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GIN“그렇게 자기기만 하면서 스스로 망가뜨리는 짓, 그만해.”차주헌은 술병을 탁, 하고 테이블 위에 내려놓았다.술이 튀어 손등을 적셨지만 그는 개의치 않았다. 잔 벽에 희미하게 비친 자신의 얼굴을 잠시 바라보다가 피식, 웃음이 새어 나왔다.“뺏어오라고? 어떻게? 지금 임서율 눈엔 우리 삼촌밖에 안 보이는데. 할아버지도 허락하셨어.”그는 이미 결론을 내린 얼굴이었다. 만약 끝내 임서율이 하도원과 결혼하겠다고 한다면 자신은 절대로 다시 돌아가지 않을 거라고.돌아가서 뭐 하겠나. 그들이 다정하게 함께 있는 걸 보고 그녀를 숙모라고 불러야 하는 신세가 될 텐데.차주헌은 그제야 깨달았다. 처음 임서율과 이혼했을 때 다행이라고 생각했지만 사실 그건 그가 잃어버린 가장 소중한 것이었다.그 생각이 스치자 가슴속이 마치 솜뭉치로 틀어막힌 듯 숨이 막혔다.그는 옆에 앉은 서재영에게 물었다.“나 예전에 진짜 개 같이 굴었지?”서재영이 피식 웃으며 그의 어깨를 두드렸다.“응, 꽤 개같았지. 그래도 지금이라도 깨달았잖아. 늦진 않았어. 적어도 앞으로는 더 개같은 짓은 안 하겠지.”차주헌은 아무 대답도 하지 않고 계속 잔을 비웠다.창밖의 네온사인이 유리창을 타고 스며들며 그의 얼굴 위로 희미하게 깜박였다.장호준과 서재영의 말이 옳았다. 하지만 가슴 깊은 곳의 그 미련과 후회는 잡초처럼 자라나 멈출 줄을 몰랐다. 아무리 술로 눌러도 끝내 사라지지 않았다....한편, 임서율과 하도원은 차진만을 배웅하고 돌아가려던 참이었다. 그때, 하도원의 휴대폰이 진동하더니 주재훈이 보낸 메시지가 떴다.[차주헌이 술집에서 완전히 뻗었어. 입에선 계속 네 여자 친구 이름만 부르고 있더라. 가서 좀 챙겨줘야 하는 거 아니야?]하도원의 눈빛이 잠시 어두워졌다.[필요 없어.]그건 차주헌이 감당해야 할 고통이었다. 이제 그는 임서율과 정말 끝이었으니까.임서율이 먼저 차에 올라탔고 하도원이 뒤따라 문을 닫으려는 순간, 그가 낮게 신음했다.임서율이 놀라 고개를 들었다.“도원 씨,
그 말에 차주헌은 잠시 멍해졌다.늘 자신을 향해 애교를 부리거나 조심스레 눈치를 보는 여자들만 봐왔는데 오가연의 담담한 태도는 오히려 그의 흐릿한 정신을 순간 또렷하게 만들었다.그는 입꼬리를 비틀었지만 끝내 웃음이 나오지 않았다.“술 마시는 것도 아니고 그림도 보려는 것도 아니야. 그냥 말할 사람이 필요해서.”“무슨 말인데요?”오가연은 천천히 생수를 들어 한 모금 마시고는 젖은 손가락으로 테이블을 톡톡 두드렸다.차주헌은 이렇게 말하고 싶었다. 임서율이 이제 삼촌과 결혼할 거라고, 한때 바보 같은 자신 때문에 그녀를 잃어버렸다고, 지금 그녀가 숙모가 되려는 걸 보고 있자니 가슴이 활활 타들어 간다고.하지만 그 모든 말이 목구멍까지 차올랐다가 오가연의 맑은 눈을 마주하는 순간 단 한마디도 나오지 않았다. 낯선 여자 앞에서 자신의 추하고 복잡한 마음을 털어놓을 순 없었으니까.멀리서 지켜보던 서재영이 팔꿈치로 장호준을 쿡 찔렀다.“야, 저거 딱 봐도 대체품 찾는 거 아니냐?”심경호가 잔을 내려놓으며 말했다.“대체품? 글쎄. 차주헌 본인도 모르겠지. 임서율이 그리운 건지, 임서율이랑 함께 있을 때의 자기 자신이 그리운 건지.”서재영은 잔을 들어 심경호와 살짝 부딪쳤다.“뭐, 상관 없지. 지금은 그냥 주헌이가 마음 정리나 좀 하게 두는 게 나아. 대체품이면 어때. 저 여자애도 가난한 예술 전공 학생이라더라. 서로 필요하면 되는 거지.”그 시각, 카좌석 쪽에서 차주헌의 목소리가 들렸다.“뭐 하나 물어봐도 돼? 좋아하는 사람이 곧 내 숙모가 된다면 넌 빼앗을 거야, 아니면 그냥 보고만 있을 거야?”오가연은 잠시 침묵하다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제가 그 상황이라면 아마 빼앗겠죠. 정말 사랑한다면 그 사람이 나를 좋아하든 말든 상관없이 나는 할 수 있는 한 다 해볼 거예요. 물론, 그건 누굴 감동시키려고가 아니라 나 스스로 후회하지 않기 위해서예요.”그 말에 차주헌은 잠시 멍하니 굳었다.사실 그도 한때는 그렇게 생각했다. 하지만 막상 임서율을
서재영과 장호준은 그제야 상황을 완전히 이해했다.“아, 그래서였구나. 갑자기 울적해서 술 퍼마시는 이유가 그거네. 임서율이 곧 네 숙모가 될지도 모른다 이거지?”심경호가 피식 웃으며 잔을 돌렸다.“그렇다면 좀 심란하긴 하다. 너희 삼촌 어떤 사람인데. 연애도 안 하고 몇 년을 혼자 지냈어. 혹시 임서율 기다린 거면?”“나도 들은 게 있어. 너희 삼촌이 임서율이랑 오래전부터 알고 있었다며? 임서율 어머니랑도 알고 지낸 사이라는 말도 있었어.”평소 한 감정에 오래 머무르지 않는 바람둥이 서재영은 오히려 현실적으로 충고했다.“주헌아, 내가 진심으로 조언 하나 할게. 임서율한테 너무 매달리지 마. 전 여친 잊는 가장 빠른 방법이 뭔지 알아? 그냥 새로운 사람 만나는 거야.”지금의 차주헌은 그런 말이 귀에 들어올 만큼 정신이 맑지도 않았다. 그저 이 상태로 계속 버티면 숨이 막힐 것 같다는 것만 알고 있었다. “추천해 줄 사람 있어?”서재영이 손가락을 튕기자 누군가 여자 몇 명을 데리고 걸어왔는데 전부가 눈에 띄는 미인이었다.“어때? 괜찮지?”차주헌은 앞쪽의 여자들에는 별 관심이 없었다. 그런데 시선이 한 사람에서 멈췄다.하얀 셔츠에 청바지, 꾸미지도 않은 차림이었다. 긴 머리는 대충 묶었고 드러난 목선은 가늘었다. 눈빛은 거리감이 느껴졌고 마치 시끌벅적한 술집 한가운데 놓인 차가운 공기 같았다.그 순간, 차주헌은 무의식적으로 손가락으로 차가운 잔을 문질렀다.서재영이 바로 눈치를 채고 팔꿈치로 그를 툭 밀었다.“어? 눈에 확 들어오지? 걔 이름 오가연이야. 그림 진공이고 평소 이런 데 잘 안 나오거든? 내가 진짜 공들여서 데려왔어.”오가연은 시선이 몰리는 걸 신경 쓰지 않고 그저 조용히 서 있었다. 그녀는 가느다란 손가락으로 가방끈을 한 번 눌렀는데 뭔가를 확인하는 듯했다.그때 차주헌이 갑자기 자리에서 일어서더니 휘청이며 그녀 앞에 섰다.“이쪽으로 와봐.”그는 상대방의 대답도 기다리지 않고 구석으로 가버렸다.서재영과 장호준은 동시에
하도원의 마음속엔 자신과 임서율이 이미 수많은 풍파를 함께 견뎌냈다는 확신이 있었다. 비록 처음엔 계약 관계라는 애매한 명목이었지만 그것도 결국 그녀를 곁에 두기 위한 작은 핑계에 불과했다.다행히 시간이 흐르면서 두 사람의 마음은 점점 가까워졌고 더 이상 복잡한 수작을 부릴 필요도 없게 됐다.처음 차진만이 결혼 이야기를 꺼냈을 때만 해도 하도원은 내심 불안했지만 그녀가 이렇게까지 단호하게 거절할 거라고는 생각 못했다. 마치 가슴에 솜뭉치가 걸려 내려가지 않는 느낌이었다.순간, 공기가 묘하게 얼어붙었다.임서율도 그걸 느꼈는지 서둘러 말을 꺼냈다.“차 회장님, 일단 이 떡부터 드셔보세요. 제가 평소에도 자주 사 먹는 집이에요.”“그래그래.”차진만은 떡을 집으면서도 하도원을 흘끗 쳐다봤다. 겉으로는 태연한 척했지만 속으로는 이미 적잖이 충격을 받은 게 눈에 보였다.차진만은 속으로 중얼거렸다.‘아직 갈 길이 멀었구먼.’하지만 그도 임서율이 대체 어떤 마음인지 확신할 수 없었다. 싫어하는 건 아닌 게 분명한데 도대체 뭐가 걸리는 건지 알 길이 없었다....반면, 그 시각 병원을 나온 차주헌은 바로 친구들을 불러 술집으로 향했다. 서재영은 소파에 널브러져 핸드폰으로 장호준에게 메시지를 보내고 있었다.[너네 도대체 언제 오냐. 얘 여기서 벌써 세 병째다. 그것도 도수 제일 높은 걸로.][문 앞이니까 조금만 기다려.]처음엔 서재영 혼자 지켜보고 있었지만 곧 셋이 모여 차주헌이 술 마시는 걸 지켜봤다.“야, 얘 왜 이러냐. 느낌 쎄한데.”“내가 어떻게 알아? 그런데 딱 봐도 감 잡히잖아. 연애 문제지 뭐.”장호준은 체념하듯 분석했다.“누구 때문인데? 설마 강수진?”“강수진이랑 무슨 상관인데? 너 이 녀석이랑 어릴 때부터 같이 붙어 다녔으면서 그 정도도 몰라? 걔가 강수진이랑 왜 헤어지려고 했는데. 죽어도 이혼하겠다고 버틴 녀석이야.”“며칠 전엔 강수진이 우리 집까지 찾아왔다니까. 차주헌 좀 말려달라고. 강수진은 이혼하기 싫다고 울고불고 난
차진만은 차주헌이 도망가듯 나간 걸 보며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나이가 몇인데 아직도 철이 없어. 정작 자기가 어떤 사람을 좋아하고 어떤 사람이랑 살아야 하는지조차 모르니...”그는 손을 휘저으며 다시 본론으로 돌아왔다.“아까 내가 한 말, 흘려듣지 마라. 너도 이제 나이가 있는데 인생 대사부터 제대로 챙겨야지.” 하도원은 입술을 꾹 다물었다.“아직... 아직 서율이가 받아줄지 모르겠습니다.”차진만은 그런 그를 보며 피식 웃었다.“임서율이 대단하긴 한가 보구나. 평소엔 어떤 일이든 척척 해내고 복잡한 프로젝트도 끝을 보던 놈이 그 여자 앞에서는 확신도 못 하다니. 그건 나도 좀 의외다.”하지만 차진만이 모르고 있는 일이 있었다. 하도원은 임서율을 뒤늦게 좋아한 것이 아니었다. 그는 처음부터 그녀를 눈여겨봤었고 지금껏 마음이 변한 적도, 흔들린 적도 없었다.쉽게 얻은 게 아니었기에 더 소중했고 더 조심스러웠다.하도원은 그저 조용히 미소만 지었다.그때 문 두드리는 소리와 함께 또렷한 여자 목소리가 들려왔다.“차 회장님.”임서율이 병실 문 앞에 서 있었다.“서율아.”그는 놀라서 금세 다가갔다.“여긴 어떻게 왔어. 지우 씨 쪽은 다 해결된 거야?”하도원은 무의식적으로 그녀의 손을 잡았다.임서율이 고개를 들어 그를 바라봤다.“네, 일단 정리는 됐어요. 엘리 선생님 말씀으로는 상태가 우리가 생각한 것보다 좋지 않대요. 사실 예전에 혼자 검사했을 때부터 상태를 숨기고 있었던 것 같아요. 그런 탓에 지금은 좀 악화된 부분도 있고요.”말을 이어가며 임서율은 눈시울이 붉어졌다. 그녀는 입을 손으로 가리고 고개를 돌렸다.“미안해요...”하도원은 다정하게 그녀의 어깨를 쓰다듬었다.“괜찮아. 지우 씨랑 그렇게 사이가 좋았는데 슬픈 게 당연하지.”임서율은 차진만 앞에서 눈물까지 보이고 싶진 않았기에 서둘러 감정을 가라앉혔다. 차진만도 아픈 상태인데 괜히 걱정시키고 싶지 않았다.그녀는 이내 표정을 정돈하고 들고 온 봉투를 꺼냈다.“차 회
“네. 예전부터 몸이 많이 안 좋으셨다는 말은 들었어요. 한 번 입원도 하셨고요. 그런데 이번엔 더 안 좋아지셨대요. 한종서 일 때문에 흥분하셨다가 결국...”하도원은 차마 임서율이 한씨 가문에 직접 찾아가 한 회장을 열받게 만들어 병원 신세까지 지게 한 일을 입 밖에 꺼내지 못했다.차진만이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나랑 한 회장 사이에 별다른 악감정은 없었어. 문제는 너랑 종서지. 전생에 원수라도 진 것처럼 싸우니, 우리 늙은이들이 뭘 어쩌겠냐.”그는 고개를 떨구며 씁쓸하게 웃었다.“안타까운 일이야. 나도 지금 병원에 누워 있으니 마지막 길까지 배웅도 못 가고.”하도원도 그의 마음을 이해했다. 이 나이대가 되면 누구나 자기 인생에 후회를 남기고 싶지 않은 법이니까.“걱정 마세요. 저희가 대신 다녀왔습니다. 한씨 가문에서도 정성을 다해 장례를 치렀으니 한 회장님께서도 편안하게 떠나셨습니다.”차진만도 하도원이 자신을 위로하려고 하는 말이라는 걸 잘 알고 있었다. 그러나 이제 세상을 뜬 마당에 더 붙잡고 있어 봤자 무슨 의미가 있을까.그는 차주헌을 보며 말했다.“도원이 너 임서율하고 오래 만났잖느냐. 어떻게 할 생각이냐. 내가 눈 뜨고 있을 때 두 사람 제대로 결혼이라도 해야지.”놀란 건 하도원이 아니라 차주헌이었다.차주헌은 눈이 튀어나올 듯 차진만을 바라보며 외쳤다.“할아버지, 제정신이세요? 삼촌이랑 임서율을 결혼시킨다니요? 임서율은 제...”“임서율이 예전에 네 아내였다는 건 나도 안다. 하지만 지금은 이미 이혼했잖느냐. 게다가 도원이가 차씨 가문 사람이라는 것도 아는 사람이 거의 없으니 이상한 소문 돌 일도 없을 거다.”“주헌아, 요즘 회사도 안정적으로 운영되고 있으니 네 삼촌 회사도 좀 도와주거라.”차주헌은 어이가 없었다. 임서율을 하도원에게 넘기라던 것도 모자라, 이제는 하도원의 회사 문제까지 나서서 도와주라니.그가 이 회사 때문에 얼마나 많은 피땀을 흘렸는데, 이제 와서 하도원을 위해 밑바닥부터 다시 깔아주라고?말도 안 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