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GIN1980년대 말, 버블 경제의 열기로 가득했던 일본. 사람들은 네온 아래에서 사랑을 이야기했고, 텔레비전 속 아이돌을 바라보며 이 화려한 시대가 영원히 계속될 것이라 믿고 있었다. 미야모토 아스카는 그런 시대 한가운데를 살아가는 여자였다. 화려한 미모와 사람의 시선과 감정을 읽는 재능으로 잡지 모델로 주목받게 된 그녀는, 결국 깨닫게 된다. 사람들이 사랑하는 것은 진짜 감정이 아니라, “자신들이 보고 싶어 하는 이미지”라는 사실을. 한편, 국민급 아이돌 사쿠라기 유메코는 완벽한 미소와 청순한 이미지 뒤편에서 자신의 욕망과 불안을 숨긴 채 살아가고 있었다. 누구보다 사랑받는 존재이면서도, 동시에 누구보다 “선택받지 못하게 되는 순간”을 두려워하는 인간이기도 했다. 교토 명문 료칸의 후계자 후지와라 요시노리와의 만남을 계기로, 아스카는 상류층 세계와 버블 시대의 화려한 이면 속으로 조금씩 발을 들여놓게 된다. 긴자의 클럽, 정재계의 접대 문화, 여성의 이미지가 소비되는 세계 속에서 그녀는 점점 “사람들이 원하는 얼굴”을 완벽하게 연기하게 되어간다.
View More다리를 모으고 앉는 자세가 생각보다 오래 버티기 힘들다는 걸, 그날 처음 알았다.
“허리를 조금 더 세워주세요.” 조용한 목소리가 들렸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지만, 몸은 이미 굳어 있었다. 무릎 아래로 감각이 희미해지고 있었다. 다다미의 감촉이 느껴졌다. 시선은 자연스럽게 아래로 떨어졌다. 정갈하게 접힌 자신의 손. 그리고 그 위에 얹힌, 낯선 옷감. 기모노였다. “…익숙해지실 거예요.” 그 말이 위로인지 확인인지 잘 구분되지 않았다. 나는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 아주 잠깐 도쿄의 밤을 떠올렸다. * * * 네온이 번진 유리창이 먼저 떠올랐다. 빗물인지, 김인지 모를 물기가 번져서, 바깥 풍경이 흐릿하게 일그러져 있었다. 그 위로 색이 겹쳐졌다. 빨강, 보라, 파랑. 음악은 너무 커서, 말소리는 서로의 입술을 읽어야 겨우 이어졌다. “아스카, 오늘 분위기 좋네.” 누가 그렇게 말했는지는 기억나지 않았다. 비슷한 말은 늘 비슷한 얼굴로 반복됐으니까. 나는 웃었다. 거울을 보지 않아도, 어떤 표정인지 알고 있었다. 눈을 조금 더 가늘게 뜨고, 입꼬리를 아주 조금만 올리는 정도. 과하지 않게, 그렇다고 부족하지도 않게. 그 정도면 충분했다. 유리잔에 남아 있던 얼음이 부딪히며 가볍게 소리를 냈다. 손목을 살짝 기울이는 것만으로도 시선이 따라붙는 걸 느꼈다. 누가 보고 있는지 굳이 확인할 필요는 없었다. 그건, 늘 그렇듯 당연한 일이었으니까. 어렵지 않다는 건, 결국 다 비슷했다. 누군가가 무엇을 원하는지 알아차리는 일. 그걸 굳이 말로 확인하지 않아도 되는 순간. 시선이 머무는 위치, 손이 멈추는 타이밍, 웃음이 길어지는 정도. 그런 것들이 전부 힌트였다. “아스카, 너는 진짜… 사람 기분 좋게 하는 재주가 있다니까.” 또 비슷한 말이었다. 나는 웃으면서 고개를 기울였다. 이번에는 조금 더 부드럽게, 조금 더 가까운 거리에서. 그게 더 좋아 보인다는 걸 알고 있었으니까. 가끔은, 내가 아니라 다른 누군가를 흉내 내고 있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하지만 그건 오래 가지 않았다. 그런 생각을 붙잡고 있으면, 표정이 어색해진다는 걸 이미 알고 있었으니까. 언젠가부터는 생각하지 않기로 했다. 그리고, 그날 밤도 마찬가지였다. 음악이 바뀌고, 사람이 바뀌고, 말이 바뀌어도, 내가 해야 할 건 거의 변하지 않았다. 적당한 타이밍에 웃고, 적당한 순간에 시선을 주고, 필요할 때는 아무 말도 하지 않는 것. 그것만으로 충분했다. 적어도, 그때까지는. 화장실 거울은 클럽 안보다 훨씬 밝았다. 형광등이 그대로 내려와서, 얼굴의 윤곽이 숨을 곳 없이 드러났다. 방금까지의 분위기가 전부 걷힌 자리에서, 나는 잠깐 서 있었다. 거울 속의 나는, 조금 전까지 웃고 있던 사람과 같은 얼굴이었지만 어딘가 달라 보였다. 정확히 어디가 다른 건지 바로 짚어낼 수는 없었지만, 아까 그 표정은 아니었다. “…아까.” 입 밖으로 작게 중얼거렸다. 눈을 조금 더 가늘게 뜨고, 입꼬리를 아주 조금만 올린다. 그대로 몇 초. 뭔가 부족했다. 방금 전보다 덜 자연스러웠다. 나는 한 번 더 시도했다. 이번에는, 바로 웃지 않았다. 시선을 먼저 떨구고, 다시 올리는 데 아주 짧은 시간을 두었다. 그리고 나서야, 천천히 입꼬리를 올렸다. 거울 속의 얼굴이 달라졌다. 조금 전보다, 더. …좋아 보였다. 나는 그 상태로 몇 초 더 서 있었다. 표정을 지우지 않은 채, 그 얼굴을 확인하듯 바라봤다. 이상하게도, 낯설지 않았다. 문을 밀고 다시 안으로 들어갔을 때, 음악은 바뀌어 있었다. 누군가가 나를 불렀다. 나는 고개를 돌렸다. 이번에는, 아까 거울 앞에서 만든 그 표정으로. “…아스카, 잠깐.” 나는 대답하지 않고, 그대로 시선을 마주쳤다. 아주 짧게. 그리고 나서야, 웃었다. 그 사람의 말이 끊겼다. 나는 그걸 놓치지 않았다. 말을 잇지 못한 쪽은 항상 저쪽이었다. “…어, 아니… 그냥, 뭐 마실래?” 나는 어깨를 살짝 으쓱하며 고개를 기울였다. 대답은 하지 않았다. 대신 시선을 한 번 더 떼었다가, 다시 마주쳤다. 그 사이에, 상대의 눈이 나를 따라오는 걸 느꼈다. “아스카는, 뭐 좋아해?” 아까보다 말투가 부드러워져 있었다. 나는 잠깐 생각하는 척을 했다. 실제로 생각할 건 없었지만, 그 몇 초가 필요했다. “...아무거나.” 짧게 말하고, 잔을 들어올렸다. 얼음이 부딪히는 소리가 작게 울렸다. 그걸로 충분했다. 상대는 그 이상 묻지 않았다. 대신, 조금 더 가까이 다가왔다. 말수가 줄어든 건 나였는데, 분위기를 끌고 가는 건 이상하게도 저쪽이었다. 나는 그걸 가만히 지켜봤다. 아, 이렇게 되는구나. 아까 거울 앞에서 만든 표정, 타이밍, 시선. 그 모든 게 그대로 이어져서, 하나의 흐름처럼 굴러가고 있었다. 나는 그 흐름을 일부러 끊지 않았다. 그대로 두는 편이 더 잘 흘러간다는 걸, 이미 알고 있었으니까. “아스카, 오늘… 다른 날보다 더 눈에 띄는 거 알아?” 그가 잔을 내려놓으며 몸을 조금 더 가까이 기울였다. 음악이 커서인지, 굳이 그렇게 하지 않아도 될 거리였다. 나는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 시선을 잠깐 아래로 떨궜다가, 다시 올렸다. 그 사이를 그가 놓치지 않는 걸 알고 있었다. “아까부터 계속 보게 되더라.” 그의 시선이 내 얼굴에 고정된 채로 움직이지 않았다. 나는 웃지 않았다. 입꼬리를 올리기 직전에서, 아주 잠깐 멈췄다. “…그래요?” 짧게, 거의 흘리듯 말하고는 시선을 옆으로 빼냈다. 다시 마주칠 때까지의 그 짧은 공백이 길게 늘어나는 걸 느꼈다. “응. 진짜로.” 그는 웃으면서 고개를 기울였다. 손등이 테이블 위에서 내 쪽으로 조금 더 가까워졌다. 닿지는 않았지만, 의식하지 않을 수 없는 거리였다. “이따 나갈래? 여기 시끄럽잖아.” 나는 그 말을 바로 받지 않았다. 대신 잔을 들어 올려 입술에 가져갔다. 마시지는 않고, 그대로 멈췄다. 유리잔 너머로 그의 시선이 따라붙는 게 보였다. 몇 초 뒤에야 잔을 내려놓고, 아주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글쎄요.” 대답은 모호했지만, 그게 오히려 더 분명하게 들렸을 거다. 그는 웃음을 참지 못한 듯 작게 숨을 내쉬었다. “넌, 진짜 어렵네.” 나는 그 말을 듣고서야, 그제야 조금 웃었다. 이 정도면, 충분하겠네. 그는 잠깐 웃다가, 더 가까이 다가왔다. 이제는 굳이 몸을 기울이지 않아도 될 거리였다. 어깨가 거의 닿을 듯 말 듯한 위치. 음악 소리는 여전히 컸지만, 이상하게도 그의 목소리만 또렷하게 들렸다. “이렇게 있으면, 말 안 해도 되니까 좋은 것 같아.” 나는 시선을 돌리지 않았다. 대신, 아주 조금만 고개를 기울였다. 그가 더 가까워지기 쉬운 각도라는 걸 알고 있었다. 손등이 스쳤다. 의도였는지, 아닌지는 알 수 없었다. 확인할 필요도 없었다. 그 정도의 애매함이 오히려 더 오래 남는다는 걸, 이제는 알고 있었다. 나는 아무 반응도 하지 않았다. 피하지도, 잡지도 않았다. 그 사이에, 그가 숨을 아주 조금 멈춘 것처럼 느껴졌다. “…아스카.” 이름을 부르는 목소리가 아까보다 낮아져 있었다. 나는 그제야 시선을 살짝 내렸다가, 다시 올렸다. 이번에는 웃지 않았다. 그냥 그대로 바라봤다. 그걸로 충분했다. 클럽 문을 밀고 나오자, 음악이 한순간에 끊겼다. 대신 밤공기가 바로 들어왔다. 안쪽에 남아 있던 열기가 식으면서, 피부 위로 얇게 식은 기운이 내려앉았다. “조용하네.” 그가 웃으며 말했지만, 나는 대답하지 않았다. 길가에는 사람이 거의 없었다. 네온이 번진 간판 불빛이 젖은 아스팔트 위에서 흔들리고 있었다. 나는 천천히 걸었다. 일부러 속도를 맞추지도, 떼어내지도 않았다. 그가 내 옆에 붙어 걷는 걸 그대로 두었다. “아까보다 훨씬 낫다.” 그의 목소리가 가까워졌다. 손이 스칠 듯 말 듯한 거리. 나는 피하지 않았다. 대신 시선을 앞쪽에 두었다. 몇 걸음 더 걸었을 때, 손이 닿았다. 나는 그대로 두었다. 손을 잡지도, 빼지도 않았다. 그 상태로 몇 초. 그 짧은 시간이 길게 늘어나는 걸 느꼈다. “...솔직히 말해도 돼?” 나는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 시선을 조금 옆으로 돌렸다. 그가 말을 꺼내기 쉽게, 그렇지만 완전히 받아주진 않는 거리. 그는 잠깐 머뭇거리다가, 결국 말을 꺼냈다. “오늘… 같이 있자.” 나는 고개를 돌렸다. “어디요?” 알면서도 물었다. 그는 잠깐 웃더니, 시선을 피하지 않고 말했다. “…하룻밤 정도, 괜찮잖아.” 말이 끝나는 순간, 공기가 조금 식었다. 나는 바로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 그를 가만히 바라봤다. 그가 농담처럼 말하려다 실패한 얼굴을 하고 있다는 걸 확인하듯이. “너도… 싫은 건 아니잖아.” 나는 그 말에 아주 작게 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고개를 살짝 기울였다. “싫은 건 아니에요.” 그의 표정이 조금 풀렸다. 그 순간을 기다렸다는 듯이. 나는 말을 이었다. “그렇지만, 안 갈래요." 그는 잠깐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왜?” 나는 웃지 않았다. "그건 제가 정하는 거니까요." 이번에는 시선을 피하지 않았다. 그대로 마주 봤다. 그가 더 말할지, 멈출지 확인하듯이. 몇 초가 흘렀다. 그는 결국 웃음을 지우지 못한 채, 고개를 끄덕였다. “…진짜 어렵네, 너.” 나는 그 말을 듣고서야 아주 조금 웃었다. 이번에는, 아까보다 훨씬 짧게. “그게 좋다면서요.” 대답을 기다리지 않고, 차갑게 돌아섰다. 한참을 걷다 보니 어느새 소음이 완전히 끊겼다. 조용했다. 방금 전까지 귀를 채우고 있던 음악이 거짓말처럼 사라진 자리에서, 하이힐 소리만 남았다. 나는 속도를 늦추지 않았다. 멈추지 않으면, 생각도 따라오지 않는다는 걸 알고 있었다. 조금 전 그의 표정, 말투, 타이밍. 하나씩 떠올랐다가, 금방 정리됐다. 깔끔하게 거절했다.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나는 길가에 멈춰 선 차 유리창에 비친 내 얼굴을 스쳤다. 조명 때문에 윤곽이 흐릿하게 번져 있었다. 아까보다 특별히 달라 보이지는 않았다. 그게 더 나았다. 변한 건 얼굴이 아니라, 순서였다. 언제 보고, 언제 웃고, 언제 말하지 않는지. 그걸 내가 정했다는 것. 나는 시선을 떼고 다시 걸었다. 뒤에서 누가 나를 부르지 않는다는 걸 확인할 필요는 없었다. 아마 그에게 내 모습은, 점점 멀어져 갔겠지. 조금 전까지만 해도, 그냥 자연스럽게 흘러간다고 생각했던 것. 그게 아니라는 걸, 이제는 알고 있었다. 그렇게 다시 걷기 시작했다.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하지만, 완전히 똑같지는 않았다. "이런 제안을 받는 것도... 이제는 익숙해졌으니까." 나는 무의식적으로 작게 내뱉었다. ...그건 내가 어떤 식으로 보이고 있는지, 이미 알고 있다는 뜻이기도 했다.저녁 식사가 시작된 뒤에도 방 안은 지나치게 시끄러워지지 않았다. 낮은 식탁 위에는 계절 생선과 맑은 국, 작은 그릇들이 가지런히 놓여 있었고, 은은한 조명 아래로 옻칠된 젓가락 끝이 조용히 움직이고 있었다.나는 등을 너무 세우지도, 그렇다고 흐트러뜨리지도 않은 채 조용히 자리에 앉아 있었다. 맞은편에는 마사노리가 낮은 목소리로 직원에게 짧게 무언가를 물었고, 옆자리의 사에코는 특별히 말을 많이 하지 않은 채 천천히 국그릇을 내려놓았다. 요시코는 자연스럽게 다음 반찬 접시를 정리하고 있었고, 노리코만이 가끔 분위기를 너무 무겁게 두지 않으려는 듯 짧은 말을 덧붙였다.그리고 그 사이 어딘가에, 요시노리는 평소처럼 조용한 얼굴로 앉아 있었다. 누구보다 이 집 공기에 익숙한 사람처럼. 그런데 이상하게도, 이제는 그 조용함이 전처럼 낯설게만 느껴지지는 않았다.젓가락이 그릇 가장자리에 아주 작게 닿는 소리와, 멀리 복도 쪽에서 직원들이 오가는 기척만이 얇게 이어지고 있었다. 나는 시선을 아주 조금만 내린 채, 국그릇 위로 천천히 올라오는 김을 바라봤다. 도쿄에서 누군가와 식사를 할 때는 대부분 말이 훨씬 빨랐다. 분위기가 끊기지 않도록 웃음이 이어졌고, 누군가는 계속 다음 화제를 꺼냈다. 침묵이 길어지면 괜히 어색해지는 쪽에 가까웠다. 그런데 이 집에서는, 말이 잠깐 멈추는 순간에도 아무도 굳이 서둘러 그 공백을 메우려 하지 않았다.“…오늘 수업은 어떠셨습니까.”잠시 뒤, 마사노리가 낮고 안정된 목소리로 물었다. 나는 시선을 천천히 들어 올렸다. 그의 말투는 부드러운 쪽에 가까웠지만, 이상하게도 자연스럽게 자세를 바로잡게 만드는 힘이 있었다.마사노리는 나의 예비 시아버지로, 평상시에는 말수가 적고 조용한 사람이었다. 그렇다고 존재감이 옅은 사람은 아니었다. 오히려 반대에 가까웠다. 그는 굳이 목소리를 높이거나 분위기를 주도하지 않아도, 식탁 끝에 조용히 앉아 있는 것만으로 자연스럽게 주변 공기를 정리하는 쪽에 가까웠다. 직원들도 그 앞에서는 괜히 움직임이
란코는 문이 닫힌 뒤에도 바로 말을 꺼내지 않았다. 방 안에는 방금 전까지 남아 있던 인기척이 아주 희미하게만 가라앉아 있었다. 나는 다다미 위에 조용히 앉은 채, 그녀가 소매 끝을 한 번 천천히 정리하는 모습을 바라봤다. 작은 체구인데도 이상하게 자세가 흐트러져 보이지 않는 사람. 란코는 언제나 그랬다. 굳이 시선을 강하게 두지 않아도, 방 안 공기를 자연스럽게 정리해버리는 쪽에 가까웠다. 잠시 뒤 그녀는 아주 차분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오늘은 걷는 것부터 다시 보겠습니다.”나는 아주 미세하게 고개를 끄덕인 뒤, 천천히 무릎 위에 손을 올렸다. 란코는 바로 설명을 이어가지 않았다. 대신 잠깐 시선을 내린 채, 내가 앉아 있는 자세와 발끝 방향을 조용히 바라봤다. 방 안은 여전히 조용했다. 복도 너머에서 직원들이 지나가는 기척이 아주 희미하게만 들렸고, 이른 햇빛은 다다미 위에 얇게 내려앉아 있었다. 몇 초 뒤, 란코가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아스카 씨는.” 아주 잠깐 멈췄다. “생각보다 먼저 시선을 움직이는 편입니다.”나는 그 말을 듣고 눈을 한 번 천천히 깜빡였다. 란코는 나를 곧바로 나무라지 않았다. 다만 방 안 공기를 정리하듯, 조용한 속도로 말을 이었다.“걷는 자세 자체는 많이 자연스러워졌어요. 그런데.” 그녀는 아주 미세하게 시선을 들었다. “누군가를 의식하는 순간, 먼저 반응을 확인하려는 쪽으로 몸이 조금 빨라집니다.”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대신 시선을 아주 조금만 내린 채, 손끝을 가볍게 모았다. 이상하게도, 그 말은 생각보다 부정하기 어려웠다.나는 시선을 내린 채 잠깐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다다미 위로 아침 햇빛이 아주 얇게 번지고 있었다. 방 안은 조용했고, 란코 역시 굳이 다음 말을 재촉하지 않았다. 그 침묵 속에서, 조금 전 노리코가 했던 말이 아주 희미하게 다시 떠올랐다. 굳이 먼저 확인하지 않게 된 느낌. 나는 눈을 한 번 천천히 깜빡였다. 그런데 란코의 말은 그와는 조금 달랐다. 확인하지 않게 되었다기보다
수화기를 내려놓은 뒤에도, 손끝에는 아주 미세한 감각이 남아 있었다. 나는 테이블 위에 손을 올린 채, 그대로 몇 초 동안 움직이지 않았다. 방 안은 조용했다. 창문 너머로는 불빛이 아주 희미하게만 들어오고 있었다. 아까까지 귀 가까이에 닿아 있던 숨소리는 이제 들리지 않았는데, 이상하게도 완전히 끝난 느낌은 아니었다.나는 시선을 천천히 내렸다. 반쯤 접힌 종이가 아직 그대로 놓여 있었다. 손가락 끝이 그 모서리를 아주 약하게 눌렀다가 멈췄다. 굳이 다시 펼칠 이유는 없었다. 그런데도, 치우고 싶은 생각은 들지 않았다.나는 등을 소파에 아주 천천히 기댔다. 방 안 공기는 아까와 달라진 게 없었다. 시계 초침 소리도 그대로였고, 창문 바깥의 불빛도 여전히 멀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조금 전까지 이어지던 침묵이 아직 어딘가에 남아 있는 것 같았다. 전화에서는 표정이 보이지 않았다. 그 대신, 말이 멈추는 간격이나 숨을 고르는 소리가 생각보다 오래 남는다. 나는 눈을 한 번 천천히 감았다가 떴다.“…아마도요.”낮고 조용한 목소리가 머릿속에서 아주 희미하게 다시 이어졌다. 나는 입꼬리를 아주 조금만 올렸다가, 다시 지웠다. 이상한 사람이네. 속으로 그렇게 생각했는데, 이번에는 그 말이 전처럼 가볍게 정리되지는 않았다.나는 시선을 천천히 옆으로 흘렸다. 창문 유리에는 희미하게 어두운 실내만 비치고 있었다. 문득, 몇 달 전 도쿄의 밤공기가 아주 짧게 떠올랐다. 젖은 아스팔트 냄새와, 늦은 시간까지 열려 있던 가게 불빛. 사람들 웃음소리와 음악이 섞여도 이상하지 않던 거리. 그 안에서는 대부분의 말이 빠르게 지나갔고, 대부분의 관계도 오래 멈춰 있지 않았다. 나 역시 그 흐름 속에 있는 쪽이 더 자연스럽다고 생각했었다. 시선을 끌고, 분위기를 읽고, 어느 순간에는 먼저 자리를 떠나는 것까지 포함해서.나는 눈을 한 번 천천히 깜빡였다. 방 안은 여전히 조용했다. 멀리 어디선가 아주 희미하게 바람 소리가 들렸다가 사라졌다. 나는 천천히 시선을 내렸다. 다다미
그는 바로 대답하지 않았다. 아주 짧게, 숨을 고르는 쪽에 가까운 공백이 있었다. 나는 수화기를 쥔 손을 아주 미세하게 움직였다가 멈췄다. 전화선 너머는 조용했다. 그런데. 끊어진 느낌은 아니었다.“…네.” 그가 천천히 말했다. “괜찮습니다.”나는 그 말을 들으면서 시선을 아주 조금만 내렸다. 테이블 위에 놓인 종이가 보였다. 반쯤 접혀 있었다. 나는 그걸 몇 초 동안 그대로 바라봤다.“늦었는데도요?” 짧게 물었다. 그는 잠깐 멈췄다. “아직 안 자고 있었습니다.”나는 그 대답을 그대로 들었다. 몇 초. 굳이 바로 이어가지 않았다. 전화에서는, 공백이 조금 더 길게 느껴졌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불편하지는 않았다.“…교토는.” 나는 천천히 말을 이었다. “원래 이렇게 조용해요?”그는 아주 미세하게 숨을 고르는 듯했다. “장소에 따라 다르겠지만.” 짧게. “지금은 그렇습니다.”나는 아주 미세하게 입꼬리를 올렸다가, 다시 지웠다. “…요시노리 씨 답네요.”그는 바로 반응하지 않았다. 아주 짧은 공백. 그리고. “그렇습니까.”나는 수화기를 귀에 댄 채, 시선을 천천히 옆으로 흘렸다. 창문 너머에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네.” 짧게 말했다. “급하지 않은 쪽.”그는 그 말을 듣고 잠깐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수화기 너머로 아주 미세한 숨소리만 이어졌다. 나는 시선을 그대로 두었다. 전화에서는 표정이 보이지 않았다. 그 대신, 말이 멈추는 간격이 조금 더 또렷하게 남았다.“…아스카 씨는.” 그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도쿄 쪽 같습니까.”나는 바로 대답하지 않았다. 아주 짧게 숨을 고르고, 수화기를 쥔 손을 조금만 고쳐 잡았다. 몇 초. 굳이 빨리 답할 필요는 없었다.“글쎄요.” 짧게 말했다. “원래는, 그런 쪽이 더 편했는데.” 그는 그 말을 끊지 않았다. 나는 시선을 아주 조금만 내렸다. 반쯤 접힌 종이가 그대로 보였다.“…요즘은 잘 모르겠네요.”말이 끝난 뒤, 짧은 공백이 이어졌다. 나는 그 상태를 그대로 두었다. 굳이 설명을
하이힐 소리가 일정한 간격으로 이어졌다. 젖은 아스팔트 위에서 미끄러지듯 퍼졌다가, 다시 또렷해졌다. 발끝에 힘을 주는 정도만으로도 리듬이 달라졌다. 나는 일부러 속도를 바꾸지 않았다. 그대로 두는 편이 더 자연스러웠다. 조금 전까지 머릿속을 채우고 있던 것들이 하나씩 정리되고 있었다. 말투, 시선, 거리. 어느 순간에 무엇을 했는지, 순서대로 떠올랐다가 금방 사라졌다. 오래 붙잡아 둘 필요는 없었다. 이미 끝난 일이었으니까.네온이 점점 줄어들었다. 가게 간판 사이의 간격이 넓어지고, 빛의 색도 옅어졌다. 대신 가로등 불빛이 길
아무것도 달라진 건 없었는데, 어제와 같은 속도로 움직이지는 않았다. 눈을 떴을 때, 몸이 먼저 반응하지 않았다. 잠이 덜 깬 것도 아니고, 피곤한 것도 아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어나기까지 아주 짧은 공백이 생겼다. 그 몇 초를 굳이 설명할 필요는 없었지만, 없던 것도 아니었다.나는 그대로 누워 있었다. 천장을 보고, 눈을 한 번 더 깜빡였다. 다시 감지는 않았다. 그럴 이유도 없었고, 의미도 없었다. 그런데도 바로 몸을 일으키지 않았다. 평소라면 이미 움직였을 타이밍이었다. 생각이 먼저 따라오지 않는 쪽이 더 편하다는
"진짜네.”그가 물었다. “무엇이 말입니까.”나는 시선을 한 번 더 마주쳤다. “안 바뀌는 거요.”그는 잠깐 생각하듯 시선을 움직였다. 아주 미세하게. 그 다음에야 말했다. “굳이 바꿀 필요가 없다고 생각해서요.”나는 그 말을 듣고, 고개를 아주 조금 기울였다. “왜요.”그는 잠깐 멈췄다. 그리고, 나를 봤다. 이번에는, 아주 조금 더 정확하게. “지금도 충분히 대화가 되고 있으니까요.”나는 그 말을 그대로 들었다. 그리고, 그 의미를 천천히 따라갔다. 대화. 지금 이 상태가. 나는 시선을 아주 미세하게 떼었다가, 다시
다리를 모으고 앉는 자세가 생각보다 오래 버티기 힘들다는 걸, 그날 처음 알았다.“허리를 조금 더 세워주세요.”조용한 목소리가 들렸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지만, 몸은 이미 굳어 있었다. 무릎 아래로 감각이 희미해지고 있었다. 다다미의 감촉이 느껴졌다. 시선은 자연스럽게 아래로 떨어졌다. 정갈하게 접힌 자신의 손. 그리고 그 위에 얹힌, 낯선 옷감. 기모노였다.“…익숙해지실 거예요.”그 말이 위로인지 확인인지 잘 구분되지 않았다. 나는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 아주 잠깐 도쿄의 밤을 떠올렸다.***네온이 번진 유리창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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