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 와서 사랑한다니

이제 와서 사랑한다니

By:  금붕어Updated just now
Language: Korea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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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윤서는 자궁암 진단서를 받은 날, 남편이 언니와 함께 산부인과를 찾은 모습을 목격했다. 민윤서가 앞으로 다시는 아이를 가질 수 없다는 말을 들었을 때, 신태현은 민윤서의 언니와 함께 새로운 생명의 탄생을 축하하고 있었다. 3년간의 결혼 생활 동안 민윤서는 헌신하며 최선을 다했지만, 그 모든 노력은 물거품이 되고 말았다. 절망에 빠진 민윤서는 자신이 암에 걸린 사실을 숨긴 채 평온한 얼굴로 이혼 합의서를 건넸다. 민윤서는 더는 그들에게 존엄을 짓밟히고 싶지 않았다. 그런데 신태현이 이혼 합의서를 쓰레기통에 버리며 말했다. “우리 집안을 위해 대를 잇기 전까지는 이혼을 요구할 자격이 없어.” 민윤서는 냉정하게 물었다. “만약 아이를 낳는 대가가 죽음이라면?” 신태현은 고개도 들지 않은 채 대답했다. “그럼 내 앞에서 한 번 죽어 보든가.” 민윤서는 마침내 마음을 완전히 접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민윤서가 암에 걸렸다는 사실이 밝혀졌고, 민윤서는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동시에 그녀는 업계의 전설로 떠올랐다. 늘 냉담하고 무심했던 신태현은 그제야 전 세계를 뒤지며 미친 듯이 민윤서를 찾기 시작했고, 끝내 민윤서의 앞에 무릎을 꿇고 눈물을 글썽이며 말했다. “윤서야, 내 목숨까지도 너한테 줄게. 제발 나를 떠나지만 말아 줘. 응?” 민윤서는 피식 웃으며 과거 신태현이 자신에게 했던 말을 그대로 되돌려주었다. “그럼 내 앞에서 한 번 죽어 보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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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apter 1

제1화

“윤서 씨, 윤서 씨 자궁내막암이 눈에 띄게 악화했어요. 보존치료만으로는 더 이상 효과를 기대하기 어려우니 가능한 한 빨리 자궁 적출 수술을 받으시는 게 좋겠어요. 지난 2년 동안 계속 혼자 진료받으러 오셨죠? 상황이 많이 안 좋은데 정말 남편분께 알리지 않으셔도 괜찮겠어요?”

진료실의 흰 조명이 민윤서의 초췌한 얼굴 위로 내려앉아 원래도 핏기 없던 얼굴이 더욱 창백해 보였다.

의사의 말이 민윤서의 귓가에 계속 맴돌았다. 민윤서는 무겁게 느껴지는 진단서를 꼭 움켜쥐었고, 차갑게 식은 손끝은 파르르 떨렸다. 민윤서는 마치 온몸의 피가 얼어붙은 것처럼 한동안 굳어 있었다.

결혼한 지 얼마 되지 않아 남편 신태현은 인사 발령으로 인해 M국으로 파견되었다.

출국하기 전날 밤, 신태현은 부드러운 눈빛으로 민윤서를 바라보며 정중한 어투로 말했다.

“조금만 기다려줄래? 아무래도 이게 내 직업이다 보니 네가 이해해 줬으면 좋겠어. 파견을 마치고 귀국하면 그때부터는 다른 사람들처럼 평범하게 살자. 그리고 아이도 갖자.”

2년 전 암 판정을 받았을 때 의사는 열심히 치료를 받으면 자궁을 적출하지 않아도 될지도 모른다고 했었다.

민윤서는 타국에서 지내고 있는 신태현이 걱정할까 봐 암에 걸렸다는 사실을 알리지 않고 홀로 이를 악물고 모든 고통과 두려움을 견뎌 냈다.

그런데 오늘 받은 진단서가 민윤서가 마지막까지 품고 있던 희망마저 산산조각 내 버렸다.

민윤서는 어쩌면 앞으로 평생 아이를 가질 수 없을지도 몰랐다.

코끝이 찡하면서 눈에 눈물이 차올랐다. 민윤서는 떨리는 손으로 휴대폰을 켠 뒤 마음속에 깊이 새겨두었던 번호로 전화를 걸었다.

그러나 통화연결음만 들려올 뿐, 전화를 받는 사람은 없었다.

머리가 어지러웠던 민윤서는 넋이 나간 얼굴로 복도에 서 있다가 뒤늦게 시차가 있다는 사실을 떠올렸다.

M국은 현재 늦은 밤일 테니 신태현은 아마 자고 있을 것이다.

막막함이 밀려오자 민윤서는 진단서를 움켜쥔 채 휘청거리며 힘없는 발걸음으로 진료실을 나섰다.

병원 입구에 막 다다랐을 때, 카메라와 마이크를 든 취재진들이 갑자기 몰려들었고 민윤서는 누군가에게 떠밀려 그대로 로비 한가운데까지 밀려났다.

“신 국장님과 신 국장님 아내분이시네요!”

“신 국장님이 조용히 귀국한 지도 벌써 사흘인데 드디어 찾았네요!”

소란스러운 사람들 속에서 민윤서는 단번에 사람들 틈 사이에 서 있는 늘씬한 남자를 발견했다.

그 남자는 바로 신태현이었다.

남색 코트를 입은 신태현은 키가 크고 준수했으며 눈빛은 한결같이 차가웠고, 온몸에서 차분함과 위압감을 내뿜었다.

언제 돌아온다는 기약 없이 타국으로 떠났던 남편이 돌아온 것이다.

충격을 받은 민윤서가 정신을 차리기도 전에 유약한 여성의 목소리가 나지막하게 들려왔다. 속상한 듯이 애교를 부리는 목소리였다.

“태현 오빠, 나 무서워. 사람들이 너무 많은데 아이가 놀라면 어떡해...”

민윤서는 소리가 들리는 곳을 바라보았다가 순간 심장이 철렁 내려앉았다. 마음이 너무 아파서 숨이 잘 쉬어지지 않았다.

신태현의 옆에 서서 창백한 얼굴로 몸을 기대고 있는 건 M국에서 유학하고 있어야 할 민윤서의 언니 민윤아였다.

다음 순간, 신태현이 본능적으로 앞으로 나서면서 손을 들어 민윤아를 몸 뒤로 감췄다.

신태현은 싸늘해진 눈빛으로 자신을 둘러싼 취재진들을 향해 호통을 쳤다.

“다들 적당히 하시죠. 윤아는 지금 임신 중이고 몸도 허약합니다. 혹시라도 윤아한테 문제가 생긴다면 다들 각오하셔야 할 겁니다.”

신태현이 내뱉은 말이 민윤서의 귓가에 때려 박혔다.

‘임신했다고… 언니가 태현 씨 아이를 가진 거야?’

그럴 것 같았다. 신태현이 누군가를 이렇게 지키려고 한 적은 처음이었기 때문이다.

저렇게 심각한 표정을 보니 신태현의 아이가 확실한 듯했다.

순간 피가 거꾸로 솟는 기분이 들면서 온몸이 굳어버렸다. 귓가에서 들리던 소리들이 점점 멀어지면서 마음속 무언가가 부서지는 것 같았다.

지난 기억들이 물밀듯이 밀려왔다.

신태현이 출국한 지 얼마 되지 않아 민윤서는 본인이 임신한 사실을 알게 되었고, 기쁨에 겨워 신태현에게 그 사실을 알리려고 했으나 미처 알리기도 전에 유산하게 되었다.

당시 슬픔에 빠진 민윤서는 자신의 몸이 약해서 그런 거라고 자책하며 신태현에게 걱정을 끼치고 싶지 않아 귀국하면 그 사실을 털어놓을 생각이었다.

그래서 신태현은 지금까지도 둘 사이에 아이가 있었다는 걸 몰랐다.

그리고 그동안 신태현은 여러 차례 통화하면서도 민윤서의 허약함과 피곤함, 고통을 전혀 눈치채지 못했다.

지금 생각해 보니 민윤아와 M국에서 오붓한 시간을 보내느라 민윤서에게 신경 쓸 겨를조차 없었던 게 분명했다.

민윤아가 유학을 핑계로 M국으로 떠난 날과 신태현이 M국으로 파견된 날은 불과 보름 차이였다.

그건 우연이 아니라 미리 짜놓은 계획일 것이다.

그렇다면 신태현은 무엇 때문에 떠나기 전 민윤서와 그런 약속을 했던 걸까?

민윤서는 신태현의 약속을 자신의 어둠을 밝혀줄 유일한 등불로 여겼고 그것에 기대어 잠 못 이루는 외로운 밤들을 견디며 신태현이 돌아오기만을 목 빠지게 기다렸다.

그러나 인간의 마음은 너무 쉽게 바뀌었고 약속이라는 건 덧없는 것이었다.

민윤서는 홀로 집을 지키며 신태현의 약속만을 믿고 3년 동안 외로움을 견뎌야 했는데 모두 혼자만의 착각이었다.

“다들 비키세요! 볼일 없는 사람들은 당장 흩어지도록 하세요.”

갑작스러운 고함에 민윤서는 복잡하게 뒤엉킨 생각들에서 빠져나왔다.

소리를 친 사람은 바로 신태현의 비서 진현수였다. 진현수는 무표정한 얼굴로 병원 경비원들과 함께 빠르게 그곳으로 걸어오더니 프로페셔널하게 현장에 있던 사람들을 해산시키라고 경비원들에게 지시를 내렸다.

경비원들은 다급하게 움직여 민윤서의 주위를 둘러싸며 사람들을 쫓아내기 시작했다.

취재진들은 감히 신태현의 심기를 건드릴 수 없었기에 순순히 뒤로 물러났다.

오로지 민윤서만이 온몸이 굳어버린 채 그 자리에 가만히 서 있을 뿐이었다. 두 다리가 무거워서 꼼짝할 수가 없었고, 두 눈동자에서는 배신감과 서러움, 믿을 수 없다는 감정이 일렁였다.

진현수는 사람들 사이에 얼어붙어 서 있는 민윤서를 발견하고는 잠시 망설이다가 취재진들이 다 떠나고 나서야 목소리를 낮추며 정중하게 민윤서에게 인사를 건넸다.

“안녕하세요, 사모님.”

크지도, 작지도 않은 사모님이라는 부름이 멀지 않은 곳에 있던 신태현의 귀에 들어갔다.

신태현은 잠시 멈칫했지만 고개를 돌리지 않았다. 처음부터 끝까지 민윤서에게 눈길 한 번 주지 않았다.

그저 옆에 있는 민윤아를 조심스럽게 감싸면서 달래주다가 몸을 숙여 민윤아를 번쩍 안아 들고는 곧장 입원 병동으로 걸어갔다.

신태현은 민윤서를 완전히 낯선 사람처럼 취급했다.

민윤서는 그 자리에 조용히 서서 신태현이 자신의 언니를 안고 서서히 멀어져 가는 걸 바라보며 마음이 차게 식는 걸 느꼈다.

그렇게 민윤서는 그곳에 아주 오랫동안 서 있었다.

로비가 완전히 조용해진 뒤에야 신태현은 병실에서 나왔다. 신태현의 주변에는 여전히 가까이 다가가기 어려운 냉랭한 분위기가 감돌았다.

신태현은 시선을 들어 로비에 우두커니 서 있는 민윤서를 바라봤다. 검은 눈동자는 한없이 고요했고 목소리에서는 아무런 감정이 느껴지지 않았다.

“왜 여기 있는 거야?”

신태현의 시선이 서서히 아래로 내려가 민윤서가 꽉 쥐고 있던 진단서로 향했다.

“뭘 들고 있는 거야? 보여줘 봐.”

민윤서는 순간 흠칫했다.

만약 진실을 알게 된다면 신태현은 어떤 선택을 할까?

신태현은 미간을 찌푸렸다.

“어디 아파?”

민윤서는 자기도 모르게 손에 힘을 주면서 진단서를 숨겼다.

그런데 바로 다음 순간 진현수가 다가와 무언가를 속삭이자 신태현은 미간을 살짝 찌푸리며 시선을 들어 민윤서를 힐끗 바라봤다.

“나는 볼일이 있으니까 먼저 집에 가.”

민윤서는 우습다는 듯이 입꼬리를 올렸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민윤서의 몸 상태를 묻던 신태현은 곧바로 아무렇지 않게 집에 가보라고 하면서 서둘러 돌아가 자신이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시간을 보내고 싶어 했다.

민윤서는 그 자리에 가만히 서 있었다.

신태현이 시선을 들어 민윤서를 바라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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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화
“윤서 씨, 윤서 씨 자궁내막암이 눈에 띄게 악화했어요. 보존치료만으로는 더 이상 효과를 기대하기 어려우니 가능한 한 빨리 자궁 적출 수술을 받으시는 게 좋겠어요. 지난 2년 동안 계속 혼자 진료받으러 오셨죠? 상황이 많이 안 좋은데 정말 남편분께 알리지 않으셔도 괜찮겠어요?”진료실의 흰 조명이 민윤서의 초췌한 얼굴 위로 내려앉아 원래도 핏기 없던 얼굴이 더욱 창백해 보였다.의사의 말이 민윤서의 귓가에 계속 맴돌았다. 민윤서는 무겁게 느껴지는 진단서를 꼭 움켜쥐었고, 차갑게 식은 손끝은 파르르 떨렸다. 민윤서는 마치 온몸의 피가 얼어붙은 것처럼 한동안 굳어 있었다.결혼한 지 얼마 되지 않아 남편 신태현은 인사 발령으로 인해 M국으로 파견되었다.출국하기 전날 밤, 신태현은 부드러운 눈빛으로 민윤서를 바라보며 정중한 어투로 말했다.“조금만 기다려줄래? 아무래도 이게 내 직업이다 보니 네가 이해해 줬으면 좋겠어. 파견을 마치고 귀국하면 그때부터는 다른 사람들처럼 평범하게 살자. 그리고 아이도 갖자.”2년 전 암 판정을 받았을 때 의사는 열심히 치료를 받으면 자궁을 적출하지 않아도 될지도 모른다고 했었다.민윤서는 타국에서 지내고 있는 신태현이 걱정할까 봐 암에 걸렸다는 사실을 알리지 않고 홀로 이를 악물고 모든 고통과 두려움을 견뎌 냈다.그런데 오늘 받은 진단서가 민윤서가 마지막까지 품고 있던 희망마저 산산조각 내 버렸다.민윤서는 어쩌면 앞으로 평생 아이를 가질 수 없을지도 몰랐다.코끝이 찡하면서 눈에 눈물이 차올랐다. 민윤서는 떨리는 손으로 휴대폰을 켠 뒤 마음속에 깊이 새겨두었던 번호로 전화를 걸었다.그러나 통화연결음만 들려올 뿐, 전화를 받는 사람은 없었다.머리가 어지러웠던 민윤서는 넋이 나간 얼굴로 복도에 서 있다가 뒤늦게 시차가 있다는 사실을 떠올렸다.M국은 현재 늦은 밤일 테니 신태현은 아마 자고 있을 것이다.막막함이 밀려오자 민윤서는 진단서를 움켜쥔 채 휘청거리며 힘없는 발걸음으로 진료실을 나섰다.병원 입구에 막 다다랐을 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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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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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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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7화
신태현의 시선이 바닥에 쓰러진 민윤서에게 닿았다. 검은 눈동자는 늘 그랬듯이 아무런 파문도 일지 않았다.그 순간, 현장에 있던 거의 모든 사람들의 시선이 민윤아에게 향했다.민윤아는 민윤서의 언니였으니 당연한 일이었다.민윤아는 깜짝 놀라며 황급히 민윤서에게로 달려갔다.그러나 민윤아가 도착하기도 전에 서승재가 한발 먼저 도착해 민윤서를 번쩍 안아 들었다.민윤서의 귓가에 주변 소음이 웅웅 울렸다. 온몸에 힘이 빠졌고 아랫배의 통증은 당장 기절해도 이상하지 않을 정도로 심했다.민윤서는 통증을 견디기 위해 두 손을 꽉 움켜쥐었다. 귓가에서는 서승재의 초조한 목소리만 들렸다.서승재의 품에 안겨 현장을 빠져나갈 때, 우연히 신태현과 시선이 마주쳤다.멀리서 본 신태현의 눈빛은 한없이 고요했고 또 차가웠다.민윤서는 조용히 눈을 감아 시선을 차단했다.민윤서의 남편은 누구에게나 다정하고 누구에게나 온화할 수 있었으나 오직 민윤서에게만은 무관심하고 냉담했다.민윤서가 죽음을 앞두고 있는 상황에서조차 말이다.민윤아가 따라가려고 하자 서승재가 차가운 얼굴로 말했다.“민윤아 씨, 오지 않으셔도 괜찮습니다. 이만 돌아가 보세요.”서승재는 민윤서가 민윤아를 싫어한다는 걸 알고 있었기에 굳이 민윤아가 따라오게 놔두고 싶지 않았다. 민윤서 기분만 잡칠 테니 말이다.이때 신태현이 다가와 민윤아에게 따라가지 말라고 했다.민윤아는 입술을 깨물면서 걱정 가득한 표정으로 말했다.“윤서가 많이 아픈 것 같아. 어떻게 된 일이지? 예전에는 괜찮았는데...”서승재는 시선을 들어 신태현을 바라봤다.“신태현 씨는 같이 안 가실 겁니까?”민윤서에게서 곧 이혼할 거라는 말은 들었지만 아직 이혼한 건 아니었다.그런데 남편이라는 사람이 어떻게 이렇게까지 무심할 수 있단 말인가?신태현은 서승재를 바라봤다.민윤아는 손으로 조심스레 자신의 배를 감쌌다. 손끝이 살짝 떨리고 있었다.민윤아도 두려웠고 당황스러웠으며 곁에 누군가 있어 줘야 했다.민윤아는 고개를 들어 신태현을 바라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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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8화
보이지 않는 손이 공기를 꽉 쥔 것처럼, 먼지마저 허공에 가만히 떠 있는 것처럼 잠깐 분위기가 얼어붙어서 숨조차 쉬기 어려웠다.민윤서는 고개를 들어 아무런 온기가 느껴지지 않는 표정을 했다.“그래. 그렇게 생각한다면 각자 원하는 대로 살자. 이혼해. 이혼합의서는 내가 다 작성해 뒀어.”신태현은 시선을 내려 민윤서를 바라보았다. 마치 중요하지 않은 물건을 바라보는 듯한 무감각한 시선이었다.몇 초간 침묵이 이어졌다. 놀라움도, 추궁도 없었고 그저 고인 물처럼 잔잔한 정적뿐이었다.신태현의 시선이 무심코 현관 쪽을 스쳐 지나갔다.검은색의 캐리어는 귀국하던 날 그대로 아직도 그 자리에 세워져 있었다.신태현이 집으로 돌아올 때마다 민윤서는 항상 환하게 웃으며 신태현을 맞이해 주었고, 넥타이를 풀어주고 캐리어 속 옷들을 하나하나 정성스럽게 다려놓았다.반대로 신태현이 해외로 떠날 때면 밤새 짐을 정리해서 신태현이 좋아하는 차와 늘 먹던 위장약을 빠짐없이 챙겨주었다. 신태현이 머나먼 타국에서 조금이라도 편하길 바라는 마음에 말이다.그러나 이번에 민윤서는 신태현의 캐리어에 손끝 하나 대지 않았다.신태현은 별말 하지 않고 몸을 돌려 위층으로 올라갔다.신태현의 발소리가 민윤서의 마음을 두드렸다. 반면에 신태현은 민윤서가 뭐라고 하든 아무런 감정도 드러내지 않았다.신태현이 떠난 뒤 민윤서는 긴장이 풀려 몸에서 힘을 뺐다. 그 순간 모든 기운이 빠져나간 듯한 기분이 들었다.민윤서는 소파 팔걸이를 붙잡은 채 거칠게 숨을 몰아쉬었다. 가슴에서 느껴지는 통증이 민윤서를 집어삼킬 듯했다.지금의 신태현은 국제적인 협상 자리에서 한 치도 물러서지 않는 외교부 부국장이었고, 이처럼 누군가 면전에서 이혼을 통보하는 일은 겪어본 적이 없을 것이다.오늘 민윤서가 한 말로 신태현은 체면을 크게 구겼다.그러나 신태현은 한 마디도 따져 묻지 않았다.민윤서는 입꼬리를 올리며 차라리 우는 것이 나을 것 같은 미소를 지었다.신태현에게 있어 그들의 결혼 생활은 화를 낼 가치조차 없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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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9화
민윤서는 이 상황이 우습기만 했다.신태현은 다른 사람들 앞에서는 최대한 체면을 지키려고 했다.민윤아가 곧바로 나서며 부드러운 목소리로 분위기를 풀려고 했다.“됐어, 태주야. 나는 괜찮아. 네 형 말이 맞아. 형수님한테 깍듯해야지.”신태주는 표정이 매우 나빴지만 신태현 때문에 더는 뭐라고 할 수가 없어 목소리를 낮추며 마지막으로 한 마디 남겼다.“남의 남자를 빼앗아서 결혼했으니 당신의 결혼 생활은 절대 행복하지 않을 거예요.”민윤서는 더 이상 그들과 실랑이를 하지 않고 곧장 안으로 들어갔다.고개를 든 민윤아는 남몰래 옆에 있는 신태현을 힐끗대며 표정을 살폈다.민윤아는 입술을 깨물다가 다정한 척하며 말했다.“오빠, 윤서 기분 안 좋아 보이던데 오늘 밤에... 윤서를 좀 달래줘야 하는 거 아니야? 오늘은 나를 보러 오지 않아도 돼. 어제도 늦은 시간에 와서 힘들었을 텐데. 나는 안 챙겨줘도 돼.”민윤서는 그 말을 듣는 순간 온몸의 피가 차게 식는 기분을 느꼈지만 걸음을 멈추지는 않았다.어제 신태현은 캐리어를 챙겨서 민윤아를 찾아갔다.어쩌면 어제 돌아온 것도 민윤서의 몸이 걱정돼서가 아니라 옷을 챙겨 가려고 온 걸지도 몰랐다.신태현은 동정심 때문에, 교양 때문에 민윤서를 걱정하고 민윤서를 병원까지 데려가려고 한 걸지도 몰랐다.그런데 민윤서는 바보처럼 신태현이 자신이 쓰러지는 모습을 보고 걱정되어 집에 돌아온 거라고 착각했다.신태주는 우습다는 듯이 코웃음을 치면서 말했다.“뭘 달래줘요? 그동안 우리 형이랑 결혼해서 남 부럽지 않은 삶을 살았고 우리 형 돈을 쓰고 살았는걸요. 그리고 일을 한다고는 하지만 아무런 성과도 없고 이룬 것도 없잖아요. 그러면서 아주 도도한 척, 깨끗한 척은 혼자 다 하죠. 그동안 누릴 수 있는 건 다 누렸을 텐데 예전에는 이렇게 열심히 하는 모습을 본 적이 없어요.”신태주는 단호하게 떠나는 민윤서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혹시라도 민윤서가 듣지 못할까 봐서 걱정이라도 하듯이 목청을 높여 말했다.“제가 보기에는 그냥 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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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0화
“됐어, 오빠.”민윤아는 입술을 깨물었다.“윤서가 기분이 안 좋은가 봐. 나는 괜찮아.”민윤서는 역겨움을 느꼈다.바로 그때 단상 위에서 결과 발표를 책임진 사람이 천천히 걸어왔다.민윤아는 고개를 돌려 민윤서를 바라보며 늘 그랬듯이 자신이 너그럽게 아량을 베푸는 것처럼 말했다.“그래도 혹시 어려움이 있다면 나한테 얘기해 줘. 이 연구과제가 하고 싶다면 내가 도와줄게.”민윤서는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민윤아는 대체 무슨 자신감으로 자신이 반드시 연구과제를 따낼 거라고 확신하는 걸까?신태현의 지위라면 자신이 연구과제를 따내도록 몰래 뒤에서 손을 써줄 거라고 생각하는 걸까?민윤서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신태현이 젊은 나이에 지금처럼 높은 자리에 오를 수 있었던 건 압도적인 능력 덕분이었다.그리고 민윤아가 아무리 소중하다고 해도 자신의 미래까지 걸 정도로 어리석은 사람이 아니었다.잠시 후 현장은 순식간에 조용해졌고, 모든 사람이 숨을 죽인 채 최종 결과를 기다렸다.단상 위에서 마침내 결과를 발표하겠다고 말했다.그 순간 모든 것이 얼어붙은 것만 같았다.“최종적으로 유일하게 선정된 곳은 청림바이오뿐입니다.”오랫동안 마음을 졸이던 민윤서는 그제야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반면 조금 전까지만 해도 자신만만한 표정으로 민윤서를 데리고 함께 연구과제를 진행하겠다고 말하던 민윤아의 얼굴은 순식간에 종잇장처럼 창백해졌다.방금까지 아량을 베푸는 척 여유를 부리더니 이제야 차가운 현실을 마주하게 된 것이다.민윤아는 옆에 늘어뜨린 손을 꽉 움켜쥐었고 손톱이 손바닥을 파고들 정도로 힘껏 주먹을 쥐었다.분명히 서승재가 손을 썼을 것이라고, 민윤서는 그저 운이 좋게 든든한 뒷배를 얻었을 뿐이라고 민윤아는 굳게 믿었다.“청림바이오의 민윤서 씨, 앞으로 나와 소감을 말씀해 주시겠어요?”민윤서는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나 단상을 향해 걸어갔다.민윤아는 애써 품위를 유지하며 부드럽게 웃으며 나지막한 목소리로 말했다.“축하해, 윤서야.”겉으로 보기에는 여전히 우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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