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이현이 온지유의 엉덩이에 한 대 때렸다.쓰라리게 아프다.“아직 정신을 못 차렸구나!”여이현이 차답게 말했다.잠시 후.온지유는 더 이상 견디지 못하겠다. 피부도 여리고 여이현의 손길에 어쩔 줄 몰라 했다.“그만… 제발… 그만해요…”여이현은 머리카락이 헝클어진 채 테이블 위에 펼쳐져 있고, 볼은 빨갛게 달아오르고, 이마에는 땀이 송골송골 맺혀있는 온지유를 보았다.셔츠는 허리에 걸쳐 있었고, 스타킹은 이미 여이현에게 찢어져 있었다.온지유는 눈물을 흘리고, 코도 빨개지고 모습은 마치 괴롭힘을 당하는 듯한 애처로운 모습이었다.여이현은 이 모습을 보고 안쓰러운지 온지유를 품에 안고 앉았다.온지유는 지금 제정신이 아니었다. 너무 많이 울어서 목도 쉬었고, 시선도 흐릿했다.온지유는 여이현 품에 안겨 산산조각 난 인형처럼 반항할 힘도 잃었다.여이현이 온지유한테 옷을 입히고 품에 안은 채 잠긴 목소리로 말했다.“네가 얌전하게 굴었다면 뒷일은 없었을 거야.”온지유는 여이현이 무엇 때문에 성질이 나는지 몰랐다.또 자기는 뭘 잘못했는지…지금은 여이현을 사람이 아니라 짐승처럼 느껴질 뿐이다.아주 위험하다.어쩌면 처음부터 여이현을 건드린 것이 잘못일지도 모른다.여진그룹에 들어오지 말았어야 했고, 여이현의 비서가 되지 말았어야 했다. 결혼은 더더욱 하지 말았어야 했다.여이현은 온지유를 안고 회사를 떠났다.온지유는 울다가 지쳐서 여이현 품에서 잠들었다. 속눈썹에도 눈물이 맺혀있었다.여이현의 전화가 계속 울리고 있었다.벨 소리에 온지유는 미간을 찌푸렸다.여이현은 한 번 보고 전화를 받았는데, 노승아의 목소리가 들여왔다.“오빠, 언제 올 거예요?”“오늘은 안 돼.”“내일은요?”노승아는 아직 기대 중이다.오늘 여이현이 아마 법원에 이혼 수속을 밟으러 갔을 거로 생각했다.노승아는 여이현과 온지유가 오늘부로 드디어 끝나는 것을 알고, 바로 자기를 찾아갈 것으로 생각했다.그러나 밤이 되어도 기다린 사람이 오지 않았다.그래서 전화로 물어보려고
여이현은 변우석이라는 남자에 대해 매우 궁금했다.도대체 누구인데 온지유가 지금까지 잊지 못하는 건지.이 남자 정체가 뭐자? 온지유를 단념시키면, 자기랑 이혼할 생각도 하지 않을까?…온지유는 자기 두 손과 발이 모두 묶인 채 새장에 갇힌 악몽을 꿨다.주변에는 아무도 없다.그리고 아무도 그녀를 신경 쓰지 않는다.온지유는 깊은 어둠 속에서 아무리 발버둥 쳐도 벗어날 수 없었다.온지유는 악몽에서 깨어나 숨을 몰아쉬며 얼굴에 식은땀을 맺혔다.온지유는 일어나 한참을 진정해서야 주위를 둘러보기 시작했다. 둘러보니 낯선 곳이었다.방안에는 난방이 되어 있고, 온지유는 이불을 덮고 있으며, 안에는 치마를 입고 있었다.꿈속의 치마와 똑같았다.그래서 아주 당황했다.‘정말 갇힌 건 아니겠지?’온지유는 서둘러 침대에서 내려와 문밖으로 달려갔다.문을 열고 보는데, 이곳의 모든 것이 매우 낯설었다.왜 자고 일어났는데 여기에 있는 건지…어제 여이현과 함께 있었는데, 아주 무서웠다.여이현한테 압박감을 느꼈다. 온지유는 그런 느낌이 매우 싫었다.“왜 맨발로 나왔어?”나지막한 목소리가 들려왔다.소리를 듣자 온지유는 갑자기 굳어져서 무의식적으로 팔을 움츠러들고 뒤를 돌아보는데, 여이현이 서 있었다.이 순간 온지유는 정말 새장에 갇힌 느낌이 들었다.어제 꾼 악몽처럼 말이다.새장에 갇혀서 아무 데도 갈 수 없다.온지유는 무의식적으로 벽을 짚고 뒤로 물러났다. 그리고 무서운 듯이 여이현의 얼굴을 봤다.여이현도 그녀의 이상함을 알아챘다. 자기를 마치 귀신 보는 마냥 쳐다보았다.예전에는 이렇지 않았다.여이현은 천천히 걸어가서 눈썹을 찡그리며 온지유의 빨갛게 언 발을 보았다.“나올 때 신발 신어.”온지유는 여이현이 다가오는 것을 보고 호흡도 제대로 못 하고 굳어졌다.온지유는 다시 여이현의 품에 안겼다.그녀는 온몸이 뻣뻣해져서 여이현이 무엇을 하려는지 경계하며 쳐다보았다.여이현은 온지유를 안고 방으로 데려가 신발을 신겨주었다.온지유는 그제야 그의 목
온지유는 여이현이 무슨 생각인지 모르겠다.온지유도 가만히 있고 죽기만을 기다리고 싶지 않았다.새장 속의 새는 온지유랑 어울리지 않는다.온지유도 원하지 않는다.여이현은 온지유가 감정이 격해지고 자기를 매우 경계하는 것을 보았다.여이현은 얼굴을 찌푸리며 말했다.“온지유, 똑바로 알아둬. 너는 내 아내야. 무슨 애완동물이야. 나랑 같이 있는 것이 이상한 것도 없어.”예전에도 이렇게 함께 있었는데, 온지유가 이렇게 흥분하는 것을 본 적이 없었다.도대체 무엇 때문에 변한 거지?여이현도 알지 못했다.온지유는 이불을 꽉 쥐고 물었다.“법원은 언제 가요?”“그렇게 급해?”“네.”온지유가 말했다.“이미 약속한 날짜면 지키는 게 상식입니다.”여이현은 그윽한 눈빛으로 온지유를 뚫어지게 쳐다보는데, 온지유가 예전의 그 온지유가 아니었다.온지유는 지금 이 상황에서 벗어나려고만 했다.“그 변우석이라는 남자 때문이야?”“네. 아시잖아요. 제가 변우석 좋아한다는 거…”여이현은 얼굴이 어두워져 말투도 차가웠다.“온지유. 너 지금 나 속이는 거야?”온지유는 순식간에 경직되었다.“그 변우석이라는 남자는 한 번도 네 앞에 나타난 적이 없는데, 계속 나를 속인 거야?”온지유는 고개를 들었다.“저 조사했어요?”“아내가 다른 사람을 사랑하는데, 조사해야 하지 않겠어?”여이현의 목소리는 차가웠다.온지유는 입술을 오므리고 말하지 않았다.만약 여이현이 예전처럼 다정하게 온지유를 대해 주면 그 변우석이 바로 여이현이라고 알려 줬을 것이다.하지만 지금은 원하지 않는다.지금은 여이현 곁에서 떠나고 싶어 했고, 자유로운 삶을 원한다.사랑도 더는 하고 싶지 않는다.게다가 온지유가 임신까지 했는데, 여이현이 자기가 임신했다는 것을 알게 하고 싶지 않았다.온지유 혼자서도 아이를 키울 수 있다.배가 불룩해지기 전에 온지유는 반드시 이혼하고 홀로 생활해야 한다.“말해봐. 변우석이 누군데? 어떻게 된 거야?”여이현은 이상했다. 조사로 봐서는 온지유가 어렸을
여이현은 갑자기 말을 바꿨다.“말 안 해도 돼. 앞으로 이혼 소리도 그만하고. 그냥 여기서 지내!”온지유는 놀라서 감정이 격해졌다.“여이현 씨! 그게 무슨 말이에요!”“내 말 들어.”여이현은 온지유의 머리카락을 만지며 나지막한 목소리로 말했다.“아직 밥 안 먹었지. 배고프지? 내가 가사도우미보고 네가 제일 좋아하는 음식을 만들어 달라고 했어. 내려가서 밥 먹자.”온지유는 여이현이 이런 수법에 넘어가지 않을 줄은 몰랐다.온지유가 여이현에 대해 아는 게 너무 적다.여이현이 온지유 마음속에 다른 사람이 있다고 화가 나서 바로 이혼할 거로 생각했다.그들 모두 각자 사랑하는 사람이 있다.하지만 여이현은 이혼보다 온지유를 걷혀있으려고 했다.온지유는 마음이 조급했다. 그가 원하는 것은 다름이 아니라 이혼이다.“여이현 씨. 왜 저랑 이혼을 안 하는 거죠? 제가 뭘 어떻게 해야 이혼할 수 있는지 알려주세요.”여이현은 온지유의 손을 잡고 담담한 얼굴로 말했다.“말했잖아, 지금은 시간이 없어.”“언젠간 시간이 날 수 있잖아요.”온지유는 여이현의 뒤를 따라갔다.“아직 네 자리를 대신할 사람도 못 찾았잖아. 그럼 그전까지 내 옆에 있어야지. 이혼 얘기는 나중에 얘기하자.”“제 자리를 대신할 사람만 있으면 되는 거죠?”온지유가 계속 물었다.온지유는 단지 답을 원할 뿐이다.“그때 가서 얘기하자.”여이현은 온지유의 뒤통수를 가볍게 두드렸다.“일단 밥 먹자.”“약속 지키셨으면 좋겠어요!”온지유는 애매모호한 대답을 원하지 않는다.온지유는 이혼할 날짜와 퇴사할 날짜를 정확하게 알고 싶었다. 그래야 진정한 자유를 얻을 수 있다.여이현을 따라 아래층으로 내려갔다.뜻밖에 환경이 매우 좋다는 것을 알았다.밖에는 연못과 숲이 있고, 넓고 조용하며, 휴양지가 따로 없었다.가사도우미들이 반찬을 이미 다 만들어 놓았다.김이 모락모락 나면서 갓 해놓은 반찬들이다.여이현의 말대로 모두 온지유가 좋아하는 음식이다.온지유는 일부러 여이현을 멀리해서 앉았다
“아니에요. 누가 하든 다 똑같아요. 그냥 오늘 제가 배가 고파서 평소보다 잘 먹는 거예요.”온지유는 여이현이 자기한테 그렇게 신경 쓰는 것을 원치 않았다.온지유를 너무 신경 써줘도 좋지 않다.신경을 쓰는 만큼 그 대가를 치러야 한다.“피곤한데 쉬러 가도 될까요?”온지유가 물었다.“그래.”여이현이 대답했다.온지유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고 서둘러 위층으로 올라갔다.내일 일어나면 회사에 가고, 더 이상 이곳에 있을 필요가 없을지도 모른다.그리고 퇴근하면 드디어 집에 갈 수 있다.방에 돌아온 온지유는 긴장이 풀렸다. 그런데 온지유의 뒤를 따라 여이현도 따라 올랐다.방문이 열리고, 온지유는 뒷걸음을 쳤다.“무슨 일로 들어왔어요?”“여기가 안방인데 내가 여기 안 들어오면 어디 가?”여이현이 당연하게 말했다.“그럼, 제가 객실로 갈게요.”온지유가 가려고 하자 여이현이 온지유의 손을 붙잡았다.“왜 갑자기 멀리하려고 그래? 3년이나 같이 지냈는데, 우리가 언제 각방을 써봤어?”여이현은 자기와 온지유의 사이가 변함이 없다고 생각했다.이혼하지 않는 한 변한 것은 없을 것이다.하지만 온지유가 여이현과 각방을 쓰려고 하니 그건 안된다.온지유는 무의식적으로 여이현을 피하려 했다. 더 이상 부부처럼 살 수 없다고 느꼈다.같이 자는 것도 동상이몽이다.“얼른 자.”여이현이 담담하게 말했다.“어느 쪽에서 자고 싶어?”온지유는 입을 오므리고는 결국 같이 자기로 했다.“이쪽이요.”그쪽은 문이랑 가까워서 온지유가 행동하기 편했다.여이현도 받아들였다.“알았어.”여이현은 시계를 한 번 보고 아직 일러서 티브이를 켰다.“아직 시간도 일러서 티브이 좀 보자.”여이현은 온지유의 반대편에 가서 옆으로 누웠다.온지유는 여이현을 보고 움직이지 않았다.“뭐해? 와서 누워.”티브이에는 한창 청춘물이 방영하고 있는데, 여자들이 즐겨 보는 그런 드라마이다.온지유도 여자이고, 여이현은 그녀가 좋아할 거로 생각해서 다른 걸로 바꾸지 않고 같이 보려고 했다
온지유의 행동에 여이현은 뜻밖이었다.“왜?”온지유는 당황해서 손을 따라서 배를 쓰다듬었다. 정말 배가 좀 커졌나?아직 배가 커질 때가 아니다.온지유와 눈이 마주친 여이현은 의심스러운 눈빛으로 온지유를 바라보았다. 온지유는 그 눈빛에 더 긴장돼서 말했다.“오늘 너무 많이 먹어서 그런가 봐요. 피곤해요. 얼른 주무세요.”말을 마치고 온지유는 누워서 눈을 감고 여이현의 질문에 대답하고 싶지 않았다.여이현은 온지유를 바라보며 전보다 좀 통통한 몸매를 보는데, 확실히 예전의 마른 모습보다 훨씬 예뻐 보였다.하지만 온지유의 반응이 그를 의심에 빠뜨렸다.온지유는 예전과 달라졌다.하지만 그 달라진 게 너무나도 많았다.예를 들어, 전처럼 그렇게 성심성의껏 여이현을 대하지 않고, 이혼하고 싶고 회사까지 그만두려고 한다.한순간에 완전히 달라진 것 같았다.여이현도 아주 어색하다.여이현도 같이 누워서 온지유를 곱게 감쌌다.이렇게 안으면 온지유가 좀 더 편안하게 잘 수 있게 한다.아마 여이현의 삶에는 온지유가 정말 없어서는 안 될 것 같았다.…온지유는 일찍 일어났다.회사에 엄청나게 가고 싶어 했다.회사를 그만둘 생각만 하고 있었는데, 회사가 가장 편한 곳이 될 줄은 몰랐다.온지유는 여이현과 함께 차를 타고 회사로 갔다.다행히 여이현은 공과 사가 분명한 사람이라 근무시간에 사적인 일을 처리하거나 신경 쓰지 않는다.온지유는 사무실로 돌아와 어제 정리한 이력서를 챙기고 면접 회의에 참석했다.수많은 이력서 중 20개만 골랐다.“온 비서님. 정말 그만둘 거예요?”이윤정은 이 소식을 들었을 때 매우 놀랐다.“네.”온지유는 이윤정을 바라보며 말했다.“지금 면접하러 갈건데, 같이 가실래요?”온지유는 여진그룹에서 7년 동안 근무했다.회사에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이다.여이현의 신뢰를 얻었는데, 회사를 그만둔다고는 아무도 생각하지 못했을 거다.이윤정은 고민에 빠졌다.“온 비서님이 그만두면 전 어떡해요. 대표님한테 죽어요.”이윤정은 온지유처럼
온지유가 수첩을 봤다.수첩에 흰색 티셔츠 한 장 적어놨다.틀리지 않았다.이건 예전의 여이현이다. 가장 심플한 옷차림이다.그때 여이현은 아주 의기양양했다.온지유가 어떻게 수첩에 이걸 메모할 수 있겠는가?이 수첩도 오래된 것 같은데, 아마 미처 긋지 못했나 본다.“온 비서님?”이채현은 온지유가 잠시 정신 줄이 놓인 것을 알아채고 온지유를 불렀다.온지유는 정신을 차리고 가볍게 웃었다.“잘못 적었네요. 그으세요.”“네.”이채현이 대답한다.대표님이라는 사람이 옷차림이 그렇게 심플하다고는 생각도 안 했다.이채현은 이제 졸업했지만, 학습 능력은 매우 뛰어났다.온지유는 이채현이 여이현의 일을 잘 처리할 거로 생각했다.온지유가 여이현에게 적절한 사람을 찾아주면, 온지유를 풀어줄 수 있다.온지유는 자리에 앉아 멍하니 있었다.이채현은 그런 온지유를 보고 걱정한 듯 물었다.“온 비서님. 어디 불편하세요?”온지유는 다정하게 웃으며 대답했다.“아니에요. 일 보세요.”발소리가 멀리서부터 가까이 들려왔다.“온 비서님. 반 시간 뒤에 회의가 열릴 예정입니다. 준비하세요.”배진호가 전했다.“네.”온지유는 일어나서 회의 준비를 했다.온지유가 고개를 돌리자, 여이현이 눈앞에 서 있었다.그의 눈동자에는 아직도 차가운 기운이 가득했다.“대표님. 새로 온 비서입니다. 이름은 이채현입니다.”“대표님 안녕하세요. 배 비서님 안녕하세요.”이채현이 인사를 했다.여이현은 표정이 차가웠다. 아예 이채현을 쳐다보지도 않고, 차갑게 말했다.“온 비서님이 데려온 사람이니 잘 알려주세요. 제가 뭘 싫어하는지 제일 잘 알고 계시니, 실수하지 않도록 하세요!”말을 다 하고 여이현은 떠났다.온지유도 이게 자기를 경고하는 거라고 알고 있다.온지유는 이채현을 책임지고, 새로 온 사람이라고 실수하면 안 된다고 생각했다.눈치가 빠른 이채현은 여이현이 떠난 후 온지유에게 말했다.“온 비서님, 걱정 마세요. 제가 잘 배워서 곤란할 일 만들지 않을게요.”“그럼 더할
여이현이 입을 열었다.“그럼 여러분들이 말하는 것처럼, 제가 새로운 비서를 찾는 것도 여러분들한테 동의를 구해야 합니까?”“저희가 언제 그런 말을 했나요.”이채현은 여이현이 자기를 언급하자 침묵 속에서 입을 열었다.“안녕하십니까. 저는 새로 온 비서, 이채현이라고 합니다. 만나게 돼서 영광입니다.”그들의 시선은 모두 이채현을 향했다.다들 어디서 온 계집애가 말할 자격이 없다고 생각했다.이채현은 다들 자기를 쳐다보자, 자신감이 생겨서 계속 말을 이어갔다.“대표님이 가장 높은 위치에 계시고, 여러분은 대표님의 말씀을 들으셔야 한다고 봅니다. 대표님이 회의를 여는 것도 여러분을 존중하기 때문입니다. 결국 결정권은 대표님이 가지고 계십니다. 대표님이 이러시는 이유도 다 회사를 위한 것입니다. 그러니 대표님을 믿으시고, 대표님의 능력을 믿으십시오. 계속 반대의 말씀을 하시는 건 혹시 다른 마음을 먹고 계시는 건 아닌지요?”이채현의 말을 들은 여이현은 보이지 않는 웃음을 지었다.이채현의 말에 다들 압박감을 느꼈다.온지유는 자기도 회의에서 이렇게 말한 적이 없는데, 이채현이 대단하다고 느꼈다.이채현이 상황과 장소를 가리지 않고 여러 주주를 의심했다.그리고 그들을 긴장하게 했다.“무슨 말이야. 우리야 당연히 대표님을 존중하고 있지.”“대표님, 헛소리 듣지 마세요. 우린 그냥 걱정돼서 물어본 겁니다.”이채현의 말에 서둘러 해명했다.“앉으세요. 이채현 씨.”여이현은 이채현의 말에 그냥 담담하게 한마디만 했다.“네.”이채현은 말을 듣고 앉았다.온지유는 여이현을 바라보는데 의외였다. 여이현은 원래 버릇없고 규칙이 없는 사람을 싫어했었다.정말 주주 간에 문제가 생긴 걸까.여이현은 사람들이 맞장구치는 것을 보고, 그 화살이 자기에게 쏠릴까 봐 두려워했다.그러나 최현욱의 안색이 그다지 좋지 않았다. 여이현은 그런 최현욱을 보고 물었다.“최 대표님. 무슨 질문이 있으시면 말씀하세요!”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여이현과 맞장구치고 있는데, 혼자 반대
하지만 감동보다는 오히려 속이 울렁거렸다. 속이 울렁거리는 느낌에 문지원은 당장 얼굴이 일그러지며 화장실로 달려갔다. 지석훈도 뒤따라 들어오며 물었다.“속이 안 좋아?”“그렇진 않은 것 같아요. 요즘 세 끼 식사도 꽤 규칙적으로 하고 날것 이거나 차갑거나 매운 음식도 먹지 않았는데...”문지원은 배를 움켜쥐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러다 문득 한 가지 가능성이 떠올랐다.지석훈도 그녀와 같은 생각을 한 듯 방으로 가서 임신 테스트기를 가져왔다.문지원은 놀라며 물었다.“언제 산 거예요?”지석훈은 당연하다는 듯이 말했다.“만일의 사태에 대비해서.”문지원은 아무 말이 없었다.5분 후, 그녀는 복잡한 얼굴로 다시 나왔다. 한 손은 여전히 배 위에 올려져 있었고 눈에는 믿을 수 없다는 기색이 역력했다.정말 임신한 것이다!그녀와 지석훈이 결혼한 지 겨우 3개월밖에 안 되었는데 이렇게 빨리 임신하다니.지석훈은 오히려 태연해 보였다. 하지만 입가에 감출 수 없는 미소를 보면 그 역시 겉모습처럼 평온하지 않고 흥분을 억누르고 있는 게 분명했다.“정말 임신한 거예요?”문지원은 아직 믿기지 않는 듯 물었다. 왜냐하면, 그녀는 이번 달 초에 생리가 끝났기 때문이다.“아마 생리가 끝난 후 며칠 사이일 거야.”지석훈의 목소리는 문지원에게 그날의 기억을 떠올리게 했다. 당시의 기억을 떠올리니 그녀의 귀는 뜨겁게 달아올랐다. 결국, 그녀는 병원에 가보기로 했다. 임신 테스트기는 가끔 틀릴 수도 있으니 이런 일은 직접 검사를 받아보고 확인해야 마음을 놓을 수 있을 것이다.그리고 그녀는 손에 든 검사지를 보고 완전히 할 말을 잃었다.의사는 마침 지석훈과 알고 지내던 사람이었다.“축하합니다, 지 원장님. 부인께서 임신 2주 차입니다.”“감사합니다.”지석훈은 침착하게 그녀를 부축하며 밖으로 나갔다.병원 진료실을 막 나오자마자 지석훈은 문지원을 품에 안았다.“너무 좋아. 우리 아이가 생겼어.”문지원은 남자가 미세하게 떨리는 모습을 보며 멍하
물론 손에 있는 일을 무턱대고 모두 남에게 맡기는 것은 너무 과한 부담을 주는 일이다.문지원은 비서를 사무실로 불렀다.“올해 25살이죠?”비서는 잠시 멍한 표정을 지었다.그녀의 나이는 모두가 다 아는데 문지원 회장이 갑자기 이 얘기를 꺼낸다는 것은 혹시 소개팅을 시켜주려는 건가 싶은 생각이 들었다.비서는 고마웠지만 거절하며 말했다.“문 사장님, 저는 아직 젊어서 당장은 결혼할 생각이 없습니다.”“전 당신더러 결혼하라고 하는게 아니에요.”문지원은 펜으로 탁자를 두드리며 말했다.“그냥 평소에 잡다한 일들을 맡기고 싶어서요. 확인이 필요한 문서들은 평소에 굳이 내게 제출하지 않아도 돼요.”비서는 그 뜻을 이해했다.이건 곧 그녀에게 승진과 급여 인상을 주려는 것이다. 문지원이 그녀의 의견을 확인한 후 급여를 조금 올려줬고 비서에게 몇 명의 적합한 인재를 추가로 모집해서 예비 인력으로 두라고 지시했다.“평소에 내가 처리하지 못한 일들을 대신 처리해주고 만약 문제가 생기면 그때마다 보고하면 돼요.”비서는 한숨을 쉬며 안도의 표정을 지었다. 그녀 혼자서 이렇게 많은 일을 하지 않아도 되어 다행이었다.일정이 정리되자 문지원은 업무에서 상당 부분 해방되었다.예전에는 아침부터 저녁까지 바쁘게 일하다 보면 퇴근 시간이 되어도 일이 끝나지 않고 긴급 통지가 오면 또 회의를 위해 야근을 해야 했다.이제는 오후 4시 반쯤이면 일을 마치고 퇴근할 수 있게 된 것이다.비서가 몇 명을 더 찾아서 양성해 두었기에 업무가 적절히 분배되어 모두 바빠 죽을 정도가 아니라 적당히 딱 맞는 분량을 처리할 수 있었다.그 덕에 문지원은 지석훈과 함께 결혼 후의 삶을 더욱 즐길 수 있게 되었다.지석훈도 이에 매우 만족해했다.“널 주려고 선물을 챙겨왔어. 들어가서 한번 봐.”그가 집 문 앞에 다가서더니 걸음을 멈췄다.문지원은 열쇠로 문을 열고 들어가 보니 안은 어두컴컴했다.“뭐 숨겨놨어요? 아직 불도 켜지 않았네요, 수상하게.”탁! 하며 불이 켜지자 거실의 모든
문지원은 이 주제가 다소 위험하다고 느꼈다. 비록 그녀의 아버지가 그녀에게 물어본 적은 없지만 그렇다고 자신과 배석훈이 결혼한 후 어떻게 지내고 있는지에 대해 말할 필요도 없다고 생각했다. 돼지고기를 먹어보지 않았다고 해도 돼지가 뛰어다니 것을 본 적은 있을 것이다. 문지원은 그러면서도 반쯤 빚어놓은 만두를 내려놓으며 말했다. “저, 화장실 좀 다녀올게요.”이에 지석훈의 어머니가 그녀의 손을 잡았다. “너희들도 이제 나이가 들었으니 아이를 가져야지. 평소에 좀 더 노력해야 한단다.”문지원은 잔소리를 듣고 나서 나오니 기운이 다 빠져있었다.시어머니는 문지원에게 정말 잘해주었다. 거의 마음을 쏟아붓는 수준이었다. 비록 문지원의 집안 사정이 좋은 것을 알면서도 혼수 때 오랜 세월 모은 돈으로 집 한 채를 사서 선물해 주었다. 사실 지석훈도 자기 집이 있었지만, 시어머니는 선물하고 싶다고 하셨다. “너희 집도 너희의 것이지만, 이건 내가 어른으로서 선물하는 거란다.”게다가 그 집에는 문지원의 이름도 함께 올려져 있었다.그래서 시어머니의 출산 독촉에도 문지원은 어쩔 수 없이 버텨야만 했다. 다행히도 시어머니는 어린 이들에게 엄격하게 구는 편은 아니었다. 만두를 빚을 때 한 번 그런 말을 했고 또 떠나면서도 지석훈을 불러 몇 마디 잔소리했다. 문지원은 그 모자간의 대화를 듣지 못했다.돌아가는 길에 문지원은 약간 궁금해져 지석훈에게 물었다.“나갈 때 어머니께서 뭐라고 하셨어요?”“정말 알고 싶어?”“네.”그러자 지석훈은 문지원의 머리를 숙이게 한 후 그녀의 흩어진 머리칼을 살며시 넘겨주며 귀 옆에서 낮게 속삭였다.“우리 아이를 빨리 낳으라고 하셨어.”남자의 낮고 진한 목소리는 얼굴을 붉히고 심장을 뛰게 만드는 약보다도 중독성이 강해 문지원의 귀가 금세 붉어지고 말았다.저녁이 되자 지석훈은 몸소 행동으로 보여주기 시작했다. 한 손으로 문지원의 머리를 받치고 이마를 맞대며 낮은 숨소리를 내쉬었다. 문지원은 마치 파도 속에 잠긴 것
그 눈빛 속에서 조용히 터져 나오는 그 소유욕. 마치 옛 시대의 군벌과 그의 부인 같았다. 그리고 사진작가는 우연히 그 장면을 목격한 운 없는 사람이 되어 몰래 촬영을 하고 있었다. 사진작가는 자신의 상상에 자극받아 목소리가 떨렸다.“지석훈 씨, 고개를 들어 카메라를 봐주세요.”지석훈은 날카로운 눈빛으로 사진작가를 향해 시선을 돌렸다. 사진작가는 재빨리 셔터를 눌렀다. 그 후에도 그들은 여러 세트의 사진을 찍었고 찍은 사진들은 모두 문지원에게 하나하나 보여주었다. 문지원은 모든 사진에 다 만족했지만 그중에서도 가장 마음에 든 것은 민국 시대 주제의 사진이었다.“대략 며칠 안에 나오나요?” 그녀가 물었다.사진작가는 답했다.“빠르면 이삼 일정도 걸릴 겁니다. 그때 완성된 사진들을 택배로 보내드리겠습니다. 그런데 제가 개인적인 부탁이 하나 있는데 혹시 두 분께서 응해주실 수 있을지 모르겠네요.”“바로 아까 찍은 사진 중 몇 장이 제가 개인적으로 아주 마음에 들어서 사진관 벽에 걸어두고 싶습니다.”문지원은 사진관에 들어올 때 봤던 사진 벽이 생각났다.“그 벽에 걸어두시겠다는 건가요?”“네.”사진작가는 그 벽은 사진관의 특별한 기념 및 홍보 방법의 하나라고 설명했다. 잘 나온 사진들은 사진 주인에게 동의를 구한 뒤 동의하면 벽에 전시한다고 한다..문지원은 옆에 있던 지석훈을 바라봤다. “저는 괜찮은데, 당신은요?” 지석훈도 아무 문제 없다고 했다.“마음대로 하도록 해.”며칠 후 문지원은 사진작가가 보내온 사진을 받아 소중히 간직했다. 하지만 그녀는 몰랐다. 그 사진관 벽에 전시된 사진들이 곧 사람들의 눈에 띄어 사진이 찍혀 인터넷에 올라간 것이다.잘생긴 남성과 아름다운 여인의 조합과 최상의 촬영 기술 덕분에 순식간에 인터넷에서 화제가 되었다.네티즌들은 저마다 아아 소리를 냈고 많은 사람이 댓글을 달았다. “마치 옛 시대의 군벌 부인 같다.”“완전 대박이다.”“3분 안에 그들의 모든 정보를 알고 싶다.” 하지만 이 모
문지원은 약간 마음이 움직였다.하지만 웨딩 촬영은 이미 여러 번 한 적이 있었다. 그때 섬에서 몇 세트 찍었고 그 후 결혼식 현장에서 또 몇 세트 찍어 셀 수 없을 정도였다.게다가 이번 촬영은 개인 예약으로 진행되었는데 이 사진관이 꽤 유명하다고 들었다.물론 사진관 이름에 걸맞게 예약은 거의 하늘의 별 따기라고 한다..이 정도면 지석훈이 얼마나 큰 노력을 들여 예약을 잡았는지 알 수 있었다. 단순히 웨딩사진만 찍는 데 사용하기에는 너무 아까웠다.하지만 문지원 역시 이런 곳에 한 번도 와본 적이 없었기에 무엇을 찍어야 할지 몰랐다.“한번 보세요. 이건 저희가 예전부터 선보였던 스타일들이에요.”사진작가는 친절하게 앨범 한 권을 꺼내 보였다.앨범에는 이전 고객들이 이곳에서 찍은 사진들이 담겨 있었는데 정말 다양한 스타일이 있었고 모두 아름다웠다.이 사진관이 만들어낸 결과물은 정말 최고였다.문지원은 그중에서도 민국 시대 주제의 사진이 눈에 들어왔다.“이렇게 찍을 수 있을까요?”사진작가는 그녀가 가리키는 사진을 한 번 살펴보고는 고개를 끄덕였다.“네, 됩니다. 먼저 메이크업하고 옷을 갈아입으세요. 직원들이 촬영 스튜디오를 설치할게요.”옷은 사진관에서 준비한 것으로 하고 지석훈의 요구에 따라 전부 새 옷이었다.사실 문지원은 소품용 옷을 입는 것에 크게 개의치 않았다. 어쨌든 한 번 입었다가 나중에 벗으면 되는 거고 몸에 달라붙지 않아서 안에 옷을 받쳐 입을 수도 있었다.하지만 지석훈은 직업병이 발동했고 그런 건 용납할 수 없었다.결국, 문지원은 어쩔 수 없이 그의 의견을 따를 수밖에 없었다.급히 새 옷을 가져와야 했기 때문에 원래 걸리던 시간에서 15분이 더 추가되었고 메이크업 등 기타 과정도 진행해야 했다.문지원이 모든 준비를 마치고 나왔을 때는 이미 2시간이 지난 후였다.그러나 결과는 확실했다.곧은 치파오가 그녀의 아름다운 몸매를 감쌌고 문지원은 옷자락을 살짝 들어 올렸다. 마치 지난 옛 시대의 그림 속에서 걸어 나온 듯한
결혼 후 문지원은 휴가를 내서 신혼여행을 갈까 고민해 본 적이 있었다.하지만 요즘 지석훈이 거의 계속 병원에 머무르며 집에 돌아오지 않는 것을 떠올리며 본의 아니게 한숨이 나왔다. 비록 이미 익숙해졌긴 했지만 실망을 감추기는 어려웠다.비서도 그녀에게 물었다.“문 사장님, 신혼여행 가고 싶지 않으세요? 제 동창 중 한 명이 며칠 전에 결혼했는데 요즘 여기저기서 신혼여행 정보를 알아보며 준비 중이에요. 신혼여행이 없는 결혼은 반은 실패한 거랑 마찬가지라고 하더라고요.”그 말을 들은 문지원은 손에 들고 있던 서류를 제대로 볼 생각조차 들지 않았고 비서는 무언가를 눈치챈 듯했다.“그렇지 않으면... 문 사장님, 지 의사님이 일하시는 곳에 한 번 가보시는 건 어떠세요?”그녀가 머뭇거리며 물었다. 어쨌든 문지원은 요즘 정신이 산만하여 업무에 집중할 기색도 없었다.문지원은 비서의 시선 속에서 정신을 차렸다. 요 며칠 동안 집에 돌아와도 지석훈을 보지 못해 한참 혼란스러워했던 자신을 깨달으며 약간 부끄러워졌다.“그건 나중에 얘기하고 기획서 한 부 복사해 가져다주세요.”점심 무렵, 문지원은 막 일을 끝내고 밥 먹으러 가려던 찰나, 핸드폰에 지석훈의 메시지가 떴다. 같이 밥을 먹자는 메시지에 문지원은 미소를 지었다. 멀리서 이 장면을 본 직원들은 서로 눈빛을 교환하며 웃음을 터뜨렸다.문지원은 재빨리 열쇠를 챙기고 회사를 떠났다. 지석훈은 그녀를 새로 오픈한 가게로 데려갔다.식사를 마친 후 문지원은 지석훈을 바라보며 머뭇거리다가 물었다.“병원에 다시 돌아갈 거예요?”“응?”지석훈은 눈썹을 치켜들며 고의적으로 물었다. “내가 돌아가길 바라는 거야?”그 말을 들은 문지원은 순간 당황했다. 사실 그녀는 지석훈이 자신과 좀 더 많은 시간을 함께 보내주길 바랐는데 이제 막 결혼한 신혼부부임에도 불구하고 각자 업무에만 매달려 밤에야 겨우 함께 잠자리에 들 수 있는 상황이었다.하지만 수줍음이 많은 그녀는 그 마음을 솔직하게 털어놓지 못했다.지석훈은
예전에는 이런 일이 있을 때면 지석훈은 항상 선을 지켰지만 오늘 밤엔 조금 달랐다. 그는 그녀를 침실에서 욕실로 다시 침대로 옮겨가며 몸 곳곳에 뜨거운 입맞춤을 했다.다음 날 아침에 일어났을 때도 문지원은 여전히 몸속 깊이 스며든 감각이 남아 있는 것만 같았다.그리고 그녀는 예상대로 휴가를 냈고 이틀이 지나서야 회사에 다시 나왔다.회사 사람들은 이미 예상이라도 한 듯 문지원이 출근하자 하나같이 말했다.“문 사장님, 결혼 축하드려요.’문지원은 무려 사흘이나 결근했지만 다들 그 사흘 동안 무얼 했는지는 굳이 말 안 해도 짐작이 갔다.분명 부부 생활이 아주 좋았겠지, 아니었으면 일까지 내팽개치고 안 나왔을 리가 없다.문지원은 직원들의 부담스러운 시선에 얼굴을 들 수도 없어 그저 아무렇지 않은 척할 수밖에 없었다.그래도 지난번에 당한 적이 있었던 터라 문지원은 이제 출근 전에 거울 앞에서 꼼꼼히 점검했다.몸에 키스 자국이 드러나지 않는 걸 확인하고 나서야 안심하고 회사를 향했다.그렇지 않았다면 그 흔적들을 들켰을 경우 정말 얼굴을 들고 다닐 수 없었을지도 모른다.문지원이 예상치 못했던 건 며칠 지나지 않아 결혼을 축하하는 선물이 회사로 배달됐다는 것이다.문지원은 처음에 여울이 보낸 거라고 생각했지만, 물어보니 아니었다.택배 상자의 외관을 살펴봐도 발신자가 적혀 있지 않아 더욱 수상했다.“이거 가져온 사람이 누가 보낸 건지 말했어요?”문지원이 로비 직원에게 물었다.로비 직원은 고개를 저었다. “아뇨, 그냥 두고 바로 가버렸어요.”문지원은 뭔가 직감적으로 찜찜한 마음이 들어 그 택배를 챙겼고 사무실에 들어와서야 상자를 열었다.그 안에는 브로치 하나와 축하 카드 한 장이 들어 있었다.문지원은 축하 카드를 집어 들어보니 카드 위에는 이렇게 적혀 있었다.“결혼 축하해요.”글씨체는 아주 정갈하고 예뻐 여성의 필체 같았다.그녀는 곧바로 짐작이 갔다.문지원은 그 브로치를 지석훈에게 보여주자 그는 눈빛이 살짝 흔들렸지만 아무 말 없이 브로치
여울은 아직 최주하를 받아들이지 않았지만 최주하도 쉽게 포기할 생각이 없었다.문지원이 알기로 여울은 마음이 여린 사람이었고 결국 받아들이게 되는 건 시간문제일지도 몰랐다.그녀는 가볍게 한숨을 내쉬었다. 친구 일에 깊이 관여하는 것도 괜히 어색하고 조심스러웠다.게다가 얼마 전 지석훈이 슬쩍 귀띔하듯 말했다.“며칠 전에 여울 씨가 병원에 재검진받으러 왔는데 주하가 데리고 왔었어.”그 말을 듣고 문지원은 혀를 끌끌 찼다.평소에 말도 없고 조용하던 여울이 은근히 비밀 많은 타입이었던 모양이었다.그렇게 시간은 순식간에 흘러 어느덧 다음 달 중순이 되었다.지석훈은 아예 와인 농장을 통째로 빌려 며칠에 걸쳐 그곳을 자신이 원하는 모습으로 꾸며놓았다.결혼식을 올릴 장소는 바로 거기였다.그 와인 농장은 웬만한 호텔 못지않게 컸고 내부에는 수년간 숙성된 고급 와인들이 그대로 보관되어 있었고 결혼식 날 손님들이 오면 바로 꺼내어 대접할 수 있을 정도였다.그들은 결혼 소식을 널리 알리진 않았다.이건 문지원이 원한 방식이었다.그녀는 온 세상에 떠들썩하게 알리는 그런 결혼식보다는 가까운 가족과 친구들만 초대해서 조용히 축하받는 걸 선호했다.행복은 굳이 남들에게 증명하지 않아도 되는 것이니까.그런데 결혼식이 한창일 때 지석훈이 무대 위에서 다시 한번 프러포즈했다.해변에서 했던 프러포즈보다 훨씬 더 진지하고 진중한 분위기였다.“하고 싶은 말이 정말 많지만 말로 다 표현할 수 없어서... 예전엔 내가 사랑인 줄도 모르고 놓쳐버렸던 순간이 많아. 이제는 더 이상 놓치고 싶지 않아. 이렇게 내 곁에 있어 줘서 고마워. 앞으로 남은 인생... 너랑 함께할 수 있어서 정말 행복해.”그의 말이 끝나자 하객들 사이에서 박수 소리가 터져 나왔다.문지원은 무대 위에서 입을 손으로 가리고 눈물을 흘렸다.식이 끝날 무렵, 문지원은 멀리서 검은색 카이엔 SUV가 그녀의 친구 여울을 데리러 오는 걸 보았다.차창이 천천히 내려가자 예상대로 그 안에 앉아 있는 사람은 최주하였다
문지원은 문득 자신이 계획에 철저히 걸려들었다는 생각에 의심의 눈길을 보냈다.“처음부터 계획한 거죠?”“응.”지석훈은 미소 지으며 그녀의 입술에 가볍게 입을 맞췄다. 사실, 그는 그녀를 향한 마음을 오래전부터 숨겨온 것이었다....해변에서의 프러포즈 이후 문지원에게 찾아온 가장 큰 변화는 손가락에 반짝이는 반지가 생겼다는 점이었다.이 반지는 지석훈이 특별히 맞춤 제작한 것이었다. 그녀는 우연히 그의 휴대폰을 보다가 두 달 전에 이미 주문이 들어가 있었다는 구매 기록을 발견하고는 깜짝 놀랐다. 그렇게 오래전부터 준비해 왔다니 감동하지 않을 수 없었다.두 사람의 결혼 소식을 접한 지석훈의 부모님은 곧바로 혼인신고부터 하라고 재촉하기 시작했다. 어느 날 문지원은 우연히 지석훈의 어머니가 그를 붙잡고 타이르는 말을 듣게 되었다.“네 아빠랑 난 애초에 너한테 기대도 안 했어. 하루가 멀다고 병원에서 살다시피 하니 너 같은 애한테 누가 시집오겠나 싶었거든. 그런데 다행히 네가 능력 있어서 지원이 같은 좋은 아이를 데려왔으니 얼른 확실히 붙잡아야지. 빨리 혼인신고부터 해. 나중에 그 아이가 너 버리고 떠나버리면 그땐 어디 가서 울어도 소용없어!”문지원은 그 대화에 웃어야 할지 울어야 할지 몰랐다.그런데 신기한 건 지석훈이 워낙 점잖고 진지한 사람이어서 집안 분위기도 매우 조용할 줄 알았는데 실제로는 그렇지 않다는 점이었다. 아버지는 이미 퇴직해 한가로운 성격으로 매일 독서나 산책을 즐기는 조용한 스타일이었다. 어머니는 젊었을 때는 커리어 우먼이었고 호탕한 성격으로 남편에게 엄격하면서도 친화력이 강한 사람이었다.두 분 모두 차분한 듯하면서도 내면에 장난기를 숨기고 있는 아들을 낳을 것 같진 않았는데 이게 바로 유전자의 신비인가 싶었다.하지만 어머니가 그렇게 그녀를 좋아해 주는 모습에 문지원도 안심했다. 확실히 시부모님의 사랑을 받고 있다는 증거였다.한편 문지원의 아버지는 지석훈과 따로 대화를 나눈 이후부터 정확히 무슨 얘기를 했는지는 몰라도 그에 대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