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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화

Author: 금붕어
신씨 가문의 본가에서 엄숙한 분위기가 흘렀다.

차가운 얼굴로 상석에 앉아 있던 노희숙은 안타까움과 연민이 담긴 눈빛으로 민윤서를 바라보다가 이내 분노 어린 눈빛으로 신태현을 바라보았다.

가족들이 모두 지켜보는 자리에서 노희숙은 대놓고 민윤서의 편을 들며 근엄하게 말했다.

“태현아. 네가 해외로 파견된 3년 동안 윤서는 홀로 집을 지켰어. 매일 쓸쓸하게 혼자 집에 있었는데도 아무런 불평을 하지 않았지. 그런데 너는 귀국하자마자 이런 소문을 만들고 다니는 거니? 지금 인터넷에 사진이 다 퍼졌고 온갖 소문이 떠돌고 있어. 왜 이렇게 사리분별을 못해?”

말을 마친 노희숙은 다시 민윤서를 바라봤다. 마른 몸에 창백한 안색의 민윤서를 보자 노희숙은 한결 부드러워진 목소리로 안쓰러운 듯이 말했다.

“윤서야, 많이 힘들었지? 너희 결혼한 지도 벌써 3년이 됐는데 이제는 아이를 가질 준비를 해야 하지 않겠니? 태현이도 파견을 마쳤으니 앞으로는 쭉 여기에 있을 텐데 더 미루지 말고 임신 준비를 하렴. 아이가 생기면 부부 사이도 더 단단해질 거고, 밖에서 떠도는 쓸데없는 소문도 자연스럽게 잠잠해질 거야.”

빨리 손주를 바라는 것처럼 들리는 말이었지만 사실은 민윤서의 편을 들어주기 위함이었다. 노희숙은 민윤서가 신태현의 아내라는 사실을 분명히 밝혀서 헛소문을 없앨 생각이었다.

민윤서는 고개를 숙이며 씁쓸함을 느꼈으나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그저 가만히 서 있기만 했다.

사람들의 시선이 신태현에게 향했다.

그러나 신태현은 여전히 침착하고 덤덤했다. 노희숙의 질책에도, 집안 어른들의 시선에도 신태현은 전혀 당황하지 않았고 본인과 민윤아의 관계를 해명하지도 않았다.

신태현은 대수롭지 않은 듯 덤덤히 말했다.

“취재진들이 억측을 한 겁니다. 일부러 오해를 살 만한 각도로 사진을 찍어서 루머를 퍼뜨린 거예요. 실제로는 아무 사이 아니니까 할머니도 너무 신경 쓰지 마세요.”

신태현은 겨우 말 한마디로 자신의 외도와 편애와 도를 넘은 행동들을 가볍게 넘기려고 했다.

신태현은 민윤서의 편을 들 생각이 전혀 없었고, 오해를 풀 생각도 없었으며, 민윤서의 체면조차 지켜주지 않았다.

그저 억측일 뿐이라는 말 한마디로 민윤서가 모든 서러움을 삼키고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얌전히 아이를 가질 준비를 하며 예전처럼 고분고분하고 순종적인 아내로 살기를 원했다.

집 안 분위기가 잠시 얼어붙었다.

노희숙은 끝까지 잘못을 인정하지 않고 해명조차 하지 않으려는 손자와 창백한 얼굴로 버티는 민윤서를 바라보았다. 노희숙은 화가 치밀어 올랐지만 가문의 체면을 생각해 더는 신태현을 추궁할 수는 없었다.

그리고 그 자리에 서 있던 민윤서는 마지막까지 품고 있던 아주 작은 희망마저 완전히 재가 되어 사라지는 걸 느꼈다.

그 순간 민윤서는 더 이상 신태현과의 결혼 생활을 이어갈 필요가 없음을 깨달았다.

신태현은 전혀 조급하지 않을 것이다.

이미 아이가 있으니 말이다.

민윤서는 시선을 내려뜨린 채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노희숙은 민윤서가 말이 없자 기분이 좋지 않다는 걸 눈치채고 더는 아이를 가지라는 말을 하지 않았다.

이후에는 그저 일상적인 안부만 물었고, 식사 자리에서도 예전처럼 의례적인 대화만 오갈 뿐이었다.

그러나 오늘 민윤서는 마치 가슴이 꽉 막힌 듯 답답하고 우울해서 음식을 먹어도 아무런 맛이 느껴지지 않았다.

신태현의 남동생 신태주도 돌아왔다.

늦둥이로 태어나 가족들의 사랑을 한몸에 받고 있는 신태주는 현재 고등학생이고 한창 혈기왕성한 나이로 감정이 표정에 그대로 드러나는 사람이었다.

민윤서가 안으로 들어왔을 때 신태주는 반가워하기는커녕 미간을 찌푸리며 대놓고 싫은 티를 냈다.

민윤서는 익숙했기에 그저 못 본 척하고 자연스럽게 자리에 앉았다.

식사가 끝날 무렵, 밖에는 눈이 많이 쌓였고 산길이 얼어붙어서 결국 그들은 어쩔 수 없이 본가에서 하룻밤 묵기로 했다.

민윤서는 산 위가 이렇게 추울 줄 몰랐고, 길이 얼어서 귀가하지 못할 줄도 예상하지 못했다.

얇은 옷차림 탓에 한기가 옷깃을 파고들며 온몸으로 스며들었다. 순간 아랫배가 뒤틀리는 것 같은 날카로운 통증이 느껴져 민윤서의 얼굴이 순식간에 새하얗게 질렸다.

민윤서는 겨우 몸을 일으킨 뒤 작은 목소리로 인사를 하고 방으로 향했다.

얇은 서리가 내려앉은 긴 복도를 지나던 도중에 신태현이 복도 끝에서 전화를 하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신태현은 민윤서가 단 한 번도 본 적 없는 부드러운 표정을 짓고 있었고 다정함이 당장이라도 흘러넘칠 것 같았다. 신태현이 누구와 연락을 하고 있는지는 뻔했다. 분명히 민윤아일 것이다.

민윤서는 신태현과 민윤아에게 신경을 쓰고 싶지 않았다.

그저 얼른 방으로 가서 누워 있고만 싶었다.

아랫배에서 느껴지는 극심한 통증에 머리는 어지럽고 발걸음은 휘청거렸다. 신태현의 곁을 지나칠 때는 발이 미끄러져 그대로 몸이 앞으로 쏠렸다.

마침 전화를 끊은 신태현이 빠르게 손을 뻗어 민윤서를 부축하며 무심한 목소리로 말했다.

“무슨 생각을 한 거야?”

애매한 말이었다.

앞을 제대로 보지 않고 걸었다고 타박하는 말 같지만 민윤서에게는 일부러 본인의 품에 안기려고 수작을 부린 거라고 나무라는 것처럼 들렸다.

멀지 않은 곳에 있던 신태주가 그 광경을 보고 피식 비웃더니 빠르게 걸어와서 비아냥댔다.

“또 불쌍한 척이네요. 동정받고 싶어서 그래요? 할머니는 속아도 나는 안 속아요. 왜 또 불쌍한 척 연기하는 거예요? 우리 형이 당신을 진짜 좋아한다고 생각하는 건 아니죠?”

민윤서는 깊이 숨을 들이마시면서 아랫배의 통증과 씁쓸한 마음을 삼켰다.

누구나 그녀를 함부로 대했다.

그건 신태현의 무관심과 방관 때문이었다.

남편인 신태현이 민윤서를 그렇게 대하니 시댁 사람들도 똑같이 대하는 것뿐이었다.

그리고 그런 태도는 민윤서에게 별로 중요하지 않았다.

민윤서는 신태현을 힘껏 밀어내며 말했다.

“내가 왜 민씨 가문 사람들의 동정을 필요로 할 거라고 생각해? 착각도 유분수지.”

신태주는 민윤서가 반박할 줄은 몰랐다. 예전에 민윤서는 늘 그들 앞에서 고분고분하고 얌전했기 때문이다.

신태주는 표정이 어두워지더니 자기도 모르게 말을 내뱉었다.

“그러니까 우리 형이 당신을 안 좋아하고 윤아 누나를 좋아하는 거예요.”

신태현이 차가운 눈빛으로 신태주를 힐끗 바라봤다.

“네 형수야.”

민윤서는 속으로 차갑게 웃었다.

참 미묘한 말이었다. 역시 외교관이라서 그런지 화술이 뛰어났다.

외교관인 신태현은 능력이 뛰어났다.

겉으로는 민윤서가 형수라는 걸 상기시켜주는 것 같지만 은근히 거리감이 느껴지는 말투에서 신태현이 좋아하는 것은 민윤아이며, 민유아야말로 진짜 형수라는 것이 느껴졌다.

민윤서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곧장 방으로 걸어갔다.

늘 몸에 지니고 다니던 진통제를 먹은 뒤 침대 위에 누워 몸을 웅크렸다. 그러나 통증은 가시지 않았고 마치 바늘 수천 개로 아랫배를 찌르는 것 같은 통증이 계속 느껴졌다.

이때 도우미가 약을 한 그릇 들고 들어왔다.

“사모님, 어르신께서 아까 안색이 안 좋으신 걸 보고 사모님이 감기에 걸린 것 같다면서 주방에 얘기해 약을 달이셨어요. 따뜻할 때 드세요.”

신씨 가문에서 아마 진심으로 민윤서를 걱정하는 것은 노희숙뿐일 것이다.

민윤서는 목이 메어 가벼운 목소리로 말했다.

“거기 두세요. 그리고 할머니께 감사하다고 전해주세요.”

도우미가 나간 뒤, 약기운과 함께 피로가 한꺼번에 밀려왔고 민윤서는 그대로 잠이 들었다.

민윤서는 오늘 밤 신태현이 서재에서 일을 할 것이라 생각했다.

신태현은 귀국할 때마다 잠시 머물다 금방 다시 해외로 돌아갔고, 이제 두 사람은 이혼을 앞둔 상태였기에 당연히 같은 침대에서 잠을 자야 할 이유가 없었다.

그런데 밤 11시쯤에 갑자기 방문이 조심스럽게 열리며 익숙한 발소리가 들려왔다.

잠에서 깬 민윤서는 신태현이 욕실로 들어가 샤워하는 소리를 들었다. 그리고 잠시 뒤 물소리가 멎었다.

곧이어 신태현이 침대에 눕자 침대가 살짝 꺼졌다.

민윤서는 깊이 숨을 들이마시며 앞으로 따로 자자고 말하려고 했다. 하지만 움직이려는 순간, 신태현의 손이 뒤통수를 감싸며 따뜻한 입술이 닿았다.

신태현의 키스는 부드럽고 조심스러웠지만 동시에 거절은 허락할 수 없다는 듯한 소유욕이 느껴졌다. 그렇게 키스를 나누는 동안 민윤서는 속이 메스꺼워졌다.

예전이었다면 오랜만에 돌아온 남편과의 스킨십을 기꺼이 받아들였을 것이다. 그러나 이제 민윤서에게 남은 것은 역겨움과 거부감뿐이었다.

“태현 씨!”

민윤서가 고개를 홱 돌리더니 크게 소리치면서 저항했다.

“이거 놔!”

그러나 신태현은 민윤서를 놔줄 생각이 없었다.

신태현이 내뿜는 강한 기운이 민윤서를 완전히 감쌌다.

민윤서는 이를 악물며 말했다.

“이딴 건 민윤아한테 해!”

그 말에 신태현의 움직임이 멈췄다.

그러나 민윤서의 허리를 감싼 손은 풀리지 않았다. 신태현은 키스만 멈췄을 뿐, 두 사람의 코끝은 거의 맞닿아 있었고 신태현의 두 눈동자는 매우 검었다.

신태현은 키스 때문에 붉어진 민윤서의 입술을 조심스럽게 문지르다가 거의 속삭이듯이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넌 윤아가 아니잖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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