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국공 걱정 마시오.”검은 깃발을 든 군사들은 북진연에게 의자를 하나 가져오게 해, 의자에 앉아서 꽤 자유분방하게 말했다.“내 부하들은 모두 전장에서 수많은 적군을 죽인 숙련자들이오. 검을 다루는 일은 그들이 가장 잘하는 일이니, 당신과 당신 아들들이 우리 일을 방해하지 않는다면 저들도 당연히 정말로 누군가를 다치게 하지는 않을 것이오.”이 말은 오늘 감히 날 막으면 저들이 손을 쓸 것이라는 말이었다.온권승은 북진연의 행실이 항상 제멋대로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하지만 그가 진국공 저택까지 올 정도로 제멋대로 일 줄은 상상도 못했다.온권승은 싸늘한 얼굴로 말했다.“온사는 내 딸이오. 저 아이는 내 허가 없이 순간적인 충동으로 폐하께 출가하여 여승이 되겠다고 하였소. 지금 내가 저 아이에게 다시 폐하께 찾아가 어명을 거두라고 하였으니, 폐하께 저 아이는 가지 않을 것이라고 전하시오. 그리고 섭정왕께서 저 아이를 수월관까지 데려가실 필요도 없소.”북진연은 발걸음을 멈춘 온사를 보고 담담히 그녀에게 물었다.“이것은 당신의 뜻이오?”“아닙니다.”온사는 고민도 하지 않고 부정했다.“나라를 위해 기도하기 위해 출가하여 여승이 되겠다는 것이 여전히 저의 바람입니다. 앞으로도 절대 후회하지 않을 것입니다.”“온사!”온권승은 화를 내며 호통쳤다.“너 설마 지금 정말 온씨 가문과 연을 끊고자 하는 것이냐?”온권승의 분노를 마주한 온사는 차갑게 웃으며 말했다.“말했잖습니까, 아버지께서 도와주시면 감사하다고요.”순식간에 온권승의 낯빛이 무섭게 변했다.그가 이런 모습을 보이는 것을 거의 본 적이 없는 온사는 속으로 두려웠다.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그녀는 고집을 꺾지 않았다.이 모습을 본 북진연은 온사의 입장을 확인하고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알겠소. 시간이 꽤 지났으니, 성녀님께서는 서둘러 채비를 마치시오.”이 말을 들은 온사는 더 이상 온권승의 얼굴은 고려하지 않고 뒤로 돌아 종종걸음으로 자리를 떴다.온권승은 다시 북진연을 보며 차가운
다음 생에는 어머니가 다시는 온씨 가문 사람들 만나지 않도록 기도할 것이다.곧 온사는 진국공 저택의 앞뜰로 돌아왔다.북진연을 보자 마치 이미 지겹도록 기다린듯했다. 그녀는 급히 앞으로 가 그에게 말했다.“섭정왕 전하, 채비를 마쳤습니다.”“그럼 가시지요.”북진연은 몸을 일으켜 자리를 떴다.온사가 곧 따라갔다.온자신 일행도 가려고 했지만, 검은 깃발을 든 군사들의 칼 때문에 갈 수 없었다.그저 온사가 정말 북진연을 따라가려는 모습을 지켜보던 온자신은 참지 못하고 큰 소리로 외쳤다.“온사! 네가 그저 이렇게 가버리면 아버지와 우리에게 떳떳할 수 있겠느냐? 넌 언젠가 후회할 것이 두렵지도 않는 것이냐?!”이 말을 듣자 온사는 뒤돌아 그를 바라보며 한없이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저 온사는 단 한 번도 당신들에게 떳떳하지 않았던 적이 없었습니다. 그리고 앞으로도 저는 절대 후회하지 않을 것입니다.”말을 마치고 그녀는 마차에 올랐다.북진연도 뒤돌아 말에 올라타 군사를 이끌고 앞장섰다.그가 ‘이랴’소리를 내며 검은 깃발을 든 군사들을 데리고 남산으로 향했다.이때 다른 한쪽.온권승과 큰 아들은 궁으로 들어가 예상외로 쉽게 서재로 가 정무를 보고 있는 왕을 만날 수 있었다.“폐하 제 다섯째 동생 온사는 충용후 저택 최세자에게 파혼당한 뒤, 순간적인 충동으로 괴로워하여 폐하께 찾아와 출가하여 여승이 되게 해달라 도움을 청한 것입니다. 만약 그녀가 오늘 정말 수월관으로 가 출가한다면 제 다섯째 동생은 앞으로 평생 푸른 등불과 함께할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폐하, 제 철없는 딸은 지금 후회하고 있습니다. 폐하께서는 어명을 거두시어 소신의 딸이 돌아올 수 있게 해주시옵소서. 소신이 앞으로 아이를 잘 다스려 다시는 소란을 피우는 일이 없도록 하겠나이다.”온권승과 온장온 부자 두 사람은 함께 무릎을 꿇고 청했다.왕은 이 말을 듣고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만약 온사의 상처를 직접 보지 않았더라면 그는 아마 정말 이 두 여우의 말을 믿고 온사가 정말
서재를 나서면서 온권승과 온장온 부자 두 사람의 표정은 말로 설명할 수 없었다.온장온은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아버지, 다 이 아들의 잘못입니다. 제가 다섯째를 잘 다스리지 못한 탓입니다.”그 역시 후회가 되는 건 어쩔 수 없었다.어쩌면 온사가 그렇게 단호하게 출가하여 여승이 되겠다고 한 것이 그날 그가 너무 심하게 때려서 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곤장 50대를 쳤으니, 다섯째도 속으로 원망하는 것이 당연하다.다섯째가 너무 철이 없는 것이다.속으로 그렇게 억울했으면 어찌 그냥 말을 하지 않았을까?굳이 이렇게 일을 크게 벌여야 속이 후련했을까?비록 아까 왕이 언급했지만, 온장온은 마치 아직도 온사가 정말 온씨 가문을 떠나려는 이유를 알 수 없었다.온권승도 똑같았다.그는 덤덤히 손을 내저으며 말했다.“이것은 네 잘못이 아니다. 우리가 예전부터 그 아이를 방치하여 세상 물정을 알지 못해, 이와 같은 말도 안 되는 일이 일어난 것이다.”“하지만 다행히 폐하께서 아버지의 체면을 고려하여 한 번 더 기회를 주셨습니다.”온장온은 표정이 약간 풀렸다.“맞다. 네가 지금 바로 온사의 마차를 따라가거라. 반드시 그 아이가 출가하기 전에 잡아와서 더 큰 비웃음을 사지 않도록 해야 한다.”궁에 다녀온 온권승과 온장온은 헛걸음을 하지 않았다고 생각했다.결국 왕이 입을 열었다.온씨 가문이 조정에 오랜 시간 충성을 다한 것을 봐서 온권승 일행에게 기회를 주겠다고 했고, 그들이 온사를 타이를 수 있다면, 그도 온사가 출가하여 여승이 되는 것을 허가하겠다는 어명을 거두기로 하였다.그 후, 온장온은 말의 속도를 높여 남산으로 항했다. 그리고 온권승은 먼저 저택으로 돌아가 소식을 기다렸다.하지만 그들이 모르는 것이 있었다. 마차가 성에서 나간 뒤, 온사는 북진연을 계속 재촉했다. 그가 속도를 더 올려 더욱 빠른 속도로 수월관에 도착하게 하기 위함이었다.“섭정왕 전하, 청컨대 속도를 올려 최대한 빠르게 갈 수 있겠사옵니까?”온사는 두려움을 참고 천막을
그 뒤로 길은 굉장히 험했다.특히 전속력으로 달리는 마차 때문에 마차 안에 있던 온사는 몇 번이고 튕겨져 나갈 뻔했다.하지만 그녀가 원한 것이다.그래서 여기저기 부딪혀서 등 뒤의 상처가 아무리 아파도 그녀는 이를 악물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역시 전속력으로 달리는 행렬의 속도는 굉장히 빨랐다. 저번에 덕공의 마차를 탔을 때는 1시간이 지나서야 남산에 도착했는데, 이번엔 겨우 30분 만에 도착했다. 계속 흔들리던 마차가 갑자기 멈춰 서더니 밖에서 북진연의 목소리가 들려왔다.“도착했소.”온사는 너무 흔들리는 바람에 정신이 없었다.그녀는 앉아서 조금 진정한 후에야 천막을 젖히고 비틀거리며 내렸다.북진연은 말에 탄 상태로 그녀가 조심스럽게 마차에서 내리는 것을 보고 있었다. 그는 손에 채찍을 든 채 가서 부축하라는 말도 하지 않았다.그래도 온사를 보고 있다가 그녀가 매무새를 잘 정돈하고 땅 위에 똑바로 선 뒤에야 입을 열었다.“폐하의 명을 받들어 제가 함께 들어가 직접 제 눈으로 당신이 정식으로 출가하여 여승이 되는 것을 보고 떠날 것이니, 들어가시오.”북진연은 무뚝뚝한 말투로 이렇게 설명했다.“좋습니다. 수고하셨습니다, 섭정왕 전하.”온사는 깊이 생각하지 않았다.어쨌든 지금 그녀는 나라를 위해 기도하기 위해 출가하여 여승이 된 성녀라는 특수한 신분이니, 폐하께서 섭정왕 전하께 곁에서 지키라고 하신 것도 정상이다.북진연은 몸을 돌려 말에서 내린 후 검은 깃발을 든 군사들에게 밖에서 기다리라 명하고 온사를 데리고 수월관으로 들어갔다.잠시 후, 온사는 막수 스승의 앞으로 갔다.그녀는 조금 의외였다. 위대한 섭정왕 전하께서 수월관에 이렇게 익숙하신 줄 몰랐다.하지만 그녀도 더 이상 물을 수 없었다.대전 불상 앞에 도착했을 때, 막수 스승과 사람들은 이미 오랫동안 기다린 뒤였다.그녀가 방석 위에 무릎을 꿇고 앉자, 막수 스승은 그녀의 곁으로 와 그녀의 풋풋하고 앳된 얼굴을 보며 참지 못하고 다시 물었다.“정말 후회 없으십니까?”“후회
그 순간, 그녀의 속에서 마치 끈이 끊어지는 듯한 소리가 들렸다.마치 몸에 있던 모든 속박이 사라진 것 같았다. 그녀 역시 드디어 그녀의 두 번의 생을 고통스럽게 하던 곳에서 벗어난 것 같았다.눈물 한 방울이 그녀의 눈가에서 천천히 흘러내렸다.북진연은 멍하니 그녀를 보고 있었다.몇 년이 지나도 그는 이 장면을 평생 잊지 못할 것이다.그는 전장에서 수많은 살육과 죽음을 목격했고, 매번 다른 감정을 느꼈지만, 지금의 충격적인 감정과는 비교조차 할 수 없었다.이미 살육으로 혼탁해진 눈에 금색의 불상과 소녀가 비쳤다.그 불상의 빛이 쏟아지니 마치 구원을 받은 것 같았다.그리고 소녀 역시 환골탈태한 듯했다.*북진연이 떠날 때, 온사는 대문까지 그를 배웅했다.그녀는 대문에 가까이 가지 않고, 그저 멀지 않은 곳에 서서 합장을 하고 고개를 살짝 끄덕여 예를 갖추었다.“오늘 정말 감사했습니다, 섭정왕 전하.”만약 북진연의 도움이 없었다면, 그녀는 그렇게 쉽게 온씨 가문을 떠나지 못했을 것이다비록 온씨 가문을 떠났다고 해도, 도중에 다시 잡혀갔을 것이다.그래서 그녀는 북진연에게 감사해야 했다.“명을 받들었을 뿐이니, 고마워하지 않아도 되오.”북진연는 그녀의 눈을 피한 채 고개를 돌리고 벽에 가득한 푸른 덩굴을 바라보며 무심결에 물었다.“오늘 물건을 다 잘 챙기셨소? 두고 온 것은 없소? 만약 필요한 것이 있으면 내가 대신 가져다드리겠소.”온사는 고개를 저었다.그녀의 물건과 어머니의 물건 중에 중요한 것은 대부분 옥패의 공간에 넣어두었다.나머지 중요하지 않은 것들은 없어도 상관없었다.북진연은 뭔가 불만스러운 듯 무심코 곁눈질로 그녀를 보았다.“오늘 그렇게 급하게 준비했는데, 정말 다 챙긴 게 확실하오? 앞으로 하산이 쉽지 않을 것이니, 만약 필요한 것이 있다면 나중에 다른 사람 귀찮게 하지 마시고 지금 내게 말씀하시는 것이 나으실 거요.”온사는 생각해 보니 그런 것 같았다.나중에 또 다른 사람에게 도움을 청하는 것은 확실히 번거로운
온사는 묵묵히 자신을 타일렀다.이제 그녀는 출가한 사람이니 더 이상 쓸데없는 생각을 해서는 안 된다.이렇게 생각한 뒤, 온사의 마음은 빠르게 물처럼 평온해졌다. 오래된 우물에는 파도가 치지 않는 법이다.“그럼 다시 한번 섭정왕 전하께 감사드립니다.”“여승은 아직 정리할 짐이 남아있어, 더 이상 시간을 지체하지 않겠습니다. 조심히 가십시오, 전하.”온사는 시종일관 미소를 잃지 않고 돌아서서 관내로 들어갔다.그녀의 수척한 모습이 월동문 뒤로 사라지자, 북진연은 그제야 뒤로 돌아 수월관을 나섰다.그가 출발하려 할 때, 온장온은 여전히 대문 밖에 있었다.북진연이 나오는 모습을 본 온장온은 재빨리 앞으로가 급히 물었다.“섭정왕 전하, 다섯째는 어찌 되었습니까? 다섯째는 같이 안 나오신 겁니까?”검은 깃발을 든 군사들이 그를 세 걸음 밖으로 밀쳐냈다.북진연은 담담히 그의 눈을 보더니 말했다.“그 아이는 이제 이미 수월관의 여승이 되었기 때문에 당연히 나오지 않았습니다.”온장온은 그 말을 듣자 순식간에 낯빛이 변했다.“네?!”“하지만 폐하께서 이미 다섯째에게 다시 한번 기회를 주시기로 약조하셨습니다. 그저 저 아이가 후회하여 돌아가 잘못을 인정한다면, 폐하께서 어명을 거두시겠다 하셨습니다!”“제가 밖에서 그렇게 오랫동안 외쳤는데 섭정왕 전하께서는 설마 듣지 못하신 겁니까?”북진연은 부하들에게 고삐를 건네받으며 말했다.“들었습니다.”“들으셨으면서 왜 데리고 나오지 않으신 겁니까?!”온장온은 순간 놀라서 화를 내며 물었다.그러자 북진연은 바로 말에 올라타 높은 곳에서 그를 내려다보았다. 그 기세가 마치 하늘을 찌를 듯했다.“그 아이가 ‘후회하지 않는다’고 했기 때문이지요.”말을 마친 그는 더 이상 온장온과 많은 말을 하지 않고 말을 몰고 가버렸다.폭포 같은 은빛 머리카락이 바람에 부드럽게 휘날리는 모습이 마치 지금 북진연의 마음과 같았다.의서?의학을 배우려는 건가?배우기 어려울 것인데, 임씨 성을 가진 자들에게 달라고 해야겠군.
온모의 말을 듣자 온자신 일행은 모두 동의했다.“아버지, 막내 말이 맞습니다. 저희가 수월관에 가는 것은 쉽지 않지만, 막내가 간다면 스승님 역시 막을 이유가 없습니다.”온권승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역시 막내구나. 이번 일은 너한테 맡기마.”온모는 갑자기 가슴을 치며 말했다.“아버지, 염려 마세요. 제가 반드시 언니를 데리고 오겠습니다!”온자신이 웃으며 말했다.“막내가 가면 분명 성공할 것이야!”“맞아, 맞아. 막내는 이렇게 착하고 귀여우니, 수월관에 가서도 분명 스승님들의 사랑을 받을 거야.”“그때 가서 막내랑 같이 다섯째를 잘 타이르면 다섯째가 돌아올지도 몰라!”온모는 속으로 비웃고 있었다.그 늙은 여승들의 사랑은 받고 싶지 않았다.재수 없어.하지만 그녀는 순진무구한 웃음을 유지하며 가끔 칭찬을 받으면 얼굴을 붉히고 부끄러운 표정을 지었다. 그렇게 하니 그녀의 진짜 속마음은 아무도 알 수 없었다.온자신 일행이 계속 온모를 칭찬하고 있을 때.옆에 있던 온장온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있었다.그는 한 손으로 아버지의 팔짱을 끼고 애교를 부리는 온모와 딸에게 무한한 웃음을 내보이는 온권승, 그들의 곁을 둘러싸고 온모를 달래고 있는 동생들을 보고 있으니, 순간 머릿속에 수월관 앞에서 섭정왕이 한 말이 떠올랐다.그 아이가 후회하지 않는다고 했기 때문이지요.온장온은 또 한 번 의문이 들었다.다섯째가 왜 후회하지 않는다고 했을까?집안이 이렇게 화목하고 따뜻한데, 아버지는 자식들을 아끼고, 오라버니들은 동생을 아끼고, 가장 어린 여동생도 그렇게 양보하는데, 왜 돌아오지 않으려고 하는 걸까?비록 둘째가 가끔 때리기도 하고, 아버지도 가법으로 처벌하기도 했지만 그건 다 그 아이가 말을 안 듣고 철없이 행동해서 그런 것이 아닌가?설마 겨우 이런 일로 집에 돌아오지 않으려고 하고, 집안이 싫어진 건가?온장온은 갑자기 화가 났다.온사에게 화가 났고, 온사가 본인의 잘못을 전혀 반성하지 않은 것에 화가 났다.그는 자신에게도 화가 났다
그런데 이때!“큰일 났어요! 큰일 났어요!”급급히 달려온 하인이 당황한 얼굴로 소리쳤다.“둘째 도련님, 셋째 도련님, 부인의… 위패가 사라졌어요!”온자신과 온자월의 안색이 급변했다.“뭐라고? 너희들 뭐 하는 것들이야? 사당에서 위패가 사라졌는데 그걸 모르고 있었어?”“대체 어머니의 위패를 누가 가져간 것이야?!”온자월이 표정을 잔뜩 구기고 물었다.그러자 온자신은 갑자기 무언가 떠오른 듯, 온자월을 바라보며 말했다.“설마… 온사가?”“감히 어머니의 위패까지 가져가?”온자신은 크게 분노했다.“정말 도둑년이 따로 없네! 지가 무슨 자격으로 어머니의 위패를 가져가?”온자월의 표정도 좋지 않았다. 그는 생각할수록 온사가 한심하기만 했다.아버지의 허락도 없이 출가해서 승려가 된 것도 어이없는데 그 일 때문에 온 경성의 웃음거리가 되었을뿐더러 이제는 어머니의 위패까지 훔쳐가다니 말이다! “어쩐지 어제 계속 수상했어. 이럴 줄 알았으면 잘 감시하는 건데!”온자신은 분노에 얼굴이 시뻘겋게 달아올랐다.하지만 아직 그들은 온사가 어머니의 위패는 물론 혼수품과 유품까지 모두 가져간 사실은 알아차리지 못했다. 물론 발견하는 건 시간문제이지만 말이다.온자월이 싸늘한 얼굴로 말했다.“욕해도 소용없어. 어제 어머니의 위패를 들고 수월관에 들어갔을 거야. 이제 믿을 건 너뿐이구나, 온모야.”온자신은 온모를 바라보며 비장하게 말했다.“어떻게 해서든 온사랑 어머니의 위패를 집으로 데려와야 해.”“네, 오라버니들. 최선을 다해볼게요.”온모는 속으로 생각했다.‘그년이 노친네 위패까지 가져갔을 줄이야! 차라리 잘됐어! 안 그래도 어떻게 그 노친네의 위패를 사당밖에 버리고 어머니의 위패를 모실 생각이었는데. 일이 이렇게 쉽게 풀릴 줄이야.’그러고는 수월관으로 가서 작은 사고를 만들어 위패를 부순 후에 온사에게 뒤집어 씌워야겠다고 다짐했다.‘그럼 일거양득일 테잖아?’그러면 온사는 잘못을 저지르고도 반성은커녕 어머니의 위패까지 부수고 수월관을 시끄럽게 만
진국공부 서재.“아버지, 형님, 어찌 막내에게 이러실 수 있어요!”“후궁이 어떤 곳인지 뻔히 아시면서, 폐하께서 진국공 가문을 얼마나 견제하는지 아시면서 어떻게 막내를 그곳에 두고 와요!”“막내가 황궁에서 괴롭힘이라도 당하면 어떡해요? 우리가 옆에 없으면 누가 걔를 지켜줘요?”“왜 다들 대답이 없어요? 아버지랑 형님이 안 가면 제가 가요!”“이럴 줄 알았으면 막내를 연회에 보내는 게 아니었어요. 어떻게 애를 그런 곳에 버려두고 와요! 내가 거기 갔어야 하는 건데!”진국공 가문은 온모가 황궁에 남은 일로 완전히 아수라장이 되었다.정확히 말하면 온자월이 일방적으로 소란을 부리고 있는 거였다.온옥지는 온자월처럼 소리를 지르지 않았지만 매번 온자월이 소란을 피울 때 그는 온자월의 편에 섰다.온권승과 온장온 부자는 처음에는 인내심 있게 상황을 설명해 주었다. 그들이 온모를 버리고 온 게 아니라 온모가 고집을 피워서 황궁에 남은 거라는 말도 했다.하지만 온자월에게는 그런 설명이 통하지 않았다.“막내는 순진해서 후궁이 얼마나 위험한 곳인지도 모른단 말이에요. 아무리 폐하의 후궁에 아직 사람이 없다지만 앞으로는 누가 보장해요?”“폐하께서 막내한테 질려서 후궁 간택을 또 하면요? 그럼 수많은 여인들이 입궐하게 될 텐데 막내는 거기서 어찌 살아남아요?”이틀째 소란을 피우는 온자월 때문에 온권승은 이미 인내심이 바닥난 상태였다.그는 짜증스러운 어투로 말했다.“폐하께서 우리 진국공가를 견제하는 걸 알면 그분이 막내를 후궁으로 들이지 않을 것도 알지 않니.”“만약이라는 게 있잖아요!”온자월은 분노한 목소리로 말했다.“만약에 폐하께서 정말 막내를 후궁으로 들일 생각이면요? 막내를 인질로 잡고 아버지와 우리 진국공 가문을 협박할 생각이라면요?”“네가 그렇게 생각한다면 나도 할 말이 없구나.”더 이상 그와 입씨름하기 싫었던 온권승은 그대로 등을 돌려버렸다.그리고 이때, 옆에서 침묵만 지키고 있던 온장온이 담담히 말했다.“황비로 간택하여 우리 가문을
양 어멈은 태후의 심복이자, 태후가 온모에게 예의와 법도를 가르치라고 보낸 사람이었다.그녀는 온모의 요구를 단박에 거절했다.“죄송합니다, 아씨. 아씨는 아직 시골 촌티가 너무 나요. 빨리 궁중의 귀인이 되기 위해서는 엄격한 훈련을 다 통과하셔야 합니다.”촌티가 난다는 말에 온모는 금세 똥 씹은 얼굴이 되었다.‘이 할망구가 감히 날 모욕해?’온모는 이를 부드득 갈며 앙칼진 목소리로 말했다.“하지만 폐하께선 저에게 한눈에 반했다고 하셨는걸요. 만약 어멈과 예의 법도를 배우다가 얼굴을 다치기라도 하면 어멈도 곤란하지 않을까요?”온모의 뻔한 수작은 양 어멈에게 너무도 하찮은 수로 보였다.어멈은 부드러운 미소를 지으며 온모에게 말했다.“아씨, 그건 틀린 말씀이죠.”온모는 가소롭다는 듯이 말했다.“어디가 틀렸는데요?”“그 말 자체가 틀렸습니다. 폐하께서 아씨께 한눈에 반하여 아씨를 비로 들이겠다고 하셔서 제가 태후의 명을 받고 여기에 온 겁니다. 그런데 아씨는 열심히 배우지도 않고 외모만 신경 쓰고 계시니, 폐하를 얼굴만 보는 속된 사람으로 몰아가는 것 아닙니까?”양 어멈의 목소리가 날카로워졌다.그 말에 온모는 가슴이 철렁했다.“그… 그건 모함이에요! 제가 언제 폐하를 속된 사람으로 말했어요!”“아씨도 그게 아니라고 생각하신다면 제가 가르쳐 드릴 때 진지하게 임하십시오. 폐하의 총애를 등에 업고 이 늙은 것을 협박할 게 아니라요!”온모는 화가 치밀어 하마터면 머리에 이고 있던 찻잔을 떨어뜨릴 뻔했다.양 어멈은 담담한 표정으로 그녀를 부축하는 척하며 힘을 주어 온모를 바닥에 무릎 꿇게 했다.“아씨, 진국공 저택에 있을 때는 아무것도 배운 게 없나 보군요. 아씨가 입궁하려면 아직 멀었습니다. 제 눈에는 성에 차지도 않지만요.”“폐하께서 아씨를 가르치라고 저를 보냈으니 저는 열심히 임할 뿐입니다. 아씨께서 제가 가르쳐 드린대로 아침에 한번, 점심에 한번, 저녁에 한번 제가 드린 숙제만 완수하면 빠른 시일 내에 궁중법도를 익히고 폐하의 시침을
온장온은 순간 당황해서 어쩔 바를 몰라했다.“녹두과자 아니었어? 그럼 계화떡인가?”온사의 목소리가 더욱 싸늘해졌다.“계화떡이요? 확실한가요? 정말 그렇게 생각해요? 더 맞혀보세요. 어쩌면 매번 내가 가장 싫어하는 걸 말씀하시는지, 그것도 재능 아닌가요? 그만큼 제가 싫었고 관심이 없었던 거겠죠.”온장온의 얼굴이 창백하게 질렸다.“됐습니다. 내가 뭘 좋아하든 당신이랑 아무 상관없잖아요. 이런 사소한 일을 기억 못하는 것도 이해해요.”온사의 어투에는 진한 비웃음이 담겨 있었다.“난 싫어하지만 그걸 좋아하는 사람도 있지 않나요. 그러니 얼른 그거 갖고 식기 전에 오라버니가 가장 총애하는 동생한테 갖다주세요.”“아니야, 온사야 내 말 좀 들어봐. 내가 일부러 네가 싫어하는 녹두과자를 사온 게 아니야. 그냥 저도 모르게… 이걸….”온장온은 너무 당황스러워서 말도 제대로 하지 못했다. 그는 점점 더 얼굴을 들 수 없었다.다시 생각해 보니 녹두과자와 계화떡은 막내가 좋아하는 간식이었다.분명 온사를 찾아온다고 왔는데 온사에게 막내가 가장 좋아하지만 온사는 가장 싫어하는 걸 가져왔으니 얼굴이 화끈거렸다.온사가 화를 내는 것도 이해가 됐다.온장온은 손에 들린 녹두과자를 멍하니 바라보며 죄책감에 견딜 수 없었다.“온사야, 화내지 마. 다 내 잘못이야. 내가 가서 네가 가장 좋아하는 걸 사올게!”온사는 싸늘한 시선으로 온장온을 바라보며 말했다.“큰 오라버니, 내가 뭘 좋아하는지 아직 기억이 나요?”“기억나, 당연히 기억나지. 네가 가장 좋아하는 건… 좋아하는 건… 오리구이, 맞지?”온장온은 기대에 찬 얼굴로 온사를 바라보며 그녀의 입에서 긍정의 답을 기다렸다.하지만 온사는 말없이 한심한 얼굴로 그를 바라만 볼 뿐이었다.온장온은 그제야 알아차렸다.‘녹두과자도 아니고, 계화떡도 아니고, 오리구이는….’‘그래, 오리구이는 셋째가 좋아하는 거잖아!’어쩌다가 그것들을 온사가 좋아한다고 인지하게 된 걸까?온장온은 손에 들고 있던 녹두과자를 툭 하고
“제가 정말 그런 불경한 짓을 저지른다면 저는 사람도 아닙니다. 벼락 맞아 죽어도 불만이 없어요!”온장온은 수월관 밖에서 장장 한 시진을 기다리며 입에 침이 마를 정도로 사태들에게 사정했다.보다못한 사태가 와서 말을 전했지만 온사의 반응은 냉담했다.“안 가요.”그 말은 그대로 온장온에게 전해졌다.하지만 그는 이렇게 포기하고 싶지 않았다.“제발 동생 좀 설득해 주세요. 꼭 만나야 합니다.”“안 돼요. 성녀 전하께서 안 만나신다고 하면 안 되는 겁니다. 여기서 시간낭비 하지 말고 어서 돌아가세요.”안 그래도 진국공 가문이 마음에 안 들었던 사태들은 말만 전하고 바로 축객령을 내렸다.그렇게 그 뒤로 매일 온장온은 수월관을 찾아왔다.그는 오후 업무만 끝나면 집으로 돌아가지도 않고 바로 수월관으로 왔다.그가 매일 찾아와서 문을 두드리니 사태들도 수련에 집중할 수 없었다.무고 사저는 난감한 얼굴로 또 온사를 찾았다.“정말 끈질긴 사람이야. 강제로 침입한 건 아니지만 매일 찾아와서 꼭 널 만나야 돌아간다잖아.”막수와 함께 새로운 독약을 연구해낸 온사는 손을 씻고 돌아와서 말했다.“알겠어요, 사저들은 일단 돌아가 계세요. 제가 해결할게요.”그 말을 들은 무고 사저는 저도 모르게 등골에 소름이 돋았다.“사매야, 흥분하면 안 돼. 비록 짜증나게 굴긴 하지만 전에 왔던 그 녀석들과 비교하면 양반이잖아. 시비를 걸려고 온 건 같지 않았어. 그냥 몇 마디 해서 좋게 돌려보내.”온사는 미소를 지으며 답했다.“예, 제가 알아서 할게요.”온장온이 온 이유는 뻔했다.온씨 가문 인간들이 이곳까지 찾아왔다면 분명 어머니의 시신을 돌려받기 위해서일 것이다.이미 어머니를 묻어드렸지만 그렇지 않다고 해도 절대 돌려줄 생각은 없었다.그러니 온장온이 매일 찾아와도 헛수고였다.사저와 사태들의 수련을 방해할 정도가 아니라면 그냥 무시하고 싶었다.“온사야!”드디어 온사를 마주한 온장온은 반가운 얼굴로 그녀를 불렀다.“드디어 나와줬구나. 오라비가 오늘 정성루에
“전하께서 어쩐 일이십니까?”온사는 놀란 눈으로 상대를 바라보며 물었다.매년 동지 때 조정은 대신들을 초대해 연회를 베푼다는 걸 그녀도 알고 있었다.허나 지금은 진국공부의 적녀가 아니니 참석할 이유가 없었다.황제는 사람을 보내 그녀의 의중을 물었으나 그녀는 출가인이 참석하기에 좋은 자리가 아니라고 거절했다.비록 폐하는 괜찮다고 했지만 그녀는 황제의 명성에 해를 끼치기 싫었다.“연회 다 끝났어. 남은 치들은 공연이나 보고 술이나 즐기겠지. 그런 것들보다는 너와 한잔하는 게 더 즐거우니까 왔지.”온사는 눈을 치켜뜨며 새침하게 말했다.“저는 술을 마시면 안 되는 몸입니다.”“알아, 그래서 좋은 차를 가져왔어.”북진연은 찻잔을 내보이며 그녀에게 제안했다.“성녀 전하, 나와 한잔하시겠소?”온사는 진지한 얼굴을 한 그를 보고 미소를 지었다.“영광이죠, 섭정왕 전하.”그렇게 두 사람은 식탁에 마주앉았다.북진연은 미리 우려낸 차를 식힌 후에 적당한 온도의 찻물을 그녀의 잔에 부어주었다.온사는 상체를 살짝 비틀고 차 맛을 보았다.그러던 그녀의 눈이 반짝 떠졌다.청량하면서도 맛이 깔끔한 차였다.“군산은침이라고 차 중에서도 최상급으로 불리는 차 아닙니까? 어찌 폐하가 마시는 차를 가져오셨어요?”북진연은 웃으며 말했다.“오늘 연회에서 차 맛을 봤는데 네가 좋아할 것 같아서 폐하께 몇 통 달라고 청을 드렸지.”온사는 북진연이 자신의 취향을 너무 잘 아는 것 같아서 왠지 얼굴이 화끈거렸다.“두고 마시지 그걸 다 가져오셨어요?”“난 진한 차를 좋아해서 이건 나랑 안 어울려.”온사는 갑자기 그의 질병이 떠올랐다.“진한 차는 몸에 안 좋습니다. 혹시라도 어디 불편하시거나 하면 언제든 찾아오세요.”말을 마친 그녀는 북진연을 향해 부드러운 미소를 지었다.“전에 약속했지 않습니까. 전하께서는 저를 도와주시고 저도 제 능력이 닿는 한 전하를 돕겠다고요. 경을 읊는 건 그리 어려운 일도 아니니 기꺼이 도와드리겠습니다.”요즘엔 북진연이 통 오지를 않
“모든 걸 바치겠다라… 네 목숨도 말이냐?”북진연은 싸늘하게 식은 목소리로 되물었다.“물론이죠. 성녀 전하는 살육을 할 수 없는 분이지만 소녀는 달라요. 소녀는 전하의 가장 예리한 검이 되어 전하를 위해…”촤르륵!안란심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기다란 장검이 마차의 측면을 찔렀다. 검은 안란심의 목덜미를 아슬아슬하게 비껴갔다.안란심은 이마에 식은땀이 맺혔다.검을 내린 북진연이 말했다.“난 검이 많아. 굳이 너까지 필요하진 않단 얘기야. 그리고 무우를 너 같은 것에 비교하지 마. 다음에 또 이러면 그때는 경고로 끝나지 않을 거다.”말을 마친 그는 말에 올라 고요에게 지시했다.“저건 다 태워버리거라.”“예, 왕야!”유혹에 실패한 안란심은 결국 고요에게 쫓겨 마차에서 내렸다.고요는 그녀가 보는 앞에서 마차를 불태웠다.명백한 혐오에 안란심도 분노가 치밀었다.마음의 준비를 안 한 건 아니지만 이 정도로 섭정왕의 혐오를 살 줄은 몰랐다.물론 너무 쉽게 넘어온다면 오히려 재미없다고 생각했을 것이다.만 천하에 여인을 혐오한다고 이름을 알린 섭정왕 전하인데 온사에게만은 달랐다.누군가는 그가 그저 폐하의 명을 받들고 제 할 일을 한다고 하지만 그녀는 그 말이 믿기지 않았다.엉망진창이 된 기분을 추스른 안란심은 심복을 불러 물었다.“오늘 연회에서 무슨 일 있었어?”북진연을 유혹하려고 연회가 끝나기도 전에 자리를 비웠기에 연회의 상황을 아직 모르고 있었다.심복은 미소를 지으며 그녀에게 말했다.“아가씨께서도 자리에 계셨어야 했는데, 정말 재미난 구경거리가 있었죠.”“그래? 무슨 일인데?”“음… 그러니까….”심복은 연회에서 황제가 온모를 비로 간택한 이야기를 상세하게 설명했다.“폐하께서 온모한테 오늘부터 태후궁에서 예의법도를 배우라고 했다는 거니?”너무 뜻밖의 일이라 안란심도 적잖이 놀랐다.첫눈에 반했다는 건 말도 안 되는 소리였다. 온모의 외모는 평범한 축에 속했고 여린 척하는 것 말고는 내세울 게 하나도 없었다.역시나 예의법도를 가르
어린 황제는 그제야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었다.“좋다.”그는 고개를 끄덕인 뒤에 말을 이었다.“허나 네 아비는 네가 시골 출신이라고 궁중 법도에 대해 아무것도 몰라 우려하고 있으니, 짐의 비가 되기엔 좀 힘들 것 같구나.”그는 턱을 괴고 미간을 찌푸린 채, 큰 고민에 빠진 시늉을 했다.그 말을 들은 온모는 다급히 말했다.“아닙니다! 전혀 힘들지 않아요! 태후마마께 궁중법도를 배우면 된다고 하시지 않았습니까? 최선을 다해 열심히 배워서 빨리 폐하의 비가 되고 싶습니다!”그러면서도 온모는 속으로 아버지를 원망했다.‘폐하께서 나한테 첫눈에 반했다는데 좋은 말은 못할 망정! 폐하께서 마음을 접기라도 하면 어쩌려고!’온모는 황제가 명을 철회할까 봐 조마조마한 얼굴로 황제를 바라보았다.황제는 만족스러운 얼굴로 고개를 끄덕이더니 말했다.“그래. 참으로 사려 깊은 여인이로구나. 그렇다면 오늘부터 태후궁에서 법도를 배우도록 하거라.”온권승은 그 말을 듣자 속으로 한숨을 쉬었다.그가 자리로 돌아오자 온장온은 다급히 아버지의 옷깃을 잡고 말했다.“아버지, 이를 어쩝니까? 폐하께서 막내를 보는 눈빛이 애정하는 비를 보는 눈빛은 아니었어요!”온권승이 그걸 모를 리 없었다.장남도 눈치챈 일을 온모가 눈치채지 못한 게 한탄스러울 따름이었다.지금이 아니라 온가의 여식은 앞으로도 황제의 후궁이 될 가능성이 없었다.안 그래도 황제는 진국공 가문의 세력을 견제하는데 그들에게 권력을 쥐여줄 빌미를 줄리가 없었다.예전이었다면 가능했을지도 모른다. 그땐 북진연도 전장에 나가 있었고 진국공 가문은 후궁 선발에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었다.허나 하필 그때엔 황제가 너무 어렸고 수렴청정 중인 태후는 진국공부를 경계했기에 황제가 어리다는 이유로 줄곧 후궁 간택을 미뤄왔다.그렇게 시간이 흘러 드디어 폐하가 성년이 되자 북진연이 전장에서 승리하고 돌아왔다.황제파인 북진연이 복귀하자 태후는 실권을 내려놓고 조정의 결정권을 전부 황제에게 맡겼다.다만 후궁에 황후의 자리가 비어
이어지는 연회에서 온모는 어딜 가든 비웃음과 조롱의 대상이 되었다.그녀는 분해서 미쳐버릴 것 같았다.하지만 그녀가 보기에 아둔하고 사지만 발달한 무관 가문 여식들은 무슨 이유에서인지 조롱과 비난은 서슴지 않으면서도 절대 폭력은 행사하지 않았다.그들은 온모에게 온갖 굴욕감을 주고는 홀연히 자리를 떴다.그리고 또 다른 무리가 온모에게 다가왔다.같은 상황이 수차례 반복된 이후, 온모는 그들이 작정하고 왔다는 것을 드디어 눈치챘다.더 돌아다니다가는 또 비웃음이나 당할 게 뻔했기에 온모는 치미는 화를 억지로 참으며 자리를 지켰다.이곳에는 폐하와 태후, 그리고 아버지와 오라버니들도 계시니 아무도 쉽게 그녀를 괴롭히지 못할 거라고 생각했다.하지만 그건 그냥 시작에 불과했다.온모가 자리에 앉고 얼마 지나지 않아 어린 황제의 시선이 그녀에게 머물렀다. 그는 의미심장한 눈길로 그녀를 바라본 후에 웃으며 온권승에게 말했다.“진국공, 최근에 짐이 고민이 좀 있는데 해결해 줄 사람이 없어서 머리가 아프던 참이었소. 마침 오늘 진국공도 자리했으니 자네가 의견 좀 내주지 않겠나?”온권승은 흠칫하며 다급히 예를 행하고 말했다.“폐하의 고민을 해결해 드리는 건 대신으로서 당연히 해야 할 일이지요. 무슨 일로 고민이십니까? 제 능력이 닿는 한 도와드리겠지만 제 능력 밖의 일이라면 괜히 폐하의 시간만 뺏지 않을까 싶습니다만.”“그리 심각한 일은 아니오. 다만 이 고민을 해결해 줄 수 있는 사람이 진국공뿐이라 얘기를 꺼낸 거요.”말을 마친 어린 황제는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었다.아니나다를까, 황제는 고개를 돌려 온모를 바라보더니 부드러운 미소를 지으며 말을 이었다.“짐이 즉위한 이래로 나이가 어리고 정무가 다망하여 후궁이 줄곧 비어 있었는데 지난번 어마마마의 생신연에서 진국공의 막내딸을 본 이후로 계속 그 모습이 머릿속에서 떠나지 않는구려. 첫눈에 반한 게 아닌가 싶소.”현장에 갑자기 정적이 찾아왔다.온모는 떨떠름한 얼굴로 황제의 말을 곱씹다가 믿을 수 없다는 표정
한심하다는 투의 말 속에는 짜증이 가득 담겨 있었다. 문관 수장인 진국공가의 딸이 무관 가문 아가씨들을 찾아갔으니 당해도 싸다는 어투였다.사실 예전의 진국공 가문은 완전한 문관파가 아니었고 오히려 가문에 무관 출신이 많았다. 다만 온권승이 집권하면서 완전히 문관 쪽으로 돌아섰고 나중에 란씨 가문과 정략혼인까지 하며 문관파에서 꽤 입지가 튼튼한 란씨 가문 덕에 온권승이 승승장구할 수 있었던 것이다.무관들은 예로부터 문관을 무시하고 혐오했는데 특히나 무관을 배신한 온권승은 그야말로 눈엣가시 같은 존재였다.그래서 진국공 가문이 아무리 잘나가도 무관들은 전혀 그들에게 굽히거나 양보하지 않았다.온권승과 척을 지는 위험을 감수하더라도 무관들은 자신들의 입장을 고수했다.하물며 무관파 출신 중에는 대단하신 섭정왕 전하도 있지 않은가.그는 섭정왕의 칭호를 받기 전에도 전장의 신이라는 칭호를 받은 인물이었다.대권을 잡은 후에도 그는 황실에 충성하며 어린 황제의 가장 충실한 신하가 되었다.그는 무관파의 명예이자 자랑이었다.전에는 섭정왕이 전쟁터에 나가 있어서 무관들이 문관들 앞에서 눈치를 많이 봤지만 섭정왕이 돌아온 지금 비실비실한 문관들의 눈치를 볼 이유가 없었다.그래서 요즘 무관들의 기세가 하늘을 찌르고 있었다.특히나 섭정왕께서 폐하의 명을 받들어 성녀 전하를 호위하게 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그들도 덩달아 성녀를 옹호하기 시작했다.성녀 전하가 그들이 가장 싫어하는 진국공의 딸이긴 하지만 섭정왕의 명이 곧 천명이었다.하물며 온사는 이미 가문과 연을 끊었으니 문제될 것도 없었다.어쩌면 성녀 전하도 정신을 차리고 보니 아비의 가식적인 본모습을 눈치채고 가문을 떠난 걸 수도 있었다.무관들은 그녀의 그런 행동이 정말 마음에 들었다.게다가 며칠 전에 들리는 소문에 의하면 진국공은 젊은 시절 부인을 배신한 것도 모자라 사생아가 적녀에게 보복한다고 란자군의 시신을 도굴해 훼손까지 시도했다고 한다.그 소식이 전해지자 경성의 모든 무관들은 경악해마지 않았다.소문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