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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화 나의 의도

“꿈도 꾸지 마! 허지영. 이렇게 평생을 나와 결혼한 걸 후회하면서 살아.”

배인호는 이성을 되찾았고 나의 의도를 알아차린 듯했다.

“각자 놀고 싶어? 그러자 그럼.”

충격적이었다. 그와 결혼한 걸 후회하게 하려고 내가 바람을 피워도 감수하겠다는 건가? 억지로 한 결혼이 그에게 이렇게 큰 트라우마로 될 줄은 몰랐다. 그래서 이토록 극단적인 방법으로 나에게 되갚아줘야 그의 마음이 풀리는 거다.

잠시 생각에 빠져 있는데 배인호는 손을 뻗어 나의 허리를 잡아 끌었다. 나의 몸을 그에게 바짝 붙였다. 그는 입술을 핥으며 어두운 눈빛으로 내게 말했다.

“내가 이차성징 도와줄까?”

“싫어.”

나는 배인호를 막았다.

배인호는 눈을 가늘게 뜨고 날카로운 눈빛으로 나를 뚫어져라 쳐다봤다. 그처럼 똑똑한 사람이 요즘 나의 변화를 알아차리지 못했을 리가 없다. 그는 나의 턱을 잡아 고개를 들어 그의 눈을 바라보게 했다.

“허지영 쌍둥이 동생이야? 응?”

그를 10년이나 좋아한 여자가 어떻게 이렇게 변할 수 있지?

나는 쓴웃음을 지었다.

“맞춰봐요.”

“허지영. 우리 결혼은 그렇게 간단한 게 아니야. 끝나는 순간 얼마나 많은 분쟁이 일어나는지 알아? 난 너랑 사랑놀이할 시간 없으니깐 그렇게 외로우면 밖에서 놀아.”

그는 내 물음을 가볍게 흘렸다. 그러고는 귓가에 다가와 속삭였다.

“콘돔 끼는 거 잊지 말고. 나는 잡종은 인정 못 해.”

나는 한번 죽었다 깨어난 사람인지라 어떤 일에도 흔들리지 않을 수 있는 평정심을 가졌다고 생각했지만 나도 모르게 손을 뻗어 배인호의 뺨을 아프게 때렸다. 얼마나 힘을 줬는지 나의 손도 얼얼했다.

배인호의 뺨에 나의 손가락 자국이 빨갛게 올라왔다. 이 상황에서도 그의 옆모습은 날카로운 턱선을 자랑하는 완벽한 얼굴이었다. 따귀를 맞아도 잘생긴 남자였다.

그는 천천히 머리를 돌렸다. 눈빛이 음침하고 무서웠고 당장이라도 나의 목을 조를 것만 같았다. 나는 손이 부들부들 덜려왔다. 무서워서가 아니라 너무 세게 때린 나머지 손에 난 상처가 벌어져 피가 흐르고 있었다.

배인호는 나의 손을 한번 쳐다보고는 차가운 뒷모습만을 남긴 채 떠났다.

나는 붕대 사이로 흘러나오는 피가 마음에 난 상처보다는 낫다고 생각했다.

그 이후로 배인호는 사라졌다. 그는 매일 연예 뉴스에 등장하며 고삐 풀린 말처럼 클럽과 회사를 드나들었지만 집에는 들어오지 않았다.

날짜를 보니 곧 보름 후면 배인호와 서란이 만나는 날이다.

나는 남은 시간 동안 그녀가 일하는 카페 ‘랑데부’에 종종 들러 커피 한잔하며 그녀가 일하는 모습을 지켜봤다. 그녀의 웃는 모습과 행동 모두 나의 눈을 사로잡았다. 내가 남자라도 그녀를 좋아했을 것이다.

“란아, 네 남자친구 왔어!”

한 동료가 그녀에게 알려주었다.

맞다, 내 기억에 그녀도 남자친구가 있었다. 그 불쌍한 남자친구는 배인호의 상대가 되지 못했다. 그녀와의 사이가 아무리 뜨거웠다 해도 권력과 지위가 있는 배인호의 상대는 아니었다.

내가 서란의 존재를 알았을 때 그녀는 이미 그 불쌍한 남자친구와 헤어진 뒤라 따로 조사하지 않았었다.

카페 문이 열리고 흰 티셔츠에 청바지를 입은 깔끔한 차림의 젊은 남자가 걸어 들어왔다. 그는 흰 모자를 쓰고 있었고 손에는 타코야끼가 들려 있었다.

나는 멈칫했다. 설마 그 남학생?

“선우야, 언제 왔어?”

서란은 꼭 다람쥐가 먹이를 주러온 주인을 반기는 것처럼 기뻐했다.

“주변에서 전단지 돌리다가 잠깐 너 보러 왔지. 자, 타코야끼 사 왔어.”

남학생은 웃을 때 눈이 반달 모양이었는데 그 모습이 서란과 꼭 닮아 있었다.

'이런 게 부부상인가. '

그런데 배인호 때문에 헤어지다니. 참으로 악연이었다.

서란은 기뻐하면서도 마음이 아픈듯했다.

“나 보러 오는 건 좋은데 전단지 돌리느라 힘들 텐데 나한테 이런 거 안 사다 줘도 돼.”

“열심히 돈 버는 이유가 우리 란이 맛있는 거 많이 사 먹이려고 그러는 건데.”

남학생은 말하는 솜씨가 예술이었다.

나도 간식을 좋아하진 않지만, 배인호는 나한테 간식 같은 걸 사준 적이 없었다.

서란이 아르바이트 중이라 남학생은 오래 머물지 않았다. 나는 혹시나 마주칠까 봐 고개를 숙였다. 전에 클럽에서 자기를 꼬시려 했던 나이 많은 여자를 알아보면 큰일이다.

남학생이 나가길 기다렸다가 나도 급하게 계산하고 떠났다.

“사모님.”

이 기사는 날 볼 때마다 이 한 마디 뿐이었다.

“집으로 가요.”

나는 너무 피곤했다. 다시 사는 삶인데도 인간관계는 왜 점점 복잡해지는 걸까? 뇌세포가 부족한지 머리가 아파 태양혈을 살살 문질렀다.

한 100미터쯤 갔을 때 나는 입을 열었다.

“이 기사님, 제가 운전해서 갈게요.”

운전 기술을 자랑하고 싶어 손이 근질근질하다는 핑계를 댔다.

나는 운전대를 잡고 사거리를 둘러보다 신호등 앞에서 길을 건너려는 남학생을 발견했다. 나는 타이밍을 맞춰 악셀을 밟아 그를 들이받았다.

“죄송합니다. 죄송합니다!’

나는 놀라서 급하게 차에서 내려 그를 부축했다. 다리에 피가 철철 흐르는 걸로 보아 많이 다친 것 같았다.

“누나?”

남학생은 아픔을 참으며 놀라서 나를 불렀다. 이 상황에서도 스윗하게 부르는 걸 보니 다들 대학생을 좋아하는 이유를 알 것 같았다.

나는 이 기사님을 불렀다.

“빨리 병원으로 데려가죠.”

남학생 이름은 기선우 였다. 21살이고 대학을 다니고 있었다.

나는 병원 의자에 앉아 방금 핸드폰에 저장된 기선우의 번호를 보았다. 마음속에 비참한 감정이 들었다. 고작 생각해 낸 것이 눈에는 눈 이에는 이로 복수하는 것이라니.

서란이 나의 남편을 뺏어 갔으니 나도 그의 남자친구를 뺏으면 안 되나? 물론 그녀가 강압적으로 당한 것이라도 그녀는 결국 그를 받아줬고 배인호는 그때 철저히 이성을 잃었다.

만약 서란이 계속 그를 거절했다면 그도 이성을 되찾아 결국 이 모든 헌신이 아무런 이익도 줄 수 없다는 걸 깨닫지 않았을까?

병원에는 사람들이 많았다. 전생에 나도 유방암 말기가 림프선까지 전이 되어 마지막 나날을 병원에서 보냈다. 의사가 말하길 평소 화를 참는 여자들이 유방암에 걸릴 확률이 높다고 했다.

나는 기선우의 병원비를 모두 결제하고 또 그에게 식사비용과 아르바이트 일당도 보상해 주었다. 입원으로 아르바이트도 할 수 없을 것이다.

사실 나는 대화를 꽤 잘하는 편이라 짧은 시간 동안 기선우에 대한 정보를 많이 얻었다. 평범한 가정에 부모님 두 분 다 계시는데 농사를 지으시고 위로 결혼한 누나가 한 명 있다고 했다. 이러니 여자친구를 배인호에게 빼앗길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몸조리 잘해요. 자주 보러 올게요.”

떠나기 전 나는 친절하고 따뜻한 누나처럼 다정하게 웃으며 인사했다.

“괜찮아요, 누나. 저 아직 젊고 튼튼해요. 회복도 빠를 거예요.”

기선우는 가지런한 흰 치아를 보이며 활짝 웃었다.

젊어서 튼튼하다, 웬지 날 유혹하는 말로 들렸다.

사실 나는 나이가 그렇게 많은 것도 아니다. 72살도 아닌 27살이다. 그저 5년의 결혼생활 기간 억눌려 살다보니 지쳐 제대로 먹지 못했다. 그러다 보니 몸과 마음이 확 늙어버린 것 같았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고는 돌아가는 길에 약국에 들러 영양제를 잔뜩 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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