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미혜는 고개를 끄덕이며 티 테이블 옆 소파에 조용히 앉았다.경민준은 한마디 더 덧붙였다.“커피 좀 부탁해 주세요.”“이미 말씀드렸습니다.”강철우의 말이 끝나자마자 문이 열리더니 서안나가 커피를 들고 들어왔다.그녀는 연미혜를 보자 잠시 멈칫했다.“어? 팀장님?”서안나는 연미혜가 경문그룹을 떠난 뒤 팀장 자리를 이어받은 후임자였다. 그러나 그 이후로 두 사람은 따로 연락을 주고받은 적이 없었다.연미혜는 잔잔하게 미소 지으며 인사했다.“안나 씨, 오랜만이에요.”“그러게요. 팀장님, 정말 오랜만입니다.”서안나도 웃으며
류수찬은 연미혜와 임지유 사이에 과거에 어떤 일이 있었는지 모르는 눈치였다. 그는 마우재의 말에 자연스럽게 맞장구쳤다.“그러게요. 저희가 지금 최신 기술 동향에 관해 이야기 나누고 있었는데, 지유 씨도 AI 전공이시니까요. 더 다양한 시선이 모이면 더 좋은 거죠. 같이 얘기 나누어도 좋을 것 같은데요?”임지유는 짧게 웃으며 말했다.“아... 그러셨군요.”말은 그렇게 했지만 그녀의 시선은 은근히 연미혜를 향하고 있었다.연미혜는 이미 업무적인 이야기를 어느 정도 마무리한 상태였다.사실 슬슬 자리를 정리하려던 참이었지만, 마우
연미혜가 아이리스 국제공항에 도착했을 땐 이미 밤 9시가 넘어 있었다.오늘은 그녀의 생일이었다. 휴대폰을 켜자마자 동료들과 친구들에게서 온 생일 축하 메시지가 한가득 쌓여 있었지만, 정작 경민준에게선 아무런 연락도 없었다.연미혜의 미소도 씁쓸한 표정으로 바뀌었다.저택에 도착했을 땐 벌써 10시가 넘은 늦은 밤이었다.유순자는 갑자기 나타난 그녀를 보곤 순간 멈칫했다.“사모님, 말도 없이... 어쩐 일이세요?”“민준 씨랑 솜이는요?”“대표님은 아직 안 들어오셨고 다솜 아가씨는 방에서 놀고 계세요.”연미혜는 짐을 유순자에게
밤 9시가 넘어가자, 경민준과 다솜이 집으로 돌아왔다.경다솜은 아빠의 옷자락을 꼭 움켜쥔 채 차에서 내리는 걸 한없이 미뤘다.솔직히, 엄마가 집에 있는 오늘 같은 날엔 아예 돌아오고 싶지 않았다.하지만 지유 이모가 ‘엄마는 일부러 널 보러 온 거야. 만약 집에 안 가면 엄마가 속상해할 거야.’라고 했고, 아빠도 ‘오늘 밤에 안 들어가면, 내일 엄마가 바다를 보러 가는 데 따라가겠다고 할 거야.’라고 했던 말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돌아오기로 했던 것이었다.경다솜의 얼굴에는 여전히 걱정이 남아 있었고, 이내 찝찝한 얼굴로 중얼거
경문 그룹의 수행 비서이자 비서실장인 강철우는 연미혜의 사직서를 받아 들고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다.그는 회사 내에서 연미혜와 경민준의 관계를 아는 몇 안 되는 사람이었고, 경민준이 단 한 번도 그녀에게 마음을 준 적 없다는 사실도 잘 알고 있었다.결혼 후, 경민준은 줄곧 냉정한 태도로 그녀를 대했고, 집에도 거의 들어가지 않았다.연미혜는 남편과 가까워지기 위해 경문 그룹에 입사했고 그녀의 목표는 처음부터 명확했다. 바로 경민준의 수행 비서가 되는 것이었다.하지만 경민준은 단칼에 거절했고, 심지어 경무진이 직접 나서서 설득했음
경다솜은 침대에서 벌떡 일어나며 소리쳤다.“진짜예요?!”“그럼!”“지유 이모는 왜 저한테 같이 돌아갈 거라고 말 안 했을까요?”“이제 막 결정된 일이니까. 아직 말하지 않았어.”경다솜은 한껏 들뜬 얼굴로 활짝 웃었다.“아빠, 이거 당분간 비밀로 해 주세요! 우리 서프라이즈처럼 지유 이모 앞에 나타나요. 그러면 정말 재밌을 것 같아요!”“그래.”“아빠 최고예요! 아빠 진짜 진짜 사랑해요!”전화를 끊은 뒤에도 경다솜은 흥분을 가라앉히지 못하고 침대 위에서 신나게 뛰어다니며 콧노래를 흥얼거렸다. 그러다 문득 연미혜의 얼굴
김태훈과 연미혜는 이 몇 년 동안 거의 만나지 않았다. 하지만 몇 번의 짧은 만남만으로도 김태훈은 그녀가 예전처럼 당당하고 빛나던 모습과는 거리가 먼 삶을 살고 있다는 걸 알 수 있었다.예전의 연미혜를 떠올리면, 그는 꿈에도 그녀를 보며 ‘자존감이 낮다’는 말을 떠올릴 거라곤 상상도 못 했다.김태훈은 그녀와 경민준의 결혼 생활에 대해 깊이 알지는 못했지만, 대략적인 사정은 알고 있었다.그는 속으로 짐작이 갔지만 굳이 말로 꺼내진 않았다. 대신, 진심을 담아 말했다.“잠깐 뒤처지는 건 아무 문제 아니야. 너의 실력과 재능은 웬
다음 날 아침, 경민준은 회사에 도착하자마자 연미혜와 마주쳤다.그녀는 경민준과 경다솜이 이미 귀국했다는 사실을 전혀 몰랐기에 예상치 못한 조우에 순간 발걸음을 멈췄다.경민준 역시 그녀를 보고 흠칫 놀란 기색을 보였지만, 그저 출장을 다녀온 줄로만 생각하며 별다른 표정 변화 없이, 마치 낯선 사람을 지나치듯 무심하게 그녀를 스쳐 지나가 회사 안으로 들어갔다.예전 같았으면, 갑작스러운 경민준의 귀국 소식에 깜짝 놀라며 기뻐했을 것이다. 바로 뛰어가 안길 수는 없어도 환한 미소로 그의 얼굴을 바라보며 아침 인사를 건넸을 것이다.그
류수찬은 연미혜와 임지유 사이에 과거에 어떤 일이 있었는지 모르는 눈치였다. 그는 마우재의 말에 자연스럽게 맞장구쳤다.“그러게요. 저희가 지금 최신 기술 동향에 관해 이야기 나누고 있었는데, 지유 씨도 AI 전공이시니까요. 더 다양한 시선이 모이면 더 좋은 거죠. 같이 얘기 나누어도 좋을 것 같은데요?”임지유는 짧게 웃으며 말했다.“아... 그러셨군요.”말은 그렇게 했지만 그녀의 시선은 은근히 연미혜를 향하고 있었다.연미혜는 이미 업무적인 이야기를 어느 정도 마무리한 상태였다.사실 슬슬 자리를 정리하려던 참이었지만, 마우
연미혜는 고개를 끄덕이며 티 테이블 옆 소파에 조용히 앉았다.경민준은 한마디 더 덧붙였다.“커피 좀 부탁해 주세요.”“이미 말씀드렸습니다.”강철우의 말이 끝나자마자 문이 열리더니 서안나가 커피를 들고 들어왔다.그녀는 연미혜를 보자 잠시 멈칫했다.“어? 팀장님?”서안나는 연미혜가 경문그룹을 떠난 뒤 팀장 자리를 이어받은 후임자였다. 그러나 그 이후로 두 사람은 따로 연락을 주고받은 적이 없었다.연미혜는 잔잔하게 미소 지으며 인사했다.“안나 씨, 오랜만이에요.”“그러게요. 팀장님, 정말 오랜만입니다.”서안나도 웃으며
골프를 모두 마친 뒤에도, 연미혜와 박찬호 일행은 예정된 다음 일정이 남아 있었다.경민준과 임지유는 중간에 끼어든 입장이었기에, 끝까지 함께하는 건 부담이 될 수도 있다는 걸 눈치챈 듯했다.그래서 경민준이 먼저 나섰다.“저희는 따로 볼 일이 있어서요. 오늘은 여기까지만 함께할게요. 남은 시간 즐겁게 보내세요.”박찬호와 염용석은 굳이 붙잡지 않았다.“그래. 다음에 기회가 되면 또 좋은 시간을 만들어보자.”경민준은 웃으며 고개를 끄덕이고, 임지유와 함께 조용히 골프장을 빠져나갔다.그 모습을 지켜보던 김태훈은 걱정이 사라진
그들은 공을 치며 가볍게 움직이고 있었지만 실제로 골프는 뒷전이었다.염용석과 박찬호는 골프보다 지금 나누고 있는 대화에 훨씬 더 깊이 빠져 있었다.처음엔 국제 시사에 대해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다 보니, 어느새 분위기가 후끈 달아올랐다.염용석과 박찬호는 근처 컵과 볼을 이용해 현장에서 전투 상황을 즉흥적으로 시뮬레이션하기 시작했다.두 사람은 진지하게 전선의 흐름을 짚으며 전략을 주고받았고, 연미혜와 김태훈, 경민준과 임지유는 그 모습을 조용히 지켜보며 말을 아꼈다.하지만 언제까지나 후배들이 듣기만 할 수는 없었는지, 박찬호
박찬호는 경민준을 바라보며 슬쩍 웃었다.“이왕 온 김에, 우리랑 한 라운드 같이할래?”“좋습니다.”경민준은 대수롭지 않다는 듯 대답했지만, 이미 박찬호 옆에 자연스럽게 자리하고 있었다.가벼운 인사를 주고받은 뒤, 박찬호는 다시 김태훈과 지철호 쪽을 돌아보며 물었다.“아까 우리 어디까지 얘기했지?”김태훈이 클럽을 손에 고쳐 잡으며 응대했다.“다른 나라 정찰용 탐사선이 한아국 관할 구역에 진입했을 때, 그걸 어떻게 처리하는 게 외교적으로 가장 바람직한 대응이 될지에 대해 논의했습니다..”그 말을 듣고 있던 임지유도 무의식
식사를 마친 뒤, 경다솜은 자연스럽게 연미혜와 함께 연씨 가문으로 향했다.오랜만에 엄마와 보내는 시간이 마냥 좋은 듯, 다솜은 손을 꼭 잡고 연미혜 곁을 따라붙었다.그날 밤, 연미혜는 박찬호에게서 전화를 받았다.내일 아침, 자신과 김태훈을 골프장에 초대하고 싶다는 제안이었다.크게 거절할 이유도 없었기에, 연미혜는 별다른 고민 없이 승낙했다.하지만 박찬호가 보내온 골프장 주소를 확인하는 순간, 손끝이 잠시 멈췄다.그 장소는 다름 아닌 경씨 가문 소유의 골프장이었고, 연미혜도 예전에 몇 번 들른 적 있는 곳이었다.잠깐 망설
연미혜와 김태훈은 전아현을 통해 캐벳 스미스의 면담 요청을 정중히 거절했지만, 이틀 뒤, 그는 별다른 예고도 없이 한국으로 들어왔다.이미 몸소 찾아온 이상, 두 사람도 완전히 외면할 수는 없었고, 결국 상징적으로 짧은 만남을 가졌다.그러나 그 자리 역시 십여 분 남짓 형식적인 대화만 나눈 채 마무리됐고, 이후 캐벳 스미스가 다시 연락을 시도했을 땐 연미혜도, 김태훈도 더 이상 응하지 않았다.두 사람의 태도는 명확했고 단호했다.결국 다음 날, 캐벳 스미스는 임지유에게 식사를 제안했다.식사 자리에서 그는 한동안 업계 동향과 기
경민준이 연미혜를 어떻게 생각하든, 어떻게 바라보든, 임지유는 애초부터 신경 쓰지 않았고 앞으로도 그럴 생각이 없었다.식당을 나선 뒤, 연미혜는 김태훈과 함께 곧장 경문 그룹 회의실로 향했다.이번에는 손수희나 손아림처럼 따라붙는 사람은 없었지만, 뜻밖에도 임지유만은 조용히 함께했다.임지유가 계속해서 동행하려는 의도를 알아챈 김태훈은 속으로 눈살을 찌푸리며 대놓고 불쾌감을 드러내지는 않았지만, 곧장 경민준을 향해 의미심장한 시선과 함께 말을 꺼냈다.“경 대표님, 임 대표님도...”그가 하고자 했던 말을 짐작이라도 한 듯, 경
정범규의 질문에 미처 대답을 하기도 전에, 경민준의 휴대폰이 울렸다.경민준이 잠시 자리를 비워 전화를 받고 돌아왔을 때는 이미 음식이 하나둘 테이블에 놓이기 시작한 뒤였다.정범규의 물음은 그렇게 흐지부지 넘겨졌다.AI 업계의 국내외 대가들이 밤새워 읽고 있다는 바로 그 논문의 주저자가 지금, 이 자리에서 식사하고 있다는 사실에 식당 안의 분위기는 묘하게 달아올라 있었다.논문의 핵심 내용과 실험 데이터를 간략히 훑어본 마우재 교수와 그의 박사과정 학생들은 식사를 하면서도 계속해서 연미혜에게 질문을 던졌다.논문 안에서 궁금했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