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때 경다솜도 연미혜가 캐리어를 끌고 나오는 모습을 보았다.“엄마!”“다솜아, 잘 잤어?”연미혜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가 고개를 끄덕이며 문을 닫았다.“엄마는 회사에 볼일이 좀 있어서 먼저 갈게. 너는 아빠랑 여기서 재미있게 놀아.”경다솜은 고개를 크게 끄덕였다.“알겠어요. 엄마...”연미혜는 조용히 캐리어를 끌고 1층으로 내려갔다. 로비에 도착했을 때, 경민준과 임지유가 함께 있는 모습을 마주쳤다.그녀가 떠날 채비를 한 걸 본 경민준이 먼저 물었다.“벌써 가려고?”연미혜는 담담하게 대답했다.“응.”“차는 불렀어
연창훈이 초대장을 건넬 때, 그는 주변을 살피며 조심스럽게 목소리를 낮췄지만, 허미숙은 이미 모든 걸 알고 있었다.“전달하기만 할 거예요.”그녀는 짧게 그렇게만 대답하며 초대장을 받았다.허미숙과 노현숙은 오랜 친구 사이였다. 절친인 허미숙의 생일이니 노현숙도 당연히 참석하고 싶었지만, 그녀는 허미숙보다 나이가 많았다. 관례상, 환갑이나 칠순처럼 특별한 자리에는 생일을 맞는 이보다 나이가 많은 지인은 자리를 삼가는 것이 예의였다.그동안 허미숙의 생일은 늘 조용히, 가족끼리 식사하는 정도로 지나갔고, 몇 년 동안 경민준은 단 한
연미혜는 조용히 코끝을 누르듯 손을 올렸다가, 아무렇지 않은 듯 그대로 손을 내려놓았다. 그와의 거리를 반 발짝 정도 뒤로 물러나며 조용히 벌렸다.경민준은 그녀의 이런 일련의 동작을 눈치채지 못한 듯, 초대장을 열어보았다.“칠순이라고?”“응... 칠순 잔치를 해드릴 거야.”예전 같았으면, 연미혜는 이 자리에 참석할 수 있는지, 시간을 낼 수 있는지 조심스레 물었을 것이다. 하지만 오늘은 묻지 않았고 그저 담담하게 말했다.“어머님, 아버님께는 민준 씨가 전해줘.”경민준이 그 말의 미묘한 차이를 느꼈는지는 알 수 없었다. 그
연미혜는 경민준이 서재에 들어오는 걸 허락하지 않는다는 걸 알고 있었기에, 거실도 아닌 침실에서 조용히 책을 읽으며 그가 나오길 기다렸다.자정이 훌쩍 넘고 시곗바늘이 새벽 1시를 가리킬 즈음, 경민준이 침실로 돌아왔다.자기가 들어서자, 책을 내려놓은 연미혜를 본 경민준은 무심하게 물었다.“무슨 일 있어?”돌려 말할 것도 없이, 연미혜는 곧장 본론으로 들어갔다.“모레 화성에서 자선 경매가 열린다고 들었어.”경민준은 우아하게 넥타이를 풀며 그녀를 흘깃 보았다.“초대장이 필요해?”연미혜는 잠시 멈칫했지만, 이내 고개를 끄덕
다음 날, 연미혜와 차예련은 간단히 드레스를 갖춰 입고 자선 경매장으로 향했다.과하게 꾸민 건 아니었지만, 두 사람 모두 워낙 눈에 띄는 외모였기에 입장하자마자 많은 시선을 끌었다.차예련은 이런 자리에 몇 번 나와 본 적이 있어, 업계 사람들 사이에서는 제법 얼굴이 알려져 있었다.하지만 연미혜는 대부분에게 생소한 얼굴이었기에, 그녀와 나란히 들어선 모습을 두고 사람들 사이에서는 ‘도대체 어느 집안 사람일까’ 하는 호기심이 이어졌다.그녀들이 배정받은 좌석은 중간쯤이었다.도착 시간이 다소 늦었던 터라, 자리에 앉은 지 얼마 되
어차피 그랬다.김태훈이 예전에 연미혜를 파티에 데려갔을 때도, 지난번 기술 전시회에 함께 갔을 때도 그는 처음부터 끝까지 그녀의 존재를 철저히 무시했다.그런 생각에 잠겨 있던 찰나, 경매가 시작되었고, 진행자가 무대에 오르자, 장내는 금세 조용해졌다.오늘 저녁 경매 품목은 연미혜가 미리 꼼꼼히 살펴본 상태였다. 그녀가 눈여겨본 것은 에메랄드 주얼리 세트와 유명 작가의 자수 작품 한 점이었다.어떤 것을 낙찰받을지는 현장 분위기를 보고 결정할 생각이었다.경매는 빠르게 진행되었다. 연미혜는 목적이 분명했기에 마음에 들지 않는 물
경민준이 피식 웃으며 말했다.“괜찮아. 할머니께서 좋아하신다며? 계속해.”담담하게 미소 짓는 경민준을 바라보며 임지유는 마음 깊은 곳까지 달콤해졌다. 그래서 다시 손을 들며 외쳤다.“120억.”곧이어 염성민이 거리낌 없이 맞받아쳤다.“140억.”그러고는 일부러 목소리를 높여 경민준 쪽을 향해 말했다.“경 대표님, 우리 집 영감탱이도 이런 거 참 좋아하시거든요. 한 번 양보해 주시죠?”경민준은 시선을 돌려 염성민을 바라보며 예의 바른 미소로 답했다.“죄송하지만 우리 집 어르신도 이런 빈티지한 작품들을 좋아하셔서요.”
임지유가 또다시 입찰가를 큰 폭으로 끌어올렸다.연미혜의 마음은 서서히, 그리고 깊이 가라앉았다.그녀가 지금 손에 쥐고 있는 현금은 많지 않았고, 이번 경매를 앞두고 정해둔 예산은 60억 원 이내였다.요즘 연씨 가문의 사업이 전반적으로 침체되어 있는 만큼 무리할 여유는 없었다.‘하지만 지금은...’“55억 원...”연미혜가 다시 손을 들었다.“60억.”연달아 두 번 모두 염성민 다음으로 응찰한 그녀의 목소리는 맑고 차분했다.전시장 안에 울려 퍼지는 그 음색은 단연 돋보였다. 그 목소리를 들은 염성민이 고개를 돌렸다.
캐벳 스미스가 미소 지으며 말했다.“내 박사 과정 학생, 임지유입니다.”그는 임지유 외에도 네댓 명의 학생들을 데려왔는데, 그중 임지유만이 유일한 동양인이었다.임지유가 캐벳 스미스의 제자라는 사실이 알려지자, 현장에선 감탄과 부러움이 쏟아졌다.“세상에, 스미스 교수님 박사 과정 학생이라니 완전 대단한데?”“그런데 저렇게 예쁘기까지 해? 신이 모든 걸 다 줬네. 너무 불공평해!”“더 기가 막힌 건... 저 여자가 경민준의 여자 친구라는 거잖아.”“헐... 진짜 비교할 게 못 되네. 나 같은 인생은 어떡하라고...”순식간
이틀 뒤, 김태훈은 서원시에서 열리는 국제 인공지능 대회에 참석했다.지난해의 기술 박람회와 마찬가지로 이번 행사 역시 업계 관계자들이 AI 관련 최신 동향을 파악하고 기술을 교류할 수 있는 중요한 자리였다.이번에 그와 함께한 일행은 연미혜, 그리고 최근 넥스 그룹에 새로 합류한 구진원을 포함한 몇몇 엔지니어들이었다.구진원을 비롯한 신입 직원들을 함께 데려온 이유는 아직 이들이 회사의 핵심 기밀에 접근할 수 있는 단계가 아니었기 때문에 기술 유출에 대한 걱정이 없었기 때문이었다.서원시에 도착한 뒤, 행사장에 들어서자 이미 내부
구진원은 결국 연미혜와 함께 래프팅을 타볼 기회를 잡지 못했다.하지만 저녁 무렵, 그는 또 한 번 ‘우연히’ 연미혜와 연씨 가문 사람들을 마주쳤다.그녀의 외삼촌 연창훈과 외숙모 하여진은 반갑게 인사하며, 그와 그의 친구에게 같이 식사하자고 흔쾌히 자리를 권했다.이야기를 나누다 그가 구씨 가문의 도련님이라는 사실을 알게 된 연창훈이 관심을 보이며 물었다.“근데 어쩐 일이에요? 갑자기 도원시로 내려올 생각을 다 하고...”구진원은 젓가락을 잠시 멈췄다.도원으로 돌아오게 된 이유가 순간 머릿속을 스쳤던 그는 짧게 숨을 고르고
‘경민준 씨는 바쁘다며 다솜인 못 챙긴다더니, 정작 임지유랑은 같이 있고?’그 말이 목 끝까지 올라왔지만, 연미혜는 끝내 입을 열지 못했다.그보다 먼저, 경다솜이 해맑게 말했다.“엄마, 조금만 더 일찍 전화했으면 좋았을 텐데요! 헬기 타고 있을 때 영상 통화했으면 진짜 멋지게 보여드릴 수 있었을 거예요!”그 말에 연미혜는 조심스럽게 웃었지만, 경다솜이 이번 여행에 얼마나 만족하고 있는지가 고스란히 느껴져 더는 뭐라 말할 수가 없었다.그럼에도 마음 한쪽이 무겁게 가라앉았다. 가슴안에 찜찜함이 또 하나 차곡히 쌓였다.경다솜은
연미혜도 같은 생각이었다.그녀는 짧고 단호하게 메시지를 보냈다.[바빠. 그리고 약속 지켜. 다솜이 외할머니댁엔 절대 못 가게 해.]잠시 뒤, 경민준에게서 짧은 답장이 도착했다.[알겠어.]이후로 그는 더 이상 아무 연락도 해 오지 않았다.어린이날 연휴 다음 주말은 마침 주말이었다.그날 오후, 연미혜는 가족들과 함께 관광지에서 래프팅을 준비하고 있었다.그때 차예련에게서 사진 한 장이 도착했는데, 사진 속 인물은 임지유였다.차예련은 지금 쿠바나에 머무르며 패션쇼 준비로 한창이었다.사진을 본 연미혜는 메시지를 보냈다.[
‘넥스 그룹이랑 세인티가 해지한 건 알고 계신가요? 교수님의 제자인 김태훈 대표가 요즘 하는 짓을 보면 재능을 믿고 우쭐대는 것도 모자라, 사사건건 여자한테 휘둘려서 점점 판단력도 흐려지고 있던데요. 혹시 그 사실도 알고 계십니까?’염성민은 막 입을 열려다 말았다.곁눈질로 경민준이 있는 걸 본 순간, 목구멍까지 올라왔던 말이 쑥 들어가 버렸다.사실 이 얘기는 전부 임지유와 관련된 일이었다. 그런데 지금 이 자리에, 임지유의 옆에 경민준이 있었다.염성민의 입장에서 굳이 나서서 이런 말을 할 명분이 없었다.괜히 앞장서서 이런
임지유는 곧바로 해약서에 서명했다.배상금은 계약서에 명시된 기한 내에 전액 납부하겠다고 약속했다.이 소식을 들은 김태훈은 비웃듯 코웃음을 쳤다.“생각보다 행동이 빠릿빠릿해서 좋은걸?”해약 이후의 처리 절차는 변호사가 맡았고, 임지유가 서명한 뒤로는 김태훈과 연미혜 모두 더 이상 그 일에 신경 쓰지 않았다.이삼일 뒤, 유명욱이 휴가를 맞아 오랜만에 두 사람을 불러 모았다. 한동안 얼굴을 못 본 터라, 사제지간에 오붓하게 점심을 함께 하기로 했던 것이었다.연미혜와 김태훈은 회사를 나와 약속 장소인 식당에 도착했는데, 식당 입
임지유는 계약 해지를 결정한 뒤, 곧바로 경민준에게 전화를 걸었다.“경매 날에 김태훈 어머님이랑 얘기하다가, 내가 말을 좀 잘못했어. 그걸 사모님이 딱 집어냈고... 게다가 김태훈 쪽은 아예 세인티랑 엮일 생각이 없어 보여. 만약 소송으로 가서 이긴다고 해도 나중에 또 딴지를 걸어 협력 관계가 틀어지게 만들 가능성이 높아.”그녀는 잠시 말을 멈추고, 담담히 결론을 내렸다.“그쪽이 처음부터 협력 의지가 없었다면, 괜히 시간 끌기보다 지금 깨고 다른 파트너 찾는 게 낫다고 봐.”경민준은 그녀가 무슨 말을 실수했는지 구체적으로 묻
‘김태훈 어머니가 연미혜를 좋아한다고? 그게 말이 돼? 진짜라면... 어제 김태훈 어머니한테 했던 말들은 대체...’임지유는 갑자기 이미연이 대화 도중 갑자기 통화하러 다녀온 일이 떠올랐다.머릿속에 전화를 받는다며 자리를 비운 장면이 스치자, 묘한 불안감이 다시 가슴을 짓눌렀다.그녀의 낯빛이 안 좋아진 것을 본 경민준이 곁에서 물었다.“왜 그래? 어디 아파?”그 말에 임지유는 정신을 가다듬고 애써 미소를 지었다.“아니야. 나 괜찮아.”그날 저녁, 임지유는 이 사실을 가족들에게 알렸다.이미연이 연미혜를 마음에 들어 하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