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승민은 재밌는 소리를 들은 것처럼 눈썹을 치켜올리며 물었다.“속여? 널 속여서 뭐 해, 뭐 얻을 게 있는 것도 아니고. 온하랑, 네가 뭐라도 된 것같아?”“뭔가를 감추고 있는 거지...?”“내가 감출 게 뭐가 있어. 온하랑, 아직 내가 너를 좋아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거야? 네가 부씨 일가에 올 때부터 나는 네가 싫었어. 너랑 결혼할 때도 너를 좋아하지 않았고. 그런데 왜 이제 와서 내가 너를 좋아한다고 생각하는 거야?”온하랑이 고개를 저으며 뭔가를 증명하고 싶어서 안달이었다.“우리가 이혼하고 내가 여행을 갔을 때부터 나를 따라다니면서 지갑도 찾아주고, 오주에서도...”부승민은 그녀의 말을 끊으며 웃었다.“내기의 시작은 그때부터였어. 그때의 너는 나를 증오하고, 계속 나를 쫓아내려고만 했는데 정말 너를 좋아했다면 너한테 추스를 시간을 줬었겠지. 네가 싫다는데도 계속 들러붙는 게 아니라. 난 그저 내기에서 이기고 싶었을 뿐이야.”당시 그녀는 정말 부승민이 들러붙는 게 짜증 났었다.하지만 당시의 상황은 부승민이 그녀를 사랑한다는 증거가 되어주었다.“하지만 추서윤한테 속았다고 했잖아. 납치 사건도 거짓이었고, 우리 아빠를 죽인 주범이 추서윤이라고 그랬잖아!”“그래야만 내가 결혼 생활 중에 범한 잘못을 최대한 축소할 수 있었고, 네가 나에 대한 적의도 희석할 수 있었어. 네가 다시 재혼을 바랄 때까지 말이야.”온하랑이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그래서 모두 계산된 행동이라는 거야?”“비슷해. 네가 해외에서 여행할 때, 어떻게 매번 널 찾을 수 있었는지 알아? 너한테 위치 추적기를 설치해 놓았기 때문이야. 이번에 납치당했을 때도 마찬가지야. 사실 위치 추적기를 통해 네 위치는 진작 알고 있었어. 그저 고의로 시간을 지연시켜 네가 돈으로 인신매매범을 유혹할 때, 망보는 사람들이 경찰을 발견하게 했지. 네가 절망에 빠져있을 때 너를 구해야만 네가 진심으로 나한테 고마워하고 나한테 의지할 테니까.”‘그런 거였구나... 나의 걱정,
“당연하지.”부승민이 손을 뻗어 맞은 왼쪽 뺨을 쓰다듬으며 조소했다.“네가 할머니, 할아버지 앞에서 허세 부리는 부리며 고상한 척하는 모습도 지긋지긋했어. 할머니, 할아버지를 봐서라도 이 뺨은 따지지 않을 테니, 알아서 꺼져.”이전의 부승민은 마치 추서윤이 기르는 한 마리의 개 같다고 생각했었다. 추서윤이 손짓만 하면 일말의 망설임도 없이 다가가 꼬리를 흔드는 그런 개 말이다.지금 생각해 보니, 자신도 부승민의 개랑 다름없었던 것 같았다. 부승민이 조금만 잘해줘도 이전의 아픔은 잊고 주인을 맞이하는 모양새였으니 말이다.지금의 부승민이 그녀에게 꺼지라고 하면, 꺼져야 하는 신세였다.온하랑이 고개를 숙인 채 입꼬리를 끌어올리며 쓰디쓴 미소를 지었다.“알았어... 알았다고... 알겠다고...”온하랑은 연속 세 번이나 같은 말을 했다. 목소리는 점점 더 기어들어 가고, 점점 더 떨리고 있었다. 울음을 참는듯한 모습이었다.그녀는 너무 마음이 아팠다. 아파서 숨도 쉬지 못할 것 같았다.온하랑이 코를 훌쩍이며 심호흡하고는 쓴 미소를 삼켰다.“죄송합니다, 부 대표님. 너무 많은 시간을 뺏었네요.”이내 그녀는 두 발 물러서더니 몸을 돌려 나갔다.문 앞까지 간 온하랑의 등 뒤로 부승민의 목소리가 들려왔다.“할머니한테는 어떻게 말해야 하는지 알지?”“대표님께서 신경 쓰이지 않도록 하겠습니다.”온하랑이 눈을 감으며 대답했다. 눈물이 저도 모르게 흘러 내려왔다.그녀가 대표실 문을 열자, 문 앞에는 안절부절못하는 연민우가 서 있었다.주체할 수 없이 눈물을 흘리는 온하랑을 본 연민우의 시선 속에서 한 줄기의 죄책감이 스쳤다.온하랑이 엘리베이터에 들어서는 모습까지 확인한 연민우가 얼른 사무실 문을 열고 들어갔다.“대표님.”부승민이 눈매를 늘어뜨리고 이전의 냉담함은 찾아볼 수 없는 모습으로 물었다.“갔나?”“가셨습니다...”연민우는 잠시 망설이더니 말을 이었다.“울고 계신 것 같았습니다.”부승민은 있는 힘껏 주먹을 쥐고 뼈마디가 하얗게 질릴 때
온하랑이 울타리 옆 계단에 앉아 반짝이는 강물을 바라보며 넋을 잃은 채 주체할 수 없이 눈물을 흘렸다.부승민의 말은 칼날같이 그녀의 마음을 도려냈다.그녀는 이 상황을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내기라니... 얼마나 우스웠겠어. 그가 한 말이 맞아. 내가 부씨 일가에 들어섰을 때도 날 싫어했고, 결혼할 때도 날 싫어했는데 왜 이제 와서 나를 좋아한다고 착각한 걸까?’망상이었다.자신의 것이 아닌 걸 착각했었다.‘내가 상황을 잘 못 헤아렸네. 어떻게 부승민이 나를 좋아할 수 있겠어...’처음 온하랑이 부씨 일가에 갔을 때, 부승민이 그녀를 쳐다보던 눈빛은 잊을 수 없었다. 온하랑이 인사를 건네도 도도하고 차갑게 응했고, 적선하듯 베푼 케이크 한 조각도 그랬다.부승민은 처음부터 그녀를 업신여겼다. 영원히 그녀를 좋아할 수 없는 사람이었다.온하랑은 이제야 그 사실을 깨달았다.젊은 시절 의식의 흐름을 거쳐 미화된 사랑은 마치 거품처럼 닿으면 부서지고, 바람 불면 사라질 그런 존재였다.온하랑은 그렇게 강가에 오전 내내 앉아 있었다.눈물도 이미 바람에 말라 얼굴마저 뻣뻣해 났다.마음은 이미 감각을 잃을 정도로 마비되어 갔다.비서가 전화와 오후에 다시 촬영해야 한다고 전해왔다.자신을 위로할 시간은 오전밖에 없었다.지구는 여전히 돌아가고 있고, 생활은 계속되고 있었다.그 누구도 한 사람이 옆에서 사라졌다고 살아갈 수 없지는 않았다.그녀도 자신에게 위로를 전했다.‘부승민이 날 좋아하지 않는게 뭐 어때! 그 사람을 위해서 죽을 수는 없잖아? 어차피 살아야 한다면, 더 잘 살아야지!’온하랑이 심호흡을 하며 마음속의 쓰라림을 감춘 채 다시 촬영장으로 돌아갔다.메이크업 아티스트는 부은 그녀의 눈을 보고는 이를 악물고 얼른 얼음주머니를 가져와 냉찜질을 햇다.날씨가 따듯해지고, 곧 여름이었지만 차가운 얼음 주머니가 피부에 닿자 온하랑은 참지 못하고 몸을 떨었다.“차가워요?”메이크업 아티스트가 물었다.“네.”온하랑이 솔직히 대답했다.“차가우면 맞
정진석 감독도 대본을 봤지만, 남녀주인공은 별 볼 일 없는 캐릭터였다. 특히 여주인공은 완전히 악역 같았고, 오히려 소민이라는 역할이 굉장히 눈에 띄었다.추서윤 사고 후, 그가 준비하고 있던 드라마의 연서라는 배역은 아직 적임자가 없었다.정진석 감독은 온하랑에게 기회를 줘볼 만하다고 생각했다.저녁이 되고, 문 열리는 소리가 들리자, 김시연이 놀란 눈동자로 온하랑을 돌아보았다.“돌아왔어? 부지런이 널 안 잡아?”온하랑이 시선을 내리깐 채, 가방을 아무렇게나 소파에 던지고는 차분히 물을 따라 마셨다.“캔디야, 앞으로 그 사람 얘기는 하지 말자.”“왜?”안색을 바꾼 김시연이 자세를 바로 했다.“부지런이 또 무슨 짓을 했는데?”온하랑이 김시연의 옆에 앉아 그녀를 안으며 오늘 있었던 일을 얘기해 주었다.“오늘 회사에 찾아갔는데, 오빠랑 추서윤이 함께 있는 모습을 봤어. 오빠는... 오빠는 항상 추서윤을 좋아하고 있었대. 나한테 접근하고 매달린 이유는 그저 내기 때문이었대...”이 일은 정말 김시연에밖에 하소연할 사람이 없었다.쪽팔렸다.부승민에게서만 두 번 쓴맛을 봤으니 너무 쪽팔렸다.결혼 기간에도 다른 여자랑 썸을 타는 남자를 용서해 주고, 다시 그와 재결합하려고 했지만 결론적으로 그 남자는 그녀를 좋아하지 않았다. 재결합도 그저 그녀만의 바람이었다는 사실이 너무 수치스러웠다.분명 어장 안에 있는 물고기라는 사실을 알면서도 계속 다가갔고, 잘해줬지만 결국 실패했다.그녀는 더 말할 자신이 없었다.온하랑이 말을 이을수록, 김시연의 분노는 더 치밀어 올랐다. 김시연이 이를 악물며 말했다.“젠장! 정말 너무한 거 아니야? 어떻게 그렇게 냉정할 수 있어? 여행할 때부터 내기였다니... 정말 제정신이 아니네!”당시 온하랑은 유산한 지 얼마 되지 않은 상태였다. 부승민의 아이를 잃고 우울증으로 갈 수도 있는 상황에서 부승민은 추서윤과 내기하며 온하랑에게 상처를 주었다.‘온하랑의 우울함이 더 깊어진다는 생각은 안 한 건가? 아니면 온하랑의 건강과
“감독님 말씀은...?”“연서 역할 오디션을 봐줬으면 좋겠어요. 비록 오디션이지만, 저는 하랑 씨가 마음에 들어요.”정진석 감독이 웃는 얼굴로 말했다.그는 궁금했다.온하랑이 연예계에 발을 들이고 싶어 한다기에는 소민이라는 역할 외에 다른 오디션 혹은 예능 프로그램 오디션에 참여했다는 소식이 없었다. 그렇다고 연예계에 발을 들이지 않는다고 하기에는 소민이라는 역할을 소화했다.온하랑이 완곡하게 거절했다.“좋게 봐주셔서 감사드립니다, 감독님. 하지만 감독님의 호의를 거절해야 할 것 같습니다. 저는 연기를 계속하고 싶지 않아요. 소민이라는 역할을 맡게 된 것도 상황이 급박해서 어쩔 수 없었습니다.”“그럼 나도 도와줘요.”온하랑의 입꼬리가 떨렸다.“감독님, 농담도 참...”송재열 감독의 드라마는 당시 이미 촬영이 시작된 상태에서 임시로 배우를 바꿔야 했었다. 적합하고 시간이 맞는 배우는 많지 않았다.하지만 정진석 감독의 드라마는 준비 중이고, 연서라는 역할도 많은 사람이 원하고 있으니, 적임자를 찾기는 어렵지 않을 것이었다. 온하랑은 굳이 그중에 끼고 싶지 않았다.온하랑이 촬영장을 벗어나며 다시 뒤를 돌아봤다.아마도 마지막일 것이었다.“하랑아!”누군가 뒤에서 그녀를 불렀다.소리를 들은 온하랑은 바로 임가희임을 눈치챘다.그녀는 몸을 돌리며 미간을 찌푸렸다.“왜 오셨어요? 임연지를 이해해 달라고 오신 건 아니죠?”‘최 회장님이 엄마를 잘 단속해 주시겠다고 한 거 아니었나?’임연지를 걱정해서 그런지, 임가희는 초췌해 보였다.임연지가 구속되고 나서, 그녀는 잘 먹지도 잘 자지도 못했다. 최국환은 온하랑을 찾아오지 못하게 단속했다.임가희도 관계를 찾아 임연지를 풀어주고 싶었지만 부질없었다.오히려 그녀와 임연지가 호텔에 배정해 둔 사람이 경찰의 습격을 받으며 도망칠 의도를 확인받아 죄명이 더 가중되었다.최국환이 출장 간 틈을 타 임가희는 몰래 강남시로 왔다.온하랑이 바로 그녀의 목적을 짚자, 임가희는 단도직입적으로 얘기했다.“하랑아,
추상훈이 그녀의 생물학적 아버지일지라도, 온 씨 집안에서 자란 온하랑은 죽어서도 추상훈을 인정할 생각이 없었다.온하랑이 냉정한 시선으로 임가희를 쳐다보며 말했다.“명심하세요. 제 아버지는 온강호 한 분뿐이십니다. 또한 잡종도 아니고, 저는 온강호의 딸이에요.”말을 마친 온하랑이 임가희를 쳐다도 보지 않고는 뒤돌아 갔다.임가희가 온하랑의 손을 잡았지만, 그녀는 매정하게 뿌리쳤다.항상 떠나고 싶다고 생각했던 온하랑이었지만, 부승민때문에 잠시나마 그 생각을 접었었다.임가희의 출현으로 인하여, 온하랑은 다시 떠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그녀는 더 이상 강남시에 머물고 싶지 않았다.더 이상 부승민을 보고 싶지도, 부승민과 추서윤이 본가에서 애정행각을 벌이는 꼴을 보고 싶지도 않았다.임가희에게 휘둘리고 싶지도 않았다.김시연은 온하랑이 남았으면 했지만, 그녀도 할머님을 제외하고는 온하랑이 의지할 만한 가족이 없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강남시를 떠나 새로운 생활을 시작하는 게 온하랑에게 더 좋은 선택일 것이었다.강남시에 남는다면, 쓰레기 같은 남녀가 온하랑을 다시 괴롭힐지 모를 일이었고 편파적인 임가희가 임연지를 위해 온하랑을 괴롭힐 것이 분명했다.“이미 결정했으니 난 널 응원해. 하지만 명절에는 한 번씩 모여야 해!”김시연이 말했다.“고마워, 캔디야.”“어디에 머물지는 정했어?”온하랑이 고개를 저었다.“아니. 일단 필라시에 한번 가보려고.”필라시에 일 년을 머문 적이 있다 보니 하랑은 한번 다시 가보고 싶었다. 그곳에서 무슨 생각이 나는지 알고 싶었고, 괜찮다면 그곳에 남는 것도 괜찮은 선택이었다.“언제 갈지는 생각했어?”“최대한 빠르게 가야지.”온하랑이 생각하며 말을 이었다.“내일 가서 비자 신청하고, 요 며칠 이쪽 일 다 처리하면 비자가 나오고 바로 떠나려고.”“알았어. 가기 전에 주현이랑 주혁이랑도 한번 모여야지.”“그래.”처리할 일은 많지 않았다.재무적인 건 이미 대부분 정리를 마쳤고, 재단도 이제 안정권에 접어들어서
“싫... 싫어요! 저는 숙모가 떠나는 거 싫어요!”부시아는 두 눈이 붉힌 채 하염없이 눈물을 흘렸다.“왜 갑자기 해외로 가요? 삼촌이 숙모 괴롭혔죠! 삼촌 찾으러 갈래요!”시아가 짧은 다리를 버둥거리며 소파에서 뛰어내리려고 했다.온하랑이 그녀를 제지하며 나지막이 말했다.“시아야, 나랑 삼촌은 이제 같이 못 있어.”“왜요?”시아가 물기가 가득한 눈동자로 그녀를 보았다.‘분명 사이가 좋아졌는데... 조금만 지나면 화해할 것 같았는데...’온하랑이 시선을 내리며 답했다.“말하자면 길어. 네가 크면 알게 될 거야.”부시아는 여전히 부승민에게 기대야 하는 아이였다. 그런 아이 앞에서 부승민의 나쁜 말을 하여 부승민에 대한 증오를 부추길 필요는 없었다.애초에 부승민이 부시아를 남긴 이유도 일부는 온하랑때문이었다. 아이를 이용해 그녀를 꼬여 내기에서 이기기 위함이었다.이미 모든 게 밝혀진 상태에서 부승민이 부시아를 어떻게 대할지 모를 일이었다.목적을 달성한 부승민이 부시아를 더 이상 보살피지 않는다면 큰일이었다.온하랑이 부드러운 목소리로 부시아를 달랬다. 가까스로 달래서 더 이상 눈물을 흘리지 않았지만, 눈시울은 여전히 촉촉한 상태로 처량한 표정으로 그녀를 쳐다보고 있었다.온하랑이 고개를 들어 안문희에게 물었다.“요 며칠 돌아온 적 있나요?”안문희는 애초에 온하랑과 부승민 사이에 문제가 있음을 눈치챘지만 간섭할 수 없었다.“며칠 전 사람을 시켜 대표님 물건을 빼갔습니다. 시아한테도 같이 갈 거냐고 물었지만, 시아가 거부해서 이곳에 남아있습니다. 며칠 전 와서 점심을 먹고 시아랑 함께 놀아주시기도 했죠.”부승민이 부시아를 방치하지 않았다는 소식에 온하랑은 겨우 마음을 내려놓았다.하지만 부시아가 이곳에 남아있는 것은 그녀 때문일 텐데, 그녀가 떠나니 이곳에 남는 것도 의미가 없었다.부승민한테 가거나, 본가로 가거나 둘 중 하나였다.“시아야, 숙모가 가면 너는 삼촌이랑 살고 싶어? 증조할머니랑 살고 싶어?”“저는 숙모랑 같이 살고 싶
어두워진 부승민의 얼굴을 본 온하랑은, 부시아가 그의 심기를 거스를까 봐 얼른 말을 잘랐다.“시아야, 숙모 가면 삼촌 말 잘 들어야 해. 시간 나면 시아 보러 다시 올게.”“숙모...”부시아가 몸을 기울였다. 시아는 온하랑이 떠나는 것을 막고 싶었다.“착하지. 앞으로는 숙모 말고 고모라고 불러.”온하랑은 부시아의 얼굴을 가볍게 꼬집고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집을 나갔다.애초에 부승민이 어떤 내기를 했는지 알았다면, 그녀는 절대로 부시아를 이곳에 남기지 않았을 것이었다.부시아가 남은 이유는 그녀와 부승민때문이었다.그녀가 떠나고, 부시아에게는 부승민남 남았다. 부승민이 부시아를 싫어한다면 그녀는 부선월의 곁으로 돌아갈 수밖에 없었다. 부선월은 더 이상 이전처럼 그녀를 맞아주지 않을 것이었다. 자주 환경을 바꾸는 것도 부시아에게 좋지는 않았다.부승민 혹은 부씨 일가의 본가에 남아있는 게 부시아에게는 제일 좋은 선택이었다. 그저 부승민에게 일말의 양심이라도 있길 바랐다. 제일 나쁜 결과는 온하랑이 밖에서 정착한 후, 부시아를 데려가는 것이었다. 거기까지는 가지 않았으면 하는 바람이었다.한 층만 내려가면 됐었기에 온하랑은 엘리베이터를 기다리지 않고 계단으로 향했다. 절반쯤 내려왔을까, 뒤에서 문이 여닫기는 소리가 들리더니 누군가가 그녀를 불러세웠다.“온하랑.”온하랑이 발걸음이 멈췄다. 그녀는 두 손을 꽉 움켜쥔 채 평온한 모습으로 돌아서서 위쪽에 있는 부승민을 쳐다보았다.“무슨 일이야?”“어린아이까지 이용하다니, 너무한 거 아니야?”부승민이 비아냥거렸다.“내가 어떻게 이용했는데?”부승민이 자조적으로 웃으며 답했다.“네가 시아한테 무슨 말을 했는지는 네가 제일 잘 알겠지. 시아가 지금 새 숙모는 싫다고 난리 부리고 있어. 만족해?”‘나를 그렇게밖에 생각하지 못하는구나. 마음속으로 이렇게 싫어하면서 내 앞에서 그런 연기를 보여주다니... 사실인 것 같아서 나조차도 속아 넘어갔어. 정말 쉽지 않았겠어.’온하랑이 멈칫했다. 소매 아래 감춰둔
“그렇다면 다행이네.”최국환은 그녀를 잠시 바라보더니 조용히 말을 이었다.“동림이도 이 병원에 있어. 천식이 재발해서 입원 중인데 같이 가서 보러 갈래?”온하랑은 잔잔히 미소 지으며 고개를 저었다.“아니요. 전 또 일이 있어서요.”“바로 아래층인데. 금방이면 돼.”최국환이 설득하듯 덧붙였지만 온하랑은 여전히 고개를 저었다.“죄송해요. 회장님. 제가 좀 바빠서 이만 가볼게요.”그녀는 부드럽게 말을 맺고 최국환을 지나쳐 앞으로 걸음을 옮겼다.걸음을 옮기면서도 그녀의 생각은 계속 이어지고 있었다.‘내가 필라시에서 메이슨을 낳았다는 얘기... 처음엔 믿기 어려웠지. 하지만 사진도 있었고 메이슨이 다시 내 품에 돌아온 뒤로는 받아들이게 됐어. 그렇다면 메이슨이 유실된 원인은 과연 무엇일까?’온하랑은 몇 가지 가능성을 떠올렸다.첫 번째 가능성은 출산한 후 며칠 지나 교통사고를 당한 경우였다.그 사고로 기억을 잃고 병원에 입원해 있던 사이 갓난아기 메이슨은 집에 혼자 남겨졌고 우는 소리에 놀란 이웃이나 행인이 아이를 구조했다가 연락처를 찾지 못해 이리저리 떠돌다 양부모 손에 들어갔을 가능성 혹은 집에 아무도 없다는 걸 틈타 누군가 아이를 빼돌렸을 수도 있었다.두 번째는 임신 후반기에 교통사고를 당한 경우였다.병원에서 아이를 낳았지만 기억을 잃고 아이를 낳았다는 사실조차 모르는 채 입원 생활을 이어갔고 아이는 병원의 판단이나 제삼자의 개입으로 다른 곳에 보내졌을 가능성도 있었다.특히 병원 측이 메이슨의 혈액형이 특이하다는 걸 알고 그 사실을 숨겼을 가능성도 생각해 볼 수 있었다.무엇보다 그때 그녀에게는 아이를 낳았다는 사실을 알려주는 사람이 단 한 명도 없었다.온하랑은 두 번째 가능성이 더 현실적이라 생각했다.사고로 깨어난 뒤 그녀의 휴대폰에는 최동철이나 벨라, 혹은 진도원 등 사람들의 연락처가 아무것도 남아 있지 않았다.그 사고에 뭔가 수상한 구석이 있다는 건 오래전부터 느끼고 있었다.그리고 오늘 메이슨의 희귀 혈액형을 알게 된 뒤로
온하랑은 조심스럽게 일반 병실 문을 밀어 열었고 문틈 사이로 소독약 특유의 냄새가 훅하고 밀려왔다.병실 안에서는 운전기사가 침대에 비스듬히 기대 누워 있었고 오른쪽 다리는 깁스를 한 채 이마엔 붕대가 감겨 있었다.온하랑이 들어오자 기사는 몸을 일으키려 애쓰며 말했다.“아가씨, 죄송합니다.”“움직이지 마세요.”온하랑은 재빨리 다가가 그를 제지하고는 다정하게 말했다. “지금은 푹 쉬셔야 해요.”기사는 눈에 띄게 미안한 기색이었다. “다 제 잘못이에요. 제가 그때 반응이 조금만 더 빨랐더라면...”“기사님 잘못 아니에요.”온하랑은 그의 곁에 앉아 방금 사 온 과일 바구니를 건넸다. “CCTV 확인해 보니까 상대 차량이 고의로 신호를 어긴 게 맞아요. 경찰이 이미 수사에 들어갔어요.”기사는 그제야 안도의 숨을 내쉬며 물었다.“그럼... 메이슨 도련님은요?”“아직 중환자실이에요.”온하랑의 목소리는 담담했지만 그 안에 담긴 걱정은 고스란히 전해졌다.“하... 부디 별일 없어야 할 텐데요. 어서 나아야 할 텐데...”“의사들이 최선을 다해주실 거예요. 기사님께서 필요한 거 있으면 간병인이나 비서한테 바로 말씀하세요. 전 이제 아주머니 병실도 보고 올게요.”“네, 고맙습니다. 조심해서 다녀오세요.”온하랑은 장 선생 병실을 나온 뒤 가정부 아주머니의 병실도 들렀고 마지막으로 메이슨이 있는 중환자실 앞으로 향했다.아직 깨어나지 않은 메이슨을 보기 위해 간호 스테이션에 들러 서류에 서명하고 푸른색 보호복과 마스크, 모자를 착용한 뒤 무거운 격리실 문을 밀었다.침대 위 메이슨은 생각보다 더 창백했다.그의 긴 속눈썹이 병실 조명 아래 거의 투명해 보였고 여러 장비와 관이 그 작은 몸을 감싸고 있었고 의료 기기에서는 규칙적인 삑삑 소리가 들렸다.온하랑은 조심스럽게 그의 손을 잡고 엄지로 손등을 부드럽게 문지르며 낮게 속삭였다.“메이슨...”그녀는 고개를 돌려 간호사에게 물었다.“언제쯤 깰 수 있나요?”“수술 끝난 지 이제 다섯 시간
온하랑은 잠시 멍하니 있다가 예전에 강남시에서 마주친 소년이 떠올랐고 고개를 살짝 저으며 말했다.“별로 가고 싶지 않아요.”그들은 비록 이복남매 사이지만 사실상 남이나 다름없었다.게다가 지금 최동림이 입원 중이라면 보호자는 거의 확실하게 임가희일 것이고 온하랑은 그 여자를 다시 보고 싶지 않았다.“그래. 그럼 내가 잠깐 내려갔다 올게.”“네.”최동철은 조용히 병실로 내려가 잠시 임가희와 인사를 나누고 최동림의 상태를 확인한 뒤 수술실 앞으로 돌아왔다.보모가 먼저 수술을 마쳤고 이어 병원에서 혈장을 수급해 수술이 이어졌으며 결국 메이슨의 수술은 성공적으로 끝났다.그는 현재 중환자실로 옮겨졌고 의사는 메이슨이 깨어나려면 대략 4~6시간 정도 걸릴 거라 설명했다.최동철은 곧장 비서 김지환과 간병인 두 명을 병동에 상주시키도록 지시했다.한편, 메이슨과 같은 희귀 혈액형을 가진 친구도 병원에 도착했다.비록 실제 수혈은 필요 없었지만 최동철과 온하랑은 감사의 의미로 음식을 대접하고 고급 담배와 술도 선물했고 연락처도 서로 교환했다.식사 자리에서 자연스레 희귀 혈액형 이야기가 나왔다.그 친구는 자신의 혈액형이 확인된 후 가족 전체가 무료 혈액형 검사를 받았고 그중 동생도 같은 혈액형이라는 사실을 알게 됐다고 했다.현재는 희귀 혈액형을 가진 사람들의 상호 도움 단체에 가입해 있으며 메이슨도 가입해 두라고 권했다.지금은 어린 나이라 헌혈이 안 되지만 이후 혹시 모를 수혈 상황에 대비해 혈액 공급망을 넓혀 두는 게 좋다는 것이다.메이슨이 성인이 되면 직접 헌혈도 가능하기 때문이다.식사를 마친 뒤 온하랑은 협력사 미팅에 가야 했기에 최동철은 그녀를 목적지까지 데려다주고 다시 자신의 업무로 향했다.협력사 미팅을 마친 온하랑은 다시 병원으로 돌아왔고 택시에서 막 내린 그녀에게 한 통의 전화가 걸려 왔다.부승민이었다.온하랑은 병원 안으로 들어서며 전화를 받았다.“여보세요?”“어때? 장 대표님은 만났어?”수화기 너머에서 부승민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온하랑은 지금 경주 출장을 온 상태였다.그는 오늘 막 도착해 협력사 직원의 안내로 호텔에 체크인했지만 아직 현지 담당자와는 만나지 못한 상황이었다.원래는 저녁에 메이슨을 잠깐 보러 갈지 생각 중이었는데 하필이면 그때 최동철에게 전화가 걸려 왔다.메이슨이 교통사고로 병원에 실려 갔다는 소식이었고 그래서 온하랑은 급히 병원으로 달려갔다. 병원 입구에는 최동철이 먼저 도착해 그녀를 기다리고 있었다.그를 보자 온하랑은 빠른 걸음으로 다가가며 다급히 물었다.“동철 오빠, 메이슨은 어때요?”그러자 최동철은 깊이 찌푸린 얼굴로 말했다.“과다 출혈이 있어서 수혈이 필요해.”그 말에 온하랑은 아까 전화로 자신에게 혈액형을 물어본 이유가 떠올랐고 마음속 불안이 더욱 커졌다.“메이슨 혈액형이... 뭔가 문제라도 있어요?”“검사 결과, 메이슨은 Kidd 혈액형 중 Jk(a-b-)형이래. Rh 음성보다 더 희귀한 혈액형이야.”최동철의 목소리에는 짙은 걱정이 묻어 있었고 온하랑은 눈을 크게 뜨며 입을 벌렸다.“그런 혈액이... 혈액은행에 있긴 있어요?”“응. 병원에서 이미 확보 요청했어.”그래도 온하랑의 불안은 가시지 않았다.‘메이슨이 어쩌다 그런 희귀 혈액형을 갖게 된 거지? 혹시 혈액이 부족하면 어쩌지...’그러자 최동철이 조심스럽게 그녀를 안심시켰다.“걱정하지 마. 예전에 경주에서 같은 혈액형 가진 사람 중 헌혈 계약을 맺은 분들이 있어서 지금 연락 중이야. 메이슨 상태도 많이 안정됐고 잘 버틸 수 있을 거야.”만약 사고가 메이슨이 처음 귀국했을 때 터졌다면 정말 위험했을 거라고 그는 덧붙였다.병실로 가는 길에 최동철은 메이슨의 혈액형에 대해 간단히 설명해 주었다.Kidd 혈액형은 ABO 혈액형과는 별개 체계로 서로 영향을 주지 않는다.ABO 혈액형상으로 메이슨은 O형이다.하지만 Kidd 혈액형 시스템에서는 적혈구 표면 항원의 존재 여부에 따라 Jk(a+b-), Jk(a-b+), Jk(a+b+), Jk(a-b-) 이렇게 네 가지로 나뉜다
아침이 밝고서야 최국환이 병원에서 돌아왔다.설윤은 그의 눈 밑이 시커멓게 팬 걸 보고 곧바로 다가가 그의 어깨를 주물러주며 조심스레 물었다.“동림이는요?”“원래 있던 증상이지. 의사 말론 어제 감정 기복이 너무 심해서 그랬다고 했어. 당분간 입원해서 안정 취해야 한대. 지금 병원에 동림이 엄마랑 하인이 같이 있어.” 최국환은 눈을 감고 길게 한숨을 쉬었다. 온몸이 뻐근하고 피로가 몰려와 그는 이제 더 이상 밤새우는 게 버겁다고 느꼈다.알레르기 유발성 천식과 감정 기복으로 인한 천식 발작은 증상이 조금 달랐다.경험 많은 의사가 문진과 혈액 검사 끝에 감정적 요인이 원인이라는 진단을 내린 것이다.“큰일 아니라니 다행이네요. 회장님도 아주 피곤해 보이세요. 아침 드시고 바로 좀 쉬시는 게 어때요?”설윤이 조용히 말하자 최국환은 고개를 끄덕였다.아침 식사를 마친 후 그는 2층으로 올라가 휴식을 취했고 임연지는 외출해 오재원을 만나러 나갔다.집에 혼자 남은 설윤은 심심하던 차에 기사에게 부탁해 병원으로 향했다.명분은 최동림의 병문안이었지만 사실 그보다 더 중요한 건 임가희의 신경을 긁어놓는 데 있었다.병원에 도착해 입원실 방향으로 걷던 중 그녀는 익숙한 뒷모습 하나를 발견했다.그 사람은 통화 중이었고 바쁘게 걸음을 옮기며 설윤보다 먼저 병동 건물 안으로 사라졌다.‘최동철? 설마 동림이를 보러 온 걸까?’설윤은 서두르지 않고 천천히 엘리베이터에 올라 최동림의 병실이 있는 층으로 이동했다.창밖으로 병실 내부를 들여다보니 최동림은 링거를 맞으며 누워 있었고 곁의 보호자 침대엔 임가희가 쉬고 있었다.설윤은 병실 문을 똑똑똑 세 번 두드렸다.아무런 응답이 없자 그녀는 그대로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그 소리에 임가희는 반사적으로 벌떡 몸을 일으켰고 그녀의 눈빛은 곧장 경계심으로 바뀌었다.“설윤 씨, 여긴 무슨 일이죠?”임가희는 빠르게 몸을 돌려 병상 앞을 가로막았고 설윤은 손에 든 과일 바구니를 살짝 흔들며 부드럽게 웃었다.“당연히 동
임연지는 설윤의 뒷모습을 노려보다가 분에 겨워 발을 굴렀다.‘진짜 싸가지 없는 여자야. 예전에 백화점에서 따귀 한 대 맞았을 땐 개처럼 쫄아서는 말도 못 하더니 지금은 고모부가 뒤를 봐준다고 어디 감히 자기를 상대로 맞불을 놓다니.’설윤은 방에 들어오자마자 침대에 드러누웠고 금세 잠이 들 것 같았다. 그런데 카카오톡 알림음이 울려 억지로 핸드폰을 집어 들었다.한편, 임연지는 뒤척이며 잠을 이루지 못하고 있었다. 결국 핸드폰을 들어 한진과 대화를 하기 시작했다.그녀는 오늘 있었던 일을 죄다 털어놓았다.[이 년은 진짜 너무 교활해. 내가 못 봤으면 동림이는 완전히 넘어갔을 걸? 아무도 몰랐을 거야. 아까는 대놓고 동림이 알레르기 유발 물질이 뭐냐고 묻더라니까? 고모부는 갑자기 노망이 났는지 그냥 다 알려주라고 하질 않나.]그러자 한진의 답장도 빠르게 도착했다.[이 여자 수위가 장난 아닌데.] [그렇지. 내 말 맞지!] [너네는 못 이겨. 이런 애 상대하려면 그냥 권력으로 찍어 눌러야 해. 지금처럼 고모부가 뒷배 봐주니까 애가 깝치는 거지. 그러니까 넌 빨리 오재원이랑 결혼하는 게 답이야.][곧 할 거야. 오씨 집안에서도 이번 주 안에 날짜 잡자고 올라온다고 했어.][근데 결혼했다고 끝난 건 아니야. 오재원이 예전처럼 아무 능력 없는 철부지라면 권한도 없고 집안에서 힘도 없을걸.]임연지는 고개를 끄덕였다.오재원네 집안 권력은 오형일, 큰아들 오하운, 그리고 작은아버지 오정우에게 집중돼 있었다.사실 그녀도 예전엔 오재원의 형 오하운에게 접근하려고 했었다. 하지만 그는 워낙 바빠서 얼굴 보기 힘들고 간신히 만나도 말도 안 섞으니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근데 솔직히 오재원은 회사에서 일할 깜냥도 안 돼.][그럼 그냥 가르치면 되지. 저 정도 집안이면 선생 몇 명 붙이는 거 일도 아니잖아. 회사 나가서 일하게 만들고 진심으로 개과천선은 못 해도 적어도 모양새는 갖춰야지. 부모님 눈에도 달라졌다고 보이게 말이야. 연지야, 지금은 오
“회장님! 동림 도련님이 천식 발작을 일으켰습니다. 지금 병원으로 모시려는 중이에요. 어서 내려와 보세요.”복도에서 다급한 하인의 외침이 들려왔다.최국환은 눈을 번쩍 뜨고 곧장 침대 머리맡에 있는 스탠드 조명을 켠 뒤 겉옷을 집어 들고 자리에서 일어났다.그를 따라 일어난 설윤이 몸을 일으키자 그는 말했다. “그냥 자. 내가 가볼게.”하지만 설윤은 이불을 걷고 몸을 일으키며 물었다. “동림이 천식이 있어요?”“응. 태어날 때부터 있었어.”“그럼 저도 같이 가볼게요.”설윤은 외투를 꺼내 입고 최국환과 함께 급히 방을 나섰다.1층 거실로 내려가 보니 최동림은 이미 약을 복용했지만 여전히 기침이 멈추지 않았고 숨을 제대로 쉬지 못해 얼굴이 벌겋게 변해 있었다.곁에서 지키고 있던 임가희는 몹시 걱정스러운 얼굴로 아들을 바라보고 있었다.“도대체 왜 갑자기 발작이 난 거야?” 최국환이 조급하게 묻자 임가희는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저도 확실하진 않은데 혹시 알레르기 유발 물질에 노출된 게 아닐까 싶어요... 다만 의사 말로는 감정적인 변화 특히 슬픔이나 불안 같은 부정적인 감정도 천식을 유발할 수 있다고 했거든요.”이런 감정이 심할 경우 몸속 자율신경 중 미주신경이 자극돼 기관지가 수축하고 천식 발작으로 이어지는 것이다.최동림은 태어난 지 얼마 안 되어 천식 판정을 받았고 그 뒤로 집안은 온통 방역과 청소, 위생 관리에 신경 써 왔다.최동림이 자라면서 체질도 좋아져 요즘엔 거의 발작이 없었고 학교에도 특이 사항을 알려 기숙사 생활을 하게 했던 터였다.“알레르기 때문은 아닐 거야. 아마 낮에 너무 놀랐던 것 같아.”최국환은 최동림 옆에 앉아 등을 두드리며 숨을 고르게 도와주었다.“동림아, 아빠가 너무 심했어. 미안해.”그때 임연지가 옆에서 코웃음을 치며 설윤을 향해 의미심장하게 말했다.“글쎄요, 고모부. 오늘 오후에 설윤 씨가 동림이 방에 다녀갔는데 혹시 몸에 뭐 안 좋은 걸 묻히고 온 건 아닐까요? 동림이 건강 생각하면 확인
방금까지 부모에게 혼나 속이 뒤집힌 상태였던 최동림은 설윤이 자신에게 친절하게 다가온 그 순간 그녀에 대한 인상이 한껏 좋아졌다.그녀는 확실히 임가희가 지금껏 상대해 온 사람 중 가장 다루기 까다로운 상대였다.최동철 쪽과도 특별히 친하지 않고 이 집에서 그녀가 기대고 있는 건 허공에 떠 있는 최국환의 사랑 말고는 오직 최동림이라는 아들뿐이었다.그리고 설윤은 단번에 그 약점을 정확히 찔러 들어왔다.임가희는 깊게 숨을 들이쉬며 치밀어 오르는 감정을 억누르고는 조용히 말했다.“연지야, 넌 먼저 나가 있어.”임연지는 아직 분이 풀리지 않은 얼굴로 최동림을 노려보다가 억지로 돌아섰고, 문을 쿵 하고 세게 닫고 나갔다.그러자 방 안에는 모자 단둘만 남았다.짙은 정적이 감도는 가운데 임가희는 천천히 걸음을 옮겨 아들 앞에 앉았다.어깨에 손을 얹으려 했지만 최동림은 피하듯 몸을 틀었다.허공에 멈춘 임가희의 손끝이 서글프게 떨리다가 조용히 내려왔다.“동림아.”그녀의 목소리는 조심스럽고 부드러웠다.“게임기... 엄마한테 줄래?”최동림은 그 말을 듣고 오히려 더 꼭 안으며 고개를 저었다.“싫어요. 이건 제 거예요!”임가희는 눈빛을 거두며 일어섰다.“동림아, 엄마 정말 실망했어.”그녀는 단호한 목소리로 말했다.“엄마가 널 얼마나 아끼는지 몰라? 새 옷 사주고 장난감 사주고 아프면 병원에서 밤새 지켜봐 주고 늘 네 곁에 있었잖아. 그런데 네가 이런 식으로 엄마 마음을 아프게 해?”그 말에 최동림의 눈이 붉어지며 금세 눈물이 고였고, 그는 와락 게임기를 내려놓고 임가희를 안았다.“엄마, 미안해요... 게임기 필요 없어요. 제발 화 풀어요...”임가희는 아들의 어깨를 다정하게 토닥이며 말했다.“그래야 우리 동림이지.”그는 흐느끼며 품에 안겼고 임가희는 조용히 속삭였다.“아직 넌 어려서 잘 모르겠지만 어른들 사이엔 보이지 않는 속셈이 오가는 거야. 설윤이란 여자는 겉으론 웃고 있어도 속은 달라. 그러니까 절대로 설윤한테 선물 받지 마. 가까이하
“누나, 무슨 일이에요?”최동림은 게임을 계속하고 싶어 속으로 짜증을 삼키며 물었다.“방금... 설윤이 여기 왔었지?”“네...”무심결에 고개를 끄덕이던 최동림은 갑자기 정신이 번쩍 들어 고개를 저었다.“아니에요. 안 왔어요.”임연지는 그의 표정을 유심히 살폈고 어딘가 어색했다. 그런데 정확히 뭐가 이상한 건지 콕 집어 말할 수가 없었다.그녀는 고개를 돌리려다 문득 책상 위의 선물 포장 상자와 그가 들고 있는 게임기를 보고 눈썹을 찌푸렸다.“이 게임기는... 누가 사준 거야?”최동림은 순간 말문이 막혔다. “그게... 엄마가... 사줬어. 왜?”“정말?”임연지는 의심스러운 눈으로 바라보며 되물었다.“그럼 고모한테 물어볼게.”최동림의 얼굴이 순간 굳어졌다.“아, 잠깐만! 누나, 그게…”그의 말을 끊고 임연지는 단단히 다그쳤다. “동림아, 솔직히 말해. 이 게임기는 진짜 누가 사준 거야?” 최동림은 두 손으로 게임기를 꼭 쥐었고 손등이 하얗게 질릴 만큼 힘이 들어가 있었다.그는 고개를 떨군 채 한참 말이 없다가 결국 나직하게 중얼거렸다. “설윤... 아줌마가 줬어.”“설윤... 아줌마?” 임연지는 말도 안 된다는 듯 헛웃음을 흘리더니 이내 눈을 부릅뜨고 목소리를 높였다. “너 지금 그 여자를 아줌마라고 불러? 이렇게 비싼 걸 받았다고? 동림아, 설윤이 어떤 여자인지는 알고 있는 거야?”갑작스러운 고함에 최동림은 깜짝 놀라 뒷걸음질 쳤다.“설... 설윤 아줌마는 착한 사람이야. 그냥...” “착하다고?”임연지는 분노에 찬 얼굴로 코웃음을 쳤다.“그렇게 착한 여자가 남의 가정을 깨뜨리냐? 넌 그런 사람한테 선물 받으면서 고맙다고 하는 거야?”그녀는 그대로 손을 뻗어 최동림의 품에 있던 게임기를 낚아채더니 바닥에 내리꽂았다.“쾅!”새 게임기는 바닥에 떨어지며 산산조각 났다. 화면은 깨지고 기계 외관도 부서져 부품이 여기저기 흩어졌다.최동림은 멍하니 그 광경을 바라보다 곧장 무릎을 꿇고 깨진 게임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