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을 마친 오관우는 전화를 끊었다.그는 잠시 고민하다가 길정우에게 전화를 걸었다. 한참 뒤, 수화기 너머로 여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오관우? 우리 오빠한테는 어쩐 일로 연락했어?”“응? 시아구나. 정우 돌아왔다고 해서 같이 밥이나 먹자고 연락했지.”오관우가 웃으며 답했다.“인삿치레는 그만 둬. 내가 오빠를 몰라? 솔직히 말해. 우리 오빠한테 무슨 볼일이 있어서 전화했어?”길시아가 싸늘하게 물었다.오관우는 어색한 미소를 지으며 강희연의 계획을 그녀에게 들려주었다.얘기를 다 들은 길시아가 음산한 미소를 지으며 새침하게 말했다.“강우연? 그럼 그렇게 하겠다고 해. 저녁에 내가 그리로 나갈게.”전화를 끊은 길시아의 눈빛이 음산하게 빛났다.강우연!몇 년을 안 보고 살았더니 이렇게까지 타락한 건가?한지훈을 위해 자존심 다 버리고 우리 오빠한테 사정한다고?그럼 그 바람, 철저히 부숴주지!“누가 전화왔어?”운동을 마치고 돌아온 길정우가 수건으로 땀을 닦으며 그녀에게 물었다.길시아는 생긋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아무것도 아니야. 스팸 전화.”길정우는 대충 고개를 끄덕이고는 씻으러 들어갔다.한편, 강희연과 강우연은 오관우의 전화를 애타게 기다리고 있었다. 한참이 지나서 오관우에게서 연락이 왔다.강희연이 다급히 물었다.“어때? 약속은 잡았어?”오관우가 머뭇거리며 대답했다.“약속은 잡았는데 길정우가 아니라 시아가 나오기로 했어.”“누구?”강희연은 당황한 표정으로 강우연의 눈치를 살피고는 작은 소리로 물었다.“걔가 왜 나와?”오관우가 말했다.“나도 이렇게 될 줄은 몰랐지. 길정우 전화를 길시아가 대신 받은 거야. 그런데 상관없지 않을까? 길시아는 길정우가 아끼는 동생이잖아. 길정우는 여동생이라면 껌뻑 죽는다던데, 길시아가 나서주면 오히려 잘된 일 아니야?”강희연은 굳은 표정으로 한참 고민하다가 말했다.“알았어. 자기가 장소 정하고 문자 줘. 강우연은 내가 데리고 갈게.”말을 마친 그녀는 전화를 끊고 가식적인 미소를 지으며 강
그 말을 들은 강우연은 감동을 금치 못하며 강희연에게 연신 허리를 숙여 인사했다.“고마워, 언니. 고마워….”강희연은 싸늘한 눈빛으로 그녀를 한번 바라보고는 요염한 걸음걸이로 자리를 떴다.강우연은 저녁 약속을 위해 만반의 준비를 했다. 한지훈에게 문자를 보내 저녁에 약속 있으니 먼저 먹으라고 전했다.집에서 고운이와 놀아주던 한지훈은 문자를 받고 잠시 고민하다가 답장을 보냈다.[약속 장소가 어디야? 끝나면 데리러 갈게.]강우연은 아무 의심없이 강희연이 알려준 술집 주소를 그에게 보내주었다.퇴근할 시간이 되자 강우연은 강희연의 차를 타고 약속 장소로 향했다.이곳은 S시에서 유구한 역사를 지닌 술집이었는데 안주가 맛있기로 소문난 집이었다. 하지만 워낙 비싼 곳이라 일반인 출입은 제한되고 예약제로 운영되고 있었다. 오관우는 이곳 VIP 회원이라 호기롭게 룸을 예약했다.약속 장소에 도착한 강우연은 호화로운 인테리어에 눈이 번쩍 뜨였다.골드가 메인 색상인 건물 외부에는 하늘을 나는 봉황 조각상이 높게 솟아 있었다.주차장에는 비싼 외제차가 빼곡이 들어서 있었는데 많은 유명인사들이 이곳에서 모임을 가지거나 미팅 장소로 사용했다.미리 도착해서 기다리던 오관우는 강희연이 보이자 종종 걸음으로 달려왔다.“드디어 왔네.”강희연이 인상을 쓰며 물었다.“왜? 그쪽에서 먼저 도착했어?”오관우가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아니, 아직. 30분 정도 걸릴 거래. 먼저 들어가자.”강희연은 고개를 끄덕인 뒤, 오관우의 팔짱을 끼고 술집으로 들어갔다. 강우연은 불안한 표정으로 들어갈지 말지 망설였다.강희연이 고개를 돌리더니 싸늘한 미소를 지으며 물었다.“왜? 들어가기 싫어? 그럼 그냥 집에 가. 어쩔 수 없지 뭐.”그 말을 들은 강우연은 서둘러 그들의 뒤를 따라갔다.그녀는 이 결정이 어떤 지옥을 불러올지 아직 예상도 하지 못하고 있었다.룸에 도착하자 강우연은 긴장한 표정으로 물었다.“언니, 길정우 씨는 언제 도착해?”강희연은 거만한 눈빛으로 강우연을 바라
길시아는 싸늘한 시선으로 술집 사장을 힐끗 보고는 거만하게 대답했다.“그럴 필요 없어요. 친구랑 약속 있어서 왔거든요. 388호 룸으로 안내 좀 부탁해요.”“네. 이쪽으로 오시죠.”사장은 허리를 굽신거리며 공손한 태도로 길시아를 3층까지 안내했다.문앞에 도착하자 길시아는 뒤를 따르는 군인들에게 말했다.“아무도 못 들어오게 여기 철저히 지키고 있어!”“네, 아가씨!”두 군인이 칼같이 대답했다.길시아는 턱을 잔뜩 치켜들고 안으로 들어갔다.기다리던 길정우가 소식이 없자 강우연은 돌아갈 생각으로 자리에서 일어섰다.“미안해, 언니. 난 일이 있어서 이만 가볼게.”조급해진 강희연이 그녀의 팔목을 잡으며 말했다.“뭐가 그렇게 급해? 네가 도와달라고 해서 만든 자리잖아! 너 지금 가면 내가 뭐가 돼? 길정우 중장이 도착했는데 부탁한 사람이 안 보이면 화를 낼 텐데 그럼 우린 어쩌라고?”오관우도 옆에서 거들었다.“그래요, 우연 씨. 길정우는 곧 군단장이 될 귀한 몸이란 말이에요. 이대로 약속을 어기고 가버리면 군단장을 무시하는 것과 뭐가 달라요?”강우연이 망설이고 있는데 문이 열리고 길시아가 들어왔다.그녀를 본 강희연은 순간 당황해서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5년의 서러움과 분노가 가슴을 먹먹하게 했다.그녀는 눈시울을 붉히며 믿을 수 없다는 듯이 강희연을 바라보았다.“언니, 길정우 중장이 나온다고 하지 않았어? 쟤가 여기 왜 있어?”강희연이 어색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길정우 중장이 좀 바쁜가 보지. 하지만 괜찮아. 길시아 씨가 이번 일의 장본인이기도 하니까.”오관우는 반가운 얼굴로 달려가서 길시아를 맞아주었다.“시아 왔구나. 어서 이쪽으로 와서 앉아.”길시아는 오관우를 거들떠보지도 않고 곧장 강우연에게로 다가왔다.그리고 들려온 마찰음.길시아는 손을 들어 강우연의 뺨을 후려치고는 욕설을 퍼부었다.“비천한 것이 어디 우리 오빠한테 수작질이야? 네가 무슨 자격으로 오빠를 만나?”현장에 있던 강희연과 오관우마저 당황했다.강우연은
그 말은 어린 시절부터 쌓아온 두 사람의 우정은 오늘로 끝이라는 뜻이었다.강우연은 기세등등한 길시아를 싸늘하게 바라보며 물었다.“왜지? 그때 나한테 왜 그랬어? 우린 서로에게 가장 소중한 친구 아니었어?”“하!”길시아가 피식 웃음을 터뜨리며 말했다.“소중한 친구? 강우연, 넌 멍청한 척하는 거야? 아니면 진짜 멍청한 거야? 내가 왜 너 같은 애랑 친구야? 내가 받아야 할 스포트라이트, 사람들의 관심 모두 네가 빼앗아갔잖아! 너 때문에 좀 잘나간다 하는 사람들은 너만 보잖아! 너 때문에 난 빛을 보지 못하고 살았어! 그럼 어떡해? 널 망가뜨려야지! 사람들이 다 보는 앞에서 널 망가뜨리면 자연스럽게 관심이 나한테 오지 않겠어? 설마 너 아직도 내가 네 친한 친구라고 생각하니?”“웃겨! 난 한 번도 널 친구라고 생각한 적 없어! 너 따위가 무슨 친구야! 네가 타락한 꼴 내 눈으로 보려고 이 자리에 나왔어. 한지훈 그 멍청한 자식은 답이 없어! 모두가 보는 앞에서 내 앞에 무릎을 꿇릴 거야! 죽기보다 더한 고통을 맛보게 할 거라고! 물론 너도 함께! 그 인간 널 사랑한다며? 그럼 더 고통스럽게 죽여줘야지!”길시아의 얼굴이 흉하게 일그러졌다.강우연은 두려움에 고개를 저었다. 더 이상 그녀가 아는 길시아가 아니었다. 지금의 길시아는 악귀보다 더 흉측한 모습을 하고 있었다.“나 갈래.”강우연은 빨리 이곳에서 도망치고 싶었다.하지만 아무리 문을 잡아당겨도 열리지 않았다.“하! 아직 시작도 안 했는데 어딜 가?”자리에 앉은 길시아가 싸늘하게 말했다.“밖에 내 경호원들이 지키고 있어. 네가 내 앞에 무릎 꿇고 사과하기 전까지는 여길 못 나가.”길시아는 악랄함 그 자체였다.옆에서 지켜보던 강희연이 싸늘하게 말했다.“강우연, 뭘 멍하니 서 있어? 당장 시아 씨한테 무릎 꿇고 사과하지 않고! 너 어차피 부탁하려고 온 거잖아! 어디서 성질이야?”“내가 무릎을 꿇는 일은 없어! 쟤 때문에 내 인생이 엉망이 되었다고! 언니, 내가 뭘 잘못했는데 나한테 꿇으
거친 폭력에 강우연의 입안이 터지며 피를 뿜어댔고 얼굴이 뻘겋게 부었다.결국 조급해진 길시아가 강우연을 손가락질하며 소리쳤다.“그냥 꿇려!”경호원은 다가가서 강우연의 무릎을 걷어차서 바닥에 꿇렸다. 그 모습을 본 길시아는 거만한 표정으로 강우연을 내려다보며 싸늘한 미소를 지었다.“강우연, 안 꿇는다며? 결국 꿇었네?”강우연은 고개를 들고 그녀를 향해 침을 뱉었다.“길시아, 지훈 씨가 널 용서하지 않을 거야! 그리고 너의 가문도!”짝!분노한 길시아가 다시 그녀의 머리를 후려쳤다.“네 주제에 날 협박해? 그 무능한 자식이 무슨 수로 우리 집을 위협해? 우리 오빠 다음 달에 군단장이 될 거야! S시에서 우리 오빠 말을 거역할 수 있는 사람이 있을까? 너도 오늘 오빠한테 봐달라고 사정하려고 온 거잖아? 당장 내 앞에서 고개를 조아리면 없던 일로 해주지!”“꿈 깨!”강우연이 차갑게 말했다.“꼴에 자존심은. 좋아, 그럼 어쩔 수 없지! 굴복할 때까지 쳐! 오늘 이년이랑 끝장을 볼 거야!”길시아가 경호원과 오관우를 바라보며 싸늘하게 말했다.오관우와 강희연은 이 상황이 난감했다. 그래도 동생인데 아무리 미워도 이렇게까지 하고 싶지는 않았다.오관우는 강우연이 스스로 민학그룹과의 프로젝트를 자신들에게 넘기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섣불리 강우연을 건드렸다가 한민학의 보복이 두려웠다.“시아야, 우연 씨는 지금 민학그룹과 협력관계에 있어. 배후에는 한민학 군단장이 있는데 이만하고 넘어가는 게 좋지 않을까?”오관우가 식은땀을 흘리며 길시아에게 사정했다.“흥! 무슨 겁이 그렇게 많아? 민학그룹이 뭐 그렇게 대단해? 한민학? 난 그 사람 두렵지 않아! 우리 오빠 길정우야. 다음 달에 한민학이랑 동급이 된다고!”길시아는 거만하게 말하며 한민학을 안중에도 두지 않았다.두 사람이 가만히 있자 길시아는 결국 경호원에게 짜증을 부렸다.“치라니까 뭐 해?”“네, 아가씨!”경호원이 허리띠를 풀더니 강우연의 어깨를 향해 휘둘렀다.“악!”강우연은 고통스럽게 신
한지훈은 온몸으로 살기를 내뿜으며 저승사자처럼 성큼성큼 방 안에 들어섰다.조금 전까지 강우연에게 허리띠를 휘두르던 경호원이 품에서 비수를 꺼냈다.하지만!한지훈은 기함할 속도로 눈 깜짝할 사이에 경호원의 앞으로 다가가더니 큰손으로 그의 손목을 비틀어 꺾어버렸다. 우드득!경쾌한 소리와 함께 경호원의 처참한 비명이 울려퍼졌다.한지훈은 거기서 멈추지 않고 다리를 들어 상대의 복부를 힘껏 걷어찼다.쾅!가슴팍을 정통으로 맞은 그 경호원은 갈비뼈가 부러진 상태로 창가까지 날아가더니 끝내는 창문을 뚫고 밖으로 추락했다.자동차 경적소리와 사람들의 비명소리가 어지럽게 들려왔다.룸 안 분위기는 얼음처럼 차갑게 식었다.한지훈은 천천히 강우연에게 다가가서 그녀를 품에 안았다. 그는 온몸이 피투성이가 된 그녀를 보자 참을 수 없는 분노가 치밀었다.“너무 늦게 와서 미안해.”날카로운 살기가 강우연을 보자마자 순식간에 사라지고 얼굴에는 죄책감만이 가득했다.한지훈의 품에 안긴 강우연은 가냘픈 숨을 헐떡이며 말했다.“미안해. 아무 도움이 못 되고 되려 폐만 끼쳤네….”몸이 이 지경이 되었는데도 그녀는 한지훈을 걱정하고 있었다.한지훈은 그녀를 안고 다른 룸으로 갔다. 강우연을 잘 눕힌 뒤, 그는 다시 살기를 가지고 길시아가 있는 룸으로 돌아왔다.그는 시뻘겋게 충혈된 눈으로 길시아를 차갑게 노려보았다.강희연과 오관우는 두려움에 떨며 길시아의 뒤로 몸을 숨겼다. 그래도 입은 살았는지 한지훈을 보자 목청을 높여 소리쳤다.“한지훈, 지금 뭐 하자는 거지? 허튼 짓 하지 마! 여기 길시아 씨는 길정우 중장 친동생이야. 다음 달에 군단장이 될 분이라고. 이러다가 그분 심기를 건드리면 너만 문제가 생기는 게 아니라 우연이랑 강씨 가문도 무사하지 못할 거야!”“맞아! 한지훈, 아까 그건… 다 오해야. 참아….”오관우도 식은땀을 뻘뻘 흘리며 옆에서 거들었다.한지훈은 아무것도 안 하고 가만히 서 있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두려움을 주었다.오관우는 사람에게서 이렇게 진한 살
짝!길시아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한지훈의 커다란 손이 그녀의 뺨을 때렸다.거대한 힘을 이기지 못한 길시아는 중심을 잃고 비틀거렸다. 귀에서 이명이 들리고 입에서 피가 주르륵 나왔다.강희연과 오관우는 믿을 수 없다는 듯이 눈을 휘둥그레 떴다.한지훈이 정말 길시아에게 폭력을 휘두를 줄은 상상도 하지 못했다.미쳤어!저 인간은 그냥 미친놈이야!“한지훈, 미쳤어? 감히 길시아 씨한테 이게 무슨 짓이야! 너 이러는 거 길정우 중장이 알면 뼈도 못 추려!”조급해진 강희연이 한지훈을 향해 욕설을 퍼부었다.오관우는 휴대폰을 꺼내 곧장 길정우에게 문자를 보냈다.길시아는 얼얼한 뺨을 잡고 분노한 눈으로 한지훈을 노려보며 소리쳤다.“감히 나 쳤어? 네가? 한지훈! 여태 부모님도 내 몸에 손찌검을 하지 않았어! 그런데 네가 감히 내 얼굴에! 우리 오빠한테 너 죽여버리라고 할 거야! 강우연 그년도 절대 용서하지 않아! 그리고 네 딸도! 한고운이라고 했나? 네가 보는 앞에서 네 딸과 마누라의 사지를 찢어 버릴 거야!”길시아는 지금도 이 상황이 믿기지 않았다.한지훈 주제에 감히!하지만 한지훈은 들은 척도 하지 않고 다리를 들어 길시아의 복부를 힘껏 걷어찼다.그 순간 방 안에 삭막한 정적이 흘렀다.강희연과 오관우는 뒤늦게 다가가서 길시아를 부축하며 소리쳤다.“한지훈! 미쳤어? 너 이러는 거 우연이까지 지옥에 빠뜨리는 거야!”하지만 한지훈은 그 말을 깡그리 무시하고 바닥에서 허리띠를 주워들었다.“비켜!”그가 싸늘한 목소리로 말했다.오관우가 정의의 기사를 자처했지만 한지훈은 가볍게 그를 걷어차서 바닥에 쓰러뜨렸다.그는 피가 묻은 허리띠를 손에 들고 고통스럽게 신음하는 길시아를 바라보며 말했다.“이 모든 건 네가 자초한 거야. 네가 오늘 우연이한테 한 모든 짓, 내가 배로 갚아주지! 내 여자는 함부로 건드리면 안 된다는 걸 평생 기억하게 될 거야!”말을 마친 한지훈은 허리띠를 높게 치켜들었다가 길시아를 향해 힘껏 휘둘렀다.그런데 밖에서 어지러운 발소리
동시에 술집 밖에 세 대의 군용 트럭이 도착했다.차에서 무장군인들이 내리더니 신속히 술집의 출입구를 봉쇄하고 손님들을 밖으로 대피시켰다.술집 사장마저 군인들에게 쫓기다시피 해서 밖으로 나왔다. 한지훈이 있는 룸을 중심으로 술집의 모든 출입구가 순식간에 봉쇄되었다.검은색 군화를 신은 길정우가 살기등등한 모습으로 한지훈의 앞에 다가갔다. 그는 동생의 상태를 힐끗 살피고는 섬뜩한 눈빛으로 한지훈을 노려보며 욕설을 퍼부었다.“죽고 싶구나!”한지훈는 길정우의 시선을 똑바로 노려보며 말했다.“네 동생이 저지른 짓에 대해 응징하고 있으니 끼어들지 마! 내 말 무시하면 너까지 같이 패버릴 테니까!”그 말을 들은 길정우가 비웃음을 터뜨렸다.철컥!순간 그는 허리춤에서 권총을 빼들고 한지훈의 미간을 겨누었다.“한지훈, 군인과 내 여동생을 잔인한 방식으로 폭행한 건 중범죄에 해당해! 내가 지금 이 자리에서 널 쏴버려도 할 말 없다는 얘기야!”한지훈은 눈썹을 살짝 치켜올리며 싸늘하게 말했다.“내 얼굴에 총을 겨눈 놈 치고 지금까지 살아남은 놈은 없어.”그 한마디에 방 안 분위기가 팽팽하게 고조되었다.북양의 총사령관이 누군가에게 총으로 협박당하다니!상부에서 알았으면 기함하며 쓰러질 상황이었다.길정우의 눈에 비친 살기가 점점 더 짙어졌다.바닥에서 몸을 일으킨 길시아가 한지훈을 손가락질하며 길정우에게 소리쳤다.“오빠, 이 놈 죽여! 죽여 버려! 감히 날 상대로 폭력을 휘두른 놈이야! 머뭇거릴 필요 없어!”사실 총은 그냥 협박용이었다. 길정우는 승진을 앞두고 불필요한 소란을 피하고 싶었다.한지훈은 주저하는 길저우를 보고 싸늘한 미소를 지었다.“어서 쏴 봐.”길정우가 분노하며 소리쳤다.“내가 못 쏠 것 같아?”말을 마친 길정우가 방아쇠를 잡은 손가락에 힘을 주었다.그런데 이때, 군인 한 명이 안으로 달려오더니 길정우의 귀에 대고 말했다.“한민학 군단장이 부대원들을 데리고 오셨습니다!”그 말을 들은 길정우는 크게 당황하며 물었다.“군단장이 왜?
“미안하지만, 정말 들어본 적이 없습니다.”한지훈은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그건 의도적으로 체면을 구기려는 것도 아니었고, 정말로 진천국이라는 인물에 대해 들어본 적이 없었던 것이다.한지훈이 귀담아들을 만한 사람이라면, 최소한 오대명산의 각 원장 정도는 되어야 했다.그 외의 사람들에 대해서는 이름조차 들을 필요가 없었다.국제적으로 유명한 인물이라 해도, 한지훈 앞에 오면 누구 하나 예를 갖추지 않는 사람이 없었다.심지어 국가 원수들조차도 한지훈은 이름을 외울지 말지 고민할 정도였다.전 세계에 백여 개국이 있는데, 한지훈이 언제 그들 이름을 다 외우겠는가?한지훈의 경지에 이르면 세상의 모든 것들이 덧없게 느껴지며, 신분이나 지위 따위는 그저 덧없는 한때일 뿐이었다.“당신이 지금 누구와 얘기하는 줄 아는 거요?!”옆에 있던 소 씨 노인은 즉시 분노에 차서 책상을 치며 차갑게 소리쳤다.진천국은 산성에서 손꼽히는 인물인데, 한지훈이 그런 인물을 모른다고 하다니?이건 노골적으로 진천국의 체면을 짓밟는 행위였다!하지만 소 씨 노인이 말끝을 맺기도 전에, 진천국이 손을 들어 그를 제지했다.“젊은이, 나도 젊었을 땐 거만하긴 마찬가지였지. 하지만 세상을 우습게 보면 안 돼.”진천국은 상위자의 태도로 차갑게 훈계했다.“용건이 뭡니까?”한지훈은 진천국을 전혀 상대하지 않고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한지훈이 이렇게 직설적으로 나오자, 진천국은 속으로 감탄하지 않을 수 없었다. 비록 한지훈이 거만하긴 했지만, 그만큼 기개가 있다는 뜻이기도 했다.“그럼 나도 본론부터 말하지. 처음엔 당신이 그냥 작은 가게 주인인 줄만 알았는데, 아까 당신의 태도에서 뭔가 좀 특별함을 느꼈소.”“하지만 나씨 가문에서 어떤 이득을 줬든 간에, 당신 따위가 우리 진씨 가문의 일을 망칠 순 없소. 내 딸도 당신 같은 사람이 넘볼 수 있는 존재가 아니오!”“그러니 우리 서로 체면 구기지 않으려면, 하나의 제안을 제시하지. 지금 당장 가능한 한 멀리 떠나시오, 그리고 다시는
온갖 옥기들이 진열된 이 옥기 상점은, 얼핏 보기엔 평범한 옥들뿐이었고 그 흔한 최상급 옥도 좀처럼 눈에 띄지 않았다.이렇게 별 볼 일 없는 가게를 지키며 겨우 연명하고 있는 사람이 대체 무슨 대단한 배경이 있겠는가?한눈에 보기에도 이 가게의 주인은 겨우 입에 풀칠하며 살아가는 밑바닥 인생일 터였다!어차피 영기가 되돌아온 이후, 조금이라도 배경이 있는 사람들은 모두 각 대종문에 의탁했고, 일부는 오대 명산의 외부 제자가 되기도 했다.장사를 한다 해도 영기 회복 전과는 비교조차 할 수 없게 됐다.그런데 지금까지도 이런 이름 없는 작은 가게를 지키고 있다는 건, 딱 하나를 의미했다. 이 가게 주인은 아무런 배경도 의지도 없는 인물이라는 것이다!얼마 지나지 않아, 한지훈이 뒷마당에서 현관으로 나왔다.한지훈이 소박한 옷차림으로 모습을 드러내자, 진천국의 미간은 더 깊이 찌푸려졌다.한지훈의 옷차림만 보고도, 진천국은 그에 대한 인상이 한두 단계 더 추락했다.“휴, 저 사람은 너무 평범해 보이지 않소! 요즘엔 병왕계에 오른 사람도 널렸는데, 저런 사람은 정말 보기 드문 케이스지요!”진천국은 한숨을 쉬며 소 씨 노인에게 말했고, 소 씨 노인도 비웃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물론 영기 회복 이후에도 세계 각국에는 여전히 수많은 평범한 사람들이 존재하긴 했지만, 용국은 유독 달랐다. 용국은 기운을 품은 나라였기에, 용국 대지 전체가 거대한 변화를 겪은 것이다!심지어 일반 백성이라도 체력이 조금만 받쳐주면, 저절로 병왕계로 돌파하는 것이 가능해졌다.즉, 용국의 거리에서 젊은이 하나를 아무나 붙잡는다 해도, 무종에 입문했든 아니든 최소한 병왕계의 실력은 가지고 있었다!그런데 한지훈은 어쩐지, 완전한 일반인인 것 아닌가?그때, 한 젊은 여자 직원이 조심스레 진천국 쪽을 흘끗 바라보았다.진천국이 처음 가게 문을 열고 들어왔을 때부터 그녀는 이 두 사람이 결코 선량한 손님이 아니라고 느꼈다.이 사람들이 한지훈에게 조금이라도 해를 끼치려 한다면, 그녀는 분
진천국은 바로 이러한 고려 끝에, 갑작스럽게 이 일에 진지하게 대응하게 된 것이었다.“음, 진 씨 형님 말씀도 일리가 있습니다. 진씨 가문이 부흥한다면 손해를 보는 건 나씨 가문일 테니까요. 하지만 제 생각엔 그 옥기점 사장은 나계홍 손에 놀아나는 한낱 졸개에 불과할 겁니다!”“만약 진 씨 형님께서 부적절하다고 느끼시면, 저는 형님과 함께 그놈을 찾아갈 수 있습니다!”소 씨 노인이 냉담한 표정으로 말했다. 그가 보기엔, 그 작은 옥기점 사장은 분명 나씨 가문 쪽에서 무언가를 받아먹고, 나씨 가문 사람들과 짜고 이 한바탕 연극을 벌이고 있는 것뿐이었다. 단지, 진씨 가문과 장씨 가문의 혼인을 방해하기 위해서 말이다!“좋습니다. 장씨 가문 쪽에서도 이미 사람을 보내 소식을 전해왔고, 장 도련님이 선이를 꽤 마음에 들어 한다더군요. 지금 모든 준비는 끝났고, 이제 바람만 불어주면 됩니다. 이 중요한 시점에 절대로 어떤 변수도 생기게 해선 안 돼요!”진천국은 창밖을 바라보며 말했다. “하지만 나계홍이란 자는, 워낙 생각이 치밀해서 아무나 선택하지는 않습니다. 그리고 설령 위장이라 해도, 나계홍이 그렇게 쉽게 누군가에게 예를 갖추는 성격은 아니잖습니까.”“그러니 저희가 만일을 대비해서 준비를 또 해야 하지 않겠습니까?”소 씨 노인이 의미심장한 목소리로 말했고, 이에 진천국은 고개를 천천히 저으며 말했다.“그럴 필요 없습니다. 저는 줄곧 그 사람을 몰래 감시하게 해왔고, 지금까지의 결과를 보면 적어도 그가 오대명산과는 전혀 연관이 없다는 건 확실합니다.”“설령 자잘한 종문들과 조금 교류가 있다 해도, 우리 진씨 가문은 그런 것쯤은 전혀 신경 쓰지 않아도 되지요.”“더군다나, 장씨 가문을 감히 거스를 수 있는 종문이 누가 있겠습니까? 그리고 장령풍은 단순히 장씨 가문의 재능 있는 젊은이일 뿐만 아니라, 믿을 만한 정보에 따르면 장령풍은 반보 인왕계 강자의 자손이라고 하더군요. 그래서 장도령이 사망한 뒤, 장씨 가문이 장령풍을 온 힘을 다해 양성하고
진선은 목소리를 따라 고개를 돌리자, 들어선 이가 소 씨 노인임을 확인했다. 그녀는 이어질 상황을 짐작하며 아버지와 소 씨 노인이 또다시 자신을 위해서라는 명분으로 끝없는 잔소리를 늘어놓을 것을 예감했다.그래서 그녀는 황급히 말을 꺼냈다. “아빠, 옥기점에 아직 끝내지 못한 일이 많아요. 전 먼저 갈게요!”진선은 말을 마치고는 바로 뒤돌아 나가 버렸고, 진천국은 그녀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무거운 한숨을 내쉬었다.사실, 지난 반년 동안 그는 온갖 방법을 동원해 진선과 장령풍의 혼인을 성사시키려 했다.하지만 안타깝게도 진선은 장씨 가문의 이 절세 천재에게 전혀 호감을 보이지 않았다.진천국이 아무리 입에 침이 마르도록 설득해도, 진선은 전혀 꿈쩍하지 않았다.사실 진씨 가문 역시 무도 세가였다.수십 년 전, 용국의 무종이 조정의 억압을 받으면서 진씨 가문은 무도를 버리고 상업으로 전환한 것이다.그러나 영기가 부활하고, 역외의 강자들이 속속 돌아오면서 세상은 다시 수백 년 전 무종이 독주하던 시대로 회귀하는 듯한 기세였다.이에 진천국은 다시 무종 문파에 의지해보려는 생각을 품었다.하지만 오대 명산이나 장씨 가문 외의 다른 무종 문파들은 그에 비해 전혀 쓸모가 없었다.게다가 진씨 가문 조상 대에 이미 장씨 가문과 인연이 있었기에, 장씨 가문에 기대는 것이야말로 최선의 선택이었다!진선이 고개를 끄덕이기만 해도, 진씨 가문은 장씨 가문의 위세를 빌어 재기할 수 있다.그때가 되면 진씨 가문은 틀림없이 비상하여, 더는 이 산성 같은 촌구석에서 연명하지 않아도 되는 것이다! “소 씨 어르신, 사실 지난 1년 동안 선이는 한 옥기점에서 일하고 있었는데, 제가 알기로는 그 옥기점의 주인에게 약간의 감정이 있는 듯합니다. 이 일을 어찌하면 좋겠습니까!”진천국은 평소 소 씨 노인과 허물없이 대화하곤 했기에, 이 일 역시 숨김없이 털어놓았다.사실 이 일이 장씨 가문과 관련이 없더라도, 그는 체면이 깎여 몹시 불쾌했다.무엇보다 그 옥기점의 사장은 이미 아내와
이 둘과 비교하면, 기자인 그녀는 마치 한 줌 모래처럼 미미한 존재였다.임설의 얼굴에 두려움이 떠오르자, 유 씨 노인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설아, 사실 그리 걱정할 필요는 없다.”“지금의 용국은 이미 몇 년 전의 용국이 아니야. 너도 알겠지만, 내 뒤에는 오대 명산이 있단 말이지.”“우리 오대 명산이 널 지지하는데, 뭐가 두려운 것이냐? 설령 용국 조정이라도 감히 우리를 어찌하지 못할 것이다.”“그리고, 그날의 대화는 줄곧 내가 한 말이었으니 잡으려면 나를 잡는 거지, 널 잡을 일은 없다.”임설은 그 말을 듣고 다소 안심한 듯 보였으나, 여전히 난감한 표정으로 말했다.“그렇지만…… 유 씨 어르신, 그건 전부 어르신의 추측일 뿐이에요. 우리 손엔 아무 증거도 없잖아요!”“증거? 증거가 그렇게 중요해?”유 씨 노인은 냉소하며 자신만만하게 말했다.“무종 전체가 내 말에 동의한다면, 그게 바로 증거지!”비록 천릉자가 대량산에서 비참하게 죽임을 당했지만, 한지훈의 명예를 실추시키기만 한다면 국왕은 가장 중요한 의지를 잃게 된다.바로 이때, 국왕의 자리를 노린다면 누가 막을 수 있겠는가?……이때, 산성시.산중에 위치한 호화로운 별장에서, 검은색 양복을 입은 중년 남자가 마주 앉아 있는 젊은 여인에게 말했다.“선아, 며칠 전 장 도령께서 놀란 일이 있었단다.”“우리 천산 장씨 가문과는 대대로 교류가 깊었지. 어떤 의미에서든, 넌 가서 한 번은 그를 봐야 하지 않겠니?”“그리고 네 신분도 좀 자각해야 해. 진씨 가문의 큰 아가씨가 어찌 그리 속된 백성들처럼 옥기점 같은 데서 얼굴을 드러내는 것이냐!”이 중년 남자의 이름은 진천국, 산성 진씨 가문의 가주였다!진천국이라는 이름은 산성 전체에서 거의 군왕이나 다름없는 존재다.특히 영기가 되돌아온 이후, 진천국의 사문은 현재 산성 최대의 종문인 천앙종이었다!게다가 진씨 가문은 지금 천산 장씨 가문과 우호 관계를 다져가며, 혼인을 추진하려 하고 있다.만일 혼인이 성사된다면, 진씨 가문은
사실, 한지훈이 산에 들어서는 길목에서 이미 유 씨 노인의 말을 다 듣고 있었다.오대명산과 무종 사람들이 무슨 수작을 부리는지 어찌 한지훈이 모를 수 있을까!최근 이 시기 동안 천릉자의 기세가 드높다는 건, 곧 오대명산이 천릉자를 내세워 한지훈이 용국에 세운 공적을 지우려는 의도임을 뜻한다.게다가 이 기회에 국왕의 지위마저 위협하려는 것이었다.개인의 영예나 치욕 따위는 한지훈에게는 이미 중요하지 않았지만, 누구든 국왕의 권위를 흔드는 일만큼은 결코 용납할 수 없었다.오대명산의 계략을 깰 가장 좋은 방법은, 바로 천릉자의 기세가 가장 드높을 때 정면으로 한방 먹이는 것이었다!그리고, 천릉자가 살해당한 사건은 과연 큰 파장을 일으켰다!그 전에 오대명산은 이 일을 공개적으로 보도하게 하려고 수많은 언론 기자들을 초청했다.하지만 정작 결과는, 제 발등을 찍는 꼴이 되어버린 것이다! 현장에 와 있던 언론사 수가 너무 많았고, 모두가 생중계로 현장을 전국의 시청자들에게 전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게다가 수많은 인플루언서들까지 합류하며 정보를 봉쇄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에 가까웠다!이 사건은 마치 다리가 달린 듯, 하룻밤 사이에 전국으로 퍼져나갔다!“흥! 정말 웃기는군. 그 따위가 어찌 한지훈과 견줄 수 있단 말인가? 한지훈보다 깨달음이 뛰어나다고? 타고난 자질이 낫다고? 결국 누가 죽였는지도 모른 채 죽어버렸잖아!”“흥, 내 보기엔 그냥 날뛰는 광대였을 뿐이지!”“날뛰는 광대? 그래도 광대는 멀쩡한 머리를 잃진 않겠지! 하하하…”온라인에서는 조롱이 난무했고, 항산의 사람들은 아예 모습을 드러낼 엄두도 내지 못했다.한순간에 오대명산의 기세는 급격히 꺾이고 말았다.그 뒤 한 달 동안, 모든 이들의 화제는 이 사건에 쏠렸다.오직 한지훈만이 조용히 천생서문에 기록된 내용을 따라 진지하게 약제를 조합하는 데 몰두하고 있었다.그에게는 강우연이 천신계 경지에 도달하는 것이 이런 화제들보다 훨씬 더 중요했다.게다가 천하 정세는 이미 크게 변하고 있었고,
그들은 누군가가 도중에 강탈할 거라는 걱정은 전혀 하지 않았고, 오히려 장령풍이 자소화의 유혹을 견디지 못하고는 약속대로 천릉자에게 져주지 않을 가봐 걱정됐다. “여러분, 드디어 가장 관건적인 순간이 다가왔습니다. 과연 누가 최후의 승자가 됐을지 함께 알아봅시다!”한 인터넷 BJ는 생방송을 켜고는 팬들을 향해 말했다. 그렇게 시간은 1분 1초가 흘렀고, 모두들 손꼽아 승패를 기다리고 있었다. 약 한 시간이 지나고 나서야, 산 길에서는 사람들이 끊임없이 걸어 나왔다. 다만, 천릉자와 장령풍 두 사람의 종적은 전혀 보이지 않았다. “설마 사고라도 난 건 아니겠죠? 장 사부님이랑 천릉자 사부님은 왜 여태까지도 나오지 않는 거죠?”임설은 눈살을 찌푸리며 물었다. 사실 또 다른 가능성이 있을 거라 생각했다. 두 사람이 너무 격렬하게 싸운 나머지 모두 중상을 입어 전혀 움직일 수도 없는 상황일 가능성도 있었다. “그렇지는 않을 거야. 필경 모두 동문 사람이기에 두 사람이 한판 붙게 된다 하더라도 반드시 어느 정도 여지를 남겨둘 거야!”유 씨 어르신은 확신에 가득 찬 말투로 말했다. 알다시피 이번 대결은 5대 명산이 함께 손을 잡고 벌인 판이다. 게다가 천산 장 씨 집안도 이 계획에 얽혀있었기에, 절대 어떠한 실수도 없을 거라 생각했다. 뿐만 아니라 그들의 주위에는 또 수많은 고수들이 지켜보고 있을 텐데, 의외의 사고란 발생할 수가 없었다. 그런데 유 씨 어르신의 말이 떨어지기도 바쁘게, 산길에서는 어두운 안색의 항산 제자 4명이 단대 하나를 들고는 눈물을 주르륵 흘리며 내려오고 있었다. 이내 카메라들은 일제히 그 단대에 초점을 뒀고, 모든 기자들은 순간 숨을 죽였다. 단대 위에는 머리 없는 시체 한 구가 누워 있었고 옆에는 웬 동그란 물건이 놓여 있었다. 자세히 들여다보고 나서야, 많은 사람들은 그것이 바로 천릉자의 머리라는 것을 알아차렸다. 다른 한편, 몇 명의 장 씨 집안 자제들 역시 단대 하나를 들고는 산에서 내려오고 있었다. 장령풍
그러나 한지훈은 장령풍을 투명 인간 취급한 체 눈 깜짝할 사이에 숲속으로 사라져 버렸다. 한지훈이 멀어질 때까지, 장령풍은 여전히 깊은 공포 속에 빠져 있었다. 사실 천릉자는 실력이 대단한 사람이었다. 방금 그와의 정면승부에서, 그는 천릉자의 털 하나 건드리지 못했다.두 사람의 실력은 그야말로 우열을 가리기 힘들었다.천릉자의 촘촘한 검망을 깨뜨려 그의 머리를 아작 낸다는 건 도무지 상상할 수가 없었다. 그가 생각하기에 자신은 최선을 다해봤자 기껏해야 천릉자에게 상처만 입힐 거라 확신했다. 천릉자를 죽이는 건 하늘의 별 따기보다도 더욱 어려웠다. 모두들 알다시피 검망 아래에서는, 수천 갈래의 검의 습격을 마주해야 했다. 그 검망을 피해 사람을 죽이는 건 말할 것도 없고, 그 검방을 피하는 것조차 매우 어려운 일이었다. 설사 2성 천신계 강자라 하더라도 밀집된 검망을 마주하게 되면, 사태를 제대로 파악하지도 못하게 되고 더욱이는 천릉자를 사지로 몰아넣을 수가 없었다. 그러나 한지훈은? 오직 나뭇잎 하나만으로, 마치 어린애 장난처럼 닥치는 대로 나뭇잎을 던져 천릉자의 머리를 아작 냈다. 지금 이 순간, 산 전체는 비할 데 없이 조용했다. 한지훈이 멀어질 때까지 장령풍은 줄곧 조용히 땅에 무릎을 꿇고 머리를 박고 있었다. 그는 심지어 감히 고개 한번 들어 앞을 제대로 보지도 못했다. 그렇게 30분이 흐르고 나서야 장령풍은 고개를 살짝 들었다. 한지훈의 자취가 더 이상 보이지 않자, 그는 비로소 이마의 식은땀을 닦아냈다. 그런데 바로 이때, 익숙한 목소리가 갑자기 들려왔다. “장령풍, 오늘 벌어진 일을 소문내면 장 씨 집안은 멸망하게 되는 줄 알아!”“네... 저는... 아무것도 못 본겁니다!”크게 놀란 장령풍은 벌벌 떨었다. 한지훈의 경고는 그에게 있어서 성지였다. 한지훈은 뱉은 말은 무조건 지키는 사람이라는 걸, 그는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다. 당시 유럽은 용경과는 80리 정도 멀리 떨어져 있었지만, 오직 용국을 위해 복수
게다가 사방에서 한지훈을 헐뜯고 있는 발언들에 대해, 장령풍은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다. 당시 한지훈에게 도움을 줄 수 있는 사람은 없었고, 몇몇 명산 모두가 그의 적이었다. 그렇기에 한지훈이 남의 도움을 받았다는 얘기 자체는 말도 안 되는 것이었다. 역외 강자조차도 흔들 수 없는 거물을, 누가 감히 건드리려 하겠는가? 그러나 옆에 있던 천릉자는, 장령풍의 표정 변화를 전혀 알아채지 못했다. 그는 한지훈의 정체가 뭐든, 자신이 쟁취해야 할 성과를 이대로 빼앗길 수는 없다고 생각했다. 이내 그는 장령풍과 상의도 하지 않고 바로 손을 들었다. 곧이어 그물처럼 촘촘한 검망이 한지훈의 정수리 위에 펼쳐졌다. 그는 단 한 방에 한지훈을 산산조각 내어, 모든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자신을 건드리면 어떤 결말을 맞이하게 되는지 똑똑히 보여줄 작정이었다. 온 하늘을 덮은 검망에도, 한지훈은 거들떠보지도 않고 닥치는 대로 나뭇가지에서 잎사귀 하나를 따냈다. 그러고 나서는 천릉자가 서있는 쪽으로 잎사귀를 가볍게 던졌다, 곧장 자신을 향해 날아오는 잎사귀에, 제대로 화가 난 천릉자는 하마터면 피를 토할 뻔했다. 잎사귀로 사람을 다치게 하는 건, 무종 모든 종사들의 장기였다. 그러나 종사계의 실력은, 그저 전신계와 같을 뿐이었다. 그런데 일성 천신계 고수인 자신이 뜻밖에도 전신계 같은 땅강아지한테 무시당하게 될 줄이야? 생각할수록 더욱 화가 치밀어 오른 천릉자는 곧바로 또 하나의 검망을 휘두르며 사악한 웃음을 보였다. “네 이 녀석, 천신계 강자를 상대로 도전장을 내밀면 어떤 결말을 맞이하게 되는지 오늘 내가 제대로 보여주마!”“죽어!”지금 이 순간, 천릉자는 이미 한지훈을 죽은 사람으로 취급했다. 이변이 일어나지 않는 한, 눈 깜짝할 사이에 한지훈은 산산조각 나게 될 것이다. 예상치 못한 눈앞의 상황에 장령풍은 저도 모르게 눈살을 찌푸렸다. 그는 전에 이미 한지훈의 전력을 직접 목격했었다. 모든 전투에서, 한지훈은 오릉군 가시를 던졌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