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연아!”하승태가 다가와 연미혜의 품에서 아이를 받아 안았다. 그제야 그는 수연의 온몸이 흠뻑 젖어 있다는 걸 깨달았다.잠시 멈칫하며 연미혜를 바라보던 그가 낮은 목소리로 물었다.“어떻게 된 거죠?”그녀는 예상치 못한 연결고리에 순간 놀랐다.‘이 아이가 하승태의 조카였다니...’“온천에 빠졌어요. 제가 마침 근처에 있어서 바로 도울 수 있었네요.”“고맙습니다.”“별말씀을요.”연미혜는 담담하게 대답했다.“우선 옷부터 갈아입히세요. 감기 걸릴 수도 있으니까요.”하승태가 고개를 끄덕였다. 무언가 더 말하려는 듯했지만
연미혜가 조금 전 자리에서 일어나 상대와 대화하는 모습을 보니, 두 사람이 아는 사이인 듯했다.“하승태 씨였어요”“하승태?”김태훈이 놀란 표정으로 되물었다.“두 분 별로 안 친하지 않아? 어쩌다 같이 앉아 있었던 거야?”“조카가 온천탕에 빠지는 걸 제가 보고 건져줬어요. 그래서 인사하러 오셨던 거예요.”“아, 그런 일이 있었구나.”연미혜가 ‘같이 온 동료’라고 말하자, 하승태는 그녀가 방금 인사했던 사람이 단순한 직장 동료라고 생각했다.굳이 돌아보지 않았고 별다른 관심도 두지 않았다.그러나 그녀가 자리를 떠난 뒤 함
연미혜의 얼굴이 순식간에 붉어졌다.당황한 그녀는 서둘러 수연이 잡고 있던 옷깃을 정리하며 가운을 단단히 여몄다.하승태의 눈빛이 미묘하게 흔들리더니, 이내 정신을 차리고 고개를 돌려 시선을 피했다.옆에 있던 베이비시터도 어쩔 줄 몰라 하며 민망한 표정을 지었다.‘다행히 다른 사람은 없네. 아니었으면 더 난감할 뻔했어.’그녀는 급히 연미혜의 옷매무새를 도왔다.평소에도 노출이 적은 옷을 즐겨 입는 연미혜는 경민준 외의 남자 앞에서 이렇게까지 노출한 적이 없었다.더구나, 그 상대가 다름 아닌 경민준의 친구였기에, 이 자리에 더
20분쯤 지나 경민준 일행이 집에 돌아왔다.노현숙은 경민준을 쳐다보지 않은 채, 다정한 미소로 경다솜을 향해 손짓했다.“경다솜이 왔구나?”“증조할머니! 보고 싶었어요!”경다솜은 반가운 듯 달려가 노현숙에게 안겼다.노현숙이 아이의 머리를 한참 쓰다듬어 준 뒤에야, 경다솜은 연미혜에게 다가갔다.“엄마...”“응.”연미혜가 경다솜을 품에 안는 순간, 익숙한 향이 은은하게 스쳤다. 희미했지만 분명 임지유가 쓰던 향수 냄새였다.연미혜는 아무 말 없이 아이를 살짝 떼어냈다.경민준은 노현숙 옆에 앉으며 작은 상자를 건넸다.“
연미혜는 경다솜을 씻기고 머리를 말려주고 있었다.경다솜은 조용히 머리를 말려주는 엄마를 바라보다가 문득 깨달았다.‘엄마... 요즘 말이 정말 많이 줄었네... 예전에는 머리를 말려주는 동안에도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곤 했는데...’경다솜이 그런 생각에 잠긴 채 연미혜를 바라보자, 그녀가 조용히 물었다.“왜 그래?”경다솜은 고개를 저었다.“아니에요.”‘괜히 내가 신경 쓰는 걸지도 몰라. 아니면 엄마가 기분이 안 좋은 날이라 그런 걸 수도 있고...’머리를 다 말리고 나서, 경다솜은 침대 위를 한 바퀴 데굴 굴러다니다가
연미혜는 이 말이 분명 자기에게 한 것이 아닐 거로 생각했다.두 사람이 결혼한 지 그렇게 오래됐지만, 경민준은 한 번도 그녀를 이렇게 안고 잔 적이 없었다.아침 인사는커녕, 입맞춤 같은 건 더더욱 없었다. 그렇기에 연미혜는 그가 자기를 임지유로 착각한 게 틀림없다고 확신했다.입술을 꾹 다문 채 눈가가 붉어졌지만, 정작 경민준은 깊이 잠든 채 깨어날 기미조차 없었다.그를 바라보며 복잡한 감정을 억누르듯 깊이 숨을 들이마시곤 조심스레 몸을 뒤로 빼며 그의 품에서 벗어났다.하지만 서로 맞닿은 채 너무 가까웠기에 아무리 조심해도
“할머니, 괜찮아요.”연미혜가 노현숙의 말을 끊으며 담담한 표정으로 조용히 입을 뗐다.“괜찮아요. 민준 씨가 바쁘다니, 저랑 다솜이만 다녀올게요.”“너...”노현숙이 뭔가 말하려다 멈칫했다.연미혜의 태도엔 강요도, 애써 붙잡으려는 기색도 없었다. 정말로 더는 신경 쓰지 않겠다는 듯 담담해 보였다.하지만 노현숙은 그걸, 그녀가 경민준을 배려해서 하는 말이라 여겼다. 아직도 그를 위해 참고 이해해 주는 거로 생각한 것이었다.그저 그런 모습을 보니 안쓰러워서 마음이 더 복잡해졌고 결국 더는 말을 잇지 못했다.그렇게 일이 정
다음 달이면 허미숙의 칠순 생신이었다.연미혜와 연창훈은 어떻게 준비할지 의논했지만, 노현숙은 별다른 흥미를 보이지 않았다.“그런 형식적인 거 말고, 그냥 가족끼리 편하게 밥 한 끼 먹으면 돼.”하여진이 조심스럽게 의견을 냈다.“그래도 칠순인데, 간단하게라도 준비하는 게 좋지 않을까요?”연미혜와 연창훈 역시 같은 생각이었다.허미숙은 손사래를 쳤지만, 손주들이 정성껏 준비하려 하자 더는 거절하지 않았다.다음 날 학교에 가야 했던 경다솜을 위해, 저녁 식사가 끝난 후 연미혜는 그녀와 함께 집으로 돌아왔다.집 앞에 도착하자,
양주시에서 온 이들은 허미숙을 알아보긴 했지만, 임씨 가문과 손씨 가문 쪽 사람들이 그녀에게 인사조차 하지 않는 걸 보고는 바로 눈치를 챘다.임씨 가문 쪽에서 예전 연씨 가문과의 일들이 이 자리에서 거론되는 걸 원하지 않는다는 사실 말이다.그렇게 분위기를 읽은 이들은 허미숙을 분명히 알아보면서도 아무도 먼저 말을 걸지 않았다.오히려 몇몇은 시선을 임지유와 임지후 쪽으로 돌리더니, 연미혜와 허미숙이 옆에 있는 상황에서도 이금자에게 이렇게 말했다.“어르신, 두 손주분이 정말 대단하시네요. 인물도 그렇고 기품도 그렇고, 어르신 복
“그러게 말이에요.”염성민과 정범규도 현장에 있었다.그들 역시 연미혜와 임씨 가문, 손씨 가문 사이에 어떤 사연이 있는지는 알지 못했기에, 이금자가 ‘사람을 잘못 봤다’고 한 말에 별다른 반응 없이 넘겼다.임해철과 임혜민 역시 그랬다. 누구 하나 나서서 연미혜를 두둔하거나, 그녀를 향해 인사 한 번도 해주지 않았다.그 광경을 지켜보던 손아림은 속이 시원하다는 듯한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반면, 강혜원은 속으로는 연미혜 편을 들어주고 싶었지만, 이처럼 많은 사람들 앞에서 쉽게 입을 뗄 수 없었다. 그래서 결국 고개를 숙이고 말
국제 인공지능 콘퍼런스를 마친 지 이틀, 아니 사흘쯤 지난 어느 저녁, 연미혜는 퇴근 후 외삼촌 쪽 친척의 결혼식에 참석하기 위해 호텔을 찾았다.호텔에 도착한 후 엘리베이터에 올라타 문이 닫히려던 순간, 누군가가 외쳤다.“잠깐만요!”같은 순간, 손이 쑥 들어와 문이 닫히는 것을 막았다.고개를 돌린 연미혜는 들어오는 사람의 얼굴을 보고 잠시 눈빛이 흔들렸다.엘리베이터에 들어선 사람은 임지후였다.두 사람은 그동안 몇 번 얼굴을 본 적은 있었지만, 마지막으로 마주친 건 두세 달 전의 일이었다.그럼에도 불구하고, 임지후는 그녀
캐벳 스미스가 말한 ‘깊이 있는 대화’라는 건 결국 김태훈에게서 Infinite-CM의 핵심 기술을 조금이라도 캐내 보겠다는 속내였다.그러나 김태훈은 그와 악수하며 한 치의 빈틈도 허락하지 않는 말투로 받아넘겼다.“스미스 교수님, 과찬이십니다. 교수님께서 쓰신 순환신경망과 어텐션 메커니즘 관련 논문, 열 번도 넘게 읽었습니다. 저한텐 정말 큰 자극이 됐어요. 이렇게 직접 뵙고 말씀 나눌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오히려 제게 큰 영광입니다.”캐벳 스미스는 당연히 더 이야기를 이어가고 싶었지만, 개막식이 임박한 터라 두 사람은 주최
캐벳 스미스가 미소 지으며 말했다.“내 박사 과정 학생, 임지유입니다.”그는 임지유 외에도 네댓 명의 학생들을 데려왔는데, 그중 임지유만이 유일한 동양인이었다.임지유가 캐벳 스미스의 제자라는 사실이 알려지자, 현장에선 감탄과 부러움이 쏟아졌다.“세상에, 스미스 교수님 박사 과정 학생이라니 완전 대단한데?”“그런데 저렇게 예쁘기까지 해? 신이 모든 걸 다 줬네. 너무 불공평해!”“더 기가 막힌 건... 저 여자가 경민준의 여자 친구라는 거잖아.”“헐... 진짜 비교할 게 못 되네. 나 같은 인생은 어떡하라고...”순식간
이틀 뒤, 김태훈은 서원시에서 열리는 국제 인공지능 대회에 참석했다.지난해의 기술 박람회와 마찬가지로 이번 행사 역시 업계 관계자들이 AI 관련 최신 동향을 파악하고 기술을 교류할 수 있는 중요한 자리였다.이번에 그와 함께한 일행은 연미혜, 그리고 최근 넥스 그룹에 새로 합류한 구진원을 포함한 몇몇 엔지니어들이었다.구진원을 비롯한 신입 직원들을 함께 데려온 이유는 아직 이들이 회사의 핵심 기밀에 접근할 수 있는 단계가 아니었기 때문에 기술 유출에 대한 걱정이 없었기 때문이었다.서원시에 도착한 뒤, 행사장에 들어서자 이미 내부
구진원은 결국 연미혜와 함께 래프팅을 타볼 기회를 잡지 못했다.하지만 저녁 무렵, 그는 또 한 번 ‘우연히’ 연미혜와 연씨 가문 사람들을 마주쳤다.그녀의 외삼촌 연창훈과 외숙모 하여진은 반갑게 인사하며, 그와 그의 친구에게 같이 식사하자고 흔쾌히 자리를 권했다.이야기를 나누다 그가 구씨 가문의 도련님이라는 사실을 알게 된 연창훈이 관심을 보이며 물었다.“근데 어쩐 일이에요? 갑자기 도원시로 내려올 생각을 다 하고...”구진원은 젓가락을 잠시 멈췄다.도원으로 돌아오게 된 이유가 순간 머릿속을 스쳤던 그는 짧게 숨을 고르고
‘경민준 씨는 바쁘다며 다솜인 못 챙긴다더니, 정작 임지유랑은 같이 있고?’그 말이 목 끝까지 올라왔지만, 연미혜는 끝내 입을 열지 못했다.그보다 먼저, 경다솜이 해맑게 말했다.“엄마, 조금만 더 일찍 전화했으면 좋았을 텐데요! 헬기 타고 있을 때 영상 통화했으면 진짜 멋지게 보여드릴 수 있었을 거예요!”그 말에 연미혜는 조심스럽게 웃었지만, 경다솜이 이번 여행에 얼마나 만족하고 있는지가 고스란히 느껴져 더는 뭐라 말할 수가 없었다.그럼에도 마음 한쪽이 무겁게 가라앉았다. 가슴안에 찜찜함이 또 하나 차곡히 쌓였다.경다솜은
연미혜도 같은 생각이었다.그녀는 짧고 단호하게 메시지를 보냈다.[바빠. 그리고 약속 지켜. 다솜이 외할머니댁엔 절대 못 가게 해.]잠시 뒤, 경민준에게서 짧은 답장이 도착했다.[알겠어.]이후로 그는 더 이상 아무 연락도 해 오지 않았다.어린이날 연휴 다음 주말은 마침 주말이었다.그날 오후, 연미혜는 가족들과 함께 관광지에서 래프팅을 준비하고 있었다.그때 차예련에게서 사진 한 장이 도착했는데, 사진 속 인물은 임지유였다.차예련은 지금 쿠바나에 머무르며 패션쇼 준비로 한창이었다.사진을 본 연미혜는 메시지를 보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