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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5화

Autor: 금붕어
민윤서는 심장이 철렁 내려앉았다.

문득 예전에 신태현과 엮이게 된 계기가 떠올랐다. 민윤서는 당시 함정에 빠져 약기운에 제정신이 아니었고 마침 술에 취해 있던 신태현은 민윤서가 민윤아와 얼굴도, 몸매도 닮은 걸 보고 민윤서를 민윤아로 착각했다.

그동안 민윤서는 민윤아의 대체품이었고 있어도 그만, 없어도 그만인 존재였다.

민윤서는 자조하듯 입꼬리를 올리며 눈빛이 싸늘해졌다.

신태현은 아무 감정도 느껴지지 않는 알 수 없는 눈빛으로 잠시 민윤서를 바라보다가 덤덤히 입을 열었다.

“할머니는 우리가 아이를 갖기를 바라셔.”

신태현은 어쩔 수 없는 선택이라는 듯이 말했다.

‘아이?’

민윤서는 곧바로 눈시울이 빨개졌다. 순간 서러움과 분노가 폭발했다.

그들에게는 한때 아이가 있었다.

그러나 신태현은 아이를 바라지 않았고 이제는 아이를 가질 수 없게 되었다.

그런데 왜 이제 와서 또 아이를 갖겠다고 하는 걸까?

민윤서는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

“내가 당신 아이를 가질 일은 절대 없을 거야.”

신태현의 눈빛이 순식간에 싸늘해지면서 주변 온도마저 내려간 듯한 기분이 들었다. 신태현은 민윤서를 놓아주며 물었다.

“나 아니면 누구 아이를 가질 건데?”

민윤서는 코웃음을 치면서 고개를 돌렸다.

민윤서는 누구의 아이도 가질 수 없을 것이다.

그리고 민윤서에게는 자신의 마음을 신태현에게 전해야 할 의무가 없었다.

“태현 씨, 우리 이혼...”

이혼이라는 말을 꺼내자마자 갑작스럽게 벨 소리가 울리며 민윤서의 말허리를 끊었다.

화면에 뜬 이름을 보니 민윤아였다.

신태현은 안색이 어두워졌고 곧바로 전화를 받지는 않았다.

민윤서는 신태현을 바라보다가 피식 웃음을 터뜨리더니 비아냥댔다.

“왜? 받기 불편해서 그래? 내가 대신 받아줄까?”

신태현은 민윤서를 힐끗 보더니 말없이 휴대폰을 챙겨 침대에서 내려간 뒤 창가로 걸어가서 전화를 받았다. 그리고 자기도 모르게 한결 부드러워진 목소리로 말했다.

“무슨 일이야?”

전화 너머에서 민윤아가 애교 섞인 목소리로 애처롭게 말했다.

“태현 오빠, 내일 밤에 중요한 식사 자리가 있거든? 오빠가 같이 가줬으면 좋겠어. 식품의약품안전처 쪽 연구과제 컨퍼런스인데 금방 귀국한 나에게는 앞으로 굉장히 큰 도움이 될 수 있는 자리야.”

두 사람은 멀리 떨어져 있는 것이 아니었기에 민윤서는 그들의 대화를 똑똑히 들을 수 있었다.

신태현은 최연소 외교부 부국장이기 때문에 직접 연구과제를 담당하는 건 아니어도 신분과 지위가 있으니 그 자리에 나간다면 누구든 신태현의 체면을 고려해야 할 것이다.

신태현은 꽤 큰 영향력을 지닌 사람이니 말이다.

민윤서는 자기도 모르게 침대 시트를 손끝이 하얘질 정도로 힘껏 움켜쥐었다.

만약 신태현이 민윤아와 함께 그 자리에 나간다면 이번 연구과제에서 민윤서의 경쟁력은 크게 떨어질 것이 분명했다.

민윤서는 신태현의 뒷모습을 죽어라 노려보면서 가슴이 꽉 막힌 듯한 답답함을 느꼈다.

신태현은 민윤서의 눈빛을 눈치챈 것처럼 덤덤한 얼굴로 고개를 돌려 민윤서를 바라봤다.

그리고 곧 휴대폰에 대고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알겠어. 같이 갈게.”

그 말을 듣는 순간 민윤서는 뒤통수를 맞은 것처럼 큰 충격을 받았다.

예전에 민윤서는 몇 번이나 신태현에게 함께 업계 컨퍼런스에 참석하자고 했었는데 그때마다 신태현은 일이 바쁘다거나 시간이 없다는 핑계로 거절했다. 이렇게 선뜻 승낙한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우습네. 정말 우스워.’

민윤서는 입꼬리를 올리며 처연한 미소를 지었다. 바보처럼 기대하고, 절절하게 매달리던 과거의 자신이 안쓰러워졌다.

민윤서는 깊이 숨을 들이마시더니 일어나 앉은 뒤 이불을 젖히고 밖으로 나갔다.

더는 가만히 있을 수 없었다. 결혼 생활뿐만 아니라 커리어에서까지 실패하는 건 절대 용납할 수 없었다.

그래서 민윤서는 만반의 준비를 해서 철저히 대비할 생각이었다.

신태현은 여윈 민윤서의 뒷모습을 조용히 바라봤다.

그날 밤 민윤서는 침실로 돌아가지 않고 객실로 향했다.

그리고 밤새도록 자료를 들여다보며 손끝으로 서류를 한 장 한 장 넘기다 보니 어느샌가 날이 밝기 시작했다.

다음 날 아침, 민윤서는 아침 일찍 일어나 노희숙에게 인사를 드린 뒤 곧바로 그곳을 떠났다.

...

청림바이오.

청림바이오는 민윤서가 대학 선배 서승재와 함께 창립한 의약 연구소이자 숨 막히는 결혼 생활에서 유일하게 지켜낸 자신의 삶이었다.

“윤서야, 오늘 저녁 준비는 다 된 거야? 이번 경쟁에서 이긴다면 우리 연구소 미래는 완전히 달라질 거야.”

민윤서는 시선을 들며 말했다.

“이번에는 반드시 성공해야죠.”

저녁 8시.

민윤서와 서승재는 시간 맞춰 행사장에 도착했다.

민윤서는 이런 행사에 참석하는 것이 처음이었다.

그동안은 연구소에서 연구만 열심히 했고 대외 활동에는 크게 신경 쓰지 않았기 때문이다.

지금 생각해 보면 민윤서는 세상일에 초연한 편이었다.

업계 사람들 앞에서 모습을 드러내는 일도 많지 않았기 때문에 그 자리에 민윤서를 알고 있는 사람이 많지 않았다.

반면 서승재는 업계의 떠오르는 신예였고 평판도 좋을 뿐만 아니라 넓은 인맥도 갖추었다.

민윤서는 서승재가 데려왔기에 사람들은 자연스럽게 민윤서를 서승재의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서승재가 업계 사람들과 이야기를 주고받을 때 북적북적한 분위기를 좋아하지 않는 민윤서는 혼자 조용히 뒤쪽 구석 자리로 가서 앉았다.

그런데 바로 그때 입구 쪽이 술렁이기 시작해 민윤서의 시선을 끌었다.

민윤서는 천천히 고개를 들어 바라봤다.

신태현이 민윤아와 함께 안으로 들어오고 있었다.

신태현은 눈빛이 차가웠고 분위기는 차분했다.

민윤아는 신태현의 팔에 팔짱을 끼고 엷은 미소를 지으며 우아하게 행동했다. 두 사람은 누가 봐도 잘 어울리는 한 쌍이었다.

외교부 부국장인 신태현이 등장하자 그 자리에 있던 사람들 사이에서 작은 탄성이 흘러나왔고, 순식간에 모든 이목이 신태현에게로 쏠렸다.

신태현은 평온한 어조로 말했다.

“저는 오늘 윤아와 함께 온 것뿐이니 다들 저는 신경 쓰지 않으셔도 됩니다.”

말을 마친 뒤에는 민윤아를 바라봤다. 그것은 민윤서가 한 번도 본 적 없는 다정한 눈빛이었다.

한마디면 충분했다.

그 자리에 있는 사람들 모두 신태현이 민윤아를 위해 이 자리에 왔다는 걸 알게 되었다.

민윤아는 수줍게 고개를 숙였고, 민윤서는 작게 헛웃음을 흘린 뒤 시선을 거두었다.

자신의 남편이 언니와 함께 사람들 앞에서 다정한 부부인 척 연기하는 걸 보니 우습기도 하고 어처구니없기도 했다.

신태현의 진짜 아내인 민윤서는 애초부터 민윤아 대신 신태현과 결혼한 것이었다.

이제 민윤아는 민씨 가문으로 돌아왔고 유학도 마치고 귀국했으니 이제 대체품이었던 민윤서는 아무런 가치가 없어졌다.

민윤서는 고개를 숙여 계속해 서류를 넘겼지만 손에 힘이 잔뜩 들어가 손끝이 하얬다.

두 사람이 함께 올 거라는 걸 알고 있었음에도 그 광경을 직접 목격하니 가슴이 먹먹했다.

“저 사람이 민씨 가문에서 잃어버렸다가 찾은 친딸이에요? 역시 진짜 명문가 아가씨는 분위기부터 다르네요.”

“남의 자리를 그렇게 오래 차지했으면 이제는 돌려줘야죠.”

“신태현 씨 말이에요. 민윤서 씨한테 속아서 약기운에 실수를 저질러 어쩔 수 없이 결혼했대요.”

“남의 가족도 빼앗고, 형부까지 가로챘다는 거네요. 정말 뻔뻔한 사람이네요.”

사람들이 수군대는 소리가 빠짐없이 민윤서의 귀에 날카롭게 꽂혔다.

민윤서가 모습을 드러내는 경우는 매우 드물었기에 민윤서를 알아보는 사람은 없었다. 그래서 사람들은 더 거리낌없이 험담을 이어갔다.

그런 얘기들을 들은 서승재는 눈빛이 순식간에 어두워지면서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

“현명한 사람은 헛소문을 퍼뜨리지 않는 법이죠. 그리고 이런 행사에서 험담을 하는 건 적절치 않은 것 같네요.”

그 말이 끝나자 주변이 순식간에 조용해졌다.

그리고 그제야 신태현의 시선이 천천히 서승재에게로 향했다.

차분하면서도 차가운 눈빛이었다. 그냥 평범한 시선인데도 불구하고 마치 윗사람이 압박감을 주는 듯한 착각이 들었다.

서승재는 무심한 눈빛으로 민윤아를 힐끗 보더니 신태현을 바라보며 말했다.

“두 분 굉장히 가까운 사이인가 봐요.”

서승재의 시선이 민윤아의 얼굴로 향했다.

“이분이 신태현 씨 아내분인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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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제 와서 사랑한다니   제30화

    평소에는 거의 쓰지 않는 카드였다.하지만 외할머니가 생사의 갈림길에 선 지금, 민윤서는 어떻게든 가족들에게 도움이 되고 싶었다.민윤서는 원무과 직원에게 카드를 내밀었다.“이 카드로 먼저 결제해 주세요.”직원은 카드를 받아 단말기에 여러 차례 결제를 시도하다가 난처한 표정으로 민윤서를 바라봤다.“죄송합니다. 이 카드는 사용 정지된 카드입니다.”“사용 정지됐다고요?”민윤서는 그대로 굳어버렸다. 순간 온몸의 피가 거꾸로 흐르는 기분이었다.불과 지난주만 해도 신씨 가문 어르신 생신 선물을 준비하면서 이 카드로 결제했었다.며칠 사이에 카드가 갑자기 정지될 리는 없었다.답은 하나뿐이었다.신태현이 직접 추가카드 사용을 막은 것이었다.민윤서는 허탈한 마음에 한숨만 내쉬었다.신태현은 이혼만큼은 끝까지 허락하지 않았으면서도 아무런 언질도 없이 추가 신용카드부터 끊어 버렸다.‘벌인 걸까. 경고인 걸까. 결국 나더러 다시 찾아가 무릎이라도 꿇으라는 건가?’민윤서는 그 자리에 굳은 듯 서 있었다. 손발이 차갑게 식어 갔고 손끝은 덜덜 떨려왔다.돌려받은 블랙카드를 바라보는 얼굴은 핏기 하나 없이 창백했다.창백하게 질린 민윤서의 얼굴을 지켜보던 주민석은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윤서야, 너무 걱정하지 마. 오빠가 어떻게든 방법을 찾아볼게.”주민석은 민윤서에게 이런 블랙카드가 있을 리 없다는 걸 알고 있었기에 그것이 신태현의 카드일 거로 생각했다.그리고 지금 카드가 정지됐다는 사실만으로도 민윤서와 신태현의 결혼 생활에 심각한 문제가 생겼다는 것을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었다.주민석은 곧장 원무과 직원을 향해 말했다.“죄송합니다, 치료비는 오늘 안으로 반드시 마련하겠습니다.”두 사람은 다시 응급실 앞으로 걸음을 옮겼다.마침 의료진들이 설명을 마치고 응급실 안으로 들어갔다.민윤서는 멍하니 그 자리에 서 있었다.공허한 눈으로 주민석의 지친 옆모습과 초췌한 부모님의 얼굴을 바라보는 순간, 가슴 한가운데가 칼로 도려내는 듯 아려 왔다.그동안 주민석

  • 이제 와서 사랑한다니   제29화

    이제는 정말 지칠 대로 지쳤던 터라, 민윤서는 눈을 내리깔며 떨리는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신태현, 우리 이혼하자.”신태현은 여전히 담담한 표정이었다. 얼굴에는 아무런 동요도 없었다.이윽고 천천히 입을 열었다.“민윤서, 잘 들어. 난 결혼에 기대어 출세할 필요 없어. 지금 넌 너무 감정적이야. 그런 상태에서 하는 말은 아무 의미 없어. 방금 한 말은… 못 들은 걸로 할게.”민윤서의 눈빛이 싸늘하게 식었다.신태현은 민윤서를 내려다봤다. 깊게 가라앉은 눈빛에는 여전히 아무런 감정도 읽히지 않았다.“대신 내가 한 말만큼은 똑똑히 기억해 둬.”말을 마친 신태현은 더 이상 민윤서를 돌아보지 않았다. 그대로 몸을 돌려 2층 서재로 향했다.늘 그렇듯 냉정하고 단호했다. 신태현이 한 번 내린 결정은 누구도 바꿀 수 없었다.국제 무대에서 숱한 협상과 이해관계를 조율해 온 신태현에게 이혼쯤은 고민거리조차 되지 않는 듯했다.민윤서는 그 자리에 굳은 듯 서 있었다.온몸의 힘이 한순간에 빠져나간 것만 같았다. 아무리 애를 써도 아무것도 바꿀 수 없다는 무력감이 몸을 무겁게 짓눌렀다.마치 온 힘을 다해 주먹을 휘둘렀는데도 아무것도 맞추지 못한 듯한 망연자실한 기분이었다.신태현은 끝까지 화를 내지도, 목소리를 높이지도 않았다.그런데 오히려 그런 태도가 더 잔인했다.겉으로는 담담하고 차분했지만, 한마디 한마디에는 가시가 숨어 있어 가장 아픈 곳만 정확히 찔렀다.민윤서는 텅 빈 거실 한가운데 우두커니 서서 싸늘하게 식어 가는 몸을 감싸안았다.수년을 살아온 이 집은 더 이상 집이 아니라 벗어날 수 없는 감옥처럼 느껴졌다.그리고 오랫동안 사랑했던 남자가 결국 이런 사람이었다는 사실은 민윤서의 가슴을 아프게 했다.잠시 뒤 안미숙이 김이 모락모락 나는 국 한 그릇을 들고 다가왔다.“작은 사모님, 도련님께서 꼭 드시라고 하셨습니다.”민윤서는 눈을 감았다가 천천히 떴다.이제야 신태현이 마지막으로 남긴 말의 의미를 분명히 이해했다.신태현의 말을 거스르는 순간,

  • 이제 와서 사랑한다니   제28화

    민윤서의 얼굴이 차갑게 굳었다.신태현의 눈에는 민윤서의 노력도, 연구를 위해 쏟아부은 시간도, 청림바이오에서 온 힘을 다해 버텨 온 순간들도 아무런 가치가 없는 것처럼 보였다.신태현에게 필요한 것은 열정적으로 삶을 살아가는 민윤서가 아니었다.얌전히 정해진 자리에 머물며 말 잘 듣고 번거로운 일을 만들지 않는 아내, 그것으로 충분했다.“무슨 권리로 내 자유까지 간섭하는데?”이제는 일까지 그만두라고 했다.민윤서는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신태현은 한 번 입 밖에 낸 말은 반드시 실행하는 사람이라는 것을. 한 번 결정하면 좀처럼 뜻을 굽히지 않는 사람이기도 했다.신태현은 더 이상 민윤서를 바라보지 않았다. 시선을 내려 다시 서류를 훑을 뿐, 민윤서의 감정에는 조금도 관심을 두지 않았다.아니, 정확히 말하면 애초부터 민윤서의 감정 따위는 신경 쓰지 않았다.신태현이 담담하게 입을 열었다.“민윤서, 결혼은 장난이 아니야.”민윤서는 허탈한 웃음을 흘렸다.“당신 입에서 그 말이 나올 줄은 몰랐네.”‘먼저 불륜을 저지른 사람이 누군데. 애초에 당신이 사랑한 사람은 민윤아였잖아. 내가 물러나 둘을 이어 주겠다는데도, 왜 끝까지 이혼은 하지 않으려는 거야?’민윤서는 깊게 숨을 들이마신 뒤 차분히 말했다.“결국 당신은 체면을 지키고 싶은 거잖아. 이혼해서 나한테 자유를 줘. 공식적으로는 이혼한 사실을 밝히지 않으면 되잖아. 그러면 당신 커리어에도 아무런 지장 없을 거야.”민윤서가 원하는 것은 거창한 것이 아니었다. 오직 자유 하나뿐이었다.신태현은 끝내 고개를 들지 않았다.아무 대답도 하지 않은 채 손끝에서 만년필을 한 바퀴 굴리더니 서류에 결재 사인을 남겼다.“신태현, 내 말 듣고는 있는 거야?”그래도 신태현은 반응하지 않았다.민윤서는 성큼 다가가 신태현의 손에서 서류를 빼앗아 그대로 옆으로 내던졌다.순간적으로는 당장이라도 갈기갈기 찢어 버리고 싶었다.하지만 서류마다 빼곡하게 적힌 내용이 모두 중요한 기밀이라는 사실을 떠올리자 차마 손을

  • 이제 와서 사랑한다니   제27화

    민윤서는 깊게 숨을 들이마셨다.사회적 지위 때문에, 최상위 권력층에 있는 신태현에게 결혼은 결코 두 사람만의 문제가 아니었다.체면이었고 이해관계였으며 세상의 평가를 좌우하는 요소였다.신태현에게 필요한 것은 안정적이고 행복해 보이는 결혼이었다.이미 부부로서의 관계가 완전히 무너졌고 아내를 향한 사랑이 남아 있지 않더라도, 겉으로만 흠잡을 데 없는 결혼 생활을 유지하면 그만이었다.그리고 민윤서는 그런 결혼 생활을 유지하기에 가장 적합한 사람이었다. 그 결혼 생활을 떠받치는 가장 순종적인 장식품에 불과했다.민윤서는 천천히 눈을 감았다. 가슴속까지 서늘하게 식어 갔다.더는 선택할 권리조차 없었다. 가족의 안전도, 외할머니의 병원비도, 온 가족의 생계도 모두 신태현의 손에 달려 있었기 때문이었다.민윤서는 자신이 상처받는 것은 견딜 수 있었지만, 자신의 선택 때문에 가족들까지 벼랑 끝으로 내몰리는 것만은 감당할 수 없었다.민윤서는 휴대전화를 쥔 손에 힘을 꾹 주었다.이를 악물고 북받치는 감정을 억눌러 통화를 끊은 뒤, 무거운 발걸음으로 계단을 내려갔다.예상대로 건물 앞 가로등 아래에는 낯익은 검은 세단 한 대가 세워져 있었다.운전석 창문을 통해 진현수가 보였다.민윤서를 발견한 진현수는 곧바로 차에서 내려 뒷문을 열어 주며 정중하게 손을 내밀었다.“사모님, 국장님께서 모시고 오라고 하셨습니다.”민윤서는 그 자리에 선 채 차 문만 바라봤다.마치 사람을 집어삼킬 듯한 거대한 동굴을 마주한 것처럼 쉽사리 발이 떨어지지 않았다.민윤서의 차갑게 굳은 얼굴을 본 진현수는 속으로 못마땅하다는 듯 혀를 찼다.‘신씨 가문 같은 명문가에 시집가 최고만 누리며 살면서 대체 뭐가 부족하다는 거야. 사모님 자리에서 편하게 호의호식하면 될 일을, 괜히 집까지 뛰쳐나와 고집을 부리고 있으니. 정말 복에 겨운 줄도 모르고 화를 자초하는군.’물론 그런 생각을 입 밖으로 꺼낼 수는 없었다.진현수는 끝까지 공손한 태도를 유지한 채 민윤서의 선택을 묵묵히 기다렸다.민윤서

  • 이제 와서 사랑한다니   제26화

    민윤서는 자신의 감정 때문에 서승재가 평생을 바쳐 일군 청림바이오를 무너뜨릴 수도 없었다.그리고 이 프로젝트 하나만 바라보며 오랜 세월 함께 달려온 동료들의 노력을 하루아침에 물거품으로 만들 수도 없었다.서승재는 애써 담담한 척하는 민윤서를 바라보다가 힘겹게 입을 열었다.“윤서야... 미안하다. 괜히 너만 힘든 일을 떠안게 했네.”민윤서는 옅게 미소 지었다.“일은 일이잖아요. 사적인 감정까지 끌고 오면 회사가 어떻게 돌아가겠어요? 결국 비즈니스는 이익으로 움직이는 거고요.”서승재는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잠시 침묵이 흐른 뒤, 서승재가 다시 말했다.“민윤아랑 직접 부딪히기 싫으면 앞으로는 내가 상대할게.”민윤서는 가볍게 고개를 저었다.“괜찮아요.”민윤아가 청림바이오에 들어오는 일은 이미 막을 수 없는 흐름이었다.오늘 거절한다고 끝날 일이 아니었다. 내일이면 또 다른 방법으로 민윤아를 들여보내려 할 테니까.신태현이라면 얼마든지 그렇게 할 수 있는 사람이었다.생각해 보면 신태현이 누군가를 위해 이렇게까지 애쓰는 모습은 처음이었다.하지만 그 대상은 단 한 번도 민윤서였던 적이 없었다. 늘 해외에 머물던 신태현은 민윤서가 집에서 고열로 의식을 잃었을 때조차 연락이 닿지 않았다.대화를 마친 민윤서는 다시 업무에 몰두했다.자료를 몇 번이고 다시 확인하고 약물 성분 데이터를 반복해서 분석했다.끝없이 일에 파묻혀 있어야만 가슴 깊은 곳에서 밀려오는 씁쓸함과 모멸감을 잠시라도 잊을 수 있었다.정신없이 일하다 보니 어느새 창밖은 완전히 어두워져 있었다.사무실에도 대부분의 사람이 이미 퇴근한 뒤였다.민윤서는 무거운 몸을 일으켜 책상을 정리한 뒤 조용히 회사를 나섰다.‘이혼하면 돼. 모든 게 정리되면... 다 끝날 테니까.’민윤서는 오래된 빌라 앞에 도착해 현관문을 열려다 걸음을 멈췄다.문 가까이 다가가자, 안에서 들려오는 가족들의 목소리가 희미하게 새어 나왔다.낡은 건물이라 방음이 좋지 않았다. 애써 목소리를 낮추고 있었지만,

  • 이제 와서 사랑한다니   제25화

    민윤아는 지금 신태현이 공개적으로 곁에 두고 있는 사람이었다.그런 민윤아가 굳이 청림바이오 프로젝트에 참여하겠다고 나선 것은 누구나 봐도 민윤서를 겨냥한 행동이었다.도발이었고 우월감을 과시하려는 의도이기도 했다.받아들이면 민윤서는 회사 안에서 난처한 처지에 놓이게 될 터였다.하지만 거절하면 국가 핵심 연구 과제는 다른 기업으로 넘어갈 가능성이 컸다.그렇게 되면 청림바이오가 수년 동안 공들여 준비해 온 프로젝트는 물거품이 될 수 있었고 회사 전체가 큰 타격을 입는 것도 피할 수 없었다.서승재는 무심코 고개를 돌려 가까이에 서 있는 민윤서를 바라봤다.민윤서는 눈을 내리깔고 있었다.길게 드리운 속눈썹이 옅은 그림자를 드리우고 있었지만, 표정에는 어떤 동요도 비치지 않았다.조금 전 이태섭 박사가 꺼낸 제안이 자신과는 아무 상관도 없는 일인 것처럼 담담한 모습이었다.서승재는 그 제안을 거절할 생각이었다.프로젝트가 무산되더라도 민윤서에게 이런 모욕을 감수하게 하고 싶지는 않았다.하지만 민윤서의 잔잔한 눈빛과 마주한 순간, 목까지 올라왔던 말은 끝내 삼켜 버렸다.민윤서는 서승재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하지만 회사는 혼자만의 것만은 아니었다.두 사람이 말없이 시선을 주고받는 사이, 민윤서가 먼저 이태섭 박사를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박사님, 저희는 늘 공과 사를 확실히 구분하는 편입니다. 개인적인 문제 때문에 회사에 영향을 주는 일은 없을 겁니다. 민윤아 씨께서 청림바이오에 합류하시겠다면 저희도 기꺼이 함께하겠습니다.”서승재는 미간을 찌푸린 채 무언가 말하려 했다.그러나 민윤서는 가볍게 고개를 저으며 괜찮다는 뜻을 전했다.그 모습을 본 서승재의 표정은 더욱 굳어졌다.이태섭 박사는 만족스러운 듯 고개를 끄덕였다. 이내 시선을 민윤서에게 옮기더니 천천히 물었다.“서 대표 비서인가?”서승재는 곧바로 한 걸음 앞으로 나서며 민윤서를 소개했다.“박사님, 이쪽은 민윤서 수석연구원입니다. 이번 프로젝트에서 핵심 약물 분석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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