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금 떨어진 뒤에야, 박우빈이 조심스럽게 물었다.“두 분, 임씨 가문하고 뭔가 오해라도 있으신 건가요?”김태훈과 연미혜는 짧게 눈을 마주쳤다.연미혜는 특별한 감정 없이 대답했다.“오해는 없어요.”사실이었다. 그건 오해가 아니라, 너무나도 분명한 원한 관계에 가까웠다.하지만 박우빈은 그 말을 곧이곧대로 받아들였다.“아, 그렇다면 다행이네요.”그는 잠시 말을 골랐다가, 의미심장하게 덧붙였다.“경민준 씨가 임지유 씨를 얼마나 신경 쓰는지 업계에선 다 알잖아요. 그러니 임씨 가문은 이제 날개를 달았다고 봐야겠죠. 경씨 가문
그 선물을 대신 전해달라는 것은 직접 참석하지 않을 것이란 뜻이었기에 연미혜도 더 이상 묻지 않았다.그녀는 다른 용건이 없었기에 곧바로 전화를 끊었다.하지만 경민준은 연미혜의 변화를 알아채지 못했다. 매년 이맘때면 연미혜는 그가 함께 연씨 가문에 가줄 수 있냐고 꼭 물어왔었지만, 올해는 그 흔한 질문 하나조차 없었다는 사실을 그는 전혀 눈치채지 못했다.연미혜가 전화를 끊자, 경민준은 휴대전화를 경다솜에게 건네며 말했다.“내일 밤에 엄마가 데리러 올 거야. 토요일엔 외증조할머니 댁에 가서, 하루 종일 엄마 말씀 잘 들어야 해.
경다솜은 연미혜 얼굴에 드리운 냉기가 눈에 들어오지 않았고 그저 연미혜의 말을 듣고 안도한 표정을 지었다.연창훈이 허미숙에게 선물을 건넨 뒤, 연미혜도 준비한 선물을 차례로 내밀었다.가장 먼저 건넨 건, 한 폭의 자수 그림이었다.“이 자수는 할머님께서 민준 씨에게 부탁해서 준비하신 거예요.”허미숙은 그림을 받아 펼쳐 보더니, 잠시 들여다보다가 입가에 미소를 지었다.마음에 쏙 든 눈치였다.“정성이 느껴지네.”이번엔 조심스럽게 조각 하나를 열어, 장신구 세트를 내놓았다.“이건 민준 씨가 드리는 선물이래요.”비취의 색감은
경민준을 무서워해서 괜히 엮이기 싫은 사람들도 있었지만, 아예 나서서 임씨 가문과 손씨 가문에 줄 서려는 사람들도 있었다.연씨 가문은 수년째 내리막이었고, 반면 임씨 가문과 손씨 가문은 지금 경민준이라는 든든한 배경을 등에 업고 있었다. 누구 편을 드는 게 유리한지는 뻔했다.남정우는 미안하다는 말만 남기고, 조용히 자리를 떴다.처음엔 허미숙과 연미혜의 외숙모 하여진도 상황을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하지만 들락날락하는 손님 수가 늘고, 본격적으로 식사를 시작할 시간이 다가왔는데도 자리는 텅텅 비어 있고, 게다가 몇몇 테이블에만
손님들이 끊임없이 몰려들자, 박영순과 손종철은 연신 웃음꽃이 피었다.연미혜가 짐작했던 대로, 그들 역시 허미숙의 생일을 뚜렷이 기억하고 있었다.오히려 수십 년간 생일을 챙겨온 날이라 일부러 잊으려 해도 잊을 수 없었다. 그만큼 오늘 손씨 가문이 이사 잔치를 허미숙 생일에 맞춘 건, 의도적인 계산이 깔려 있었다.과거 손씨 가문이 연씨 가문 맞은편으로 이사 오려다, 연미혜가 경민준에게 부탁해 그 계획이 틀어졌던 일을 생각하면, 그들이 이날을 택한 심정도 이해할 수 있었다.그 일로 마음이 상했던 손씨 가문은 경민준의 보상 덕에 결
그 시각, 하승태와 정범규도 연회장에 도착했다.두 사람이 모습을 드러내자, 손씨 가문과 임씨 가문 사람들은 일제히 반가운 얼굴로 그쪽을 향해 걸어갔다.도원시에서 이 두 사람의 위치는 남다른 데다, 하씨 가문 역시 경씨 가문 못지않은 명문가였기에, 그들에게 공을 들이는 건 당연한 일이었다.하승태를 예전부터 본 적 있던 손아림은 그가 다시 눈앞에 나타나자 정성스레 화장한 얼굴이 금세 붉어졌다.딸의 반응을 본 한효진은 미소를 지었다.하씨 가문은 말할 것도 없이 일류 명문, 하승태는 능력이며 외모며 흠잡을 데 없는 인물이었다. 손
김태훈은 조용히 말했다.“아저씨, 조금만 더 기다리실 수 있을까요? 곧 한 분 더 오실 거예요. 십 분 안으로 도착하실 겁니다.”김태훈과 연미혜의 관계를 잘 알고 있던 연창훈은 고개를 끄덕였다. 평소에도 김태훈이 연미혜를 많이 챙기는 걸 알고 있었기에, 그에게는 늘 고마운 마음이 있었다.“혼자 오시는 거야? 우리 주빈석에 자리가 비어 있는데, 괜찮으시다면 함께 앉으셔도 좋을 것 같은데.”“괜찮아요. 그런 거 신경 안 쓰실 분이에요.”“그럼 다행이고...”연창훈은 고개를 끄덕이며, 다른 테이블엔 먼저 요리를 내오게 하고,
연미혜는 유명욱 곁에 조용히 앉아 있었다.하지만 그는 허미숙과 이야기를 나누느라, 아직 연미혜에게 눈길을 줄 틈이 없었다.연미혜는 고개를 살짝 돌려 김태훈에게 속삭였다.“고마워요.”유명욱이 온 뒤, 외할머니의 표정이 눈에 띄게 밝아진 걸 그녀는 누구보다 먼저 알아챘다.김태훈은 어깨를 으쓱하며 대답했다.“나한테 고마워할 거 없어. 교수님께서 네가 최근에 제안했던 프로젝트 구상 보고 연락해 주셨어. 그 타이밍에 얘기 꺼냈더니 직접 오신 거지. 그러니까 결국 널 보고 온 거야.”연미혜가 무언가 말하려던 순간, 누군가가 작게
연미혜도 같은 생각이었다.그녀는 짧고 단호하게 메시지를 보냈다.[바빠. 그리고 약속 지켜. 다솜이 외할머니댁엔 절대 못 가게 해.]잠시 뒤, 경민준에게서 짧은 답장이 도착했다.[알겠어.]이후로 그는 더 이상 아무 연락도 해 오지 않았다.어린이날 연휴 다음 주말은 마침 주말이었다.그날 오후, 연미혜는 가족들과 함께 관광지에서 래프팅을 준비하고 있었다.그때 차예련에게서 사진 한 장이 도착했는데, 사진 속 인물은 임지유였다.차예련은 지금 쿠바나에 머무르며 패션쇼 준비로 한창이었다.사진을 본 연미혜는 메시지를 보냈다.[
‘넥스 그룹이랑 세인티가 해지한 건 알고 계신가요? 교수님의 제자인 김태훈 대표가 요즘 하는 짓을 보면 재능을 믿고 우쭐대는 것도 모자라, 사사건건 여자한테 휘둘려서 점점 판단력도 흐려지고 있던데요. 혹시 그 사실도 알고 계십니까?’염성민은 막 입을 열려다 말았다.곁눈질로 경민준이 있는 걸 본 순간, 목구멍까지 올라왔던 말이 쑥 들어가 버렸다.사실 이 얘기는 전부 임지유와 관련된 일이었다. 그런데 지금 이 자리에, 임지유의 옆에 경민준이 있었다.염성민의 입장에서 굳이 나서서 이런 말을 할 명분이 없었다.괜히 앞장서서 이런
임지유는 곧바로 해약서에 서명했다.배상금은 계약서에 명시된 기한 내에 전액 납부하겠다고 약속했다.이 소식을 들은 김태훈은 비웃듯 코웃음을 쳤다.“생각보다 행동이 빠릿빠릿해서 좋은걸?”해약 이후의 처리 절차는 변호사가 맡았고, 임지유가 서명한 뒤로는 김태훈과 연미혜 모두 더 이상 그 일에 신경 쓰지 않았다.이삼일 뒤, 유명욱이 휴가를 맞아 오랜만에 두 사람을 불러 모았다. 한동안 얼굴을 못 본 터라, 사제지간에 오붓하게 점심을 함께 하기로 했던 것이었다.연미혜와 김태훈은 회사를 나와 약속 장소인 식당에 도착했는데, 식당 입
임지유는 계약 해지를 결정한 뒤, 곧바로 경민준에게 전화를 걸었다.“경매 날에 김태훈 어머님이랑 얘기하다가, 내가 말을 좀 잘못했어. 그걸 사모님이 딱 집어냈고... 게다가 김태훈 쪽은 아예 세인티랑 엮일 생각이 없어 보여. 만약 소송으로 가서 이긴다고 해도 나중에 또 딴지를 걸어 협력 관계가 틀어지게 만들 가능성이 높아.”그녀는 잠시 말을 멈추고, 담담히 결론을 내렸다.“그쪽이 처음부터 협력 의지가 없었다면, 괜히 시간 끌기보다 지금 깨고 다른 파트너 찾는 게 낫다고 봐.”경민준은 그녀가 무슨 말을 실수했는지 구체적으로 묻
‘김태훈 어머니가 연미혜를 좋아한다고? 그게 말이 돼? 진짜라면... 어제 김태훈 어머니한테 했던 말들은 대체...’임지유는 갑자기 이미연이 대화 도중 갑자기 통화하러 다녀온 일이 떠올랐다.머릿속에 전화를 받는다며 자리를 비운 장면이 스치자, 묘한 불안감이 다시 가슴을 짓눌렀다.그녀의 낯빛이 안 좋아진 것을 본 경민준이 곁에서 물었다.“왜 그래? 어디 아파?”그 말에 임지유는 정신을 가다듬고 애써 미소를 지었다.“아니야. 나 괜찮아.”그날 저녁, 임지유는 이 사실을 가족들에게 알렸다.이미연이 연미혜를 마음에 들어 하고
다음 날 아침, 경민준은 임지유, 경다솜과 함께 일찍부터 경기장에 도착해 있었다.잠시 후, 하승태와 수연도 도착했다.경다솜이 그들을 발견하고 손을 흔들었다.“승태 삼촌, 안녕하세요!”“수연아, 와줘서 고마워!”수연이 경다솜의 손을 꼭 잡으며 말했다.“이제 곧 경기 시작되잖아. 다솜아, 많이 긴장돼?”경다솜은 고개를 저으며 또렷하게 말했다.“긴장되긴, 당연히 긴장 안 되지!”하승태는 다른 일정이 있어 경기엔 오래 머무를 수 없었다. 그는 수연이를 데려다주러 잠깐 들른 것이었다.경민준이 그의 사정을 알고 먼저 말했다.
김태훈의 부모님이 자리를 뜬 뒤, 경민준이 물었다.“사모님이랑 얘긴 잘했어?”임지유는 옅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응. 그런 것 같아. 고마워.”임지유는 속으론 생각했다.‘방금 사모님 얼굴 보니까 연미혜에 대한 불만이 점점 커지는 것 같던데....’사실 세인티와 넥스 그룹 사이에서 벌어진 일은 이미연도 이미 알고 있었다. 김태훈이 미리 설명을 해뒀기 때문이었다.조금 전 임지유와 이야기를 나눌 때 울린 전화는 사실 존재하지도 않았다. 그녀는 대화를 미리 녹음해 두고, 자리를 비켜선 후 멀리서 경민준과 임지유 쪽을 슬쩍
임지유는 며칠은 기다려야 소식이 올 줄 알았다. 그런데 그날 오후, 경민준에게서 먼저 전화가 걸려 왔다.“김 회장님이랑 사모님께서 내일 경매 행사에 참석하신대. 우리도 같이 가보자.”그 말에 임지유는 미소 지으며 답했다.“좋아.”다음 날 저녁, 경매장에 도착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경민준은 임지유를 데리고 곧장 김태훈의 부모님이 있는 쪽으로 향했다. 그리고 직접 임지유를 두 사람에게 소개했다.김태훈의 부모는 이미 경민준과 연미혜의 관계를 알고 있었고, 연미혜와 임지유 사이에 있었던 일들도 모두 알고 있었다.하지만 그들은
지현승이 뭔가 생각에 잠긴 듯한 얼굴을 하고 있을 때, 염성민이 다시 물었다.“성민아, 철호 아저씨나 아버지 말고, 네가 아는 사람 중에 유명욱 교수님 연락처 아는 사람 또 없어?”“없는 것 같아.”지현승이 대답했다.그렇게 말한 뒤, 무언가 떠오른 듯 다시 말을 이었다.“근데, 너 전에 임지유 씨가 유명욱 교수님을 만난 적 있다고 하지 않았어? 아마 지유 씨는 교수님이 연락처를 갖고 있을 것 같은데? 교수님한테 직접 연락해서 해결될 일이라면, 임지유 씨가 알아서 연락하지 않았을까?”염성민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나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