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지만 하연이 하루아침에 갑부의 손녀가 되자 사람들은 하나같이 하연의 환심을 사려고 먼저 다가가 아부하고 있다.이 모습을 보니 유진은 배알이 꼬였다.“작은고모, 혹시 한서영이 왜 A국으로 쫓겨난 줄 아세요?”한설매는 결혼을 한 뒤 본가의 일에 큰 관심을 두지 않아 서영에게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모른다.그저 A국으로 유학을 보냈다는 이수애의 말만 철석같이 믿고 있었다.그런데 A국이 어떤 곳인가? 한씨 가문이 설사 망했다 할지라도 자식을 A국으로 유학 보내는 건 말도 안 되는 일이다. 하지만 한설매는 내막을 모르기에 궁금한 듯 되물었다.“무슨 속사정이라도 있는 거야?”유진은 이내 사람들에게 둘러 싸인 하연을 가리키며 입을 열었다.“이유라 할 게 있겠어요? 다 최하연 때문이죠.”“최하연? 최하연에게 그런 능력이 있다고?”유진은 하연을 만만하게 보면 안 된다는 눈빛으로 한설매를 바라봤다.“전에 둘째 숙모와 한서영이 최하연을 어떻게 괴롭혔는지 잊었어요? 최하연은 그걸 복수하려고 때를 기다린 거예요. 그리고 하루아침에 한서영한테 그 본대를 보여줬잖아요. 서준이 직접 명령을 내렸대요. 남은 평생 한서영이 귀국하지 못하도록.”그 말을 들은 한설매는 가슴이 쿵 내려앉았다.“최하연이 그 정도로 뒤끝이 있다고?”돌이켜 보면 한설매도 하연을 남자 덕에 팔자 폈다고 종종 모욕했었다. 그러니 하연이 만약 그때 일을 복수한다면 한설매는 분명 꼼짝없이 당할 수밖에 없다.“작은고모가 몰라서 그렇지 이번 일로 피해 본 사람 한서영뿐만이 아니에요. 둘째 숙모도 당했거든요.”“뭐? 둘째 언니는 그래도 최하연 시어머니였잖아, 게다가 어르신이고! 그런데 어떻게 감히! 이젠 위아래도 없다 이거야?”유진은 한참 부채질하다가 기회를 보더니 마지막 한마디를 투척했다.“두 사람 지금은 이혼했잖아요. 그러니 둘째 숙모도 이제는 시어머니가 아니죠. 그래서 저렇게 거리낄 게 없는 거고. 그러니 작은고모한테는 어떻게 대하겠어요.”그 순간, 한설매는 덜컥 겁이 났다.한설매가 결혼한
모든 사람이 하연의 주위에 모여들어 떠받드는 걸 보자 강영숙은 흐뭇한 표정을 지었다. 그에 반해 거실 구석에 앉아 있는 이수애는 속에서 열불이 났다.이 사람들이 권세에 빌붙으려 한다는 건 이미 익히 알고 있었다.예전에 이수애가 잘나갈 때는 하나같이 그녀를 추켜세우며 빌붙으려 하던 사람들이니. 하지만 지금 그 태도가 180도로 변해 모두 하연에게 몰려들었다.이 사실을 인지한 순간 이수애는 딸 서영이 더 그리웠다.지금 서영은 A국에서 고생하고 있는데, 하연은 너무 잘나가고 있었으니 속이 말이 아니었다.“어머님, 최하연은 이제 우리 집 식구도 아닌데, 왜 초대했어요?”그 말에 강영숙은 이내 언짢은 기색을 내비쳤다.“하연은 내가 초대한 손님이다. 내 손님에 네가 왜 토를 달지? 그럴 시간이 있으면 주방에서 일이나 좀 거들어라. 여기서 방해하지 말고.”강영숙의 강경한 태도에 이수애는 마지못해 입을 다물더니 곧장 뒤돌아 주방으로 걸어갔다.그제야 강영숙이 손을 뻗어 아픈 가슴께를 꾹꾹 눌렀다. ‘고질병이 또 도졌나 보네.’강영숙은 얼른 자리에서 일어나 소리 없이 위층으로 올라갔다.그리고 그때.“하연 씨.”유진이 사람들을 가로 지나 하연에게 인사를 건넸다. 하연은 그나마 유진에게 호감을 갖고 있다. 그도 그럴 게, 서준의 사촌 누나인 유진은 다른 식구들처럼 하연을 괴롭힌 적이 한 번도 없었으니까.“유진 언니.”“하연 씨, 너무 많이 변해서 몰라보겠네요.”유진은 싱긋 웃으며 말을 걸어오자 하연 역시 웃음으로 화답했다.“언니야말로 점점 예뻐지네요.”그때 유진이 갑자기 뭔가 생각난 듯 말을 보탰다.“방금 할머니가 몸이 편찮아 보이던데, 또 고질병이 도진 것 같아요.”강영숙이 편찮다는 말에 하연은 이내 걱정했다.“할머님은 괜찮으세요?”그 말에 유진은 주위를 빙 둘러보며 무심코 말했다.“어? 이상하다? 위층에 올라간 지 한참이 되는데 왜 안 돌아오셨지?”하연은 순간 걱정이 한층 더해졌다. 하지만 주위를 아무리 둘러보아도 서로 대화하는 손
“지금 여기서 뭐 해?”문 앞에 서 있는 서준의 목소리에는 노기가 가득 담겨 있었다.심지어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안으로 성큼성큼 걸어 들어오더니 하연의 손을 확 낚아챘다.그제야 정신을 차린 하연은 서준에게 끌려 방을 나섰다.“방금 그거 뭐야?”믿을 수 없다는 듯 묻는 하연의 질문에 서준은 눈살을 찌푸릴 뿐 아무런 설명도 하지 않았다.“뭘 봤든 쓸데없는 생각하지 마.”하지만 그 말을 들으니 하연의 의심은 더해져만 갔다.심지어 이곳에 남모를 비밀이 숨겨져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이건 너무 이상하잖아.”하연은 낮은 소리로 중얼거리며 방금 본 걸 떠올리더니 결국 서준을 보며 물었다.“왜 서준 씨 흑백 사진이 벽에 걸려 있어? 뭐 귀신이라도 돼?”그 말에 서준은 버럭 화냈다.“헛소리하지 마. 잘못 본 거야.”“전말?”재차 질문하던 하연은 그제야 서준이 제 손목을 잡고 있다는 걸 발견하고는 이내 손을 뿌리쳤다.“생일 연회 이제 곧 시작해. 내려가자.”서준은 텅 빈 손을 바라보며 인내심 있게 말했다.하연은 아직 의심이 가시지 않았지만 이내 본인이 너무 복잡하게 생각하는 거라고 결론 지었다.‘한서준이 내 앞에 이렇게 있잖아. 그러니 그럴 리 없어.’“할머님은 어떠셔? 괜찮아?”“뭐라고?”“할머님이 편찮으시다고 해서 올라와 본 거야.”서준은 방금 전 상황을 설명하는 하연을 의심 가득한 눈빛으로 바라봤다.“할머니는 괜찮아. 다음에 다시는 여기 오지 마.”“응.”하연은 눈을 내길 깔고 짤막하게 대답했다.두 사람이 앞뒤로 나란히 서서 계단 입구에 이르렀을 때, 갑자기 정체 모를 물건이 하연을 향해 날아왔다.“조심해.”무의식적으로 반응한 서준은 하연의 팔을 잡아당기며 제 몸으로 무거운 물건을 막아냈다.그리고 다음 순간, ‘쿵’하는 소리와 함께 물건이 서준의 등에 떨어지더니 옷이 얼룩덜룩한 물감으로 완전히 뒤덮여 처참한 몰골이 되어버렸다.주위의 시선은 순간 서준에게 모였다. 다들 의아한 눈빛으로 처참한 몰골의 서준을 바라봤다.
“난 최하연만 있으면 돼.”그 말에 하연은 화가 치밀었다.“그건 안 될 것 같은데.”하연의 거절에 서준의 표정을 그대로 굳어버렸다.그렇다고 사람들 앞에서 하연에게 강요할 수는 없었기에 결국은 유진을 따라 자리를 피했다.두 사람이 떠나자 강영숙이 얼른 다가와 하연을 걱정했다.“하연아, 괜찮니?”그제야 정신을 차린 하연은 이내 고개를 저었다.“괜찮아요. 몸은 괜찮으세요?”“나는 괜찮다. 늘 있는 일이라.”그 말이 떨어지자마자 한설매가 7살 정도 되는 남자애의 귀를 잡아당기며 아래로 내려왔다. 그 아이의 옷 역시 얼룩덜룩한 물감이 묻었고, 손에 붓 두개를 든 채 눈물범벅이 되어 울고 있었다.“네가 한 짓 똑똑히 봐!”남자애는 꾸중을 듣자 지붕이 떠나갈 것처럼 엉엉 울었다.그걸 본 강영숙이 언짢은 표정으로 호통쳤다.“그만 해라. 창피한줄도 모르고.”이건 분명 하연을 겨냥했던 일인데, 왜 서준이 엉망이 되었는지 한설매는 의문이었다.심지어 서준이 이 일을 알게 되면 제 아들을 혼낼지도 모르기에 먼저 나서서 사과했다.“엄마, 죄송해요. 애가 철이 없어서 서준을 저렇게 만들 줄 누가 알았겠어요. 너그러이 용서해 줘요. 내가 이미 심하게 혼쭐냈으니.”어두운 표정의 강영숙은 한설매를 무시하며 하연을 제 쪽으로 끌어왔다.“가자, 하연아.”그 시각, 하연의 눈은 어두워졌다.심지어 마음속 한구석이 왠지 자꾸만 불안했다.한편, 방에 도착한 유진이 하인들을 쫓아내는 바람에 서준과 단둘이 남게 되었다.등을 돌리고 있는 탓에 유진이 아직 떠나지 않았다는 걸 모르는 서준은 곧바로 외투를 벗었다. 그런데 다음 순간, 하연이 그에게 달려들었다.“서준아, 내가 도와줄게.”유진의 눈은 활활 타오르고 있었다.심지어 동작도 어찌나 빠른지 서준이 미처 반응할 새도 없이 그의 외투를 벗겼다.이에 서준은 거의 무의식적으로 뒷걸음치며 눈살을 찌푸리더니 의아한 눈빛으로 유진을 바라봤다.“누나도 그만 나가 봐. 나 혼자 할 수 있으니까.”서준이 거절 의사를 밝혔
유진은 도망치듯 저에게서 멀어지는 서준을 보며 자조적인 미소를 지었다.그제야 정신이 든 유진은 눈을 내리깔며 주먹을 그러쥐었다.거절당했다는 분노를 고스란히 얼굴에 드러낸 유진은 방금 전 계단 입구에서 하연을 감싸주던 서준의 모습을 떠올렸다.‘이미 이혼한 거 아니었어? 왜 아직도 애매하게 구는 건데?’유진의 눈동자는 순식간에 어두워지더니 매서운 빛이 언뜻 지나갔다....샤워를 하고 옷을 새로 갈아입은 서준은 거실에 도착하자마자 주위를 둘러보며 하연을 찾았지만, 하연의 그림자는 이미 사라진 지 오래였다.그때 서준을 발견한 강영숙이 낮은 한숨을 쉬며 귀띔했다.“하연은 이미 떠났어.”그 말에 살짝 놀란 서준은 원망하는 투로 되물었다.“왜 붙잡지 않았어요?”“너 이 할미한테 솔직히 말해 봐. 대체 뭐하고 싶어?”강영숙의 말투는 매우 퉁명스러웠다.“여자도 아직 해결하지 않았으면서. 내 기억이 맞는다면, 네가 바람피워 그 계집 임신까지 시켰잖아.”지난 일을 언급하자 서준의 안색은 이내 어두워졌다.강영숙은 평소에 서준을 아끼지만 이 일에서만큼은 서준을 지지할 수 없었다.“한번 배신하면 그 고통은 영원해. 하연이 너를 용서하면 남은 평생 후회하며 잘해줘야 할 거지만, 만약 하연이 이 일을 놓지 못한다면 절대 강요하지 마라. 두 사람 인연이 여기까지라는 뜻일 테니.”서준은 강영숙의 말에 눈살을 찌푸렸다. 심지어 연회장에 남아 있을 기분이 사라져 곧장 제 방으로 돌아갔다.잠시 뒤, 서준의 방 베란다는 연기가 자욱했고, 바닥에는 온통 담배꽁초가 널렸다.그로부터 얼마나 지났을까? 서준은 끝내 핸드폰을 꺼내 해외로 전화했다.“내가 조사하라던 건 어떻게 됐어?”상대방이 뭐라 말했는지 서준은 곧장 손에 들고 있던 담배를 꺼버렸다.“알았어. 내가 바로 갈게.”이윽고 한시도 지체하지 않고 그날 바로 해외로 떠났다....한씨 고택을 나온 하연은 곧바로 회사로 돌아가는 대신 브랜드 디자이너 브랜드숍으로 향했다.한동안 오지 않았는데, 이곳의 장사는 여
“참, 네가 오니까 갑자기 생각났는데.”예나가 갑자기 하연의 생각을 끊으며 말을 이었다.“전에 어떤 고객님이 너를 콕 집어서 드레스 디자인해달라고 하더라고.”“무슨 디자인인데?”예나는 얼른 카운터에 보관하고 있던 고객 리스트를 하연에게 건넸다.“가격을 6억이나 제시했어. 시간도 빠듯한 게 아니고. 반년 내로 네가 시간 날 때 언제든 만들어만 주면 된다던데.”하연은 눈썹을 치켜 올리며 리스트를 건네받았다.리스트에는 고객의 상세한 정보 대신 이름과 전화번호만 적혀 있었다.“뭐야? 신비주의 컨셉이래? 드레스에 대한 요구는 없고?”“말 안 하던데? 네가 시간 날 때 직접 만나서 얘기하고 싶대. 받을 거야?”하연은 이내 입꼬리를 말아 올리며 예쁜 미소를 지었다.“당연히 받아야지. 안 받을 이유가 없잖아. 우리 가게에 들어온 큰 주문인데. 이건 나한테 맡겨, 회사 일만 처리하면 내가 직접 연락할게.”“그래, 나야 당연히 네 의견에 찬성이지.”...눈 깜짝할 사이에 다가온 월요일.아침 일찍 회사에 도착한 하연은 공교롭게도 1층 로비에서 운석과 마주쳤다. 운석은 슈트 차림에 평소와는 사뭇 다른 모습을 하고 있었는데, 하연을 본 순간 이내 원래의 모습으로 돌아왔다.“하이, 여신님!”싱글벙글 웃으며 하연에게 인사하는 운석의 모습은 다정한 미남이 따로 없었다. 게다가 매너를 지키려는 듯 적당한 거리를 유지하며 엘리베이터에 올라탔다.“하연 씨도 회의에 참석하러 왔어요?”“네.”그 말에 운석의 미소는 더 짙어졌다.관계에 따르면 DS 그룹은 매주 월요일 정기적으로 회의를 하는데, 하연은 지금껏 거의 참석한 적이 없다. 때문에 하연이 참석하는 게 의외라고 느껴졌다.“오늘 회의에서 주로 D시 프로젝트에 관해 다루잖아요. 아마 최종 예산안을 확정하고 내일 바로 입찰 진행할 거예요.”하연은 운석의 업무 능력을 조금도 의심하지 않는다. 그도 그럴 게, 운석은 일할 때만큼은 누구보다 진지하니까.하지만 이번 입찰이 중요한 건이다 끝내 보니 참지 못 하고
나운석의 프로젝트는 만장일치로 통과되었다.회의가 끝난 뒤 하연은 먼저 회의실에 나왔고, 태훈이 그녀와 약 반 발짝 떨어진 거리를 우유지하며 업무를 보고했다.그러다 두 사람이 이제 막 사무실 문 앞에 도착했을 때.“하연 씨!”갑자기 들리는 목소리에 발걸음을 멈췄더니 유진이 웃는 얼굴로 하연에게 걸어왔다.유진의 갑작스러운 방문이 하연은 놀랍기만 했다. 그도 그럴 게, 서준과 이혼하고 난 뒤 한씨 집안 식구들과는 깨끗하게 관계를 정리하여 친척들과는 한 번도 왕래한 적이 없다.‘여기는 갑자기 왜 왔지?’하연은 의문이 앞섰지만 예의를 지키며 인사했다.“유진 언니, 여기는 어쩐 일이에요?”그 말에 유진이 손에 들고 있던 보온병을 건넸다.“할머니가 나한테 삼계탕 심부름시키더라고. 하연 씨 가져다주라고.”하연은 고개를 끄덕이더니 서류를 덮어 이내 태훈에게 건넸다.“방금 말한 대로 진행해.”“네, 사장님.”태훈이 떠나자 하연은 그제야 시선을 유진에게 옮겼다.“들어와서 앉아요.”유진은 하연의 초대에 응하고는 이내 그녀 뒤를 따라 사무실로 들어갔다.솔직히 유진은 180도로 변한 하연의 분위기에 깜짝 놀랐다. 예전에는 항상 저자세로 순종적인 모습만 보였었는데, DS 그룹 대표가 된 지금은 오히려 유진을 누르는 카리스마를 갖고 있었다.하연에게 압도당한다는 느낌은 전에 한 번도 받아본 적 없는데 말이다.“하연 씨, 참 많이 변했네요.”사무실에 들어서자마자 유진은 감탄했다.“아니에요, 일할 때만 이래요.”하연은 겸손하게 대답했다.“앉아요.”소파에 앉은 유진은 이내 손에 들고 있던 보온병을 하연에게 건넸다.“먹어 봐요. 할머니가 특별히 부탁한 거니까.”이에 하연은 고개를 끄덕이며 거리감 느껴지는 말투로 대답했다.“할머님께 고맙다고 전해줘요. 이렇게까지 마음 쓰실 줄 몰랐는데.”그러자 유진은 싱긋 웃었다.“고맙긴요. 할머니한테 하연 씨는 친손녀나 다름없는데요. 서준과 이혼했어도, 그건 변함없어요.”하연은 그 말에 표정을 가다듬으며 아무
“하연 씨가 서준과 재결합하지 않아도 나한테는 영원한 동생이나 마찬가지예요.”유진의 말이 떨어지기 바쁘게, 사무실 밖에서 노크 소리가 들려왔다.하연은 손에 들고 있던 그릇을 내려놓고 티슈로 입을 닦고 나서야 대답했다.“들어와요.”그 말이 떨어지자 운석은 서류뭉치를 안은 채 안으로 들어왔다. 하지만 다른 손님이 있는 걸 발견하자 사뭇 진지한 태도로 변했다.“최 사장님, 말씀하신 서류예요. 확인 부탁드립니다.”보기 드문 운석의 진지한 태도에 하윤은 고개를 끄덕였다.“테이블 위에 올려 둬요.”“그래요.”하지만 그때, 운석을 본 유진이 놀라서 입을 다물지 못했다.“나운석, 네가 왜 여기 있어?”그 말에 운석 역시 고개를 들어 유진을 바라봤다. 서준의 오랜 친구로서 운석은 당연히 유진을 알고 있다.그뿐만 아니라 심지어는 유진에 관한 비밀도 알고 있다.하지만 유진을 본 운석은 그저 겉웃음만 지어 보였다.“나 DS 그룹에서 일해.”그 말에 유진은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NW그룹 후계자가 남의 밑에서, 그것도 DS 그룹에서 일을 하다니.유진은 더 묻고 싶었지만 운석은 그럴 기회도 주지 않은 채 하연을 보며 말했다.“최 사장님, 다른 일 없으면 저는 이만 물러가겠습니다.”“그래요.”운석이 떠나자 유진은 가슴이 철렁 내려 앉았다. 심지어 은연중에 운석의 태도가 예전처럼 살갑지 않다는 것도 어느 정도 느꼈다.“유진 언니, 왜 그래요?”유진이 수저를 내려놓으며 묻자 유진은 다급히 대답했다.“아무것도 아니에요. 다 마셨어요? 저 잠깐 설거지하러 갔다 올게요.”“아니에요. 제가 할게요.”하연은 그릇과 보온병을 들고 사무실을 나가자 커다란 사무실 안에 일순 유진만 남게 되었다.그 틈에 유진은 자리에서 일어나 하연의 책상 앞으로 다가가 운석이 방금 가져온 서류를 확인했다.그리고 그걸 확인하는 순간 눈에 흥분의 빛이 언뜻 지나갔다.유진은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핸드폰을 꺼내 서류를 한 장 한 장 펼치며 사진을 찍어 대더니 하연이 돌아오기 전
송혜선은 조봉규를 거칠게 밀쳐냈다. 조봉규는 중심을 잃고 바닥에 거칠게 쓰러졌다. “안 돼... 혜선아...” 쿵!무거운 소리와 함께 조봉규는 힘없이 바닥에 쓰러진 채, 천천히 눈꺼풀이 내려앉았다. 결국 그는 의식을 잃었다. 송혜선은 조심스레 무릎을 꿇었고, 가느다란 손가락이 조봉규의 얼굴을 스쳤다. 잠시 머뭇거리던 손끝은 이내 떼어졌다. ‘이젠, 끝이야.’ 송혜선은 망설임 하나 없이 돌아서며, 서늘한 공기 속으로 사라졌다. ...그동안, 상혁은 대부분의 일정을 취소하고 하연의 곁에 머물렀다. 둘만의 달콤한 시간은 보는 이들까지 부러움에 빠지게 했다. 이런 두 사람의 모습에 양가 부모님들은 대만족이었다. 어느 날, 오랜만에 양가 어른들이 한자리에 모였으니, 자연스레 상혁과 하연의 결혼 이야기가 오갔다. “약혼은 했지만, 전통대로라면 결혼식도 치러야지.” 최동신이 흐뭇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조진숙 역시 고개를 끄덕였다. 하연은 이미 조진숙에게 친딸과 다름없는 존재였기 때문에, 인생에 단 한 번뿐인 결혼식을 대충 넘길 순 없었다. “걱정 마세요. 결혼식 준비는 제가 맡아서 잘 준비할게요. 두 아이는 그날 예쁘게 하고 참석만 하면 됩니다.” “하하, 고맙소, 고맙소.” 최동신은 기쁜 마음을 숨기지 못했다. 요즘 들어 최동신의 건강도 한층 좋아진 데다가 경사까지 겹치니 덩달아 기운이 나는 모양이었다. “아이들만 행복하면, 우리야 바랄 게 없지.” 옆에 있던 최하민이 자연스럽게 거들었다. “결혼식은 서둘러야겠지만, 아직 혼인신고를 안 했으니 그게 먼저 아닐까요?” 조진숙은 그제야 무릎을 탁 치며 소리쳤다. “맞다, 그걸 깜빡했네.” 그녀는 바로 말을 이었다. “그래도 혼인신고는 아이들 의견을 먼저 들어봐야지. 중요한 일이니까.” 하연과 상혁은 나란히 계단을 내려오다, 자연스럽게 들려온 혼인신고 이야기. 둘 다 순간 멈칫했다. 본능처럼 서로를 바라봤다. ‘
상혁은 말없이 부동건의 뒷모습을 오래도록 바라보았다. 지나간 모든 일들이 마치 한 편의 영화처럼 머릿속으로 한 파래임 한 파래임 스쳐 지나갔다. 한참을 그렇게 서 있다가, 마음을 다잡은 상혁은 겨우 한 마디를 내뱉었다. “네, 알겠습니다.” 부남준 사건은 예정대로 재판이 열렸다. 부씨 가문은 변호사를 통해 대응했지만, 형사 사건인 만큼 얽히고설킨 진실을 밝히는 데 꽤 많은 시간이 걸렸다. ...DL 그룹, 최상층 대표실.상혁은 혼자 창밖을 내려다보고 있었고 거대한 도시가 한눈에 들어왔다. ‘결국 이 순간이 오는구나.’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문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고, 곧 원신민이 문을 열고 들어왔다. “대표님, 재판 끝났습니다.” 상혁은 가슴이 철렁 내려앉는 걸 느끼며 입꼬리를 살짝 올렸다. “판결 나왔어?” “예상대로입니다. 다시는 못 일어날 겁니다.” 원신민의 말은 고요했던 상혁의 마음에 작은 돌을 던진 것처럼 퍼져나갔다. 두 사람의 목숨과 확실한 증거. 이미 알고 있던 결말이었지만, 막상 그 순간이 다가오니 상혁도 묘한 허탈함이 밀려왔다. “부 회장님도 알고 계시나?” “예, 소식을 듣고 충격을 받아 기절하셨지만, 다행히 지금은 안정을 되찾으셨고요.” 원신민은 망설이다가 조심스럽게 덧붙였다. “송 여사는 재판하는 그 자리에 있었는데, 판결 듣자마자 바로 떠났어요.”부동건에게 쫓겨난 후, 송혜선은 과거의 화려함을 모두 잃었다. 부동건은 그녀에게 줬던 모든 부동산을 회수했고, 카드 계좌까지 정지시켰다. 이제 송혜선에게는 남은 보석을 팔아 생계를 이어가고 있을 뿐. 상혁은 가늘게 눈을 좁혔다. ‘재판에 온 건 놀랍지 않지만... 반응이 이 정도로 끝났다는 게 아무래도 수상해.’ 경계를 늦추지 않고 바로 상혁은 차갑게 말했다. “송혜선 감시 붙여. 또 무슨 일 일으키기 전에.” 원신민은 알아듣고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대표님.” ...어둡고 습
비틀거리던 부동건은 힘겹게 몸을 일으켰다. ‘정신 차려... 이 순간만은 피하지 말자.’ 그는 느릿한 걸음으로 상혁 쪽으로 다가갔다. 서서히 가까워지는 거리. 마침내 눈앞에 다다라 멈춰 섰을 때, 두 사람의 시선이 정확히 맞닿았다. 부동건은 말하고 싶은 게 많았지만, 막상 눈을 마주하니, 무슨 말을 먼저 꺼내야 할지 도무지 감이 잡히지 않았다. 잠시 침묵이 흘렀고, 부동건은 깊은숨을 들이쉬며 차분하게 입을 열었다. “상혁아. 그동안, 너랑 너희 어머니한테 내가 너무 못했다.” ‘처음부터 길을 잘못 들었다. 그날, 그 선택이 결국 우리 가족을 무너뜨린 거야.’ 사실, 부동건은 이혼하던 날부터 이미 후회하고 있었다. 그 후로의 모든 시간은, 그저 체면과 자존심을 위한 연기였을 뿐이다. 지금 이 꼴이 된 건... 결국 하늘이 내린 벌이었다. ‘자업자득이야. 이 모든 건 내가 자초한 거니까.’ 상혁은 조용히 아버지를 바라보았다. 그 눈동자엔 적당한 거리감과 냉정함이 깃들어 있었다. “그게 이제 와서 중요하진 않아요. 저도, 어머니도... 이미 오래전에 마음 정리했어요.” 그 말에 부동건은 눈을 감았다. 눈가에 뜨거운 기운이 차오르는 걸 애써 참았다. “그래. 마음 내려놨다니 다행이다. 정말... 다행이다.” 잠시 묵묵히 고개를 끄덕이던 부동건은 책상 위에 놓여 있던 한 서류봉투를 꺼냈다. 그리고 곧장 상혁에게 건넸다. “이제 나도... 나이가 들었고, 더는 회사를 끌고 나갈 힘이 없다. DL그룹은 내가 처음부터 세운 회사다.”“내 모든 시간과 인생이 들어간 곳이지. 하지만 이제는 놓아야 할 때가 왔다.” 상혁은 망설이듯 손을 내밀지 않았다. 그런 상혁의 손에 부동건은 서류를 억지로 쥐여주며 아들의 손등을 두드렸다. “앞으로는... 네가 이끌어가야 한다.” 그 손길엔 조용한 무게와 책임, 그리고 사죄가 담겨 있었다. “그동안... 많이 힘들었지?” 입꼬리를 살짝 움직이던 부동
상혁도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살짝 웃음을 지었다. ‘다행이야... 정말 다행이야.’ 검진을 마친 뒤, 하연은 선명한 초음파 사진을 손에 들고 있었다. 사진을 바라보는 그녀의 얼굴에는 저절로 미소가 번졌다. 그녀는 손끝으로 사진 속 동그란 그림을 가리켰다. “여기 봐봐요. 이게 우리 아기래요.” 목소리엔 설렘과 떨림이 그대로 묻어났다. 상혁도 조용히 고개를 끄덕이며 하연의 손끝을 따라 시선을 옮겼다. 그리고 눈엔 이미 감동이 차올라 있었다. 상혁은 조심스레 하연의 아랫배에 손을 얹고,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지금 이 순간... 난 정말 너무 행복해.” ‘네가 내 옆에 있고, 우리 아이가 이렇게 자라고 있다는 것만으로도... 세상을 다 가진 기분이야.’ 하연은 눈을 반짝이며 물었다. “남자아기일까요, 여자아기일까요?” 그녀의 눈빛에는 이미 사랑스러운 미래가 그려지고 있었다. 상혁은 웃으며 대답했다. “아무래도 상관없어.” 하연은 고개를 살짝 돌려 상혁을 바라봤다. 그 눈동자엔 별빛이 머물러 있는 듯 반짝였다. “그래요... 건강하게만 태어나면... 그걸로 충분해요.” 두 사람은 자연스럽게 손을 맞잡았고, 서로의 손바닥에서 전해지는 따뜻함을 느꼈다. 그 순간, 상혁의 주머니 속 핸드폰이 진동했다. 그는 핸드폰을 꺼내 화면을 확인하곤 순간 눈빛이 깊어졌다. 화면엔 낯익은 이름이 선명히 떠 있었다. [부동건.]‘이 타이밍에...?’ ‘설마 무슨 일 생긴 건가?’ 지난 연회 이후, 부동건과는 한 번도 마주치지 않았다. 하지만 그날의 파장이 얼마나 컸는지는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송혜선과 조봉규. 그 두 사람 때문에 무너진 자존심. 그리고 결국, 부동건은 송혜선을 아이와 함께 본가에서 내쫓았다는 소문까지 들려왔다. 하연이 조용히 말했다. “받아봐요. 무슨 일일 수도 있으니까.” 상혁은 하연의 손등을 가볍게 토닥이고, 그녀를 옆에 있는 의자에 앉힌 후
부동건은 갑작스레 거칠게 기침을 터뜨렸다. “컥”‘피 맛...?’ 목 안에서 치밀어 오르는 피비린내를 억지로 삼켰다. 손등에 핏줄이 선명히 드러나고, 이성의 끈은 이미 위태롭게 흔들리고 있었다. 부동건의 시선이 천천히 송혜선과 조봉규를 향했다. ‘죽여버리고 싶다. 지금 당장 이 자리에서...’ “너희들... 너희들...” 부동건의 입술은 부르르 떨리고 있었다. 송혜선은 극도의 공포에 휩싸였다. ‘이건 아니야... 이렇게 끝나면 안 돼...’ 그녀는 급히 앞으로 다가가 부동건의 팔을 붙잡았다. “회장님... 우리, 조 선생님이랑 그냥 산후 회복 얘기하던 중이었어요. 진짜예요, 저희는...” 그 말이 끝나기도 전, 부동건의 손이 송혜선의 뺨을 후려쳤다. 짝! 순간 정적. 강하게 내리친 손바닥 소리에, 그 자리에 있던 사람들은 일제히 숨을 멈춘 듯 조용해졌다. 송혜선의 얼굴 한쪽이 순식간에 붉게 부어올랐다. 눈가가 덜덜 떨리며, 눈물도 같이 맺혔다. “이 천하의... 배은망덕 같은 것. 내가 너를 어떻게 믿었는데... 감히 날 기만해?” 뒤에 서 있던 하객들 사이에서도 탄식이 흘러나왔다. “저 정도였어?” “저게 진짜였네... 소문이 아니고...” “...”송혜선은 뺨의 통증을 애써 무시한 채, 다시 붙잡았다. “회장님, 제발... 오해예요. 저희 그런 사이 아니에요. 저는... 당신뿐이었어요.” 그러나 부동건은 그 손마저 거칠게 뿌리쳤다. 그리고는 힘껏 송혜선의 복부를 발로 찼다. 퍽! 무너지는 소리와 함께, 송혜선은 바닥에 힘없이 쓰러졌다. 그녀의 입에서 신음이 터졌다. 조봉규는 그 자리에서 얼어붙었다. ‘아니야... 지금 나섰다간 나도 끝장이야.’ 한 걸음 다가가려다... 그는 떨리는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회... 회장님... 저희... 아무 일도 없었어요... 정말이에요...” 하지만 그 한마디가 기름을 붓는 꼴이 됐다. 부동건은 그대로 조
일 순간 충격의 정점이었다.부동건은 들고 있던 와인잔을 그대로 바닥에 내던졌다. 쨍그랑! 깨지는 소리와 동시에 모든 시선이 그에게 꽂혔다. “저... 저런 미친...!” 그는 화면을 가리키며, 얼굴을 붉힌 채 말을 잇지 못했다. 숨이 거칠게 턱 끝까지 차올랐다. ‘송혜선... 네가 감히!’ 주변 하객들도 이미 술렁이기 시작했다. “저게 진짜야?” “부 회장님 딸이... 아니라고?” “와... 이건 완전히 생각지도 못한 미친 패륜이야, 상상도 못 했어.” 오늘의 연회는 더없이 화기애애한 분위기였지만, 이제 와선 최악의 스캔들 파티가 되어버렸다. ‘이 연회가... 전부 거짓된 일 때문에 생긴 일이란 말이야?’ ‘우리, 사기당한 거네. 다 같이.’ 그때 스크린이 멈췄고, 연회장 전체의 조명이 다시 환히 켜졌다. 하객들은 본능적으로 두리번거리며 부동건을 찾았다. “회장님, 괜찮으십니까?” 하지만 부동건은 아무런 대답 없이 어금니를 꽉 물고, 몸을 떨며 계단 쪽으로 향했다. 하객들은 그 뒤를 따라붙었다. ‘뭔가 일어나겠군...’ ‘이번엔 진짜 끝장이다.’ ...같은 시각, 2층 방 안. 송혜선은 조봉규의 손등을 다독이며 조용히 말했다. “조금만 참아. 며칠만 지나면 내가 다시 올게.” 조봉규는 싱긋 웃으며, 그녀의 허벅지를 장난스럽게 움켜쥐었다. “응. 기다릴게, 자기.” 하지만 그 말이 끝나기도 전, 문이 거칠게 흔들렸고, 익숙한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쾅!! “송혜선! 당장 안 나와?!” 송혜선의 온몸이 순간 얼어붙었다. 그녀는 반사적으로 조봉규의 팔을 꽉 잡았다. ‘망했다.’ “어떡해, 부동건이 올라왔어.” 두 사람은 당황하며 방 안을 둘러봤지만, 창문 하나 없는 좁은 방엔 도망칠 곳조차 없었다. ‘안 돼... 이렇게 들키면, 끝장이야. 정말 끝이야.’ 송혜선은 급하게 숨을 고르며 애써 이성을 붙잡으려 했다. ‘진정해. 침착해야 돼.
연회장 안은 화기애애한 분위기로 가득했다. 부동건은 손에 잔을 들고, 연신 들어오는 축하 인사에 밝은 표정으로 답하고 있었다. “회장님, 따님이 너무 예뻐요. 축하드립니다!” “아이고, 이런 경사는 자주 있어야죠!” ‘그래, 이 정도면 완벽하지. 오늘은 그 누구도 나를 흔들 수 없어.’ 그렇게 술이 한 잔, 두 잔 더해지며 연회장의 분위기도 점점 무르익고 있었다. 그때, 갑작스레 모든 조명이 꺼졌다. 탁! “어, 뭐야?” “불 꺼졌어! 왜 이래?” “아야, 누가 내 발 밟았어!” “...”순식간에 어둠이 덮친 연회장. 사람들의 놀란 목소리와 웅성거림이 퍼졌다. 잔을 들고 있던 부동건은 순간 정지된 듯 멈췄고, 날카로운 눈빛으로 주변을 살폈다. “지금 뭐 하는 거야! 당장 가서 확인해봐!” “네, 회장님!” 직원들이 급히 움직였고, 부동건은 진정시키려는 듯 손을 들고 말했다. “여러분, 당황하지 마시고 잠시만 기다려 주세요. 전기 쪽 문제인 것 같습니다. 금방 복구됩니다.” 사람들은 잠시 멈춰 서서 어둠 속에 귀를 기울이고 있었고- 그 순간, 연회장 한쪽 벽면에 설치된 대형 스크린이 조용히 켜졌다. “위이잉...” 어둠 속에서 갑작스레 터진 화면의 빛에 모두가 눈을 찌푸리며 반사적으로 손으로 눈을 가렸다. 그 빛이 익숙해질 무렵, 누군가가 터트린 외마디 감탄에, 시선이 일제히 스크린으로 향했다. “어... 저거 뭐야? 헉, 저게... 말이 돼?” 그리고, 그 스크린 안에 있는 건... 분명 두 남녀의 은밀한 장면이었다. 화면 속, 분명히 누군가를 알아본 듯한 목소리가 터졌다. “저 여자... 그분 아니야?” “옆에 있는 남자는...?” “헐, 이건 진짜 레전드다.” “아, 눈 버렸어. 이게 뭐야, 이게...” “...”사람들의 목소리는 점점 커졌고, 순식간에 연회장은 도저히 되돌릴 수 없는 혼돈의 도가니로 빠져들고 있었다.사람들 사이에 웅성거림이
송혜선이 복도 입구에 막 다다랐을 때였다. 갑작스레 어디선가 튀어나온 그림자가 그녀를 뒤에서 껴안았다. “꺄악!” 놀란 송혜선은 반사적으로 비명을 질렀고, 누군가 재빨리 그녀의 입을 막았다. “나야! 나야, 혜선아.” 익숙한 목소리에 송혜선은 순간 멈칫했다. 그리고 조심스레 남자의 손을 떼어내며 차갑게 말했다. “지금... 뭐 하는 짓이야?” ‘이 사람, 지금 제정신인 거야?’ 놀란 가슴을 쓸어내리며 이어서 급히 주위를 살폈다. 다행히 복도에는 아무도 없었다. 송혜선은 그제야 숨을 돌리며, 낮은 목소리로 흘기듯 말했다. “지금 여기가 어디라고... 미쳤어, 사람들 눈에 띄면 어쩌려고!!” 그 말엔 명백한 불만과 경계심이 섞여 있었다. 조봉규는 잠시 말없이 그녀를 바라보았다. ‘이런 식으로 나오면 안 되는데...’ 그 순간의 긴장, 그리고 복잡한 감정이 두 사람 사이에 감돌았다.조봉규의 시선이 송혜선의 얼굴에서 천천히 내려앉았다. 송혜선은 산후라 그런가, 몸매는 훨씬 더 부드럽고 풍성해져 있었다. ‘이러니까, 잊으려고 해도... 더 생각이 나잖아.’ 그는 순간 충동적으로 송혜선의 팔을 붙잡았다. “잠깐만.” 당황한 송혜선이 눈을 부릅떴다. “뭐 하는 거야!! 지금...” 그러나 조봉규는 말없이 송혜선을 옆방으로 이끌었다. 문이 닫히는 소리가 작게 ‘탁’ 하고 울렸다. 좁은 공간, 차오르는 침묵. 송혜선은 남자를 노려보며 벽에 등을 댔다. “정신 차려! 지금 여기가 어디라고!” 조봉규는 그녀를 바라보며 낮게 숨을 내쉬었다. “다들 홀에 있잖아. 아무도 몰라.” 남자의 말투엔 간절함과 조급함이 섞여 있었다. 이건 단순한 욕망이 아니었다. 그리움, 억눌림, 그리고 못다 한 말들. 그는 조심스럽게 송혜선의 턱선을 손끝으로 만지며 말했다. “혜선아... 나, 정말 많이 참았어.” ‘이 사람 또 이러네...’ 송혜선의 심장이 미묘하게 흔들렸다. 분
생각에 잠겨 있던 찰나, 정문 쪽에서 웅성거림이 들려왔다. 부동건이 고개를 돌리자, 최하연이 부상혁의 팔을 자연스럽게 끼고 등장하는 모습이 시야에 들어왔다. 그 순간, 많은 이들의 시선이 두 사람에게 쏠렸다. 잘생긴 남자와 우아한 여자의 조합. 누가 봐도 완벽한 한 쌍이었다. ‘딱 봐도 좋은 그림이야. 저 둘은 그냥 서 있기만 해도 눈길을 끌어...’ “회장님, 부상혁 대표님은 정말 복도 많으십니다. 최씨 가문의 따님과 이렇게 잘 어울리는 커플이 어디 또 있겠습니까?” 누군가의 말에 부동건의 표정이 확 풀렸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미묘하던 분위기가 사라지고, 부동건의 얼굴에는 흐뭇한 미소가 피어났다. 부동건은 고개를 끄덕이며 두 사람을 향해 시선을 보냈다. “젊은 사람들이 서로 마음이 맞아 좋아하는 걸, 우리 어른들은 그저 기쁜 마음으로 축하해줘야 하는 일일 뿐이지요.” “게다가 상대가 최씨 가문의 따님이라니, 정말 금상첨화가 아닙니까.” 부동건은 더없이 만족스러웠다. ‘역시 상혁이다. 내 아들이라면 이 정도는 돼야지.’ 상혁은 오늘 이 자리에서 당당히 아버지의 체면을 세워주고 있었다. 한편, 송혜선도 뒤늦게 정신을 차렸다. 방금 전까지 얼굴에 띄웠던 미소는 점점 사라져 갔고, 그녀의 시선은 어느새 하연에게 향했다. 오늘의 하연은, 나무나 예쁘고... 아니, 그냥 눈이 부실 만큼 찬란했다. 그리고 또렷한 이목구비에 윤기 흐르는 머릿결, 화사하게 피어난 얼굴빛까지. 하연의 행복함이 전신에서 흘러나오는 듯했다. 송혜선의 눈빛이 서서히 차가워졌다. ‘정다영... 그년, 나를 속였어.’ 그동안 하연 쪽에서 뭔가 반응이 있을 줄 알고 기다려 왔다. 하지만 소식은커녕, 정다영조차 자취를 감췄다. ‘다영이 걔가 하연이에게 약 먹이는 계획이 분명 실패한 거야. 그렇지 않고 선 지금 저렇게 멀쩡한 얼굴로 서 있을 수는 없어.’ 이대로 배가 불러오면, 섣불리 손도 쓸 수 없게 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