온하랑은 제대로 듣지 못하고 그저 부승민이 술에 취해 잠꼬대한다고 생각했다.손목을 잡은 그의 손을 풀어내려고 했지만 부승민은 더욱 세게 온하랑의 손목을 잡았다.온하랑은 손을 뻗어 부승민의 손가락을 하나하나 떼어내려고 했지만 그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부승민이 또 가볍게 속삭였다.“하랑아, 사랑해.”온하랑은 온몸이 그대로 굳어 하려던 동작도 멈춘 채 서 있었다. 환청인 줄 알고 천천히 부승민에게로 몸을 숙여 물었다.“뭐라고?”“사랑해, 하랑아. 제발 날 떠나지 마. 내가 잘못했어. 앞으로 널 더 사랑하고 아낄게. 제발 날 떠나지 마...”부승민은 자신이 얼마나 나약한 사람인지 다시금 깨달았다.차갑게 조소하는 온하랑의 시선이 두려워 이런 방법으로 온하랑에게 비는 것이었다.온하랑은 그 말을 들으면서 천천히 눈을 감았다.어쩌면 부승민이 잠결에 사람을 착각했을지도 모른다.그에게 잘못이 없다고 해도, 그가 이혼하기 싫다고 해도, 지금 이 행동은 그저 죄책감 때문일 것이다.그렇게 많은 고생을 하고 처참한 대가를 치렀으니, 온하랑은 더 이상 부승민과 함께하고 싶은 생각이 없었다.온하랑은 계속해서 부승민의 손가락을 하나하나 떼어냈다.온하랑이 떠나려고 하자 부승민은 속으로 실망하고 절망했다.그의 고백을 듣고도 온하랑은 아무 반응이 없다.결국은 붙잡지 못할 인연인 것이다.감정이 파도처럼 치고 올라왔다.아니, 그는 아직 온하랑을 놓을 수가 없었다.부승민은 온하랑의 손목을 잡은 채 힘을 줘서 끌어당겼다. 놀란 온하랑은 비명을 지르면서 그의 몸 위로 넘어졌다.부승민이 몸을 돌려 온하랑을 자기 아래에 깔고 정확히 입술을 향해 키스를 퍼부었다.부드럽고 달콤한 그 입술에 부승민은 점점 빠져드는 기분이었다.“읏...”두 사람 사이에 독한 술 냄새가 퍼졌다. 온하랑은 숨을 꾹 참고 두 팔을 가슴 앞에 교차한 채 열심히 그의 어깨를 밀어냈다. 그리고 고개를 이리저리 돌리면서 부승민의 입술을 피하기도 했다.“부승민... 이거 놔...”부승민의 가슴은 마
예전 부승민은 일부 사람들이 왜 그렇게 담배를 피우기 좋아하는지 알 수가 없었다. 하지만 이제야 비로소 그 이유를 알 것 같았다.담배 한 대를 다 피우고 담배꽁초를 비벼 끈 부승민은 찬 바람을 맞으며 몸에 밴 담배 냄새를 다 날려 보내고서야 방에서 나왔다.온하랑은 이미 아래층에서 부승민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녀는 그가 곧 내려올 거라는 걸 알고 있는 듯했다.두 사람은 일순간 마주쳤던 시선을 재빨리 피했다.부승민은 아직도 미련이 남아있고, 온하랑은 이미 마음을 굳힌 상태다. 굳이 서로 말하지 않아도 훤히 알 수 있었다.“가자.”“그래.”온하랑은 자리에서 일어나 부승민의 뒤를 따라 차에 올라탔다.부승민은 이번에는 일부러 속도를 늦추거나 하지 않았다. 가는 길 내내 막힘이 없었고, 차가 이내 가정법원 주차장에 도착해 멈춰 섰다. 그들이 이곳으로 온 건 이번이 두 번째다.차에서 내린 후 각자의 서류를 챙긴 부승민과 온하랑은 어깨를 나란히 하고 안으로 걸어 들어갔다. 누구도 말하지 않았고, 괴이한 침묵이 흘렀다.안으로 걸어 들어갈 때 부승민은 갑자기 온하랑의 손을 잡았다. 그녀가 손을 빼내기 전에 얼른 한마디를 보탰다.“마지막으로 한 번만.”지난 3년 동안, 부승민은 당장이라도 멀리 떠나가 버릴 것 같은 위태로운 온하랑의 마음을 되돌릴 기회가 무수히 많았지만, 안타깝게도 끝내는 그 기회를 잡지 못했다.그녀는 이미 그에게서 마음이 떠난 지 오래였다.온하랑의 손을 꼭 감싸쥔 부승민의 커다란 손은 여전히 따뜻했다.온하랑은 지난번 가정법원에 왔을 때를 떠올렸다. 그녀는 앞이 잘 보이지 않았고, 부승민은 그때도 지금처럼 그녀의 손을 잡고 계단을 올라갔다. 그때와 별반 다르지 않은 것 같으면서도 또 뭔가 달라 보였다.창구 앞으로 간 부승민과 온하랑은 서류를 들이밀었다. 이름을 흘긋 본 직원은 고개를 들어 그들과 말하려다가 문득 무언가 알아챈 듯 다시 고개를 숙여 서류에 적힌 이름을 자세히 들여다보았다.재차 확인한 직원은 고개를 들어 부승민과 온하
부승민은 손에 들린 이혼 확인서 등본을 어찌나 힘껏 구겨 쥐었는지 뼈마디가 하얗게 질렸다. 한순간 갈기갈기 찢어버리고 싶은 충동이 일었다.직원은 혼인관계증명서에 무효 처리 도장을 찍으며 말했다.“이건 다시 가져가실 건가요? 아니면 바로 폐기할까요?”“주세요!”서류를 건네받은 부승민은 나머지 하나를 온하랑의 손에 쥐여주었다.온하랑은 적잖이 당혹스러웠지만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이혼 확인서와 함께 가방에 집어넣었다.“가자.”“그래.”돌아가는 차 안에서 온하랑은 창문을 열고 창밖을 바라보았다. 살을 에는 듯한 차가운 바람이 그녀의 얼굴에 날카롭게 부딪혔다.온하랑은 무표정한 얼굴로 오른쪽 백미러를 통해 자기 얼굴을 바라보았다. 그녀의 마음은 자신이 생각했던 것처럼 후련하지 않았고, 오히려 무거울 따름이다.미세한 욱신거림과 쓰라림이 천천히 그녀의 가슴 한구석을 옥죄어왔다.그다지 아프지는 않았지만, 가슴 전체가 답답하고 불편했다.온하랑은 자신의 눈시울이 붉어진 것을 부승민에게 들키지 않으려고 눈에 힘을 주며 버텼다.하긴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열여섯 살 때부터 스물다섯 살까지 거의 10년에 가까운 시간이다. 키우던 반려동물을 갑자기 떠나보내도 커다란 아쉽움이 남을 텐데, 그게 사람이라면?그것도 온하랑이 10년을 좋아한 사람이다. 차갑고 어두웠던 그녀의 삶에 한 줄기 햇살 같은 사람이자, 그녀가 애타게 쫓으려 했던 빛이다.부승민은 이미 온하랑의 삶에 녹아들어 습관처럼 굳어버렸다.어떻게 짧은 시간 안에, 그에 대한 미련을 훌훌 털어버릴 수 있단 말인가.그러나 몇 년이라는 시간이 흐르는 동안에도 끝내 그의 마음을 잡지 못했다.이미 온갖 노력을 기울이고 지칠 대로 지쳐버린 온하랑은 이제는 그냥 다 내려놓고 싶었다.온하랑은 칼로 찌르는 듯한 마음의 고통을 억누르며 애써 미소를 지어 보였다.이제 안녕, 열여섯 살의 하랑아.오늘 이후부터 그녀는 과거와 작별하고 새로운 삶을 시작할 것이다.“부승민.”온하랑이 돌연 그의 이름을 불렀다.“왜?
부승민은 키가 너무 커서 병원 침대는 그가 눕기엔 작아 보였다.의식을 잃기 직전에 발생한 일을 떠올린 온하랑은 순간 심장이 멎는 것 같았다. 어쩔 바를 모르며 부승민의 침대 옆에 뛰어가 그의 손을 꼭 그러잡았다.“오빠? 괜찮은 거지? 빨리 일어나서 뭐라고 말 좀 해봐!”심장이 목구멍으로 튀어나올 것 같았다. 그렇게 무서웠던 적은 처음이다. 부승민도 아버지처럼 교통사고 이후 혼수상태에서 영영 깨어나지 못할까 봐 두려웠다.그녀는 그때의 사고 장면을 잊을 수 없었다. 그때도 트럭이 그녀가 앉아있는 조수석을 향해 오른쪽에서 돌진했다.아버지가 핸들을 오른쪽으로 꺾어 자신의 생사를 마다하고 그녀를 보호하지 않았다면 아버지는 죽지 않았을 것이다. 죽는 사람은 오히려 그녀였다. 바로 그때처럼 부승민도 위험을 무릅쓰고 핸들을 오른쪽으로 돌렸다. 설마 부승민도 이렇게 그녀를 떠나가려는 걸까?온하랑이 아무리 불러도 침대에 누워있는 부승민은 아무 반응이 없었다. 온하랑은 눈시울이 붉어지며 마음속의 공포가 점점 커졌다.“부승민, 죽지 마!”온하랑은 이제 아무렇지 않게 부승민을 내려놓을 수 있을 줄 알았다. 하지만 생기를 잃고 침대에 누워있는 부승민을 보는 순간 마치 보이지 않는 무형의 손길이 그녀의 심장을 옥죄이며 천천히 밖으로 끄집어내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부승민에게 정말 무슨 일이라도 생긴다면 온하랑은 절대 자신을 용서할 수 없다.그녀는 화근덩어리다. 주변 사람들에게 끊임없이 여러 가지 불행을 가져다준다.마땅히 죽어야 할 사람은 바로 그녀다.“울지 마. 나 괜찮아.”부승민의 잠긴 목소리가 들려왔다. 온하랑이 고개를 들어보니 부승민은 어느새 눈을 뜨고 있었다.머리에 하얀 붕대를 감고 그윽한 눈길로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 머리는 살짝 헝클어지고 잘생긴 얼굴은 약간 창백해져 오히려 유연한 아름다움이 비쳤다.온하랑은 저도 모르는 새에 멍하니 바라보고 있었다.그 순간 그녀는 자기 심장이 두근거리는 소리가 귀에 들리는 것 같았다.“왜 그래? 좋아서 못
“괜한 생각하지 마. 오빠가 날 실리려다가 다쳐서 마음이 편치 않을 뿐이야.”온하랑은 눈을 내리깔고 말했다. 그녀는 부승민 때문에 아픈 마음을 단순한 불안감으로 관념을 바꿔버렸다. 낯선 사람이 그녀를 구하려다가 다쳤을지라도 감동받고 걱정하긴 매한가지니까.그러나 마음이 아프다는 건 다른 의미이다. 누군가 이런 말을 한 적이 있다. 당신이 한 남자를 마음 아파하고 있다는 건 그 남자에게 마음이 있기 때문이라고.부승민의 눈은 다시 빛을 잃고 어두워졌다.“왜 널 살리려고 했는지 안 물어보는 거야?”그런 위기 상황 속에서 그는 이것저것 생각할 여유 따위는 없었다. 심지어 자기 안위조차 내팽개치고 의도적으로 핸들을 돌렸다. 오로지 그녀를 다치게 하고 싶지 않다는 이유만으로 본능보다 이성이 앞섰다.“이유가 어찌 됐든 내가 고마워해야 하는 건 당연한 사실이야. 고마워, 오빠.”온하랑은 진심이 가득 담긴 눈빛으로 그를 바라보았다.부승민이 목숨을 걸고 구해줬으니 온하랑도 목숨으로 보답할 것이다.혹시나 언젠가 부승민한테 위험이 닥친다면 온하랑도 그를 위해 목숨을 내던질 수 있다는 말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그를 믿을 수는 없었다. 다시 마음을 내줄 리는 더욱 만무했다.온하랑의 감사 인사는 부승민이 듣기에 그저 가혹할 따름이다. 그는 어이없다는 듯 웃으며 말했다.“그저 입으로만 고맙다고?” “그럼 내가 어떻게 하길 바라는데?”“너...”엉겹결에 말이 입밖으로 튀어나왔지만 부승민은 잠시 머뭇거리다가 다시 말했다.“... 내가 퇴원할 때까지 병원에서 돌봐주면 안 돼?” 그 한순간 부승민이 하고 싶었던 말은 사실‘너 나를 떠나가지 않으면 안 돼? 우리 다시 시작하자’ 라는 말이었다.온하랑이 눈살을 찌푸렸다. 위급한 상황을 틈타 이런 말을 하면 안 됐다고 생각한 부승민은 마음이 불편해졌다. 그러나 그녀는 고개를 끄덕였다.“그래.”온하랑이 동의하자 부승민의 마음에 기쁨이 차올랐다.이윽고 온하랑의 목소리가 다시 들려왔다.“날 구하려다가 다쳤으니 내가 돌
부승민은 한참 뒤에야 두 사람이 이미 이혼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더 이상 서로의 행방에 대해 알려줄 의무가 없었고, 생활에 간섭할 이유도 없었다.온하랑은 앞으로 자기만의 삶을 살며 자기만의 일을 할 것이다.아마도 부승민은 어쩌다 가끔 본가에서만 온하랑을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만약 온하랑이 일부러 그를 피한다면 일 년 동안 못 보는 것도 지극히 정상적인 일이다.그럴 수도 있겠다는 생각에 부승민은 가슴이 저렸다. 그는 정말로 받아들일 수 없었다.“뭐 먹고 싶어? 내가 내려가서 사 올게.”온하랑의 목소리에 부승민은 생각을 멈추고 천천히 눈을 뜨며 말했다.“그냥 아무거나 사. 난 별로 입맛이 없어.”“그래. 그럼 내가 알아서 살게.”온하랑은 휴대폰을 들고 병실을 나섰다.이십 분쯤 지나자 그녀는 밖에서 음식을 사 들고 돌아왔다. 손에는 만두, 빵, 계란, 두유, 소고기 야채죽을 들고 있었다.온하랑은 음식을 한꺼번에 테이블에 올려놓았다.“이것저것 사 왔어. 뭘 먹을래?”“지금은 아무것도 먹고 싶지 않아.”“먹기 싫어도 먹어야지. 가뜩이나 다치기까지 했는데, 잘 먹어야 몸도 빨리 회복할 거 아니야. 게다가 원래 위도 안 좋잖아...”절반 말하다가 온하랑은 갑자기 멈추고 침묵했다.그들은 이미 이혼한 사이다. 어떤 말은 그녀가 하기에는 주제넘은 감이있었다. 부승민도 침묵했다. 지난 3년 동안 온하랑은 항상 부승민을 관심하며 하루 세끼를 잘 챙겨 먹으라 당부했다. 그가 업무에 몰두하거나 회의하느라 식사 시간을 잊어버리지는 않았는지, 온하랑은 직접 찾아가 그를 감독하곤 했다. 그렇게 그들은 점차 함께 그의 사무실에서 밥 먹는 습관을 들였다.그러나 언제부터인가 그는 다시는 그녀의 관심과 당부를 들을 수 없었다. 심지어 함께 마주 앉아 밥 먹을 그 흔한 기회조차 드물었다.온하랑은 모든 음식을 절반씩 덜어 침대 앞 테이블에 올려놓았다.“여기다 올려 둘게. 먹고 싶을 때 알아서 먹어.”온하랑이 돌아서서 병실을 나가려고 하자 부승민은 온하랑이
“그럴 필요 없어. 전에 이혼 협의할 때 더윈파크힐은 너에게 주기로 했잖아. 내가 나갈게.”부승민은 담담한 표정으로 말했지만, 마음속으로는 피눈물을 흘리고 있었다.온하랑은 고개를 가로저었다.“그냥 오빠가 가져. 아니면 내가 부동산 중개인에게 팔아달라고 할게.”전에 이혼 협의서를 작성할 때 온하랑은 이 별장을 가지고 싶어 했었다.이 집에는 두 사람이 함께 생활한 흔적이 곳곳에 남아있었다. 온하랑은 그들의 추억이 깃든 이곳을 남겨두고 싶었다. 그리고 이 집이 추서윤에게 점령당하는 걸 원하지 않았다.그러나 온하랑은 이제 더는 이 별장을 가지고 싶은 마음이 남아 있지 않았다. 지나간 기억들은 그녀에게 고통과 아쉬움만 가져다줄 뿐이었다.내려놓기로 마음먹었으니 지나간 모든 것들을 다 같이 버려버릴 것이다.온하랑의 말을 들은 부승민은 몸에 얼음물을 들이부은 것처럼 온몸이 시리고 가슴은 커다란 돌덩이로 짓눌러 놓은 것처럼 호흡이 가빠지며 숨이 막혀왔다.그녀가 지금 그들이 3년 동안 함께 살아온 별장을 팔아버리겠다고 한다. 약간의 추억조차 남기기 싫단 말인가?이렇게도 그를 벗어나고 싶단 말인가?온하랑은 가방을 들고 병실을 떠났다.부승민은 두 눈을 감고 무기력하게 침대에 누워있었다. 마치 심장을 칼로 도려내는 것 같은 아픔에 온몸이 마비되고 오한이 들었다.온하랑이 떠났다.앞으로는 더 이상 그녀를 찾을 정당한 핑계가 사라졌다.그가 의도적으로 찾지 않는 한 두 사람이 서로를 만날 횟수는 매우 적을 것이다.보통의 이혼한 부부처럼 서로를 간섭하지 않고 각자의 삶을 살아야 한다.부승민은 저도 모르게 주먹을 꽉 쥐었다. 뼈마디는 하얗게 변하고 우두둑 소리가 났다....별장으로 돌아온 온하랑은 짐을 싸기 시작했다.캐리어를 바닥에 열어놓고 옷장에서 옷을 꺼내려고 고개를 돌리는 새에 새끼 고양이 한 마리가 여행 가방 안에 들어가 그녀를 향해 야옹거렸다.온하랑이 송이의 머리를 쓰다듬자 송이는 온하랑의 손가락을 다정하게 핥았다.온하랑은 물론 송이를 데려갈 생
온하랑은 송이를 안고 계단을 내려왔다.다음 날 오전 온하랑이 송이를 애견 카페에 맡기러 갈려고 할 때 예상 밖에 문 앞에서 아주머니와 마주쳤다.“아주머니, 왜 돌아오셨어요?”“연 비서님이 가셔서. 전 필요 없어졌어요.”아주머니는 웃으며 말했다.“사모님, 송이를 안고 어디 가시는 거예요?”“아주머니, 저희 이제 이혼했어요. 앞으로는 사모님이라고 부르지 말아 주세요. 저 곧 여행 갈 거라서 송이를 잠시 애견 카페에 맡기려고요.” “그냥 여기에 두면 안 돼요? 송이도 이미 이곳에 익숙해져 있는데, 낯선 애견카페에 보내면 적응 못 할 수도 있고 아직 너무 작아요.”온하랑의 얼굴에 난감한 기색이 역력했다.“여긴 오빠 집이라 여기 두면 안 될 것 같은데요.”“괜찮아요. 송이도 대표님이 데려온 거니까 잠시 둬도 괜찮을 거예요. 대표님도 이 집을 당분간 팔지 않을 거라 하셨고요. 게다가 이렇게 큰 별장은 당장 팔리지도 않을 거예요. 저도 있는데 뭐가 걱정이세요. 만약 대표님이 진짜 팔아버리시면 제가 송이를 집에 데려가 며칠 돌보면 돼요. 적어도 송이는 제가 익숙할 거고 저도 송이를 정말 좋아하거든요.”아주머니에게 맡기는 것이 애견 카페에 맡기는 것보다 훨씬 낫다.온하랑은 곰곰이 생각하고 말했다.“아주머니, 그럼 그렇게 해요. 고마워요. 송이를 잘 부탁드려요.”“사모... 하랑 씨, 걱정하지 마세요. 제가 송이를 이쁘게 잘 키울 테니까요.”그리고 온하랑은 본가로 향했다.이미 부승민과 끝냈으니 김정숙에게 이 사실을 알려야 했다.그녀가 입원해 있을 때 김정숙이 그녀를 보러오지 않은 건 아마도 부승민이 김정숙에게 이 사실을 숨겼기 때문일 것이다.김정숙은 눈치가 빨라 이미 어느 정도 짐작하고 있었다.“하랑아, 그동안 마음고생이 많았지. 그래, 잘 이혼했어. 승민이는 너에게 어울리지 않아. 어찌 됐든 넌 할머니 손녀니까 앞으로 자주 보러 와야 해, 알았지?”“알았어요, 할머니. 저와 오빠의 관계가 어떻든 할머니가 제 할머니인 건 영원히 변함이 없어요
“그렇다면 다행이네.”최국환은 그녀를 잠시 바라보더니 조용히 말을 이었다.“동림이도 이 병원에 있어. 천식이 재발해서 입원 중인데 같이 가서 보러 갈래?”온하랑은 잔잔히 미소 지으며 고개를 저었다.“아니요. 전 또 일이 있어서요.”“바로 아래층인데. 금방이면 돼.”최국환이 설득하듯 덧붙였지만 온하랑은 여전히 고개를 저었다.“죄송해요. 회장님. 제가 좀 바빠서 이만 가볼게요.”그녀는 부드럽게 말을 맺고 최국환을 지나쳐 앞으로 걸음을 옮겼다.걸음을 옮기면서도 그녀의 생각은 계속 이어지고 있었다.‘내가 필라시에서 메이슨을 낳았다는 얘기... 처음엔 믿기 어려웠지. 하지만 사진도 있었고 메이슨이 다시 내 품에 돌아온 뒤로는 받아들이게 됐어. 그렇다면 메이슨이 유실된 원인은 과연 무엇일까?’온하랑은 몇 가지 가능성을 떠올렸다.첫 번째 가능성은 출산한 후 며칠 지나 교통사고를 당한 경우였다.그 사고로 기억을 잃고 병원에 입원해 있던 사이 갓난아기 메이슨은 집에 혼자 남겨졌고 우는 소리에 놀란 이웃이나 행인이 아이를 구조했다가 연락처를 찾지 못해 이리저리 떠돌다 양부모 손에 들어갔을 가능성 혹은 집에 아무도 없다는 걸 틈타 누군가 아이를 빼돌렸을 수도 있었다.두 번째는 임신 후반기에 교통사고를 당한 경우였다.병원에서 아이를 낳았지만 기억을 잃고 아이를 낳았다는 사실조차 모르는 채 입원 생활을 이어갔고 아이는 병원의 판단이나 제삼자의 개입으로 다른 곳에 보내졌을 가능성도 있었다.특히 병원 측이 메이슨의 혈액형이 특이하다는 걸 알고 그 사실을 숨겼을 가능성도 생각해 볼 수 있었다.무엇보다 그때 그녀에게는 아이를 낳았다는 사실을 알려주는 사람이 단 한 명도 없었다.온하랑은 두 번째 가능성이 더 현실적이라 생각했다.사고로 깨어난 뒤 그녀의 휴대폰에는 최동철이나 벨라, 혹은 진도원 등 사람들의 연락처가 아무것도 남아 있지 않았다.그 사고에 뭔가 수상한 구석이 있다는 건 오래전부터 느끼고 있었다.그리고 오늘 메이슨의 희귀 혈액형을 알게 된 뒤로
온하랑은 조심스럽게 일반 병실 문을 밀어 열었고 문틈 사이로 소독약 특유의 냄새가 훅하고 밀려왔다.병실 안에서는 운전기사가 침대에 비스듬히 기대 누워 있었고 오른쪽 다리는 깁스를 한 채 이마엔 붕대가 감겨 있었다.온하랑이 들어오자 기사는 몸을 일으키려 애쓰며 말했다.“아가씨, 죄송합니다.”“움직이지 마세요.”온하랑은 재빨리 다가가 그를 제지하고는 다정하게 말했다. “지금은 푹 쉬셔야 해요.”기사는 눈에 띄게 미안한 기색이었다. “다 제 잘못이에요. 제가 그때 반응이 조금만 더 빨랐더라면...”“기사님 잘못 아니에요.”온하랑은 그의 곁에 앉아 방금 사 온 과일 바구니를 건넸다. “CCTV 확인해 보니까 상대 차량이 고의로 신호를 어긴 게 맞아요. 경찰이 이미 수사에 들어갔어요.”기사는 그제야 안도의 숨을 내쉬며 물었다.“그럼... 메이슨 도련님은요?”“아직 중환자실이에요.”온하랑의 목소리는 담담했지만 그 안에 담긴 걱정은 고스란히 전해졌다.“하... 부디 별일 없어야 할 텐데요. 어서 나아야 할 텐데...”“의사들이 최선을 다해주실 거예요. 기사님께서 필요한 거 있으면 간병인이나 비서한테 바로 말씀하세요. 전 이제 아주머니 병실도 보고 올게요.”“네, 고맙습니다. 조심해서 다녀오세요.”온하랑은 장 선생 병실을 나온 뒤 가정부 아주머니의 병실도 들렀고 마지막으로 메이슨이 있는 중환자실 앞으로 향했다.아직 깨어나지 않은 메이슨을 보기 위해 간호 스테이션에 들러 서류에 서명하고 푸른색 보호복과 마스크, 모자를 착용한 뒤 무거운 격리실 문을 밀었다.침대 위 메이슨은 생각보다 더 창백했다.그의 긴 속눈썹이 병실 조명 아래 거의 투명해 보였고 여러 장비와 관이 그 작은 몸을 감싸고 있었고 의료 기기에서는 규칙적인 삑삑 소리가 들렸다.온하랑은 조심스럽게 그의 손을 잡고 엄지로 손등을 부드럽게 문지르며 낮게 속삭였다.“메이슨...”그녀는 고개를 돌려 간호사에게 물었다.“언제쯤 깰 수 있나요?”“수술 끝난 지 이제 다섯 시간
온하랑은 잠시 멍하니 있다가 예전에 강남시에서 마주친 소년이 떠올랐고 고개를 살짝 저으며 말했다.“별로 가고 싶지 않아요.”그들은 비록 이복남매 사이지만 사실상 남이나 다름없었다.게다가 지금 최동림이 입원 중이라면 보호자는 거의 확실하게 임가희일 것이고 온하랑은 그 여자를 다시 보고 싶지 않았다.“그래. 그럼 내가 잠깐 내려갔다 올게.”“네.”최동철은 조용히 병실로 내려가 잠시 임가희와 인사를 나누고 최동림의 상태를 확인한 뒤 수술실 앞으로 돌아왔다.보모가 먼저 수술을 마쳤고 이어 병원에서 혈장을 수급해 수술이 이어졌으며 결국 메이슨의 수술은 성공적으로 끝났다.그는 현재 중환자실로 옮겨졌고 의사는 메이슨이 깨어나려면 대략 4~6시간 정도 걸릴 거라 설명했다.최동철은 곧장 비서 김지환과 간병인 두 명을 병동에 상주시키도록 지시했다.한편, 메이슨과 같은 희귀 혈액형을 가진 친구도 병원에 도착했다.비록 실제 수혈은 필요 없었지만 최동철과 온하랑은 감사의 의미로 음식을 대접하고 고급 담배와 술도 선물했고 연락처도 서로 교환했다.식사 자리에서 자연스레 희귀 혈액형 이야기가 나왔다.그 친구는 자신의 혈액형이 확인된 후 가족 전체가 무료 혈액형 검사를 받았고 그중 동생도 같은 혈액형이라는 사실을 알게 됐다고 했다.현재는 희귀 혈액형을 가진 사람들의 상호 도움 단체에 가입해 있으며 메이슨도 가입해 두라고 권했다.지금은 어린 나이라 헌혈이 안 되지만 이후 혹시 모를 수혈 상황에 대비해 혈액 공급망을 넓혀 두는 게 좋다는 것이다.메이슨이 성인이 되면 직접 헌혈도 가능하기 때문이다.식사를 마친 뒤 온하랑은 협력사 미팅에 가야 했기에 최동철은 그녀를 목적지까지 데려다주고 다시 자신의 업무로 향했다.협력사 미팅을 마친 온하랑은 다시 병원으로 돌아왔고 택시에서 막 내린 그녀에게 한 통의 전화가 걸려 왔다.부승민이었다.온하랑은 병원 안으로 들어서며 전화를 받았다.“여보세요?”“어때? 장 대표님은 만났어?”수화기 너머에서 부승민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온하랑은 지금 경주 출장을 온 상태였다.그는 오늘 막 도착해 협력사 직원의 안내로 호텔에 체크인했지만 아직 현지 담당자와는 만나지 못한 상황이었다.원래는 저녁에 메이슨을 잠깐 보러 갈지 생각 중이었는데 하필이면 그때 최동철에게 전화가 걸려 왔다.메이슨이 교통사고로 병원에 실려 갔다는 소식이었고 그래서 온하랑은 급히 병원으로 달려갔다. 병원 입구에는 최동철이 먼저 도착해 그녀를 기다리고 있었다.그를 보자 온하랑은 빠른 걸음으로 다가가며 다급히 물었다.“동철 오빠, 메이슨은 어때요?”그러자 최동철은 깊이 찌푸린 얼굴로 말했다.“과다 출혈이 있어서 수혈이 필요해.”그 말에 온하랑은 아까 전화로 자신에게 혈액형을 물어본 이유가 떠올랐고 마음속 불안이 더욱 커졌다.“메이슨 혈액형이... 뭔가 문제라도 있어요?”“검사 결과, 메이슨은 Kidd 혈액형 중 Jk(a-b-)형이래. Rh 음성보다 더 희귀한 혈액형이야.”최동철의 목소리에는 짙은 걱정이 묻어 있었고 온하랑은 눈을 크게 뜨며 입을 벌렸다.“그런 혈액이... 혈액은행에 있긴 있어요?”“응. 병원에서 이미 확보 요청했어.”그래도 온하랑의 불안은 가시지 않았다.‘메이슨이 어쩌다 그런 희귀 혈액형을 갖게 된 거지? 혹시 혈액이 부족하면 어쩌지...’그러자 최동철이 조심스럽게 그녀를 안심시켰다.“걱정하지 마. 예전에 경주에서 같은 혈액형 가진 사람 중 헌혈 계약을 맺은 분들이 있어서 지금 연락 중이야. 메이슨 상태도 많이 안정됐고 잘 버틸 수 있을 거야.”만약 사고가 메이슨이 처음 귀국했을 때 터졌다면 정말 위험했을 거라고 그는 덧붙였다.병실로 가는 길에 최동철은 메이슨의 혈액형에 대해 간단히 설명해 주었다.Kidd 혈액형은 ABO 혈액형과는 별개 체계로 서로 영향을 주지 않는다.ABO 혈액형상으로 메이슨은 O형이다.하지만 Kidd 혈액형 시스템에서는 적혈구 표면 항원의 존재 여부에 따라 Jk(a+b-), Jk(a-b+), Jk(a+b+), Jk(a-b-) 이렇게 네 가지로 나뉜다
아침이 밝고서야 최국환이 병원에서 돌아왔다.설윤은 그의 눈 밑이 시커멓게 팬 걸 보고 곧바로 다가가 그의 어깨를 주물러주며 조심스레 물었다.“동림이는요?”“원래 있던 증상이지. 의사 말론 어제 감정 기복이 너무 심해서 그랬다고 했어. 당분간 입원해서 안정 취해야 한대. 지금 병원에 동림이 엄마랑 하인이 같이 있어.” 최국환은 눈을 감고 길게 한숨을 쉬었다. 온몸이 뻐근하고 피로가 몰려와 그는 이제 더 이상 밤새우는 게 버겁다고 느꼈다.알레르기 유발성 천식과 감정 기복으로 인한 천식 발작은 증상이 조금 달랐다.경험 많은 의사가 문진과 혈액 검사 끝에 감정적 요인이 원인이라는 진단을 내린 것이다.“큰일 아니라니 다행이네요. 회장님도 아주 피곤해 보이세요. 아침 드시고 바로 좀 쉬시는 게 어때요?”설윤이 조용히 말하자 최국환은 고개를 끄덕였다.아침 식사를 마친 후 그는 2층으로 올라가 휴식을 취했고 임연지는 외출해 오재원을 만나러 나갔다.집에 혼자 남은 설윤은 심심하던 차에 기사에게 부탁해 병원으로 향했다.명분은 최동림의 병문안이었지만 사실 그보다 더 중요한 건 임가희의 신경을 긁어놓는 데 있었다.병원에 도착해 입원실 방향으로 걷던 중 그녀는 익숙한 뒷모습 하나를 발견했다.그 사람은 통화 중이었고 바쁘게 걸음을 옮기며 설윤보다 먼저 병동 건물 안으로 사라졌다.‘최동철? 설마 동림이를 보러 온 걸까?’설윤은 서두르지 않고 천천히 엘리베이터에 올라 최동림의 병실이 있는 층으로 이동했다.창밖으로 병실 내부를 들여다보니 최동림은 링거를 맞으며 누워 있었고 곁의 보호자 침대엔 임가희가 쉬고 있었다.설윤은 병실 문을 똑똑똑 세 번 두드렸다.아무런 응답이 없자 그녀는 그대로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그 소리에 임가희는 반사적으로 벌떡 몸을 일으켰고 그녀의 눈빛은 곧장 경계심으로 바뀌었다.“설윤 씨, 여긴 무슨 일이죠?”임가희는 빠르게 몸을 돌려 병상 앞을 가로막았고 설윤은 손에 든 과일 바구니를 살짝 흔들며 부드럽게 웃었다.“당연히 동
임연지는 설윤의 뒷모습을 노려보다가 분에 겨워 발을 굴렀다.‘진짜 싸가지 없는 여자야. 예전에 백화점에서 따귀 한 대 맞았을 땐 개처럼 쫄아서는 말도 못 하더니 지금은 고모부가 뒤를 봐준다고 어디 감히 자기를 상대로 맞불을 놓다니.’설윤은 방에 들어오자마자 침대에 드러누웠고 금세 잠이 들 것 같았다. 그런데 카카오톡 알림음이 울려 억지로 핸드폰을 집어 들었다.한편, 임연지는 뒤척이며 잠을 이루지 못하고 있었다. 결국 핸드폰을 들어 한진과 대화를 하기 시작했다.그녀는 오늘 있었던 일을 죄다 털어놓았다.[이 년은 진짜 너무 교활해. 내가 못 봤으면 동림이는 완전히 넘어갔을 걸? 아무도 몰랐을 거야. 아까는 대놓고 동림이 알레르기 유발 물질이 뭐냐고 묻더라니까? 고모부는 갑자기 노망이 났는지 그냥 다 알려주라고 하질 않나.]그러자 한진의 답장도 빠르게 도착했다.[이 여자 수위가 장난 아닌데.] [그렇지. 내 말 맞지!] [너네는 못 이겨. 이런 애 상대하려면 그냥 권력으로 찍어 눌러야 해. 지금처럼 고모부가 뒷배 봐주니까 애가 깝치는 거지. 그러니까 넌 빨리 오재원이랑 결혼하는 게 답이야.][곧 할 거야. 오씨 집안에서도 이번 주 안에 날짜 잡자고 올라온다고 했어.][근데 결혼했다고 끝난 건 아니야. 오재원이 예전처럼 아무 능력 없는 철부지라면 권한도 없고 집안에서 힘도 없을걸.]임연지는 고개를 끄덕였다.오재원네 집안 권력은 오형일, 큰아들 오하운, 그리고 작은아버지 오정우에게 집중돼 있었다.사실 그녀도 예전엔 오재원의 형 오하운에게 접근하려고 했었다. 하지만 그는 워낙 바빠서 얼굴 보기 힘들고 간신히 만나도 말도 안 섞으니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근데 솔직히 오재원은 회사에서 일할 깜냥도 안 돼.][그럼 그냥 가르치면 되지. 저 정도 집안이면 선생 몇 명 붙이는 거 일도 아니잖아. 회사 나가서 일하게 만들고 진심으로 개과천선은 못 해도 적어도 모양새는 갖춰야지. 부모님 눈에도 달라졌다고 보이게 말이야. 연지야, 지금은 오
“회장님! 동림 도련님이 천식 발작을 일으켰습니다. 지금 병원으로 모시려는 중이에요. 어서 내려와 보세요.”복도에서 다급한 하인의 외침이 들려왔다.최국환은 눈을 번쩍 뜨고 곧장 침대 머리맡에 있는 스탠드 조명을 켠 뒤 겉옷을 집어 들고 자리에서 일어났다.그를 따라 일어난 설윤이 몸을 일으키자 그는 말했다. “그냥 자. 내가 가볼게.”하지만 설윤은 이불을 걷고 몸을 일으키며 물었다. “동림이 천식이 있어요?”“응. 태어날 때부터 있었어.”“그럼 저도 같이 가볼게요.”설윤은 외투를 꺼내 입고 최국환과 함께 급히 방을 나섰다.1층 거실로 내려가 보니 최동림은 이미 약을 복용했지만 여전히 기침이 멈추지 않았고 숨을 제대로 쉬지 못해 얼굴이 벌겋게 변해 있었다.곁에서 지키고 있던 임가희는 몹시 걱정스러운 얼굴로 아들을 바라보고 있었다.“도대체 왜 갑자기 발작이 난 거야?” 최국환이 조급하게 묻자 임가희는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저도 확실하진 않은데 혹시 알레르기 유발 물질에 노출된 게 아닐까 싶어요... 다만 의사 말로는 감정적인 변화 특히 슬픔이나 불안 같은 부정적인 감정도 천식을 유발할 수 있다고 했거든요.”이런 감정이 심할 경우 몸속 자율신경 중 미주신경이 자극돼 기관지가 수축하고 천식 발작으로 이어지는 것이다.최동림은 태어난 지 얼마 안 되어 천식 판정을 받았고 그 뒤로 집안은 온통 방역과 청소, 위생 관리에 신경 써 왔다.최동림이 자라면서 체질도 좋아져 요즘엔 거의 발작이 없었고 학교에도 특이 사항을 알려 기숙사 생활을 하게 했던 터였다.“알레르기 때문은 아닐 거야. 아마 낮에 너무 놀랐던 것 같아.”최국환은 최동림 옆에 앉아 등을 두드리며 숨을 고르게 도와주었다.“동림아, 아빠가 너무 심했어. 미안해.”그때 임연지가 옆에서 코웃음을 치며 설윤을 향해 의미심장하게 말했다.“글쎄요, 고모부. 오늘 오후에 설윤 씨가 동림이 방에 다녀갔는데 혹시 몸에 뭐 안 좋은 걸 묻히고 온 건 아닐까요? 동림이 건강 생각하면 확인
방금까지 부모에게 혼나 속이 뒤집힌 상태였던 최동림은 설윤이 자신에게 친절하게 다가온 그 순간 그녀에 대한 인상이 한껏 좋아졌다.그녀는 확실히 임가희가 지금껏 상대해 온 사람 중 가장 다루기 까다로운 상대였다.최동철 쪽과도 특별히 친하지 않고 이 집에서 그녀가 기대고 있는 건 허공에 떠 있는 최국환의 사랑 말고는 오직 최동림이라는 아들뿐이었다.그리고 설윤은 단번에 그 약점을 정확히 찔러 들어왔다.임가희는 깊게 숨을 들이쉬며 치밀어 오르는 감정을 억누르고는 조용히 말했다.“연지야, 넌 먼저 나가 있어.”임연지는 아직 분이 풀리지 않은 얼굴로 최동림을 노려보다가 억지로 돌아섰고, 문을 쿵 하고 세게 닫고 나갔다.그러자 방 안에는 모자 단둘만 남았다.짙은 정적이 감도는 가운데 임가희는 천천히 걸음을 옮겨 아들 앞에 앉았다.어깨에 손을 얹으려 했지만 최동림은 피하듯 몸을 틀었다.허공에 멈춘 임가희의 손끝이 서글프게 떨리다가 조용히 내려왔다.“동림아.”그녀의 목소리는 조심스럽고 부드러웠다.“게임기... 엄마한테 줄래?”최동림은 그 말을 듣고 오히려 더 꼭 안으며 고개를 저었다.“싫어요. 이건 제 거예요!”임가희는 눈빛을 거두며 일어섰다.“동림아, 엄마 정말 실망했어.”그녀는 단호한 목소리로 말했다.“엄마가 널 얼마나 아끼는지 몰라? 새 옷 사주고 장난감 사주고 아프면 병원에서 밤새 지켜봐 주고 늘 네 곁에 있었잖아. 그런데 네가 이런 식으로 엄마 마음을 아프게 해?”그 말에 최동림의 눈이 붉어지며 금세 눈물이 고였고, 그는 와락 게임기를 내려놓고 임가희를 안았다.“엄마, 미안해요... 게임기 필요 없어요. 제발 화 풀어요...”임가희는 아들의 어깨를 다정하게 토닥이며 말했다.“그래야 우리 동림이지.”그는 흐느끼며 품에 안겼고 임가희는 조용히 속삭였다.“아직 넌 어려서 잘 모르겠지만 어른들 사이엔 보이지 않는 속셈이 오가는 거야. 설윤이란 여자는 겉으론 웃고 있어도 속은 달라. 그러니까 절대로 설윤한테 선물 받지 마. 가까이하
“누나, 무슨 일이에요?”최동림은 게임을 계속하고 싶어 속으로 짜증을 삼키며 물었다.“방금... 설윤이 여기 왔었지?”“네...”무심결에 고개를 끄덕이던 최동림은 갑자기 정신이 번쩍 들어 고개를 저었다.“아니에요. 안 왔어요.”임연지는 그의 표정을 유심히 살폈고 어딘가 어색했다. 그런데 정확히 뭐가 이상한 건지 콕 집어 말할 수가 없었다.그녀는 고개를 돌리려다 문득 책상 위의 선물 포장 상자와 그가 들고 있는 게임기를 보고 눈썹을 찌푸렸다.“이 게임기는... 누가 사준 거야?”최동림은 순간 말문이 막혔다. “그게... 엄마가... 사줬어. 왜?”“정말?”임연지는 의심스러운 눈으로 바라보며 되물었다.“그럼 고모한테 물어볼게.”최동림의 얼굴이 순간 굳어졌다.“아, 잠깐만! 누나, 그게…”그의 말을 끊고 임연지는 단단히 다그쳤다. “동림아, 솔직히 말해. 이 게임기는 진짜 누가 사준 거야?” 최동림은 두 손으로 게임기를 꼭 쥐었고 손등이 하얗게 질릴 만큼 힘이 들어가 있었다.그는 고개를 떨군 채 한참 말이 없다가 결국 나직하게 중얼거렸다. “설윤... 아줌마가 줬어.”“설윤... 아줌마?” 임연지는 말도 안 된다는 듯 헛웃음을 흘리더니 이내 눈을 부릅뜨고 목소리를 높였다. “너 지금 그 여자를 아줌마라고 불러? 이렇게 비싼 걸 받았다고? 동림아, 설윤이 어떤 여자인지는 알고 있는 거야?”갑작스러운 고함에 최동림은 깜짝 놀라 뒷걸음질 쳤다.“설... 설윤 아줌마는 착한 사람이야. 그냥...” “착하다고?”임연지는 분노에 찬 얼굴로 코웃음을 쳤다.“그렇게 착한 여자가 남의 가정을 깨뜨리냐? 넌 그런 사람한테 선물 받으면서 고맙다고 하는 거야?”그녀는 그대로 손을 뻗어 최동림의 품에 있던 게임기를 낚아채더니 바닥에 내리꽂았다.“쾅!”새 게임기는 바닥에 떨어지며 산산조각 났다. 화면은 깨지고 기계 외관도 부서져 부품이 여기저기 흩어졌다.최동림은 멍하니 그 광경을 바라보다 곧장 무릎을 꿇고 깨진 게임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