잠깐 쓰러졌다가 일어나 보니 벌써 일주일이 그냥 지나가 버린 것이었다.온사는 고통스럽게 신음했다.수많은 기도 경문을 암기해야 하는데 9일은 너무 부족했다.“안 되겠습니다. 어서 수월관으로 돌아가야겠어요.”산처럼 쌓인 경문을 생각하니 온씨 가문 사람들을 신경 쓸 여유가 없어졌다.“섭정왕 전하, 혹시 마차를 준비해 주실 수 있을까요? 지금 수문관으로 돌아가야 합니다.”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온사는 조심스레 다시 몸을 일으키고 주변을 더듬거리다가 부주의로 북진연의 탄탄한 어깨에 손이 닿고 말았다.옷감을 통해 전해지는 따뜻한 온기에 온사는 순간 당황했다.이 방 안에 그들을 제외하고는 아무도 없으니 상대가 북진연이라는 것을 감지한 순간 불에 데인 것처럼 손끝이 달아올랐다.그때 커다란 손이 그녀의 손목을 잡았다.“움직이면 안 된다고 했지 않습니까.”이어서 북진연의 엄중한 목소리가 들려왔다.“필요한 게 있으면 나에게 말씀하시면 됩니다. 하지만 수월관으로 돌아가시려는 거라면 지금은 안 됩니다.”그는 단박에 그녀의 부탁을 거절했다.온사가 다급히 말했다.“하지만 소인은 기도 의식을 준비해야 합니다! 지금 돌아가지 않으면 늦는단 말입니다!”“그 눈을 해가지고, 돌아간다고 해서 대체 무슨 준비를 할 수 있겠습니까?”정곡을 찌르는 북진연의 몰에 온사는 말문이 막혔다.그랬다. 너무 급해서 지금 실명 상태라는 것마저 잊고 있었다.경문을 암기하더라도 앞이 보여야지 가능한 법이었다. 온사는 순간 침묵에 잠겼다.북진연은 갑자기 말이 없어진 그녀를 보고 자신이 너무 심하게 말을 했나 순간 후회가 들었다.그가 못 말린다는 듯이 한숨을 쉬며 위로의 말을 건네려 할 때, 갑자기 고개를 든 온사가 분노한 얼굴로 울분을 터뜨리기 시작했다! “이게 다 온자신 때문입니다!”오래 참았던 서러움이 순식간에 폭발해 버린 것이다.“그 인간은 무력만 쓸 줄 아는 시정잡배예요! 무슨 자격으로 수월관까지 찾아와서 나를 훈계하는 걸까요? 그 인간이 수월관에 침입해서 이상한 헛소
아쉽게도 그가 뭔가 행동을 취하기도 전에 막수 사태가 안으로 들어왔다.손에 경문을 들고 안으로 들어서다가, 온사의 울음소리를 듣고 다급히 달려왔다.“어떻게 된 거니? 어디 아파?!”막수 사태는 경문을 내려놓고 북진연을 밀친 후에 침대에서 울고 있는 온사를 품에 안았다. 그리고 투박한 손으로 온사의 온 얼굴을 적신 눈물을 닦아주며 부드럽게 위로했다. “괜찮다, 괜찮아. 내가 봤는데 이마의 상처는 흉이 질 것 같지 않구나. 부상 정도도 그리 심하지 않고 눈도 며칠 후면 다시 볼 수 있을 게야. 아무 걱정하지 말거라.”온사는 조심스럽게 자신을 보듬는 손길에 몸을 맡겼다.문득 아주 어렸을 적 그녀의 어머니가 매번 울 때면 자신을 이렇게 품에 안고 달래주던 것이 떠올랐다.북진연은 옆에서 그 모습을 지켜보며 한참 침묵하다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막수 사태, 무우 사태께서는 잠시 경문을 암기할 수 없어서 차후에 있을 기도 의식이 지체될까 봐 우려하고 계십니다.”갑자기 분위기를 깨는 말에 막수 사태는 굳은 표정으로 그를 힐끗 바라보고는 다시 온화한 목소리로 온사에게 말했다.“걱정 말거라. 그래서 기도 의식에 쓰일 경문을 가져왔으니 암기하고 싶거든 내가 읽어주겠다.”그러자 흐릿했던 온사의 눈동자에 다시 빛이 돌아왔다.‘그래! 그런 방법도 있었지!’다만 사부에게 민폐를 끼쳤다는 생각에 마음이 좋지 않았다.하지만 막수 사태는 온사의 머리를 넘겨주며 부드러운 미소를 지을 뿐이었다.“민폐라고 생각하지 말거라. 넌 내 제자 중에 가장 막내이며, 후에 중임을 맡고 나라를 위해 기도를 올릴 성녀이니 사부로서 너를 돕는 건 당연한 일이다.”온사는 큰 감동을 느껴 고개를 연신 끄덕였다.“감사합니다, 사부.”막수 사태의 도움이 있으니 온사의 부담도 많이 줄어들었다.막수 사태는 곧이어 북진연을 방에서 쫓아냈고, 그렇게 스승과 제자는 같이 경을 읽기 시작했다.막수 사태가 한 구절 읊으면 온사가 따라하는 식으로 진행되었다. 밖으로 쫓겨나버린 북진연은 밖에서 안의
복명 성녀가 깨어났다는 소식이었다.하필이면 이 시기에 깨어나다니 온권승 부자는 정말 농락당한 기분이 들었다.온장온이 피곤한 기색으로 불평을 토로했다.“온사 걔는 정말 사람을 귀찮게 하네요.”그의 입장에서는 하필 이 시점에 깨어난 온사가 얄밉기 그지없었다.만약에 그가 온자신에게 맞아서 중상을 입은 온사를 직접 보지 못했더라면 아마 진작에 깨어났으면서 자신들을 농락하는 건 아닌지 의심했을 것이다.아들의 생각을 읽은 온권승이 냉소를 지으며 말했다.“감히 아비인 나에게 반기를 들다니! 배후에 부추기는 자가 있는 게 분명하다.”그러자 온장온이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물었다.“누구 말씀이신가요?”“북연진 그 인간 말고 또 누가 있겠어?”온권승은 싸늘하게 식은 눈동자에 독기를 품으며 말을 이었다.“원래부터 폐하를 등에 업고서 수단 방법 안 가리고 날뛰는 인간이었어.”특히나 진국공부를 상대할 때는 더욱 그러했다.“이번에 우리 가문이 놈의 손에 놀아난 것도 온사 그 계집애 때문이지. 그 애가 없었으면 네 동생이 옥에 갇히는 일도 없었을 게다.”온권승은 온자신이 수월관에 침입한 것 하나만으로도 곤장을 칠 죄에 해당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하지만 아무리 그렇다 하더라도 옥에 갇힐 정도는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그래서 그는 모든 탓을 온사에게 돌렸다.“둘째는 너무 걱정할 필요 없습니다. 제가 이미 셋째를 시켜서 옥의 간수들에게 쌈짓돈을 좀 보냈으니, 아마 그 안에서 너무 고생하지는 않을 겁니다.”“가혹한 일을 당했어도 그건 그 녀석이 자초한 거야. 어쩔 수 없다.”온권승은 둘째 아들에게도 가차없었다. 비록 온사가 잘못한 것은 맞지만 온자신에게 잘못이 없다고 할 수는 없었기 때문이었다.온권승은 짜증스럽게 말을 이었다.“둘째 돌아오면 너는 큰형으로서 제대로 훈계해야 할 것이다. 이런 일이 또 있으면 너도 둘째랑 같이 사당으로 가서 무릎 꿇고 있을 줄 알아.”결국 온장온도 아버지의 훈계를 피해갈 수는 없었다.아버지의 말이라면 무조건 따르는 온장온이
한편, 온자신이 수월관에 침입해서 온사에게 중상을 입혔다는 소식을 들은 온모는 기분이 매우 좋은 상태였다.다만 그 뒤로 일이 걷잡을 수 없이 커진 건 예상치 못한 일이었다.폐하께서 온사를 위해 온자신에게 곤장 80대나 칠 줄이야!게다가 온씨 가문은 무조건 온사에게 용서를 받은 후에야 온자신을 풀어주겠다며 으름장을 늘어 놓았다.이 소식을 들은 온모는 참을 수 없는 분노를 느꼈다.“왜 그렇게까지 하지?”그녀는 폐하께서 드디어 미친 게 아닌지 의심이 들기까지 했다.한낱 여승을 위해 진국공부를 적으로 돌리다니, 온모는 생각할수록 황당했다.‘그럼 온사는 무슨 자격으로 폐하의 보호를 받지?’현재의 온사는 진국공부의 적녀도 아니고 한낱 여승에 불과한테 왜 존귀하신 이 나라의 주인이 그녀를 이렇게까지 챙기는지 이해가 가지 않았다.조정의 상황에 대해서는 까맣게 모르는 온모는 온사를 두둔하는 사람이 어린 황제 한 명뿐이라고 착각했다.하지만 실제로 조정의 반을 휘어잡고 있는 사람은 따로 있다는 사실을 그녀는 몰랐다. 온권승이 서재로 부른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온모는 올 게 왔구나라고 생각했다.그렇다면 온사가 수월관에서 한 짓을 까발릴 좋을 기회였기 때문이다.‘그런 더러운 년이라는 것을 알게 되면 더 이상 이 집에서 온사의 편은 없을 거야.’온모는 입꼬리를 말아올리며 냉소를 지은 후, 말을 전하러 온 하인에게 말했다.“알겠다. 아버지께 옷만 갈아입고 곧 가겠다고 전하거라.”온모는 방으로 돌아가 소박한 옷으로 갈아입었다.전에 성인식 때 온사가 소박한 옷을 입고 고아한 자태를 뽐낸 이후로 그녀는 줄곧 질투욕에 불타 있었다.그래서 요즘 그녀는 색감이 연하고 깨끗한 옷을 수두룩하게 사놓기 바빴다.온사도 그런 분위기와 자태를 갖고 있는데 자신이라고 못할 이유는 없다고 생각하며, 온사처럼 옷을 입고 자신이 그녀보다 훨씬 낫다는 것을 증명할 속셈이었다.하지만 안타깝게도 온모는 뭐가 자신에게 어울리고 뭐가 안 어울리는지를 전혀 몰랐다. 그녀가 아무리 순수한
“걔는 거기서 대체 뭘 하고 있었단 거지?”온장온은 아직도 사태의 심각성을 의식하지 못하고 있었다.그러자 온모는 잠시 머뭇거리는 척하다가 눈물을 쥐어 짜내며 말했다.“언니가 거기서 한 사내랑… 밀회를 하고 있는 걸 봤어요.”탁!이때, 온장온이 쥐고 있던 찻잔이 부서지며 바닥에 떨어졌다.그는 믿을 수 없다는 듯이 눈을 휘둥그레 떴다.“막내야, 너 지금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 알기나 하니?”온사가 사내랑 밀회를 한다니!그럴 리는 없었다.아무리 온사가 막무가내에 철부지라고 하더라도 그런 발칙한 짓까지는 저지르지 않을 것이다.온모가 여전히 울며 말했다.“저도 제 눈을 믿기 어려웠어요. 그런데 제 눈으로 직접 보니까 믿을 수밖에 없었죠. 언니에게 발각된 후로 저도 이러면 안 된다고 설득하려 했는데 언니가 저를 시냇물에 담그면서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라고 협박까지 하는 거예요. 안 그러면… 물에 빠뜨려 죽이겠다고까지 했어요.”그녀의 말이 끝나도록 온권승과 온장온은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온권승의 얼굴은 음침하게 굳어 있었고 온장온 또한 이 상황이 믿기지 않은 듯 보였다.그가 아는 온사는 말도 잘 안 듣고 철이 없기는 하지만 그 정도로 불경한 짓을 저지를 아이는 아니었다. 게다가 막내를 협박까지 하다니!온권승은 길게 심호흡을 한 후, 온모에게 말했다.“일단 돌아가 보거라.”온모는 순순히 고개를 끄덕이고는 예를 행한 후에야 서재를 나갔다.“아버지….”온장온은 착잡한 얼굴로 온권승을 바라보며 말을 잇지 못했다.“저는 뭔가 오해가 있었던 게 아닌지 싶습니다….”“오해?”온권승의 목소리가 얼음장처럼 차가워졌다.“오해인지 아닌지는 불러서 물어보면 확인되겠지.”곧이어 온모의 처소에서 시중을 드는 시녀 한 명과 온자신의 처소에서 일하는 남자 시종을 불렀다.그러고는 두 사람에게 물었다.“9일 전, 막내 아가씨와 둘째 도련님이 무슨 얘기를 나누었는지 알고 있느냐?”온자신 처소의 시종이 먼저 입을 열었다.“그날 둘째 도련님은 뜰에서 무공을
“뭐라고? 돌아갔다니?!”온권승과 온장온 부자는 또 온사를 만나지 못했다.모든 걸 알고 왔다고 생각했건만, 다시 황궁에 도착하자 온사가 수월관으로 돌아갔다는 답변만 들을 수 있었다.내관이 부드러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예. 성녀께서는 며칠 후에 있을 기도 의식을 걱정하시어 깨어나자마자 수월관으로 돌아갈 준비를 하셨습니다.”하지만 온권승의 얼굴이 분노로 퍼렇게 질린 뒤였다.단단히 따지러 준비하고 왔는데 수월관으로 돌아갔다니.만약 그녀가 황궁에 계속 있었다면 만날 핑계라도 있었을 텐지만, 이미 수월관으로 돌아갔다면 그들은 대문에 발조차 들일 수 없게 된다.‘이것도 북진연의 꿍꿍이인가?’온권승은 의심이 들었지만, 이것은 북진연이 꾸민 꿍꿍이 따위가 아니었다.온사는 온권승이 찾아올 것을 미리 예견하고 시력이 돌아온 후에 막수 사태와 함께 바로 수월관으로 돌아갔다.온권승을 만나는 게 두려워서가 아닌, 기도 의식 준비를 마친 후에 그들을 상대하기로 마음먹었다. 그리고 온자신이 이렇게 빨리 옥에서 나오는 것도 원하지 않았다.기분이 풀릴 때까지 옥에 가둘 생각이었다.온권승과 온장온은 그렇게 남산 산기슭까지 쫓아갔지만 그곳에는 이미 흑기군이 진을 치고 지키고 있었다. 그들은 성녀를 보호하고 침입자를 엄벌한다며 진국공부의 마차를 막아섰다.그리고 온씨 성을 가진 사람은 그 누구도 산에 발을 들일 수 없다고 엄포를 놓았다.이 광경에 온권승은 순식간에 똥 씹은 얼굴이 되었다.모두의 존중을 받던 진국공에게 이런 홀대와 수치는 익숙하지 않았다. 게다가 그 원흉이 철없는 딸 때문이라니 더 기가 막힌 것이었다.집으로 돌아간 온권승은 적어도 기도 의식이 끝나기 전까지는 온사를 만날 수 없을 거라고 직감했다.그리하여 화를 진정시킨 후, 이 일을 장남에게 떠맡겼다.“폐하께서 원하시는 건 우리의 태도야. 요 며칠 너희들은 번갈아가며 남산을 방문해. 만나면 좋겠지만, 못 만나더라도 폐하께 우리가 이 일을 가볍게 생각하지 않는다는 것을 보여줘야 한다.”온장온은
목소리를 들은 온사는 순간 놀란 표정을 지었다.칠호는 키도 꽤 큰 편이며 온몸을 꽁꽁 감싼 복장을 하고 있어, 겉으로 보기에는 아무런 특이점이 없어서 긴가민가 했는데 목소리를 들어보니 여인이었기 때문이다.“섭정왕 전하, 이게 대체 어떻게 된 일이죠?”온사 역시 귀족가에서 나고 자랐기에 권세가문, 특히나 황족들이 그림자 호위를 옆에 두고 육성한다는 사실에 대해 잘 알았다.진국공부 역시 마찬가지였다.온권승의 신변에는 그림자 호위가 있었는데, 어릴 때 아버지의 신변에서 그들을 본 것 같았는데 칠호 역시 그들이 주었던 느낌과 비슷했기 때문이다. “폐하께서 보내신 그림자 호위입니다. 원래는 황실에만 속한 자들이었지만 당신은 이 나라의 유일한 성녀이고 나라를 위해 관내에서 기도를 올리고 계시니 제가 폐하와 상의 후에 전과 같은 일이 다시 발생하는 것을 막기 위해 적당한 녀석을 선별하여 데려왔습니다.”북진연은 칠호의 신분패를 온사에게 건넸다.“앞으로 성녀는 이 아이의 주인입니다. 아무리 폐하라도 성녀를 제치고 이 아이에게 무언가를 명령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온사는 북진연이 이렇게 큰 선물을 준비했을 줄은 꿈에도 몰랐다.칠호를 신변에 두면 앞으로 온자신 일행이 또 그녀에게 무력을 행사하려 할 때 그녀에게도 반격할 수 있는 힘이 생기게 된다. 그녀는 이 선물을 거절할 수 없었다.그저 폐하가 은혜를 베푼 것이라고는 말했지만, 북진연의 입김이 크게 작용했다는 것도 알아차렸다. 그가 아니었으면 아무리 폐하라도 이렇게 쉽게 황실의 그림자 호위를 내어주지는 않았을 것이다.잠깐의 고민 후에 온사는 결정을 내렸고, 곧이어 추월을 바라보며 말했다. “앞으로 너를 추월이라고 부르겠다. 관내에는 사람이 적고 조용하니 나를 따르면 조금 따분하고 무료할 수 있다.”추월이 답했다.“이름을 주셔서 감사합니다, 주인님. 소인 주인님의 곁에 남고 싶습니다.”“그러면 그 호칭부터 바꿔야겠구나.”온사가 웃으며 말했다.“나는 출가인이니, 주인이라고 불리는 것은 예의에 어긋
“이건 섭정왕 전하께 드리는 저의 답례입니다. 그리고 나머지 하나는 폐하께 드리는 거예요. 귀찮으시겠지만 섭정왕 전하께서 소인을 대신해 폐하께 전해주셨으면 합니다.”북진연은 나무 상자를 건네받은 후, 고개를 끄덕였다.“알겠습니다.”그렇게 북진연이 돌아간 후, 온사는 다시 경문을 베끼기 시작했다. 하지만 필사를 시작한지 얼마 지나지 않아 누군가가 안으로 들어왔다.바로 막수 사태였다! “무우야.”막수 사태는 진지하게 경문을 필사하는 온사를 보며, 부드러운 목소리로 불렀다.“사부님?”온사가 이내 붓대를 내려놓으며, 고개를 들었다.“섭정왕 전하께서 그림자 호위 한 명을 데려왔다지?”“예. 감사히 받았습니다. 제가 추월이라는 이름도 지어줬어요! 그 아이를 만나보시렵니까?”사람을 수월관에 들이는 일은 막수 사태의 허락 없이는 불가능한 일이었다.“그럴 필요까지 없다. 네 사람이니 네가 어련히 알아서 잘하겠지.”막수는 손사래를 치고는 온사가 건넨 찻잔을 받으며 말했다.“이리 와서 앉아 보거라. 내가 너한테 긴히 물어볼 게 있으니.”온사는 찻잔을 내려놓고 사부의 옆으로 다가가서 앉았다.“무슨 일입니까?”막수는 온순한 그녀의 표정을 잠시 바라보다가 어렵게 입을 열었다.“너… 최근에 독약을 연구하고 있었니?”온사는 올 게 왔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날 다급히 해독약을 그녀에게 먹여준 사람이 바로 사부였으니 말이다.“예.”온사는 솔직히 털어놓기로 했다.막수 사태에게는 거짓말을 하고 싶지 않았다.“불가에 발을 들인 제자는 독을 연구하면 안 되는 겁니까?”막수 사태는 그녀의 질문에 고개를 저었다.“그런 건 아니다. 독이라도 잘 쓰면 사람을 구할 수도 있는 거니까.”온사는 그제야 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막수 사태가 말을 이었다.“그렇다고 하더라도 앞으로 몰래 독을 연구하는 것은 안 된다.”막수는 엄중한 표정으로 온사를 바라보았다.“그날 자칫 잘못했으면 목숨을 잃을 수도 있었어.”“하지만 사부님, 저 이미 독경을 손에 넣은걸
“전하께서 어쩐 일이십니까?”온사는 놀란 눈으로 상대를 바라보며 물었다.매년 동지 때 조정은 대신들을 초대해 연회를 베푼다는 걸 그녀도 알고 있었다.허나 지금은 진국공부의 적녀가 아니니 참석할 이유가 없었다.황제는 사람을 보내 그녀의 의중을 물었으나 그녀는 출가인이 참석하기에 좋은 자리가 아니라고 거절했다.비록 폐하는 괜찮다고 했지만 그녀는 황제의 명성에 해를 끼치기 싫었다.“연회 다 끝났어. 남은 치들은 공연이나 보고 술이나 즐기겠지. 그런 것들보다는 너와 한잔하는 게 더 즐거우니까 왔지.”온사는 눈을 치켜뜨며 새침하게 말했다.“저는 술을 마시면 안 되는 몸입니다.”“알아, 그래서 좋은 차를 가져왔어.”북진연은 찻잔을 내보이며 그녀에게 제안했다.“성녀 전하, 나와 한잔하시겠소?”온사는 진지한 얼굴을 한 그를 보고 미소를 지었다.“영광이죠, 섭정왕 전하.”그렇게 두 사람은 식탁에 마주앉았다.북진연은 미리 우려낸 차를 식힌 후에 적당한 온도의 찻물을 그녀의 잔에 부어주었다.온사는 상체를 살짝 비틀고 차 맛을 보았다.그러던 그녀의 눈이 반짝 떠졌다.청량하면서도 맛이 깔끔한 차였다.“군산은침이라고 차 중에서도 최상급으로 불리는 차 아닙니까? 어찌 폐하가 마시는 차를 가져오셨어요?”북진연은 웃으며 말했다.“오늘 연회에서 차 맛을 봤는데 네가 좋아할 것 같아서 폐하께 몇 통 달라고 청을 드렸지.”온사는 북진연이 자신의 취향을 너무 잘 아는 것 같아서 왠지 얼굴이 화끈거렸다.“두고 마시지 그걸 다 가져오셨어요?”“난 진한 차를 좋아해서 이건 나랑 안 어울려.”온사는 갑자기 그의 질병이 떠올랐다.“진한 차는 몸에 안 좋습니다. 혹시라도 어디 불편하시거나 하면 언제든 찾아오세요.”말을 마친 그녀는 북진연을 향해 부드러운 미소를 지었다.“전에 약속했지 않습니까. 전하께서는 저를 도와주시고 저도 제 능력이 닿는 한 전하를 돕겠다고요. 경을 읊는 건 그리 어려운 일도 아니니 기꺼이 도와드리겠습니다.”요즘엔 북진연이 통 오지를 않
“모든 걸 바치겠다라… 네 목숨도 말이냐?”북진연은 싸늘하게 식은 목소리로 되물었다.“물론이죠. 성녀 전하는 살육을 할 수 없는 분이지만 소녀는 달라요. 소녀는 전하의 가장 예리한 검이 되어 전하를 위해…”촤르륵!안란심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기다란 장검이 마차의 측면을 찔렀다. 검은 안란심의 목덜미를 아슬아슬하게 비껴갔다.안란심은 이마에 식은땀이 맺혔다.검을 내린 북진연이 말했다.“난 검이 많아. 굳이 너까지 필요하진 않단 얘기야. 그리고 무우를 너 같은 것에 비교하지 마. 다음에 또 이러면 그때는 경고로 끝나지 않을 거다.”말을 마친 그는 말에 올라 고요에게 지시했다.“저건 다 태워버리거라.”“예, 왕야!”유혹에 실패한 안란심은 결국 고요에게 쫓겨 마차에서 내렸다.고요는 그녀가 보는 앞에서 마차를 불태웠다.명백한 혐오에 안란심도 분노가 치밀었다.마음의 준비를 안 한 건 아니지만 이 정도로 섭정왕의 혐오를 살 줄은 몰랐다.물론 너무 쉽게 넘어온다면 오히려 재미없다고 생각했을 것이다.만 천하에 여인을 혐오한다고 이름을 알린 섭정왕 전하인데 온사에게만은 달랐다.누군가는 그가 그저 폐하의 명을 받들고 제 할 일을 한다고 하지만 그녀는 그 말이 믿기지 않았다.엉망진창이 된 기분을 추스른 안란심은 심복을 불러 물었다.“오늘 연회에서 무슨 일 있었어?”북진연을 유혹하려고 연회가 끝나기도 전에 자리를 비웠기에 연회의 상황을 아직 모르고 있었다.심복은 미소를 지으며 그녀에게 말했다.“아가씨께서도 자리에 계셨어야 했는데, 정말 재미난 구경거리가 있었죠.”“그래? 무슨 일인데?”“음… 그러니까….”심복은 연회에서 황제가 온모를 비로 간택한 이야기를 상세하게 설명했다.“폐하께서 온모한테 오늘부터 태후궁에서 예의법도를 배우라고 했다는 거니?”너무 뜻밖의 일이라 안란심도 적잖이 놀랐다.첫눈에 반했다는 건 말도 안 되는 소리였다. 온모의 외모는 평범한 축에 속했고 여린 척하는 것 말고는 내세울 게 하나도 없었다.역시나 예의법도를 가르
어린 황제는 그제야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었다.“좋다.”그는 고개를 끄덕인 뒤에 말을 이었다.“허나 네 아비는 네가 시골 출신이라고 궁중 법도에 대해 아무것도 몰라 우려하고 있으니, 짐의 비가 되기엔 좀 힘들 것 같구나.”그는 턱을 괴고 미간을 찌푸린 채, 큰 고민에 빠진 시늉을 했다.그 말을 들은 온모는 다급히 말했다.“아닙니다! 전혀 힘들지 않아요! 태후마마께 궁중법도를 배우면 된다고 하시지 않았습니까? 최선을 다해 열심히 배워서 빨리 폐하의 비가 되고 싶습니다!”그러면서도 온모는 속으로 아버지를 원망했다.‘폐하께서 나한테 첫눈에 반했다는데 좋은 말은 못할 망정! 폐하께서 마음을 접기라도 하면 어쩌려고!’온모는 황제가 명을 철회할까 봐 조마조마한 얼굴로 황제를 바라보았다.황제는 만족스러운 얼굴로 고개를 끄덕이더니 말했다.“그래. 참으로 사려 깊은 여인이로구나. 그렇다면 오늘부터 태후궁에서 법도를 배우도록 하거라.”온권승은 그 말을 듣자 속으로 한숨을 쉬었다.그가 자리로 돌아오자 온장온은 다급히 아버지의 옷깃을 잡고 말했다.“아버지, 이를 어쩝니까? 폐하께서 막내를 보는 눈빛이 애정하는 비를 보는 눈빛은 아니었어요!”온권승이 그걸 모를 리 없었다.장남도 눈치챈 일을 온모가 눈치채지 못한 게 한탄스러울 따름이었다.지금이 아니라 온가의 여식은 앞으로도 황제의 후궁이 될 가능성이 없었다.안 그래도 황제는 진국공 가문의 세력을 견제하는데 그들에게 권력을 쥐여줄 빌미를 줄리가 없었다.예전이었다면 가능했을지도 모른다. 그땐 북진연도 전장에 나가 있었고 진국공 가문은 후궁 선발에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었다.허나 하필 그때엔 황제가 너무 어렸고 수렴청정 중인 태후는 진국공부를 경계했기에 황제가 어리다는 이유로 줄곧 후궁 간택을 미뤄왔다.그렇게 시간이 흘러 드디어 폐하가 성년이 되자 북진연이 전장에서 승리하고 돌아왔다.황제파인 북진연이 복귀하자 태후는 실권을 내려놓고 조정의 결정권을 전부 황제에게 맡겼다.다만 후궁에 황후의 자리가 비어
이어지는 연회에서 온모는 어딜 가든 비웃음과 조롱의 대상이 되었다.그녀는 분해서 미쳐버릴 것 같았다.하지만 그녀가 보기에 아둔하고 사지만 발달한 무관 가문 여식들은 무슨 이유에서인지 조롱과 비난은 서슴지 않으면서도 절대 폭력은 행사하지 않았다.그들은 온모에게 온갖 굴욕감을 주고는 홀연히 자리를 떴다.그리고 또 다른 무리가 온모에게 다가왔다.같은 상황이 수차례 반복된 이후, 온모는 그들이 작정하고 왔다는 것을 드디어 눈치챘다.더 돌아다니다가는 또 비웃음이나 당할 게 뻔했기에 온모는 치미는 화를 억지로 참으며 자리를 지켰다.이곳에는 폐하와 태후, 그리고 아버지와 오라버니들도 계시니 아무도 쉽게 그녀를 괴롭히지 못할 거라고 생각했다.하지만 그건 그냥 시작에 불과했다.온모가 자리에 앉고 얼마 지나지 않아 어린 황제의 시선이 그녀에게 머물렀다. 그는 의미심장한 눈길로 그녀를 바라본 후에 웃으며 온권승에게 말했다.“진국공, 최근에 짐이 고민이 좀 있는데 해결해 줄 사람이 없어서 머리가 아프던 참이었소. 마침 오늘 진국공도 자리했으니 자네가 의견 좀 내주지 않겠나?”온권승은 흠칫하며 다급히 예를 행하고 말했다.“폐하의 고민을 해결해 드리는 건 대신으로서 당연히 해야 할 일이지요. 무슨 일로 고민이십니까? 제 능력이 닿는 한 도와드리겠지만 제 능력 밖의 일이라면 괜히 폐하의 시간만 뺏지 않을까 싶습니다만.”“그리 심각한 일은 아니오. 다만 이 고민을 해결해 줄 수 있는 사람이 진국공뿐이라 얘기를 꺼낸 거요.”말을 마친 어린 황제는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었다.아니나다를까, 황제는 고개를 돌려 온모를 바라보더니 부드러운 미소를 지으며 말을 이었다.“짐이 즉위한 이래로 나이가 어리고 정무가 다망하여 후궁이 줄곧 비어 있었는데 지난번 어마마마의 생신연에서 진국공의 막내딸을 본 이후로 계속 그 모습이 머릿속에서 떠나지 않는구려. 첫눈에 반한 게 아닌가 싶소.”현장에 갑자기 정적이 찾아왔다.온모는 떨떠름한 얼굴로 황제의 말을 곱씹다가 믿을 수 없다는 표정
한심하다는 투의 말 속에는 짜증이 가득 담겨 있었다. 문관 수장인 진국공가의 딸이 무관 가문 아가씨들을 찾아갔으니 당해도 싸다는 어투였다.사실 예전의 진국공 가문은 완전한 문관파가 아니었고 오히려 가문에 무관 출신이 많았다. 다만 온권승이 집권하면서 완전히 문관 쪽으로 돌아섰고 나중에 란씨 가문과 정략혼인까지 하며 문관파에서 꽤 입지가 튼튼한 란씨 가문 덕에 온권승이 승승장구할 수 있었던 것이다.무관들은 예로부터 문관을 무시하고 혐오했는데 특히나 무관을 배신한 온권승은 그야말로 눈엣가시 같은 존재였다.그래서 진국공 가문이 아무리 잘나가도 무관들은 전혀 그들에게 굽히거나 양보하지 않았다.온권승과 척을 지는 위험을 감수하더라도 무관들은 자신들의 입장을 고수했다.하물며 무관파 출신 중에는 대단하신 섭정왕 전하도 있지 않은가.그는 섭정왕의 칭호를 받기 전에도 전장의 신이라는 칭호를 받은 인물이었다.대권을 잡은 후에도 그는 황실에 충성하며 어린 황제의 가장 충실한 신하가 되었다.그는 무관파의 명예이자 자랑이었다.전에는 섭정왕이 전쟁터에 나가 있어서 무관들이 문관들 앞에서 눈치를 많이 봤지만 섭정왕이 돌아온 지금 비실비실한 문관들의 눈치를 볼 이유가 없었다.그래서 요즘 무관들의 기세가 하늘을 찌르고 있었다.특히나 섭정왕께서 폐하의 명을 받들어 성녀 전하를 호위하게 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그들도 덩달아 성녀를 옹호하기 시작했다.성녀 전하가 그들이 가장 싫어하는 진국공의 딸이긴 하지만 섭정왕의 명이 곧 천명이었다.하물며 온사는 이미 가문과 연을 끊었으니 문제될 것도 없었다.어쩌면 성녀 전하도 정신을 차리고 보니 아비의 가식적인 본모습을 눈치채고 가문을 떠난 걸 수도 있었다.무관들은 그녀의 그런 행동이 정말 마음에 들었다.게다가 며칠 전에 들리는 소문에 의하면 진국공은 젊은 시절 부인을 배신한 것도 모자라 사생아가 적녀에게 보복한다고 란자군의 시신을 도굴해 훼손까지 시도했다고 한다.그 소식이 전해지자 경성의 모든 무관들은 경악해마지 않았다.소문이
온모는 뒷담화 하다가 본인에게 들켰는데도 그들이 이렇게 적반하장으로 나올 줄은 몰랐다.그녀는 홧김에 앙칼진 목소리로 따졌다.“너희 어느 가문 애들이야? 왜 한 번도 본 적 없지? 어디 일반 관료네 딸인가 본데 어딜 감히 내 뒷담화를 하고 있어?”온모는 그제야 여기 있는 아가씨들 모두 못 보던 얼굴이라는 것을 발견했다.진국공가로 들어온 뒤, 온모가 만난 사람들은 다 온권승의 부하 관원들 집안의 자식들이었다. 다들 대단한 권세를 가진 사람들이지만 어쨌거나 온권승에게 아부하는 입장이기에 그들의 자식들도 그녀에게 친절히 대해주었다.하지만 눈앞의 소녀들은 그들 중에 속하지 않은 것 같았다.그래서 온모는 그들이 관직이 낮은 집안 자식들이라 평소에 진국공 가문에 방문할 자격조차 주어지지 않았다고 생각했다.그녀는 가소롭다는 듯이 그들에게 말했다.“내 아버지 체면을 봐서 너희들에게 사과할 기회를 줄 것이다. 거부할 시, 너희들이 방금 한 말을 모두 아버지한테 알릴 거야. 그럼 너희도 곤란해질 건 물론이고 너희들의 아버지한테까지 피해가 가겠지!”온모는 턱을 뻣뻣하게 치켜들고 거만하게 말했다.그러나 그런 협박의 말은 소녀들의 비웃음만 자아낼 뿐이었다.“세상에나, 쟤가 무슨 소릴 하는 거지?”“역시 비천한 사생아야. 여자들끼리 한 말을 아버지한테 일러바친대.”이소은은 경멸의 눈빛으로 온모를 바라보며 말했다.“일러바쳐서 뭐 하게? 설마 우리가 널 무서워할 거라고 생각하는 건 아니지?”“온사였으면 어느 정도 눈치를 봤겠지만 너는… 그럴 가치가 없어.”이소은은 팔짱을 끼고 온모를 아래위로 훑어보고는 혀를 찼다.“너!”이소은의 도발에 넘어간 온모가 도끼눈을 뜨고 상대에게 소리쳤다.“지금 뭐라고 했어? 다시 말해봐!”다른 소녀들은 깔깔 웃음을 터뜨렸다.“소은아, 말귀를 못 알아먹는 애한테 그런 말을 해도 소 귀에 경 읽기야.”온모는 그 말을 듣고 더 부아가 치밀었다.“너희 죽고 싶어? 내 아버지가 진국공이야!”“알아! 우리 다 알아!”“경성에 네
이번 제사에는 성녀가 필요 없었기에 온사와 수월관 사태들은 참석하지 않았다.제사가 끝난 후, 궁중 연회가 시작되었다.관원들은 처자식을 대동하고 입장했다.명절을 경축하기 위해 마련된 자리라 오늘의 연회는 분위기가 비교적 자유로웠다.어린 황제는 태후와 함께 공연을 감상했고 각 집안의 부인, 아가씨들은 떼를 지어 수다를 떨었다.줄곧 방에만 갇혀 있던 온모도 사람들을 만나고 수다를 떨고 싶었다. 그래서 부하와 얘기 중인 온권승의 눈치를 힐끗 보고는 아가씨들이 모인 쪽으로 걸어갔다.“다들 여기서….”온모가 인사를 건네려는데 그녀를 등진 한 아가씨가 말했다.“온사는 왜 오늘 연회에 안 왔지?”“못 온 거겠지. 걔 지금 출가해서 승려가 되었잖아. 우리 어머니 말로는 절 생활이 그렇게 자유롭지 않대. 아무 때나 하산할 수 있는 게 아니라고 하더라고.”“그래? 너무 아쉽네. 올해는 어떤 가야금 곡을 연주하려나 듣고 싶었는데.”“우리들 중에 걔가 가야금 연주를 가장 잘하지 않아?”“당연한 소릴. 가야금뿐이겠어? 바둑 좀 못하는 거 말고 서예나 그림 실력 모두 최고라고 할 수 있지.”“아쉽네. 앞으로는 걸작을 감상할 기회가 없겠어.”“진국공부에서 온모라는 애가 왔잖ㅇ라. 뭐 순수하고 천진난만하다고 칭찬이 자자해서 귀에 피딱지가 앉을 지경이었어. 요즘은 뭐 다른 소문 없어?”“있지! 최근에 그런 소문이 들리잖아. 걔 진국공 나리의 양녀가 아니라 사생아라고.”“세상에나, 그게 사실이야?”“사실이래!”“설마… 그런데 뻔뻔하게 연회에 왔어?”“난 저렇게 밖에서 태어난 애가 제일 싫어. 첩이나 이랑이 낳은 서자, 서녀들보다 더 얄미워!”“걔네 어미와 진국공 어르신은 일찍부터 연인이었대. 그런데 진국공부의 미래를 위해 어쩔 수 없이 연인을 버리고 란씨 가문의 아가씨와 혼인한 거지.”“그럼 왜 첩이나 이랑으로 들어오지 않고 굳이 밖에서 애를 낳았을까?”“주제도 모르고 자존심만 센 거지.”“맞아, 밖에서 불륜을 저지르면서도 첩이 되길 거부하는 여자들은
“지금 무슨 헛소리를 하는 거니? 내가 언제 널 버린다고 했어?”온권승은 홧김에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서 한심한 얼굴로 말했다.“네가 최근에 친 사고들을 생각해 봐. 그거 수습해 준 사람이 누구야? 다만 이번에는 선을 넘었어! 계속 이런 식이면 이제 나도 너 못 지켜준다. 네 어미한테 간다는 말로 날 협박할 생각은 하지 마!”말을 마친 그는 차갑게 뒤돌아서 방을 나가버렸다.온모는 다급히 그의 등 뒤에 대고 소리쳤다.“아니… 아니에요, 아버지. 협박이 아니에요. 아버지께서 저를 버릴까 봐 무서웠어요. 그래서 순간 말이 잘못 나온 거예요. 화 푸세요, 아버지. 제가 정말 잘못했어요!”그녀는 울며 자리에서 몸을 일으켰다.어릴 적 그녀는 사람들에게 들은 말이 있었다. 그녀는 죽은 어미와 너무 닮았으며 우는 모습까지 닮았다고 사람들이 말해주었다.어린 시절 풋풋한 설렘을 온권승은 잊을 수 없었다. 그녀와 똑 같은 얼굴을 하고 우는 온모를 보니 마음이 약해질 수밖에 없었다.결국 그는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됐어. 어차피 너도 교훈을 얻었고 잘못을 알면 된 거야….”온권승의 어투가 드디어 누그러지자 온모는 그제야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그런데 이때, 온권승이 갑자기 표정을 바꾸더니 말했다.“다만 이번 일은 쉽게 끝날 것 같지 않아. 만일을 대비해서 당분간은 방에서 나가지 말고 네 어미의 측근들도 만나지 마. 안 그럼 나도 다신 널 돕지 않겠다.”그 말을 들은 온모는 억울한 얼굴로 반박했다.“괜한 걱정이세요, 아버지. 온사의 어머니 시신도 이미 돌려줬잖아요. 걔가 뭘 더 어쩌겠어요?”온권승은 고개를 돌리고 한심한 얼굴로 딸을 바라보며 말했다.“이번 일이 온사랑만 연관된 줄 아니? 란씨 가문이 이미 멸문했지만 조정에는 아직도 그들의 영향력이 남아 있어.”만약 걱정해야 할 상대가 온사뿐이었다면 이렇게까지 화를 낼 필요도 없었다.그가 걱정하는 건 황제였다.안타깝게도 온모는 그 말을 알아듣지 못했다.그녀는 온권승이 괜한 걱정을 한다고 생각했다.어쩌
온모는 눈물이 그렁그렁해서 세 오라버니들을 바라보며 말했다.“오라버니들, 어차피 제 말을 못 믿으시는 거 알아요. 하지만 이건 정말 제가 한 게 아니에요.”온장온은 미간을 찌푸리며 그녀에게 물었다.“하지만 너와 관련 있는 자들이 우리 어머니의 시신을 관 채로 도굴해서 가져간 걸 봤어. 정말 이 일이 너랑 관련이 없다고?”온모는 이 일에서 완전히 발뺌할 수 없다는 걸 알고 말을 바꾸었다.“사실 저와 관련이 아예 없다고는 할 수 없어요. 하지만 제가 한 게 아니라고 한 이유는 큰 오라버니께서 본 그 세 사람은 제 친어머니께서 저를 지켜주라고 남겨주고 가신 사람들이에요. 다만 아버지께서 저를 진국공부 양녀로 들이면서 그들은 경성에 같이 따라오지 않은 거고요.”그녀는 진지하게 자신의 말을 듣고 있는 세 사람을 바라보며 계속해서 거짓말을 이어갔다.“얼마 전에 제가 곤장을 맞은 이후로 너무 서러워서 그들에게 서신을 보내 하소연한 적 있어요. 경성으로 와서 날 좀 지켜달라고요. 그런데 그 일을 듣고 그 사람들이 너무 화가 나서… 저 대신 복수해 주겠다고… 양어머니의 무덤을 도굴한 거예요….”“정말 죄송해요, 큰 오라버니… 믿기 힘든 걸 알아요. 이럴 줄 알았으면 그들에게 서신을 보내는 게 아니었는데….”온모는 숨이 넘어갈 정도로 흐느꼈다.겉으로 보기에는 절절하고 진심으로 느껴졌다.처음에는 온모를 탓하던 온장온마저도 흔들리기 시작했다.하지만 그는 여전히 싸늘한 얼굴로 계속해서 질문을 이어갔다.“그런데 온사는 왜 네가 사람을 시켜서 그 짓을 했다고 하지? 게다가 보복한다고 시신을 훼손한다고까지 했다며?”온모는 잔뜩 억울한 얼굴을 하고 말했다.“그건… 저는 그 일을 알고 당장 양어머니의 시신을 돌려놓으라고 했죠. 그런데 그날 밤에 온사 언니가 저를 납치해 간 거예요. 언니는 저를 때리고 독까지 먹이니까 너무 무서워서… 내가 시킨 거라고, 날 안 내보내 주면 다신 어머니를 만날 생각하지 말라고 했어요. 그래서 나중에 거래가 성사된 거예요.”“내가 막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