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싫... 싫어요! 저는 숙모가 떠나는 거 싫어요!”부시아는 두 눈이 붉힌 채 하염없이 눈물을 흘렸다.“왜 갑자기 해외로 가요? 삼촌이 숙모 괴롭혔죠! 삼촌 찾으러 갈래요!”시아가 짧은 다리를 버둥거리며 소파에서 뛰어내리려고 했다.온하랑이 그녀를 제지하며 나지막이 말했다.“시아야, 나랑 삼촌은 이제 같이 못 있어.”“왜요?”시아가 물기가 가득한 눈동자로 그녀를 보았다.‘분명 사이가 좋아졌는데... 조금만 지나면 화해할 것 같았는데...’온하랑이 시선을 내리며 답했다.“말하자면 길어. 네가 크면 알게 될 거야.”부시아는 여전히 부승민에게 기대야 하는 아이였다. 그런 아이 앞에서 부승민의 나쁜 말을 하여 부승민에 대한 증오를 부추길 필요는 없었다.애초에 부승민이 부시아를 남긴 이유도 일부는 온하랑때문이었다. 아이를 이용해 그녀를 꼬여 내기에서 이기기 위함이었다.이미 모든 게 밝혀진 상태에서 부승민이 부시아를 어떻게 대할지 모를 일이었다.목적을 달성한 부승민이 부시아를 더 이상 보살피지 않는다면 큰일이었다.온하랑이 부드러운 목소리로 부시아를 달랬다. 가까스로 달래서 더 이상 눈물을 흘리지 않았지만, 눈시울은 여전히 촉촉한 상태로 처량한 표정으로 그녀를 쳐다보고 있었다.온하랑이 고개를 들어 안문희에게 물었다.“요 며칠 돌아온 적 있나요?”안문희는 애초에 온하랑과 부승민 사이에 문제가 있음을 눈치챘지만 간섭할 수 없었다.“며칠 전 사람을 시켜 대표님 물건을 빼갔습니다. 시아한테도 같이 갈 거냐고 물었지만, 시아가 거부해서 이곳에 남아있습니다. 며칠 전 와서 점심을 먹고 시아랑 함께 놀아주시기도 했죠.”부승민이 부시아를 방치하지 않았다는 소식에 온하랑은 겨우 마음을 내려놓았다.하지만 부시아가 이곳에 남아있는 것은 그녀 때문일 텐데, 그녀가 떠나니 이곳에 남는 것도 의미가 없었다.부승민한테 가거나, 본가로 가거나 둘 중 하나였다.“시아야, 숙모가 가면 너는 삼촌이랑 살고 싶어? 증조할머니랑 살고 싶어?”“저는 숙모랑 같이 살고 싶
어두워진 부승민의 얼굴을 본 온하랑은, 부시아가 그의 심기를 거스를까 봐 얼른 말을 잘랐다.“시아야, 숙모 가면 삼촌 말 잘 들어야 해. 시간 나면 시아 보러 다시 올게.”“숙모...”부시아가 몸을 기울였다. 시아는 온하랑이 떠나는 것을 막고 싶었다.“착하지. 앞으로는 숙모 말고 고모라고 불러.”온하랑은 부시아의 얼굴을 가볍게 꼬집고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집을 나갔다.애초에 부승민이 어떤 내기를 했는지 알았다면, 그녀는 절대로 부시아를 이곳에 남기지 않았을 것이었다.부시아가 남은 이유는 그녀와 부승민때문이었다.그녀가 떠나고, 부시아에게는 부승민남 남았다. 부승민이 부시아를 싫어한다면 그녀는 부선월의 곁으로 돌아갈 수밖에 없었다. 부선월은 더 이상 이전처럼 그녀를 맞아주지 않을 것이었다. 자주 환경을 바꾸는 것도 부시아에게 좋지는 않았다.부승민 혹은 부씨 일가의 본가에 남아있는 게 부시아에게는 제일 좋은 선택이었다. 그저 부승민에게 일말의 양심이라도 있길 바랐다. 제일 나쁜 결과는 온하랑이 밖에서 정착한 후, 부시아를 데려가는 것이었다. 거기까지는 가지 않았으면 하는 바람이었다.한 층만 내려가면 됐었기에 온하랑은 엘리베이터를 기다리지 않고 계단으로 향했다. 절반쯤 내려왔을까, 뒤에서 문이 여닫기는 소리가 들리더니 누군가가 그녀를 불러세웠다.“온하랑.”온하랑이 발걸음이 멈췄다. 그녀는 두 손을 꽉 움켜쥔 채 평온한 모습으로 돌아서서 위쪽에 있는 부승민을 쳐다보았다.“무슨 일이야?”“어린아이까지 이용하다니, 너무한 거 아니야?”부승민이 비아냥거렸다.“내가 어떻게 이용했는데?”부승민이 자조적으로 웃으며 답했다.“네가 시아한테 무슨 말을 했는지는 네가 제일 잘 알겠지. 시아가 지금 새 숙모는 싫다고 난리 부리고 있어. 만족해?”‘나를 그렇게밖에 생각하지 못하는구나. 마음속으로 이렇게 싫어하면서 내 앞에서 그런 연기를 보여주다니... 사실인 것 같아서 나조차도 속아 넘어갔어. 정말 쉽지 않았겠어.’온하랑이 멈칫했다. 소매 아래 감춰둔
“네, 한번 찾아왔었어요. 하지만 저도 참지만은 않았어요.”온하랑이 최동철의 표정을 살펴보았다.“잘했어. 연지가 잘못했으니 상응하는 벌을 받아야지. 아주머니가 널 찾아가도 너는 다른 건 생각하지 말고 그냥 거절해.”“동철 오빠랑 최 회장님은 공정하신 분이신 줄 알고 있었어요.”최동철이 시선을 내리며 화제를 바꿨다.“왜 갑자기 출국하려고 결심한 거야?”“특별한 이유는 없어요. 그냥 여기 있기 싫어서요.”그렇게 쪽팔린 일은 꺼낼 리가 없었다.최동철이 온하랑의 표정을 살피며 말을 이었다.“며칠 전 부승민이 추서윤 시랑 같이 연회에 참석하는 모습을 봤어. 보니까 보통 사이는 아닌 것 같던데.”온하랑이 차분히 답했다.“그 사람 얘기는 하지 말죠. 한잔 올릴게요.”“그래.”최동철은 온하랑의 태도를 보고 그녀가 외국으로 가는 이유가 부승민과 추셔윤이 재결합 때문임을 눈치챘다.비록 온하랑과 부승민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지금이야말로 그에게 절호의 기회였다. 임가희가 온하랑에게 약을 탄 사실만 없었다면 말이다.그 일이 있고 난 뒤 얼마 지나지 않아 그는 온하랑에게 정을 운운했었다. 그것만으로 온하랑은 그가 임가희에게 지시했음을 눈치챘을 것이었다.하여 최동철은 당분간 더 마음을 숨길 수밖에 없었다.온하랑과 부승민이 갈라서고 외국까지 간다면 그에게 기회는 얼마든지 있었다.최동철이 주머니에서 명함 한 장을 꺼내 온하랑 앞으로 밀며 말했다.“바빠서 도무지 시간이 나지 않네. 아니면 널 그곳까지 바래다주고 다 해결해 주는 건데. 이건 스튜디오 작업실 명함이야. 사장은 내 친구고. 뉴욕과 필라시에 모두 지점이 있어. 너만 괜찮다면 내가 추천했다고 하고 한번 연락해 봐.”온하랑이 명함을 건네받고 웃으며 답했다.“알겠어요. 고마워요, 오빠.”재산을 기부한 이후 남은 거라고는 몇 년간 모아둔 월급뿐이었다. 비록 꽤 되는 돈이었지만 정착하기 위해 일부 쓰고 나면 한가롭게 집에 머물 수만은 없었다.”그렇다고 집에만 있을 생각을 한 것도 아
‘온하랑이 갑자기 간다니, 부승민이랑 사이가 틀어진 건가?’“모르겠어. 자신만의 선택이 있는 거겠지.”“나도 가도 돼?”서혜민이 기대 어린 표정으로 부현승을 바라보았다.“나도 하랑 씨 알아. 하랑 씨도 우리 사촌 언니를 알고 있어. 이렇게 가면 우리 결혼식에 참석하지도 못할 텐데 배웅해 주고 싶어.”비록 부현승이 그녀와 결혼하기로 약속하고 그녀를 데리고 결혼식장을 구경하고, 웨딩드레스 피팅하고 반지를 고르고 웨딩 사진을 찍으며 결혼에 필요한 모든 일을 했지만 정작 부모님에게 소개해 준 적은 없었다. 그리고 혼인신고서 얘기만 나오면 말을 돌렸다.한번은 그녀가 혼인신고 하러 가자고 암시했더니 부현승은 결혼식이 끝나면 집 한 채를 그녀의 명의로 넘겨주겠다고 했다.서혜민은 기쁨과 동시에 부현승의 뜻을 눈치챘다. 그는 그녀와 혼인신고를 할 생각이 없었다.결혼식을 올리는 것도 그저 아이에게 명분을 주기 위해서였고, 부현승이 원하지 않는다면 언제든지 멈출 수 있는 그런 사이였다.하지만 부씨 일가에 발을 들일 수 있게 되었는데, 어찌 집 한 채와 몇억 정도의 재산만 탐을 낼 서혜민이였겠는가.그녀는 최선을 다해 영원히 부씨 일가에 머무를 계획이었다.하여 서혜민은 본가에 가보고 싶었다.결혼 전에 조금이라도 알아둔다면, 결혼 후에 적어도 까막눈은 아닐 것이었다.부현승은 서혜민을 바라보며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바라본 시간이 길어지자, 서혜민은 긴장되기 시작했다. 그녀의 속마음을 꿰뚫어 보는 것만 같았다.하지만 어떨 때는 부현승이 지금과 같은 눈으로 쳐다봐도 그녀의 요구를 들어줬었다.“정말 가고 싶어?”서혜민은 잠시 망설이다 고개를 끄덕였다.“응.”“가고 싶으면 가자.”하여 부현승이 서혜민을 데리고 왔다.그가 서혜민을 데리고 본가로 왔을 때, 둘째 숙부와 숙모는 아직 오지 않은 상태였다.온하랑은 서혜민도 올 줄은 몰랐다는 시선으로 그녀를 쳐다보았다. 서혜민의 몸매는 여전히 가냘파 임신한 티가 나지 않았다.온하랑이 웃으며 인사를 건넸다.“오
서혜민이 속으로 부인의 신분을 추측하고 있을 때, 부현승이 그녀의 손을 잡고 앞으로 갔다.“아버지, 어머니. 혜민이예요.”서혜민의 머리가 백지장이 되며 얼굴이 창백해진 채 급하게 인사드렸다.“안녕하세요. 아버님, 어머님.”서혜민은 긴장한 기색으로 둘째 숙모가 그녀를 못 알아보기를 바랐다.둘째 숙모는 온하랑과 말을 나누며 그저 서혜민을 흘깃 보고 대충 대꾸해 주며 계속하여 온하랑에게 당부의 말을 이어 나갔다.서혜민의 가슴이 철렁했다. 온하랑의 표정을 슬쩍 보니, 왠지 더 서러운 감정이 들었다.‘아무리 나를 좋아하지 않는다시지만, 굳이 다른 사람 앞에서까지 좋은 태도를 보여주시진 않으시네. 집에서라면 모르겠는데, 처음 부씨 일가 본가에 와서도 냉대를 받으면 앞으로 누가 날 제대로 대우해 줄까...’서혜민은 부현승을 쳐다보았다. 그가 나서서 대화를 이어 나가 줬으면 하는 바람이었다.하지만 부현승은 못 본 척 그녀를 끌고 소파에 앉았다.서혜민이 전전긍긍하는 모습을 본 온하랑은 왠지 모르게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비록 일전 혼인 생활을 했었지만, 부영훈 부부가 일찍 세상을 떠나고 부선월은 외국에서 지내다 보니 시댁과의 모순은 겪은 적이 없었다.둘째 숙모도 그녀 앞에서는 언제나 온화한 모습이었지만 서혜민에게는 나쁜 시어머니의 형상이 보였다.둘째 숙모는 어른이다 보니 서혜민을 신경 쓰지 않아도 괜찮았지만, 온하랑은 서혜민에게 뭐라 하기 어려웠다. 특히 그녀한테 인사하러 온 서혜민이다 보니 그녀를 냉대하기 더 어려웠다.하여 대화하면서도 온하랑은 계속하여 서혜민에게 말을 걸었지만, 온하랑 앞에서 체면을 구겼다고 생각한 서혜민은 그녀의 말을 제대로 받아주지 않았다.점심 식사 시 서혜민이 용기를 내어 시어머니에게 반찬을 집어주었지만, 그녀는 담담한 표정을 유지하며 젓가락을 대지도 않았다.서혜민의 안색은 유난히 창백해 보였다.그 모습을 본 온하랑이 생각을 이었다.‘부승민이 부영훈 아래에 이름을 올렸었다면 시어머니는 부선월일텐데, 아마 서혜민과 비슷
서혜민은 답답하다는 듯이 입을 삐죽였다. 말을 쉽지만, 그녀의 입장에서 어떤 어려움이 있는지 그는 전혀 알지 못했다.“하지만... 그저 어머니가 날 좋아해 줬으면 좋겠어. 그러면 네가 중간에 겨서 힘들어하지 않아도 되잖아.”“그러지 않아도 돼. 어차피 너랑 우리 부모님은 잘 못 지낼 거니 굳이 가깝게 지내지 않아도 돼. 각자 알아서 잘 지내면 되지.”서혜민의 부현승의 차가운 얼굴을 보며 더욱 화가 치밀어 올랐다.부씨 일가에서 그녀는 겨우 온하랑과 안면이 있다고 할 수 있었다. 하지만 온하랑은 떠나는데 부현승은 다른 사람과 가깝게 지내지 않아도 된다고 하니 그녀는 더 겉도는 기분이 들었다.부현승은 여전히 평온한 표정으로 지금 이 상황을 신경 쓰지 않는 듯했다.서혜민이 살고 있는 곳으로 온 부현승이 길가에 차를 세우며 말했다.“난 이만 갈게. 푹 쉬고, 내가 한 말 잘 생각해 봐.”서혜민은 콧방귀를 뀌고는 차에서 내렸다.부현승은 차를 돌려 회사로 향했다.한 골목에서 우회전할 때 눈앞에 갑자기 인영이 스쳐 부현승은 급하게 브레이크를 밟았다.여자는 핸드폰을 들고 바닥에 주저앉은 채 놀란 가슴을 쓸어내리고 있었다.길을 건널 때, 핸드폰이 떨어져 그녀는 바로 주워야겠다는 생각밖에 없었다.핸드폰을 주워 일어서기도 전에 여자는 한 차가 자신을 향해 오는 것을 보며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부현승이 얼른 안전벨트를 풀며 차에서 내려 안색이 창백한 채 주저앉아 있는 여자를 보았다.“부딪히셨나요?”여자는 멍하니 고개를 끄덕이다 그의 질문을 파악하고는 다시 고개를 저었다.“부딪쳤다는 거예요? 아니라는 거예요?”여자가 땅을 짚으며 일어서더니 핸드폰을 주머니에 집어놓고 아파지는 배를 부여잡았다.“안 부딪혔어요.”“앞으로 그렇게 위험하게 굴지 말아요.”부현승은 그녀를 쳐다보더니 몸을 돌려 운전석으로 가 자리를 떴다.“수현아, 깜짝 놀랐잖아.”친구가 얼른 앞으로 와 서수현의 팔을 부여잡았다.“아까 그 사람이 브레이크를 제때 밟아서 다행이지, 아니면
6월7일 10시쯤, 온하랑은 캐리어를 들고 강남국제공항으로 갔다. 김시연이 그녀를 배웅하러 나왔다.11시 30분 비행기로 두 번의 환승과 20시간의 비행을 거쳐야 필라시에 도착한다. 김시연은 온하랑과 함께 탑승 수속을 하러 갔다. 함께 체크인하고 보안 검색대를 통과한 후 대기실에서 기다렸다.11시가 되자 승객들은 탑승구에 줄을 서서 항공권을 확인하고 탑승할 준비를 했다. 이번에 온하랑이 가면 최소 몇 달은 볼 수 없었다. 김시연은 눈시울을 붉히며 온하랑을 껴안았다.“도착하면 꼭 전화해 줘. 혹시라도... 거기서 지내기 힘들면 다시 돌아와.”“그래.”김시연의 말을 듣던 온하랑은 코끝이 시큰해졌다.“아니면 나랑 같이 갈래?”두 사람의 관계가 여기까지 올 수 있었던 이유중 하나는 온하랑이 가장 힘들 때 김시연이 항상 옆에서 온하랑을 지지해 주고 그녀의 편이 되어 주었기 때문이다. 온하랑은 무뚝뚝한 사람이라 단 한 번도 김시연에 대한 우정을 말로 표현 한 적이 없지만 마음속으로는 항상 김시연을 최고의 절친으로 여겼다. 이제 둘이 헤어지게 되자 온하랑은 매우 아쉬웠다. 김시연은 미소를 지었다.“엄마가 없었다면 무조건 너랑 같이 갔을 텐데, 우리 엄마가 여기 있잖아.”어머니가 의지할 수 있는 사람은 오직 그녀뿐이어서 김시연은 떠날 수 없었다.“그래, 아주머니 잘 돌봐. 자주 연락할게. 만약 아저씨가 또 선보라고 하면 나랑 말해야 해. 어떤 사람인지 내가 판단해 볼게.”“네가? 너의 안목을 믿지 못하겠는데?”김시연은 의미심장한 눈빛으로 그녀를 쳐다보며 웃었다.“하긴. 내 주제에 무슨.”온하랑은 멋쩍게 웃었다. 물러터진 성격으로 부승민에게 두 번이나 속았는데 김시연을 위해 남자를 봐준다니 웃기지도 않는 말이다.탑승이 시작되자 온하랑은 아쉬워서 계속 뒤돌아보았다.“그럼 갈게?”“그래. 도착하자마자 꼭 연락해.” “알았어.”김시연이 지켜보는 가운데 온하랑은 비행기로 통하는 통로로 걸어갔다. 부승민은 대기실의 기둥 뒤에서 온하랑의 뒷모습이
온하랑은 카톡으로 진도원과 대화를 하다가 우연히 진도원이 자신을 알고 있다는 사실을 알았다.생각해 보면 딱히 이상한 일도 아니었다. 최동철이 필라시에 있을 때부터 그녀를 알고 있었으니 진도원이 최동철의 친구인 이상 그녀를 알고 있는 것도 가능했다.진도원은 온하랑을 한인 협회에서 알았다고 했는데 두 사람은 친한 사이는 아니었고 최동철이 온하랑과 더 친했다고 말했다.챙겨야 할 사람이 오랜 지인이라는 사실에 진도원은 더 열정적이었고 귀찮다는 생각이 전혀 들지 않았다. 그는 반 시간 전에 공항에 도착해서 온하랑에게 문자를 남겼다.[비행기에서 내리면 전화해.]메시지를 본 온하랑은 안내 표지판을 따라가 짐을 찾고 진도원에게 전화했다. 온하랑이 자신의 위치를 말하자 진도원은 그 자리에서 자신을 기다리라고 했다.온하랑은 캐리어 손잡이를 잡고 주변을 둘러보았다. 많은 사람들이 짐을 찾고 차례로 떠나자 주변은 금세 조용해졌다. 멀지 않은 곳에 KFC가 영업 중이었고, 안에는 사람이 많지 않았다.약 10분 후, 왼쪽에 검은 트렌치코트를 입은 키가 큰 남자가 온하랑과 몇 걸음 떨어진 곳에 멈춰 섰다.“온하랑?”“도원 오빠?”신분을 확인한 진도원은 앞으로 다가가 훑어보더니 주동적으로 온하랑 손에 들린 캐리어를 건네받았다.“내가 도와줄게. 이쪽으로 가면 가까워.”“네, 도원 오빠. 늦은 시간에 데리러 와줘서 정말 고마워요.”온하랑은 진도원을 바라보다가 왼쪽 귀에 피어싱과 한 단추를 풀어 헤친 셔츠 사이로 살짝 드러난 문신을 발견했다.진도원은 매력적인 미소를 지었다.“고맙긴 뭘, 같은 한국인끼리 도와야지. 여기서는 다 가족이나 다름없어. 앞으로 무슨 일이 있으면 언제든지 연락해.”이곳에 이민해 온 한국인은 많았지만 같은 민족끼리 정을 나누는 것은 불가피하므로 자발적으로 한인 협회를 만들어 서로 도우면서 살았다.“네, 그럼 사양하지 않을게요. 며칠 뒤에 집 구할 때도 오빠 도움이 필요할 것 같아요.”온하랑은 이 도시에 처음 온 거나 다름없었기에 이곳의 물가
“그렇다면 다행이네.”최국환은 그녀를 잠시 바라보더니 조용히 말을 이었다.“동림이도 이 병원에 있어. 천식이 재발해서 입원 중인데 같이 가서 보러 갈래?”온하랑은 잔잔히 미소 지으며 고개를 저었다.“아니요. 전 또 일이 있어서요.”“바로 아래층인데. 금방이면 돼.”최국환이 설득하듯 덧붙였지만 온하랑은 여전히 고개를 저었다.“죄송해요. 회장님. 제가 좀 바빠서 이만 가볼게요.”그녀는 부드럽게 말을 맺고 최국환을 지나쳐 앞으로 걸음을 옮겼다.걸음을 옮기면서도 그녀의 생각은 계속 이어지고 있었다.‘내가 필라시에서 메이슨을 낳았다는 얘기... 처음엔 믿기 어려웠지. 하지만 사진도 있었고 메이슨이 다시 내 품에 돌아온 뒤로는 받아들이게 됐어. 그렇다면 메이슨이 유실된 원인은 과연 무엇일까?’온하랑은 몇 가지 가능성을 떠올렸다.첫 번째 가능성은 출산한 후 며칠 지나 교통사고를 당한 경우였다.그 사고로 기억을 잃고 병원에 입원해 있던 사이 갓난아기 메이슨은 집에 혼자 남겨졌고 우는 소리에 놀란 이웃이나 행인이 아이를 구조했다가 연락처를 찾지 못해 이리저리 떠돌다 양부모 손에 들어갔을 가능성 혹은 집에 아무도 없다는 걸 틈타 누군가 아이를 빼돌렸을 수도 있었다.두 번째는 임신 후반기에 교통사고를 당한 경우였다.병원에서 아이를 낳았지만 기억을 잃고 아이를 낳았다는 사실조차 모르는 채 입원 생활을 이어갔고 아이는 병원의 판단이나 제삼자의 개입으로 다른 곳에 보내졌을 가능성도 있었다.특히 병원 측이 메이슨의 혈액형이 특이하다는 걸 알고 그 사실을 숨겼을 가능성도 생각해 볼 수 있었다.무엇보다 그때 그녀에게는 아이를 낳았다는 사실을 알려주는 사람이 단 한 명도 없었다.온하랑은 두 번째 가능성이 더 현실적이라 생각했다.사고로 깨어난 뒤 그녀의 휴대폰에는 최동철이나 벨라, 혹은 진도원 등 사람들의 연락처가 아무것도 남아 있지 않았다.그 사고에 뭔가 수상한 구석이 있다는 건 오래전부터 느끼고 있었다.그리고 오늘 메이슨의 희귀 혈액형을 알게 된 뒤로
온하랑은 조심스럽게 일반 병실 문을 밀어 열었고 문틈 사이로 소독약 특유의 냄새가 훅하고 밀려왔다.병실 안에서는 운전기사가 침대에 비스듬히 기대 누워 있었고 오른쪽 다리는 깁스를 한 채 이마엔 붕대가 감겨 있었다.온하랑이 들어오자 기사는 몸을 일으키려 애쓰며 말했다.“아가씨, 죄송합니다.”“움직이지 마세요.”온하랑은 재빨리 다가가 그를 제지하고는 다정하게 말했다. “지금은 푹 쉬셔야 해요.”기사는 눈에 띄게 미안한 기색이었다. “다 제 잘못이에요. 제가 그때 반응이 조금만 더 빨랐더라면...”“기사님 잘못 아니에요.”온하랑은 그의 곁에 앉아 방금 사 온 과일 바구니를 건넸다. “CCTV 확인해 보니까 상대 차량이 고의로 신호를 어긴 게 맞아요. 경찰이 이미 수사에 들어갔어요.”기사는 그제야 안도의 숨을 내쉬며 물었다.“그럼... 메이슨 도련님은요?”“아직 중환자실이에요.”온하랑의 목소리는 담담했지만 그 안에 담긴 걱정은 고스란히 전해졌다.“하... 부디 별일 없어야 할 텐데요. 어서 나아야 할 텐데...”“의사들이 최선을 다해주실 거예요. 기사님께서 필요한 거 있으면 간병인이나 비서한테 바로 말씀하세요. 전 이제 아주머니 병실도 보고 올게요.”“네, 고맙습니다. 조심해서 다녀오세요.”온하랑은 장 선생 병실을 나온 뒤 가정부 아주머니의 병실도 들렀고 마지막으로 메이슨이 있는 중환자실 앞으로 향했다.아직 깨어나지 않은 메이슨을 보기 위해 간호 스테이션에 들러 서류에 서명하고 푸른색 보호복과 마스크, 모자를 착용한 뒤 무거운 격리실 문을 밀었다.침대 위 메이슨은 생각보다 더 창백했다.그의 긴 속눈썹이 병실 조명 아래 거의 투명해 보였고 여러 장비와 관이 그 작은 몸을 감싸고 있었고 의료 기기에서는 규칙적인 삑삑 소리가 들렸다.온하랑은 조심스럽게 그의 손을 잡고 엄지로 손등을 부드럽게 문지르며 낮게 속삭였다.“메이슨...”그녀는 고개를 돌려 간호사에게 물었다.“언제쯤 깰 수 있나요?”“수술 끝난 지 이제 다섯 시간
온하랑은 잠시 멍하니 있다가 예전에 강남시에서 마주친 소년이 떠올랐고 고개를 살짝 저으며 말했다.“별로 가고 싶지 않아요.”그들은 비록 이복남매 사이지만 사실상 남이나 다름없었다.게다가 지금 최동림이 입원 중이라면 보호자는 거의 확실하게 임가희일 것이고 온하랑은 그 여자를 다시 보고 싶지 않았다.“그래. 그럼 내가 잠깐 내려갔다 올게.”“네.”최동철은 조용히 병실로 내려가 잠시 임가희와 인사를 나누고 최동림의 상태를 확인한 뒤 수술실 앞으로 돌아왔다.보모가 먼저 수술을 마쳤고 이어 병원에서 혈장을 수급해 수술이 이어졌으며 결국 메이슨의 수술은 성공적으로 끝났다.그는 현재 중환자실로 옮겨졌고 의사는 메이슨이 깨어나려면 대략 4~6시간 정도 걸릴 거라 설명했다.최동철은 곧장 비서 김지환과 간병인 두 명을 병동에 상주시키도록 지시했다.한편, 메이슨과 같은 희귀 혈액형을 가진 친구도 병원에 도착했다.비록 실제 수혈은 필요 없었지만 최동철과 온하랑은 감사의 의미로 음식을 대접하고 고급 담배와 술도 선물했고 연락처도 서로 교환했다.식사 자리에서 자연스레 희귀 혈액형 이야기가 나왔다.그 친구는 자신의 혈액형이 확인된 후 가족 전체가 무료 혈액형 검사를 받았고 그중 동생도 같은 혈액형이라는 사실을 알게 됐다고 했다.현재는 희귀 혈액형을 가진 사람들의 상호 도움 단체에 가입해 있으며 메이슨도 가입해 두라고 권했다.지금은 어린 나이라 헌혈이 안 되지만 이후 혹시 모를 수혈 상황에 대비해 혈액 공급망을 넓혀 두는 게 좋다는 것이다.메이슨이 성인이 되면 직접 헌혈도 가능하기 때문이다.식사를 마친 뒤 온하랑은 협력사 미팅에 가야 했기에 최동철은 그녀를 목적지까지 데려다주고 다시 자신의 업무로 향했다.협력사 미팅을 마친 온하랑은 다시 병원으로 돌아왔고 택시에서 막 내린 그녀에게 한 통의 전화가 걸려 왔다.부승민이었다.온하랑은 병원 안으로 들어서며 전화를 받았다.“여보세요?”“어때? 장 대표님은 만났어?”수화기 너머에서 부승민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온하랑은 지금 경주 출장을 온 상태였다.그는 오늘 막 도착해 협력사 직원의 안내로 호텔에 체크인했지만 아직 현지 담당자와는 만나지 못한 상황이었다.원래는 저녁에 메이슨을 잠깐 보러 갈지 생각 중이었는데 하필이면 그때 최동철에게 전화가 걸려 왔다.메이슨이 교통사고로 병원에 실려 갔다는 소식이었고 그래서 온하랑은 급히 병원으로 달려갔다. 병원 입구에는 최동철이 먼저 도착해 그녀를 기다리고 있었다.그를 보자 온하랑은 빠른 걸음으로 다가가며 다급히 물었다.“동철 오빠, 메이슨은 어때요?”그러자 최동철은 깊이 찌푸린 얼굴로 말했다.“과다 출혈이 있어서 수혈이 필요해.”그 말에 온하랑은 아까 전화로 자신에게 혈액형을 물어본 이유가 떠올랐고 마음속 불안이 더욱 커졌다.“메이슨 혈액형이... 뭔가 문제라도 있어요?”“검사 결과, 메이슨은 Kidd 혈액형 중 Jk(a-b-)형이래. Rh 음성보다 더 희귀한 혈액형이야.”최동철의 목소리에는 짙은 걱정이 묻어 있었고 온하랑은 눈을 크게 뜨며 입을 벌렸다.“그런 혈액이... 혈액은행에 있긴 있어요?”“응. 병원에서 이미 확보 요청했어.”그래도 온하랑의 불안은 가시지 않았다.‘메이슨이 어쩌다 그런 희귀 혈액형을 갖게 된 거지? 혹시 혈액이 부족하면 어쩌지...’그러자 최동철이 조심스럽게 그녀를 안심시켰다.“걱정하지 마. 예전에 경주에서 같은 혈액형 가진 사람 중 헌혈 계약을 맺은 분들이 있어서 지금 연락 중이야. 메이슨 상태도 많이 안정됐고 잘 버틸 수 있을 거야.”만약 사고가 메이슨이 처음 귀국했을 때 터졌다면 정말 위험했을 거라고 그는 덧붙였다.병실로 가는 길에 최동철은 메이슨의 혈액형에 대해 간단히 설명해 주었다.Kidd 혈액형은 ABO 혈액형과는 별개 체계로 서로 영향을 주지 않는다.ABO 혈액형상으로 메이슨은 O형이다.하지만 Kidd 혈액형 시스템에서는 적혈구 표면 항원의 존재 여부에 따라 Jk(a+b-), Jk(a-b+), Jk(a+b+), Jk(a-b-) 이렇게 네 가지로 나뉜다
아침이 밝고서야 최국환이 병원에서 돌아왔다.설윤은 그의 눈 밑이 시커멓게 팬 걸 보고 곧바로 다가가 그의 어깨를 주물러주며 조심스레 물었다.“동림이는요?”“원래 있던 증상이지. 의사 말론 어제 감정 기복이 너무 심해서 그랬다고 했어. 당분간 입원해서 안정 취해야 한대. 지금 병원에 동림이 엄마랑 하인이 같이 있어.” 최국환은 눈을 감고 길게 한숨을 쉬었다. 온몸이 뻐근하고 피로가 몰려와 그는 이제 더 이상 밤새우는 게 버겁다고 느꼈다.알레르기 유발성 천식과 감정 기복으로 인한 천식 발작은 증상이 조금 달랐다.경험 많은 의사가 문진과 혈액 검사 끝에 감정적 요인이 원인이라는 진단을 내린 것이다.“큰일 아니라니 다행이네요. 회장님도 아주 피곤해 보이세요. 아침 드시고 바로 좀 쉬시는 게 어때요?”설윤이 조용히 말하자 최국환은 고개를 끄덕였다.아침 식사를 마친 후 그는 2층으로 올라가 휴식을 취했고 임연지는 외출해 오재원을 만나러 나갔다.집에 혼자 남은 설윤은 심심하던 차에 기사에게 부탁해 병원으로 향했다.명분은 최동림의 병문안이었지만 사실 그보다 더 중요한 건 임가희의 신경을 긁어놓는 데 있었다.병원에 도착해 입원실 방향으로 걷던 중 그녀는 익숙한 뒷모습 하나를 발견했다.그 사람은 통화 중이었고 바쁘게 걸음을 옮기며 설윤보다 먼저 병동 건물 안으로 사라졌다.‘최동철? 설마 동림이를 보러 온 걸까?’설윤은 서두르지 않고 천천히 엘리베이터에 올라 최동림의 병실이 있는 층으로 이동했다.창밖으로 병실 내부를 들여다보니 최동림은 링거를 맞으며 누워 있었고 곁의 보호자 침대엔 임가희가 쉬고 있었다.설윤은 병실 문을 똑똑똑 세 번 두드렸다.아무런 응답이 없자 그녀는 그대로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그 소리에 임가희는 반사적으로 벌떡 몸을 일으켰고 그녀의 눈빛은 곧장 경계심으로 바뀌었다.“설윤 씨, 여긴 무슨 일이죠?”임가희는 빠르게 몸을 돌려 병상 앞을 가로막았고 설윤은 손에 든 과일 바구니를 살짝 흔들며 부드럽게 웃었다.“당연히 동
임연지는 설윤의 뒷모습을 노려보다가 분에 겨워 발을 굴렀다.‘진짜 싸가지 없는 여자야. 예전에 백화점에서 따귀 한 대 맞았을 땐 개처럼 쫄아서는 말도 못 하더니 지금은 고모부가 뒤를 봐준다고 어디 감히 자기를 상대로 맞불을 놓다니.’설윤은 방에 들어오자마자 침대에 드러누웠고 금세 잠이 들 것 같았다. 그런데 카카오톡 알림음이 울려 억지로 핸드폰을 집어 들었다.한편, 임연지는 뒤척이며 잠을 이루지 못하고 있었다. 결국 핸드폰을 들어 한진과 대화를 하기 시작했다.그녀는 오늘 있었던 일을 죄다 털어놓았다.[이 년은 진짜 너무 교활해. 내가 못 봤으면 동림이는 완전히 넘어갔을 걸? 아무도 몰랐을 거야. 아까는 대놓고 동림이 알레르기 유발 물질이 뭐냐고 묻더라니까? 고모부는 갑자기 노망이 났는지 그냥 다 알려주라고 하질 않나.]그러자 한진의 답장도 빠르게 도착했다.[이 여자 수위가 장난 아닌데.] [그렇지. 내 말 맞지!] [너네는 못 이겨. 이런 애 상대하려면 그냥 권력으로 찍어 눌러야 해. 지금처럼 고모부가 뒷배 봐주니까 애가 깝치는 거지. 그러니까 넌 빨리 오재원이랑 결혼하는 게 답이야.][곧 할 거야. 오씨 집안에서도 이번 주 안에 날짜 잡자고 올라온다고 했어.][근데 결혼했다고 끝난 건 아니야. 오재원이 예전처럼 아무 능력 없는 철부지라면 권한도 없고 집안에서 힘도 없을걸.]임연지는 고개를 끄덕였다.오재원네 집안 권력은 오형일, 큰아들 오하운, 그리고 작은아버지 오정우에게 집중돼 있었다.사실 그녀도 예전엔 오재원의 형 오하운에게 접근하려고 했었다. 하지만 그는 워낙 바빠서 얼굴 보기 힘들고 간신히 만나도 말도 안 섞으니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근데 솔직히 오재원은 회사에서 일할 깜냥도 안 돼.][그럼 그냥 가르치면 되지. 저 정도 집안이면 선생 몇 명 붙이는 거 일도 아니잖아. 회사 나가서 일하게 만들고 진심으로 개과천선은 못 해도 적어도 모양새는 갖춰야지. 부모님 눈에도 달라졌다고 보이게 말이야. 연지야, 지금은 오
“회장님! 동림 도련님이 천식 발작을 일으켰습니다. 지금 병원으로 모시려는 중이에요. 어서 내려와 보세요.”복도에서 다급한 하인의 외침이 들려왔다.최국환은 눈을 번쩍 뜨고 곧장 침대 머리맡에 있는 스탠드 조명을 켠 뒤 겉옷을 집어 들고 자리에서 일어났다.그를 따라 일어난 설윤이 몸을 일으키자 그는 말했다. “그냥 자. 내가 가볼게.”하지만 설윤은 이불을 걷고 몸을 일으키며 물었다. “동림이 천식이 있어요?”“응. 태어날 때부터 있었어.”“그럼 저도 같이 가볼게요.”설윤은 외투를 꺼내 입고 최국환과 함께 급히 방을 나섰다.1층 거실로 내려가 보니 최동림은 이미 약을 복용했지만 여전히 기침이 멈추지 않았고 숨을 제대로 쉬지 못해 얼굴이 벌겋게 변해 있었다.곁에서 지키고 있던 임가희는 몹시 걱정스러운 얼굴로 아들을 바라보고 있었다.“도대체 왜 갑자기 발작이 난 거야?” 최국환이 조급하게 묻자 임가희는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저도 확실하진 않은데 혹시 알레르기 유발 물질에 노출된 게 아닐까 싶어요... 다만 의사 말로는 감정적인 변화 특히 슬픔이나 불안 같은 부정적인 감정도 천식을 유발할 수 있다고 했거든요.”이런 감정이 심할 경우 몸속 자율신경 중 미주신경이 자극돼 기관지가 수축하고 천식 발작으로 이어지는 것이다.최동림은 태어난 지 얼마 안 되어 천식 판정을 받았고 그 뒤로 집안은 온통 방역과 청소, 위생 관리에 신경 써 왔다.최동림이 자라면서 체질도 좋아져 요즘엔 거의 발작이 없었고 학교에도 특이 사항을 알려 기숙사 생활을 하게 했던 터였다.“알레르기 때문은 아닐 거야. 아마 낮에 너무 놀랐던 것 같아.”최국환은 최동림 옆에 앉아 등을 두드리며 숨을 고르게 도와주었다.“동림아, 아빠가 너무 심했어. 미안해.”그때 임연지가 옆에서 코웃음을 치며 설윤을 향해 의미심장하게 말했다.“글쎄요, 고모부. 오늘 오후에 설윤 씨가 동림이 방에 다녀갔는데 혹시 몸에 뭐 안 좋은 걸 묻히고 온 건 아닐까요? 동림이 건강 생각하면 확인
방금까지 부모에게 혼나 속이 뒤집힌 상태였던 최동림은 설윤이 자신에게 친절하게 다가온 그 순간 그녀에 대한 인상이 한껏 좋아졌다.그녀는 확실히 임가희가 지금껏 상대해 온 사람 중 가장 다루기 까다로운 상대였다.최동철 쪽과도 특별히 친하지 않고 이 집에서 그녀가 기대고 있는 건 허공에 떠 있는 최국환의 사랑 말고는 오직 최동림이라는 아들뿐이었다.그리고 설윤은 단번에 그 약점을 정확히 찔러 들어왔다.임가희는 깊게 숨을 들이쉬며 치밀어 오르는 감정을 억누르고는 조용히 말했다.“연지야, 넌 먼저 나가 있어.”임연지는 아직 분이 풀리지 않은 얼굴로 최동림을 노려보다가 억지로 돌아섰고, 문을 쿵 하고 세게 닫고 나갔다.그러자 방 안에는 모자 단둘만 남았다.짙은 정적이 감도는 가운데 임가희는 천천히 걸음을 옮겨 아들 앞에 앉았다.어깨에 손을 얹으려 했지만 최동림은 피하듯 몸을 틀었다.허공에 멈춘 임가희의 손끝이 서글프게 떨리다가 조용히 내려왔다.“동림아.”그녀의 목소리는 조심스럽고 부드러웠다.“게임기... 엄마한테 줄래?”최동림은 그 말을 듣고 오히려 더 꼭 안으며 고개를 저었다.“싫어요. 이건 제 거예요!”임가희는 눈빛을 거두며 일어섰다.“동림아, 엄마 정말 실망했어.”그녀는 단호한 목소리로 말했다.“엄마가 널 얼마나 아끼는지 몰라? 새 옷 사주고 장난감 사주고 아프면 병원에서 밤새 지켜봐 주고 늘 네 곁에 있었잖아. 그런데 네가 이런 식으로 엄마 마음을 아프게 해?”그 말에 최동림의 눈이 붉어지며 금세 눈물이 고였고, 그는 와락 게임기를 내려놓고 임가희를 안았다.“엄마, 미안해요... 게임기 필요 없어요. 제발 화 풀어요...”임가희는 아들의 어깨를 다정하게 토닥이며 말했다.“그래야 우리 동림이지.”그는 흐느끼며 품에 안겼고 임가희는 조용히 속삭였다.“아직 넌 어려서 잘 모르겠지만 어른들 사이엔 보이지 않는 속셈이 오가는 거야. 설윤이란 여자는 겉으론 웃고 있어도 속은 달라. 그러니까 절대로 설윤한테 선물 받지 마. 가까이하
“누나, 무슨 일이에요?”최동림은 게임을 계속하고 싶어 속으로 짜증을 삼키며 물었다.“방금... 설윤이 여기 왔었지?”“네...”무심결에 고개를 끄덕이던 최동림은 갑자기 정신이 번쩍 들어 고개를 저었다.“아니에요. 안 왔어요.”임연지는 그의 표정을 유심히 살폈고 어딘가 어색했다. 그런데 정확히 뭐가 이상한 건지 콕 집어 말할 수가 없었다.그녀는 고개를 돌리려다 문득 책상 위의 선물 포장 상자와 그가 들고 있는 게임기를 보고 눈썹을 찌푸렸다.“이 게임기는... 누가 사준 거야?”최동림은 순간 말문이 막혔다. “그게... 엄마가... 사줬어. 왜?”“정말?”임연지는 의심스러운 눈으로 바라보며 되물었다.“그럼 고모한테 물어볼게.”최동림의 얼굴이 순간 굳어졌다.“아, 잠깐만! 누나, 그게…”그의 말을 끊고 임연지는 단단히 다그쳤다. “동림아, 솔직히 말해. 이 게임기는 진짜 누가 사준 거야?” 최동림은 두 손으로 게임기를 꼭 쥐었고 손등이 하얗게 질릴 만큼 힘이 들어가 있었다.그는 고개를 떨군 채 한참 말이 없다가 결국 나직하게 중얼거렸다. “설윤... 아줌마가 줬어.”“설윤... 아줌마?” 임연지는 말도 안 된다는 듯 헛웃음을 흘리더니 이내 눈을 부릅뜨고 목소리를 높였다. “너 지금 그 여자를 아줌마라고 불러? 이렇게 비싼 걸 받았다고? 동림아, 설윤이 어떤 여자인지는 알고 있는 거야?”갑작스러운 고함에 최동림은 깜짝 놀라 뒷걸음질 쳤다.“설... 설윤 아줌마는 착한 사람이야. 그냥...” “착하다고?”임연지는 분노에 찬 얼굴로 코웃음을 쳤다.“그렇게 착한 여자가 남의 가정을 깨뜨리냐? 넌 그런 사람한테 선물 받으면서 고맙다고 하는 거야?”그녀는 그대로 손을 뻗어 최동림의 품에 있던 게임기를 낚아채더니 바닥에 내리꽂았다.“쾅!”새 게임기는 바닥에 떨어지며 산산조각 났다. 화면은 깨지고 기계 외관도 부서져 부품이 여기저기 흩어졌다.최동림은 멍하니 그 광경을 바라보다 곧장 무릎을 꿇고 깨진 게임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