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운석은 연달아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이죠. 그것만큼 중요한 건 없어요.”“하지만 난 당신이 곧 진짜 사랑을 만날 거라고 생각해요.”이 말을 듣고 운석은 깜짝 놀랐다. “여신님, 농담이죠?”이에 하연은 미간을 찌푸리며 말했다. “왜 믿지 않죠?”“믿지 않는 게 아니라, 이 세상에서 당신 외에 다른 사람이 나를 설레게 할 수 있을지 의심스러워서요.”운석은 자조적으로 한숨을 쉬며 말했다. “하지만 내 행복보다 당신의 행복이 더 중요하죠.”그래서 운석은 주저 없이 DS그룹을 떠나 하연의 행복을 이루기 위해서만 노력했고 본인의 행복은 이미 그렇게 중요하지 않았다.“오늘 밤에 모임이 있는데 같이 올래요?”하연이 거절하려 했지만, 운석이 애원하는 표정으로 말했다. “여신님, 제발요! 그렇지 않으면 우리 집 어르신이 가만두지 않을 거예요.”하연은 피식 웃었다. 천하무적 운석에게도 두려운 사람이 있다는 사실이 정말 놀라워서 결국 요청에 응했다. “좋아요.”그러자 운석은 기뻐하며 말했다. “그럼 그렇게 하는 걸로 해요. 저녁에 봐요.”...저녁이 되자 하연은 편한 옷차림으로 외출했다. 운석이 모임을 주최한 곳은 고급 바였고 하연이 도착했을 때, 운석은 이미 입구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그리고 하연을 보자마자 손을 흔들며 말했다. “여신님, 이 쪽이에요!”하연은 운석을 따라 들어가 룸에 도착하니, 남녀 할 것 없이 모두 운석의 오랜 친구들이었고 대부분 어릴 때부터 함께 자란 사이였다. 모두 하연을 보자마자 매우 열정적으로 맞아주었다.“하연 씨, 뭐 하고 싶으세요? 포커? 화투? 주사위?”하연은 가리지 않았기에 대답했다. “다 괜찮아요.”그래서 몇몇 사람들은 함께 포커를 시작했다. 하연은 포커를 자주 치지 않았지만, 운이 좋아서 한 바퀴 돌고 나니 손에 쥔 칩이 두 배로 늘어났다. 하연은 조금 미안해 하며 화장실에 가겠다고 핑계를 대고, 운석에게 두 판을 대신 치게 했다. 하연은 룸에서 나와 복도를 따라 옥상으로 나갔는데 그때 갑자기
그 방 안의 남자도 밖으로 나왔다. 남자는 최하연을 보자마자 눈이 반짝였다.“와우, 이건 어디서 나온 보물이지?”그들 중 한 사람이 하연을 알아보고 나운석과 함께 들어온 손님이라고 조용히 말했다.“대호 형님, 이 사람은 나씨 집안 운석 도련님이 데려온 손님입니다.”남자는 운석의 이름을 듣고 얼굴이 굳어졌고 이내 하연에게 다가가며 물었다. “방금 뭘 봤고, 뭘 들었죠?”하연은 대호를 똑바로 바라보며, 눈에 두려움 없이 말했다. “당신들이 정당하게 영업하는 줄 알았더니, 이런 은밀한 거래도 하는군요. 안에 있는 여자아이들은 모두 유괴해 온 거죠?”씩 웃는 남자의 눈에 잔혹함이 서려 있었다. “보아하니, 오늘 여기서 나가고 싶지 않은 모양이네요. 뭐, 좋아요. 당신 같은 미인은 보기 드문 보물이니까요.”말을 마치고 대호는 부하들에게 손짓하여 하연을 잡으라고 명령했고 하연은 냉소했다.“날 잡으려면, 당신에게 그럴 능력이 있는지 봐야겠죠.”말이 끝나자마자, 건장한 남자들이 우르르 몰려들었다. 하연의 눈빛이 어두워지며, 날렵하게 한 남자의 다리를 걷어차 후퇴하게 했다. 전혀 주저함이 없었고 하연은 단번에 상대를 몇 걸음 뒤로 물러서게 만들었다. 그러자 대호는 흥미를 느끼며 말했다. “보아하니, 여기서 싸우려는 모양이네요!”대호는 직접 나서서 최하연을 잡으려고 했고 동작은 매우 거칠었다. 단 두 세 번의 공격에 하연은 열세에 처했지만, 하연은 남자의 약점을 발견하고 몸을 돌려 급소를 찼다.순간, 남자는 아래를 움켜쥐고 얼굴이 새빨개졌다.“잡아라! 당장 잡아!”점점 더 많은 사람이 몰려오자, 하연은 알아차렸다. 자기 혼자서는 이들을 상대할 수 없었다. 그래서 주저 없이 틈을 타서 출구로 달렸다. 그러나 출구에 도착했을 때, 문이 잠겨 있는 것을 발견했다.“하하하, 도망가 봐요! 도망갈 수 있으면 도망가 보세요!”남자는 냉소하며 천천히 하연을 포위했고 하연은 그들이 주의를 돌리기 전에 손목의 긴급 버튼을 눌렀다.“여자와 아이들을 유괴하는 것
“어떡해요? 내일 아침이면 우리 모두 끌려갈 텐데, 다시는 가족을 볼 수 없겠죠.”“흑흑, 죽기 싫어! 누가 우리 좀 구해줘요!”말이 끝나자 흐느낌이 이어졌다. 최하연은 이 모습을 보며 눈빛이 어두워졌다. 현대 사회에서 이런 어두운 일이 벌어지고 있다는 사실에 마음이 아팠다. 그래서 하연은 흐느낌이 나는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그러나 곧 아주 침착한 눈빛과 마주쳤는데 이 눈빛은 슬픔이 가득한 분위기와는 대조적이었다.그 소녀는 열일곱에서 열 여덟 살 정도로 보였으나, 성인과 같은 침착함과 지혜를 가지고 있었다. 그리고 차가운 표정으로 최하연을 바라보며, 마치 꿰뚫어 보려는 듯했다.둘 다 말을 하지 않았고 몇 분이 지난 후, 소녀가 입을 열었는데 불확실한 어조로 물었다. “정말 우리를 구해낼 수 있나요?”그러자 하연은 확신에 찬 목소리로 대답했다. “믿어줘요, 꼭 구해 줄게요.”이 말은 구원의 빛처럼 소녀에게 희망을 주었다. 그러나, 소녀는 하연이 묶여 있는 모습을 보고 희망이 끊어졌다. 하연은 시선을 낮춰 자신을 묶고 있는 밧줄을 보았다. 그리고 입꼬리가 스멀스멀 올라갔다. 이런 방식으로 사람을 묶다니, 너무 허술했다. 곧이어, 하연은 손을 움직여 빠르고 깔끔하게 밧줄을 풀었다. 하연의 동작은 유려하고 신속했으며, 모두가 놀랐다.“정말로 풀었어요!”“정말 대단해요.”하연은 손짓으로 조용히 하라고 했다. “말하지 마세요!”이에 사람들은 이해하고 희망의 빛을 띠며, 아까 흐느끼던 여자도 얼굴의 눈물자국을 닦아냈다. 하연은 아무 말없이 다가가서 하나씩 밧줄을 풀어주자 곧 모두가 자유로워졌다. 아까 침착했던 소녀는 이제 하연을 경외하는 눈빛으로 바라보았다.“언니, 제 이름은 하선유예요. 나가게 되면 꼭 보답할 게요.”하연은 미소를 지으며 선유의 말을 마음에 담지 않았다. 그리고 손을 뻗어 선유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걱정하지 마, 선유야. 우린 반드시 나갈 수 있을 거야.”선유는 고개를 힘차게 끄덕였다. 그리고 하연은 모두를 모아 작은
이 말에 여자들은 몸을 부들부들 떨었는데, 아마 대부분 채찍 맛을 본 적이 있는 듯했다. 그때, 권대호가 앞으로 나왔다. 대호는 최하연을 보며 차가운 눈빛을 보였다. “꽤 능력 있네요. 십여 분 만에 도망쳐 나오다니요.”하연은 대호를 차갑게 바라보며 말했다. “우리를 풀어줘요. 그렇지 않으면 이곳을 쑥대밭으로 만들 거예요.”그러자 남자는 웃으며 말했다. “웃기는 소리! 우리를 풀어주라고? 꿈도 꾸지 마.”대호는 손짓하며 보디가드들을 앞으로 불렀다. 그때, 한 부하가 다급히 달려왔다. “형님, 큰일 났습니다! 우리 술집이 포위당했습니다.”대호는 얼굴이 굳어지며 소리쳤다. “무슨 일이야?”“최씨 집안의 사람들이에요! 재벌 최씨 집안의 사람들이라고요!”이에 대호는 부하의 옷깃을 잡아당기며 물었다. “최씨 집안? 우리가 그 집안과 우리가 무슨 상관이 있지? 왜 우리 영역에 와 있는 거야?”“저도 모릅니다, 형님! 그 집안은 만만한 상대가 아니에요. 그들이 데려온 사람들은 모두 훈련된 전문가들이에요.”대호는 이를 갈며 말했다. “제길! 우리가 최씨 집안과는 아무 상관도 없는데, 왜 우리 일을 방해하려는 거지?”대호는 주변을 둘러보다가 시선을 하연에게 멈췄다. 그리고 하연을 주의 깊게 살피며 생각에 잠겼다.“혹시 그쪽이 최씨 집안 딸이예요?”그러자 하연은 팔짱을 끼고, 당당하게 말했다. “걱정하지 마세요. 밖에는 하민의 사람들뿐만 아니라 F 국 경찰도 있으니까요.”“여성과 아동을 유괴하는 것은 중범죄예요. 지금 증거가 확보되었으니, 당신들은 남은 생을 감옥에서 보내게 될 거예요.”뒤에 있는 여성들은 최하연의 말을 듣고 기뻐했다.“경찰이 왔어요! 우리 나갈 수 있어요!”대호는 화가 치밀어 올라 주먹을 불끈 쥐고 말했다. “나를 감옥에 보내려면, 당신에게 그럴 능력이 있는지 봐야겠죠!”곧이어 대호는 하연에게 다가가며 말했다. “내 손을 빠져나간 여자는 없었어요. 경찰 몇 명이 온다고 해서 당신을 구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해요?
“권대호 씨, 사람 풀어줘요.”“물론 그래야죠. 가세요.”하연의 말에 대호는 천연덕스럽게 고개를 끄덕였다.아무렇지 않다는 듯한 대호의 태도에 화가 난 하연은 목소리가 한층 더 차가워졌다.“지금 내 말 못 알아듣는 겁니까?”“최하연 씨, 무례하게 굴었던 건 어디까지나 제 잘못입니다. 하지만 저도 큰돈 들여 산 건데, 이러면 손해가 이만저만이 아닙니다.”대호의 표정은 갑자기 사뭇 진지해졌다.하지만 하연은 대호에게 조금의 기회도 주지 않았다.“손해? 끝까지 가보자는 겁니까?”대호가 하연을 당해낼 수는 없다. 하지만 이 많은 여자를 포기하자니 아쉬운 건 사실이었다.“최하연 씨, 우리 서로 이익 충돌도 없는데 이러는 거 너무 선 넘는 거 아닙니까? 사과의 의미로 이들 중 한 명을 선택해 데려가세요. 제 성의 표시라고 해두죠.”“말했을 텐데요. 모두 풀어주라고. 이번이 마지막 기회입니다.”호락호락 넘어가지 않는 하연의 태도에 대호가 뭐라 말하려 할 때, 부하 한 명이 헐레벌떡 달려왔다. “대호 형님, 그만합시다. 최씨 가문이 이번 일 그냥 넘어가지 않을 것 같아요. 밖에 특공대도 와 있어요. 얼른 피하지 않으면 콩밥 먹을 수 있다고요.”그 말을 들은 순간 대호는 더 이상 시간 끌 여유가 없어졌다.심지어 이젠 하연과 협상할 카드마저 사라진 셈이다.“최하연 씨, 이번에는 그쪽 체면 봐줄 거지만 이 빚 조만간 확실히 받을 겁니다.”이 말만 남긴 채, 대호는 여자들을 지킬 사람 몇 명을 남겨두고 부하들을 데리고 다급히 떠나버렸다.곧 현장에 도착한 하민과 태훈은 방을 한 칸 한 칸 다 뒤져본 뒤에야 겨우 하연을 찾았다.“하연아 괜찮아?”하민의 말투에는 걱정과 초조함이 가득 담겨 있었다.“오빠, 저쪽 두목이 도망쳤어요.”아무렇지 않다는 듯 대답하는 하연을 하민은 곧바로 달래주었다.“걱정하지 마. 내가 이미 뒤쫓으라고 일러뒀어.”“오빠, 권대호는 사회질서를 어지럽히고 온갖 나쁜 짓을 일삼았어요. 얼마나 많은 부녀와 아이들이 그놈 손에 당했는
무사한 하연을 보자 걱정했던 운석도 긴장이 풀렸다. 그리고 그제야 하연의 옆에 있는 여자애를 발견하고는 의아한 듯 물었다.“넌 누구야?”그 물음에 선유는 날카로운 눈빛으로 운석을 볼 뿐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운석은 그제야 여자애를 열심히 훑어보기 시작했다.오밀조밀한 이목구비에 귀엽고도 예쁘장한 여자애를 보자 운석은 손을 뻗어 선유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괜찮아. 이제 곧 가족 만날 거야.”하지만 선유는 몸을 피하며 운석의 손길을 피했다.“만지지 마요!”도도하고 차가운 여자애의 태도에 운석은 실소했다.“꼬마야, 너 아직 미성년자지?”그 말에 선유는 버럭 화를 냈다.“누가 미성년자라는 거예요? 저 20살이거든요.”‘20살?’‘아무리 봐도 발육이 채 안 된 것 같은데?’운석은 의심이 들었지만 반박하지 않고 오히려 타일렀다.“앞으로 혼자 밖에 나다니지 마. 지금 세상이 얼마나 무서운데. 오늘 우리 여신님 만난 거 운 좋은 줄 알아. 인신매매범들은 무슨 짓이든 할 수 있어. 너를 데려다 장기 빼낼 수도 있다고.”선유는 잔뜩 긴장한 채 뭔가를 참는 듯했다.그걸 보고 이상함을 느낀 운석이 이내 물었다.“왜 그래? 안색이 안 좋은데?”그 말이 떨어지기 바쁘게 선유는 눈앞이 캄캄해지며 바로 쓰러졌다. 다행히 눈치 빠른 운석이 얼른 잡아주어 넘어지는 것만은 면할 수 있었다.“야, 정신 차려봐. 괜찮아?”운석은 높은 소리로 선유를 불렀지만 여전히 돌아오지 않는 반응에 할 수 없이 빠른 속도로 선유를 데리고 병원으로 달려갔다.검사 결과 선유의 몸 곳곳에 채찍 흔이 발견되었고, 특히 등 쪽 상처는 이미 곪아 옷에 붙어있었다.게다가 치료하는 내내 선유는 아프다는 소리 한번 하지 않았다.이 모든 걸 알게 된 운석은 인신매매범들을 떠올리며 이를 갈았다.“이렇게 어린애도 때리다니. 개자식들 사람이야?”하연도 일이 이렇게 될 줄은 몰랐기에 분노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인신매매범은 원래 무슨 일이든 할 수 있어요. 그런 사람은 총살해야 해
“혹시 HL 산업은행 하민철 은행장님이세요?”“네.”하민철이 싱긋 웃으며 대답했다.그때 옆에 있던 운석이 뭔가 생각난 듯 물었다.“그러면 혹시 하선유 친척이신가요?”“선유 아비 되는 사람입니다.”그 말에 하연은 어리둥절했다. 그도 그럴 게, 선유가 HL 산업은행 은행장 딸일 줄은 생각도 하지 못했으니까.“하 은행장님, 안녕하세요.”하지만 이내 비굴하지도 거만하지도 않은 태도로 하민철에게 인사했다. 마치 여장부 같은 기품 넘치는 하연의 모습에 하민철인 찬사의 미소를 보냈다.“예의 차릴 것 없어요.”“하 은행장님, 선유가 외상을 입어 상처가 감염되었습니다. 치료를 받아 생명의 위험은 없지만 아직 깨어나지 않았습니다.”하민철은 고개를 살짝 끄덕였다.“선유 상태는 전에 알아봤어요. 이번에 우리 선유 구해줘서 고마워요.”“별말씀을요. 어려운 일도 아니고. 그럼 선유는 은행장님께 맡기고 저는 이만 가보겠습니다.”“잠깐만요.”하민철이 눈빛을 보내자 집사가 얼른 백지수표를 꺼내 하연에게 건넸다.“최하연 씨, 이건 우리 은행장님의 작은 성의이니 받아 주세요.”하연은 생각도 하지 않고 거절했다.“아닙니다. 필요 없으니 가져가세요.”그 모습에 하민철도 자기가 너무 당돌했다는 걸 느꼈다. 그도 그럴 게, 천하의 최씨 가문 아가씨가 이런 적은 돈에 혹할 리 없으니까.“미안합니다. 습관이 되어 버렸어요.”“괜찮습니다.”하민철은 이내 집사더러 수표를 회수하라고 지시했다.“받지 않겠다고 하니 오늘 일은 내가 신세 진 거로 하고, 앞으로 도울 일이 있으면 언제든 말해요.”HL 산업은행 은행장을 빚지게 만드는 게 백지 수표보다는 훨씬 값어치 있었다.특히 사업가에게 은행의 지지가 있다면 앞으로 일하는 데도 훨씬 편해질 터였다.“필요하다면 절대 사양하지 않고 도움 청하겠습니다.”하연은 담담하게 대답했다. 그 솔직함은 하민철에게 아주 잘 먹혔다. 하연 같은 젊은이는 하민철도 오랜만에 보는 거였으니.“그럼 전 이만 가볼게요.”하연의 인사에 하민
하연은 더 지체하지 않고 얼른 최동신에게 달려갔다.“할아버지, 저 왔어요.”최동신은 제 팔짱을 끼는 하연을 흘긋거리더니 화가 난 듯 말했다.“오늘 밤 얼마나 위험했는지 알아? 여자애가 거기에 왜 끼어들어? 인신매매범들은 돈이라면 목숨도 내놓을 놈들이야. 무슨 일이라도 나면 어쩌려고 그랬어?”“할아버지, 저 괜찮잖아요. 걱정시켜 드려 미안해요.”하연이 다급히 달랬지만 최동신은 콧방귀를 뀌었다.“다음은 없어. 앞으로 경호원 더 붙여줄 거다. 절대 이런 일 다시 있으면 안 되니까.”하연은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알았어요, 할아버지.”한참 얘기하고 있던 그때, 최동신이 갑자기 눈을 들어 멀리 있는 하민을 바라봤다.“말해. 그놈들은 어떻게 됐어?”“경찰에서 공범 몇 명 잡았대요. 하지만 주범인 권대호는 도망쳐서 아직 소식 없어요.”그 말에 최동신은 버럭 화를 냈다.“대체 일을 어떻게 처리한 게냐? 어떻게 그런 놈들을 놓쳐? 이번에 그놈들이 이렇게 큰 타격을 입었으니 보복하지 보복할 게 틀림없어...”최동신은 말을 채 잇지 않고 하민과 눈빛을 교환했다.그러자 하민은 이내 알아들었다는 듯 대답했다.“걱정하지 마세요, 할아버지. 지하 세력도 지금 그놈들 쫓고 있어요. 발견하는 즉시 경찰로 보낼 거고요.”그제야 최동신의 표정은 조금 풀어지더니 하연의 어깨를 툭툭 쳤다.“너는 요즘 안전에 꼭 주의해. 절대 빈틈 보이지 말고.”하연은 고개를 끄덕였다.“알았어요, 할아버지.”그러자 최동신 이내 화제를 돌렸다.“아까 나씨 가문 아들놈이 너 데려다줬던데?”하연은 그 한마디에 최동신의 생각을 파악하고 먼저 싹을 잘랐다.“할아버지, 저 운석 씨랑 그냥 친구예요. 보통 친구.”하지만 최동신은 그걸 믿지 않았다.이미 산전수전 다 겪은 사람인데, 남녀 간에 순수한 우정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쯤은 최동신도 알고 있다.하지만 그렇다고 더 이상 따져 묻지도 않았다. 어찌 됐든 남녀 간의 감정은 억지로 되는 것도 아니고, 제삼자가 끼어들 수 있는 것도
상혁은 말없이 부동건의 뒷모습을 오래도록 바라보았다. 지나간 모든 일들이 마치 한 편의 영화처럼 머릿속으로 한 파래임 한 파래임 스쳐 지나갔다. 한참을 그렇게 서 있다가, 마음을 다잡은 상혁은 겨우 한 마디를 내뱉었다. “네, 알겠습니다.” 부남준 사건은 예정대로 재판이 열렸다. 부씨 가문은 변호사를 통해 대응했지만, 형사 사건인 만큼 얽히고설킨 진실을 밝히는 데 꽤 많은 시간이 걸렸다. ...DL 그룹, 최상층 대표실.상혁은 혼자 창밖을 내려다보고 있었고 거대한 도시가 한눈에 들어왔다. ‘결국 이 순간이 오는구나.’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문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고, 곧 원신민이 문을 열고 들어왔다. “대표님, 재판 끝났습니다.” 상혁은 가슴이 철렁 내려앉는 걸 느끼며 입꼬리를 살짝 올렸다. “판결 나왔어?” “예상대로입니다. 다시는 못 일어날 겁니다.” 원신민의 말은 고요했던 상혁의 마음에 작은 돌을 던진 것처럼 퍼져나갔다. 두 사람의 목숨과 확실한 증거. 이미 알고 있던 결말이었지만, 막상 그 순간이 다가오니 상혁도 묘한 허탈함이 밀려왔다. “부 회장님도 알고 계시나?” “예, 소식을 듣고 충격을 받아 기절하셨지만, 다행히 지금은 안정을 되찾으셨고요.” 원신민은 망설이다가 조심스럽게 덧붙였다. “송 여사는 재판하는 그 자리에 있었는데, 판결 듣자마자 바로 떠났어요.”부동건에게 쫓겨난 후, 송혜선은 과거의 화려함을 모두 잃었다. 부동건은 그녀에게 줬던 모든 부동산을 회수했고, 카드 계좌까지 정지시켰다. 이제 송혜선에게는 남은 보석을 팔아 생계를 이어가고 있을 뿐. 상혁은 가늘게 눈을 좁혔다. ‘재판에 온 건 놀랍지 않지만... 반응이 이 정도로 끝났다는 게 아무래도 수상해.’ 경계를 늦추지 않고 바로 상혁은 차갑게 말했다. “송혜선 감시 붙여. 또 무슨 일 일으키기 전에.” 원신민은 알아듣고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대표님.” ...어둡고 습
비틀거리던 부동건은 힘겹게 몸을 일으켰다. ‘정신 차려... 이 순간만은 피하지 말자.’ 그는 느릿한 걸음으로 상혁 쪽으로 다가갔다. 서서히 가까워지는 거리. 마침내 눈앞에 다다라 멈춰 섰을 때, 두 사람의 시선이 정확히 맞닿았다. 부동건은 말하고 싶은 게 많았지만, 막상 눈을 마주하니, 무슨 말을 먼저 꺼내야 할지 도무지 감이 잡히지 않았다. 잠시 침묵이 흘렀고, 부동건은 깊은숨을 들이쉬며 차분하게 입을 열었다. “상혁아. 그동안, 너랑 너희 어머니한테 내가 너무 못했다.” ‘처음부터 길을 잘못 들었다. 그날, 그 선택이 결국 우리 가족을 무너뜨린 거야.’ 사실, 부동건은 이혼하던 날부터 이미 후회하고 있었다. 그 후로의 모든 시간은, 그저 체면과 자존심을 위한 연기였을 뿐이다. 지금 이 꼴이 된 건... 결국 하늘이 내린 벌이었다. ‘자업자득이야. 이 모든 건 내가 자초한 거니까.’ 상혁은 조용히 아버지를 바라보았다. 그 눈동자엔 적당한 거리감과 냉정함이 깃들어 있었다. “그게 이제 와서 중요하진 않아요. 저도, 어머니도... 이미 오래전에 마음 정리했어요.” 그 말에 부동건은 눈을 감았다. 눈가에 뜨거운 기운이 차오르는 걸 애써 참았다. “그래. 마음 내려놨다니 다행이다. 정말... 다행이다.” 잠시 묵묵히 고개를 끄덕이던 부동건은 책상 위에 놓여 있던 한 서류봉투를 꺼냈다. 그리고 곧장 상혁에게 건넸다. “이제 나도... 나이가 들었고, 더는 회사를 끌고 나갈 힘이 없다. DL그룹은 내가 처음부터 세운 회사다.”“내 모든 시간과 인생이 들어간 곳이지. 하지만 이제는 놓아야 할 때가 왔다.” 상혁은 망설이듯 손을 내밀지 않았다. 그런 상혁의 손에 부동건은 서류를 억지로 쥐여주며 아들의 손등을 두드렸다. “앞으로는... 네가 이끌어가야 한다.” 그 손길엔 조용한 무게와 책임, 그리고 사죄가 담겨 있었다. “그동안... 많이 힘들었지?” 입꼬리를 살짝 움직이던 부동
상혁도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살짝 웃음을 지었다. ‘다행이야... 정말 다행이야.’ 검진을 마친 뒤, 하연은 선명한 초음파 사진을 손에 들고 있었다. 사진을 바라보는 그녀의 얼굴에는 저절로 미소가 번졌다. 그녀는 손끝으로 사진 속 동그란 그림을 가리켰다. “여기 봐봐요. 이게 우리 아기래요.” 목소리엔 설렘과 떨림이 그대로 묻어났다. 상혁도 조용히 고개를 끄덕이며 하연의 손끝을 따라 시선을 옮겼다. 그리고 눈엔 이미 감동이 차올라 있었다. 상혁은 조심스레 하연의 아랫배에 손을 얹고,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지금 이 순간... 난 정말 너무 행복해.” ‘네가 내 옆에 있고, 우리 아이가 이렇게 자라고 있다는 것만으로도... 세상을 다 가진 기분이야.’ 하연은 눈을 반짝이며 물었다. “남자아기일까요, 여자아기일까요?” 그녀의 눈빛에는 이미 사랑스러운 미래가 그려지고 있었다. 상혁은 웃으며 대답했다. “아무래도 상관없어.” 하연은 고개를 살짝 돌려 상혁을 바라봤다. 그 눈동자엔 별빛이 머물러 있는 듯 반짝였다. “그래요... 건강하게만 태어나면... 그걸로 충분해요.” 두 사람은 자연스럽게 손을 맞잡았고, 서로의 손바닥에서 전해지는 따뜻함을 느꼈다. 그 순간, 상혁의 주머니 속 핸드폰이 진동했다. 그는 핸드폰을 꺼내 화면을 확인하곤 순간 눈빛이 깊어졌다. 화면엔 낯익은 이름이 선명히 떠 있었다. [부동건.]‘이 타이밍에...?’ ‘설마 무슨 일 생긴 건가?’ 지난 연회 이후, 부동건과는 한 번도 마주치지 않았다. 하지만 그날의 파장이 얼마나 컸는지는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송혜선과 조봉규. 그 두 사람 때문에 무너진 자존심. 그리고 결국, 부동건은 송혜선을 아이와 함께 본가에서 내쫓았다는 소문까지 들려왔다. 하연이 조용히 말했다. “받아봐요. 무슨 일일 수도 있으니까.” 상혁은 하연의 손등을 가볍게 토닥이고, 그녀를 옆에 있는 의자에 앉힌 후
부동건은 갑작스레 거칠게 기침을 터뜨렸다. “컥”‘피 맛...?’ 목 안에서 치밀어 오르는 피비린내를 억지로 삼켰다. 손등에 핏줄이 선명히 드러나고, 이성의 끈은 이미 위태롭게 흔들리고 있었다. 부동건의 시선이 천천히 송혜선과 조봉규를 향했다. ‘죽여버리고 싶다. 지금 당장 이 자리에서...’ “너희들... 너희들...” 부동건의 입술은 부르르 떨리고 있었다. 송혜선은 극도의 공포에 휩싸였다. ‘이건 아니야... 이렇게 끝나면 안 돼...’ 그녀는 급히 앞으로 다가가 부동건의 팔을 붙잡았다. “회장님... 우리, 조 선생님이랑 그냥 산후 회복 얘기하던 중이었어요. 진짜예요, 저희는...” 그 말이 끝나기도 전, 부동건의 손이 송혜선의 뺨을 후려쳤다. 짝! 순간 정적. 강하게 내리친 손바닥 소리에, 그 자리에 있던 사람들은 일제히 숨을 멈춘 듯 조용해졌다. 송혜선의 얼굴 한쪽이 순식간에 붉게 부어올랐다. 눈가가 덜덜 떨리며, 눈물도 같이 맺혔다. “이 천하의... 배은망덕 같은 것. 내가 너를 어떻게 믿었는데... 감히 날 기만해?” 뒤에 서 있던 하객들 사이에서도 탄식이 흘러나왔다. “저 정도였어?” “저게 진짜였네... 소문이 아니고...” “...”송혜선은 뺨의 통증을 애써 무시한 채, 다시 붙잡았다. “회장님, 제발... 오해예요. 저희 그런 사이 아니에요. 저는... 당신뿐이었어요.” 그러나 부동건은 그 손마저 거칠게 뿌리쳤다. 그리고는 힘껏 송혜선의 복부를 발로 찼다. 퍽! 무너지는 소리와 함께, 송혜선은 바닥에 힘없이 쓰러졌다. 그녀의 입에서 신음이 터졌다. 조봉규는 그 자리에서 얼어붙었다. ‘아니야... 지금 나섰다간 나도 끝장이야.’ 한 걸음 다가가려다... 그는 떨리는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회... 회장님... 저희... 아무 일도 없었어요... 정말이에요...” 하지만 그 한마디가 기름을 붓는 꼴이 됐다. 부동건은 그대로 조
일 순간 충격의 정점이었다.부동건은 들고 있던 와인잔을 그대로 바닥에 내던졌다. 쨍그랑! 깨지는 소리와 동시에 모든 시선이 그에게 꽂혔다. “저... 저런 미친...!” 그는 화면을 가리키며, 얼굴을 붉힌 채 말을 잇지 못했다. 숨이 거칠게 턱 끝까지 차올랐다. ‘송혜선... 네가 감히!’ 주변 하객들도 이미 술렁이기 시작했다. “저게 진짜야?” “부 회장님 딸이... 아니라고?” “와... 이건 완전히 생각지도 못한 미친 패륜이야, 상상도 못 했어.” 오늘의 연회는 더없이 화기애애한 분위기였지만, 이제 와선 최악의 스캔들 파티가 되어버렸다. ‘이 연회가... 전부 거짓된 일 때문에 생긴 일이란 말이야?’ ‘우리, 사기당한 거네. 다 같이.’ 그때 스크린이 멈췄고, 연회장 전체의 조명이 다시 환히 켜졌다. 하객들은 본능적으로 두리번거리며 부동건을 찾았다. “회장님, 괜찮으십니까?” 하지만 부동건은 아무런 대답 없이 어금니를 꽉 물고, 몸을 떨며 계단 쪽으로 향했다. 하객들은 그 뒤를 따라붙었다. ‘뭔가 일어나겠군...’ ‘이번엔 진짜 끝장이다.’ ...같은 시각, 2층 방 안. 송혜선은 조봉규의 손등을 다독이며 조용히 말했다. “조금만 참아. 며칠만 지나면 내가 다시 올게.” 조봉규는 싱긋 웃으며, 그녀의 허벅지를 장난스럽게 움켜쥐었다. “응. 기다릴게, 자기.” 하지만 그 말이 끝나기도 전, 문이 거칠게 흔들렸고, 익숙한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쾅!! “송혜선! 당장 안 나와?!” 송혜선의 온몸이 순간 얼어붙었다. 그녀는 반사적으로 조봉규의 팔을 꽉 잡았다. ‘망했다.’ “어떡해, 부동건이 올라왔어.” 두 사람은 당황하며 방 안을 둘러봤지만, 창문 하나 없는 좁은 방엔 도망칠 곳조차 없었다. ‘안 돼... 이렇게 들키면, 끝장이야. 정말 끝이야.’ 송혜선은 급하게 숨을 고르며 애써 이성을 붙잡으려 했다. ‘진정해. 침착해야 돼.
연회장 안은 화기애애한 분위기로 가득했다. 부동건은 손에 잔을 들고, 연신 들어오는 축하 인사에 밝은 표정으로 답하고 있었다. “회장님, 따님이 너무 예뻐요. 축하드립니다!” “아이고, 이런 경사는 자주 있어야죠!” ‘그래, 이 정도면 완벽하지. 오늘은 그 누구도 나를 흔들 수 없어.’ 그렇게 술이 한 잔, 두 잔 더해지며 연회장의 분위기도 점점 무르익고 있었다. 그때, 갑작스레 모든 조명이 꺼졌다. 탁! “어, 뭐야?” “불 꺼졌어! 왜 이래?” “아야, 누가 내 발 밟았어!” “...”순식간에 어둠이 덮친 연회장. 사람들의 놀란 목소리와 웅성거림이 퍼졌다. 잔을 들고 있던 부동건은 순간 정지된 듯 멈췄고, 날카로운 눈빛으로 주변을 살폈다. “지금 뭐 하는 거야! 당장 가서 확인해봐!” “네, 회장님!” 직원들이 급히 움직였고, 부동건은 진정시키려는 듯 손을 들고 말했다. “여러분, 당황하지 마시고 잠시만 기다려 주세요. 전기 쪽 문제인 것 같습니다. 금방 복구됩니다.” 사람들은 잠시 멈춰 서서 어둠 속에 귀를 기울이고 있었고- 그 순간, 연회장 한쪽 벽면에 설치된 대형 스크린이 조용히 켜졌다. “위이잉...” 어둠 속에서 갑작스레 터진 화면의 빛에 모두가 눈을 찌푸리며 반사적으로 손으로 눈을 가렸다. 그 빛이 익숙해질 무렵, 누군가가 터트린 외마디 감탄에, 시선이 일제히 스크린으로 향했다. “어... 저거 뭐야? 헉, 저게... 말이 돼?” 그리고, 그 스크린 안에 있는 건... 분명 두 남녀의 은밀한 장면이었다. 화면 속, 분명히 누군가를 알아본 듯한 목소리가 터졌다. “저 여자... 그분 아니야?” “옆에 있는 남자는...?” “헐, 이건 진짜 레전드다.” “아, 눈 버렸어. 이게 뭐야, 이게...” “...”사람들의 목소리는 점점 커졌고, 순식간에 연회장은 도저히 되돌릴 수 없는 혼돈의 도가니로 빠져들고 있었다.사람들 사이에 웅성거림이
송혜선이 복도 입구에 막 다다랐을 때였다. 갑작스레 어디선가 튀어나온 그림자가 그녀를 뒤에서 껴안았다. “꺄악!” 놀란 송혜선은 반사적으로 비명을 질렀고, 누군가 재빨리 그녀의 입을 막았다. “나야! 나야, 혜선아.” 익숙한 목소리에 송혜선은 순간 멈칫했다. 그리고 조심스레 남자의 손을 떼어내며 차갑게 말했다. “지금... 뭐 하는 짓이야?” ‘이 사람, 지금 제정신인 거야?’ 놀란 가슴을 쓸어내리며 이어서 급히 주위를 살폈다. 다행히 복도에는 아무도 없었다. 송혜선은 그제야 숨을 돌리며, 낮은 목소리로 흘기듯 말했다. “지금 여기가 어디라고... 미쳤어, 사람들 눈에 띄면 어쩌려고!!” 그 말엔 명백한 불만과 경계심이 섞여 있었다. 조봉규는 잠시 말없이 그녀를 바라보았다. ‘이런 식으로 나오면 안 되는데...’ 그 순간의 긴장, 그리고 복잡한 감정이 두 사람 사이에 감돌았다.조봉규의 시선이 송혜선의 얼굴에서 천천히 내려앉았다. 송혜선은 산후라 그런가, 몸매는 훨씬 더 부드럽고 풍성해져 있었다. ‘이러니까, 잊으려고 해도... 더 생각이 나잖아.’ 그는 순간 충동적으로 송혜선의 팔을 붙잡았다. “잠깐만.” 당황한 송혜선이 눈을 부릅떴다. “뭐 하는 거야!! 지금...” 그러나 조봉규는 말없이 송혜선을 옆방으로 이끌었다. 문이 닫히는 소리가 작게 ‘탁’ 하고 울렸다. 좁은 공간, 차오르는 침묵. 송혜선은 남자를 노려보며 벽에 등을 댔다. “정신 차려! 지금 여기가 어디라고!” 조봉규는 그녀를 바라보며 낮게 숨을 내쉬었다. “다들 홀에 있잖아. 아무도 몰라.” 남자의 말투엔 간절함과 조급함이 섞여 있었다. 이건 단순한 욕망이 아니었다. 그리움, 억눌림, 그리고 못다 한 말들. 그는 조심스럽게 송혜선의 턱선을 손끝으로 만지며 말했다. “혜선아... 나, 정말 많이 참았어.” ‘이 사람 또 이러네...’ 송혜선의 심장이 미묘하게 흔들렸다. 분
생각에 잠겨 있던 찰나, 정문 쪽에서 웅성거림이 들려왔다. 부동건이 고개를 돌리자, 최하연이 부상혁의 팔을 자연스럽게 끼고 등장하는 모습이 시야에 들어왔다. 그 순간, 많은 이들의 시선이 두 사람에게 쏠렸다. 잘생긴 남자와 우아한 여자의 조합. 누가 봐도 완벽한 한 쌍이었다. ‘딱 봐도 좋은 그림이야. 저 둘은 그냥 서 있기만 해도 눈길을 끌어...’ “회장님, 부상혁 대표님은 정말 복도 많으십니다. 최씨 가문의 따님과 이렇게 잘 어울리는 커플이 어디 또 있겠습니까?” 누군가의 말에 부동건의 표정이 확 풀렸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미묘하던 분위기가 사라지고, 부동건의 얼굴에는 흐뭇한 미소가 피어났다. 부동건은 고개를 끄덕이며 두 사람을 향해 시선을 보냈다. “젊은 사람들이 서로 마음이 맞아 좋아하는 걸, 우리 어른들은 그저 기쁜 마음으로 축하해줘야 하는 일일 뿐이지요.” “게다가 상대가 최씨 가문의 따님이라니, 정말 금상첨화가 아닙니까.” 부동건은 더없이 만족스러웠다. ‘역시 상혁이다. 내 아들이라면 이 정도는 돼야지.’ 상혁은 오늘 이 자리에서 당당히 아버지의 체면을 세워주고 있었다. 한편, 송혜선도 뒤늦게 정신을 차렸다. 방금 전까지 얼굴에 띄웠던 미소는 점점 사라져 갔고, 그녀의 시선은 어느새 하연에게 향했다. 오늘의 하연은, 나무나 예쁘고... 아니, 그냥 눈이 부실 만큼 찬란했다. 그리고 또렷한 이목구비에 윤기 흐르는 머릿결, 화사하게 피어난 얼굴빛까지. 하연의 행복함이 전신에서 흘러나오는 듯했다. 송혜선의 눈빛이 서서히 차가워졌다. ‘정다영... 그년, 나를 속였어.’ 그동안 하연 쪽에서 뭔가 반응이 있을 줄 알고 기다려 왔다. 하지만 소식은커녕, 정다영조차 자취를 감췄다. ‘다영이 걔가 하연이에게 약 먹이는 계획이 분명 실패한 거야. 그렇지 않고 선 지금 저렇게 멀쩡한 얼굴로 서 있을 수는 없어.’ 이대로 배가 불러오면, 섣불리 손도 쓸 수 없게 된다. ‘
이 질문에 송혜선은 눈을 반짝이며 부동건을 바라봤다. ‘이렇게 많은 사람들 앞에서, 이젠 나를 당당히 소개해 줄 때가 됐겠지.’ 오늘 이 자리에서, 그녀는 부동건의 정식 아내로서 인정받기를 바라고 있었다. “회장님, 말씀 좀 해보세요?” 조금은 성급한 목소리로 말을 꺼내자, 주변의 시선도 하나둘 송혜선과 부동건을 향했다. 모두 속으로는 뻔히 알고 있었다. 부동건이 과연 예전 애인을 진짜로 정실로 앉혔는지, 눈으로 확인하고 싶어 했다. 부동건은 미소를 지었다. 그는 숨기거나 피할 생각은 없어 보였다. 담백하게 말했다. “오 회장님, 이 사람은 제 딸의 어머니입니다.” 순간, 송혜선은 그대로 굳어버렸다. ‘딸의... 어머니?’ 손에 들고 있던 와인 잔이 살짝 흔들렸다. 금세 넘칠 듯한 와인, 애써 잡고 있는 감정. ‘지금... 이게 무슨 말을 하고 있는 거지?’ 그리고 가슴 속 깊은 곳에서 억울함이 툭 하고 솟구쳤다. 심지어 손에 힘이 들어가며 하얗게 질린 손등이 떨렸다. 오병지는 단번에 눈치챘고, 싱긋 웃으며 더는 묻지 않았고, 대신 가볍게 말을 건넸다. “축하드립니다. 부 회장님, 여전히 복이 많으시네요.” 부동건은 공손하게 웃으며 송혜선의 어깨를 감싸 안았다. 그 손길엔 무언의 위로가 담겨 있었다. “아닙니다. 앞으로도 잘 부탁드립니다. 나중에 저와 이 사람의 결혼식엔 꼭 오셔서 축배 들어주세요.” 그 말에 송혜선의 눈이 번쩍 뜨였다. ‘결혼식...?’ 순간, 가슴이 쿵 하고 울렸다. 이어서 고개를 들며 수줍게 웃었다. “회장님...” 부동건은 말없이 그녀를 더 가까이 끌어안았다. 더 이상의 말은 없었지만, 그 행동으로 모든 것을 말해주고 있었다. 주변의 사람들 시선이 바뀌었다. 예전에는 송혜선을 무시하거나 조롱하던 눈빛이, 지금은 선망과 부러움으로 가득했다. 결국, ‘부동건의 아내’라는 타이틀은 그 자체로 막대한 부와 권력을 상징하는 이름이었다.송혜선은 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