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AZER LOGIN후부 사랑채 회랑에서 예령은 무겸과 마주쳤다.그는 진북후의 처소에서 막 나오는 길이었다. 어제의 자색 혼례복 대신 짙은 남색 겉옷 차림이었다. 밤을 새운 탓인지 눈가가 조금 꺼져 있었다. 그녀를 알아본 그가 걸음을 멈췄다.“부인.”밝은 낮에 듣는 그 호칭은 어젯밤과 또 달랐다. 예령은 허리를 숙여 예를 갖췄다.“곽진에게 이야기는 들었습니다. 그 하녀의 일도, 무천 공자의 일도.”“내가 직접 전했어야 했는데, 곽진의 입으로 먼저 듣게 해서 미안하오.”“공자님께서는 그 자백을 처음부터 끝까지 혼자 들으셨다지요.”무겸이 그녀를 보았다. 무언가 말하려다 그만두는 얼굴이었다.두 사람 사이에 짧은 침묵이 흘렀다. 어젯밤 신방에서 오간 말들이 그 침묵 속에 가만히 가라앉아 있었다. 누구도 먼저 꺼내지 않았다.예령은 소매에서 작은 보자기를 꺼냈다. 약과 몇 개와 떡 한 조각이 싸여 있었다.“연화가 챙겨 준 것입니다. 아침을 거르셨다기에.”무겸이 보자기를 내려다보았다.“곽진이 말했소?”“아침은 거르지 말라 하신 분이 거르셨다고요.”그의 입가가 아주 조금 풀렸다. 그는 보자기를 받아 소매에 넣었다.“연화에게 고맙다고 전해 주시오.”“그러겠습니다.”연화가 싼 게 아니라는 것을 그가 알아챘는지는 알 수 없었다. 예령은 먼저 걸음을 옮겼다.사랑채 대청에는 진북후가 앉아 있었다. 무겸과 예령이 한쪽에 자리를 잡자, 하인 둘이 무천을 데려왔다. 포박은 하지 않았지만 양옆에서 팔을 붙들고 있었다.무천은 대청 한가운데 서서 먼저 예령을 보았다. 어제 혼례복을 입었던 여인이 오늘은 형의 곁에 앉아 있었다.진북후가 입을 열었다.“별원에서 형을 함정에 빠뜨리려 했고, 혼례날 사람을 들여 신부에게 칼을 들이밀었다. 조씨의 몸종을 부려 형의 처소를 엿보게 했고, 그 이야기를 병부에 흘렸다.”한 마디 한 마디가 대청 바닥을 치듯 떨어졌다.“칼을 든 자는 끝내 입을 열지 않았다. 하나 조씨의 몸종은 전부 털어놓았다. 그 끝에 네 이름이 있었다.”“아니라고 할
예령이 눈을 뜬 것은 창호지가 희게 밝아 온 뒤였다. 밤새 켜 두었던 초는 다 타서 촛농만 남아 있었다.잠깐 동안 여기가 어디인지 몰랐다. 낯선 천장, 낯선 이부자리. 그러다 어젯밤 일이 한꺼번에 떠올랐다. 부채를 내리던 순간 굳어 버리던 얼굴, 귀 끝까지 붉어지던 모습, 문고리를 쥔 채 한참을 망설이던 등. 그리고 잘 자라는 인사 끝에 붙은 부인이라는 말.예령은 이불을 끌어 올려 얼굴을 묻었다. 아침부터 뺨이 뜨거웠다.“아가씨, 일어나셨습니까?”연화가 세숫물을 들고 들어왔다. 입가에 웃음을 잔뜩 머금은 얼굴이었다.“큰공자님께서는 동트기 전에 후부로 나가셨습니다. 후작께서 급히 사람을 보내셨답니다. 어제 그 열쇠 일 때문이라고요.”“그렇게 이른 시각에?”“예. 나가시면서 이걸 서실에 두셨습니다.”연화가 접힌 쪽지를 내밀었다. 급히 쓴 듯 먹이 번진 글씨였다.‘후부에서 급히 부르셔서 먼저 나가오. 아침은 거르지 마시오. 오후에 뵙겠소.’짧았다. 두 장짜리 서신을 쓰던 사람이 쓴 것이라기엔 너무 짧았다. 그런데 마지막 줄 앞에서, 붓이 한 번 멈췄다 간 자국이 보였다. 무언가 더 쓰려다 만 것 같았다.예령은 저도 모르게 웃었다. 아침은 거르지 말라니. 제가 아이도 아닌데.쪽지를 들고 서실로 가는 길에, 회랑 건너편 방 앞을 지났다. 문이 반쯤 열려 있었다. 방 안의 이부자리는 한 번도 펴지 않은 듯 반듯하게 개어져 있었다. 밤새 불만 켜 두고 앉아 있었던 모양이었다.예령은 문틈에서 얼른 눈을 떼고 걸음을 옮겼다.서실 창 너머로 뒤뜰의 매화나무가 보였다. 아직 꽃은커녕 잎도 없는 가지였다. 내년 봄에야 꽃이 필 거라던 나무였다. 책장 둘째 칸에는 벌써 종이가 세 장이었다. 그가 받은 그녀의 서신, 그녀가 받은 그의 두 장짜리 서신, 그리고 방금 받은 이 쪽지.예령은 쪽지를 꽂다 말고 손을 멈췄다.혼담이 오간 지 두 달이 채 되지 않았다. 그 사이 그녀는 이 사람의 서신을 기다리게 되었고, 그의 귀가 붉어지는 것을 알아보게 되었고, 어젯
의식이 끝난 것은 밤이 깊어서였다.붙잡힌 두 사내는 곽진이 후부 지하로 데려갔다. 칼을 든 자는 입을 다물었고, 열쇠를 지녔던 자는 누구에게서 받았는지 끝내 말하지 않았다. 열쇠에 관해서는 진북후가 직접 하인들을 불러 캐묻겠다고 했다. 무겸은 그 자리에 남으려 했지만, 진북후가 손을 내저었다.“신랑이 신방을 비우면 그것이야말로 저들이 바라는 일이다. 가거라.”성 동쪽 집으로 가는 마차 안에서 두 사람은 나란히 앉아 한동안 말이 없었다. 부채를 쥔 예령의 손 위로, 무겸의 손이 한 번 가만히 얹혔다가 떨어졌다.“무섭지 않았소?”“부르는 쪽으로만 가면 된다 하셨으니까요.”무겸은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 창밖을 보는 그의 옆얼굴이 조금 풀렸다.마차가 성 동쪽 집에 닿았을 때, 회랑 끝 등이 환하게 켜져 있었다. 밤새 꺼지지 않게 기름을 넉넉히 채워 두라 일렀다던, 서신 속 그 등이었다. 서실 창 너머 뒤뜰에는 옮겨 심은 매화나무가 달빛 속에 가지만 앙상하게 서 있었다.안채 신방에는 붉은 초 두 자루가 타고 있었다. 예령은 연화의 손을 빌려 머리에 꽂았던 장식을 하나씩 내리고, 백옥 비녀 하나만 남긴 채 단장을 가볍게 했다. 그러고는 다시 부채를 들어 얼굴을 가렸다. 이제 남은 것은 하나였다.연화가 물러가며 문을 닫았다. 닫히는 문틈으로 연화가 꼭 쥔 두 주먹을 흔들어 보이는 것이 보였다. 신방에는 두 사람만 남았다.무겸은 초 곁에 선 채 한동안 말이 없었다. 부채 너머로 그의 자색 소매 끝만 보였다. 촛불이 그의 곧은 콧날과 턱선을 따라 흔들렸다. 낮에 칼을 쳐 내던 사람이라고는 믿기 어려울 만큼, 그는 신방 한가운데서 어쩔 줄 몰라 하는 얼굴이었다. 신랑이 시를 읊어야 신부가 부채를 내리는 것이 각선의 법도였다.“……시는 한 번이면 족할 줄 알았소.”예령은 부채 뒤에서 웃음을 참았다.“대문 앞에서 읊으신 시는 온 골목이 들었습니다. 이번엔 저 하나만 들으면 됩니다.”무겸이 헛기침을 했다. 초 심지가 한 번 튀는 소리가 났다. 이윽고 낮은
진북후부 대청 앞마당에는 이미 붉은 등롱이 줄지어 걸려 있었다. 해가 넘어간 하늘 아래, 등불 빛이 하객들의 얼굴을 붉게 물들였다.가마에서 내린 예령은 부채로 얼굴을 가린 채 걸었다. 발밑에 깔린 붉은 자리를 따라 대청 앞까지. 무겸이 지팡이를 짚고 한 걸음 앞에서 그녀를 이끌었다.부채 가장자리 너머로 마당이 보였다.대청 위에는 진북후가 굳은 얼굴로 앉아 있었다. 동쪽 기둥 곁에는 곽진이, 대문 쪽에는 위량이 서 있었다. 세 걸음 뒤에서 장호의 발소리가 따라왔다. 전날 밤 들은 그대로였다.그리고 하객들 사이, 서쪽 줄 끝에 낯선 얼굴 둘이 나란히 서 있었다. 한 사람은 소매 속에 두 손을 모으고 있었고, 다른 한 사람은 자꾸만 회랑 쪽을 흘끔거렸다. 회랑 끝은 새 자물쇠가 걸린 무천의 처소였다.예령은 부채를 쥔 손에 힘을 주었다.“신랑 신부는 마주 서시오.”예관의 목소리가 마당을 울렸다. 무겸이 그녀를 마주 보고 섰다. 부채 한 장을 사이에 두고, 그의 숨소리가 들릴 만큼 가까웠다.“첫 번째 절이오.”두 사람이 천천히 허리를 굽혔다. 붉은 소매와 자색 소매가 동시에 바닥을 쓸었다.허리를 펴는 순간이었다.서쪽 줄의 사내가 소매에서 손을 뺐다. 등불 빛에 칼날이 번쩍였다. 하객 두 줄을 밀치고, 사내가 곧장 신부를 향해 뛰어들었다.“예령!”무겸의 목소리였다. 망설일 틈도 없었다. 예령은 약속대로 그 목소리가 난 쪽으로 몸을 던졌다.무겸의 팔이 그녀의 허리를 낚아채 제 등 뒤로 돌렸다. 그와 동시에 지팡이가 허공을 갈랐다.딱.검은 매가 새겨진 손잡이가 사내의 손목을 정확히 내리쳤다. 칼이 바닥에 떨어져 미끄러졌다. 사내가 손목을 움켜쥐고 비틀거리는 사이, 장호가 뒤에서 덮쳐 그를 바닥에 짓누르고 팔을 등 뒤로 꺾었다.모든 일이 숨 한 번 사이에 끝났다.하객들의 비명이 뒤늦게 터졌다. 사람들이 사방으로 흩어지는 틈에, 회랑 쪽을 보던 두 번째 사내가 몸을 돌려 달렸다. 무천의 처소 쪽이었다.“위량!”대문 곁에 있던 위량이 이미 회
혼례는 해 질 무렵에 치르는 법이었다. 그런데도 서씨 집 안채에는 새벽부터 등불이 켜졌다.연화는 손을 세 번이나 씻고서야 예령의 머리를 빗기 시작했다. 검은 머리를 높이 틀어 올리고, 마지막에 백옥 비녀를 꽂았다. 무겸이 가장 단정하다며 골라 준 그 비녀였다. 짙은 붉은 비단 혼례복 위로 금실 수가 은은하게 빛났다. 소매 안쪽에는 검은 매의 인장을 넣었다. ‘그날 돌려받겠소. 그대와 함께.’ 그 말 때문이었다.“이렇게 고우신 줄은, 저도 오늘 처음 알았습니다.”거울 너머로 그녀를 보던 연화가 목이 메었다. 연지를 엷게 얹은 입술, 붉은 비단빛에 한결 희어진 뺨. 예령은 연화가 건네는 둥근 부채를 받아 들었다. 이제부터는 이 부채로 얼굴을 가려야 했다.해가 서쪽으로 기울 무렵, 대문 밖이 소란스러워졌다.“오셨습니다! 영친 행렬이요!”하녀가 숨을 헐떡이며 달려왔다. 신랑이 몸소 신부를 데리러 오는 날이었다. 예령은 부채를 쥔 손에 힘을 주었다.대문 앞 골목은 구경꾼으로 가득 찼다. 서씨 상단의 행수와 일꾼들까지 몰려나와 담장 위로 목을 뺐다. 붉은 비단을 두른 수레와 등롱을 든 하인들 맨 앞에, 흰 말 한 필이 서 있었다.말 위에 무겸이 있었다.짙은 자색 혼례복이 석양을 받아 검붉게 타올랐다. 넓은 어깨와 곧은 허리, 고삐를 쥔 손까지 흐트러진 데가 없었다. 안장 옆에는 검은 매가 새겨진 지팡이가 매달려 있었다.“큰공자가 말을 탔네?”“곽진이란 자가 부축해서 겨우 올렸다던데.”“그래도 저리 앉으니 장수는 장수로구먼.”구경꾼들의 수군거림에 예령은 부채 뒤에서 웃음을 삼켰다. 부축을 받아야만 말에 오르는 척했을 그의 모습이 눈에 선했다. 어젯밤 골목 끝까지 스무 걸음을 곧게 걸어오던 사람이었다.무겸이 대문 앞에 말을 세웠다. 이제 신랑이 해야 할 일이 남아 있었다. 신부가 나오도록 재촉하는 시를 읊는 일이었다.행렬 뒤쪽에서 곽진이 헛기침을 했다. 하인들이 저마다 웃음을 참는 얼굴이었다. 서신 한 장에 종이 네 장을 구겼다는 이야기가 그새
혼례 전날 밤, 서씨 집은 초저녁부터 불이 꺼졌다. 신부가 잠을 설치면 안 된다는 서문백의 당부 때문이었다. 예령의 방 한쪽에는 내일 입을 붉은 혼례복이 횃대에 걸려 있었고, 머리맡 함에는 백옥 비녀와 검은 매의 인장이 나란히 들어 있었다. 눕는다고 잠이 올 것 같지 않았다.“아가씨, 큰공자님께서 뒤뜰 쪽문 밖에 오셨습니다. 망은 제가 보겠습니다.”연화가 문틈으로 속삭였다. 예령은 겉옷을 걸치고 소리 없이 방을 나섰다.쪽문 너머 골목에 무겸이 서 있었다. 검은 도포에 달빛이 희게 내려앉아, 곧은 콧날과 턱선이 칼로 그은 듯 또렷했다. 혼례 전날 신랑과 신부는 한 문 안에 드는 법이 아니라며, 그는 문턱 바깥에서 걸음을 멈췄다.“답장은 받았소. 많이 길어졌다더니 한 줄이더군.”“나머지는 직접 말씀드리려 했습니다.”“그 전에 내가 먼저 하겠소. 오늘 하기로 했으니.”무겸이 지팡이를 담장에 기대 세웠다. 검은 매가 새겨진 손잡이가 달빛에 번들거렸다.“외상을 갚으러 왔소.”그가 돌아서서 걷기 시작했다. 지팡이 없이, 골목 끝 우물가까지 스무 걸음 남짓. 돌아올 때는 조금 더 빨랐다. 흙바닥을 딛는 발소리가 고르게 이어졌고, 어느 쪽으로도 기울지 않았다. 삼 년 동안 황도 사람들이 한 번도 보지 못한 걸음이었다.예령은 전생의 혼례 날을 떠올렸다. 무천의 신부로 선 그녀는 하객들 사이에서 지팡이를 짚은 그를 멀리서 보았다. 사람들 눈이 닿지 않을 때면 그는 다리를 거의 끌지 않았다. 그때는 그 의미를 몰랐다.“다 나으셨군요.”“놀라지 않는군.”“폐사에서 저를 불상 뒤로 끌어당기던 손이 너무 빨랐습니다. 그날부터 짐작만 했지요.”무겸이 소리 없이 웃었다. 그날 이미 들켰다는 것을 그도 처음 안 얼굴이었다.“알면서 한 번을 묻지 않았군.”“말씀하실 때를 기다렸습니다. 언제부터 걸으셨습니까?”“말에 깔려 정강이뼈가 두 군데 부러졌소. 의원은 다시는 제대로 못 걸을 거라 했고, 일 년 가까이 방 밖에도 못 나갔지. 그 뒤로는 밤마다 별당 기둥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