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완성의 페르소나

미완성의 페르소나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6-16
By:  노블다크Ongoing
Language: Korea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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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0년대 말, 버블 경제의 열기로 가득했던 일본. 사람들은 네온 아래에서 사랑을 이야기했고, 텔레비전 속 아이돌을 바라보며 이 화려한 시대가 영원히 계속될 것이라 믿고 있었다. 미야모토 아스카는 그런 시대 한가운데를 살아가는 여자였다. 화려한 미모와 사람의 시선과 감정을 읽는 재능으로 잡지 모델로 주목받게 된 그녀는, 결국 깨닫게 된다. 사람들이 사랑하는 것은 진짜 감정이 아니라, “자신들이 보고 싶어 하는 이미지”라는 사실을. 한편, 국민급 아이돌 사쿠라기 유메코는 완벽한 미소와 청순한 이미지 뒤편에서 자신의 욕망과 불안을 숨긴 채 살아가고 있었다. 누구보다 사랑받는 존재이면서도, 동시에 누구보다 “선택받지 못하게 되는 순간”을 두려워하는 인간이기도 했다. 교토 명문 료칸의 후계자 후지와라 요시노리와의 만남을 계기로, 아스카는 상류층 세계와 버블 시대의 화려한 이면 속으로 조금씩 발을 들여놓게 된다. 긴자의 클럽, 정재계의 접대 문화, 여성의 이미지가 소비되는 세계 속에서 그녀는 점점 “사람들이 원하는 얼굴”을 완벽하게 연기하게 되어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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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apter 1

001#. 익숙해졌다는 것

다리를 모으고 앉는 자세가 생각보다 오래 버티기 힘들다는 걸, 그날 처음 알았다.

“허리를 조금 더 세워주세요.”

조용한 목소리가 들렸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지만, 몸은 이미 굳어 있었다. 무릎 아래로 감각이 희미해지고 있었다. 다다미의 감촉이 느껴졌다. 시선은 자연스럽게 아래로 떨어졌다. 정갈하게 접힌 자신의 손. 그리고 그 위에 얹힌, 낯선 옷감. 기모노였다.

“…익숙해지실 거예요.”

그 말이 위로인지 확인인지 잘 구분되지 않았다. 나는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 아주 잠깐 도쿄의 밤을 떠올렸다.

*

*

*

네온이 번진 유리창이 먼저 떠올랐다. 빗물인지, 김인지 모를 물기가 번져서, 바깥 풍경이 흐릿하게 일그러져 있었다. 그 위로 색이 겹쳐졌다. 빨강, 보라, 파랑. 음악은 너무 커서, 말소리는 서로의 입술을 읽어야 겨우 이어졌다.

“아스카, 오늘 분위기 좋네.”

누가 그렇게 말했는지는 기억나지 않았다. 비슷한 말은 늘 비슷한 얼굴로 반복됐으니까. 나는 웃었다. 거울을 보지 않아도, 어떤 표정인지 알고 있었다. 눈을 조금 더 가늘게 뜨고, 입꼬리를 아주 조금만 올리는 정도. 과하지 않게, 그렇다고 부족하지도 않게. 그 정도면 충분했다.

유리잔에 남아 있던 얼음이 부딪히며 가볍게 소리를 냈다. 손목을 살짝 기울이는 것만으로도 시선이 따라붙는 걸 느꼈다. 누가 보고 있는지 굳이 확인할 필요는 없었다. 그건, 늘 그렇듯 당연한 일이었으니까.

어렵지 않다는 건, 결국 다 비슷했다. 누군가가 무엇을 원하는지 알아차리는 일. 그걸 굳이 말로 확인하지 않아도 되는 순간. 시선이 머무는 위치, 손이 멈추는 타이밍, 웃음이 길어지는 정도. 그런 것들이 전부 힌트였다.

“아스카, 너는 진짜… 사람 기분 좋게 하는 재주가 있다니까.”

또 비슷한 말이었다. 나는 웃으면서 고개를 기울였다. 이번에는 조금 더 부드럽게, 조금 더 가까운 거리에서. 그게 더 좋아 보인다는 걸 알고 있었으니까. 가끔은, 내가 아니라 다른 누군가를 흉내 내고 있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하지만 그건 오래 가지 않았다. 그런 생각을 붙잡고 있으면, 표정이 어색해진다는 걸 이미 알고 있었으니까.

언젠가부터는 생각하지 않기로 했다. 그리고, 그날 밤도 마찬가지였다. 음악이 바뀌고, 사람이 바뀌고, 말이 바뀌어도, 내가 해야 할 건 거의 변하지 않았다. 적당한 타이밍에 웃고, 적당한 순간에 시선을 주고, 필요할 때는 아무 말도 하지 않는 것. 그것만으로 충분했다. 적어도, 그때까지는.

화장실 거울은 클럽 안보다 훨씬 밝았다. 형광등이 그대로 내려와서, 얼굴의 윤곽이 숨을 곳 없이 드러났다. 방금까지의 분위기가 전부 걷힌 자리에서, 나는 잠깐 서 있었다. 거울 속의 나는, 조금 전까지 웃고 있던 사람과 같은 얼굴이었지만 어딘가 달라 보였다. 정확히 어디가 다른 건지 바로 짚어낼 수는 없었지만, 아까 그 표정은 아니었다.

“…아까.”

입 밖으로 작게 중얼거렸다. 눈을 조금 더 가늘게 뜨고, 입꼬리를 아주 조금만 올린다. 그대로 몇 초. 뭔가 부족했다. 방금 전보다 덜 자연스러웠다. 나는 한 번 더 시도했다. 이번에는, 바로 웃지 않았다. 시선을 먼저 떨구고, 다시 올리는 데 아주 짧은 시간을 두었다. 그리고 나서야, 천천히 입꼬리를 올렸다. 거울 속의 얼굴이 달라졌다. 조금 전보다, 더.

…좋아 보였다. 나는 그 상태로 몇 초 더 서 있었다. 표정을 지우지 않은 채, 그 얼굴을 확인하듯 바라봤다. 이상하게도, 낯설지 않았다. 문을 밀고 다시 안으로 들어갔을 때, 음악은 바뀌어 있었다. 누군가가 나를 불렀다. 나는 고개를 돌렸다. 이번에는, 아까 거울 앞에서 만든 그 표정으로.

“…아스카, 잠깐.”

나는 대답하지 않고, 그대로 시선을 마주쳤다. 아주 짧게. 그리고 나서야, 웃었다. 그 사람의 말이 끊겼다. 나는 그걸 놓치지 않았다. 말을 잇지 못한 쪽은 항상 저쪽이었다.

“…어, 아니… 그냥, 뭐 마실래?”

나는 어깨를 살짝 으쓱하며 고개를 기울였다. 대답은 하지 않았다. 대신 시선을 한 번 더 떼었다가, 다시 마주쳤다. 그 사이에, 상대의 눈이 나를 따라오는 걸 느꼈다.

“아스카는, 뭐 좋아해?”

아까보다 말투가 부드러워져 있었다. 나는 잠깐 생각하는 척을 했다. 실제로 생각할 건 없었지만, 그 몇 초가 필요했다.

“...아무거나.”

짧게 말하고, 잔을 들어올렸다. 얼음이 부딪히는 소리가 작게 울렸다. 그걸로 충분했다. 상대는 그 이상 묻지 않았다. 대신, 조금 더 가까이 다가왔다. 말수가 줄어든 건 나였는데, 분위기를 끌고 가는 건 이상하게도 저쪽이었다. 나는 그걸 가만히 지켜봤다. 아, 이렇게 되는구나. 아까 거울 앞에서 만든 표정, 타이밍, 시선. 그 모든 게 그대로 이어져서, 하나의 흐름처럼 굴러가고 있었다.

나는 그 흐름을 일부러 끊지 않았다. 그대로 두는 편이 더 잘 흘러간다는 걸, 이미 알고 있었으니까.

“아스카, 오늘… 다른 날보다 더 눈에 띄는 거 알아?”

그가 잔을 내려놓으며 몸을 조금 더 가까이 기울였다. 음악이 커서인지, 굳이 그렇게 하지 않아도 될 거리였다. 나는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 시선을 잠깐 아래로 떨궜다가, 다시 올렸다. 그 사이를 그가 놓치지 않는 걸 알고 있었다.

“아까부터 계속 보게 되더라.”

그의 시선이 내 얼굴에 고정된 채로 움직이지 않았다. 나는 웃지 않았다. 입꼬리를 올리기 직전에서, 아주 잠깐 멈췄다.

“…그래요?”

짧게, 거의 흘리듯 말하고는 시선을 옆으로 빼냈다. 다시 마주칠 때까지의 그 짧은 공백이 길게 늘어나는 걸 느꼈다.

“응. 진짜로.”

그는 웃으면서 고개를 기울였다. 손등이 테이블 위에서 내 쪽으로 조금 더 가까워졌다. 닿지는 않았지만, 의식하지 않을 수 없는 거리였다.

“이따 나갈래? 여기 시끄럽잖아.”

나는 그 말을 바로 받지 않았다. 대신 잔을 들어 올려 입술에 가져갔다. 마시지는 않고, 그대로 멈췄다. 유리잔 너머로 그의 시선이 따라붙는 게 보였다. 몇 초 뒤에야 잔을 내려놓고, 아주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글쎄요.”

대답은 모호했지만, 그게 오히려 더 분명하게 들렸을 거다. 그는 웃음을 참지 못한 듯 작게 숨을 내쉬었다.

“넌, 진짜 어렵네.”

나는 그 말을 듣고서야, 그제야 조금 웃었다. 이 정도면, 충분하겠네. 그는 잠깐 웃다가, 더 가까이 다가왔다. 이제는 굳이 몸을 기울이지 않아도 될 거리였다. 어깨가 거의 닿을 듯 말 듯한 위치. 음악 소리는 여전히 컸지만, 이상하게도 그의 목소리만 또렷하게 들렸다.

“이렇게 있으면, 말 안 해도 되니까 좋은 것 같아.”

나는 시선을 돌리지 않았다. 대신, 아주 조금만 고개를 기울였다. 그가 더 가까워지기 쉬운 각도라는 걸 알고 있었다. 손등이 스쳤다. 의도였는지, 아닌지는 알 수 없었다. 확인할 필요도 없었다. 그 정도의 애매함이 오히려 더 오래 남는다는 걸, 이제는 알고 있었다. 나는 아무 반응도 하지 않았다. 피하지도, 잡지도 않았다. 그 사이에, 그가 숨을 아주 조금 멈춘 것처럼 느껴졌다.

“…아스카.”

이름을 부르는 목소리가 아까보다 낮아져 있었다. 나는 그제야 시선을 살짝 내렸다가, 다시 올렸다. 이번에는 웃지 않았다. 그냥 그대로 바라봤다. 그걸로 충분했다. 클럽 문을 밀고 나오자, 음악이 한순간에 끊겼다. 대신 밤공기가 바로 들어왔다. 안쪽에 남아 있던 열기가 식으면서, 피부 위로 얇게 식은 기운이 내려앉았다.

“조용하네.”

그가 웃으며 말했지만, 나는 대답하지 않았다. 길가에는 사람이 거의 없었다. 네온이 번진 간판 불빛이 젖은 아스팔트 위에서 흔들리고 있었다. 나는 천천히 걸었다. 일부러 속도를 맞추지도, 떼어내지도 않았다. 그가 내 옆에 붙어 걷는 걸 그대로 두었다.

“아까보다 훨씬 낫다.”

그의 목소리가 가까워졌다. 손이 스칠 듯 말 듯한 거리. 나는 피하지 않았다. 대신 시선을 앞쪽에 두었다. 몇 걸음 더 걸었을 때, 손이 닿았다. 나는 그대로 두었다. 손을 잡지도, 빼지도 않았다. 그 상태로 몇 초. 그 짧은 시간이 길게 늘어나는 걸 느꼈다.

“...솔직히 말해도 돼?”

나는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 시선을 조금 옆으로 돌렸다. 그가 말을 꺼내기 쉽게, 그렇지만 완전히 받아주진 않는 거리. 그는 잠깐 머뭇거리다가, 결국 말을 꺼냈다.

“오늘… 같이 있자.”

나는 고개를 돌렸다. “어디요?” 알면서도 물었다.

그는 잠깐 웃더니, 시선을 피하지 않고 말했다. “…하룻밤 정도, 괜찮잖아.”

말이 끝나는 순간, 공기가 조금 식었다. 나는 바로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 그를 가만히 바라봤다. 그가 농담처럼 말하려다 실패한 얼굴을 하고 있다는 걸 확인하듯이.

“너도… 싫은 건 아니잖아.”

나는 그 말에 아주 작게 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고개를 살짝 기울였다. “싫은 건 아니에요.”

그의 표정이 조금 풀렸다. 그 순간을 기다렸다는 듯이. 나는 말을 이었다.

“그렇지만, 안 갈래요."

그는 잠깐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왜?”

나는 웃지 않았다. "그건 제가 정하는 거니까요."

이번에는 시선을 피하지 않았다. 그대로 마주 봤다. 그가 더 말할지, 멈출지 확인하듯이. 몇 초가 흘렀다. 그는 결국 웃음을 지우지 못한 채, 고개를 끄덕였다.

“…진짜 어렵네, 너.”

나는 그 말을 듣고서야 아주 조금 웃었다. 이번에는, 아까보다 훨씬 짧게.

“그게 좋다면서요.” 대답을 기다리지 않고, 차갑게 돌아섰다.

한참을 걷다 보니 어느새 소음이 완전히 끊겼다. 조용했다. 방금 전까지 귀를 채우고 있던 음악이 거짓말처럼 사라진 자리에서, 하이힐 소리만 남았다. 나는 속도를 늦추지 않았다. 멈추지 않으면, 생각도 따라오지 않는다는 걸 알고 있었다.

조금 전 그의 표정, 말투, 타이밍. 하나씩 떠올랐다가, 금방 정리됐다. 깔끔하게 거절했다.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나는 길가에 멈춰 선 차 유리창에 비친 내 얼굴을 스쳤다. 조명 때문에 윤곽이 흐릿하게 번져 있었다. 아까보다 특별히 달라 보이지는 않았다. 그게 더 나았다. 변한 건 얼굴이 아니라, 순서였다. 언제 보고, 언제 웃고, 언제 말하지 않는지. 그걸 내가 정했다는 것.

나는 시선을 떼고 다시 걸었다. 뒤에서 누가 나를 부르지 않는다는 걸 확인할 필요는 없었다. 아마 그에게 내 모습은, 점점 멀어져 갔겠지.

조금 전까지만 해도, 그냥 자연스럽게 흘러간다고 생각했던 것. 그게 아니라는 걸, 이제는 알고 있었다. 그렇게 다시 걷기 시작했다.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하지만, 완전히 똑같지는 않았다.

"이런 제안을 받는 것도... 이제는 익숙해졌으니까." 나는 무의식적으로 작게 내뱉었다.

...그건 내가 어떤 식으로 보이고 있는지, 이미 알고 있다는 뜻이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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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01#. 익숙해졌다는 것
다리를 모으고 앉는 자세가 생각보다 오래 버티기 힘들다는 걸, 그날 처음 알았다.“허리를 조금 더 세워주세요.”조용한 목소리가 들렸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지만, 몸은 이미 굳어 있었다. 무릎 아래로 감각이 희미해지고 있었다. 다다미의 감촉이 느껴졌다. 시선은 자연스럽게 아래로 떨어졌다. 정갈하게 접힌 자신의 손. 그리고 그 위에 얹힌, 낯선 옷감. 기모노였다.“…익숙해지실 거예요.”그 말이 위로인지 확인인지 잘 구분되지 않았다. 나는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 아주 잠깐 도쿄의 밤을 떠올렸다.***네온이 번진 유리창이 먼저 떠올랐다. 빗물인지, 김인지 모를 물기가 번져서, 바깥 풍경이 흐릿하게 일그러져 있었다. 그 위로 색이 겹쳐졌다. 빨강, 보라, 파랑. 음악은 너무 커서, 말소리는 서로의 입술을 읽어야 겨우 이어졌다.“아스카, 오늘 분위기 좋네.”누가 그렇게 말했는지는 기억나지 않았다. 비슷한 말은 늘 비슷한 얼굴로 반복됐으니까. 나는 웃었다. 거울을 보지 않아도, 어떤 표정인지 알고 있었다. 눈을 조금 더 가늘게 뜨고, 입꼬리를 아주 조금만 올리는 정도. 과하지 않게, 그렇다고 부족하지도 않게. 그 정도면 충분했다.유리잔에 남아 있던 얼음이 부딪히며 가볍게 소리를 냈다. 손목을 살짝 기울이는 것만으로도 시선이 따라붙는 걸 느꼈다. 누가 보고 있는지 굳이 확인할 필요는 없었다. 그건, 늘 그렇듯 당연한 일이었으니까.어렵지 않다는 건, 결국 다 비슷했다. 누군가가 무엇을 원하는지 알아차리는 일. 그걸 굳이 말로 확인하지 않아도 되는 순간. 시선이 머무는 위치, 손이 멈추는 타이밍, 웃음이 길어지는 정도. 그런 것들이 전부 힌트였다. “아스카, 너는 진짜… 사람 기분 좋게 하는 재주가 있다니까.”또 비슷한 말이었다. 나는 웃으면서 고개를 기울였다. 이번에는 조금 더 부드럽게, 조금 더 가까운 거리에서. 그게 더 좋아 보인다는 걸 알고 있었으니까. 가끔은, 내가 아니라 다른 누군가를 흉내 내고 있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하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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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02#. 수상한 남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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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04#. 가능성
"진짜네.”그가 물었다. “무엇이 말입니까.”나는 시선을 한 번 더 마주쳤다. “안 바뀌는 거요.”그는 잠깐 생각하듯 시선을 움직였다. 아주 미세하게. 그 다음에야 말했다. “굳이 바꿀 필요가 없다고 생각해서요.”나는 그 말을 듣고, 고개를 아주 조금 기울였다. “왜요.”그는 잠깐 멈췄다. 그리고, 나를 봤다. 이번에는, 아주 조금 더 정확하게. “지금도 충분히 대화가 되고 있으니까요.”나는 그 말을 그대로 들었다. 그리고, 그 의미를 천천히 따라갔다. 대화. 지금 이 상태가. 나는 시선을 아주 미세하게 떼었다가, 다시 맞췄다. 입꼬리는 올리지 않았다. 대신, 그대로 말했다.“그건.” 아주 짧게 멈췄다. “대화가 아니라, 그냥 있는 건데요.”그는 그 말을 듣고도, 바로 반박하지 않았다. 대신, 아주 짧게 숨을 고른 뒤,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다면.”나는 시선을 그대로 두었다. 그 다음을 기다렸다.“있는 것도, 나쁘지 않다고 생각합니다.”나는 그 말을 듣고, 잠깐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몇 초. 조용했다. 손을 무릎 위에서 아주 미세하게 움직였다가 멈췄다. 그리고, 아무렇지 않게 말했다.“이상한 사람이네요.”그는 고개를 아주 조금 기울였다. “그런 이야기는, 자주 듣습니다.”나는 그 말을 듣고서야, 아주 조금 웃었다. 이번에는, 의식하지 않고 나온 쪽에 가까웠다. 짧게.“…그럴 것 같아요.”그 말이 끝난 뒤에도, 나는 시선을 거두지 않았다. 그 상태로 몇 초. 아까보다, 조금 더 길게. 그리고. 이번에는 내가 먼저 시선을 피하지 않았다. 그게. 조금 전과는 달랐다.그 상태로 몇 초 더 흘렀다. 길게 느껴지지는 않았다. 오히려, 그 길이가 그대로 유지되는 쪽이 자연스러웠다. 나는 먼저 눈을 깜빡였다. 아주 평범한 동작이었는데, 그걸 하고 나서야 시선의 온도가 아주 미세하게 바뀐 걸 느꼈다. 붙잡고 있던 걸, 일부러 풀지 않았는데도 느슨해지는 순간. 나는 그걸 그대로 두었다.“요시노리 씨.” 이름을 한 번 더 불렀다.그는 바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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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06#. 늦게 알아차린 얼굴
익숙해지는 건 생각보다 빨랐다. 그래서, 더 이상 물러설 곳이 없어졌다는 걸 늦게 알아차렸다. 처음에는 그저 불편한 정도라고 생각했다. 조금만 버티면 괜찮아질 거라고. 익숙해지기만 하면, 나아질 거라고. 실제로도 그랬다. 앉는 자세도, 시선을 두는 위치도, 말을 고르는 방식도. 몇 번 반복하고 나면 몸이 먼저 따라왔다.문제는 그 다음이었다. 어디까지가 ‘익숙해진 것’이고, 어디부터가 ‘그렇게 되어버린 것’인지, 구분할 수 없게 되는 순간이 있었다. 나는 그 경계를 놓쳤다. 의식하지 못한 채, 하나씩 받아들였고, 굳이 거부할 이유를 찾지 않았다. 그게 더 편했으니까. 그리고. 그 편함이 생각보다 오래 남았다.나는 시선을 아주 조금만 내렸다. 다다미 위에 가지런히 놓인 손, 무릎 위로 흐르는 옷감. 이제는 어색하지 않은 감촉이었다. 그 사실이, 이상하게도 더 분명하게 느껴졌다. 나는 언제부터, 이 자리에 앉아 있는 게 당연해졌을까. 그 질문은, 답을 요구하지 않았다. 이미 알고 있는 쪽에 가까웠으니까.***요시노리를 만났던 그날 밤, 비는 그치지 않았고 길 위에는 물기가 남아 있었다. 가로등 불빛이 번져서, 바닥이 흐릿하게 흔들렸다. 나는 그 위를 그대로 걸었다. 평소와 다를 건 없었다. 속도도, 시선도, 걸음의 간격도. 그때는 아무것도 모르고 있었다.그는 그냥 거기에 서 있었다. 가로등 아래, 빛이 닿는 자리에서. 혼자였다. 누군가를 기다리는 것 같지도 않았고, 무언가를 하고 있는 것도 아니었다. 나는 그대로 지나쳤다. 굳이 말을 걸 이유는 없었다. 그 정도의 거리는, 그냥 스쳐 지나가는 편이 더 자연스러웠으니까.“저기.”뒤에서 들린 목소리에, 나는 걸음을 멈췄다. 그제야 돌아봤다. 그는 아까와 같은 자리에 서 있었다. 시선도, 자세도, 거의 변하지 않은 채.“…길을 좀 여쭤봐도 될까요.”말투는 정중했다. 그 시간대에, 그 장소에서는 조금 어색할 정도로. 나는 잠깐 그를 봤다. 그리고, 별 생각 없이 답했다.“이쪽 아니에요.”그때까지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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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07#. 끝을 미루는 방식
아무것도 달라진 건 없었다. 그래서, 어디가 달라진 건지 더 늦게 알았다. 눈을 떴을 때, 바로 몸을 일으키지 않았다. 그 정도의 공백은, 이제는 익숙한 범위 안에 들어가 있었다. 나는 그걸 굳이 고치지 않았다. 맞추지 않아도, 문제는 없었으니까. 한 번 숨을 고르고,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발을 바닥에 내리는 감각도, 시선을 두는 위치도 어제와 크게 다르지 않았다. 거울 앞에 서는 것도, 따로 의식하지 않아도 이어졌다. 나는 거울을 봤다. 표정을 만들지 않았다. 그대로 몇 초. 익숙했다. 문제없었다.…그런데. 아주 짧게, 시선이 멈췄다. 이유를 바로 설명할 수는 없었다. 달라진 건 없었으니까. 나는 눈을 한 번 깜빡였다. 그리고, 아주 미세하게 입꼬리를 올렸다. 몇 초. 그대로 두었다. 자연스러웠다. 나는 그걸 확인하듯 한 번 더 바라봤다. 그리고, 그대로 지웠다. 그 정도면 충분했다.나는 시선을 떼고 돌아섰다. 더 확인할 필요는 없었다. 어제 있었던 일도 굳이 이어서 생각하지 않았다. 그런 종류의 일은, 대부분 그렇게 끝난다.…보통은. 나는 세면대 쪽으로 걸어갔다. 물을 틀고, 손을 적셨다. 차가운 감촉이 올라왔다. 그 정도의 자극이면, 다른 생각은 자연스럽게 밀려난다. 얼굴을 한 번 씻고 나서야 시야가 또렷해졌다. 나는 수건으로 물기를 닦아내면서, 아무 생각도 하지 않으려고 했다. 그게 더 편했으니까. 그런데. 아주 짧게.“…지루한 쪽이 더 편합니다.”반 년 전에 그가 했던 말이 그대로 떠올랐다. 나는 손을 멈추지 않았다. 수건을 걸고, 그대로 돌아섰다. 그 정도의 기억은, 붙잡지 않으면 사라진다. 굳이 남겨둘 필요는 없었다. 나는 옷장을 열었다. 익숙한 색, 익숙한 소재. 손을 뻗으면 바로 선택되는 것들. 잠깐 멈췄다가, 가장 가까운 걸 꺼냈다. 이유는 없었다. 그렇게 정리하는 쪽이 더 간단했다. 옷을 갈아입고, 머리를 정리하고, 문을 나섰다. 밖의 공기가 그대로 닿았다. 어제와 크게 다르지 않은 온도였다....거기서 나는 또 다시 도쿄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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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08#. 언젠가는
아무것도 바뀌지 않은 상태가 생각보다 오래 이어졌다. 처음에는 그게 당연하다고 생각했다. 굳이 바뀔 이유가 없었으니까. 말이 길어지지도 않았고, 시선이 늦어지지도 않았고, 거리도 그대로였다. 그 정도면 충분했다. 그렇게 두는 쪽이 더 편했다. 그런데. 어느 순간부터는, 그게 유지되고 있다는 사실 자체가 더 또렷하게 느껴졌다. 보통은 이쯤에서 하나쯤은 어긋난다. 이유 없이 말이 끊기거나, 타이밍이 조금 늦어지거나. 그런 종류의 변화가 자연스럽게 끼어든다.그런데 이번에는 그게 없었다. 나는 그걸 그대로 두고 있었다. 굳이 건드리지 않아도 되는 상태였으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주 미세하게. 어딘가 하나가 비어 있는 느낌은 사라지지 않았다.나는 그 빈 자리를 굳이 확인하려 하지 않았다. 확인하는 순간, 거기에 이름이 붙는다. 이름이 붙으면, 그쪽으로 기울어진다. 그건 원하지 않았다. 그래서 그대로 두었다. 손을 무릎 위에서 아주 미세하게 움직였다가 멈췄다. 시선은 정면에 둔 채, 조금도 흔들리지 않은 것처럼. 그 상태를 유지하는 건 어렵지 않았다. 이미 익숙해진 범위 안에 있었으니까.그런데. 아주 짧게, 그가 떠올랐다. 말이 이어지지 않던 간격, 굳이 덧붙이지 않던 태도. 나는 눈을 한 번 깜빡였다. 그 정도의 기억은, 붙잡지 않으면 사라진다. 그렇게 생각하면서도, 완전히 지워지지는 않았다. 그래서 더 건드리지 않았다. 그대로 두는 쪽이, 아직은 더 편했다.그 상태가 계속될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보통은, 오래 가지 않는다. 나는 시선을 아주 조금만 옆으로 흘렸다. 거기에 이유가 있는 건 아니었다. 그냥, 그렇게 하는 쪽이 더 자연스러웠다. 몇 초. 그보다 조금 더 긴 시간. 나는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오늘도, 갈까.나는 그 생각을 바로 붙잡지 않았다. 붙잡는 순간, 의미가 생긴다. 의미가 생기면, 선택이 된다. 선택이 되면, 이유가 따라온다. 그건 필요 없었다. 그래서 그대로 흘려보냈다. 손을 한 번 더 정리하듯 움직였다. 아무 일도 없었던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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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09#. 그대로 두었다
아무것도 이어지지 않은 채로 이어져 있었다. 그 사이를 굳이 설명하지 않아도, 상태는 이미 정리된 쪽에 가까웠다. 나는 그걸 따로 확인하지 않았다. 확인하는 순간, 그건 과정이 된다. 과정이 되면, 흐름이 생긴다. 그건 필요 없었다. 나는 그대로 앉아 있었다. 다다미 위에 무릎을 가지런히 두고, 허리를 세우고, 시선은 정면에 두고 있었다. 굳이 의식하지 않아도 그 자세는 무너지지 않았다. 손끝의 위치도, 숨을 고르는 간격도, 이미 몸에 익은 범위 안에 있었다.익숙해졌다는 생각은 하지 않았다. 그건 맞추려는 쪽에서 나오는 말에 가까웠다. 지금은, 그보다 조금 더 자연스러운 쪽이었다. 그렇게 되어 있었다. 나는 시선을 아주 조금만 아래로 내렸다. 무릎 위에 놓인 손이 보였다. 움직이지 않았다. 그 상태를 굳이 바꾸지 않았다.…문득, 떠오르는 건 있었다. 로비의 조명, 유리문 너머의 공기, 손에 들고 있던 얇은 종이의 감촉. 나는 눈을 한 번 깜빡였다. 그 정도의 기억은, 붙잡지 않으면 흐려진다. 굳이 남겨둘 필요는 없었다. 그래서 그대로 두었다. 사라지지 않는 쪽으로. 나는 시선을 다시 올렸다. 정면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그 상태가, 더 또렷하게 느껴졌다.그는 더 말하지 않았다. 나도, 굳이 이어가지 않았다. 그 상태가 그대로 이어졌다. 말이 없는 쪽이 더 안정적이었다. 굳이 하나를 덧붙이지 않아도, 흐트러지지 않았다. 나는 시선을 그대로 두었다. 정면, 아무것도 없는 쪽. 그 상태를 유지하는 건 어렵지 않았다.…익숙하네. 짧게 생각이 스쳤다. 나는 그걸 바로 지우지 않았다. 굳이 지울 필요가 없다고 느껴졌으니까. 손을 무릎 위에서 아주 미세하게 움직였다가 멈췄다. 그 정도의 조정이면 충분했다. 자세는 흐트러지지 않았다. 조용했다. 바깥에서 들려오는 소리도 거의 없었다. 복도를 지나는 발소리, 문이 닫히는 소리. 그 사이를 채우는 건 별로 없었다. 그게 더 나았다. 나는 눈을 한 번 깜빡였다. 그 동작이 끝난 뒤에도, 공기는 그대로였다.…여기서는, 변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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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10#. 전화선 너머
그는 바로 대답하지 않았다. 아주 짧게, 숨을 고르는 쪽에 가까운 공백이 있었다. 나는 수화기를 쥔 손을 아주 미세하게 움직였다가 멈췄다. 전화선 너머는 조용했다. 그런데. 끊어진 느낌은 아니었다.“…네.” 그가 천천히 말했다. “괜찮습니다.”나는 그 말을 들으면서 시선을 아주 조금만 내렸다. 테이블 위에 놓인 종이가 보였다. 반쯤 접혀 있었다. 나는 그걸 몇 초 동안 그대로 바라봤다.“늦었는데도요?” 짧게 물었다. 그는 잠깐 멈췄다. “아직 안 자고 있었습니다.”나는 그 대답을 그대로 들었다. 몇 초. 굳이 바로 이어가지 않았다. 전화에서는, 공백이 조금 더 길게 느껴졌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불편하지는 않았다.“…교토는.” 나는 천천히 말을 이었다. “원래 이렇게 조용해요?”그는 아주 미세하게 숨을 고르는 듯했다. “장소에 따라 다르겠지만.” 짧게. “지금은 그렇습니다.”나는 아주 미세하게 입꼬리를 올렸다가, 다시 지웠다. “…요시노리 씨 답네요.”그는 바로 반응하지 않았다. 아주 짧은 공백. 그리고. “그렇습니까.”나는 수화기를 귀에 댄 채, 시선을 천천히 옆으로 흘렸다. 창문 너머에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네.” 짧게 말했다. “급하지 않은 쪽.”그는 그 말을 듣고 잠깐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수화기 너머로 아주 미세한 숨소리만 이어졌다. 나는 시선을 그대로 두었다. 전화에서는 표정이 보이지 않았다. 그 대신, 말이 멈추는 간격이 조금 더 또렷하게 남았다.“…아스카 씨는.” 그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도쿄 쪽 같습니까.”나는 바로 대답하지 않았다. 아주 짧게 숨을 고르고, 수화기를 쥔 손을 조금만 고쳐 잡았다. 몇 초. 굳이 빨리 답할 필요는 없었다.“글쎄요.” 짧게 말했다. “원래는, 그런 쪽이 더 편했는데.” 그는 그 말을 끊지 않았다. 나는 시선을 아주 조금만 내렸다. 반쯤 접힌 종이가 그대로 보였다.“…요즘은 잘 모르겠네요.”말이 끝난 뒤, 짧은 공백이 이어졌다. 나는 그 상태를 그대로 두었다. 굳이 설명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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