번화로운 도시와 달리 농장은 아주 생기가 흘러넘쳤다. 꽃도 있고 풀도 있고 연못도 있었는데 마음 편히 쉴 수 있는 곳으로 적합했다.고은서와 송민아는 각각 자기 차를 몰고 왔는데 주차하고 정원으로 들어가자마자 미리 도착해 있는 주인혁이 눈에 들어왔다.흰색 티셔츠와 청바지 차림을 한 그는 과일나무 아래서 무언갈 보고 있었는데 따뜻한 햇살이 그를 비추면서 마치 청춘 만화 속 남자주인공과 같은 느낌을 주었다.“연예인은 확실히 다른가 봐. 엄청 평범한 옷차림임에도 불구하고 엄청 멋있어 보이잖아.”송민아가 감탄했다.고은서는 그녀를 힐끔 보면서 말했다.“보기와 다르게 덕후의 잠재력이 깃들어 있는 것 같은데.”“덕후는 무슨. 그냥 간단하게 감탄해 본 것뿐이거든.”송민아가 콧방귀를 뀌면서 반박했다.바로 그때, 인기척을 느낀 주인혁이 두 사람을 향해 다가왔다.“누나!”그는 고은서한테 인사하고 이내 시선을 송민아한테로 돌렸다.“송민아 씨시죠?”“네. 맞아요.”송민아는 손을 내밀면서 그와 악수하려 했다.주인혁도 예의 바르게 웃으면서 그녀와 악수했다.“송 대표님은?”“오빠는 할 일이 있어서 나중에 시간 되는대로 올 거예요. 상관하지 않으셔도 돼요. 여기 꽤 좋은 것 같은데 아까는 뭘 보고 있었어요?”송민아가 호기심 어린 눈으로 주인혁을 바라보며 물었다.“나뭇가지에 병아리 두 마리가 앉아 있어서 어떻게 올라갔는지 궁금해서 보고 있었던 거예요.”주인혁이 머쓱해 하며 답했다.“정말이에요? 저도 보러 갈래요.”송민아는 말하면서 총총 달려갔다.“고은서, 얼른 와 봐. 엄청 귀여워.”두 사람이 한창 병아리와 놀고 있을 때 옆에 있던 주인혁이 제안했다.“누나, 민아 씨, 뒤에 농장주가 직접 심은 채소도 있는데 뜯으러 가지 않을래요?”고은서에게 있어 이는 너무 신기한 일이 아니었다.평소 고준석이 정원에 꽃 외에 채소도 심는 바람에 시간만 나면 그를 도와 뜯곤 했었다.그러나 마침 할 일도 없었는지라 그녀는 아주 흔쾌히 그러자고 했다.고은서의 덤덤한
“은서 씨!”여시은은 고은서를 보자마자 평소처럼 환하게 웃으면서 친절하게 인사했다.고은서는 약간 어색하긴 했지만 티 내지 않고 고개를 끄덕였다.“여시은 씨.”“은서 씨, 여기서 만나게 될 줄은 생각도 못 했어요.”여시은이 고은서한테로 다가오면서 생긋 웃으며 말했다.“혼자 왔어요?”“아니요. 친구 두 명이랑 같이 왔어요.”고은서는 채소밭이 있는 곳을 가리키면서 말했다.“여시은 씨는 농장 체험하러 온 건가요?”“오랜만에 만나는 아줌마 한 분이 해성에 왔는데 도시에 오래 있다 보니 시골 생활도 체험시켜 드리고 싶어서요. 그런데 은서 씨를 만나게 될 줄은 생각도 못 했어요.”고은서는 여시은의 시선을 한 정자를 바라보았다.정자에는 녹색 원피스를 입고 선글라스를 낀 중년 여성 한 명이 앉아 있었는데 부잣집 귀부인 출신이라는 걸 한눈에 알아볼 수 있었다.‘민시후 비서가 준 조사자료에 의하면 여시은이 확실히 가까이 지내는 아줌마 한 분이 있다고 했는데 여시은 어머니의 절친이라고 했지. 여시은 보러 자주 해성에 온다더니 그분인가?’그러나 상대방이 선글라스를 끼고 있는 탓에 고은서는 그녀의 표정이 제대로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왠지 모르게 자신을 보고 있는 듯했다.“은서 씨, 저한테 마침 금붕어 먹이가 있는데 같이 뿌려주지 않을래요?”여시은은 금붕어 먹이를 들고 고은서를 향해 물었다.고은서는 똘망똘망한 눈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여시은을 보면서 차마 그녀가 마재경의 질투심을 일으키기 위해 그런 일을 꾸몄다는 게 믿기지 않았다.“은서 씨, 저한테 할 말이 있는 거죠? 그럼 같이 먹이를 주면서 얘기 나누지 않을래요?”여시은이 천진난만한 미소를 지어 보이며 말했다.“그래요.”고은서는 고개를 끄덕였다.전에는 만날 기회가 없어 물어보지 못했는데 이 기회에 그녀가 대체 무슨 속셈인지 확실하게 알아볼 생각이었다.연못 옆에는 자갈이 깔려 있었고 손님들이 편하게 앉으라고 둔 큰 돌덩이도 여러 개 있었다.고은서와 여시은은 각자 하나씩 차지해 앉았다.여시은
고은서는 생긋 웃으면서 손에 있던 먹이를 한꺼번에 연못에 던지고는 손을 털며 말했다.“먼저 가볼게요. 즐거운 시간 되세요.”여시은은 멀어지는 금붕어들을 보면서 한숨을 내쉬었다.“은서 씨, 이러고 어떻게 즐거운 시간이 돼라는 거죠?”고은서는 그제야 여시은의 연기력이 얼마나 무서운지 깨달았다.‘분명히 내가 무슨 얘기를 하는지 알면서도 모르는 척하고 나를 다른 사물에 비유하면서 천진한 척하기는.’고은서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뒤돌아 떠났다.나무다리에 도착했을 때 고은서는 어느새 정자에 여재훈까지 앉아 있는 걸 발견했다.여재훈과 중년 여성과 다정하게 얘기를 나누고 있었는데 두 사람 사이에서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소외감이 느껴졌다.마치 어쩌다 한 번 장모님 집에 간 사위처럼 서로 웃으면서 예의를 갖추어 대화하고 있었지만 어색함은 여전한 분위기처럼 와닿았다.고은서가 여재훈에게 인사를 드려야 하는지 말아야 하는지 고민하고 있을 때 송민준이 정원으로 걸어 들어왔다.그는 나무 다리 위에 있는 고은서를 향해 손을 흔들며 은서 씨라고 부르면서 다가왔다.정자에 있던 여재훈과 중년 여성도 그 목소리를 따라 시선을 돌렸는데 고은서의 착각인지 모르겠지만 중년 여성의 표정이 왠지 이상하게 바뀐 것 같았다.그러나 선글라스 때문에 정확히 확인할 수가 없었다.“은서 씨, 저랑 짜릿하고 재밌는 게임 한 번 하지 않을래요?”고은서가 생각에 잠겨 있을 때 귓가에서 갑자기 여시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그녀는 순간 가슴이 철렁하면서 불안감에 휩싸였다.그러나 고은서가 반응하기도 전에 여시은이 그녀의 손을 잡더니 갑자기 몸을 뒤로 젖혔다.두 사람이 서있는 나무다리는 아무런 난간이 존재하지 않았는 데다가 여시은이 갑자기 뒤로 젖히는 바람에 고은서는 그녀의 손을 뿌리칠 새도 없이 그대로 고꾸라졌다.“아악!”여시은의 비명소리와 함께 두 사람은 동시에 연못으로 떨어졌다.풍덩!커다란 소리와 함께 물방울이 사방이 튕겼다.그 찰나, 차가운 연못 물이 콧구멍과 입속으로 들어가면서
고은서는 여재훈이 말하면서 자신을 힐끔힐끔 보고 있다는 걸 느꼈다.그러나 고은서 또한 지금 이게 무슨 상황인지 갈피가 잡히지 않았다.‘내 예감이 틀리지 않았어. 여시은이 그렇게 좋은 사람일 리가. 짜릿한 게임이라는 게 바로 이거였어?’고은서는 방금전까지만 해도 여시은이 왜 자신을 잡고 연못에 빠지려 했는지 의문이 들었지만 여재훈의 반응을 보고서 모든 걸 깨달았다.여재훈은 여시은이 비명을 지르고서야 두 사람이 있는 곳으로 시선을 돌렸는데 그에게는 여시은이 자신을 잡고 떨어진 게 아니라 그녀가 여시은을 밀친 것으로 보였을 것이다.고은서는 샤워 타올을 쓰고서도 밀려오는 추위 때문에 몸이 떨렸다.더 섬뜩한 건 여시은이 이토록 악랄한 사람일 줄 생각 못 했다는 것이다.‘곽현수 하나만으로도 힘겨워 죽겠는데 여재훈까지 날 해치려 한다면 절대 감당하지 못할 거야.’놀란 고은서와 달리 여시은은 아직도 방금전의 공포 속에서 빠져나오지 못한 듯했다.여재훈의 물음을 들은 여시은은 물이 뚝뚝 떨어지는 얼굴을 고은서를 향해 돌렸다.억울한 표정을 하고 있었지만 고은서는 그녀가 자신을 비웃고 있다는 걸 분명히 알 수 있었다.이어 여시은은 여재훈의 품에 얼굴을 숨기고 엉엉 울면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여재훈은 이내 표정이 차가워지더니 고은서를 보며 엄숙한 목소리로 물었다.“고은서 씨, 방금전에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지 얘기해 주실 수 있나요?”고은서는 한쪽 입꼬리를 올리면서 되물었다.“여 대표님, 저도 제가 왜 물에 빠졌는지 모른다고 하면 믿어주실 건가요?”고은서는 샤워 타올을 쓰고도 추위 때문에 저도 모르게 몸을 떨고 있었다.그녀의 얼굴은 물 범벅이 되어 있었고 머리카락도 다 젖어 얼굴에 이리저리 달라붙어 있었다. 심지어 눈초리에마저도 물방울이 맺혀 있었다.그러나 그녀의 표정은 약간 화나면서도 이 상황을 비아냥거리는 것 같았다. 눈빛은 또 얼마나 결연했는지 평소와 달리 아주 연약해 보였다.여재훈은 저도 모르게 마음이 아파오면서 무언가에 홀린 듯했다.“
여재훈은 딸을 일으켜 세우고 고은서에게 말했다.“은서 씨도 얼른 가서 옷을 갈아입어요. 감기 걸리겠어요.”여재훈과 여시은이 떠난 후 송민준은 예의를 지키며 고은서에게 물었다.“은서 씨, 괜찮아요? 제가 부축해드릴까요?”고은서는 고개를 저으며 스스로 일어섰다.여시은이 말한 대로 연못은 깊지 않았고 고은서도 제때 자구책을 취했기 때문에 크게 다치지 않았다.고은서는 휴게실에서 깨끗한 옷으로 갈아입었고 송민아와 주인혁은 이제야 소식을 듣고 급히 달려왔다.“은서야, 괜찮아?”송민아가 걱정하며 물었다.“나 인혁 씨랑 옥수수밭에서 옥수수 따느라 이제야 네가 물에 빠졌다는 걸 알았어.”“누나, 미안해...”주인혁도 죄책감 가득한 얼굴로 말했다.고은서는 부드러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나 괜찮아. 그러니까 너무 속상하지 마. 그냥 연못에 빠졌던 것뿐이야. 물도 그리 깊지 않았어.”송민아는 고은서의 몸에 외상이 없는 것을 재차 확인한 후에야 마음이 놓였다.“그렇게 넓은 다리에서 어쩌다가 물에 빠진 거야?”송민아가 이상해서 묻자 고은서는 사실을 말하지 않았다.“운이 없었던 거지. 시은 씨가 발을 헛디뎌 물어 빠지면서 나도 같이 빠졌어.”두 사람이 함께 물에 빠졌다는 말을 듣자 송민아는 더 의아해했다.“여시은 씨 균형감에 문제 있는 거 아니야? 다리에 물도 없는데 어떻게 미끄러져서 너까지 같이 끌어내린 거야?”“오빠도 그 자리에 있었어? 어떻게 된 건지 얘기 좀 해봐. 뭐 이상한 점 없었어?”송민아는 쭉 말이 없는 송민준에게 물었다.송민준은 옅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나 그때 좀 멀리 떨어져 있어서 정확히 무슨 일이 있었는지 제대로 보지 못했어.”“됐어. 사고가 다 이런 거지. 이상할 게 뭐 있어.”고은서는 송민아가 이 일에 연루되지 않기를 바랐다. 그녀는 화제를 돌려 송민아에게 오늘 수확한 작물이 어떤지 물었다.송민아는 바로 주의를 돌려 자신이 어떤 작물을 수확했는지 하나하나 이야기했다.“은서야, 우리 계속 여기 남아서 밥까지 먹
오늘 송민준은 평소보다 말이 적으며 가끔 멍하니 딴생각을 하기도 했다.송민아의 말을 듣고 고은서도 송민준을 바라보며 물었다.“민준 씨, 일이 너무 힘드신가요?”송민준은 미안한 듯 웃으며 말했다.“힘들진 않아요. 그냥 아직 처리하지 못한 일이 있어서 무슨 문제라도 생길까 봐 걱정이네요.”“오빠는 어떻게 종일 일 생각만 해.”송민아는 언짢다는 듯이 말했다.“오빠, 농장 분위기가 이렇게 좋고 재미있는 활동도 얼마나 많은데 제대로 휴식 좀 하면 안 돼?”송민준은 태연한 표정으로 송민아를 바라보며 말했다.“그럼 네가 좀 더 분발해. 네가 앞가림 잘해서 내 일을 덜어주면 나도 제대로 쉴 수 있을 거야.”송민준이 ST 그룹을 관리하기 시작하면서부터 회사 규모가 많이 발전했지만, 송민아는 부모 밑에서 한 번도 회사 일에 대해 야망을 품어본 적이 없다.여자에게 사업이 있어야 한다는 것을 알지만 송민아는 집안 사업에 손대고 싶지 않았다.오빠인 송민준은 겉으로 보기엔 다정하고 점잖아 보이지만, 권력에 대한 욕심이 아주 컸다. 그녀는 자기 눈으로 직접 자신의 사촌 형제들이 어떻게 오빠를 오만하게 대하던 데로부터 공손하게 모시는지를 보았다.그래서 송민아는 ST 그룹의 사업에 손댈 생각이 전혀 없었다.“난 회사 일에 관심 없어. 오빠, 나한테 기댈 생각하지 마.”송민아가 서둘러 말했다.“민준 씨, 먼저 일 보세요. 저와 인혁 씨가 민아 곁에 있을게요.”고은서가 나서서 얘기했다.송민준은 거절하지 않고 주인혁에게 예의상 한마디 물었다.“인혁 씨, 지난번 문제는 잘 해결되셨나요?”“네.”주인혁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누나한테서 들었어요. 민준 씨가 저를 위해 신경을 많이 썼다고 하더라고요. 정말 고마웠어요.”송민준이 방긋 웃으며 말했다.“별말씀을요. 제가 도운 게 별로 없었어요.”간단히 대화를 나눈 후 송민준은 자리를 떠나려 했고 송민아는 그를 차까지 배웅했다.“왜? 사과하는 의미로 선물이라도 사줘?”송민준은 송민아의 생각을 알아차리고 물
송민준이 말했다.“내가 성격이 차갑고 사람들과 거리를 두니까 은서 씨가 나를 경계하는 것도 당연한 일이야. 너도 계속 날 무서워했잖아.”송민아는 말문이 막혔다.송민아는 확실히 어릴 때부터 송민준과 가깝게 지내지 않았다. 송민준은 늘 부모보다 엄격했기에 송민아는 송민준이 자신을 좋아하지 않는다고 생각했다.해성에 온 이후로 두 사람의 관계가 많이 가까워졌고, 송민아도 점점 송민준을 신뢰하게 되었다.지금 송민준이 이렇게 자신을 조롱하자 송민아는 약간의 죄책감을 느꼈다.“오빠, 어릴 때는 내가 철이 없었어. 그런데 지금은 오빠를 완전히 이해해. 걱정하지 마. 은서 쪽에는 내가 기회를 봐서 좋은 얘기 많이 해줄게. 은서가 오빠에 관한 생각을 바꾸는 날이 올 거야.”송민준은 송민아의 어깨를 가볍게 두드리며 말했다.“괜찮아. 너무 애쓰지 마.”...송민준을 배웅한 후 송민아는 다시 농장으로 돌아왔다.이때 고은서는 나무로 만든 그네 의자에 앉아 살랑살랑 흔들거리며 싱싱한 토마토를 깨작거리고 있었다.“인혁 씨는?”송민아는 고은서의 옆에 앉아 함께 그네를 타기 시작했다.“너희들이 전에 딴 채소를 부엌으로 나르고 있어.”고은서는 토마토를 먹으며 물었다.“민준 씨 갔어?”송민아는 고개를 끄덕였다.“오빠도 더 있고 싶은데 처리하지 않으면 안 되는 급한 일이 생겨서 먼저 갔어.”고은서는 고개를 끄덕이며 동의했다.“일부터 처리해야지.”“우리 오빠가 ST 그룹을 총괄하고 있어서 때때로 엄격하지 않으면 사람들이 잘 따라주지 않아.”송민아가 덧붙였다.“그래서 겉으로 보기에 다가가기 힘들지만 사실 그렇지 않아. 우리 오빠도 알아 봐주는 사람이 있길 원해.”고은서는 계속 토마토를 먹으며 얘기를 들었지만 들을수록 기분이 이상했다.“민아야, 어떻게 배웅 한 번 하더니 태도가 180도 바뀌었어? 무슨 일 있었어? 아니면 회사에 몹시 어려운 일이 생긴 거야?”“아니, 그런 게 아니야.”송민아는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 몰라 마음이 답답했다. 그녀는 머리를 긁
곽승재를 보자 고은서는 미간을 찡그렸다.‘이 농장이 이렇게 유명한 장소인가? 시은에 이어 곽승재까지 만나다니.’송민아는 곽승재를 보자 왠지 모를 죄책감이 들었다.그녀는 곽승재가 고은서에 대해 마음을 접지 못했다는 것을 잘 알고 있기에, 방금의 행동이 약간 마음에 걸렸다.하지만 송민아는 여전히 용기를 내어 곽승재에게 대답했다.“곽 대표님, 저의 오빠가 주견이 있는 건 오빠 일이고 오빠를 도와주는 건 제 마음이죠.”곽승재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담담한 표정으로 고은서를 위아래로 훑어보고는 감정을 드러내지 않으면서 말했다.“고 대표님은 참 인기가 많으시네요.”고은서는 멀리서 뛰어오는 여자의 모습을 힐끗 보고는 비웃는 말투로 대꾸했다.“그쪽도 마찬가지잖아요.”“곽 대표님, 한참 찾았잖아요. 여기에 계셨네요.”마재경이 숨을 헐떡이며 달려왔다.“고은서 씨가 여긴 어쩐 일로 오셨어요?”마재경의 얼굴에는 실망과 원망이 고스란히 드러났다.고은서는 곽승재를 힐끗 보며 말했다.“곽 대표님, 설명 좀 해주시겠어요?”곽승재가 입을 열기도 전에 마재경이 친근하게 그와 팔짱을 끼며 말했다.“고은서 씨, 곽 대표님은 제가 교외 나들이를 하고 싶다고 해서 같이 온 거예요. 혹시 저희 일정을 수소문해서 일부러 여기까지 찾아오신 건 아니죠?”“머리가 나쁘면 병원에 가봐요. 마침 여기에도 의사가 있어요.”송민아가 참지 못하고 나섰다.“우리가 여기에 온 지 반나절도 지났어요. 일부러 쫓아온 게 누군지 뻔하지 않아요?”마침 주인혁이 그들을 향해 걸어오고 있었다.상황이 심상치 않음을 눈치챈 그는 재빨리 고은서와 송민아 앞으로 다가갔다.지난번 레스토랑과 엘리베이터에서 있었던 사건 이후, 마재경은 더 이상 고은서를 쉽게 건드리지 못했다.그녀는 곽승재를 바라보며 애처롭게 말했다.“곽 대표님, 아무도 저를 반겨주지 않네요. 다른 곳으로 가볼까요?”곽승재는 머루처럼 검은 눈동자로 고은서를 흘겨보고는 고개를 끄덕였다.“그래.”마재경이 만족스럽게 말했다.“곽 대
지난번 숙모에게 가방을 선물했을 때, 숙모가 엄청나게 기뻐했던 모습이 순간 떠올랐다.그래서 이번엔 삼촌에게도 뭔가를 사서 드리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고은서는 노 사장님에게 코담배병을 어디서 샀는지 물어봤다. 그리고 가족에게 드릴 선물로 하나 사고 싶다고 말을 덧붙였다.“이건 친구가 선물한 거라 어디서 샀는지는 나도 잘 모르겠네.”노 사장님은 미안한 듯 말했다.고은서는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괜찮아요, 그냥 예뻐서 한번 여쭤본 거예요. 나중에 백화점 가서 한번 골라볼게요.”“아가씨는 참 효심이 깊구먼.”노 사장님은 칭찬을 몇 마디 건넨 뒤, 주문한 메뉴를 주방으로 가져갔다.“은서 씨 아버님께서 코담배병을 좋아하시나요? 선물하시려고요?”여재훈이 부드럽게 물었다.고은서는 고개를 저었다.“전 아버지가 없어요. 삼촌께 드리려는 거예요.”여재훈은 조금 놀란 표정이었다.그는 고은서를 몇 번밖에 만나지 못했기에 그녀의 가정사에 대해서는 잘 알지 못했다. 그래서 그녀에게 아버지가 없다는 사실도 오늘 처음 들었다.“죄송합니다. 그런 줄도 모르고...”여재훈은 곧바로 사과했다.고은서는 별일 아니라는 듯 웃었다.“괜찮아요. 저희 가족끼리도 잘 지내고 있어요.”착각일지도 모르지만, 여재훈은 고은서의 그 미소는 어딘가 익숙하다는 느낌을 받았다.그때 여재훈의 휴대전화 벨 소리가 울렸다.전화번호를 확인한 그는 곧바로 정신을 차리고 전화를 받았다.“시은아, 왜 그래... 주사 맞는 게 당연히 좀 아프지. 하지만 주사를 안 맞으면 어떻게 낫겠어... 알겠으니깐 떼쓰지 말고, 의사 말 잘 들어.”전화를 끊고 나서 여재훈은 고은서에게 간단히 상황을 설명했다.“시은이가 아픈데 주사 맞기 싫다고 하네요.”고은서는 여시은의 이름에 반응이 컸다. 예전에 여시은에게 학대받다 죽은 쿠아가 떠올랐다. 그 기억 때문에 속이 불쾌해지고 분노가 스멀스멀 올라왔다.그녀는 말없이 찻잔을 들어 한 모금 마셨다.여재훈은 고은서의 반감을 눈치채지 못할 리 없었다.그는 조심
여재훈의 말을 들은 고은서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고은서는 여시은이 아픈 시기가 참으로 절묘하다고 생각했다. 아마도 밖의 여론이 여시은에게 불리해서 고은서를 만나고 싶지 않았을 뿐일 것이다.요 며칠, 인터넷에서는 여시은과 관련된 뉴스가 아직 완전히 사라지지 않았다.고은서가 KK한테 도움을 요청한 것 외에도, 아마 곽승재도 뒤에서 힘을 써준 것 같았다.“원래 연회 다음 날에 시은이를 데리고 직접 사과드리려고 했는데, 며칠간 일이 좀 많아서 오늘로 미뤄졌어요.”여재훈은 이어 말했다.“오늘 아침에 갑자기 시은이가 열이 나서, 제가 혼자 찾아오게 됐습니다.”“은서 씨, 지난 일은 전부 시은이의 잘못입니다. 제가 대신 사과드리겠습니다.”여재훈은 미안한 표정으로 말했다.고은서는 담담하게 웃으며 대꾸했다.“재훈 씨의 사과는 저한테 너무 과분해요. 다만 저를 나쁜 사람으로 오해하지 않으셨으면 좋겠어요.”고은서가 지난번 여씨 가문에서 있었던 일을 언급하고 있다는 걸 알아챈 여재훈은 마음이 더욱 불편해져났다.“제가 도우미와 시은이의 말만 믿었네요. 시은이에게는 그 일에 대해 이미 훈계했고, 요 며칠 집에서 반성하고 있습니다.”고은서는 여시은이 그저 여재훈에게 보여주기 위해 반성하는 척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녀는 결코 자기 잘못을 인정하지 않았을 것이다.그러나 여재훈은 여시은을 여전히 굳게 믿고 있었고 그녀의 이중적인 모습에도 크게 실망하지 않은 듯했다.고은서가 더 이상 말을 잇지 않자, 운전 중이던 여재훈도 잠시 침묵을 지켰다.얼마 지나지 않아, 두 사람은 한적한 곳에 있는 개인 요리 식당에 도착했다.그 식당은 규모가 너무 크지는 않았지만 분위기는 엄청 좋았다.정원에는 다양한 희귀한 꽃들과 식물들이 놓여 있었고 작은 인공 폭포와 휴식용 테이블과 의자들도 마련되어 있었다.입구 쪽의 돌 테이블 위에는 하얀색의 통통한 고양이 두 마리가 게으르게 햇볕을 쬐고 있었다.잔잔하게 흘러나오는 음악을 들으니 고은서의 마음이 한결 차분해지는 것을 느꼈다.
송민아가 입을 삐죽이며 말했다.“저번에 네가 너무 진지하게 말하길래, 나 진짜 겁먹었잖아.”고은서가 다시 한번 웃으며 잡담하듯 물었다.“민아야, 너 예전에 말했잖아. 너랑 네 오빠는 엄마가 다르다고. 그럼 네 아빠랑 네 오빠 엄마는 이혼하신 거야?”송민아는 사무실 밖을 슬쩍 확인했다. 그리고 아무도 없는 걸 확인하고 조용히 말했다.“몰래 엄마한테 물어봤는데, 우리 오빠 엄마는 아빠랑 혼인신고도 안 했대. 둘이 약혼까진 했는데, 무슨 이유인진 모르겠지만 오빠 엄마가 아빠랑 결혼하길 거절했대.”고은서는 눈썹을 찌푸렸다.‘설마 송민준의 엄마도 결혼 안 하고 그를 낳은 걸까?’지난번 고은서가 송민준과 함께 바에서 우연히 만났을 때, 그가 그녀를 집까지 데려다주면서 송민준은 어릴 때부터 보호만 받고 자라서 사람에 대한 경계심이 없다고 고은서한테 말한 기억이 있다.그때 그의 말투는 평소의 부드러운 말투가 아니라 약간의 조롱 섞인 느낌이었다. 마치 그의 어린 시절이 순탄치 않았다는 듯이.‘혹시 송민준의 어머니가 결혼도 안 하고 그를 낳아서 상처를 받은 탓일까?’“은서야, 이건 진짜 너한테만 말한 거니까, 절대 우리 오빠한테 묻지 마!”송민아가 신신당부하면서 말했다.“오빠는 이 얘기를 누구한테도 한 적 없어. 분명히 신경 쓰고 있다는 거야. 우리 엄마가 말하는 데 이 사실을 아는 사람은 거의 없더래.”“오빠는 혼자 살긴 해도 우리 엄마한테는 되게 예의 바른 거 있지. 나도 이 비밀 듣기 전까진 우리 둘이 같은 엄마 뱃속에서 태어난 줄 알았어.”고은서는 절대 이 비밀을 다른 사람에게 말하지도, 송민준에게 묻지도 않겠다고 약속했다.“민아야, 혹시 너희 엄마가 네 아빠의 다른 연애 상대에 대해 말한 적 있어?”고은서는 궁금한 것이 있으면 참지 못하고 묻는 성격이었다.혹시라도 송민아의 어머니가 송민준 부모의 관계에 끼어든 거라면 송민아의 어머니가 뭔가 알고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한 것이다.“그냥 어른들 옛날 연애사에 호기심이 생긴 거야. 만약 불쾌했
송민준의 단어 사용은 꽤 신박했다.그는 “어젯밤 그 일은, 네가 의도한 거야?”라고 물었다. “어젯밤 무슨 일이 있었던 거야?”가 아니라.그러니까 송민준의 말뜻은 그가 어젯밤 일이 여시은을 고의로 함정에 빠뜨리려고 한 고은서의 계획이었음을 알고 있다는 건가?하지만 그 테라스는 비교적 한적했고 로마식 기둥이 시야를 가려 일반적으로는 사람들이 잘 알아채기 어려운 장소였다.고은서가 로비에서 넘어졌을 때 여시은은 빈 와인잔을 들고 그녀 앞에 서 있었다. 이 상황을 봤을 때 대부분의 사람들은 여시은이 고은서를 민 것으로 생각했을 것이다.그런데 어떻게 송민준은 고은서가 여시은을 속이기 위해 고육지계를 쓴 걸 알아챈 걸까?고은서는 아예 직설적으로 물었다.“민준 오빠, 왜 그렇게 물어보는 거야? 설마 어젯밤 내가 넘어졌던 게 자작극이라고 생각한 거야?”그 말을 듣자 송민준은 웃으며 물었다.“은서야, 그런 뜻이 아니야. 난 그냥 그 농장 영상 말이야, 그걸 일부러 어젯밤 그 시점에 터뜨린 건지 궁금해서 물어본 거야.”알고 보니 송민준은 농장 영상을 묻고 있었던 것이다.그날 송민준의 컴퓨터에서 영상을 확인하고 난 후, 송민아가 고은서에게 이 영상을 바로 여재훈에게 전달할 거냐고 물었을 때, 고은서는 송민준을 경계해 일부러 연회 이후에 결정하겠다고 말했었다.하지만 실제로는 연회 그 자리에서 바로 그 영상을 공개해 버렸다.송민준이 의심하는 것도 정상이다.“맞아.” 고은서는 고개를 끄덕였다.“원래는 어젯밤이 지나고 여재훈 씨를 따로 찾아가려고 했는데, 그 상황에서는 여시은이 그런 행동을 할 만한 동기를 증명하려면 그걸 꺼낼 수밖에 없었어.”송민준은 고개를 끄덕였다.“다른 뜻은 없었어. 그냥 궁금해서 물어본 거야. 네 선택이 맞아, 난 항상 널 지지할 거니깐.”그의 표정을 본 고은서는 확신했다. 송민준은 고은서가 아직 그를 경계하고 있다는 걸 눈치챘을 것이다.그의 성격상, 어젯밤 그녀가 계획적으로 움직였다는 것쯤은 쉽게 짐작했을 테니까. 하지만 송민준
박지연은 계속해서 불만을 터뜨렸다.“내가 보기엔 여시은은 태생이 못돼먹었어!”“이번에 그렇게 크게 당했으니 더더욱 널 원망할 거야. 너 조심 좀 해.”박지연이 걱정스럽게 당부했다.고은서는 고개를 끄덕였다.이미 각을 세우기로 마음먹었기에 여시은과 평화롭게 지낼 생각은 애초에 없었다. 앞으로는 여시은을 더 철저히 경계할 것이다.“듣자 하니 곽승재가 내내 널 감싸줬다며? 너한테 점점 마음이 가는 모양이야.”박지연이 코웃음을 쳤다.어젯밤 곽승재가 고은서를 계속 도와줬던 건 사실이었다. 증거를 공개하자고 제안한것도 곽승재의 생각이었고 마지막에 그녀를 집까지 데려다줬다. 곽승재가 고은서에게 큰 도움을 준 셈이었다.하지만 고은서는 곽승재에 대한 이야기를 박지연과 깊이 나누지 않았다.잠시 다른 이야기를 하던 중 박지연이 고은서에게 뜬금없는 소문 하나를 전했다.“우리 과장님한테서 들었는데, 어제 혜린 씨가 다니는 병원에 조 여사님이 찾아가서 난리를 쳤대. 혜린 씨 남자관계가 복잡하다고, 다른 남자랑 팔짱 낀 사진까지 들고 와서 공개하면서 혜린 씨랑 그 자리에서 머리끄덩이 잡고 싸움 났대!”고은서는 지난번 소동 이후 손자를 중시하는 조수연이 한동안은 조용할 거라 생각했었다. 그런데 고작 며칠 만에 또 난리를 친 거였다. 조수연의 전투력은 엄청 대단했다.“아니, 그러다 혜린 씨 혹시라도 애를 지우기라도 하면 어떡하려고 그래?”고은서가 물었다.박지연은 말했다.“조 여사님 말로는 혜린 씨 뱃속 애가 자기 아들 애가 아닐 수도 있다고 의심해서 혜린 씨를 끌고 가서 친자 확인하자고 했대. 그래서 둘이 몸싸움까지 벌어져서 이미지도 최악이라 혜린 씨는 한 달 정직당했어.”“혜린 씨 배속에 애가 온승준 씨 애가 아니라고? 그럼 도대체 왜 그렇게까지 그 집에 들어가려고 애쓰는 거야? 그냥 진짜 애 아빠랑 결혼하면 될걸...”고은서는 도무지 납득이 가지 않았다.“소문엔 그 남자가 유부남에 애까지 있다고 하더라. 자세한 건 나도 몰라. 그냥 과장님이 흘린 얘기야.”
여시은은 여전히 여재훈의 다리를 붙잡고 불쌍한 표정을 지으며 물었다.“그럼, 아빠가 생각하시는 해결 방법은 뭐예요?”여재훈은 여시은에게 홍보팀을 통해 자신이 저지른 잘못에 대해 공개 사과하고, 개인적으로 고은서에게 직접 진심으로 사과한 뒤 집에서 2주 동안 자숙하라고 말했다.“제 회사는 아직 개업식도 제대로 안 했는데 공개 사과를 하라뇨? 그럼 모든 사람들이 저를 웃음거리로 볼 거 아니에요!”여시은은 눈이 퉁퉁 부은 채 애원했다.“아빠, 저 은서한테 개인적으로 사과만 하면 안 돼요? 저도 아직 경험이 부족해서 사람들을 이끌기 힘든데, 공개적으로 사과하면 앞으로 누가 저를 믿고 따르겠어요?”“안 된다.” 여재훈은 단호하게 말했다.“이 일은 이미 파장이 커졌고 많은 사람들이 너를 지켜보고 있어. 그러니 모든 사람에게 확실하게 해명해야 한다.”“시은아, 잘못을 저지른 건 무서운 일이 아니야. 진심으로 뉘우치고 성실하게 사과하면 은서 씨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들도 너에게 다시 기회를 줄 거다.”여재훈은 계속해서 말했다.“사람은 자기가 저지른 잘못에 책임질 줄 알아야 한다. 네가 잘못했는데 내가 덮어주면 그건 너를 망치는 거야. 그러니까 이 일은 이렇게 결정된 거다!”여시은은 그 말을 듣자 속으로 분노가 치밀었다.‘고은서를 그저 연못에 좀 빠지게 했을 뿐인데 이게 뭐 그렇게 큰일이라고 이렇게까지 일을 키운단 말인가?’‘공개 사과라니, 이제 예전처럼 모두에게 존경받고 칭찬받던 모습은 끝이라는 거잖아.비록 인터넷의 영상은 지워지더라도 사람들이 나에 대한 나쁜 인상은 지워지지 않을 거란 말이야!’오늘 밤 그렇게 많은 부유층과 정재계 인사들이 있는 자리에서 그녀는 그들에게 최악의 인상을 남겼을 것이다. 해성에서 쌓아온 그녀의 완벽한 이미지가 단번에 무너진 셈이다.예전엔 그녀가 울기만 하면 여재훈은 안쓰러워하며 뭐든지 다 용서해 줬었다.‘지금은 무릎까지 꿇었는데도 아빠는 고은서 때문에 자신의 딸을 벌하려 한다니, 정말 나를 딸로 생각하긴 하는 걸까?’
여시은은 그 말을 듣자 눈이 시뻘게지면서 큰 소리로 외쳤다.“아빠, 제가 한 게 아니라니까요! 고은서가 일부러 저를 함정에 빠뜨린 거예요. 왜 저를 믿지 않으세요!”“시은아!”여재훈이 의자에서 벌떡 일어나며 난생처음으로 이토록 차가운 눈빛으로 딸에게 화를 냈다.“너는 어쩌다 이렇게 뻔뻔하게 거짓말만 하는 사람이 됐니!”“내가 사람을 시켜서 확인해 봤어. 연회장 CCTV 꺼놓은 거, 그거 네가 시킨 거더라.”여재훈은 딸을 억울하게 만들까 걱정돼 CCTV 관련 내용을 직접 조사했다.그런데 정말로 여시은이 꺼놓았던 것이었다.“네가 정말 은서 씨를 해치려는 의도가 없었다면 왜 CCTV를 미리 꺼놓은 거냐?”여재훈은 냉정한 태도로 물었다.여시은은 자신이 고은서의 계략에 걸려든 것을 그제야 깨달았다.고은서는 일부러 도발적인 눈빛으로 여시은을 자극했고 곧바로 테라스로 이끌어냈던 것이다. 모두 여시은한테 엿 먹이려는 행동이었다!여시은은 고은서가 쿠아가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격동적으로 행동해 자신을 밀칠 거라 확신했었다.왜냐하면 고은서는 지난번엔 쿠아를 다치게 한 일로도 크게 충격을 받았었기 때문이다.하지만 이번엔 반전이 생겼다.고은서는 오히려 침착하게 반격했고 지난번 농장에서의 ‘물에 빠진 사건’ 증거까지 들고나왔다.일이 이렇게 커져 버린 이상 여시은은 더 이상 변명할 여지가 없다는 걸 알았다.그녀는 결국 울음을 터뜨리며 여재훈을 향해 소리쳤다.“맞아요! 저 고은서가 너무 꼴 보기 싫었어요! 왜 아빠는 맨날 걔만 칭찬하세요? 이러니깐 제가 질투 나서 그런 거 아니에요? 그냥 고은서한테 꼽 주고 싶었어요!”“어차피 이미 벌어진 일이에요. 전 잘못한 거 없어요! 후회도 안 해요!”“너!”여재훈은 손을 번쩍 들어 여시은의 뺨을 때리려 했지만, 그녀의 눈물범벅이 된 얼굴을 보고는 차마 때릴 수가 없었다.“시은아, 아빠가 평소에 너를 어떻게 가르쳤니? 사람은 자기 양심에 떳떳해야 하고 올곧게 살아야 한다고 했잖아! 근데 너는 어떻게 질투심에 눈이
이미숙은 유튜브 영상을 보고 있었는데, 바로 여시은이 고은서 머리끄덩이를 잡아당겨 연못 가까이로 끌어당기는 장면이 재생되고 있었다.그 영상은 누군가가 휴대전화로 촬영해 올린 것 같았고 화질이 너무 좋은 건 아니지만 전반 상황을 알아보는 데에는 충분했다.영상의 끝에는 고은서와 여시은의 얼굴을 비춘 장면도 담겨 있었다.다소 초라해진 고은서는 곽승재의 부축을 받으며 옆에 서 있었다. 여시은은 얼굴이 벌겋게 달아오르고 눈빛엔 분노와 원망으로 가득했다.그 와중에 영상의 제목이 더욱 눈길을 끌었다.[재벌가 아가씨, 두 얼굴의 진실!]“사모님, 저 여자는 어쩜 저리 독하대요. 이렇게 심하게 괴롭히다니. 누가 폭로해 줘서 다행이지! 이제 세상 사람들 다 그 여자 피해서 다니겠어요!”이미숙은 화가 난 듯 말했다.고은서는 이번 일이 오래 퍼지지는 않을 거라고 생각했다. 여시은 뒤에는 여재훈이 있기 때문이다.하지만 이번 일로 여시은이 보기 좋게 망신을 당했고, 여재훈 역시 자신의 딸이 그렇게 순진하지 않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을 테니, 이번 목적은 어느 정도 달성되었다.고은서는 이미숙의 휴대전화 영상에 대뜸 ‘좋아요'를 눌렀다.한편, 여씨 가문에서.여시은 역시 유튜브 영상을 확인했다. 분노에 찬 그녀는 휴대전화를 바닥에 내던졌다.밖에 서 있는 박미화가 조심스럽게 말을 전했다.“시은 아가씨, 회장님께서 지금 바로 서재로 오시래요. 할 말씀이 있으시답니다.”이번이 박미화가 세 번째로 말을 전하러 온 것이었다.여시은은 곧바로 얼굴에 드리워진 분노와 짜증을 숨기고는 일부러 슬프고 억울한 표정을 지으며 방문을 열었다.박미화는 방안에서 반응이 없자 방문을 열려고 하였다. 때마침 여시은이 문을 열고 나오는 것을 보고 급히 손을 거두며 사과했다.여시은은 박미화의 손을 움켜쥐었다. 조금 전에 분노로 인해 물어뜯은 날카로운 손톱이 그녀의 살을 깊이 파고들었다. 그리고는 여시은은 울먹이는 말투로 물었다.“미화 언니, 아빠가 나한테 화 많이 나신 거야? 나 어떻게 해야
얼마 지나지 않아 운전기사가 차를 라이트문 아파트 앞에 세웠다.고은서와 곽승재는 위층으로 올라갔다. 고은서는 샤워하기 위해 자신의 방으로 직행했고 곽승재는 거실에 남았다.샤워를 마치고 나온 고은서는 의외의 광경을 목격했다. 곽승재가 거실 소파에 앉아 있었고 테이블 위에는 김이 모락모락 나는 차 한 잔이 놓여 있었다.“왜 또 왔어? 할 말 있어?”고은서가 물었다.곽승재는 태연하게 대답했다.“논의할 게 있어서. 그전에 이 콜라 생강차부터 마셔. 아주머니께서 특별히 준비하신 거야.”“사모님, 콜라 생강차는 감기 예방에도 효과적이거든요. 어서 드세요!”이미숙이 차를 가져오며 말했다.고은서는 감기에 걸릴까 봐 걱정하고 있던 참이었다. 그녀는 잔을 들어 올리더니 이상한 듯 물었다.“아줌마, 제가 방금 들어온 걸 보지도 못하셨을 텐데 어떻게 제가 감기 걸릴 줄 아시고 미리 차를 준비하셨어요?”이미숙의 눈가에는 잠시 당황한 기색이 스쳤다.곽승재가 자연스럽게 말을 이었다.“내가 알려줬어. 일단 마셔.”고은서는 고개를 숙여 생강차를 내려다 볼뿐 이미숙의 표정 변화를 주의 깊게 보지 못했다.물론 곽승재의 눈에 비친 기대감도 보지 못했다.생강차의 냄새를 맡아보니 생강 향이 꽤 진했다.고은서는 생강차를 조심스럽게 한 모금 마셨다. 콜라의 단맛과 생강의 톡 쏘는 맛이 어우러져 생각보다 맛이 나쁘지 않았다.“맛이 어때요?”이미숙이 물었다.“좋네요. 그런데 오늘은 생강을 좀 많이 넣으신 것 같네요. 예전에 만드신 것보다 더 매운데요.”이미숙은 잠시 망설이다가 급히 대답했다.“생강 양을 조절하지 못했네요. 주의할게요.”고은서는 더는 따지지 않고 다시 마시려던 참이었는데 곽승재가 말을 건넸다.“맛이 별로면 안 마셔도 돼.”고은서는 그를 흘겨보았다.“누가 맛없다고 했어? 아줌마가 정성스럽게 준비해주신 건데 끝까지 마셔야지.”“사모님, 도련님과 얘기 나누세요. 저는 할 일이 남아서 먼저 가보겠습니다.”이미숙은 두 사람의 언쟁을 피하려는 듯 급히 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