴을 홱 돌리면서 말했다.“마재경이 아니면 당신이겠지. 그런데 두 사람 중에 누구든 무슨 차이가 있어? 찔리는 게 없다면 왜 내 전화는 안 받은 거야?”그러자 곽승재가 콧방귀를 뀌면서 답했다.“내가 왜 네 전화를 받아야 하는데? 네가 다른 남자를 위해 날 비난하는 걸 듣기 위해서?”‘그러니까 내가 무슨 일로 연락했는지 알고 있었단 말이야?’“듣기 싫으면서 왜 찾아온 거야?”고은서가 호통쳤다.“난...”똑똑.바로 이때 누군가가 문을 두드렸다.이어 마재경의 목소리가 들려왔다.“곽 대표님, 안에 계시는 거예요?”‘이 늦은 시간에 마재경이 왜 이곳에 있는 거지?’고은서는 순간 며칠 전에 이삿짐센터 직원들과 함께 있는 마재경의 모습이 떠올랐다.‘설마 집을 바꾸지 않고 끝내는 라이트문에 살기로 정했단 말이야? 그러니까 곽승재도 마재경을 만나러 온 거겠네.’고은서는 차가운 눈빛으로 곽승재를 노려보았다.곽승재도 그녀를 마주 보면서 입을 열었다.“무슨 일이야?”마재경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면서 답했다.“방금전에 오신다고 연락이 왔는데 아무리 기다려도 오지 않아서 밑에 내려가 보려고 했는데 비상계단 쪽에서 소리가 들려서요... 곽 대표님, 괜찮은 거 맞으시죠?”고은서는 그녀의 말을 듣자마자 콧방귀를 뀌면서 대신 답했다.“괜찮지 않은 것 같은데. 머리에 큰 문제가 생긴 것 같은데 대신 구급차 좀 불러주시지 그래요?”“고은서 씨가 왜 대표님이랑 같이 있는 거죠? 우연하게 만난 건가요?”마재경이 약간 의아해하며 물었다.‘내가 여기 있는 걸 모를 리가 없지. 아까 큰소리로 다툰 데다가 그 소리를 듣고 찾아왔다며.’“먼저 올라가 있어. 나중에 다시 얘기해.”마재경은 머뭇거리더니 조심스럽게 올라가서 기다릴게요라는 말을 하고 떠났다.그래도 그녀가 찾아온 덕분에 고은서는 조금이나마 진정이 되는 것 같았다.그녀는 차가운 표정으로 곽승재를 밀어냈다.“대체 뭐 하자는 거야? 해성에 아파트가 많고도 많은데 왜 하필 이곳이야?
곽승재의 의도를 알아차린 고은서는 짜증이 극치에 달했다.그녀는 곽승재가 캐묻는 틈을 타 입으로 그의 손목을 꽉 깨물었다.곽승재는 그녀의 예상치 못한 행동에 스읍하고 숨을 들이쉬면서 눈살을 찌푸렸다.고은서는 그를 방심한 사이에 힘껏 밀쳐내고는 문을 열고 엘리베이터 쪽으로 걸어갔다.마재경은 엘리베이터 앞에 서서 일부러 기다리는 흉내를 냈다.그녀는 고은서를 보자마자 질투 어린 눈빛으로 그녀를 잡아먹을 기세로 뚫어지라 바라보았다.고은서는 그녀를 무시한 채 엘리베이터에 올랐다.“고은서 씨, 대체 무슨 일인데 늦은 시간까지 곽 대표님이랑 함께 있는 거죠?”고은서가 엘리베이터에 들어선 찰나 뒤에서 마재경의 울분이 섞인 목소리가 들려왔다.그러나 고은서는 그녀의 말에 답하지 않고 닫힘 버튼을 눌렀다.바로 그때 마재경이 손으로 엘리베이터 문을 막으면서 앞으로 다가서며 나지막한 목소리로 고은서한테 경고를 건넸다.“곽 대표님이 아직 당신한테 미련이 남았다고 잘난 체 하는 것 같은데 감히 날 사과하게 만들어? 내가 그대로 갚아줄 거야.”마침 뒤에서 발걸음 소리가 들렸는데 어느새 곽승재가 엘리베이터 쪽으로 걸어오고 있었다.마재경은 이내 억울한 표정을 지으며 비굴하게 애원하는 척 연기하기 시작했다.“은서 씨, 제가 곽 대표님 곁에 있을 자격이 없다는 거 알고 있어요. 그런데 그저 옆에서 바라보게만 해주세요. 은서 씨 곁에는 훌륭한 남자들이 많잖아요. 곽 대표님을 저한테 양보하면 안 될까요?”그사이, 곽승재는 엘리베이터 앞에 멈춰 섰다.마재경의 말을 들어서인지 아니면 고은서가 그녀의 손목을 물어서인지 표정이 어두웠는데 기분이 그다지 좋아 보이지 않았다.마재경은 계속 억울하다는 듯한 눈빛으로 고은서를 바라보았다.고은서는 헛웃음을 치더니 이내 엘리베이터 안에서 나와 곽승재의 멱살을 잡고 그에게 입술을 맞추었다.마재경뿐만 아니라 곽승재도 깜짝 놀랐다.부드러운 입맞춤에 곽승재는 저도 모르게 그녀의 허리를 끌어안으며 더 진한 키스를 하려고 했다.그러나 고은서가
생각할수록 화가 난 고은서는 참지 못하고 발로 엘리베이터 문을 찼다.집으로 들어서면서까지도 씩씩거리는 모습 그대로였다.이미숙은 약간 머뭇거리면서 그녀를 힐끔힐끔 보고 있었다.오랫동안 함께 생활해 온 고은서는 그녀가 할 말이 있다는 걸 단숨에 알아차렸다.“아줌마, 할 말 있으시면 그냥 하세요.”이미숙은 한참 동안 더 머뭇거리다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해 질 무렵에 산책하러 나가면서 맞은편 집에 한 여자가 입주했던데...”“곽승재랑 스캔들이 난 여자를 닮았던가요?”고은서가 자연스럽게 그녀의 말을 대신 이어갔다.이미숙도 얼마 전에 곽승재의 스캔들에 관한 기사를 본 적이 있었다.그녀는 속으로 마재경을 곽승재를 유혹하는 염치 없는 여자라고 욕하기까지 했었다.그러나 그 여자가 이리도 대담하게 고은서의 맞은 켠 집에 입주할 줄은 생각도 못 했다.‘어떻게 사람이 이토록 파렴치하게 굴 수가 있지?’“아마 은서 씨가 여기에 사는 줄 모르고 우연하게 입주하게 된 걸 거예요.”이미숙은 겉으로는 자신의 진심을 드러내지 않고 고은서를 애써 위안하려 했다.“그 사람들이 어디에 살든 저랑 상관없어요.”고은서가 콧방귀를 뀌면서 말했다.‘곽승재가 틀린 말을 한 건 아니야. 아무튼 이젠 감정도 없는데 어디에 살든 나랑 무슨 상관이야. 나도 굳이 쓸데없는 사람 때문에 힘들게 이사할 필요가 없지.’이미숙은 그녀의 말을 듣자마자 한숨을 내쉬었다.‘도련님이랑 사모님이 재혼하길 바랐는데. 어렵겠네.’...송민준의 일 처리 속도는 여전하게 빨랐다.고은서가 이튿날 아침에 일어나자마자 확인해 보았는데 주인혁에 관한 기사가 점차 가라앉고 있었다.경찰 측에서도 연관된 일에 관해 아직 조사하고 있지만 새로운 목격자의 증언에 따르면 주인혁이 먼저 시비를 건 측은 아니라고 입장을 밝혔다.여론의 방향이 이내 뒤바뀌게 되었다.특히 주인혁의 팬들은 누명을 벗은 사람 마냥 그가 얼마나 훌륭하고 착한 사람인지 이리저리 알리기 위해 날뛰었다.또다른 소식에 따르면 주인혁과 시비가
고은서는 이지호가 자신이 주인혁 일로 곽승재를 찾아간 적이 있는 슬쩍 떠보는 거라는 걸 이내 알아차렸다.또한 일이 곧 잠잠해질 테니 더는 주인혁이 곽승재랑 엮이지 않았으면 하는 자신의 의견을 전달하는 것과 마찬가지였다.‘매니저도 주인혁 일이 타사 연예인이 저지른 일이라는 게 신임이 가지 않는 모양이네. 아마 이번 일을 해결함에 있어서 희생양이 필요했던 거겠지.’고은서는 직설적으로 대답하지 않고 주인혁처럼 정직한 사람이 굳이 이런 일로 누군가를 무서워할 필요가 없다고만 말했다.그녀는 전화를 끊은 후 소파에 앉은 채 생각에 빠졌다.‘곽승재가 마재경 대신 화풀이하기 위해 꾸민 일이라고만 생각했는데 어젯밤에 화내는 걸 보아서는 곽승재가 아닌 것 같은데. 게다가 굳이 자신이 한 일을 부인할 사람이 아니란 말이지. 그럼 대체 누가 주인혁을 모함한 거지? 마재경인가?’고은서는 한참 생각하다가 송민준한테 감사 인사를 하려고 전화를 걸었다.“저는 별로 도운 게 없어요. 주인혁 씨가 운이 좋아서 정의감 있는 사람을 만난 덕분이에요.”‘송민준이 도운 게 아니라고? 그럼 일이 이렇게 쉽게 풀릴 리가 없는데. 때마침 하루 저녁에 목격자가 나타났다는 게 말이 돼? 송민준이 아니면 대체 누가 도와주고 있는 거지?’“어찌 됐든 고마워요. 주인혁이 나오면 같이 밥이라도 한 끼 먹어요.”고은서가 진심 어린 말투로 말했다.“그럼 기다리고 있을게요.”송민준이 허허 웃으면서 답했다.고은서가 세수하고 이미숙이 준비한 아침을 먹고 있을 때 마침 문 여는 소리가 들리면서 장 보러 나갔단 이미숙이 들어왔다.“은서 씨, 방금 장보고 돌아오면서 들었는데 아파트 관리원 여러 명이 잘렸대요. 듣기로는 우리 단지에 사는 인플루언서가 어제 짐을 가지고 나갈 때 뒤에서 수군거렸다면서 고소당했다나 뭐라나. 혹시 우리 맞은편 집에 사는 그 사람 아니에요?”이미숙이 추측하기 시작했다.고은서는 그녀의 말을 듣자마자 눈살을 찌푸렸다.‘마재경이라면 한밤중에 짐을 들고 나갈 리가 없는데. 설마 곽승
얼마 지나지 않아 운전기사가 차를 라이트문 아파트 앞에 세웠다.고은서와 곽승재는 위층으로 올라갔다. 고은서는 샤워하기 위해 자신의 방으로 직행했고 곽승재는 거실에 남았다.샤워를 마치고 나온 고은서는 의외의 광경을 목격했다. 곽승재가 거실 소파에 앉아 있었고 테이블 위에는 김이 모락모락 나는 차 한 잔이 놓여 있었다.“왜 또 왔어? 할 말 있어?”고은서가 물었다.곽승재는 태연하게 대답했다.“논의할 게 있어서. 그전에 이 콜라 생강차부터 마셔. 아주머니께서 특별히 준비하신 거야.”“사모님, 콜라 생강차는 감기 예방에도 효과적이거든요. 어서 드세요!”이미숙이 차를 가져오며 말했다.고은서는 감기에 걸릴까 봐 걱정하고 있던 참이었다. 그녀는 잔을 들어 올리더니 이상한 듯 물었다.“아줌마, 제가 방금 들어온 걸 보지도 못하셨을 텐데 어떻게 제가 감기 걸릴 줄 아시고 미리 차를 준비하셨어요?”이미숙의 눈가에는 잠시 당황한 기색이 스쳤다.곽승재가 자연스럽게 말을 이었다.“내가 알려줬어. 일단 마셔.”고은서는 고개를 숙여 생강차를 내려다 볼뿐 이미숙의 표정 변화를 주의 깊게 보지 못했다.물론 곽승재의 눈에 비친 기대감도 보지 못했다.생강차의 냄새를 맡아보니 생강 향이 꽤 진했다.고은서는 생강차를 조심스럽게 한 모금 마셨다. 콜라의 단맛과 생강의 톡 쏘는 맛이 어우러져 생각보다 맛이 나쁘지 않았다.“맛이 어때요?”이미숙이 물었다.“좋네요. 그런데 오늘은 생강을 좀 많이 넣으신 것 같네요. 예전에 만드신 것보다 더 매운데요.”이미숙은 잠시 망설이다가 급히 대답했다.“생강 양을 조절하지 못했네요. 주의할게요.”고은서는 더는 따지지 않고 다시 마시려던 참이었는데 곽승재가 말을 건넸다.“맛이 별로면 안 마셔도 돼.”고은서는 그를 흘겨보았다.“누가 맛없다고 했어? 아줌마가 정성스럽게 준비해주신 건데 끝까지 마셔야지.”“사모님, 도련님과 얘기 나누세요. 저는 할 일이 남아서 먼저 가보겠습니다.”이미숙은 두 사람의 언쟁을 피하려는 듯 급히 자
고은서는 고개를 끄덕이며 곽승재에게 사실대로 털어놓았다. 그녀는 친구에게 부탁해 적절한 시기에 감시 카메라를 끊어놓도록 준비해두었다.하지만 여시은이 먼저 참지 못하고 로비의 카메라를 꺼버린 것이다.고은서가 감히 감시 카메라의 확인을 제안한 데는 이유가 있었다. 그녀는 자신만의 준비를 했을 뿐만 아니라 여시은 역시 감시 카메라를 조작할 것이라는 점까지 예측했다.“만약 여시은이 참고 끝까지 널 찾지 않았다면 어떻게 할 작정이었어?”곽승재가 물었다.고은서는 피식 웃으며 대답했다.“개업식이 끝난 후 대형 스크린에 공개할 계획이었어.”곽승재가 눈썹을 추켜세웠다.“네가 앞서 백스테이지 주위를 둘러본 것도 동영상을 공개할 준비를 했던 거야?”고은서는 고개를 끄덕였다.“여시은이 일부러 나를 물에 빠뜨리고 향수로 나를 함정에 빠뜨렸을 뿐만 아니라 쿠아까지 학대했어. 내가 당연히 가만히 있을 수 없지! 그리고 시은이가 인내심을 가졌다고 해도 난 개업식이 끝날 때까지 기다렸을 거야. 하지만 결과적으로 그러지 못했지. 시은이는 결국 참지 못하고 테라스에서 쿠아의 죽음을 언급하며 나를 자극했고 다시 같은 수법을 쓸 참이었던 거지. 나는 그저 시은이가 파려던 함정을 그대로 돌려준 것뿐이야.”곽승재는 고은서가 준비를 해왔을 거라 예상했지만 이런 고육지계를 공개적인 자리에서 펼칠 줄은 몰랐다.게다가 그녀의 연기는 너무나도 실감 났다.고은서가 바닥에 넘어져 흐트러진 모습을 보는 순간 곽승재는 정말로 여시은의 소행일 것으로 생각할 정도였다.고은서는 곽승재의 생각을 읽었는지 피식 웃으며 입을 열었다.“가여운 척 한 거 아니야. 백유미와 여시은이라는 고수들 덕분에 나도 한 수 배웠을 뿐이지.”백유미의 과거 행동을 떠올린 곽승재는 가슴을 죄는 듯한 자책감이 밀려왔다.곽승재는 진지하게 사과했다.“은서야, 미안해.”무심코 흘린 말에 곽승재가 사과하는 모습을 본 고은서는 잠시 당황했다.“사과할 필요는 없어. 당신도 백유미 씨에게 속았을 뿐이잖아. 어쨌든 ‘목숨의 은인'
“시은아!”영상 속 장면에 충격을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여재훈은 걱정된 목소리로 딸을 불렀다. 그리고 뒤이어 멀리 있는 부하들에게 명령했다.“어서 따라가서 시은이를 보호해! 무슨 일이라도 생기게 해서는 안 돼!”부하들이 여시은의 뒤를 쫓아 나간 뒤 여재훈은 스크린을 힐끗 바라보더니 진지한 표정으로 고은서에게 사과했다.“제가 딸을 제대로 가르치지 못했습니다. 이 일은 제가 시은에게 직접 확인한 뒤 여은서 씨께 해명해 드리겠습니다.”고은서는 목적을 달성했으니 더는 그곳에 머물 생각이 없었다. 그녀는 옷을 갈아입어야 한다는 이유로 자리를 떠나려 했다.“여 대표님, 제가 은서 씨를 모셔다드리겠습니다.”곽승재가 말했다.송민준 역시 함께 가겠다고 전했다.여재훈은 당연히 거절하지 않았다. 개업식에서 이런 소동을 일으킨 이상 누구라도 축하할 마음이 없을 터였다.고은서 일행이 떠나자 여재훈은 참석자들에게 직접 사과하며 홍보팀에 현장 수습을 지시했다.호텔 앞 광장에서 곽승재와 송민준의 운전기사들이 각각 차를 대기시켜 놓고 기다리고 있었다.송민준은 고은서를 배웅하려는 태도를 보였으나 곽승재가 고은서를 부축하면서 예의를 갖추어 말했다.“번거로울 텐데 제가 은서 씨를 모시고 가겠습니다.”송민준은 자기가 고은서의 파트너로 왔기 때문에 그녀를 집까지 모셔다드리는 것이 당연하다고 설득했다.곽승재는 송민준의 이런 친근한 태도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는 억지로 고은서를 안아 들어 자신의 차에 태우고 싶었지만 고은서가 화를 낼 것을 잘 알고 있었다.그는 입을 오므리다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선택권을 고은서에게 넘겼다.고은서는 당연히 송민준과 함께 갈 생각이 없었다.“오빠, 오늘은 고마웠어. 오늘 승재 오빠의 차를 타고 갈게. 어차피 길도 같으니까. 내일 다시 연락할게.”고은서의 반응에 송민준은 고개를 끄덕이는 수밖에 없었다.“알겠어. 집에 도착하면 연락해.”곽승재는 고은서를 차에 태운 뒤 트렁크에서 깨끗한 외투를 꺼냈다.차 안에 앉자 곽승재는 고은서의 어깨
여시은은 고은서의 말에 더욱 어리둥절해졌다.‘갑자기 왜 또 농장 일을 다시 꺼내는 거지?’여시은은 속으로 불길한 예감이 들기 시작했다. 그녀는 생각할수록 점점 더 억울하고 분했다.“은서야, 왜 나를 이렇게 모함하는 거야? 내가 언제 너를 물에 빠뜨렸다고 그래? 네가 나를 밀었잖아! 내가 우리 아빠를 생각해서 참고 넘어갔는데 이제 와서 또 나에게 뒤집어씌우다니!”여시은은 여재훈을 바라보며 눈시울을 붉혔다.“아빠, 저는 항상 사람을 보는 안목이 없는 것 같아요... 은서가 이런 사람일 줄은 정말 몰랐어요... 너무 속상해요...”여시은의 슬프고 안쓰러운 모습에 여재훈은 점차 진지해졌고 고은서를 보며 물었다.“고은서 씨, 시은이가 은서 씨를 물에 빠뜨렸다는 증거라도 있어요?”“물론 있죠.”고은서는 이미 곽승재의 부축을 받아 일어난 상태였다. 그녀는 휴대폰을 꺼내 송민준이 보낸 영상을 찾았다.현장에 있던 사람들 모두 다가가지는 않았지만 적당한 거리를 유지하며 상황을 지켜보고 있었다. 그러다가 고은서가 진짜 증거를 가지고 있다는 소식을 듣더니 그들의 호기심을 더욱 자극했다.이때 곽승재가 제안했다.“여 대표님, 모두가 보는 앞에서 영상을 공개하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모두가 직접 보면 진실이 명백해질 테니 나중에 왜곡되는 일도 없을 겁니다. 어떻게 생각하세요?”여시은은 고은서가 미리 준비한 듯한 태도를 보이자 불안감이 더욱 커졌다.고은서가 이렇게 계획적으로 행동할 수 있었던 것은 어쩌면 증거를 손에 넣었을지도 모른다.여시은이 고은서를 과소평가했던 것이다.여시은은 붉어진 눈으로 소리쳤다.“도대체 무슨 짓을 하려는 거에요! 이미 개업식 시간이 다 됐는데 계속 이러쿵저러쿵하며 일을 벌이다니! 고의로 우리 개업식을 방해하는 거 아니에요?”“아빠, 오늘 이분들은 분명히 좋은 의도로 온 게 아닌 것 같아요. 그냥 쫓아내는 게 낫겠어요!”“여시은 씨, 말씀이 참 지나치군요. 우리는 단지 진실을 알고 싶을 뿐입니다.”송민준이 여재훈보다 먼저 입을 열
구경하는 사람들도 송민준을 쳐다보았다. 그들은 도대체 왜 그의 여자 파트너가 곽승재의 품에 안겨 있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송민준은 사람들의 의문스러운 시선을 받고 있었지만 태연하게 입을 열었다.“여시은 씨, 저는 단지 사실을 말했을 뿐입니다. 은서와 여시은 씨의 사이에 아무런 원한도 없는데 은서가 왜 그런 행동을 하겠습니까?”“아빠, 정말 제가 한 게 아니에요! 저 사람들은 같은 편이라서 일부러 저를 괴롭히려는 거예요!”여시은은 억울함을 참지 못하고 그녀의 아버지에게 도움을 청했다.여재훈은 눈물 글썽이는 딸을 바라보더니 온몸이 흐트러진 고은서를 향해 물었다.“고은서 씨, 사실대로 말해보세요. 방금 무슨 일이 있었는지.”고은서는 감정을 어느 정도 추스렸지만 이런 일을 당하면 당연히 난처할 수밖에 없었다. 그녀는 최대한 평온한 어조로 대답했다.“여 대표님, 제가 뭘 말해도 소용없을 겁니다. 시은이와 저는 각자 주장이 다르기 때문에 누구도 판단하기 어려울 겁니다.”고은서는 로비 주위를 둘러보며 말을 이었다.“여기 곳곳에 감시 카메라가 설치되어 있어요. 직원들을 시켜 감시 카메라를 확인해보시는 게 좋을 것 같아요. 그러면 진실도 드러나겠죠.”이 말을 듣자 여시은의 얼굴색이 확 변했다.고은서가 여시은보다 먼저 바닥에 넘어졌는데 감시 카메라의 확인까지 제안하다니!‘설마 은서가 이 시간대에 감시 카메라를 꺼뒀다는 걸 알고 있는 건 아니겠지?’“시은아, 너의 생각은 어때?”고은서는 고개를 들어 여시은에게 물었다.여시은은 분노를 꾹 참고는 여전히 억울하고 순진한 표정으로 대답했다.“좋아! 하지만 개업식 시간이 다가오고 있는데 감시 카메라는 확인하는 동안 내가 먼저 개업식을 진행하고 나중에 이 문제를 논의하는 게 어때?”“안 돼.”고은서의 작은 얼굴에는 단호한 표정이 담겨있었다.“이 사건은 반드시 바로 조사되어야 한다고 봐.”고은서는 다시 여재훈을 바라보며 말했다.“여 대표님, 폐를 끼쳐 죄송합니다. 제가 시은이 만큼 귀하지는 않지만 이런
고은서는 얼굴과 몸이 온통 와인으로 범벅이 된 채로 바닥에 주저앉았다.와인은 그녀의 얼굴 결을 따라 드레스 위로 떨어졌고 머리카락에도 많이 튀었다. 그리고 젖은 앞머리 몇 가닥이 이마에 붙어 고은서를 더욱 가여워 보이게 했다.고은서는 놀란 듯 눈동자에 공포가 가득 차 있었다.“괜찮아요?”그 순간 곽승재와 송민준이 동시에 고은서를 향해 급히 다가왔다.곽승재가 송민준보다 한발 앞서 도착해 고은서를 부축하며 다급하게 물었다.고은서는 몸을 살짝 떨면서 두려움을 겨우 참으며 고개를 저었다.“네, 괜찮아요.”누군가 물티슈를 건네자 곽승재는 서둘러 고은서의 얼굴을 닦아주었다.여시은은 텅 빈 와인 잔을 들고 테라스에서 고은서와 멀지 않은 곳에 떡하니 서 있었다.모든 일이 순식간에 벌어졌다.평소 감정을 잘 숨기던 여시은도 고은서의 이런 행동에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다.그사이 로비의 음악은 멈췄고 상황을 보려는 사람들이 점점 모여들었다.“은서야, 괜찮아? 어떻게 넘어진 거야?”여시은은 금세 정신을 차리고 고은서의 앞에 다가가며 걱정 가득한 표정으로 물었다.하지만 고은서는 여시은을 보더니 놀란 기색이 역력했고 몸까지 움츠리며 뒤로 물러났다.곽승재는 고은서를 안정시키듯 감싸며 여시은을 향해 차가운 시선을 던졌다.“여시은 씨, 대체 무슨 일이죠? 방금 무슨 일이 있었던 겁니까?”송민준이 곽승재보다 먼저 여시은에게 질문하고는 자신의 재킷을 벗어 고은서에게 걸쳐주려 했다.그러나 가까이 다가가기도 전에 곽승재가 재킷을 받아 고은서에게 걸쳐주었다.“시은아!”소식을 접한 여재훈이 급히 달려왔다.“아빠!”여재훈을 본 여시은은 든든한 빽이라도 생긴 듯 바로 울음을 터뜨렸다.“으윽...”여재훈이 여시은을 달래기도 전에 고은서가 타이밍 좋게 아픔을 참는 소리를 냈다.“왜요? 아파요?”고은서에게 재킷을 걸쳐주던 곽승재가 긴장한 목소리로 물었다.고은서는 말없이 고개를 가로 저었지만 다른 한 손으로 팔꿈치를 문지르는 동작을 했다.곽승재가 고은서의 팔을 살펴
이런 수법은 백유미도 쓴 적이 있었다.안타깝게도 여시은은 백유미처럼 곽승재에게 은혜를 베푼 적이 없기 때문에 이 수작은 곽승재에게 통하지 않았다.아마 고은서의 시선이 너무 노골적이었던 탓인지 여시은의 시선이 마침 고은서에게로 향했다.고은서는 입가의 비웃음을 다 감추지도 못한 채 여시은과 눈을 마주쳤다.여시은의 눈빛이 차가워졌지만 고은서는 아무렇지도 않은 듯 손에 들고 있던 주스를 한 모금 마시더니 여시은에게 잔을 들어 인사를 건넸다. 그리고는 기분 좋게 앞쪽 테라스로 걸어갔다.고은서는 여시은이 이런 식으로 도발을 당한 적이 없었기에 참지 못하고 따라올 것으로 생각했다.역시나 고은서가 테라스에 도착지 얼마 되지 않아 뒤에서 여시은의 목소리를 들려왔다.“은서야, 왜 혼자 여기서 술을 마시고 있어? 송 대표님은?”여시은은 손에 와인 잔을 들고 있었고 목소리는 여전히 달콤했다.고은서는 잔을 내려놓으며 씨익 웃으며 말했다.“여시은 씨, 매일 이렇게 연기하느라 피곤하지 않으세요? 아니면 제가 여시은 씨처럼 건망증이 심한 줄 아세요?”여시은은 고은서가 이런 태도를 보일 줄 몰랐는지 환했던 얼굴이 순간 굳어졌다.“은서야, 지난번에 아버지께서 우리 둘 사람을 불러 화해시켜줬잖아. 왜 아직도 화를 내고 있어?”여시은은 무언가 떠올랐는지 갑자기 슬픈 어조로 계속해서 말했다.“은서야, 너에게 말하지 못한 게 있는데 쿠아가 사고를 당해서 이미 하늘나라로 갔어.”고은서는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쿠아가 죽었다고?’여시은의 목소리는 점점 낮아졌다.“쿠아가 연못에 빠져 사고를 당했어. 연못에 금붕어들이 많이 있었는데 쿠아가가 놀면서 잡으려다가 빠진 모양이야. 내가 발견했을 때는 쿠아가 이미 물 위에 떠 있는 상태였어. 내가 직접 건져 올렸지만 쿠아의 몸이 이미 굳어버린 거 있지. 눈도 뜨인 채로 털은 전부 젖어서 몸에 붙어 있었어. 정말 안됐지...”고은서는 알고 있었다. 여시은이 일부러 이 사실을 그녀에게 알려주었다는 것을.그리고 쿠아가 물고기를 잡다가
곽승재는 현재 판주 투자은행에 있지만 감히 그를 얕보는 사람은 없었다.그는 곽씨 가문의 장손이자 곽씨 그룹의 유일한 후계자였기 때문이다. 판주 투자은행에 간 것도 일종의 시련으로 여겨질 뿐이다.앞으로의 곽씨 그룹은 여전히 곽승재가 이어받게 된다는 것도 모두가 뻔히 알고 있는 사실이다. 사람들 속에 둘러싸인 곽승재는 평소처럼 검은색의 양복을 차려입고 있었다. 키가 크고 훤칠한 체구에 빼어난 외모는 마치 이곳이 그의 무대가 된 듯한 느낌을 주었다.여시은과 여재훈 역시 그에게 다가가 친근하고 허물없는 표정으로 이야기를 나누었다.주변에서는 곧장 수군거리는 소리가 퍼져 나왔다.“곽씨 가문과 여씨 가문이 혹시 좋은 일이라도 생기는 거 아니에요? 저렇게 친밀하게 대화하는 걸 보면 마치 한 가족 같잖아요.”“아직도 모르셨어요? 여씨 가문이 이번 투자은행의 개업을 순조롭게 하게 된 것도 곽 대표님이 뛰어다니며 큰 도움을 줬다잖아요!”“얼마 전까지 곽 대표님이 연예인과 스캔들 난 거 아니었어? 요즘은 소식이 뚝 끊겼던데... 아마도 정략결혼 얘기가 오가면서 그런 여자들은 정리한 모양이네.”“솔직히 곽 대표님과 여시은 씨는 그야말로 천생연분이죠. 진짜 결혼하면 주가가 어디까지 치솟을지 가늠이 안 가네요!”“그러게 말이야. 얼른 주식 좀 사둬야겠다...”주변의 이야기를 들으며 고은서는 담담한 미소만 지었다.여시은이 곽승재와 결혼할 마음이 굉장히 확고한 모양이었다. 곽승재에게만 신경 쓰는 게 아니라 여론도 자신이 원하는 방향으로 이끌고 있었으니까.하지만 고은서는 그런 것에 한 치도 관심이 없었다. 오늘은 따로 할 일이 있었다.KK에게 전화를 걸어 모든 준비가 완료되었음을 확인한 고은서는 홀로 로비 안으로 들어가 자신을 찾아온 몇몇 동업자들과 함께 대화를 나누었다.곽승재 역시 고은서를 발견했지만 이런 자리에서 두 사람은 묵묵히 고개만 끄덕이며 인사만 했다.하지만 그 모습을 여시은이 눈치채고 있었다는 사실, 그리고 그녀의 아름다운 얼굴에 살짝 어두운 그림자가
여시은은 몇몇 귀부인들에게 고은서를 소개했다.고은서도 예의 바르게 그녀들에게 인사를 나눴다.“시은아, 이분이 바로 네가 말했던 요즘 사업을 크게 성공시키고 관청에서 상까지 받은 그 친구야?”화려한 옷을 입은 한 귀부인이 물었다.“네, 언니. 은서는 정말 뛰어난 사람이라 제가 본받을 만한 점이 많아요. 우리 회사도 은서 회사처럼 잘 운영될 수만 있다면 너무 만족할 것 같아요!”여시은은 과장된 어조로 대답했다.“고은서 씨가 뛰어난지는 잘 모르겠지만 얼굴은 참 예쁘네.”이혜화로 불리는 사람이 이렇게 평가했다.“요즘 젊은이들은 정말 대단한 것 같다니까. 자기 장점을 잘 파악하고 이용하다니! 우리 세대는 따라갈 수 없는 것 같아.”다른 한 귀부인이 감탄했다.고은서는 눈앞의 여자들의 말하고 있는 의도를 못 알아들을 리가 없었다. 그녀의 성과가 얼굴 덕분이라는 얘기였다.고은서는 미소를 지으며 말을 이었다.“언니들이 이루신 지위와 성과에 비하면 제가 이 얼굴로 얻은 작은 성과는 비교도 안 되죠. 앞으로는 미모와 실력을 겸비한 언니들에게 많이 배워야겠어요.”고은서의 자기 비하와 아첨이 섞인 말을 들은 이혜화 일행은 당황한 표정을 지었다.이때 여시은이 달콤하게 웃으며 말했다.“언니들, 은서가 정말 대단하지 않아요? 말재주도 좋고! 제가 이렇게 훌륭한 분을 언니들에게 소개해 드리길 잘했죠?”고은서도 웃으며 말을 이었다.“제 생각에 더 대단한 분은 시은인 것 같아요. 어떤 사람들은 끊임없는 노력과 투쟁으로 원하는 것을 얻어야 하지만 시은은 태어날 때부터 이미 성공한 삶을 살고 있잖아요. 예를 들어 제가 투자은행에서 오래 일하면서 크고 작은 만찬회도 많이 참석했지만 언니분들과 같은 귀한 분들을 만날 기회가 한 번도 없었어요. 그런데 오늘 시은의 개업식에서 이렇게 많은 언니를 한자리에 모이게 하다니 시은의 인맥이 얼마나 넓은지 알 수 있는걸요.”고은서는 살짝 한숨을 쉬며 진심인지 아닌지 모를 어조로 다시 입을 열었다.“그래서 시은이가 저를 부러워한다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