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 생은 그의 형을 선택했다

이번 생은 그의 형을 선택했다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9-08
By:  아람Updated just now
Language: Korea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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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무천을 위해 가문도 재산도 바쳤지만, 그는 다른 여인들을 탐하다 예령의 가문을 멸하고 그녀마저 죽였다. 혼인 두 달 전으로 돌아온 예령은 복수를 위해 그의 형 한무겸과 계약혼인을 맺는다. “삼 년 뒤에는 깨끗이 헤어지는 겁니다.” 그러나 무겸은 그녀의 허리를 끌어안으며 낮게 웃었다. “계약은 그대가 정했지만, 부부 사이의 거리는 내가 정하겠소.” 자신을 버릴 리 없다던 무천은 예령이 형의 여자가 된 뒤에야 무너진다. 하지만 너무 늦었다. 이번 생의 예령은 그가 아닌, 그의 형을 선택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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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은 아내가 돌아왔다
1화. 죽은 아내가 돌아왔다서예령이 죽던 날, 한무천은 다른 여인의 처소에 있었다.그 여인은 이제 막 그의 아이를 가졌고, 진북후부에서는 오랜 경사라도 맞은 듯 값비싼 약재와 비단을 아낌없이 들여보냈다.삼 년 동안 이름뿐인 아내로 살았던 예령에게는 단 한 번도 내어 주지 않았던 것들이었다.예령은 차가운 감옥 벽에 기대어 앉아 천천히 눈을 감았다. 바깥에서 들려오는 소리는 멀었고, 숨을 들이쉴 때마다 가슴 안쪽이 날카롭게 갈라졌다.열두 살에 처음 마음을 주었다.열여덟에는 아버지의 반대를 무릅쓰고 그의 아내가 되었다.그리고 스물하나가 된 지금, 예령은 자신이 사랑한 남자의 손에 죽을 날만 기다리고 있었다.한무천과 혼인한 첫날부터 부부 사이에는 아무 일도 없었다. 그는 전장에서 입은 내상이 낫지 않았다는 말로 합방을 피했고, 예령은 그의 자존심을 지켜 주기 위해 누구에게도 그 사실을 말하지 않았다.시어머니가 후사를 낳지 못한다며 그녀를 몰아세울 때도, 의원과 약재를 구해 오라며 친정에 손을 벌릴 때도 예령은 묵묵히 감당했다.남편이 아픈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게 된 것은 혼인한 지 일 년이 지난 뒤였다.그는 여색을 즐겼다. 권세가의 딸부터 기방의 여인까지 상대를 가리지 않았고, 은밀한 만남이 필요할 때마다 예령의 이름과 재물을 이용했다.그 사실을 알고도 예령은 떠나지 못했다.어릴 때부터 품어 온 마음이 너무 길었고, 자신이 선택한 혼인이 잘못되었다는 것을 인정하기가 두려웠다. 무엇보다 조금만 더 기다리면 그도 언젠가는 자신을 돌아봐 줄 것이라고 믿었다.그 어리석은 믿음이 서씨 가문을 무너뜨렸다.한무천은 예령이 건네준 상단의 장부와 인장을 이용해 금지된 물품을 거래했고, 일이 드러나자 모든 죄를 서씨 가문에 뒤집어씌웠다. 아버지는 역모를 꾸몄다는 누명을 쓴 채 끌려갔고, 평생 일군 상단과 재산은 진북후부의 손으로 넘어갔다.그리고 마지막 증인인 예령은 이곳에 갇혔다.쇠문이 열리는 소리에 예령이 눈을 떴다.한무천이 감옥 안으로 들어왔다.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9-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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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의 형
2화. 그의 형“혼인을 깨겠다고?”서문백의 목소리가 넓은 집무실을 울렸다.예령은 아버지 맞은편에 앉아 찻잔을 내려다보았다. 새벽부터 몇 번이나 같은 말을 설명했지만, 아버지의 얼굴에는 여전히 믿을 수 없다는 기색이 역력했다.그럴 만도 했다.한무천과 혼인하겠다며 몇 년 동안 아버지를 설득한 사람이 바로 자신이었다. 진북후부의 사정이 어렵다는 말에도, 한무천이 허영심만 강하고 책임감이 부족하다는 경고에도 귀를 닫았다.그런 딸이 혼례를 두 달 앞두고 갑자기 혼인을 깨겠다고 나섰으니, 누구라도 의심할 수밖에 없었다.“예. 파혼하겠습니다.”“무천과 다투기라도 한 것이냐?”“아닙니다.”“그 집안에서 너를 홀대했느냐?”“아직 시집도 가지 않았는데 어떻게 홀대를 받겠습니까.”“그렇다면 이유가 무엇이냐?”예령은 곧바로 대답하지 못했다.전생의 일을 그대로 말할 수는 없었다. 앞으로 한무천이 서씨 상단의 재산을 빼돌리고, 가문을 역모에 끌어들여 모두를 죽게 할 것이라고 말한다면 아버지조차 믿지 않을 것이다.그렇다고 어린 시절의 마음이 갑자기 식었다는 말로 넘길 수도 없었다.예령은 준비해 둔 장부 한 권을 아버지 앞으로 밀었다.“한무천이 지난달 서씨 상단의 이름으로 돈을 빌렸습니다.”서문백의 눈빛이 단숨에 달라졌다.그는 장부를 펼쳐 몇 장 넘기다가 미간을 좁혔다. 황도에서 값비싼 비단과 보석을 취급하는 상점들의 이름이 적혀 있었고, 그 아래에는 한무천이 외상으로 가져간 물품과 금액이 빠짐없이 기록돼 있었다.“이게 사실이냐?”“상점 세 곳에 사람을 보내 확인했습니다.”“우리 상단의 이름을 누가 쓰도록 허락했지?”“제가 했습니다.”예령은 담담히 인정했다.“한 달 전 무천이 급하게 쓸 곳이 있다며 부탁했고, 저는 이유도 묻지 않은 채 인장을 빌려주었습니다.”전생의 자신은 물품의 행방을 확인하지 않았다. 무천이 진북후부의 사정 때문에 체면을 세워야 한다고 하자, 오히려 돈이 부족할까 걱정하며 더 가져다주었다.그러나 그 보석들은 진북후부로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9-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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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심스러운 동맹
3화. 의심스러운 동맹약속한 시각이 가까워질수록 비가 거세졌다.예령은 연화와 호위 한 명만 데리고 황도 외곽의 폐사로 향했다. 오래전 화재로 승려들이 떠난 곳이라 인적이 드물었고, 진북후부와 서씨 가문 어느 쪽의 눈도 피하기에 적당했다.“정말 혼자 들어가시려고요?”연화가 젖은 처마 아래에서 불안한 표정으로 물었다.“상대도 혼자 오라고 했으니까.”“그래도 한무천 공자의 형님이잖아요. 무슨 일을 당하실 줄 알고…….”“나를 해칠 생각이었다면 나오지도 않았겠지.”예령은 연화와 호위에게 밖에서 기다리라고 한 뒤 법당 안으로 들어갔다.희미한 등불 아래, 검은 옷을 입은 남자가 무너진 불상 앞에 서 있었다. 한쪽 손으로 지팡이를 짚은 채 비스듬히 기운 모습은 소문대로 다리가 불편한 사람처럼 보였다.한무겸이었다.전생의 혼례 날 멀리서 보았던 것보다 훨씬 크고 날카로운 인상이었다. 창백한 얼굴 때문에 병약하다는 소문이 그럴듯하게 느껴졌으나, 예령을 살피는 눈빛만은 조금도 흐리지 않았다.“생각보다 대담하군.”무겸이 먼저 입을 열었다.“혼인을 앞둔 여인이 밤중에 예비 시아주버니를 불러내다니.”“그 혼인은 곧 깨질 겁니다.”“내 아우도 알고 있소?”“알게 되겠지요.”예령은 젖은 겉옷을 벗어 문가에 걸었다. 무겸의 시선이 잠시 그녀를 따라왔지만, 그는 더 묻지 않고 품에서 서신을 꺼냈다.“후계 자리를 되찾고 싶다면 만나자고 했더군.”“예.”“그대가 내게 그 자리를 줄 수 있소?”“제가 드릴 수 있는 자리는 아닙니다.”“그렇다면 빈말을 적어 보낸 것이오?”“기회는 드릴 수 있습니다.”예령은 준비해 온 장부를 꺼내 낡은 탁자 위에 펼쳤다.“진북후부는 북방 전쟁이 끝난 뒤에도 군비를 줄이지 못했습니다. 황실에서 지원한 군량과 은자는 매년 장부보다 적게 들어오고 있고, 부족한 금액은 서쪽 상단에서 빌리고 있지요.”무겸의 시선이 장부로 향했다.“두 달 뒤에는 첫 번째 빚을 갚아야 합니다. 막지 못하면 북쪽 농지와 병기 창고 일부가 채권자에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9-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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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인을 제안하다
4화. 혼인을 제안하다예령의 등이 무겸의 가슴에 닿았다.허리를 감싼 팔은 단단했고, 젖은 옷 너머로도 손바닥의 열기가 선명하게 전해졌다.“쉿. 조용히.”낮은 목소리가 바로 귓가에 닿았다.곧 법당 문이 열렸다.“이 안에는 아무도 없는 것 같습니다.”“확실히 살펴라. 큰공자께서 별당에 계시지 않는다.”진북후부 사람들의 목소리였다.예령은 숨을 죽였다. 무겸은 그녀의 허리를 감싼 채 미동도 하지 않았다. 좁은 공간이라 조금만 움직여도 몸이 더 깊이 맞닿을 수밖에 없었다.누군가 불상 앞까지 다가왔다.예령의 몸이 굳자 무겸의 다른 손이 올라와 그녀의 입가 가까이에 머물렀다. 손바닥이 입술에 닿지는 않았지만, 손끝이 뺨을 스칠 듯 가까웠다.“여기도 없습니다.”“밖을 찾아보자.”사내들이 법당을 나갔다. 문이 닫힌 뒤에도 무겸은 한동안 예령을 놓아주지 않았다.발소리가 완전히 멀어진 뒤에야 예령이 작게 입을 열었다.“이제 괜찮은 것 같습니다.”“아직이오.”“이미 나갔습니다.”“한 명쯤 남겨 두었을 수 있소.”낮은 속삭임과 함께 그의 숨결이 귀 아래에 닿았다. 예령은 허리에 감긴 팔을 의식하지 않으려 했지만, 등을 통해 전해지는 심장박동까지는 무시하기 어려웠다.그 심장박동은 놀라울 만큼 차분했다.다급하게 자신을 끌어당겼던 사람이라고는 믿기지 않았다. 오히려 가슴이 빠르게 뛰는 쪽은 예령이었다.잠시 후 무겸이 천천히 팔을 풀었다.예령은 곧바로 한 걸음 떨어졌다. 어둠 속이라 달아오른 얼굴을 들키지 않은 것이 다행이었다.무겸은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지팡이를 찾아 다시 몸을 기댔다. 조금 전 예령을 끌어당겼던 빠른 움직임은 흔적조차 남아 있지 않았다.예령은 그의 다리를 바라보다가 시선을 거두었다.아직 확신할 수는 없었다. 하지만 한무겸은 소문처럼 무기력한 사람이 아니었다. 적어도 자신이 가진 패를 모두 드러내지 않고 있다는 것만큼은 분명했다.그렇다면 자신 역시 마지막 패를 꺼내야 했다.“제안을 마저 하겠습니다.”예령은 흐트러진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9-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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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렸다는 증명
5화. 버렸다는 증명다음 날 아침, 한무천이 서씨 저택을 찾아왔다.예령은 비에 젖은 정원을 내려다보다가 연화의 보고를 들었다.“대문 앞에서부터 아가씨를 만나겠다고 소란을 피우고 있어요. 호위들까지 데려왔습니다.”한무천다운 행동이었다. 파혼 이야기를 듣고도 자신의 잘못을 돌아보기보다 예령이 잠시 심술을 부린다고 생각하는 것이다.“사랑채로 안내해.”예령이 사랑채에 들어서자 무천은 주인처럼 상석에 앉아 있었다. 값비싼 비단옷과 허리춤의 옥 장식까지, 지난번과 달라진 것은 없었다.“이제야 얼굴을 보여주는군.”“하실 말씀이 무엇입니까?”예령이 맞은편에 앉지도 않자 무천의 표정이 굳었다.“혼례를 앞둔 여인이 예비 남편을 문전박대해도 된다고 생각하나?”“그 혼인은 하지 않을 겁니다.”“상단의 인장을 돌려받고 싶어서 이러는 것이라면 이미 말했을 텐데. 급하게 쓸 곳이 있었을 뿐이야.”“제 허락 없이 다시 사용하셨습니다.”“곧 부부가 될 사이에 네 것과 내 것이 따로 있나?”전생에도 수없이 들었던 말이었다.무천은 서씨 상단의 돈을 제 것처럼 쓰면서도 예령이 거래 내역을 물으면 부부 사이에 장부를 따지는 여인은 천박하다며 화를 냈다.그 말에 속아 예령은 번번이 눈을 감았다.이번에는 아니었다.“따로 있습니다.”단호한 대답에 무천이 잠시 말을 잃었다.“서씨 상단은 제 아버지가 일군 재산입니다. 공자께서는 그 돈을 쓸 권리가 없습니다.”“공자?”무천이 비웃듯 되물었다.“언제부터 나를 그렇게 불렀지?”예령은 대답하지 않았다.어린 시절부터 그녀는 무천이 화를 내면 먼저 사과했고, 약속을 어겨도 값비싼 선물을 보내 마음을 풀어 주었다. 그는 예령이 영원히 자신을 바라보리라 믿고 있었다.“누가 무슨 말을 했는지는 모르겠지만 그만해라.”무천이 자리에서 일어났다.“혼례를 앞두고 불안해진 것이라면 이해하겠다. 아버지께 파혼 이야기는 실수였다고 말씀드려.”명령에 가까운 말이었다.“실수가 아닙니다.”“예령아.”“공자와 혼인하지 않겠습니다.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9-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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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아갈 길을 끊다
6화. 돌아갈 길을 끊다다음 날 아침, 예령은 연화와 함께 황도의 상점들을 돌았다.무천이 가져간 비단과 보석이 누구에게 넘어갔는지 확인하기 위해서였다. 물건을 되찾는 것만으로는 부족했다. 그가 서씨 상단의 돈으로 누구의 환심을 샀고, 어떤 관계를 만들었는지 알아내야 했다.첫 번째 비단 가게의 주인은 장부를 보여주려 하지 않았다.“한 공자께서 직접 가져가신 물건입니다. 손님의 일을 함부로 말씀드릴 수는 없습니다.”예령은 준비해 온 거래 문서를 탁자 위에 내려놓았다.“대금은 제 이름으로 남아 있습니다.”“그것은 한 공자께서 곧 혼인할 사이이니 괜찮다고 하셔서…….”“그 혼인은 취소될 겁니다.”주인의 얼굴이 굳었다.“대금을 제가 갚아야 한다면 물건이 어디로 갔는지 확인할 권리도 있겠지요. 밝히지 않으시면 제 이름으로 이루어진 거래를 전부 사기로 신고하겠습니다.”그제야 주인이 장부를 꺼냈다.최고급 비단 열 필 가운데 여섯 필은 병부 관리의 집으로 들어갔다. 나머지는 무천과 가까이 지내는 여인 둘에게 보내졌다.두 번째 보석상에서도 사정은 다르지 않았다.비녀 한 쌍은 병부 관리의 부인에게, 옥팔찌는 홍월루의 기녀에게 전달되어 있었다. 선물은 모두 무천의 이름으로 보냈지만 대금만 예령의 앞으로 남았다.전생에 알고 있던 것과 같았다.병부 관리는 훗날 무천에게 군량 장부를 빼돌려 주었다. 예령은 그가 진북후부의 권세를 보고 무천을 도운 줄 알았다.하지만 시작은 자신의 돈으로 산 선물이었다.“아가씨, 물건을 모두 돌려받으실 건가요?”가게를 나온 연화가 물었다.“아니.”“그럼 대금만 받으시려고요?”“그것도 아니야.”예령은 베껴 온 배달 기록을 접었다.“선물을 받은 사람들에게 누구의 돈으로 산 물건인지 알려야지.”무천이 자신의 재력으로 환심을 산 것이 아니라는 사실이 드러나면 그가 쌓아 온 관계에도 금이 갈 것이다.예령은 저택으로 돌아오자마자 서신을 썼다.병부 관리의 부인에게는 정중하게 물건의 반환을 요구했다. 무천이 혼인을 전제로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9-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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빼앗길 수 없는 것
7화. 빼앗길 수 없는 것무겸의 말이 사랑채 안에 무겁게 내려앉았다.무천은 한동안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예령이 파혼하겠다고 했을 때도 남아 있던 비웃음이 얼굴에서 완전히 사라졌다.“형님이 예령과 혼인하겠다고요?”“그렇다.”“말도 안 됩니다.”무천은 탁자 위의 혼인 약조문을 집어 들려 했다. 그러나 무겸이 지팡이 끝으로 종이 위를 눌렀다.무천의 손이 멈췄다.“예령은 저와 혼인하기로 한 여자입니다.”“그녀가 그 혼인을 거절했지.”“잠시 화가 나 고집을 부리는 겁니다. 형님께서 끼어들 일이 아닙니다.”무천은 예령을 돌아보았다.“네가 형님께 무슨 말을 했는지는 모르겠지만 지금 당장 혼인하겠다는 말을 거둬.”여전히 명령하는 말투였다.예령은 무천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았다.“싫습니다.”“예령아.”“제가 먼저 혼인을 청했습니다.”무천의 눈이 가늘어졌다.“거짓말하지 마.”“폐사에서 한무겸 공자를 만나 혼인 약조문을 건넨 사람도 저입니다.”예령이 밤에 저택을 나갔던 이유를 깨달은 무천의 얼굴이 서서히 굳었다.“그날 만난 사람이 형님이었어?”“그렇습니다.”“나를 속이고 둘이 몰래 만났다는 말이냐?”“공자께 알릴 이유가 없었습니다.”무천의 손이 주먹을 쥐었다.예령이 자신을 버릴 수 있다는 사실은 믿지 않으면서도, 그녀가 몰래 무겸을 만났다는 사실은 견디기 어려운 듯했다.“왜 형님이지?”“그 질문에 대답할 의무도 없습니다.”“내가 아니라 형님을 택한 이유를 묻는 거야.”무천의 목소리가 거칠어졌다.“다리를 다쳐 후계 자리에서 밀려난 사람이다. 지금의 형님에게 무엇이 있다고 나를 버리고 그쪽을 택해?”예령의 표정이 차갑게 굳었다.“그런 식으로 형님을 깎아내리면 제가 공자께 돌아갈 것 같습니까?”“나는 진북후부의 후계자가 될 사람이다.”“그래서 저와 혼인하려는 것이겠지요. 서씨 상단의 재물이 있어야 그 자리를 지킬 수 있으니까.”“그만해.”“한무겸 공자께서는 제게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 먼저 물었습니다.”예령의 시선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9-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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흔적도 없이
8화. 흔적도 없이다음 날 아침, 진북후부에서 파혼서를 돌려보냈다.봉인조차 뜯지 않은 채였다.서문백은 되돌아온 서신을 탁자 위에 내려놓았다.“진북후께서 직접 거절하신 것은 아닌 듯하구나.”“조씨 부인이 중간에서 막았겠지요.”조씨에게 이번 파혼은 혼약 하나가 깨지는 일이 아니었다. 예령의 혼수와 서씨 상단의 자금을 모두 잃는 일이었다. 더구나 예령이 무겸과 혼인하면 그 재물이 장남의 힘이 된다.무천을 후계자로 세우려는 조씨가 받아들일 리 없었다.“내가 직접 찾아가 보마.”“지금은 만나 주지 않을 겁니다.”“그렇다고 손을 놓을 수는 없지 않으냐?”예령은 파혼서를 집어 들었다.“진북후께 이 서신부터 전해야 합니다.”전생에도 조씨는 진북후에게 들어가는 서신을 가려 받았다. 무천에게 불리한 소식은 대부분 그의 귀에 들어가지 않았다.“북방에서 군량을 관리했던 장수가 있습니다. 지금은 황도 외곽의 병영에 머물고 있으니, 그분을 통하면 서신을 전할 수 있을 겁니다.”“사람을 보내면 되지 않겠느냐?”“제가 직접 만나 확답을 받겠습니다.”서문백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전날 무천이 보인 태도가 마음에 걸리는 듯했다.예령은 그의 손등 위에 손을 얹었다.“연화와 호위들을 데리고 가겠습니다. 날이 저물기 전에 돌아올게요.”한참 망설이던 서문백이 마침내 허락했다.예령은 정오가 되기 전에 저택을 나섰다.마차에는 연화가 함께 탔고, 호위 두 명이 앞뒤를 지켰다. 예령은 파혼서와 무천이 사용한 재물의 내역을 품에 챙겼다.황도를 벗어나자 길은 빠르게 한산해졌다.간간이 짐수레가 지나갈 뿐, 수상한 기척은 없었다.마차가 야트막한 언덕 아래에 이르렀을 때 앞쪽에서 말 울음소리가 들렸다. 곧 마차가 크게 흔들리며 멈췄다.“밖에 무슨 일이냐?”대답은 돌아오지 않았다.예령이 문을 열기도 전에 문짝이 거칠게 젖혀졌다. 낯선 사내들이 서씨 가문의 호위들을 제압하고 있었다.그 뒤로 무천이 다가왔다.“내려.”“길을 막고 무슨 짓입니까?”“너와 조용히 이야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9-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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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르는 척
9화. 모르는 척검은 무복의 사내가 사라진 뒤에도 예령은 한동안 빈 길을 바라보았다.사람이 그렇게 흔적도 없이 사라질 수 있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았다.“아가씨, 괜찮으세요?”연화가 달려와 예령의 손목을 살폈다. 무천에게 붙잡혔던 자리에 붉은 자국이 선명했다.“괜찮아.”“그냥 저택으로 돌아가요. 또 무슨 일이 생길지 모르잖아요.”호위들도 같은 표정이었다. 무천의 수하들에게 제압당한 것이 수치스러운 듯 고개를 들지 못했다.그러나 예령은 돌아갈 수 없었다.무천이 자신을 데려가지 못했으니 조씨는 곧 다른 방법을 쓸 것이다. 진북후에게 파혼서를 전하는 일이 늦어질수록 불리해졌다.“병영으로 간다.”“하지만 아가씨…….”“저들이 다시 돌아오지는 못할 거야.”무천의 얼굴에 떠올랐던 공포는 거짓이 아니었다. 적어도 오늘은 움직이지 못할 것이다.예령은 바닥에 떨어진 비녀를 주워 들었다. 끝에 묻은 피를 닦아 소매 안에 넣은 뒤 마차에 올랐다.길을 다시 출발한 뒤에도 정체를 알 수 없는 사내의 모습이 머릿속에서 떠나지 않았다.우연히 지나던 무인이었다면 무천을 쫓아낸 뒤 사례를 요구했을 것이다. 처음부터 자신을 지켜보던 사람이라면 누구의 명을 받았는지가 문제였다.떠오르는 사람은 한 명뿐이었다.하지만 증거는 없었다.예령은 섣불리 결론짓지 않기로 했다.황도 외곽의 병영에 도착했을 때는 해가 서쪽으로 기울기 시작한 뒤였다.병사들은 갑작스럽게 찾아온 귀족가의 여인을 경계했다. 예령이 서씨 상단의 인장을 내보이자 그제야 안으로 들어가 확인했다.잠시 후 체격이 다부진 중년의 사내가 막사에서 나왔다. 왼쪽 눈썹에서 뺨까지 길게 이어진 흉터가 있었다.북방에서 군량을 관리했던 유강이었다.“서 대인의 따님이시오?”“예. 갑작스럽게 찾아와 죄송합니다.”유강은 예령과 망가진 호위들의 옷차림을 훑어보았다.“오는 길이 편하지 않았던 모양이군.”“그래도 반드시 전해야 할 것이 있어 왔습니다.”예령은 봉인된 파혼서를 내밀었다.“진북후께 직접 전달해 주십시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9-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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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스로 오게 만들어
10화. 스스로 오게 만들어예령이 저택에 돌아왔을 때는 밤이 깊어 있었다.대문 앞에는 등불 여러 개가 밝혀져 있었고, 서문백이 직접 마당에 나와 기다리고 있었다.마차가 멈추자마자 그가 계단을 내려왔다.“어찌 이리 늦었느냐?”“병영에서 이야기가 길어졌습니다.”“다친 곳은 없고?”예령은 괜찮다고 대답하려 했지만, 마차에서 내리는 연화의 표정이 먼저 굳었다. 서문백의 시선이 예령의 손목으로 향했다.소매 아래로 검붉은 멍이 드러나 있었다.“이게 어찌 된 일이냐?”예령이 손목을 감추기도 전에 서문백이 다가왔다.“오는 길에 한무천 공자가 마차를 막았습니다.”결국 연화가 먼저 털어놓았다.“아가씨를 억지로 데려가려고 했어요.”서문백의 얼굴이 굳었다.예령은 그를 안으로 모신 뒤 길에서 있었던 일을 설명했다. 무천이 자신을 밤새 붙잡아 두고 소문을 퍼뜨리려 했다는 말까지 듣자 서문백의 손이 떨렸다.“그자가 감히…….”“실패했습니다. 당분간은 다시 움직이지 못할 겁니다.”“어찌 벗어났느냐?”예령은 잠시 대답하지 못했다.“누군가 도와주었습니다.”“누구냐?”“저도 모릅니다.”이름도 밝히지 않고 흔적 없이 사라진 사내였다. 무겸이 보낸 사람일 가능성이 가장 컸지만, 확인하지 않은 일을 사실처럼 말할 수는 없었다.서문백은 곧바로 호위를 늘리라고 명했다.“앞으로는 네가 어디를 가든 최소 열 명을 붙이겠다.”“호위가 너무 많으면 오히려 눈에 띕니다.”“오늘 같은 일을 겪고도 그런 말이 나오느냐?”“오늘은 제가 경솔했습니다.”예령은 순순히 잘못을 인정했다. 전생의 기억만 믿고 지금의 무천을 지나치게 얕본 것은 사실이었다.자신이 파혼을 요구하면 무천은 서씨 상단의 재물을 놓치지 않으려 할 것이라고만 생각했다. 그러나 무겸과 혼인하겠다는 말이 그의 자존심을 자극한 뒤부터는 행동이 달라졌다.무천은 이제 손익을 따지지 않았다.자신을 되찾는 일에 집착하고 있었다.“앞으로는 혼자 판단하지 않겠습니다.”예령의 대답을 들은 뒤에야 서문백은 조금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9-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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