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hare

제978화

Author: 류한나
생각할수록 화가 난 고은서는 참지 못하고 발로 엘리베이터 문을 찼다.

집으로 들어서면서까지도 씩씩거리는 모습 그대로였다.

이미숙은 약간 머뭇거리면서 그녀를 힐끔힐끔 보고 있었다.

오랫동안 함께 생활해 온 고은서는 그녀가 할 말이 있다는 걸 단숨에 알아차렸다.

“아줌마, 할 말 있으시면 그냥 하세요.”

이미숙은 한참 동안 더 머뭇거리다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해 질 무렵에 산책하러 나가면서 맞은편 집에 한 여자가 입주했던데...”

“곽승재랑 스캔들이 난 여자를 닮았던가요?”

고은서가 자연스럽게 그녀의 말을 대신 이어갔다.

이미숙도 얼마 전에 곽승재의 스캔들에 관한 기사를 본 적이 있었다.

그녀는 속으로 마재경을 곽승재를 유혹하는 염치 없는 여자라고 욕하기까지 했었다.

그러나 그 여자가 이리도 대담하게 고은서의 맞은 켠 집에 입주할 줄은 생각도 못 했다.

‘어떻게 사람이 이토록 파렴치하게 굴 수가 있지?’

“아마 은서 씨가 여기에 사는 줄 모르고 우연하게 입주하게 된 걸 거예요.”

이미숙은 겉으로는 자신의 진심을 드러내지 않고 고은서를 애써 위안하려 했다.

“그 사람들이 어디에 살든 저랑 상관없어요.”

고은서가 콧방귀를 뀌면서 말했다.

‘곽승재가 틀린 말을 한 건 아니야. 아무튼 이젠 감정도 없는데 어디에 살든 나랑 무슨 상관이야. 나도 굳이 쓸데없는 사람 때문에 힘들게 이사할 필요가 없지.’

이미숙은 그녀의 말을 듣자마자 한숨을 내쉬었다.

‘도련님이랑 사모님이 재혼하길 바랐는데. 어렵겠네.’

...

송민준의 일 처리 속도는 여전하게 빨랐다.

고은서가 이튿날 아침에 일어나자마자 확인해 보았는데 주인혁에 관한 기사가 점차 가라앉고 있었다.

경찰 측에서도 연관된 일에 관해 아직 조사하고 있지만 새로운 목격자의 증언에 따르면 주인혁이 먼저 시비를 건 측은 아니라고 입장을 밝혔다.

여론의 방향이 이내 뒤바뀌게 되었다.

특히 주인혁의 팬들은 누명을 벗은 사람 마냥 그가 얼마나 훌륭하고 착한 사람인지 이리저리 알리기 위해 날뛰었다.

또다른 소식에 따르면 주인혁과 시비가
Continue to read this book for free
Scan code to download App
Locked Chapter

Related chapters

  • 어게인, 비긴   제979화

    고은서는 이지호가 자신이 주인혁 일로 곽승재를 찾아간 적이 있는 슬쩍 떠보는 거라는 걸 이내 알아차렸다.또한 일이 곧 잠잠해질 테니 더는 주인혁이 곽승재랑 엮이지 않았으면 하는 자신의 의견을 전달하는 것과 마찬가지였다.‘매니저도 주인혁 일이 타사 연예인이 저지른 일이라는 게 신임이 가지 않는 모양이네. 아마 이번 일을 해결함에 있어서 희생양이 필요했던 거겠지.’고은서는 직설적으로 대답하지 않고 주인혁처럼 정직한 사람이 굳이 이런 일로 누군가를 무서워할 필요가 없다고만 말했다.그녀는 전화를 끊은 후 소파에 앉은 채 생각에 빠졌다.‘곽승재가 마재경 대신 화풀이하기 위해 꾸민 일이라고만 생각했는데 어젯밤에 화내는 걸 보아서는 곽승재가 아닌 것 같은데. 게다가 굳이 자신이 한 일을 부인할 사람이 아니란 말이지. 그럼 대체 누가 주인혁을 모함한 거지? 마재경인가?’고은서는 한참 생각하다가 송민준한테 감사 인사를 하려고 전화를 걸었다.“저는 별로 도운 게 없어요. 주인혁 씨가 운이 좋아서 정의감 있는 사람을 만난 덕분이에요.”‘송민준이 도운 게 아니라고? 그럼 일이 이렇게 쉽게 풀릴 리가 없는데. 때마침 하루 저녁에 목격자가 나타났다는 게 말이 돼? 송민준이 아니면 대체 누가 도와주고 있는 거지?’“어찌 됐든 고마워요. 주인혁이 나오면 같이 밥이라도 한 끼 먹어요.”고은서가 진심 어린 말투로 말했다.“그럼 기다리고 있을게요.”송민준이 허허 웃으면서 답했다.고은서가 세수하고 이미숙이 준비한 아침을 먹고 있을 때 마침 문 여는 소리가 들리면서 장 보러 나갔단 이미숙이 들어왔다.“은서 씨, 방금 장보고 돌아오면서 들었는데 아파트 관리원 여러 명이 잘렸대요. 듣기로는 우리 단지에 사는 인플루언서가 어제 짐을 가지고 나갈 때 뒤에서 수군거렸다면서 고소당했다나 뭐라나. 혹시 우리 맞은편 집에 사는 그 사람 아니에요?”이미숙이 추측하기 시작했다.고은서는 그녀의 말을 듣자마자 눈살을 찌푸렸다.‘마재경이라면 한밤중에 짐을 들고 나갈 리가 없는데. 설마 곽승

  • 어게인, 비긴   제980화

    번화로운 도시와 달리 농장은 아주 생기가 흘러넘쳤다. 꽃도 있고 풀도 있고 연못도 있었는데 마음 편히 쉴 수 있는 곳으로 적합했다.고은서와 송민아는 각각 자기 차를 몰고 왔는데 주차하고 정원으로 들어가자마자 미리 도착해 있는 주인혁이 눈에 들어왔다.흰색 티셔츠와 청바지 차림을 한 그는 과일나무 아래서 무언갈 보고 있었는데 따뜻한 햇살이 그를 비추면서 마치 청춘 만화 속 남자주인공과 같은 느낌을 주었다.“연예인은 확실히 다른가 봐. 엄청 평범한 옷차림임에도 불구하고 엄청 멋있어 보이잖아.”송민아가 감탄했다.고은서는 그녀를 힐끔 보면서 말했다.“보기와 다르게 덕후의 잠재력이 깃들어 있는 것 같은데.”“덕후는 무슨. 그냥 간단하게 감탄해 본 것뿐이거든.”송민아가 콧방귀를 뀌면서 반박했다.바로 그때, 인기척을 느낀 주인혁이 두 사람을 향해 다가왔다.“누나!”그는 고은서한테 인사하고 이내 시선을 송민아한테로 돌렸다.“송민아 씨시죠?”“네. 맞아요.”송민아는 손을 내밀면서 그와 악수하려 했다.주인혁도 예의 바르게 웃으면서 그녀와 악수했다.“송 대표님은?”“오빠는 할 일이 있어서 나중에 시간 되는대로 올 거예요. 상관하지 않으셔도 돼요. 여기 꽤 좋은 것 같은데 아까는 뭘 보고 있었어요?”송민아가 호기심 어린 눈으로 주인혁을 바라보며 물었다.“나뭇가지에 병아리 두 마리가 앉아 있어서 어떻게 올라갔는지 궁금해서 보고 있었던 거예요.”주인혁이 머쓱해 하며 답했다.“정말이에요? 저도 보러 갈래요.”송민아는 말하면서 총총 달려갔다.“고은서, 얼른 와 봐. 엄청 귀여워.”두 사람이 한창 병아리와 놀고 있을 때 옆에 있던 주인혁이 제안했다.“누나, 민아 씨, 뒤에 농장주가 직접 심은 채소도 있는데 뜯으러 가지 않을래요?”고은서에게 있어 이는 너무 신기한 일이 아니었다.평소 고준석이 정원에 꽃 외에 채소도 심는 바람에 시간만 나면 그를 도와 뜯곤 했었다.그러나 마침 할 일도 없었는지라 그녀는 아주 흔쾌히 그러자고 했다.고은서의 덤덤한

  • 어게인, 비긴   제981화

    “은서 씨!”여시은은 고은서를 보자마자 평소처럼 환하게 웃으면서 친절하게 인사했다.고은서는 약간 어색하긴 했지만 티 내지 않고 고개를 끄덕였다.“여시은 씨.”“은서 씨, 여기서 만나게 될 줄은 생각도 못 했어요.”여시은이 고은서한테로 다가오면서 생긋 웃으며 말했다.“혼자 왔어요?”“아니요. 친구 두 명이랑 같이 왔어요.”고은서는 채소밭이 있는 곳을 가리키면서 말했다.“여시은 씨는 농장 체험하러 온 건가요?”“오랜만에 만나는 아줌마 한 분이 해성에 왔는데 도시에 오래 있다 보니 시골 생활도 체험시켜 드리고 싶어서요. 그런데 은서 씨를 만나게 될 줄은 생각도 못 했어요.”고은서는 여시은의 시선을 한 정자를 바라보았다.정자에는 녹색 원피스를 입고 선글라스를 낀 중년 여성 한 명이 앉아 있었는데 부잣집 귀부인 출신이라는 걸 한눈에 알아볼 수 있었다.‘민시후 비서가 준 조사자료에 의하면 여시은이 확실히 가까이 지내는 아줌마 한 분이 있다고 했는데 여시은 어머니의 절친이라고 했지. 여시은 보러 자주 해성에 온다더니 그분인가?’그러나 상대방이 선글라스를 끼고 있는 탓에 고은서는 그녀의 표정이 제대로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왠지 모르게 자신을 보고 있는 듯했다.“은서 씨, 저한테 마침 금붕어 먹이가 있는데 같이 뿌려주지 않을래요?”여시은은 금붕어 먹이를 들고 고은서를 향해 물었다.고은서는 똘망똘망한 눈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여시은을 보면서 차마 그녀가 마재경의 질투심을 일으키기 위해 그런 일을 꾸몄다는 게 믿기지 않았다.“은서 씨, 저한테 할 말이 있는 거죠? 그럼 같이 먹이를 주면서 얘기 나누지 않을래요?”여시은이 천진난만한 미소를 지어 보이며 말했다.“그래요.”고은서는 고개를 끄덕였다.전에는 만날 기회가 없어 물어보지 못했는데 이 기회에 그녀가 대체 무슨 속셈인지 확실하게 알아볼 생각이었다.연못 옆에는 자갈이 깔려 있었고 손님들이 편하게 앉으라고 둔 큰 돌덩이도 여러 개 있었다.고은서와 여시은은 각자 하나씩 차지해 앉았다.여시은

  • 어게인, 비긴   제982화

    고은서는 생긋 웃으면서 손에 있던 먹이를 한꺼번에 연못에 던지고는 손을 털며 말했다.“먼저 가볼게요. 즐거운 시간 되세요.”여시은은 멀어지는 금붕어들을 보면서 한숨을 내쉬었다.“은서 씨, 이러고 어떻게 즐거운 시간이 돼라는 거죠?”고은서는 그제야 여시은의 연기력이 얼마나 무서운지 깨달았다.‘분명히 내가 무슨 얘기를 하는지 알면서도 모르는 척하고 나를 다른 사물에 비유하면서 천진한 척하기는.’고은서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뒤돌아 떠났다.나무다리에 도착했을 때 고은서는 어느새 정자에 여재훈까지 앉아 있는 걸 발견했다.여재훈과 중년 여성과 다정하게 얘기를 나누고 있었는데 두 사람 사이에서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소외감이 느껴졌다.마치 어쩌다 한 번 장모님 집에 간 사위처럼 서로 웃으면서 예의를 갖추어 대화하고 있었지만 어색함은 여전한 분위기처럼 와닿았다.고은서가 여재훈에게 인사를 드려야 하는지 말아야 하는지 고민하고 있을 때 송민준이 정원으로 걸어 들어왔다.그는 나무 다리 위에 있는 고은서를 향해 손을 흔들며 은서 씨라고 부르면서 다가왔다.정자에 있던 여재훈과 중년 여성도 그 목소리를 따라 시선을 돌렸는데 고은서의 착각인지 모르겠지만 중년 여성의 표정이 왠지 이상하게 바뀐 것 같았다.그러나 선글라스 때문에 정확히 확인할 수가 없었다.“은서 씨, 저랑 짜릿하고 재밌는 게임 한 번 하지 않을래요?”고은서가 생각에 잠겨 있을 때 귓가에서 갑자기 여시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그녀는 순간 가슴이 철렁하면서 불안감에 휩싸였다.그러나 고은서가 반응하기도 전에 여시은이 그녀의 손을 잡더니 갑자기 몸을 뒤로 젖혔다.두 사람이 서있는 나무다리는 아무런 난간이 존재하지 않았는 데다가 여시은이 갑자기 뒤로 젖히는 바람에 고은서는 그녀의 손을 뿌리칠 새도 없이 그대로 고꾸라졌다.“아악!”여시은의 비명소리와 함께 두 사람은 동시에 연못으로 떨어졌다.풍덩!커다란 소리와 함께 물방울이 사방이 튕겼다.그 찰나, 차가운 연못 물이 콧구멍과 입속으로 들어가면서

  • 어게인, 비긴   제983화

    고은서는 여재훈이 말하면서 자신을 힐끔힐끔 보고 있다는 걸 느꼈다.그러나 고은서 또한 지금 이게 무슨 상황인지 갈피가 잡히지 않았다.‘내 예감이 틀리지 않았어. 여시은이 그렇게 좋은 사람일 리가. 짜릿한 게임이라는 게 바로 이거였어?’고은서는 방금전까지만 해도 여시은이 왜 자신을 잡고 연못에 빠지려 했는지 의문이 들었지만 여재훈의 반응을 보고서 모든 걸 깨달았다.여재훈은 여시은이 비명을 지르고서야 두 사람이 있는 곳으로 시선을 돌렸는데 그에게는 여시은이 자신을 잡고 떨어진 게 아니라 그녀가 여시은을 밀친 것으로 보였을 것이다.고은서는 샤워 타올을 쓰고서도 밀려오는 추위 때문에 몸이 떨렸다.더 섬뜩한 건 여시은이 이토록 악랄한 사람일 줄 생각 못 했다는 것이다.‘곽현수 하나만으로도 힘겨워 죽겠는데 여재훈까지 날 해치려 한다면 절대 감당하지 못할 거야.’놀란 고은서와 달리 여시은은 아직도 방금전의 공포 속에서 빠져나오지 못한 듯했다.여재훈의 물음을 들은 여시은은 물이 뚝뚝 떨어지는 얼굴을 고은서를 향해 돌렸다.억울한 표정을 하고 있었지만 고은서는 그녀가 자신을 비웃고 있다는 걸 분명히 알 수 있었다.이어 여시은은 여재훈의 품에 얼굴을 숨기고 엉엉 울면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여재훈은 이내 표정이 차가워지더니 고은서를 보며 엄숙한 목소리로 물었다.“고은서 씨, 방금전에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지 얘기해 주실 수 있나요?”고은서는 한쪽 입꼬리를 올리면서 되물었다.“여 대표님, 저도 제가 왜 물에 빠졌는지 모른다고 하면 믿어주실 건가요?”고은서는 샤워 타올을 쓰고도 추위 때문에 저도 모르게 몸을 떨고 있었다.그녀의 얼굴은 물 범벅이 되어 있었고 머리카락도 다 젖어 얼굴에 이리저리 달라붙어 있었다. 심지어 눈초리에마저도 물방울이 맺혀 있었다.그러나 그녀의 표정은 약간 화나면서도 이 상황을 비아냥거리는 것 같았다. 눈빛은 또 얼마나 결연했는지 평소와 달리 아주 연약해 보였다.여재훈은 저도 모르게 마음이 아파오면서 무언가에 홀린 듯했다.“

  • 어게인, 비긴   제984화

    여재훈은 딸을 일으켜 세우고 고은서에게 말했다.“은서 씨도 얼른 가서 옷을 갈아입어요. 감기 걸리겠어요.”여재훈과 여시은이 떠난 후 송민준은 예의를 지키며 고은서에게 물었다.“은서 씨, 괜찮아요? 제가 부축해드릴까요?”고은서는 고개를 저으며 스스로 일어섰다.여시은이 말한 대로 연못은 깊지 않았고 고은서도 제때 자구책을 취했기 때문에 크게 다치지 않았다.고은서는 휴게실에서 깨끗한 옷으로 갈아입었고 송민아와 주인혁은 이제야 소식을 듣고 급히 달려왔다.“은서야, 괜찮아?”송민아가 걱정하며 물었다.“나 인혁 씨랑 옥수수밭에서 옥수수 따느라 이제야 네가 물에 빠졌다는 걸 알았어.”“누나, 미안해...”주인혁도 죄책감 가득한 얼굴로 말했다.고은서는 부드러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나 괜찮아. 그러니까 너무 속상하지 마. 그냥 연못에 빠졌던 것뿐이야. 물도 그리 깊지 않았어.”송민아는 고은서의 몸에 외상이 없는 것을 재차 확인한 후에야 마음이 놓였다.“그렇게 넓은 다리에서 어쩌다가 물에 빠진 거야?”송민아가 이상해서 묻자 고은서는 사실을 말하지 않았다.“운이 없었던 거지. 시은 씨가 발을 헛디뎌 물어 빠지면서 나도 같이 빠졌어.”두 사람이 함께 물에 빠졌다는 말을 듣자 송민아는 더 의아해했다.“여시은 씨 균형감에 문제 있는 거 아니야? 다리에 물도 없는데 어떻게 미끄러져서 너까지 같이 끌어내린 거야?”“오빠도 그 자리에 있었어? 어떻게 된 건지 얘기 좀 해봐. 뭐 이상한 점 없었어?”송민아는 쭉 말이 없는 송민준에게 물었다.송민준은 옅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나 그때 좀 멀리 떨어져 있어서 정확히 무슨 일이 있었는지 제대로 보지 못했어.”“됐어. 사고가 다 이런 거지. 이상할 게 뭐 있어.”고은서는 송민아가 이 일에 연루되지 않기를 바랐다. 그녀는 화제를 돌려 송민아에게 오늘 수확한 작물이 어떤지 물었다.송민아는 바로 주의를 돌려 자신이 어떤 작물을 수확했는지 하나하나 이야기했다.“은서야, 우리 계속 여기 남아서 밥까지 먹

  • 어게인, 비긴   제985화

    오늘 송민준은 평소보다 말이 적으며 가끔 멍하니 딴생각을 하기도 했다.송민아의 말을 듣고 고은서도 송민준을 바라보며 물었다.“민준 씨, 일이 너무 힘드신가요?”송민준은 미안한 듯 웃으며 말했다.“힘들진 않아요. 그냥 아직 처리하지 못한 일이 있어서 무슨 문제라도 생길까 봐 걱정이네요.”“오빠는 어떻게 종일 일 생각만 해.”송민아는 언짢다는 듯이 말했다.“오빠, 농장 분위기가 이렇게 좋고 재미있는 활동도 얼마나 많은데 제대로 휴식 좀 하면 안 돼?”송민준은 태연한 표정으로 송민아를 바라보며 말했다.“그럼 네가 좀 더 분발해. 네가 앞가림 잘해서 내 일을 덜어주면 나도 제대로 쉴 수 있을 거야.”송민준이 ST 그룹을 관리하기 시작하면서부터 회사 규모가 많이 발전했지만, 송민아는 부모 밑에서 한 번도 회사 일에 대해 야망을 품어본 적이 없다.여자에게 사업이 있어야 한다는 것을 알지만 송민아는 집안 사업에 손대고 싶지 않았다.오빠인 송민준은 겉으로 보기엔 다정하고 점잖아 보이지만, 권력에 대한 욕심이 아주 컸다. 그녀는 자기 눈으로 직접 자신의 사촌 형제들이 어떻게 오빠를 오만하게 대하던 데로부터 공손하게 모시는지를 보았다.그래서 송민아는 ST 그룹의 사업에 손댈 생각이 전혀 없었다.“난 회사 일에 관심 없어. 오빠, 나한테 기댈 생각하지 마.”송민아가 서둘러 말했다.“민준 씨, 먼저 일 보세요. 저와 인혁 씨가 민아 곁에 있을게요.”고은서가 나서서 얘기했다.송민준은 거절하지 않고 주인혁에게 예의상 한마디 물었다.“인혁 씨, 지난번 문제는 잘 해결되셨나요?”“네.”주인혁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누나한테서 들었어요. 민준 씨가 저를 위해 신경을 많이 썼다고 하더라고요. 정말 고마웠어요.”송민준이 방긋 웃으며 말했다.“별말씀을요. 제가 도운 게 별로 없었어요.”간단히 대화를 나눈 후 송민준은 자리를 떠나려 했고 송민아는 그를 차까지 배웅했다.“왜? 사과하는 의미로 선물이라도 사줘?”송민준은 송민아의 생각을 알아차리고 물

  • 어게인, 비긴   제986화

    송민준이 말했다.“내가 성격이 차갑고 사람들과 거리를 두니까 은서 씨가 나를 경계하는 것도 당연한 일이야. 너도 계속 날 무서워했잖아.”송민아는 말문이 막혔다.송민아는 확실히 어릴 때부터 송민준과 가깝게 지내지 않았다. 송민준은 늘 부모보다 엄격했기에 송민아는 송민준이 자신을 좋아하지 않는다고 생각했다.해성에 온 이후로 두 사람의 관계가 많이 가까워졌고, 송민아도 점점 송민준을 신뢰하게 되었다.지금 송민준이 이렇게 자신을 조롱하자 송민아는 약간의 죄책감을 느꼈다.“오빠, 어릴 때는 내가 철이 없었어. 그런데 지금은 오빠를 완전히 이해해. 걱정하지 마. 은서 쪽에는 내가 기회를 봐서 좋은 얘기 많이 해줄게. 은서가 오빠에 관한 생각을 바꾸는 날이 올 거야.”송민준은 송민아의 어깨를 가볍게 두드리며 말했다.“괜찮아. 너무 애쓰지 마.”...송민준을 배웅한 후 송민아는 다시 농장으로 돌아왔다.이때 고은서는 나무로 만든 그네 의자에 앉아 살랑살랑 흔들거리며 싱싱한 토마토를 깨작거리고 있었다.“인혁 씨는?”송민아는 고은서의 옆에 앉아 함께 그네를 타기 시작했다.“너희들이 전에 딴 채소를 부엌으로 나르고 있어.”고은서는 토마토를 먹으며 물었다.“민준 씨 갔어?”송민아는 고개를 끄덕였다.“오빠도 더 있고 싶은데 처리하지 않으면 안 되는 급한 일이 생겨서 먼저 갔어.”고은서는 고개를 끄덕이며 동의했다.“일부터 처리해야지.”“우리 오빠가 ST 그룹을 총괄하고 있어서 때때로 엄격하지 않으면 사람들이 잘 따라주지 않아.”송민아가 덧붙였다.“그래서 겉으로 보기에 다가가기 힘들지만 사실 그렇지 않아. 우리 오빠도 알아 봐주는 사람이 있길 원해.”고은서는 계속 토마토를 먹으며 얘기를 들었지만 들을수록 기분이 이상했다.“민아야, 어떻게 배웅 한 번 하더니 태도가 180도 바뀌었어? 무슨 일 있었어? 아니면 회사에 몹시 어려운 일이 생긴 거야?”“아니, 그런 게 아니야.”송민아는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 몰라 마음이 답답했다. 그녀는 머리를 긁

Latest chapter

  • 어게인, 비긴   제1112화

    의사가 여재훈의 상처를 처치하는 사이, 고은서의 휴대폰이 울렸다.번호를 보니 곽승재였다.고은서는 여재훈에게 말하고 복도로 나가 전화를 받았다.“은서야, 너 사고를 당했다며? 너와 여 대표님이 모두 다쳤다고?”곽승재가 다급히 물었다.임신 오해 사건 이후, 두 사람이 모든 것을 터놓고 얘기한 뒤로 그녀를 몰래 보호하던 인원을 철수한 상태였다.하지만 운전기사는 여전히 주민기가 배치한 인원이어서 고은서에게 무슨 일이 생기면 바로 알 수 있었다.고은서는 어디서 들었는지 캐묻지 않았다.“괜찮아. 마재경이 갑자기 유일 투자은행 주차장에서 나를 습격했어. 여재훈 씨가 막아주다가 팔을 다치셨고.”“나는 지금 출장 중이라 경찰서 쪽에 다른 사람을 보냈어.”곽승재는 무거운 목소리로 말했다.“지금 바로 해성으로 돌아갈게.”고은서는 급히 돌아올 필요가 없다고 말했다.“여긴 별일 없으니까 일에 집중해. 여재훈 씨의 상처 처치가 끝나면 경찰서로 가서 마재경을 만날 거야.”“이쪽 일은 거의 마무리됐어. 내가 돌아가면 같이 경찰서에 가자.”곽승재는 설명을 이어갔다.“지난번 마재경이 다쳤을 때 병원을 방문해 더 이상 협조가 필요 없다고 통보하고 충분한 보상금도 지급했어.”“다시는 네 앞에 나타나 존재감을 과시하지 말라고 몇 번 경고했는데 갑자기 나타난 걸 보면 배후에 조종자가 있는 게 아닌지 의심스러워.”곽승재는 차분한 목소리로 분석을 이어갔고, 고은서도 어느 정도 수긍했다.따져보면, 마재경은 돈 때문에 곽승재와 손잡은 것이고 그녀와 깊은 원한이 없었다.협력 관계가 끝났으면 적당한 선에서 물러나야 정상이지, 이렇게 위험한 방식으로 그녀에게 복수할 이유가 없지 않은가?하지만 마재경이 진심으로 곽승재를 좋아하게 됐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천천히 사랑을 키워나가고 싶었는데 곽승재가 갑자기 관계를 끊자고 하니 그 분노를 고은서에게 쏟아냈을 수도 있다.고은서가 이 가능성을 말하려는 순간, 간호사가 문을 열고 나오더니 안에 있는 환자분의 부탁이라며 그녀의 상처

  • 어게인, 비긴   제1111화

    ‘분명 넘어뜨렸는데.’고은서는 마재경이 이렇게 빨리 일어날 줄은 몰랐고, 가위를 들고 달려들 줄은 더욱 생각지 못했다.피하기엔 이미 늦은 상황이었다. 고은서는 다급한 마음에 전기충격기를 꺼내 마재경의 몸에 들이댔다.“조심해요.”고은서와 마재경이 전기충격기와 가위를 손에 들고 서로 공격하려는 순간, 우람한 체구의 남성이 황급히 달려왔다. 여재훈이었다.그는 고은서를 확 끌어당기고 마재경을 밀쳐냈다.쨍그랑! 전기충격기가 땅에 떨어지며 마재경의 몸에 닿았고, 감전된 마재경은 비명을 질렀다.잠시 비틀거리던 마재경은 눈에 핏발을 세우고 다시 가위를 휘두르며 덤벼들었다.고은서가 마재경을 걷어차려고 다리를 뻗는 순간, 여재훈이 자기 팔로 가위를 막아 그녀를 보호했다.그의 넓은 어깨는 웅대한 산처럼 든든해 보였고, 어린 시절 외할아버지 품에 안겼을 때처럼 피난처 같은 안정감을 주었다.짝! 가위가 여재훈의 팔을 찌르며 옷이 찢어지는 소리가 들렸다. 여재훈은 잽싸게 마재경을 발로 걷어찼다.“여재훈 씨, 괜찮으세요?”정신을 차린 고은서가 다급한 목소리로 물었다.여재훈은 평온한 표정으로 대답했다.“괜찮아요.”이때 경비원 몇 명이 달려와 마재경을 제압했다.고은서는 여재훈의 팔을 살펴보았다. 재킷과 셔츠가 찢기고 기다란 상처에서 피가 흘러나오고 있었다.고은서는 가슴이 아려와 다급히 말했다.“다치셨네요. 빨리 병원 가서 싸매야 해요.”“고은서 씨도 다쳤으니 같이 가요.”여재훈이 고은서의 쇄골 부위를 가리키며 말했다.아무 느낌도 없었는데, 여재훈의 말을 듣고 나니 쇄골 근처 어깨죽지 부위에서 얼얼한 통증이 느껴졌다.손으로 만져보니 피는 나지 않는 듯했다. 오늘 카라 없는 캐주얼 셔츠를 입은 까닭에 마재경이 가위를 휘두를 때 살짝 긁힌 듯하다.“저는 연고만 바르면 될 것 같아요. 어서 병원 가요.”고은서는 경비원에게 마재경을 경찰서에 넘기라고 말했다.그러고는 기사를 불러오고 여재훈과 함께 뒷좌석에 탔다.여재훈의 팔뚝에 번진 핏자국을 보며 고은서는

  • 어게인, 비긴   제1110화

    여재훈도 자리에서 일어났다.“제가 은서 씨를 회사까지 모셔다드리겠습니다.”이 식사는 여재훈이 초대한 자리였으니 끝까지 책임지고 고은서를 안전하게 회사까지 돌려보내는 게 맞다고 생각했다.돌아가는 길에 두 사람은 거의 말을 하지 않아 분위기가 조금 무거웠다.고은서는 여재훈이 자기 딸이 고양이를 학대했을 수도 있다는 사실을 받아들이기 힘들어한다는 걸 알기에 여재훈한테 혼자 생각할 시간을 줬다.얼마 지나지 않아 그들은 유일 투자은행의 주차장에 도착했다.“은서 씨, 곽승재 씨랑 현재 무슨 사이이신가요?”여재훈이 물었다.고은서는 사실대로 답했다.“그냥 평범한 친구 사이예요.”여재훈은 고개를 끄덕이더니 말했다.“승재 씨는 은서 씨를 많이 신경 쓰는 것 같더군요.”연회 때 곽승재가 고은서를 적극적으로 감싸는 모습을 모두가 똑똑히 봤다.이에 대해 고은서도 부정하지 않았다.“그건 곽승재 씨의 일방적인 감정이에요. 저는 그 사람한테 이성적인 감정은 없어요.”“시은이가 승재 씨를 꽤 마음에 들어 하더라고요. 저한테도 말한 적 있어요. 그와 결혼하고 싶다고.”여재훈은 말을 이었다.“아마 시은이의 질투심도 여기서 시작된 것 같아요. 그래서 은서 씨를 해하려 했던 걸지도 모르죠. 하지만 쿠아는 시은이가 가장 아끼던 반려동물이에요. 시은이가 이유 없이 해칠 리는 없을 겁니다.”고은서는 그 말의 속뜻을 곧바로 이해했다.여재훈의 말은 여시은이 고은서를 향한 질투 때문에 공격적으로 나왔을 수는 있어도, 쿠아는 여시은이 키우는 반려동물이기에 쿠아를 해칠 사람은 아니라고 믿는다는 것 같았다.고은서는 그저 씁쓸하게 웃었다.가족이라는 필터는 쉽게 사라지지 않는다. 하지만 언젠가는 여재훈도 여시은의 본모습을 보게 될 날이 올 것이라 믿었다.고은서는 더 말해봤자 의미가 없다는 걸 알기에 여재훈한테 간단히 인사를 하고 차에서 내렸다.차에서 내린 고은서는 어디선가 여자 하나가 스쳐 지나가는 듯한 그림자를 본 것 같았고, 공기 중에서 약간의 피비린내도 느꼈다.그녀는 주

  • 어게인, 비긴   제1109화

    여재훈은 고은서를 바라보며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을 하고는 물었다.“시은이가 또 무슨 일을 했다는 거죠?”마침 노 사장님이 식전 반찬을 가져다주며 주문한 대표 요리도 곧 준비된다고 알렸다.고은서는 계속해서 말했다.“재훈 씨, 저희 먼저 식사부터 하고 이야기할까요?”고은서는 몹시 배가 고팠다. 만약 지금 이 이야기를 꺼내면 두 사람 모두 식사할 마음이 사라질 것 같았다.여재훈은 고은서의 제안에 동의했다.이 개인 요리 식당의 음식은 색다른 풍미가 있었고, 고은서는 배부르게 먹었다.반면, 여재훈은 거의 먹지 않았다. 마치 그는 고은서를 동반하기 위해 자리를 함께한 것처럼 보였다.식사 중에는 가끔 일상적이고 가벼운 이야기를 나누기도 했다.약 삼십 분 후, 고은서는 젓가락을 내려놓으며 배가 너무 부르다고 말했다.아직 못다 한 이야기가 남아있지만, 여재훈은 배부른 고은서를 보며 묘한 만족감을 느꼈다.여재훈은 그녀가 배부르게 먹는 모습을 보는 것만으로도 기뻤다.여재훈은 고은서의 찻잔에 물을 따라주며 물었다.“우리 시은이가 또 무슨 잘못을 저질렀던 거죠?”고은서는 찻물을 한 모금 마신 뒤 숨을 깊이 들이쉬고는 여시은이 고양이를 학대한 일에 대해 털어놓았다.“저번에 제가 쿠아 때문에 경찰에 신고를 했었잖아요?”고은서가 말했다.“전 정말 시은이에게 누명을 씌운 게 아니에요. 여시은이 제 눈앞에서 쿠아의 입술을 다치게 했어요. 그리고 평소에도 쿠아를 자주 괴롭혔어요.”고은서의 말을 들은 여재훈은 자신의 귀를 의심했다.“시은이는 쿠아를 그렇게 아꼈어요. 집에서도 항상 품에 안고 다녔고, 쿠아가 뭐라도 먹고 싶어 하면 직접 손으로 먹여줬다니까요. 시은이가 어떻게 그런 짓을 했겠어요?”여재훈은 믿지 못하겠다는 듯이 물었다.“은서 씨, 혹시 오해가 있는 건 아니에요? 뭔가 착각하신 거 아닐까요?”평소 여시은은 얌전한 딸의 이미지를 잘 연기해 왔기에 여재훈은 그녀를 철석같이 믿고 있었다.“재훈 씨가 믿기 힘든 거 알아요. 아버지 입장에서야 딸이 그

  • 어게인, 비긴   제1108화

    지난번 숙모에게 가방을 선물했을 때, 숙모가 엄청나게 기뻐했던 모습이 순간 떠올랐다.그래서 이번엔 삼촌에게도 뭔가를 사서 드리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고은서는 노 사장님에게 코담배병을 어디서 샀는지 물어봤다. 그리고 가족에게 드릴 선물로 하나 사고 싶다고 말을 덧붙였다.“이건 친구가 선물한 거라 어디서 샀는지는 나도 잘 모르겠네.”노 사장님은 미안한 듯 말했다.고은서는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괜찮아요, 그냥 예뻐서 한번 여쭤본 거예요. 나중에 백화점 가서 한번 골라볼게요.”“아가씨는 참 효심이 깊구먼.”노 사장님은 칭찬을 몇 마디 건넨 뒤, 주문한 메뉴를 주방으로 가져갔다.“은서 씨 아버님께서 코담배병을 좋아하시나요? 선물하시려고요?”여재훈이 부드럽게 물었다.고은서는 고개를 저었다.“전 아버지가 없어요. 삼촌께 드리려는 거예요.”여재훈은 조금 놀란 표정이었다.그는 고은서를 몇 번밖에 만나지 못했기에 그녀의 가정사에 대해서는 잘 알지 못했다. 그래서 그녀에게 아버지가 없다는 사실도 오늘 처음 들었다.“죄송합니다. 그런 줄도 모르고...”여재훈은 곧바로 사과했다.고은서는 별일 아니라는 듯 웃었다.“괜찮아요. 저희 가족끼리도 잘 지내고 있어요.”착각일지도 모르지만, 여재훈은 고은서의 그 미소는 어딘가 익숙하다는 느낌을 받았다.그때 여재훈의 휴대전화 벨 소리가 울렸다.전화번호를 확인한 그는 곧바로 정신을 차리고 전화를 받았다.“시은아, 왜 그래... 주사 맞는 게 당연히 좀 아프지. 하지만 주사를 안 맞으면 어떻게 낫겠어... 알겠으니깐 떼쓰지 말고, 의사 말 잘 들어.”전화를 끊고 나서 여재훈은 고은서에게 간단히 상황을 설명했다.“시은이가 아픈데 주사 맞기 싫다고 하네요.”고은서는 여시은의 이름에 반응이 컸다. 예전에 여시은에게 학대받다 죽은 쿠아가 떠올랐다. 그 기억 때문에 속이 불쾌해지고 분노가 스멀스멀 올라왔다.그녀는 말없이 찻잔을 들어 한 모금 마셨다.여재훈은 고은서의 반감을 눈치채지 못할 리 없었다.그는 조심

  • 어게인, 비긴   제1107화

    여재훈의 말을 들은 고은서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고은서는 여시은이 아픈 시기가 참으로 절묘하다고 생각했다. 아마도 밖의 여론이 여시은에게 불리해서 고은서를 만나고 싶지 않았을 뿐일 것이다.요 며칠, 인터넷에서는 여시은과 관련된 뉴스가 아직 완전히 사라지지 않았다.고은서가 KK한테 도움을 요청한 것 외에도, 아마 곽승재도 뒤에서 힘을 써준 것 같았다.“원래 연회 다음 날에 시은이를 데리고 직접 사과드리려고 했는데, 며칠간 일이 좀 많아서 오늘로 미뤄졌어요.”여재훈은 이어 말했다.“오늘 아침에 갑자기 시은이가 열이 나서, 제가 혼자 찾아오게 됐습니다.”“은서 씨, 지난 일은 전부 시은이의 잘못입니다. 제가 대신 사과드리겠습니다.”여재훈은 미안한 표정으로 말했다.고은서는 담담하게 웃으며 대꾸했다.“재훈 씨의 사과는 저한테 너무 과분해요. 다만 저를 나쁜 사람으로 오해하지 않으셨으면 좋겠어요.”고은서가 지난번 여씨 가문에서 있었던 일을 언급하고 있다는 걸 알아챈 여재훈은 마음이 더욱 불편해져났다.“제가 도우미와 시은이의 말만 믿었네요. 시은이에게는 그 일에 대해 이미 훈계했고, 요 며칠 집에서 반성하고 있습니다.”고은서는 여시은이 그저 여재훈에게 보여주기 위해 반성하는 척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녀는 결코 자기 잘못을 인정하지 않았을 것이다.그러나 여재훈은 여시은을 여전히 굳게 믿고 있었고 그녀의 이중적인 모습에도 크게 실망하지 않은 듯했다.고은서가 더 이상 말을 잇지 않자, 운전 중이던 여재훈도 잠시 침묵을 지켰다.얼마 지나지 않아, 두 사람은 한적한 곳에 있는 개인 요리 식당에 도착했다.그 식당은 규모가 너무 크지는 않았지만 분위기는 엄청 좋았다.정원에는 다양한 희귀한 꽃들과 식물들이 놓여 있었고 작은 인공 폭포와 휴식용 테이블과 의자들도 마련되어 있었다.입구 쪽의 돌 테이블 위에는 하얀색의 통통한 고양이 두 마리가 게으르게 햇볕을 쬐고 있었다.잔잔하게 흘러나오는 음악을 들으니 고은서의 마음이 한결 차분해지는 것을 느꼈다.

  • 어게인, 비긴   제1106화

    송민아가 입을 삐죽이며 말했다.“저번에 네가 너무 진지하게 말하길래, 나 진짜 겁먹었잖아.”고은서가 다시 한번 웃으며 잡담하듯 물었다.“민아야, 너 예전에 말했잖아. 너랑 네 오빠는 엄마가 다르다고. 그럼 네 아빠랑 네 오빠 엄마는 이혼하신 거야?”송민아는 사무실 밖을 슬쩍 확인했다. 그리고 아무도 없는 걸 확인하고 조용히 말했다.“몰래 엄마한테 물어봤는데, 우리 오빠 엄마는 아빠랑 혼인신고도 안 했대. 둘이 약혼까진 했는데, 무슨 이유인진 모르겠지만 오빠 엄마가 아빠랑 결혼하길 거절했대.”고은서는 눈썹을 찌푸렸다.‘설마 송민준의 엄마도 결혼 안 하고 그를 낳은 걸까?’지난번 고은서가 송민준과 함께 바에서 우연히 만났을 때, 그가 그녀를 집까지 데려다주면서 송민준은 어릴 때부터 보호만 받고 자라서 사람에 대한 경계심이 없다고 고은서한테 말한 기억이 있다.그때 그의 말투는 평소의 부드러운 말투가 아니라 약간의 조롱 섞인 느낌이었다. 마치 그의 어린 시절이 순탄치 않았다는 듯이.‘혹시 송민준의 어머니가 결혼도 안 하고 그를 낳아서 상처를 받은 탓일까?’“은서야, 이건 진짜 너한테만 말한 거니까, 절대 우리 오빠한테 묻지 마!”송민아가 신신당부하면서 말했다.“오빠는 이 얘기를 누구한테도 한 적 없어. 분명히 신경 쓰고 있다는 거야. 우리 엄마가 말하는 데 이 사실을 아는 사람은 거의 없더래.”“오빠는 혼자 살긴 해도 우리 엄마한테는 되게 예의 바른 거 있지. 나도 이 비밀 듣기 전까진 우리 둘이 같은 엄마 뱃속에서 태어난 줄 알았어.”고은서는 절대 이 비밀을 다른 사람에게 말하지도, 송민준에게 묻지도 않겠다고 약속했다.“민아야, 혹시 너희 엄마가 네 아빠의 다른 연애 상대에 대해 말한 적 있어?”고은서는 궁금한 것이 있으면 참지 못하고 묻는 성격이었다.혹시라도 송민아의 어머니가 송민준 부모의 관계에 끼어든 거라면 송민아의 어머니가 뭔가 알고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한 것이다.“그냥 어른들 옛날 연애사에 호기심이 생긴 거야. 만약 불쾌했

  • 어게인, 비긴   제1105화

    송민준의 단어 사용은 꽤 신박했다.그는 “어젯밤 그 일은, 네가 의도한 거야?”라고 물었다. “어젯밤 무슨 일이 있었던 거야?”가 아니라.그러니까 송민준의 말뜻은 그가 어젯밤 일이 여시은을 고의로 함정에 빠뜨리려고 한 고은서의 계획이었음을 알고 있다는 건가?하지만 그 테라스는 비교적 한적했고 로마식 기둥이 시야를 가려 일반적으로는 사람들이 잘 알아채기 어려운 장소였다.고은서가 로비에서 넘어졌을 때 여시은은 빈 와인잔을 들고 그녀 앞에 서 있었다. 이 상황을 봤을 때 대부분의 사람들은 여시은이 고은서를 민 것으로 생각했을 것이다.그런데 어떻게 송민준은 고은서가 여시은을 속이기 위해 고육지계를 쓴 걸 알아챈 걸까?고은서는 아예 직설적으로 물었다.“민준 오빠, 왜 그렇게 물어보는 거야? 설마 어젯밤 내가 넘어졌던 게 자작극이라고 생각한 거야?”그 말을 듣자 송민준은 웃으며 물었다.“은서야, 그런 뜻이 아니야. 난 그냥 그 농장 영상 말이야, 그걸 일부러 어젯밤 그 시점에 터뜨린 건지 궁금해서 물어본 거야.”알고 보니 송민준은 농장 영상을 묻고 있었던 것이다.그날 송민준의 컴퓨터에서 영상을 확인하고 난 후, 송민아가 고은서에게 이 영상을 바로 여재훈에게 전달할 거냐고 물었을 때, 고은서는 송민준을 경계해 일부러 연회 이후에 결정하겠다고 말했었다.하지만 실제로는 연회 그 자리에서 바로 그 영상을 공개해 버렸다.송민준이 의심하는 것도 정상이다.“맞아.” 고은서는 고개를 끄덕였다.“원래는 어젯밤이 지나고 여재훈 씨를 따로 찾아가려고 했는데, 그 상황에서는 여시은이 그런 행동을 할 만한 동기를 증명하려면 그걸 꺼낼 수밖에 없었어.”송민준은 고개를 끄덕였다.“다른 뜻은 없었어. 그냥 궁금해서 물어본 거야. 네 선택이 맞아, 난 항상 널 지지할 거니깐.”그의 표정을 본 고은서는 확신했다. 송민준은 고은서가 아직 그를 경계하고 있다는 걸 눈치챘을 것이다.그의 성격상, 어젯밤 그녀가 계획적으로 움직였다는 것쯤은 쉽게 짐작했을 테니까. 하지만 송민준

  • 어게인, 비긴   제1104화

    박지연은 계속해서 불만을 터뜨렸다.“내가 보기엔 여시은은 태생이 못돼먹었어!”“이번에 그렇게 크게 당했으니 더더욱 널 원망할 거야. 너 조심 좀 해.”박지연이 걱정스럽게 당부했다.고은서는 고개를 끄덕였다.이미 각을 세우기로 마음먹었기에 여시은과 평화롭게 지낼 생각은 애초에 없었다. 앞으로는 여시은을 더 철저히 경계할 것이다.“듣자 하니 곽승재가 내내 널 감싸줬다며? 너한테 점점 마음이 가는 모양이야.”박지연이 코웃음을 쳤다.어젯밤 곽승재가 고은서를 계속 도와줬던 건 사실이었다. 증거를 공개하자고 제안한것도 곽승재의 생각이었고 마지막에 그녀를 집까지 데려다줬다. 곽승재가 고은서에게 큰 도움을 준 셈이었다.하지만 고은서는 곽승재에 대한 이야기를 박지연과 깊이 나누지 않았다.잠시 다른 이야기를 하던 중 박지연이 고은서에게 뜬금없는 소문 하나를 전했다.“우리 과장님한테서 들었는데, 어제 혜린 씨가 다니는 병원에 조 여사님이 찾아가서 난리를 쳤대. 혜린 씨 남자관계가 복잡하다고, 다른 남자랑 팔짱 낀 사진까지 들고 와서 공개하면서 혜린 씨랑 그 자리에서 머리끄덩이 잡고 싸움 났대!”고은서는 지난번 소동 이후 손자를 중시하는 조수연이 한동안은 조용할 거라 생각했었다. 그런데 고작 며칠 만에 또 난리를 친 거였다. 조수연의 전투력은 엄청 대단했다.“아니, 그러다 혜린 씨 혹시라도 애를 지우기라도 하면 어떡하려고 그래?”고은서가 물었다.박지연은 말했다.“조 여사님 말로는 혜린 씨 뱃속 애가 자기 아들 애가 아닐 수도 있다고 의심해서 혜린 씨를 끌고 가서 친자 확인하자고 했대. 그래서 둘이 몸싸움까지 벌어져서 이미지도 최악이라 혜린 씨는 한 달 정직당했어.”“혜린 씨 배속에 애가 온승준 씨 애가 아니라고? 그럼 도대체 왜 그렇게까지 그 집에 들어가려고 애쓰는 거야? 그냥 진짜 애 아빠랑 결혼하면 될걸...”고은서는 도무지 납득이 가지 않았다.“소문엔 그 남자가 유부남에 애까지 있다고 하더라. 자세한 건 나도 몰라. 그냥 과장님이 흘린 얘기야.”

Explore and read good novels for free
Free access to a vast number of good novels on GoodNovel app. Download the books you like and read anywhere & anytime.
Read books for free on the app
SCAN CODE TO READ ON APP
DMCA.com Protection Statu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