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GIN한무천을 위해 가문도 재산도 바쳤지만, 그는 다른 여인들을 탐하다 예령의 가문을 멸하고 그녀마저 죽였다. 혼인 두 달 전으로 돌아온 예령은 복수를 위해 그의 형 한무겸과 계약혼인을 맺는다. “삼 년 뒤에는 깨끗이 헤어지는 겁니다.” 그러나 무겸은 그녀의 허리를 끌어안으며 낮게 웃었다. “계약은 그대가 정했지만, 부부 사이의 거리는 내가 정하겠소.” 자신을 버릴 리 없다던 무천은 예령이 형의 여자가 된 뒤에야 무너진다. 하지만 너무 늦었다. 이번 생의 예령은 그가 아닌, 그의 형을 선택했으니까.
View More12화. 감춘 손목다음 날 정오가 가까워질 무렵, 무겸의 마차가 서씨 상단 앞에 멈췄다.그가 온다는 사실을 알고 있던 예령은 본점 이층의 작은 응접실을 비워 두었다. 사람들이 오가는 저택보다 상단에서 만나는 편이 눈에 덜 띌 것이라 판단했다.그러나 검은 옷을 입은 무겸이 지팡이를 짚고 안으로 들어서자 상인들의 시선이 일제히 그에게 쏠렸다.진북후부의 장남이 서씨 상단에 찾아왔다는 사실보다, 예령과 혼인을 약조한 사내가 직접 찾아왔다는 사실에 더 관심이 많은 눈치였다.예령은 창밖을 내려다보다 휘장을 내렸다.“눈에 띄지 않으려 이곳에서 뵙자고 했는데 소용없게 됐군요.”“내가 온다는 사실을 알고도 상단으로 나오지 않았소?”무겸이 맞은편에 앉으며 말했다.“그렇다면 그대도 숨길 생각은 없었던 것 같은데.”“피하지 않겠다는 것과 구경거리가 되고 싶다는 건 다른 일입니다.”“곧 익숙해져야 할 것이오.”예령이 차를 따르던 손을 멈췄다.“무엇에 말입니까?”“사람들이 그대와 나를 함께 묶어 이야기하는 것에.”무겸은 아무렇지 않게 대답했지만 예령은 곧바로 말을 잇지 못했다.둘의 혼인은 서로 필요한 것을 얻기 위한 약조였다. 그런데 그의 입에서 당연하다는 듯 두 사람을 한데 묶는 말이 나오자 묘한 기분이 들었다.예령은 찻잔을 그에게 밀어 주며 화제를 돌렸다.“확인할 것이 있다고 하셨지요.”무겸은 차를 마시지 않았다.그의 시선이 예령의 얼굴에서 천천히 아래로 내려갔다. 예령은 소매 속에 감춰 둔 손을 자신도 모르게 뒤로 물렸다.“손을 내놓으시오.”“갑자기 무슨 말씀이십니까?”“왼손.”예령의 눈빛이 가늘어졌다.멍은 소매 안쪽에 가려져 있었다. 연화와 아버지, 함께 갔던 호위들이 아니면 알 수 없는 일이었다.“어떻게 아셨습니까?”“무엇을 말이오?”“제 손목이 다쳤다는 사실 말입니다.”무겸의 표정에는 변화가 없었다.“다쳤다고 말한 적은 없소.”예령은 그가 자신을 떠본 것임을 뒤늦게 깨달았다.무겸의 입가에 희미한 웃음이 스쳤다.“감
11화. 존재하지 않는 상단최만석이 무천의 처소를 찾은 것은 다음 날 해가 기울 무렵이었다.방 안에는 새 거울이 놓여 있었고, 향로에서는 평소보다 짙은 향이 피어올랐다. 최만석은 무천의 손등에 남은 상처를 발견했지만 아무것도 묻지 않았다.오랫동안 남의 비밀을 팔아 살아온 사람은 궁금한 것이 있어도 함부로 입 밖에 내지 않았다.“찾으셨습니까, 공자님.”최만석이 허리를 깊이 숙였다.무천은 앉으라는 말도 없이 탁자 위에 은자 주머니를 던졌다.“서씨 상단에 거래를 넣어라.”“물건을 사시려는 겁니까, 파시려는 겁니까?”“어느 쪽이든 상관없다.”최만석이 눈을 가늘게 떴다.“그렇다면 거래 자체가 목적은 아니시군요.”무천은 대답하지 않았다.최만석이 주머니를 들어 무게를 가늠했다. 상당한 은자가 들어 있었지만, 곧바로 소매에 넣지는 않았다. 돈이 많은 의뢰일수록 뒤에 감춰진 위험도 컸다.“누구를 불러내면 됩니까?”“서예령이다.”“서씨 상단의 아가씨 말씀이십니까?”“그렇다.”“그분을 만나려는 것이라면 직접 서신을 보내시는 편이 빠를 텐데요.”무천의 눈빛이 서늘해졌다.“그랬다면 너를 부르지 않았겠지.”최만석은 더 묻지 않았다.서예령과 무천의 파혼 이야기는 이미 황도에 조금씩 퍼지고 있었다. 무천이 서씨 상단에서 가져간 물건값을 갚으라는 요구를 받았다는 소문도 들었다.자신을 만나 주지 않는 여인을 거래로 끌어내려는 것이라면, 실패했을 때 모든 책임을 떠안을 사람까지 필요하다는 뜻이었다.“작은 거래로는 움직이지 않을 겁니다.”최만석이 말했다.“서씨 상단은 황도에서도 손에 꼽히는 곳입니다. 비단 몇 필이나 약재 몇 상자로 아가씨가 직접 나오지는 않겠지요.”“그래서 큰 거래를 만들라고 한 거다.”“큰 거래에는 큰돈이 필요합니다.”“얼마면 되지?”무천이 망설임 없이 묻자 최만석의 시선이 달라졌다.“거래가 진짜처럼 보이려면 물건과 창고, 어음이 있어야 합니다. 상단의 인장도 필요하고, 과거에 다른 곳과 거래한 기록까지 있어야 하지요.
10화. 스스로 오게 만들어예령이 저택에 돌아왔을 때는 밤이 깊어 있었다.대문 앞에는 등불 여러 개가 밝혀져 있었고, 서문백이 직접 마당에 나와 기다리고 있었다.마차가 멈추자마자 그가 계단을 내려왔다.“어찌 이리 늦었느냐?”“병영에서 이야기가 길어졌습니다.”“다친 곳은 없고?”예령은 괜찮다고 대답하려 했지만, 마차에서 내리는 연화의 표정이 먼저 굳었다. 서문백의 시선이 예령의 손목으로 향했다.소매 아래로 검붉은 멍이 드러나 있었다.“이게 어찌 된 일이냐?”예령이 손목을 감추기도 전에 서문백이 다가왔다.“오는 길에 한무천 공자가 마차를 막았습니다.”결국 연화가 먼저 털어놓았다.“아가씨를 억지로 데려가려고 했어요.”서문백의 얼굴이 굳었다.예령은 그를 안으로 모신 뒤 길에서 있었던 일을 설명했다. 무천이 자신을 밤새 붙잡아 두고 소문을 퍼뜨리려 했다는 말까지 듣자 서문백의 손이 떨렸다.“그자가 감히…….”“실패했습니다. 당분간은 다시 움직이지 못할 겁니다.”“어찌 벗어났느냐?”예령은 잠시 대답하지 못했다.“누군가 도와주었습니다.”“누구냐?”“저도 모릅니다.”이름도 밝히지 않고 흔적 없이 사라진 사내였다. 무겸이 보낸 사람일 가능성이 가장 컸지만, 확인하지 않은 일을 사실처럼 말할 수는 없었다.서문백은 곧바로 호위를 늘리라고 명했다.“앞으로는 네가 어디를 가든 최소 열 명을 붙이겠다.”“호위가 너무 많으면 오히려 눈에 띕니다.”“오늘 같은 일을 겪고도 그런 말이 나오느냐?”“오늘은 제가 경솔했습니다.”예령은 순순히 잘못을 인정했다. 전생의 기억만 믿고 지금의 무천을 지나치게 얕본 것은 사실이었다.자신이 파혼을 요구하면 무천은 서씨 상단의 재물을 놓치지 않으려 할 것이라고만 생각했다. 그러나 무겸과 혼인하겠다는 말이 그의 자존심을 자극한 뒤부터는 행동이 달라졌다.무천은 이제 손익을 따지지 않았다.자신을 되찾는 일에 집착하고 있었다.“앞으로는 혼자 판단하지 않겠습니다.”예령의 대답을 들은 뒤에야 서문백은 조금
9화. 모르는 척검은 무복의 사내가 사라진 뒤에도 예령은 한동안 빈 길을 바라보았다.사람이 그렇게 흔적도 없이 사라질 수 있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았다.“아가씨, 괜찮으세요?”연화가 달려와 예령의 손목을 살폈다. 무천에게 붙잡혔던 자리에 붉은 자국이 선명했다.“괜찮아.”“그냥 저택으로 돌아가요. 또 무슨 일이 생길지 모르잖아요.”호위들도 같은 표정이었다. 무천의 수하들에게 제압당한 것이 수치스러운 듯 고개를 들지 못했다.그러나 예령은 돌아갈 수 없었다.무천이 자신을 데려가지 못했으니 조씨는 곧 다른 방법을 쓸 것이다. 진북후에게 파혼서를 전하는 일이 늦어질수록 불리해졌다.“병영으로 간다.”“하지만 아가씨…….”“저들이 다시 돌아오지는 못할 거야.”무천의 얼굴에 떠올랐던 공포는 거짓이 아니었다. 적어도 오늘은 움직이지 못할 것이다.예령은 바닥에 떨어진 비녀를 주워 들었다. 끝에 묻은 피를 닦아 소매 안에 넣은 뒤 마차에 올랐다.길을 다시 출발한 뒤에도 정체를 알 수 없는 사내의 모습이 머릿속에서 떠나지 않았다.우연히 지나던 무인이었다면 무천을 쫓아낸 뒤 사례를 요구했을 것이다. 처음부터 자신을 지켜보던 사람이라면 누구의 명을 받았는지가 문제였다.떠오르는 사람은 한 명뿐이었다.하지만 증거는 없었다.예령은 섣불리 결론짓지 않기로 했다.황도 외곽의 병영에 도착했을 때는 해가 서쪽으로 기울기 시작한 뒤였다.병사들은 갑작스럽게 찾아온 귀족가의 여인을 경계했다. 예령이 서씨 상단의 인장을 내보이자 그제야 안으로 들어가 확인했다.잠시 후 체격이 다부진 중년의 사내가 막사에서 나왔다. 왼쪽 눈썹에서 뺨까지 길게 이어진 흉터가 있었다.북방에서 군량을 관리했던 유강이었다.“서 대인의 따님이시오?”“예. 갑작스럽게 찾아와 죄송합니다.”유강은 예령과 망가진 호위들의 옷차림을 훑어보았다.“오는 길이 편하지 않았던 모양이군.”“그래도 반드시 전해야 할 것이 있어 왔습니다.”예령은 봉인된 파혼서를 내밀었다.“진북후께 직접 전달해 주십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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