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g-log in여기까지 함께 달려와 주신 독자님들, 정말 감사합니다. 예령이 전생의 악연을 끊어 내는 과정이 조금 길고 복잡하게 느껴지셨을 것 같아요. 그만큼 이번 생의 예령이 스스로의 힘으로 길을 여는 모습을 제대로 보여 드리고 싶었습니다. 이제 무겸과 예령, 두 사람의 거리가 본격적으로 가까워지기 시작합니다. 함께 입을 혼례복을 고르고, 함께 살 집을 둘러보는 날들이 곧 찾아와요. 조금만 더 두 사람 곁에 머물러 주세요.
그날 밤 무겸은 방에 있었다.누운 뒤로 한참 뒤척이는 기척이 났고, 이불이 들렸다가 도로 덮였다. 예령은 자는 척을 했다. 깨어 있다고 하면 그가 또 일어날 것 같았다.새벽에 눈을 떴을 때 그는 천장을 보고 있었다.“……장군.”“더 자시오.”“몇 시진이나 깨어 계셨습니까?”무겸은 대답하지 않았다.이튿날 아침, 노 씨와 만씨가 관사로 왔다.예령은 북방 지도를 마루에 펴 놓았다. 군영에서 쓰는 지도라 관문과 큰길은 굵게 그려져 있었고, 그 사이 마을들은 점으로만 찍혀 있었다.“이 지도에 없는 길을 여쭙겠습니다.”노 씨가 무릎걸음으로 다가와 지도를 들여다보았다. 한참을 보다가 손가락으로 한 곳을 짚었다.“여기 강이 있습니다.”“다리는 관문 쪽뿐인 줄 압니다만.”“다리로 안 건넙니다.”노 씨가 손가락을 그대로 둔 채 말했다.“동짓달부터 정월까지는 얼음이 사람을 받습니다. 그냥 걸어서 건너지요. 강 저쪽이 바로 백운상회 뒷마을입니다.”예령은 그 자리를 손끝으로 눌러 보았다. 관문에서 이십 리쯤 위였다.“수레는 어떻습니까?”“수레는 못 갑니다. 얼음이 아무리 두꺼워도 바퀴가 한 자리를 오래 누르면 깨집니다. 사람이 지고 걸으면 무게가 흩어져서 괜찮고요.”“짐을 실은 썰매는요?”노 씨가 잠깐 멈칫했다.“……썰매라면 될지도 모르겠습니다. 생각은 못 해 봤습니다.”“얼음 위로 썰매를 끌어 본 사람이 이 근방에 있습니까?”“강마을 사람들이 겨울에 나무를 그렇게 나릅니다.”만씨가 대답했다.“사람이 앞에서 끌고 뒤에서 밉니다. 나무 대신 자루를 싣지 못할 까닭은 없지요.”“강마을 사람들은 몇이나 됩니까?”“스무 집쯤 됩니다. 겨울에는 손이 남아돌고요.”장부에 적어야 할 이름이 또 늘었다.예령은 장부를 펴고 셈을 시작했다.썰매 한 대에 쌀 열 말. 사람 넷이 한 대를 끌면, 등짐으로는 여덟 말을 나를 인원이 열 말을 나른다. 얼음이 녹기까지 남은 날은 사십 일 남짓. 사흘에 한 번씩 건넌다면 열세 번.붓이 멈춘 곳에서 숫자가
언제 잠이 들었는지 예령은 알지 못했다.눈을 떴을 때 손은 비어 있었고, 옆자리에는 아직 온기가 남아 있었다. 마루 쪽에서 무겸이 갑옷 끈을 조이는 소리가 났다.“장군.”“깨웠소?”“아닙니다. 저도 일어나려던 참이었습니다.”예령이 몸을 일으켰다.“오늘 첫 등짐이 나갑니다.”“몇이오?”“넷입니다. 한꺼번에 열넷이 관문에 몰리면 눈에 띈다고 해서요.”“곽진의 사람은 붙였소?”“둘을 붙였습니다. 군복은 벗기고 칼도 두고 가라 했습니다.”“잘하셨소.”문이 닫혔다. 예령은 그 자리에 잠깐 더 누워 있다가 일어났다.넷을 한 번에 보내지도 않았다. 아침에 둘, 해가 기울 무렵에 둘. 지고 갈 짐도 쌀 두 말씩으로만 맞췄다. 모두 노 씨가 일러 준 대로였다.붙잡혔다면 저녁 전에 소식이 올 것이고, 소식이 없으면 넘은 것이었다. 예령은 장부를 펴 놓고 앉았다가 같은 줄만 세 번 읽고 덮었다.넷이 돌아온 것은 그날 밤이었다.쌀 여덟 말. 진가상회 수레 한 대에 실리는 양의 십분의 일도 되지 않았다. 그런데도 멍석 위에 내려놓은 자루를 보는 동안 예령은 숨을 한 번 길게 쉬었다.“아전이 뭐라 하지 않았습니까?”“묻긴 물었습니다.”노 씨가 손을 비비며 답했다.“겨울에 웬 등짐이냐고요.”“뭐라 하셨습니까?”“읍내에 장이 선다고 했습니다. 그랬더니 자루를 한 번 만져 보고는 가라 하더군요.”만씨가 옆에서 덧붙였다.“아전이 쌀자루를 못 알아봤겠습니까. 등짐까지 붙잡기 시작하면 그날로 장이 안 섭니다. 읍내 사람들이 먼저 들고일어나지요.”이튿날은 여덟을 보냈고, 사흘째는 열넷을 다 보냈다.사흘 동안 쌀 예순두 말이 관문을 넘었다. 예령은 장부에 이름과 날짜와 양을 한 줄씩 적었다. 만씨, 쌀 두 말. 노 씨, 쌀 두 말. 그 아래로 열두 줄.값은 지기 전에 치렀다. 관사 마당에서 돈을 받아 든 사람들이 그 자리에서 세어 보고, 세 번 세는 이도 있었다.곽진이 곁에서 낮게 말했다.“이 사람들이 부인 이름을 대고 다닙니다.”“대라고 했습
이튿날 아침, 예령은 곽진에게 명단을 다시 가져오게 했다.겨울 동안 북방에 남은 작은 상인 스물세 명. 비단 두어 필을 지고 다니는 자, 소금 반 섬을 나르는 자, 약재를 말려 파는 자.“이 사람들을 관사로 부르면 오겠습니까?”“오기야 오겠지요. 다만 부인께서 무엇을 시키시든 겁부터 낼 겁니다.”“겁낼 만한 일을 시킬 참입니다.”그날 오후, 관사 마당에 스물세 명 가운데 열일곱이 왔다.솜이 비어 가는 옷을 입은 이들이었다. 등이 굽은 노인도 있었고, 아이를 업고 온 여인도 있었다. 마당에 들어서면서 모자를 벗고, 누구도 먼저 앉으려 하지 않았다.마당에 멍석을 깔고 앉힌 뒤, 예령은 먼저 물었다.“여러분은 관문을 넘을 때 문서를 뗍니까?”아무도 대답하지 않았다. 한참 뒤에 등짐 장수 노 씨가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수레에 실으면 뗍니다. 등에 지고 넘으면 묻지 않습니다.”“한 사람이 얼마나 집니까?”“쌀로 치면 두 말쯤 됩니다. 젊은 사람은 서 말도 집니다. 그 이상은 등이 먼저 상합니다.”“관문에서는 무엇을 봅니까?”“수레와 짐칸을 봅니다. 등짐은 헤아리지 않습니다. 그걸 다 세자면 관문이 하루 종일 막히니까요.”예령은 머릿속으로 셈을 했다. 두 말씩 열일곱이면 서른 말이 넘는다. 진가상회 수레 한 대에 실리는 양에는 못 미치지만, 하루에 한 번이 아니라 사흘에 두 번씩 오간다면 이야기가 달라졌다.“그 짐을 서씨 상단이 사겠습니다.”마당이 술렁였다.“진가상회 곡식이 관문 저쪽에 쌓여 있습니다. 수레로는 못 넘습니다. 그러니 등으로 넘기겠습니다.”“값은 관문 이쪽에서 받는 값으로 치겠습니다. 물건이 상하거나 눈에 묻혀도 값은 드립니다.”소금 반 섬을 지고 다닌다는 만씨가 손을 들었다. 나이가 마흔은 되어 보이는 여인이었다.“부인. 저희가 그 짐을 못 져서 안 지는 게 아닙니다.”“압니다.”“관아에서 알면 저희부터 잡아갑니다. 큰 상회야 문을 닫고 겨울을 나면 그만이지만, 저희는 등짐 한 번이 식구들 사나흘 식량입니다.
곽진이 관문에 다녀온 것은 그날 낮이었다.“문서에 흠이 있다는데, 어느 줄이 어떻다는 말은 없습니다. 그냥 돌려보냈답니다.”“관문 아전이 그럴 수 있습니까?”“아전 혼자서는 못 합니다. 관문 문서는 관아에서 뗍니다.”예령은 그 말을 듣고 외투를 챙겼다.관아는 군영에서 십 리 떨어진 읍내에 있었다.예령이 이름을 대자 곧 안으로 들였다. 마루에 세워 두는 일도, 오래 기다리게 하는 일도 없었으니 백운상회와는 다른 대접이었다.북방 자사[(刺史)한 주의 민정과 창고, 관문을 맡아 다스리는 관리] 하정근은 쉰 줄로 보였다. 방에는 화로가 둘이나 놓여 있었고, 그는 털옷 없이 편한 차림이었다.“정북장군 부인께서 여기까지 오시다니요.”말이 느리고 웃음이 많은 사람이었다.“차부터 드시지요. 관아 것이라 좋은 건 아닙니다만.”“어제 관문에서 돌려보낸 진가상회 수레 일로 왔습니다.”“아, 그 일이요.”하정근은 알아보지도 않고 답했다.“문서에 흠이 있었답니다.”“어느 줄입니까?”“글쎄요. 아랫것들이 워낙 꼼꼼해서요.”“그 문서는 제가 직접 보았습니다. 수레가 몇 대인지도 맞았고, 실린 물목도 적힌 그대로였습니다. 진가상회 인도 제자리에 찍혀 있었습니다.”“그럼 아랫것들이 잘못 보았겠지요. 다시 떼어 오시면 됩니다.”“그 문서를 떼어 주시는 곳이 여기 아닙니까.”“그러니 다시 오시라는 말씀입니다.”“얼마나 걸립니까?”“겨울이라 사람이 없어서요. 보름은 잡으셔야 할 겁니다.”보름. 군영의 곡식으로 버틸 수 있는 날과 거의 같았다.예령은 무릎 위에 손을 모았다.“하나만 여쭙겠습니다. 문서를 떼는 데 보름이 걸린다면, 어제 관문을 넘은 태성상단 수레는 그 문서를 언제 뗀 것입니까?”방 안이 조용해졌다.화로에서 숯이 타는 소리만 났다. 하정근이 들고 있던 잔이 입에 닿지 않고 멈춰 있었다.“……그건 제가 알아보겠습니다.”“예. 알아봐 주십시오.”“부인.”하정근이 잔을 내려놓았다. 웃음은 그대로였다.“이런 일은 장군께 말씀드리시면
황기문이 백운상회에 들었다는 말을 들은 뒤로도 예령은 그쪽으로 사람을 보내지 않았다.대신 곽진에게 사람을 풀어 겨울 동안 북방에 남아 있는 상인들을 적어 오게 했다. 큰 상회는 셋, 그 아래에 이름조차 걸지 못한 작은 상인이 스물이 넘었다. 비단 두 필, 소금 반 섬을 지고 다니는 이들이었다. 큰 상회가 값을 쳐 주지 않아 겨울이면 물건을 쌓아 두고 굶는다고 했다.예령은 그 이름들을 장부 한쪽에 옮겨 적었다.이튿날, 군영 문에 사람이 왔다.태성상단에서 온 자였다. 상단주가 읍내 객점에서 뵙고자 한다는 전갈이었다.“잡아 가둘 수는 없습니까?”연화가 분한 목소리로 물었다.예령은 고개를 저었다.관 염창에서 빠져나온 소금은 태성상단의 북방 창고를 거쳤다. 위량이 그 창고에서 빼 온 소금 한 줌이 염창 것과 같았고, 장군의 장계에는 황기문의 이름이 그대로 올라가 있었다. 봄에 황도에서 사람이 오면 그가 먼저 불려 갈 사람이라는 뜻이었다.그런데도 지금 잡을 수는 없었다. 창고 마당의 알갱이가 같다는 것은 정황일 뿐이고, 굴에서 나온 상자의 낙인도 관의 것이지 태성상단의 것이 아니었다. 지금 손을 대면 일꾼이 훔쳤다는 말 한마디로 꼬리가 끊긴다.그래서 무겸은 그를 두고 보는 쪽을 골랐다.“가겠다고 전하세요.”객점 이층 방에서 황기문이 기다리고 있었다.“앉으시지요.”“서서 듣겠습니다. 길지 않게 하시면 됩니다.”황기문이 웃으며 탁자 위에 종이 한 장을 밀어 놓았다.곡식 이백 섬. 한 섬에 두 냥.황도 시세의 반이었다. 겨울에 나올 수 없는 값이었다.“겨울 인사로 아십시오.”“인사는 값이 없을 때 하는 말이지요.”예령은 종이를 들여다본 채 말했다.“이 값에 겨울을 나면, 봄에는 어찌 됩니까?”“봄이야 봄에 셈하면 되지요.”“봄이면 황도에서 사람이 옵니다.”예령은 종이에서 눈을 떼지 않았다.“그 사람들이 군영 장부를 펼치면 이 종이가 나오겠지요. 소금 일로 조사를 받아야 할 상단이 정북장군의 군량을 댔다고요. 값이 시세의 반이면 더
진가상회의 첫 수레가 군영에 닿은 것은 이튿날 아침이었다.곡식 여섯 수레와 마른 콩 두 수레. 값은 황도 시세, 운반은 진가상회 몫. 문서에 인을 찍은 것은 진서헌이 아니라 그가 보낸 늙은 행수였다.“상단주께서는 눈이 그치면 다시 오신답니다.”행수가 물러가자 곽진이 낮게 말했다.“저쪽 상단주가 부인 이야기를 하고 다닌답니다.”“무슨 이야기를요?”“황도에서 온 여자 상인이 값을 깎은 게 아니라 이름을 팔았다고요. 흉은 아닙니다. 웃으면서 하는 말이랍니다.”예령은 문서를 접었다. 소문이 도는 것은 나쁘지 않았다. 이 겨울에 셈이 돌아가려면 이름이 먼저 걸어 다녀야 했다.그 이름으로 다음 문을 두드리기로 했다.백운상회는 군영에서 반나절 거리였다. 북방 세 상회 가운데 가장 먼저 서씨 상단의 거래를 끊은 곳이자, 황도에 있을 때부터 예령이 되찾아야 할 첫 번째로 꼽아 둔 곳이었다.눈이 얕은 길을 골라 갔다. 장호가 앞서고 연화가 따랐다.상회 마당에는 짐꾼들이 나와 있었다. 예령이 이름을 대자 안으로 들어간 사내가 한참 뒤에 나왔다.“상단주께서 오늘은 뵙기 어렵다 하십니다.”“언제 오면 됩니까?”“……그건 모르겠습니다.”예령은 물러나지 않았다.“그럼 여기서 기다리겠습니다.”마당에 눈이 쌓이기 시작했다. 반 시진이 지나고 한 시진이 지났다.짐꾼들이 힐끔거리며 저희끼리 수군댔다. 바람이 그쪽 말을 실어 왔다.“정북장군 부인이라며.”“부인이면 뭐 해. 장사는 따로지.”“봄에 황도로 돌아갈 사람한테 겨울 물건을 맡겨?”연화의 얼굴이 새빨개졌다. 예령은 연화의 소매를 가볍게 눌렀다.연화가 참다 못해 입을 열었다.“부인, 이러다 밤길이 됩니다.”“상단주가 지금 저 안에 있어.”예령은 처마 밑 발자국을 보고 있었다. 들어간 자국은 있는데 나온 자국이 없었다.해가 기울 무렵에야 문이 열렸다.백운상회의 상단주 양석이 나왔다. 머리가 반쯤 센 사내였다. 그는 예령을 마당에 세워 둔 채 섬돌 위에서 말했다.“서씨 상단이라 하셨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