온지유가 일어났을 때 방에는 아무도 없었다. 눈가는 여전히 촉촉했다.어젯밤 싸웠던 일이 떠오른 온지유는 곁으로 손을 뻗었다. 누군가 누웠던 흔적은 없었다. 아무래도 여이현은 어제 나간 대로 돌아오지 않은 모양이었다.그녀는 몸을 일으켜 옷장을 확인했다. 여이현의 옷이 그대로 있는 걸 봐서 완전히 포기한 건 아닌 모양이었다. 기분은 더욱 암울해졌다.욕실에서 샤워하고 나온 그녀는 바로 출근했다. 방송국에서 채미소는 큰 소리로 외쳐댔다.“내 앞길 막지 마요! 여기 나보다 더 중요한 일을 하는 사람이 있어요?”오늘의 그녀는 폭탄을 집어삼킨 것처럼 불을 뿜어냈다.“미소 씨, 왜 그래요? 안 좋은 일이 있다고 해서 남한테 화풀이 아는 건 아니죠.”동료가 기분 나쁜 듯 말했다.그러나 채미소는 언제나 이랬다. 특히 기분 나쁠 때는 눈에 뵈는 것이 없었다.“안 좋은 일? 하, 내 앞길을 막아놓고 무슨 말이 이렇게 길어요. 난 중요한 인터뷰를 하러 가는 길이에요. 당신 따위가 방해할 스케일이 아니라고요.”“미소 씨가 여이현 대표님 인터뷰 못 따낸 거, 우리가 모를 줄 알아요? 따냈으면 여기서 화풀이하지도 않았겠죠. 동네방네 소문내고 다니기 바빴을 테니까.”채미소는 미간을 팍 찌푸리더니 언성을 더욱 높이며 말했다.“확정 안 됐을 뿐이지 못 따낸 거 아니에요! 앞으로 기회가 있다고요! 당신은 뭐 할 수 있을 줄 알아요? 다들 못하는 일이니까 내가 하는 거예요! 실력도 없으면서 입만 살았네요!”동료도 화가 나 보였지만 아무 말도 못 했다. 채미소의 말마따나 그녀는 방송국의 기둥이었기 때문이다.이때 온지유가 들어왔다. 채미소와 싸우고 있는 동료 빼고는 아무도 말하지 않았다. 다들 채미소가 무서운 눈치였다.“왜 이렇게 시끄러워요? 다들 일 안 해요?”안정희가 차가운 표정으로 말했다. 채미소는 곧바로 달려가서 고자질하기 시작했다.“편집장님, 저 하루 종일 고생해서 여이현 대표님을 만나고 돌아온 거 아시죠. 근데 인터뷰를 하루 만에 못 따냈다고 비웃는 사람이 있
채미소는 여전히 화가 나 있었다. 하지만 이번 인터뷰에서 온지유의 도움이 꼭 필요했다. 그녀는 또 여이현을 잘 설득해서 지난번 잃어버린 체면을 되찾아야 했다.안정희가 떠난 다음 그녀는 온지유에게 다가가 한결 부드러운 어조로 말을 건넸다.“지유 씨, 어제 말했던 일 다시 생각해 봤어요?”“답은 어제 이미 드렸잖아요.”온지유는 그녀를 쳐다보지도 않았다. 그런데도 채미소는 속으로만 화를 삭였다.온지유는 만만한 동료들과 달랐다. 그러나 이번 일이 끝나고 나면 반드시 대가를 치르게 할 생각이었다.“이렇게 하는 건 어때요? 이번 일은 우리가 같이 한 걸로 해요. 언제까지 블로그에 글만 쓰고 있을 거예요. 지유 씨도 높은 자리에 가고 싶죠? 나 채미소예요. 나만 잘 따라오면 1년 안에 내 위치에 오를 수 있게 해줄게요.”이 말을 듣고 온지유는 가볍게 웃었다. 직장은 냉혹하다. 누군가 무책임하개 한 말까지 믿으면 안 되는 법이다.그녀는 채미소를 올려다보며 말했다.“미소 씨가 원하는 대로 양보해 줬으면 되는 거 아니에요? 제가 왜 또 따라가야 하죠?”채미소는 인내심이 바닥난 듯 당당하게 말했다.“그러는 온지유 씨는 뭐가 그렇게 잘났어요? 잊었나 본데, 이번 일은 내가 따온 거예요!”그녀는 ‘양보’라는 말을 용납할 수 없었다. 뭐든 직접 손에 넣어야만 실력을 입증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온지유는 서류를 정리하며 말했다.“채미소 씨가 뭐라고 하든 상관없어요. 아무튼 저는 이 인터뷰 하지 않을 거예요. 저는 당신 뒤만 졸졸 따라다닐 정도로 유치하지 않거든요. 적당히 얼렁뚱땅 넘어갈 생각은 말아요. 그리고 채미소 씨 뭐든 혼자 잘 해내는 능력자라고 하지 않았나요? 그러면 이번에도 스스로 실력을 입증해 봐요.”온지유는 다시 한번 채미소의 요청을 거절했다. 이쯤 되니 채미소도 그녀가 자신과 대립하려고 한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녀는 도와줄 생각이 전혀 없었다.“아영 씨, 잠깐 저 좀 봐요.”온지유는 옆에서 타자하던 공아영을 향해 말했다.“네.”공아영은 하던
온지유는 회사 차를 타고 밖으로 나갔다. 공아영은 신난 기색으로 말했다.“지유 씨 너무 대단한 것 같아요. 우리 부서에 편집장님을 제외하고는 다 미소 씨 무서워하거든요.”“제가 뭘 했다고요. 저는 그냥 사실을 말한 거예요. 미소 씨만 특별한 거 아니에요.”“하지만 미소 씨가 화난 것 같았어요. 이제 지유 씨를 괴롭히려고 할 텐데요.”공아영은 채미소의 성격을 잘 알았다. 그녀는 모두가 자신을 좋아할 것을 요구하지는 않지만, 한 번 찍은 사람은 끝까지 물고 놔주지 않았다.온지유가 다시 입을 열었다.“영원히 높은 자리에 있을 수 있는 사람은 없어요. 미소 씨도 지금은 잘 나가지만, 인간관계가 엉망이면 결국 몰락하게 되어 있어요. 때가 되면 모두가 복수하려고만 할 거예요.”채미소는 이익지상주의자다. 이익만 따라다니는 그녀는 친구 한 명 없었다. 이용 가치를 잃는 순간 전부 등 돌릴 사람이었다.“지금 보육원에 가는 거예요?”“네, 편집장님이 가보라고 하셨어요. 소재 좀 찾아서 공익 광고 하는 셈으로 기사를 쓰면 된다고 했어요. 근데 이번 일 꽤 중요한 것 같아요. TV 프로그램에 실릴 수도 있을 것 같거든요.”“그건 어디서 알게 된 소식이에요?”“편집장님이랑 얘기하다가 추측한 거예요. 이틀 뒤면 알 수 있을걸요.”온지유는 안정희의 말에 따라 추측했을 뿐이다. 물론 그녀가 틀렸을 수도 있다.어찌 됐든 그녀는 이번 일이 단순하지 않을 것 같았다. 보육원을 주제로 한 사건이 TV에 나온다면 감동적인 요소를 더해서 엄청난 효과를 일으킬 수 있었기 때문이다.요즘 TV 프로그램은 경쟁이 심했다. 재미를 추구하는 동시에 사회적인 울림을 주는 것도 필요했다.이건 온지유의 생각이다. 방송국의 생각은 다를 수도 있다.20분 후, 두 사람은 보육원에 도착했다. 온지유는 차에서 내리기도 전에 벌써 울음소리를 들었다.녹슨 대문은 반쯤 열려 있었다. 마치 강도라도 들었던 것처럼 말이다. 공아영은 놀란 표정으로 말했다.“여기 너무 허름해 보이는데요. 20년 전으로
원장은 고개를 끄덕이며 눈물을 글썽였다.“지유 씨가 다른 사람의 것을 건드렸으니, 그들도 똑같이 돌려주겠다고 하더군요. 지유 씨더러 다시는 이곳에 오지 말라고 했어요. 안 그러면 가만두지 않겠대요. 저도 지유 씨한테 이러고 싶지는 않지만, 아이들을 위해 어쩔 수 없어요.”“너무해요!”공아영이 격분하며 말했다.“아무리 그래도 아이들을 건드리면 안 되죠! 그것들은 인간도 아니에요!”“원장님, 죄송해요. 괜히 저 때문에...”온지유도 상대가 이런 짓을 할 줄은 몰랐다. 다른 곳도 아닌 보육원을 건드릴 줄은 말이다.“아니에요, 저는 항상 고맙게 생각하고 있어요. 지유 씨 덕분에 아이들이 이렇게 빨리 고기를 먹을 수 있었잖아요.”원장은 여전히 감사의 마음을 전했다.“하지만 지유 씨가 건드려서는 안 되는 사람을 건드린 것 같아요. 그들은 지유 씨를 노리고 온 거예요. 방송국에서 일한다면서 어쩌다 그런 일에 연루된 거예요?”“분명 채미소 씨일 거예요! 지유 씨가 도와주지 않는다고 이런 수를 써서 협박하는 거잖아요!”온지유는 공아영를 바라보았다. 공아영의 얼굴은 분노로 가득 차 있었다.“채미소 씨는 더러운 수작을 쓰고 있어요. 지유 씨가 먼저 도와줘야만 보육원 프로젝트를 계속할 수 있을 거예요. 채미소 씨의 일이 잘 안 되면 지유 씨의 일도 마찬가지예요. 채미소 씨는 이런 사람이었어요!”온지유와 갈등이 있는 사람이라면 채미소일 가능성이 높았다. 채미소는 그녀가 자신을 찾아와서 무릎 꿇고 빌기를 바라고 있을지도 몰랐다.원장이 경찰에 신고하지 않는 것도 이해할 수 있었다. 보육원에는 50명 남짓의 아이가 있었기 때문이다. 문제는 근원에서 해결해야 했다.온지유는 차분하게 말했다.“알겠어요, 원장님. 폐를 끼쳐서 죄송해요. 이 문제 제가 직접 해결할게요. 다음 번에 왔을 때는 아이들이 잘 지내는 모습을 볼 수 있기를 바라요.”“감사합니다, 지유 씨. 이해해 줘서 정말 감사해요.”원장은 깊이 감사했다.“이모!”아이들은 온지유를 부르며 아쉬움 가득한
채미소는 온지유를 위아래로 훑어봤다. 그러고는 피식 웃으며 말했다.“지금 뭐라고 했어요? 하, 난 정말 지유 씨를 모르겠어요. 내가 그런 말에 넘어갈 정도로 멍청해 보였어요?”그녀의 눈빛에는 무시로 가득했다. 온지유의 말을 전혀 안 믿는 눈치였다.“만약 지유 씨한테 그런 남편이 있었으면 날 찾아오지 않았을 거예요. 지금 자그마한 문제 하나 해결하지 못해서 나한테 빌고 있는 거잖아요. 허풍을 쳐도 믿을 만한 거로 쳐야죠. 사람을 무시해도 정도가 있지.”온지유는 속으로 자신이 틀린 말을 하지 않았다고 생각했다. 비록 곧 이혼할 사이이기는 하지만, 지금은 서류상 부부가 맞았다. 채미소에게 밝힌다고 해서 안 될 건 없었다.이게 바로 온지유가 생각한 방법이라는 것이었다. 하지만 채미소는 믿어주지 않았다.“제가 미소 씨를 도와주면 정말 보육원 일에 간섭하지 않을 거죠?”잠시 생각에 잠겼던 온지유는 결국 한발 물러나기로 했다. 이번 한 번 채미소의 말을 따르면 앞으로는 그녀에게 달렸다.채미소는 피식 웃으며 말했다.“왜요? 지유 씨 연기하는 거 재밌는데 좀 더 해봐요.”온지유는 얼마든지 여이현을 불러낼 수 있었다. 채미소의 삐딱한 태도도 일단은 무시하기로 했다. 무시해서 얻는 것이 더 많았기 때문이다.그들의 거래가 성사되면 서로에게 다 좋은 일이었다. 보육원 일도 안심하고 할 수 있었다. 안 된다고 해도 그녀의 책임은 없었다.온지유는 차라리 채미소를 도와주는 것이 더 좋은 방법이라고 생각했다.“제가 대신 자리를 마련할게요.”“여진에서 그렇게 오래 일했으니, 대표님을 꼬드겨낼 핑곗거리 정도는 있겠죠? 이렇게 작은 일도 못 하면 방송국에서 일할 생각 말아요. 일한다고 해도 청소부가 될 거예요.”채미소는 승자의 자태로 말했다. 온지유를 바라보는 눈빛에는 경멸이 가득했다.“나는 지유 씨한테 인생을 가르치는 거예요. 듣기는 안 좋지만 전부 사실이라고요.”온지유는 그녀가 하는 말에 전혀 신경 쓰지 않고 덤덤하게 말했다.“필요 없어요.”“아무튼 좋은 소
“그래도 지유 씨한테 너무 불공평해요. 지금으로서 다른 방법이 있는 건 아니지만요. 근데 그렇게 대단한 사람이 왜 대표님한테 연락할 방법은 찾지 않고 지유 씨만 괴롭힌대요?”“신입사원인 저한테 겁주고 싶었겠죠. 채미소 씨가 부서에서의 위치도 알릴 겸요.”공아영은 궁금한 듯 물었다.“그것보다 지유 씨가 대표님 아내라는 말 사실이에요?”그녀는 온지유의 말을 약간 믿는 눈치였다. 온지유는 잠깐 멈칫하다가 핸드폰을 끄면서 대답했다.“지금은 맞지만, 곧 아니게 될 거예요. 우리도 이만 일어날까요?”공아영이 정신 차리지 못한 와중에 온지유는 가방을 들고 몸을 일으켰다. 그녀는 아직 완벽한 방법을 생각해야 했다.반대로 공아영은 어리둥절해 있었다. 온지유의 말이 약간 이해가 안 됐던 것이다. 하지만 분위기상 계속 물어보면 안 될 것 같았다.두 사람은 함께 사무실에 돌아갔다. 채미소와 아이들은 벌써 김칫국을 마시기 시작했다.“정말 대표님이랑 약속 잡았어요? 역시 우리 미소 씨가 최고예요! 못 하는 게 없어요!”“언제 만나기로 했어요? 저는 뭘 준비하면 될까요? 저 재벌은 한 번도 만난 적 없어요. 따라가서 미소 씨 곁에 서 있으면 안 돼요?”채미소는 오만하게 콧방귀를 뀌었다.“두 사람도 데려갈게요. 이제 세상 물정 구경할 때도 됐잖아요. 내가 어떻게 말하는지 보고 배워요.”“그럼요! 미소 씨는 우리 롤모델이에요!”채미소는 대놓고 자랑했다. 자신의 능력을 과시하기 위해서 말이다.“여이현 대표님은 다른 사람이랑 달라요. 여진그룹 실세의 인터뷰를 딴 사람이 몇이나 되겠어요. 대표님의 눈에 들 수 있다면 반평생 걱정 없이 보낼 거예요.”“역시 미소 씨예요!”채미소가 인터뷰를 따낸 것처럼 말하는 것을 듣고 다른 동료들도 다가왔다.“미소 씨 대단하네요. 역시 미소 씨만 한 사람 없어요. 해결 못 하는 일이 없잖아요. 이번 일 잘되면 우리 회식이라도 해요. 축하는 제대로 해야죠.”“그럼요. 그 회식 제가 쏠게요. 저를 도와준 사람은 절대 잊지 않을 거예요
[점심에 시간 있어요?]온지유는 아래에 레스토랑 주소까지 덧붙였다. 그리고 채미소에게도 문자를 보냈다.[점심 12시.]온지유의 문자를 보고 채미소는 싸늘한 미소를 지었다. 여이현을 상대할 방법은 진작 생각해 놓았다....같은 시각, 여이현은 기분이 꽤 좋았다. 온지유가 먼저 약속을 잡았기 때문이다.온지유는 한 번도 먼저 약속을 잡은 적이 없었다.‘갑자기 정신 차린 건가? 이혼하기 싫어서 이러는 거 맞지?’여이현은 이게 좋은 신호라고 생각했다. 부잣집 사모님으로 살던 그녀에게 역시 자그마한 오피스텔은 무리라고 생각했다.‘이따가 가서 괜히 도도한 척해볼까? 내가 당한 것만큼 호락호락하지 않다는 걸 보여줘야지. 나 같은 남자 세상에 어디 있어? 다시는 이혼 소리 안 나오게 할 거야.’사무실에 들어왔다가 여이현이 생각에 잠긴 것을 보고 배진호는 짧게 노크했다.“대표님, 오후에 주주 회의 있습니다.”“미뤄줘요. 점심에 갈 데가 있어요.”배진호는 놀란 듯 눈을 크게 떴다. 오늘 일정은 아주 많았다. 한 일정을 미루게 되면 모든 일정을 다 미뤄야 했다.“어디에 가시는데요?”“지유 만나...”여이현은 말을 하다 말고 갑자기 바꿨다.“지유가 날 찾아서요.”“두 분 드디어 화해하신 거예요?”여이현은 핸드폰을 내려놓고 의자에 기대며 입꼬리를 올렸다.“글쎄, 지유가 하는 걸 봐서요.”배진호는 미소를 지었다.“그럼 미리 축하드릴게요.”여이현은 그를 힐끗 노려보며 말했다.“축하하긴 일러요. 내가 아직 용서하기로 한 건 아니니까.”“...”배진호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속으로는 여이현이 이미 용서하고도 남았다는 것을 잘 알았다. 표현을 안 해서 그렇지 엄청 신이 났을 것이다.‘정말 다행이다.’배진호는 남몰래 안도했다. 여이현의 기분이 좋아야 비서인 그도 쉽게 일할 수 있기 때문이다. 어쩌면 보너스가 하늘에서 떨어지는 일이 있을지도 몰랐다.“지금 바로 차를 준비하겠습니다.”여이현은 잠깐 고민하다가 물었다.“이번에는 어떻게 해야 할
배진호까지 같은 말을 하는 것을 듣고 여이현은 약간 회의감이 들었다.‘결국 다 내 문제라는 건가?’“차 준비해요. 지금 바로 출발할 거예요.”...온지유는 차에 앉아서 레스토랑 정문에 도착했다. 채미소는 창문을 톡톡 두드리면서 물었다.“여기예요?”“네. 12시에 만나기로 했어요.”“좋아요.”채미소는 온지유를 바라보며 미소를 지었다.“이번에 도와준 건 기억하고 있을게요. 내가 편집장이 되면 지유 씨도 보조 자리에서 벗어날 수 있어요.”“이만 들어가요.”온지유는 예약한 룸의 번호를 알려줬다. 채미소는 성큼성큼 안으로 들어갔다.이때 온지유의 핸드폰이 울렸다. 문자를 확인한 그녀는 미소를 지었다. 보육원 일이 잘 해결된 것이다.그녀는 채미소가 멀어져간 방향을 바라봤다. 당분간은 그녀의 일을 방해할 여력이 없어 보였다. 그녀는 곧장 보육원을 향해 달려갔다.20분 후, 여이현의 차가 레스토랑에 도착했다. 그는 백미러로 옷매무시를 정리하고 나서 차 문을 열었다. 그리고 한적한 복도를 따라 룸으로 걸어갔다채미소는 이미 안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발걸음 소리를 들은 그녀는 자세를 바로 하고 여이현이 들어오기만 기다리고 있었다.여이현은 문을 열고 들어갔다. 주변을 빙 둘러봤지만, 온지유는 안 보이고 채미소만 보였다. 원래는 평온했던 얼굴이 빠르게 어두워졌다.“여이현 대표님.”채미소는 미소를 지으며 머리를 끄덕였다. 속으로는 온지유가 정말 성공한 것에 약간 놀라고 있었다.“지유는요?”“지유 씨는 화장실에 갔어요. 금방 돌아올게요.”여이현도 이게 함정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도 온지유를 놓칠 1%의 가능성이 있기에 참기로 했다.안으로 들어간 그는 채미소와 가장 먼 자리에 앉아 기다리기 시작했다. 채미소는 적극적으로 술을 따라주며 말했다.“조금 기다리시면 금방 돌아올 거예요. 음식도 주문해 놨어요. 그 전에 저랑 술 한잔할까요?”여이현은 차가운 표정으로 거절했다.“저는 지유를 기다릴 거예요.”“지유 씨 만나러 오신 거 알아요. 술 마시면
하지만 감동보다는 오히려 속이 울렁거렸다. 속이 울렁거리는 느낌에 문지원은 당장 얼굴이 일그러지며 화장실로 달려갔다. 지석훈도 뒤따라 들어오며 물었다.“속이 안 좋아?”“그렇진 않은 것 같아요. 요즘 세 끼 식사도 꽤 규칙적으로 하고 날것 이거나 차갑거나 매운 음식도 먹지 않았는데...”문지원은 배를 움켜쥐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러다 문득 한 가지 가능성이 떠올랐다.지석훈도 그녀와 같은 생각을 한 듯 방으로 가서 임신 테스트기를 가져왔다.문지원은 놀라며 물었다.“언제 산 거예요?”지석훈은 당연하다는 듯이 말했다.“만일의 사태에 대비해서.”문지원은 아무 말이 없었다.5분 후, 그녀는 복잡한 얼굴로 다시 나왔다. 한 손은 여전히 배 위에 올려져 있었고 눈에는 믿을 수 없다는 기색이 역력했다.정말 임신한 것이다!그녀와 지석훈이 결혼한 지 겨우 3개월밖에 안 되었는데 이렇게 빨리 임신하다니.지석훈은 오히려 태연해 보였다. 하지만 입가에 감출 수 없는 미소를 보면 그 역시 겉모습처럼 평온하지 않고 흥분을 억누르고 있는 게 분명했다.“정말 임신한 거예요?”문지원은 아직 믿기지 않는 듯 물었다. 왜냐하면, 그녀는 이번 달 초에 생리가 끝났기 때문이다.“아마 생리가 끝난 후 며칠 사이일 거야.”지석훈의 목소리는 문지원에게 그날의 기억을 떠올리게 했다. 당시의 기억을 떠올리니 그녀의 귀는 뜨겁게 달아올랐다. 결국, 그녀는 병원에 가보기로 했다. 임신 테스트기는 가끔 틀릴 수도 있으니 이런 일은 직접 검사를 받아보고 확인해야 마음을 놓을 수 있을 것이다.그리고 그녀는 손에 든 검사지를 보고 완전히 할 말을 잃었다.의사는 마침 지석훈과 알고 지내던 사람이었다.“축하합니다, 지 원장님. 부인께서 임신 2주 차입니다.”“감사합니다.”지석훈은 침착하게 그녀를 부축하며 밖으로 나갔다.병원 진료실을 막 나오자마자 지석훈은 문지원을 품에 안았다.“너무 좋아. 우리 아이가 생겼어.”문지원은 남자가 미세하게 떨리는 모습을 보며 멍하
물론 손에 있는 일을 무턱대고 모두 남에게 맡기는 것은 너무 과한 부담을 주는 일이다.문지원은 비서를 사무실로 불렀다.“올해 25살이죠?”비서는 잠시 멍한 표정을 지었다.그녀의 나이는 모두가 다 아는데 문지원 회장이 갑자기 이 얘기를 꺼낸다는 것은 혹시 소개팅을 시켜주려는 건가 싶은 생각이 들었다.비서는 고마웠지만 거절하며 말했다.“문 사장님, 저는 아직 젊어서 당장은 결혼할 생각이 없습니다.”“전 당신더러 결혼하라고 하는게 아니에요.”문지원은 펜으로 탁자를 두드리며 말했다.“그냥 평소에 잡다한 일들을 맡기고 싶어서요. 확인이 필요한 문서들은 평소에 굳이 내게 제출하지 않아도 돼요.”비서는 그 뜻을 이해했다.이건 곧 그녀에게 승진과 급여 인상을 주려는 것이다. 문지원이 그녀의 의견을 확인한 후 급여를 조금 올려줬고 비서에게 몇 명의 적합한 인재를 추가로 모집해서 예비 인력으로 두라고 지시했다.“평소에 내가 처리하지 못한 일들을 대신 처리해주고 만약 문제가 생기면 그때마다 보고하면 돼요.”비서는 한숨을 쉬며 안도의 표정을 지었다. 그녀 혼자서 이렇게 많은 일을 하지 않아도 되어 다행이었다.일정이 정리되자 문지원은 업무에서 상당 부분 해방되었다.예전에는 아침부터 저녁까지 바쁘게 일하다 보면 퇴근 시간이 되어도 일이 끝나지 않고 긴급 통지가 오면 또 회의를 위해 야근을 해야 했다.이제는 오후 4시 반쯤이면 일을 마치고 퇴근할 수 있게 된 것이다.비서가 몇 명을 더 찾아서 양성해 두었기에 업무가 적절히 분배되어 모두 바빠 죽을 정도가 아니라 적당히 딱 맞는 분량을 처리할 수 있었다.그 덕에 문지원은 지석훈과 함께 결혼 후의 삶을 더욱 즐길 수 있게 되었다.지석훈도 이에 매우 만족해했다.“널 주려고 선물을 챙겨왔어. 들어가서 한번 봐.”그가 집 문 앞에 다가서더니 걸음을 멈췄다.문지원은 열쇠로 문을 열고 들어가 보니 안은 어두컴컴했다.“뭐 숨겨놨어요? 아직 불도 켜지 않았네요, 수상하게.”탁! 하며 불이 켜지자 거실의 모든
문지원은 이 주제가 다소 위험하다고 느꼈다. 비록 그녀의 아버지가 그녀에게 물어본 적은 없지만 그렇다고 자신과 배석훈이 결혼한 후 어떻게 지내고 있는지에 대해 말할 필요도 없다고 생각했다. 돼지고기를 먹어보지 않았다고 해도 돼지가 뛰어다니 것을 본 적은 있을 것이다. 문지원은 그러면서도 반쯤 빚어놓은 만두를 내려놓으며 말했다. “저, 화장실 좀 다녀올게요.”이에 지석훈의 어머니가 그녀의 손을 잡았다. “너희들도 이제 나이가 들었으니 아이를 가져야지. 평소에 좀 더 노력해야 한단다.”문지원은 잔소리를 듣고 나서 나오니 기운이 다 빠져있었다.시어머니는 문지원에게 정말 잘해주었다. 거의 마음을 쏟아붓는 수준이었다. 비록 문지원의 집안 사정이 좋은 것을 알면서도 혼수 때 오랜 세월 모은 돈으로 집 한 채를 사서 선물해 주었다. 사실 지석훈도 자기 집이 있었지만, 시어머니는 선물하고 싶다고 하셨다. “너희 집도 너희의 것이지만, 이건 내가 어른으로서 선물하는 거란다.”게다가 그 집에는 문지원의 이름도 함께 올려져 있었다.그래서 시어머니의 출산 독촉에도 문지원은 어쩔 수 없이 버텨야만 했다. 다행히도 시어머니는 어린 이들에게 엄격하게 구는 편은 아니었다. 만두를 빚을 때 한 번 그런 말을 했고 또 떠나면서도 지석훈을 불러 몇 마디 잔소리했다. 문지원은 그 모자간의 대화를 듣지 못했다.돌아가는 길에 문지원은 약간 궁금해져 지석훈에게 물었다.“나갈 때 어머니께서 뭐라고 하셨어요?”“정말 알고 싶어?”“네.”그러자 지석훈은 문지원의 머리를 숙이게 한 후 그녀의 흩어진 머리칼을 살며시 넘겨주며 귀 옆에서 낮게 속삭였다.“우리 아이를 빨리 낳으라고 하셨어.”남자의 낮고 진한 목소리는 얼굴을 붉히고 심장을 뛰게 만드는 약보다도 중독성이 강해 문지원의 귀가 금세 붉어지고 말았다.저녁이 되자 지석훈은 몸소 행동으로 보여주기 시작했다. 한 손으로 문지원의 머리를 받치고 이마를 맞대며 낮은 숨소리를 내쉬었다. 문지원은 마치 파도 속에 잠긴 것
그 눈빛 속에서 조용히 터져 나오는 그 소유욕. 마치 옛 시대의 군벌과 그의 부인 같았다. 그리고 사진작가는 우연히 그 장면을 목격한 운 없는 사람이 되어 몰래 촬영을 하고 있었다. 사진작가는 자신의 상상에 자극받아 목소리가 떨렸다.“지석훈 씨, 고개를 들어 카메라를 봐주세요.”지석훈은 날카로운 눈빛으로 사진작가를 향해 시선을 돌렸다. 사진작가는 재빨리 셔터를 눌렀다. 그 후에도 그들은 여러 세트의 사진을 찍었고 찍은 사진들은 모두 문지원에게 하나하나 보여주었다. 문지원은 모든 사진에 다 만족했지만 그중에서도 가장 마음에 든 것은 민국 시대 주제의 사진이었다.“대략 며칠 안에 나오나요?” 그녀가 물었다.사진작가는 답했다.“빠르면 이삼 일정도 걸릴 겁니다. 그때 완성된 사진들을 택배로 보내드리겠습니다. 그런데 제가 개인적인 부탁이 하나 있는데 혹시 두 분께서 응해주실 수 있을지 모르겠네요.”“바로 아까 찍은 사진 중 몇 장이 제가 개인적으로 아주 마음에 들어서 사진관 벽에 걸어두고 싶습니다.”문지원은 사진관에 들어올 때 봤던 사진 벽이 생각났다.“그 벽에 걸어두시겠다는 건가요?”“네.”사진작가는 그 벽은 사진관의 특별한 기념 및 홍보 방법의 하나라고 설명했다. 잘 나온 사진들은 사진 주인에게 동의를 구한 뒤 동의하면 벽에 전시한다고 한다..문지원은 옆에 있던 지석훈을 바라봤다. “저는 괜찮은데, 당신은요?” 지석훈도 아무 문제 없다고 했다.“마음대로 하도록 해.”며칠 후 문지원은 사진작가가 보내온 사진을 받아 소중히 간직했다. 하지만 그녀는 몰랐다. 그 사진관 벽에 전시된 사진들이 곧 사람들의 눈에 띄어 사진이 찍혀 인터넷에 올라간 것이다.잘생긴 남성과 아름다운 여인의 조합과 최상의 촬영 기술 덕분에 순식간에 인터넷에서 화제가 되었다.네티즌들은 저마다 아아 소리를 냈고 많은 사람이 댓글을 달았다. “마치 옛 시대의 군벌 부인 같다.”“완전 대박이다.”“3분 안에 그들의 모든 정보를 알고 싶다.” 하지만 이 모
문지원은 약간 마음이 움직였다.하지만 웨딩 촬영은 이미 여러 번 한 적이 있었다. 그때 섬에서 몇 세트 찍었고 그 후 결혼식 현장에서 또 몇 세트 찍어 셀 수 없을 정도였다.게다가 이번 촬영은 개인 예약으로 진행되었는데 이 사진관이 꽤 유명하다고 들었다.물론 사진관 이름에 걸맞게 예약은 거의 하늘의 별 따기라고 한다..이 정도면 지석훈이 얼마나 큰 노력을 들여 예약을 잡았는지 알 수 있었다. 단순히 웨딩사진만 찍는 데 사용하기에는 너무 아까웠다.하지만 문지원 역시 이런 곳에 한 번도 와본 적이 없었기에 무엇을 찍어야 할지 몰랐다.“한번 보세요. 이건 저희가 예전부터 선보였던 스타일들이에요.”사진작가는 친절하게 앨범 한 권을 꺼내 보였다.앨범에는 이전 고객들이 이곳에서 찍은 사진들이 담겨 있었는데 정말 다양한 스타일이 있었고 모두 아름다웠다.이 사진관이 만들어낸 결과물은 정말 최고였다.문지원은 그중에서도 민국 시대 주제의 사진이 눈에 들어왔다.“이렇게 찍을 수 있을까요?”사진작가는 그녀가 가리키는 사진을 한 번 살펴보고는 고개를 끄덕였다.“네, 됩니다. 먼저 메이크업하고 옷을 갈아입으세요. 직원들이 촬영 스튜디오를 설치할게요.”옷은 사진관에서 준비한 것으로 하고 지석훈의 요구에 따라 전부 새 옷이었다.사실 문지원은 소품용 옷을 입는 것에 크게 개의치 않았다. 어쨌든 한 번 입었다가 나중에 벗으면 되는 거고 몸에 달라붙지 않아서 안에 옷을 받쳐 입을 수도 있었다.하지만 지석훈은 직업병이 발동했고 그런 건 용납할 수 없었다.결국, 문지원은 어쩔 수 없이 그의 의견을 따를 수밖에 없었다.급히 새 옷을 가져와야 했기 때문에 원래 걸리던 시간에서 15분이 더 추가되었고 메이크업 등 기타 과정도 진행해야 했다.문지원이 모든 준비를 마치고 나왔을 때는 이미 2시간이 지난 후였다.그러나 결과는 확실했다.곧은 치파오가 그녀의 아름다운 몸매를 감쌌고 문지원은 옷자락을 살짝 들어 올렸다. 마치 지난 옛 시대의 그림 속에서 걸어 나온 듯한
결혼 후 문지원은 휴가를 내서 신혼여행을 갈까 고민해 본 적이 있었다.하지만 요즘 지석훈이 거의 계속 병원에 머무르며 집에 돌아오지 않는 것을 떠올리며 본의 아니게 한숨이 나왔다. 비록 이미 익숙해졌긴 했지만 실망을 감추기는 어려웠다.비서도 그녀에게 물었다.“문 사장님, 신혼여행 가고 싶지 않으세요? 제 동창 중 한 명이 며칠 전에 결혼했는데 요즘 여기저기서 신혼여행 정보를 알아보며 준비 중이에요. 신혼여행이 없는 결혼은 반은 실패한 거랑 마찬가지라고 하더라고요.”그 말을 들은 문지원은 손에 들고 있던 서류를 제대로 볼 생각조차 들지 않았고 비서는 무언가를 눈치챈 듯했다.“그렇지 않으면... 문 사장님, 지 의사님이 일하시는 곳에 한 번 가보시는 건 어떠세요?”그녀가 머뭇거리며 물었다. 어쨌든 문지원은 요즘 정신이 산만하여 업무에 집중할 기색도 없었다.문지원은 비서의 시선 속에서 정신을 차렸다. 요 며칠 동안 집에 돌아와도 지석훈을 보지 못해 한참 혼란스러워했던 자신을 깨달으며 약간 부끄러워졌다.“그건 나중에 얘기하고 기획서 한 부 복사해 가져다주세요.”점심 무렵, 문지원은 막 일을 끝내고 밥 먹으러 가려던 찰나, 핸드폰에 지석훈의 메시지가 떴다. 같이 밥을 먹자는 메시지에 문지원은 미소를 지었다. 멀리서 이 장면을 본 직원들은 서로 눈빛을 교환하며 웃음을 터뜨렸다.문지원은 재빨리 열쇠를 챙기고 회사를 떠났다. 지석훈은 그녀를 새로 오픈한 가게로 데려갔다.식사를 마친 후 문지원은 지석훈을 바라보며 머뭇거리다가 물었다.“병원에 다시 돌아갈 거예요?”“응?”지석훈은 눈썹을 치켜들며 고의적으로 물었다. “내가 돌아가길 바라는 거야?”그 말을 들은 문지원은 순간 당황했다. 사실 그녀는 지석훈이 자신과 좀 더 많은 시간을 함께 보내주길 바랐는데 이제 막 결혼한 신혼부부임에도 불구하고 각자 업무에만 매달려 밤에야 겨우 함께 잠자리에 들 수 있는 상황이었다.하지만 수줍음이 많은 그녀는 그 마음을 솔직하게 털어놓지 못했다.지석훈은
예전에는 이런 일이 있을 때면 지석훈은 항상 선을 지켰지만 오늘 밤엔 조금 달랐다. 그는 그녀를 침실에서 욕실로 다시 침대로 옮겨가며 몸 곳곳에 뜨거운 입맞춤을 했다.다음 날 아침에 일어났을 때도 문지원은 여전히 몸속 깊이 스며든 감각이 남아 있는 것만 같았다.그리고 그녀는 예상대로 휴가를 냈고 이틀이 지나서야 회사에 다시 나왔다.회사 사람들은 이미 예상이라도 한 듯 문지원이 출근하자 하나같이 말했다.“문 사장님, 결혼 축하드려요.’문지원은 무려 사흘이나 결근했지만 다들 그 사흘 동안 무얼 했는지는 굳이 말 안 해도 짐작이 갔다.분명 부부 생활이 아주 좋았겠지, 아니었으면 일까지 내팽개치고 안 나왔을 리가 없다.문지원은 직원들의 부담스러운 시선에 얼굴을 들 수도 없어 그저 아무렇지 않은 척할 수밖에 없었다.그래도 지난번에 당한 적이 있었던 터라 문지원은 이제 출근 전에 거울 앞에서 꼼꼼히 점검했다.몸에 키스 자국이 드러나지 않는 걸 확인하고 나서야 안심하고 회사를 향했다.그렇지 않았다면 그 흔적들을 들켰을 경우 정말 얼굴을 들고 다닐 수 없었을지도 모른다.문지원이 예상치 못했던 건 며칠 지나지 않아 결혼을 축하하는 선물이 회사로 배달됐다는 것이다.문지원은 처음에 여울이 보낸 거라고 생각했지만, 물어보니 아니었다.택배 상자의 외관을 살펴봐도 발신자가 적혀 있지 않아 더욱 수상했다.“이거 가져온 사람이 누가 보낸 건지 말했어요?”문지원이 로비 직원에게 물었다.로비 직원은 고개를 저었다. “아뇨, 그냥 두고 바로 가버렸어요.”문지원은 뭔가 직감적으로 찜찜한 마음이 들어 그 택배를 챙겼고 사무실에 들어와서야 상자를 열었다.그 안에는 브로치 하나와 축하 카드 한 장이 들어 있었다.문지원은 축하 카드를 집어 들어보니 카드 위에는 이렇게 적혀 있었다.“결혼 축하해요.”글씨체는 아주 정갈하고 예뻐 여성의 필체 같았다.그녀는 곧바로 짐작이 갔다.문지원은 그 브로치를 지석훈에게 보여주자 그는 눈빛이 살짝 흔들렸지만 아무 말 없이 브로치
여울은 아직 최주하를 받아들이지 않았지만 최주하도 쉽게 포기할 생각이 없었다.문지원이 알기로 여울은 마음이 여린 사람이었고 결국 받아들이게 되는 건 시간문제일지도 몰랐다.그녀는 가볍게 한숨을 내쉬었다. 친구 일에 깊이 관여하는 것도 괜히 어색하고 조심스러웠다.게다가 얼마 전 지석훈이 슬쩍 귀띔하듯 말했다.“며칠 전에 여울 씨가 병원에 재검진받으러 왔는데 주하가 데리고 왔었어.”그 말을 듣고 문지원은 혀를 끌끌 찼다.평소에 말도 없고 조용하던 여울이 은근히 비밀 많은 타입이었던 모양이었다.그렇게 시간은 순식간에 흘러 어느덧 다음 달 중순이 되었다.지석훈은 아예 와인 농장을 통째로 빌려 며칠에 걸쳐 그곳을 자신이 원하는 모습으로 꾸며놓았다.결혼식을 올릴 장소는 바로 거기였다.그 와인 농장은 웬만한 호텔 못지않게 컸고 내부에는 수년간 숙성된 고급 와인들이 그대로 보관되어 있었고 결혼식 날 손님들이 오면 바로 꺼내어 대접할 수 있을 정도였다.그들은 결혼 소식을 널리 알리진 않았다.이건 문지원이 원한 방식이었다.그녀는 온 세상에 떠들썩하게 알리는 그런 결혼식보다는 가까운 가족과 친구들만 초대해서 조용히 축하받는 걸 선호했다.행복은 굳이 남들에게 증명하지 않아도 되는 것이니까.그런데 결혼식이 한창일 때 지석훈이 무대 위에서 다시 한번 프러포즈했다.해변에서 했던 프러포즈보다 훨씬 더 진지하고 진중한 분위기였다.“하고 싶은 말이 정말 많지만 말로 다 표현할 수 없어서... 예전엔 내가 사랑인 줄도 모르고 놓쳐버렸던 순간이 많아. 이제는 더 이상 놓치고 싶지 않아. 이렇게 내 곁에 있어 줘서 고마워. 앞으로 남은 인생... 너랑 함께할 수 있어서 정말 행복해.”그의 말이 끝나자 하객들 사이에서 박수 소리가 터져 나왔다.문지원은 무대 위에서 입을 손으로 가리고 눈물을 흘렸다.식이 끝날 무렵, 문지원은 멀리서 검은색 카이엔 SUV가 그녀의 친구 여울을 데리러 오는 걸 보았다.차창이 천천히 내려가자 예상대로 그 안에 앉아 있는 사람은 최주하였다
문지원은 문득 자신이 계획에 철저히 걸려들었다는 생각에 의심의 눈길을 보냈다.“처음부터 계획한 거죠?”“응.”지석훈은 미소 지으며 그녀의 입술에 가볍게 입을 맞췄다. 사실, 그는 그녀를 향한 마음을 오래전부터 숨겨온 것이었다....해변에서의 프러포즈 이후 문지원에게 찾아온 가장 큰 변화는 손가락에 반짝이는 반지가 생겼다는 점이었다.이 반지는 지석훈이 특별히 맞춤 제작한 것이었다. 그녀는 우연히 그의 휴대폰을 보다가 두 달 전에 이미 주문이 들어가 있었다는 구매 기록을 발견하고는 깜짝 놀랐다. 그렇게 오래전부터 준비해 왔다니 감동하지 않을 수 없었다.두 사람의 결혼 소식을 접한 지석훈의 부모님은 곧바로 혼인신고부터 하라고 재촉하기 시작했다. 어느 날 문지원은 우연히 지석훈의 어머니가 그를 붙잡고 타이르는 말을 듣게 되었다.“네 아빠랑 난 애초에 너한테 기대도 안 했어. 하루가 멀다고 병원에서 살다시피 하니 너 같은 애한테 누가 시집오겠나 싶었거든. 그런데 다행히 네가 능력 있어서 지원이 같은 좋은 아이를 데려왔으니 얼른 확실히 붙잡아야지. 빨리 혼인신고부터 해. 나중에 그 아이가 너 버리고 떠나버리면 그땐 어디 가서 울어도 소용없어!”문지원은 그 대화에 웃어야 할지 울어야 할지 몰랐다.그런데 신기한 건 지석훈이 워낙 점잖고 진지한 사람이어서 집안 분위기도 매우 조용할 줄 알았는데 실제로는 그렇지 않다는 점이었다. 아버지는 이미 퇴직해 한가로운 성격으로 매일 독서나 산책을 즐기는 조용한 스타일이었다. 어머니는 젊었을 때는 커리어 우먼이었고 호탕한 성격으로 남편에게 엄격하면서도 친화력이 강한 사람이었다.두 분 모두 차분한 듯하면서도 내면에 장난기를 숨기고 있는 아들을 낳을 것 같진 않았는데 이게 바로 유전자의 신비인가 싶었다.하지만 어머니가 그렇게 그녀를 좋아해 주는 모습에 문지원도 안심했다. 확실히 시부모님의 사랑을 받고 있다는 증거였다.한편 문지원의 아버지는 지석훈과 따로 대화를 나눈 이후부터 정확히 무슨 얘기를 했는지는 몰라도 그에 대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