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세희가 반응하기도 전에 소원이 질문을 던졌다."네 입으로 말해. 혜인한테 맞은 이유.”왠지 모를 불안감이 갑자기 덮쳐왔다. 임세희가 다급히 말했다. "정신이 온전치 않은 사람이 왜 그랬는지 제가 어떻게 알아요...."소원이 웃음기를 완전히 지운 채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네가 먼저 그랬잖아! 처음부터 이준혁이 아이를 원하지 않았다고! 이준혁한테 버림받아 꼴좋다고 먼저 자극한 건 너잖아!"소원의 입에서 좀 전에 자신이 했던 말이 튀어나오자, 임세희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내가 언제 그런 말 했다고!"하지만 임세희는 개의치 않았다. 누군가가 이 대화를 알고 있다하더라도 증거가 있지 않은 이상 잡아떼면 그만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이때, 소원이 입꼬리를 비틀며 결정타를 날렸다. "진정해, 아직 끝나지 않았어. 너 아까 임신 진단서랑 친자 확인서도 네가 조작했다고 했지? 그걸 이준혁이 알고도 일부러 추궁하지 않은 거라고 당당히 말한 걸 내가 다 들었어!"소원의 말을 들은 이준혁의 얼굴에서 순식간에 살벌한 기운이 뿜어져 나오기 시작했다. "세희야, 진짜야?""난 그런 말 한 적 없어."역시나 임세희는 인정하지 않았다. 오히려 억울한 표정으로 그에게 호소하기 시작했다. "준혁 오빠, 나 진짜 그런 말 한 적 없어. 소원 씨가 날 모함하고 있는 거야."임세희가 소원을 가리키며 말했다. “소원 씨, 친구를 생각하는 마음은 알겠지만, 있지도 않은 일을 진짜인 것처럼 말하는 것은 명예 훼손에 해당할 수 있어요. 윤혜인 씨한테 어떤 말을 들었는지 몰라도, 제발 사리 분간은 해주세요. 이번 일은 그냥 잠시 이성을 잃어 그런 거라고 생각하고 넘어가 줄 테니, 다음번엔 같은 실수 저지르는 일이 없도록 조심하세요.”소원은 역겨움에 구토가 나올 것 같았다. 겉으론 대인배인 것처럼 굴지만, 저 말은 다른 의미로 윤혜인을 모욕하는 것이었다. 겉과 속이 달라도 이렇게까지 다를 수 있다니, 소원은 임세희의 연기에 소름이 끼쳤다. 그녀는 더 이상 임세희와
소원은 임세희의 말에 입꼬리를 올리며 기막히다는 듯 말했다. "와, 내가 살다 살다 별소리 다 듣는다. 넌 거울도 안 보고 살아? 혜인이가 뭐가 부족하다고 널 질투해? 보톡스 과다 주입으로 사람 얼굴 같지도 않은 네 면상? 아니면 유부남만 골라 꼬시는 그 능력? 그것도 아니면 뭐든 징징거리면 다 해결될 거라 착각하는 너의 멍청한 두뇌? 어디 하나 잘난 구석도 없으면서, 용케 그딴 소리 지껄이네."모든 말이 마치 비수처럼 임세희의 가슴에 꽂혔다. 이준혁만 없었다면, 그녀는 당장이라도 소원의 입을 찢어버렸을 것이다. 이때, 이준혁이 임세희가 잡고 있던 옷자락을 빼내며 침착한 목소리로 말했다. "세희야, 저번에 내가 한 경고, 농담 같았어?"임세희의 머릿속에 지난번 이준혁이 임향숙을 경찰에 넘기면서 했던 경고가 떠올랐다. 등골이 오싹해지며,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임세희는 두려움에 자기도 모르게 딸꾹질하기 시작했다. "준혁 오빠, 그게 아니라. 저거 다 거짓말이야. 윤혜인이랑 짜고 날 모함하려고 꾸민 짓일 거야....""하하!"소원은 어이없어 웃음을 터트렸다. "못 믿겠으면, 전문 기관에 의뢰해도 좋아. 누구의 말이 맞는지 어디 한번 보자고.""닥쳐!"임세희가 이를 갈며 소원을 노려봤다. "친구라고 둘이 합세해서 지금 나를 모함하는 거잖아!"임세희가 이렇게 나오리라는 것을 소원도 예상하고 있었다. 어차피 임세희가 인정하던 인정하지 않던 중요하지 않았다. 명백한 증거가 손에 있었으니까. 오늘 굳이 이 자리에서 이 사실을 밝힌 것은, 경고하기 위함이었다. 볼일을 마친 소원은 주머니에 녹음기를 다시 걷어 넣고 임세희를 바라봤다. "너랑 시간 낭비할 시간 없으니까, 잘 들어. 앞으로 다시 한번 내 친구를 건드리면, 이 녹음된 거 그대로 인터넷에 퍼트릴 거야. 그렇게 되면 넌 평생 불륜녀 꼬리표를 달고 살아가야겠지. 그러니까 부디 처신 잘 하길 바라. 내가 이거 쓰는 일이 없도록!""네가 감히!"임세희는 분노에 몸을 부들부들 떨었다. 이대로
이준혁이 가라앉은 눈동자로 다시 한번 경고했다. "그러니까, 입조심 좀 하세요. 참견하지 말아야 할 일엔 참견하지 말고."그 말을 들은 소원이 뭔가 깨달은 듯 말했다. "이준혁, 설마 혜인이 당신을 용서할 거라 생각하는 건 아니지?"그의 표정을 본 소원은 자신의 추측이 맞았음을 알아차렸다. 역시 소설은 현실의 고증이었다. 소설에 보면 잘생기고, 돈도 많고, 일도 잘하면 꼭 감정이 결렬되어 있던데, 이준혁이 딱 그 꼴이었다. 소원은 이 순간을 놓치지 않고 그를 비웃어줬다."당신 뜻대로 함부로 참견하지는 않을게, 하지만...."그녀가 잠시 뜸을 들이다 말을 이었다. "혜인은 한번 결정한 일은 두 번 번복하지 않는다는 걸, 기억해!"이 말을 마지막으로 소원은 완전히 이준혁의 시야에서 사라졌다. 그는 주먹을 꽉 쥔 채, 한참 소원이 떠나간 자리를 바라보다 다시 병실로 돌아왔다. 그가 돌아온 모습을 본 임세희가 다급히 물었다. "오빠, 녹음기는? 녹음기는 되찾았어?"임세희는 그가 당연히 녹음기 때문에 소원을 뒤쫓아간 것이라 확신했다. 그래서 이번에도 이준혁이 쉽게 이번 일을 넘어가 줄 거라 생각했다. 물론 녹음기 때문에 점수는 좀 깎였겠지만, 노력한다면 그의 마음을 다시 되찾을 수 있을 것이라 여겼다.‘역시 오빠는 윤혜인보다 날 더 좋아하는 게 틀림없어!’임세희는 속으로 소원과 윤혜인을 욕하면서 앞으로 자신의 찬란한 미래를 그렸다. 반드시 이준혁과 결혼해 윤혜인은 물론 소원도 함께 무너뜨릴 것을 다짐했다. 그녀가 한참 달콤한 상상의 나래를 펼치는 동안, 어느새 이준혁이 다가왔다. "세희야."이준혁이 낮게 깔린 목소리로 임세희를 불렀다. 그의 부름에 임세희가 고개를 들어 이준혁을 바라봤다. 병실 조명이 환하게 그의 얼굴을 비춰 유난히 화려한 이목구비를 더 빛나게 해줬다. 임세희는 넋을 잃고 멍하니 그의 얼굴을 감상했다. 심장이 두근두근 빠르게 뛰며 얼굴이 점점 빨갛게 달아올랐다. 임세희가 부드러운 목소리로 되물었다. "준혁 오빠, 왜?
임세희의 두 눈이 부릅떠졌다. '어떻게 이럴 수가... 계획은 완벽했는데!'그녀는 모든 과정에 철저히 증거를 인멸했다. 꼬리가 잡힐 일이 없는데, 임세희는 분명 이준혁이 일부러 자신을 테스트하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녀는 눈물을 머금은 채 계속 모르쇠로 일관했다. "그게 무슨 말이야? 나 정말 하나도 못 알아듣겠어....""네가 맞은 그 주사, L국에서 들여온 거잖아. 그리고 범인들은 굳이 왜 그 도주로를 선택했을까? 주훈이 수소문해서 당시 주변을 지나가던 차 블랙박스를 찾았어. 브레이크가 통제 불능이었던데? 그 많은 돈을 요구할 정신은 있었는데, 차는 허술하게 고장 난 걸 준비했다는 건 말이 안 되지 않아?"이준혁이 평온한 목소리로 말을 이어갔다."임세희, 증거 인멸 성공했다고 내가 모를 줄 알았어?"분명 분노가 느껴지지 않는 말투였지만, 임세희는 왠지 모르게 오싹한 기분이 들었다. 그녀가 구슬픈 목소리로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말했다. "아, 아니야... 오빠, 제발 내 말 좀 들어줘...."뜨거운 눈물이 후드득 그의 손목 위로 떨어졌다. 이준혁은 왠지 모를 혐오감이 밀려와 잡고 있던 턱을 매몰차게 내팽개쳤다. 임세희는 갑작스러운 움직임에 질퍼덕하고 바닥에 널브러졌다. 얼굴이 바닥에 부딪히며 머리가 울렸다. "아악!"임세희가 고통에 비명을 지르며 얼굴을 감싸안았다. 하지만 이준혁은 전혀 아무렇지도 않은 표정으로 계속해서 말을 이어갔다. "임세희, 난 잔머리 굴리는 사람 제일 싫어해. 예전엔 너한테 빚진 것이 있어 계속 봐줬지만, 이만하면 됐잖아? 이젠 남은 것도 없겠다, 널 어떻게 처리하면 좋을까?"물론 그도 의심한 적이 없었던 건 아니었다. 하지만 기억 속 그녀의 존재가 너무 강인하게 각인돼, 매번 부정하고 또 부정했다. 그런데 그의 눈앞에 도무지 부정하고 싶어도 부정할 수 없는 증거들이 나타났다. 그 순간, 가장 이준혁을 막막하게 한 것은 윤혜인을 대면하는 것이었다. 윤혜인은 수도 없이 그에게 임세희의 진짜 모습을 말했
그동안 아름다웠던 모든 순간이 망상이었다고 그는 말해주고 있었다. 임세희는 이 사실을 받아들일 수 없었다. 그러나 그녀가 멍하니 있는 사이에, 이준혁은 망설임 없이 상황을 진행했다. "주훈아, 서울 정신병원에 연락 넣어. 임세희가 정신착란 증세를 보인다고, 지금 당장 치료가 필요할 것 같다고 전해줘."임세희는 뭔가 잘못돼도 단단히 잘못됐음을 느꼈다. 서울 정신 병원이라니, 거긴 정신질환을 가진 환자들만 가는 곳이 아닌가? 그런데 그런 곳에 자신을 보내려고 하다니, 임세희는 기겁하고 말았다. 그곳은 사람이 살 수 있는 곳이 아니었다. 철저히 폐쇄된 채 운영되는 곳으로, 한번 들어가면 쉽사리 나올 수 있는 데가 아니었다.임세희가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준혁 오빠, 지금 뭐라고 했어? 장난하는 거지?""네가 혜인을 보내고 싶어 했던 곳이잖아?"윤혜인을 가둬놓으려 만들었던 덫이 부메랑이 되어 그녀에게 돌아왔다. 임세희는 너무 갑작스러운 상황에 적응조차 하지 못했다. 이때, 이준혁이 입꼬리를 올리며 그녀에게 마지막 비수를 꽂았다. "그러니 너부터 체험해 봐."그 순간, 강력한 공포가 찾아와 임세희는 몸을 부들부들 떨었다. 그녀는 체면이고 자존심이고 다 버리고, 손이 발이 되도록 그에게 빌기 시작했다. "오빠, 잘못했어. 내가 진짜 잘못했어... 내가 그런 말을 했으면 안 됐는데, 이젠 진짜 안 그럴게... 그러니까 제발 정신병원만큼은 보내지 말아줘...."하지만 그는 비웃기만 할 뿐, 그녀를 쳐다보지도 않은 채 병실을 나가려 하고 있었다. 임세희는 절망했다. 이대로 끌려갔다가는 정말 인생이 끝장날 것 같았다. 그녀가 날카롭게 떠나가는 그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외쳤다. "이준혁! 네가 뭔데 나한테 이래! 나도 가족이 있다고! 날 정신병원에 가두면 우리 아빠가 가만히 있을 것 같아?"이준혁이 조용히 조소를 날리며 물었다. "임요한도 네가 꾀병 부린 거 알고 있어?"아버지의 이름이 나오자 임세희는 자리에 굳어버렸다. 지금까지 그가 임세희의 아버
돌발 상황에 주훈은 우선 경호원들에게 멈추라는 신호를 보내며 이준혁을 바라봤다. 지금은 그의 지시를 기다릴 때였다. "나한테 어떻게 이럴 수가 있어! 내가 오빠 목숨도 구해줬는데!"임세희가 눈물을 짜내며 억지부리기 시작했다. ‘갚을 만큼 다 갚았다고? 누구 맘대로!’그녀는 인정할 수 없었다. 목숨을 구해준 순간부터, 이준혁은 그녀의 것이었다. 임세희는 그가 자신한테서 벗어나는 걸 용납할 수 없었다. 그리고 이준혁이라면 절대로 자신을 죽게 내버려두지 않을 거라는 확신이 있었다.아니나 다를까, 이준혁이 발걸음을 멈추며 그녀에게 다가오기 시작했다. 임세희의 표정이 환희로 가득 찼다. 목숨을 건 협박이 제대로 통한 것 같았다. 이준혁이 한쪽 무릎을 꿇은 채, 조용히 칼을 쥐고 있는 임세희의 손을 움켜쥐며 말했다."하지 마."임세희는 그동안의 설움이 해소되는 듯한 기분에 눈물이 왈칵하고 터져 나왔다.역시, 이준혁은 배신하지 않았다. 그는 차가워 보이는 것뿐, 속은 다정했던 것이다. 그렇지 않았다면 그 긴 세월 그녀를 돌봐줬을 리 없었다. 드디어 잃어버렸던 소중한 것을 다시 찾은 기분이었다.임세희가 감격스러운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그렇지? 오빠가 날 그냥 내버려둘 리 없지...."하지만 환희가 절망으로 바뀌는 것은 한순간이었다. 임세희는 손에 들고 있던 칼을 버리려고 안간힘을 썼지만, 움직여지지 않았다. 이준혁이 으스러뜨릴 듯 그녀의 손을 움켜쥐고 있었기 때문이었다.임세희가 고통에 일그러진 얼굴로 말했다. "아, 아파... 왜, 왜 그러는 거야...?"이준혁은 들은 체도 하지 않았다. 그는 묵묵히 칼을 목 위쪽, 경동맥과 더 가까운 쪽으로 움직였다. "거기 아니야. 여기, 여기를 찔러야 확실히 죽을 수 있어."차가운 칼날의 감촉을 느낀 임세희는 그대로 굳어버렸다. 뼛속까지 공포가 파고들었다. 당장이라도 칼날이 그녀의 목을 뚫고 들어올 것 같았다. "죽겠다며? 어서 찔러 봐."이준혁이 무표정한 얼굴로 말했다."아니면, 내가 도와줘?"
간호사는 애쓰는 윤혜인의 모습이 안타까워 위로했다."회복하는 동안, 왼손 쓰는 연습도 하시는 편이 좋을 거예요."간호사가 떠나간 뒤에도 윤혜인은 손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그날 유리 조각을 잡으면서 손바닥 힘줄이 손상된 것 같았다. 한동안 오른손 쓰기는 어려워 보였다. 어쩐지 힘주면 손이 떨리더라니, 이 상태론 디자인 도안은커녕 일상생활도 어려울 터였다.윤혜인은 자기도 모르게 눈물이 흘러나왔다. ‘전생에 도대체 무슨 죄를 지었기에, 하늘이 내게 이런 벌을 내리는 걸까?’처음엔 외할머니였고, 그다음엔 아이였다. 이젠 손까지, 안 그래도 가진 것이 없는데 자꾸만 빼앗아 갔다.이때, 이준혁이 문을 열고 들어왔다. 윤혜인이 울고 있는 모습을 본 이준혁은 가슴이 찢어질 것 같았다. 좀 전까지 임세희한테 잔인하게 굴던 남자는 온데간데없었다.그동안 눈이 멀어 임세희의 악행을 깨닫지 못하고 윤혜인을 방치했던 대가는 참담했다. 이준혁은 위로의 말을 꺼내려 그녀의 옆으로 다가갔다. 하지만 윤혜인은 그에게 눈길 한번 주지 않고 공기 취급했다. 이준혁은 입을 달싹거리며 머뭇거렸다. 윤혜인은 며칠간 쉬었음에도 안색이 좋아지기는커녕 점점 더 창백해지고 야위어 갔다. 이준혁은 말로 위로하는 대신 손을 뻗어 그녀의 눈물을 닦아주려 했다. 하지만 손이 채 닿기도 전에 윤혜인이 매서운 눈빛으로 그를 째려보며 말했다. "뭐 하는 거예요?"윤혜인이 냉소를 지으며 갈라진 목소리로 말했다. "밥 먹었어?"이준혁의 질문에 윤혜인은 대꾸할 가치를 못 느꼈다."이준혁 씨, 우리한테 그런 일상적인 대화, 어울린다고 생각하세요?"날카로운 비수가 그의 가슴에 꽂혔다. 그래도 이준혁은 포기하지 않고 다시 입을 열었다. "임세희는 정신병원으로 보냈어."임세희의 이름이 나왔음에도 윤혜인의 표정은 매우 무덤덤했다. 임세희 따위, 그녀에겐 더 이상 아무런 의미가 없었다. 그 모습을 본 이준혁은 가슴이 저렸다. 결국 참지 못하고 그가 윤혜인의 손을 잡으며 단호한 목소리로 말했다."
윤혜인은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이 기가 막힌 상황에 어떻게 대응해야 할지 몰랐다.그런데 이때, 갑자기 병실 문이 쾅 하고 열렸다. 그리고 이준혁이 채 반응하기도 전에 무언가가 그를 향해 날아왔다. 그것은 검은색 핸드백이었다. 핸드백이 정통으로 그의 등을 가격한 것이었다. 이어서 흰 블라우스에 검은색 바지를 입은 문현미가 살기 어린 표정으로 그의 등을 때렸다. 하지만 그래도 분이 안 풀리는지 문현미가 씩씩거리며 이준혁에게 말했다. "잘 보살피랬더니, 이게 도대체 무슨 일이야!"같은 엄마로서 아이를 잃었다는 소식에 문현미는 이루 말할 수 없는 슬픔을 느꼈다. 그동안 손주를 기다리면서 야금야금 사두었던 아기용품들도 이제 쓸모없게 되었다. 원래 윤혜인이 임신 7, 8개월에 접어들면 이태수에게도 말할 참이었다. 이 부분은 그나마 불행 중 다행이었다. 만약 미리 말했더라면, 겨우 회복한 이태수가 다시 드러누웠을 지도 몰랐다.문현미가 눈물을 흘리며 윤혜인을 끌어안았다."혜인아, 그동안 고생 많았지...."그러나 윤혜인은 눈물이 메말라 함께 울어줄 수가 없었다. 그녀가 공허한 눈빛으로 문현미에게 말했다."어머님, 저 이혼할래요."옆에 있던 이준혁이 움찔하고 몸을 떨었다. 안 그래도 윤혜인이 자꾸 이혼하자는 바람에, 그는 문현미에게 윤혜인의 입원 사실을 말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런데 문현미가 이곳에 왔다는 건, 답이 하나밖에 없었다. 윤혜인이 이혼하기 위해 지원군을 부른 것이다."혜인아, 일단 몸부터 추스르면... 나머지는 내가 해결할게.""안돼!"이준혁이 차갑게 끼어들었다. 여태껏 그가 입을 닫고 있던 터라, 문현미는 그가 옆에 있던 것을 까맣게 잊어버리고 있었다. 문현미가 화난 목소리로 그에게 외쳤다."넌 나가 있어!"하지만 이준혁은 도리어 문현미를 끌고 병실 밖으로 향했다. 그는 문현미가 뭐라 대꾸할 틈도 주지 않은 채 곧바로 주훈에게 명령을 내렸다."어머니 집까지 배웅해 드려."문현미가 이를 갈며 따졌다."너 이 녀석, 나 네 엄마
소종은 육경한이 아이들을 얼마나 그리워하는지 잘 알고 있었다.교도소 안에 있을 때 육경한은 모든 사람들의 면회를 거절했지만 마음속으로는 늘 두 아이를 그리워했다.그는 아이들에게 자신의 안 좋은 모습을 보여주고 싶어 하지 않았다.“타세요, 대표님.”소종이 침묵을 깨며 한마디 했다.육경한이 차에 타자 소종은 그동안 일어난 일들을 이야기하기 시작했다.“이 대표님 가족이 소 대표님을 잘 돌봐주셨어요. 아이들끼리도 친하게 지내고... 그리고 김 대표님도 하정이와 유진이를 돌봐주셨어요... 그리고 윤혜인 사모님의 오빠가 8년 전에 결혼했어요. 집 가정부의 딸 구지윤 씨와 결혼했어요. 처음에 할아버지가 많이 반대했지만 지금은 행복하게 잘살고 있어요. 딸을 낳으면서 할아버지도 받아들이셨고요... 아, 참. 예전에 소 대표님과 친하게 지냈던 여경 강민혜 씨, 기억하시죠? 소 대표님의 친동생이었더라고요. 당시 소 대표님의 어머니가 과다 출혈로 위독하셨을 때 그 여경이 수혈해 줬거든요. 소 대표님이 두 사람의 혈액형이 같은 것을 알고 친자 확인을 했더니 강민혜 씨가 정말 친동생이었어요. 예전에 도둑맞아 죽었다고 알려졌던 아이가 사실은 살아 있었던 거죠...”소종이 이야기를 하는 사이 차는 어느새 호화로운 호텔 앞에 도착했다.그들이 육경한을 위해 환영회를 준비한 듯했다.육경한이 말했다.“이런 거 필요 없어. 어떤 모임에도 참석하고 싶지 않아. 그냥 쉬고 싶어.”그러자 소종이 바로 말했다.“안 돼요. 오늘 식사 자리에는 꼭 가야 해요.”황진수도 말했다.“맞아요, 육경한 씨. 소소하게 준비한 것이니 우리 마음을 봐서라도 꼭 참석해 주세요.”마지못해 차에서 내린 육경한은 호텔 룸에 들어간 순간 방 안에 익숙한 얼굴들이 가득한 것을 보았다.예쁜 소녀가 육경한에게 다가오더니 큰 눈을 깜빡이며 그를 보고 말했다.“그쪽이 우리 아빠예요?”자신과 닮은 소녀의 눈매에 육경한은 순간 말을 잇지 못했다.육하정이 계속 말했다.“엄마가 말했어요. 아빠가 잘못을 저질러
법정 안, 판사가 선고했다.“피고인 육경한, 살인죄로... 그러나 피해자와의 갈등 관계를 고려하고 증인의 증언을 종합하여 본 법정은 다음과 같이 판결합니다. 육경한에게 징역 20년을 선고합니다...”“대표님...”방금 깨어나서 법정에 나와 주석훈의 살인을 증언한 소종은 울며 육경한을 불렀다.뒤에 서서 두 달 된 아기를 안고 있는 소원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 눈시울은 이미 붉어져 있었다.아기의 얼굴과 핑크색 이불을 본 육경한은 만족스러운 표정을 지었다.그는 더 이상 소원에게 할 말이 없었다. 대신 소종을 보며 한마디 했다.“잘 돌봐줘.”육경한이 누구를 말하는지 바로 캐치한 소종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대표님, 걱정하지 마세요. 대표님이 나올 때까지 기다릴게요.”...15년 후, 구치소 대문 앞.15년 전 입소할 때 입었던 옷을 입고 나온 육경한은 여전히 가슴을 펴고 당당하게 걸었다.교도소에 있는 동안 좋은 표현 덕분에 감형을 받아 조기 출소했다.10여 년의 세월이 흐른 지금, 육경한의 얼굴에 시간의 흔적이 고스란히 남아 있었지만 왠지 모르게 더 깊고 온화한 매력을 내뿜었다.구치소 밖에서는 황진수와 소종이 육경한을 기다리고 있었다. 소종이 가장 먼저 달려와 그를 붙잡고 울었다.“대표님, 고생 많으셨어요!”키가 185cm나 되는 팔이 하나뿐인 남자가 눈물을 흘리며 울부짖고 있었다.“대표님...”옆에 있던 황진수가 육경한에게 담배를 건네자 담배를 받은 육경한은 깊게 빨아들인 뒤 말했다.“내 재봉 솜씨가 얼마나 좋은지 알아? 나중에 너희들에게 옷 한 벌 만들어 줄게.”소종은 정말 어이가 없었다.슬픈 분위기가 육경한의 한 마디에 완전히 뒤바뀌었다.소종이 울다가 웃으며 말했다.“대표님, 기대하고 있을게요.”육경한이 코웃음을 쳤다.“꺼져.”먼 곳을 바라본 육경한은 소종과 황진수 외에 그를 맞이하러 온 사람이 없는 것을 보고 왠지 실망감이 들면서도 한편으로는 안도감도 들었다.그녀가 오지 않아도... 괜찮았다.결코 좋은
“두 번째 것을 선택할게.”죽어도 소원을 구하겠다는 결심을 하고 온 육경한이었기에 고민할 필요 없이 바로 대답했다.“허허, 육 대표가 소원을 정말 많이 아끼나 봐.”주석훈이 비꼬는 듯한 말투로 한마디 했다.“그럼 시작하지. 육 대표, 6년 전 교통사고를 당했을 때 죽은 소녀의 이름이 뭔지 기억나?”자리에 얼어붙은 육경한은 주석훈이 혹시라도 소원을 해칠까 봐 바로 앞으로 두 걸음 걸었다. 덫이 ‘탁탁’ 소리를 내며 그의 두 다리를 집었고 이내 피가 철철 흘렀지만 육경한은 극심한 고통을 참으며 말했다.“몰라.”손에 칼을 움켜쥔 주석훈은 이를 갈며 말했다.“그 소녀의 이름은 수정이야. 육 대표처럼 모든 지원을 다 받아 치료받은 사람은 기억하지 못하겠지.”큰 고통 속에도 맑은 정신을 유지하고 있던 육경한이 입을 열었다.“그 교통사고에서 소녀가 죽은 것은 알고 있었어. 하지만 나는 우리 미우 그룹의 병원에서 치료를 받았어. 그 사람들이 나를 먼저 치료한 이유는 대동맥이 눌러져 위급한 상황이었기 때문이야. 하지만 그 소녀도 나와 똑같이 심각한 상태라는 것은 예상하지 못했어. 그래서 그 후에 소녀의 가족에게 위로금도 보냈어.”육경한의 책임은 아니었지만 소녀가 꽃다운 나이에 세상을 떠나 그녀의 부모님이 통곡하는 모습을 본 육경한은 소종을 시켜 소녀의 가족에게 2억 원의 위로금을 전달했다.“내가 네 말을 믿을 것 같아?!”주석훈이 매서운 눈빛을 내뿜으며 큰소리로 외쳤다.“어쨌든 넌 살아남았고 나의 수정이는 떠났어. 아무도 우리 수정이에게 신경을 쓰지 않았지!”주석훈은 더 이상 게임 따위 생각하지 않은 채 미친듯이 울부짖었다.“너희들은 모두 냉혈 인간들이야. 너희들은 죽어도 싸!”말을 마친 주석훈이 칼을 휘둘러 소원의 배를 찌르려 하자 육경한은 재빨리 몸을 날려 자신의 종아리로 칼을 막았다.소원을 밀어낸 육경한은 격렬한 고통을 참으며 주석훈과 맞붙었다.팔다리가 멀쩡한 주석훈은 이내 다리가 다친 육경한보다 우위를 점했다.도우려고 한 발 나선 소
이후 남자는 기분이 좋은 듯 소원의 입에 물린 천을 빼주며 말했다.“어떻게 여기에!”소원은 깜짝 놀랐다. 눈앞에 있는 사람은 바로 그녀를 계속 도와주던 주석훈이었다!자신에게 접근한 의도를 의심한 적은 있었지만 나중에 그의 여자친구가 병으로 사망했다는 얘기를 듣고 자신과는 원한이 없을 거라고 생각했다.그런데 이 모든 사건의 배후가 주석훈이라니...“소원, 많이 놀랐지?”가면을 벗어 던진 주석훈은 마치 조금 전까지 잔인했던 사람이 본인이 아닌 듯 아주 평온해 보였다.“왜... 이렇게까지?”소원은 처음에 이해할 수 없었지만 자연스럽게 왼손을 사용해 물건을 잡는 모습을 보고 바로 깨달았다.“너였어!”소원은 확신에 찬 얼굴로 말했다.“상철 삼촌과 진아연을 죽인 사람이 너! 맞지?!”주석훈은 부인하지 않았고 그의 표정 또한 모든 걸 말해주듯 가볍게 웃으며 한마디 했다.“소원, 그 사람들은 죽어도 싼 사람들이야. 그들이 죽었으니 네가 기뻐해야 하는 거 아니야? 그 사람들이 공모해서 네 아버지를 죽였잖아?”“아니야!”소원은 단호하게 부정했다.“그 사람들은 단순히 조종당한 희생양일 뿐이야. 내 아버지를 죽인 진짜 범인이 너였어?! 넌 그냥 증거 인멸을 한 거야!”“소원, 정말 똑똑하네?!”칭찬하듯 한마디 한 주석훈의 말에 소원은 분노로 가득 차올라 외쳤다.“왜! 아빠가 뭘 잘못했다고 죽인 건데?!”주석훈은 음흉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소원, 네가 모를 거라고 생각했어. 이유? 알고 싶어? 나와 육경한 사이에 깊은 원한이 있기 때문이야.”“그게 아빠와 무슨 상관인데!”소원은 아무리 생각해도 이해가 되지 않았다.“이렇게 간단한 이치를 모른다고?”주석훈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소진용이 죽어야만 너와 육경한의 갈등을 최대로 끌어올릴 수 있으니까. 넌 내 손에 있는 최고의 무기야. 넌 육경한에게 끔찍한 고통을 안겨 줄 수 있는 존재지. 지난 5년 동안, 본인만의 원칙이 있는 사람이 그것을 깨고 괴로워하는 모습을 보는 게 얼마나 즐거운
소원이 두 손을 머리 위로 든 채 남자의 방향으로 걸어가자 남자는 다친 전미영을 바닥에 내던졌다.전미영은 이미 의식을 잃었기에 지금 상태가 어떤지 알 수 없었다.소원은 체념한 듯 보였지만 사실 남자에게 가까이 다가가면서 몰래 반지 속의 장치를 작동시켰다.이내 독이 묻은 바늘로 남자의 팔을 찌르자 팔이 곧바로 마비되기 시작한 남자는 저린 감각이 팔을 타고 온몸으로 퍼져 나가는 것을 느꼈다.“망할 년! 감히 날 속여?”남자는 분노하며 소원을 발로 걷어찼다.배를 보호하기 위해 몸을 돌린 소원은 엉덩이가 세게 걷어차인 바람에 비틀거리며 앞으로 두 걸음 나아갔다. 다행히 앞에 소파가 있었기에 소파를 붙잡고 간신히 몸의 균형을 잡은 뒤 있는 힘껏 소리쳤다.“살려 주세요! 도와주세요...!”그러나 남자가 바로 달려와 순식간에 손수건으로 그녀의 입을 틀어막았다.최면제의 효과가 서서히 올라옴과 동시에 문을 걷어차는 소리와 몇 발의 총성이 희미하게 울리는 것이 들렸다.소원은 속으로 간절히 기도했다.‘제발 엄마를 구해 주세요...’그러고는 있는 힘을 다해 목걸이를 바닥으로 내던진 뒤 점점 의식을 잃고 깊은 잠에 빠져들었다.희미하게 정신을 차렸을 때는 운송 차 안인 듯한 밀폐된 공간에 갇혀 있었다.입안에는 천이 틀어막혀 있었고 팔도 밧줄에 단단히 묶여 있었다.순간 소원은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결국 구출되지 못하고 가면을 쓴 남자에게 끌려온 것이다.주위에 전미영이 보이지 않자 소원은 그제야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엄마가 같이 끌려오지 않은 것만으로도 다행이야. 현장에 있던 사람들이 엄마를 병원으로 옮겼을 거야. 그러면 희망이 있어.’하지만 엄마의 상태가 어떤지 알 수 없었기에 속으로 행운을 빌며 기도할 수밖에 없었다.그리고 이 납치범에 대한 분노가 가슴 속 깊이 밀려왔다.‘이 사람은 대체 우리와 무슨 원한이 있길래 이런 짓을 하는 거지?’덜컹거리며 달리는 차 안에 있는 소원은 졸음이 밀려왔다.임신 후기라서 그런지 이런 상황에서도 극심한 피
육경한이 진지한 목소리로 말했다.“지금 바로 그 여경을 찾아서 같이 있도록 해. 이 사람이 아직도 쇼핑몰 안에 있을 가능성이 커. 나도 지금 돌아가는 중이야...”소원은 순간 숨을 죽인 채 눈도 깜빡이지 않고 앞을 응시했다.바로 앞에 하얀 여우 가면을 쓴 남자가 한 중년 여성을 붙잡고 있었다. 그 중년 여성이 바로 모두가 찾는 전미영이었다.육경한의 말대로 그녀의 엄마는 정말 여기에 있었다.육경한의 목소리가 전화기 너머로 계속 들렸지만 소원은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전미영은 처음부터 끝까지 밖으로 나가지 않았다. 가면을 쓴 이 교활한 남자는 사람을 쇼핑몰 안에 붙잡아둔 채 밖으로 나가지 않았던 것이다.‘등잔 밑이 어둡다’라는 말이 괜히 있는 것이 아니었다.가짜 번호판 차량은 아마도 이 남자가 미리 파놓은 함정일 것이다.그녀가 상상한 것보다 훨씬 똑똑한 이 사람은 다른 사람의 심리를 읽을 줄 알았다.가면 쓴 남자는 손가락을 입에 대며 ‘쉿’ 하는 제스처를 취하더니 소원에게 말을 하지 말고 전화를 끊으라는 뜻을 내비쳤다.자기 엄마가 상대방의 손에 있기에 소원은 그의 말에 따를 수밖에 없었다.전화를 끊은 후 가면을 쓴 남자가 그녀에게 한마디 지시했다.“전화기를 꺼서 이쪽으로 던져.”소원은 남자의 말대로 순순히 전화기를 끄고 그의 앞에 던진 후 한마디 물었다.“누구세요? 지금 뭘 원하는 거예요? 제발 우리 엄마만 해치지 마세요!”간신히 마음을 진정시킨 소원은 남자를 향해 두 가지 질문을 던졌지만 그녀의 유일한 요구는 상대방이 엄마를 해치지 않는 것이었다.말을 하면서도 소원은 몰래 주변을 관찰했다. 가면 쓴 신비로운 남자는 정말 교묘한 장소를 선택했다.화장실은 휴게실 제일 안 쪽에 있었고 뒤쪽에 있는 창문과 거리가 가까웠다.남자는 전미영을 붙잡고 입구 쪽에서 소원과 정면으로 마주서 있었다. 이렇게 하면 좁은 포위망이 형성되어 소원을 한 구석에 가둘 수 있다.남자는 손에 흉기를 들고 있었을 뿐만 아니라 자체적으로 제작한 권총 비슷한 것
강민혜는 즉시 지시를 내려 이 수상한 차량을 중점적으로 조사하라고 했다. 육경한이 회사의 위기 대응팀과 협력해 조사하라고 지시하자 그들은 이내 차량의 이동 경로를 찾아냈다.육경한은 즉시 차량을 출동시켜 추적하도록 했지만 소원더러는 가만히 있으라고 했다. 현재 상대방의 목표가 소원의 엄마가 아니라 임신 중인 소원일 가능성이 컸기 때문이다.게다가 차량 추격은 너무 자극적이어서 소원 같은 임산부에게 위험할 수 있었다.소원은 육경한이 그녀를 배려하기 위해 이렇게 하는 것임을 알았다. 이런 상황에서 소원이 차량 추격에 참여해 무슨 일이라도 생기면 큰일이다. 어머니를 찾지 못하고 본인까지 안 좋은 상황이 되면 두 마리 토끼를 다 놓친 셈이 된다.육경한의 부탁에 소원은 그의 말에 따라 자리에서 기다리기로 했다. 육경한은 회사 경호원 한 팀을 불러 상대방의 차량을 추적하도록 했다.쇼핑몰에 남아 있는 경호원들은 움직이지 않고 그 자리에서 소원을 경호했다. 소원의 걱정을 덜기 위해 육경한도 차량 추적에 나섰다.이렇게 되어 여러 대의 차량이 CCTV에 찍힌 그 검은 차를 추적하기 시작했다.소원은 쇼핑몰의 휴게실에서 초조하게 기다렸다. 불안감에 휩싸인 그녀는 심박 수가 빨라져 의사가 와서 경고하기도 했다. 이렇게 되면 그녀의 몸에도 해로울 뿐만 아니라 조산할 위험이 있기 때문이다.소원이 걱정된 강민혜는 현장에 남아 그녀를 달랬고 소원이 화장실에 갈 때도 한 발짝도 떨어지지 않고 함께했다.소원은 마음을 진정시키기 위해 화장실에 가서 찬물로 세수를 했고 강민혜도 옆에서 그녀를 위로했다.“소원 씨, 걱정하지 마세요. 어머님은 분명 괜찮을 거예요. 그렇게 큰 고비도 넘겼는데 별일 없을 거예요. 게다가 경찰과 육 대표님이 모두 추적하고 있잖아요. 그러니 마음 놓으세요.”본인이 아무리 불안해해도 소용없다는 것을 알고 있는 소원은 육경한이 좋은 소식을 전해주길 간절히 기다렸다. 하지만 불편한 몸 때문에 자꾸 구역질이 났다.이때 소원의 전화가 울렸다.육경한이었다.당황한
육경한이 성큼성큼 다가가 물었다.“왜 그래, 장모님은?”“엄마가 사라졌어...”소원이 흐느끼는 목소리로 말했다.방금 충돌이 일어났을 때만 해도 전미영은 그녀 곁에 서 있었다.어떻게 된 일일까... 눈 깜짝할 사이에 전미영이 사라졌다.전미영은 걸을 수는 있지만 말을 잘하지 못하고 지능도 두세 살 아이 수준인데 도대체 어디로 갔을까...소원이 급히 찾으러 가려 하자 육경한이 그녀의 손을 잡으며 달랬다.“너무 급해 하지 마. 우선 CCTV를 보자. 경호원들에게 찾으라고 했어. 네가 걷는 것보다 경호원들이 움직이는 게 빨라.”소원도 육경한의 생각이 맞다고 생각했다. 지금은 최대한 침착한 마음가짐으로 엄마를 찾아야 했다. 절대 당황하면 안 되었다.두 사람이 CCTV 실로 향했을 때 안에 있던 사람들은 이미 전미영이 사라지는 영상을 찾아냈다.영상을 보니 전미영은 처음에는 경호원의 뒤, 소원 곁에 서 있었다.하지만 조금 전 말싸움이 일어나면서 그 남자가 경호원과 몸싸움을 하려 하자 경호원들은 소원이 다칠까 봐 소원과 육경한 주변으로 몰렸다.그러면서 전미영은 자연스럽게 뒤에 갔다. 원래대로라면 전미영도 별일 없어야 했지만 무슨 일인지 전미영이 갑자기 혼자 모퉁이 쪽으로 걸어갔다. 마치 그곳에 그녀를 끌어당기는 뭔가가 있는 것처럼 말이다.그녀는 불과 7, 8걸음 되는 모퉁이까지 아주 빠른 속도로 걸어갔다. 한편 소원과 육경한에게 정신이 팔린 경호원들은 전미영을 발견하지 못했고 전미영이 뒤에서 사라질 때까지 아무도 눈치채지 못했다.다음 모퉁이의 CCTV에는 소원이 비상구로 들어가는 것이 찍었다. 계단에 CCTV가 없었고 출구에 CCTV가 한 대 있었지만 전미영의 모습은 어디에도 찍히지 않았다. 즉 전미영이 출구로 나가지 않았다는 것을 의미했다.그렇다면 유일한 통로는 지하 주차장이었다. 하지만 지하 주차장 출구의 CCTV가 때마침 고장이 나 있어 전미영이 그 출구로 나갔는지 확인할 수 없었다.전미영이 실종된 지 불과 몇 분, 실종자를 한 시간 이내에
두 모자가 가식적으로 불쌍한 척하며 사람들의 동정을 구걸한 것을 안 사람들은 순간 말문이 막혔다.그 모자를 제일 먼저 도우려고 나섰던 남자는 고개를 숙이며 소원에게 사과했다.“죄송해요. 제가 눈이 어두웠네요. 이런 말썽꾸러기 아이는 정말 톡톡히 교육해야 해요. 얼마든지 책임을 물으세요.”주변 사람들도 같은 입장이었다.입장을 바꿔 생각해 봤을 때 본인이 이런 말썽꾸러기 아이를 만난다면 분명 화가 날 것이다.게다가 이 모자는 역할 분담이 명확했다. 아들은 말썽을 부리고 엄마는 말재주를 발휘해 변명했다. 누구나 이런 일이 생긴다면 진짜로 화가 날 것이다.구경꾼들이 흩어진 후 육경한은 두 모자의 앞으로 한 걸음 앞으로 나아가더니 아이를 내려다보며 싸늘한 목소리로 말했다.“누가 시킨 거야?”엄마가 아이를 뒤로 끌어당기며 말했다.“아무도 없어요! 아무도 없다고 했잖아요. 그냥 우리 애가 장난친 거예요.”여자는 눈물을 흘리며 흐느꼈다.“왜 이래요... 우리가 그냥... 사과할게요... 아이고, 내가 왜 이렇게 불행한지...”그들은 완전히 피해자 행세를 하고 있었다.이런 상황에서도 여전히 자신이 피해자인 척하고 있으니 말이다.하지만 그들의 눈빛은 이미 흔들리기 시작했고 주위 사람들과 눈을 마주치지 못하는 모습은 보기에도 이상해 보였다.조금 지친 소원이 육경한의 손을 잡아당기며 말했다.“됐어, 이만 가자.”“1분만 기다려.”뭔가 이상하다고 느낀 육경한은 아이를 뚫어지게 바라보더니 압박감이 넘치는 목소리로 물었다.“누가 너를 시켰는지 말해. 안 그러면 바로 고소할 테니까.”겁이 많은 아이는 바로 오줌을 지리더니 이내 ‘와’하고 울음을 터뜨리며 말했다.“아저씨가...”아이의 엄마는 아이의 입을 막으려 했지만 이미 늦었다. 육경한이 아이의 엄마를 밀어내고 차가운 눈빛으로 아이를 바라보며 말했다.“똑바로 말해!”“어떤 아저씨가... 아주머니와 부딪히면 엄마에게 100만 원을 준다고 했어요... 엄마가 그러면 게임기를 사주겠다고 했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