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g-log in"이십 년 전 해온 선배의 위치를 본부에 보고한 사람은 접니다." 늘 규정 뒤에 서 있던 선희가 새벽 휴게실에서 처음으로 무너졌다. 정확해서 더 잔인했던 보고서, 열지 못한 채 이십 년을 서랍에 묵힌 편지 한 통. 그 안에는 선배의 마지막 당부가 있었다. "규정에 없는 일에 서명할 날이 오면 두려워하지 마라." 사유란에 그녀가 쓴 한 줄은 이것이었다. '규정에 없음. 서명자 개인의 판단.' 그리고 밝혀진 또 하나의 비밀. 강휘는 해온의 가장 가까운 동기였다.
"얼굴에 붙이시면 됩니다. 저승 팩이에요."덕순이 하얀 시트를 내밀었다. 무장승은 그것을 두 손으로 받아 들고 한참을 들여다보았다. 총무팀 휴게 공간에는 방석이 둘러 깔려 있었고, 가운데에는 사탕과 과자와 보리차가 산처럼 쌓여 있었다. 천장에는 누가 만들었는지 알 수 없는 반짝이 장식이 달려 있었다. 현수막에는 굵은 글씨가 적혀 있었다. 청문회 필승 전야제."...이것을 어디에 붙인다고?""얼굴이요.""어느 부분에?""전체요. 눈구멍, 코구멍, 입구멍 있어요.""...구멍이 세 개 뚫린 흰 천을 얼굴에 붙이라는 것이오?""네! 피부가 촉촉해지고 긴장이 풀려요.""긴장은 천으로 풀리는 것이 아니오.""해 보시면 알아요."무장승은 한참 망설이다가 시트를 펼쳤다. 얼굴에 가져다 대고 구멍을 맞추었다. 반듯하게 붙이느라 거울 앞에서 삼 분을 보냈다. 붙이고 나자 정말로 구멍 세 개 뚫린 흰 얼굴이 되었다. 바리는 그 모습을 보고 쓰러지듯 방석에 엎드렸다. 숨을 쉴 수 없을 만큼 웃었다."팀장님, 지금... 조각상 같아요... 아니, 진짜 조각상인데...""...웃지 마시오.""안 웃어요... 풉... 안 웃을게요...""이미 웃고 있지 않소.""그러니까 안 웃는 중이에요..."구석에서는 국장이 방석을 베개 삼아 코를 골고 있었다. 얼굴에는 팩 대신 낚시 모자가 덮여 있었다. 덕순이 그 옆에서 수첩에 무언가를 열심히 적었다. 바리가 눈물을 닦으며 물었다."덕순 씨, 뭐 적어요?""내일 심의에서 쓸 응원 구호요. 세 개 준비했어요.""세 개나요?""'규정은 사람을 위해', '인연은 서류보다 위', '국물은 끝까지'.""마지막 건 무슨 뜻이에요?""그냥 이 팀의 구호예요. 이제.""세 개 다 외워야 하오?""팀장님은 마지막 것만 외우세요. 나머지는 제가 외칠게요.""...왜 마지막 것이오.""그게 제일 팀장님한테 어울려서요."무장승이 입을 열었다가 닫았다. 구호가 어울린다는 말을 들은 것은 오백 년 만에 처음인 듯한 얼굴이었
"이십 년 전에 해온 선배의 위치를 본부에 보고한 사람은 접니다."선희는 그 말을 하고 나서 한동안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찻잔도 들지 않았고, 서류도 펼치지 않았다. 제3팀 휴게실 구석 의자에 곧게 앉은 채로, 무릎 위에 올린 두 손만 내려다보았다. 새벽이 가까운 시간이었다. 형광등 하나가 깜빡이는 소리가 유난히 크게 들렸다.바리는 들고 있던 종이컵을 내려놓았다. 무장승은 그녀 옆자리에서 몸을 굳혔다. 도윤은 문가에 서서 숨을 죽였다. 휴게실 한쪽 수레 위에서는 민 주임이 종이 더미를 이불 삼아 곯아떨어져 있었다. 사탕 껍질이 손에서 반쯤 풀려 있었다."...그게 무슨 말이오."무장승의 목소리는 낮았다. 오히려 그 낮음이 방 안의 공기를 더 무겁게 눌렀다."입사 이 년 차였습니다. 해온 선배의 직속 후배였고요. 선배가 사라지기 전날, 저는 정기 위치 보고서를 제출했습니다. 규정대로. 정확하게. 한 줄도 틀리지 않게.""그게 왜 문제요.""선배가 그날 일부러 위치를 흐려 놓았기 때문입니다. 저는 그걸 몰랐습니다. 흐려진 위치를 정확하게 보정해서 올렸습니다. 후배로서 성실했던 거죠."선희가 웃었다. 웃음이라기에는 입가가 너무 얇게 당겨져 있었다."그 보고서가 제1팀으로 넘어갔고, 해온 선배는 이틀 뒤에 관측 정지 처분을 받았습니다. 그게 선배가 이십 년 동안 실을 붙잡고 지내야 했던 일의 시작이었습니다.""그건 선희 씨 잘못이 아니에요."바리가 말했다. 선희는 고개를 저었다."규정을 따랐을 뿐이라는 말은 이십 년 동안 제 입으로 수천 번 했습니다. 그런데 한 번도 위로가 된 적이 없었습니다."휴게실이 조용해졌다. 민 주임의 코 고는 소리가 작게 이어졌다. 도윤이 손에 든 보리차 보온병을 만지작거리다가 조용히 말했다."선배, 그건 제가 처음 듣는 이야기입니다.""처음 말하니까.""왜 지금 하십니까.""내일이 심의니까."선희가 일어섰다. 휴게실 벽 한쪽의 작은 서랍장에서 낡은 봉투 하나를 꺼내 왔다. 누렇게 바랜 종이에 가느다란 글씨
"차 드시겠습니까?""괜찮습니다.""차 드시겠습니까?""괜찮다고 말씀드렸습니다.""그럼 여기 두겠습니다. 식으면 드세요."덕순이 감사단원 앞에 찻잔을 탁 내려놓았다. 이미 열한 번째 잔이었다. 회의 탁자는 찻잔으로 빼곡했다. 보리차, 둥굴레차, 유자차, 쌍화차, 옥수수차, 결명자차, 대추차까지. 감사단원 세 명은 서류철을 가슴에 안은 채 꼼짝도 하지 않고 앉아 있었다. 그들 앞에서 차가 식어 가는 모습은 일종의 항의 시위 같았다."저, 총무팀장님. 저희는 업무 중입니다.""저도 업무 중입니다. 접객 업무요.""접객은 업무 규정에 없습니다.""제 개인 규정입니다. 근거는 없지만 사랑입니다."회의실 문 쪽에서 헛기침이 났다. 국장이 낚시 조끼 차림으로 서 있었다. 한 손에는 사탕 주머니, 한 손에는 낚싯대 케이스를 들고. 그는 느긋하게 걸어 들어와 감사단원들 앞에 앉더니 사탕을 한 줌씩 나누어 주었다."자, 드시게나. 입이 심심하면 감사도 짜증 나는 법이야.""국장님, 저희는 본부에서 파견된 임시 감사단으로...""알아, 알아. 근데 그 감사라는 게 지금 바로 해야 하는 건가? 물때라는 게 있잖아.""물때요?""감사든 낚시든 때가 있어. 지금은 썰물이야. 한 세 시간 기다리면 밀물이 오는데, 그때 하면 훨씬 잘 걸려.""국장님, 저희는 낚시가 아니라...""그게 그거야."감사단원 하나가 얼떨결에 사탕을 받아 입에 넣었다. 다른 하나가 그걸 보고 눈을 크게 떴다. 입에 넣은 단원은 순간 어쩔 줄 모르는 얼굴로 눈을 굴렸다. 오래 묵은 설탕 맛이 입안에 퍼진 것이었다."맛있죠?""...맛은 있습니다만 이게 뇌물로 간주될 수 있는지 규정을 확인해야...""사탕 하나는 뇌물이 아니라 인정이야.""인정은 규정에 없습니다.""그러니까 규정 밖에 있는 거지. 규정 밖엔 좋은 것들이 많아."그때 회의실 뒷문이 열리고 무장승이 서류 수레를 끌고 들어왔다. 수레 위에는 서류철이 탑처럼 쌓여 있었다. 그 뒤를 바리가 따라 들어왔다. 둘 다
"그 숟가락을 만져 봐도 되겠냐."오구는 바리가 대답하기도 전에 손을 내밀었다. 링거 바늘이 꽂힌 손등이 가늘게 떨렸다. 바리는 숟가락을 건네려다 멈칫했다. 무장승이 의자에서 반쯤 일어서 있었다. 아주 짧은 순간이었지만, 바리는 그가 숟가락을 아버지에게 넘겨도 되는지 고민한다는 것을 알았다."괜찮아요, 팀장님. 아빠예요.""...알고 있소.""그럼 앉으세요.""...앉겠소."오구가 숟가락을 받아 들었다. 한참 동안 가만히 쥐고 있다가, 엄지로 손잡이 끝을 천천히 문질렀다. 그의 눈이 가늘어졌다. 안경을 쓰지 않아서 잘 보이지 않는 모양이었다. 바리가 침대 옆 서랍에서 돋보기를 꺼내 건넸다."이십 년 동안 한 번도 읽은 적이 없다고 했잖냐.""네.""사실은 읽으려고 한 적은 있다. 그때마다 글씨가 번졌어. 눈이 침침해서 그런 줄 알았는데, 이제 보니 아니구나."오구가 돋보기를 눈에 대고 숟가락을 불빛에 비췄다. 한참을 들여다보다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읽히네. 두 글자. 장, 승."병실 안이 고요해졌다. 옆 침대 할아버지도 신문을 내려놓았다. 무장승은 의자 팔걸이를 잡고 있었다. 손가락이 하얗게 질려 있었다."사람 이름 같은데 이상하지. 우리 집안에 그런 이름이 있었나 싶어서 한참 생각했다. 없었어.""아빠, 그날 아침에 엄마가 뭐라고 했어요?""그날?""사라지던 날이요."오구는 돋보기를 내려놓았다. 숟가락을 무릎 위에 올려놓고 창밖을 바라보았다. 오후 햇빛이 병실 바닥에 길게 누워 있었다. 그는 말을 시작하기 전에 마른기침을 두 번 했다."그날 아침에 국을 끓였다. 해온이가. 평소엔 내가 끓이는 날이었는데, 그날따라 자기가 끓이겠다고 하더구나. 무를 크게 썰어 넣고, 파는 송송 썰어서. 나한테 한 숟갈씩 떠먹여 주면서 그러더라. '당신, 국물은 꼭 마셔야 해. 그래야 안 추워.'"바리의 손이 입가로 올라갔다. 무장승이 눈을 감았다."그 말이 이상했다. 해온이는 평생 그런 말을 한 적이 없었거든. 그런데 그날 처음으로 했어
"이 양반이 누구요. 장의사요?"병실 침대에 반쯤 기대앉은 오구가 무장승을 올려다보며 첫마디를 뱉었다. 바리는 문턱에서 한쪽 눈을 감았다. 올 것이 왔다. 검은 정장, 각 잡힌 자세, 오백 년 동안 한 번도 웃어 본 적 없는 얼굴. 병원에서 이런 사람을 만나면 누구라도 같은 생각을 할 만했다."아빠, 장의사가 아니고요.""그럼 보험 설계사요?""그것도 아니고요.""아직 안 죽었소. 보험도 이미 들었고.""...."무장승은 허리를 정확히 사십오 도로 숙인 채 입을 열었다."따님과 같이 왔습니다.""그건 보면 알지. 그러니까 당신이 뭐 하는 사람이냐고.""...명부 관리국, 관문통과심사팀 팀장이오.""명부? 호적계 직원이오?""비슷하오.""비슷한 게 아니라 거의 같은 거지."오구가 고개를 끄덕였다. 바리는 입술을 깨물었다. 저승의 호적계라니, 틀린 말은 아니었다. 다만 아버지가 그 말을 곧이곧대로 받아들이는 순간, 이 대화는 어디로 튈지 알 수 없었다."그래서 우리 딸이랑은 무슨 사이요.""보증인이오.""무슨 보증을 서요?""...배우자 보증이오."병실 안이 조용해졌다. 링거 방울이 똑 떨어지는 소리가 들렸다. 옆 침대의 할아버지가 신문을 접었다. 간병인 아주머니가 걸레질을 멈췄다. 바리는 눈을 질끈 감았다."배우자.""...그렇소.""내 딸이 혼인신고를 했다는 거요?""서류상으로는 그러하오. 다만 아직 정식 절차는...""서류상으로 혼인했는데 나는 몰랐다 이거요."오구가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링거대가 흔들렸다. 바리가 당황해서 달려가 아버지 어깨를 눌렀다."아빠, 누워 계세요. 설명할게요.""설명은 필요 없고. 이 양반한테 몇 가지만 물어봐야겠다.""무슨 질문요.""사위 될 사람한테 물어볼 건 정해져 있지. 나이, 월급, 술, 본관."바리는 천장을 올려다보았다. 이 상황에서 '나이'가 제일 위험했다. 무장승은 정직한 사람이었다. 정직하게 오백 년이라고 답할 사람이었다."나이부터 대시오.""....""왜
"밥은 먹었니?"바리는 문 앞에서 그대로 굳었다. 이십 년 만에 만난 엄마가 한 첫마디가 그것이었다. 천장에서 실이 내려오는 본부장실 한가운데, 낮은 탁자 앞에 한 여자가 앉아 있었다. 단정하게 묶은 머리, 낡았지만 깨끗한 회색 제복, 바리와 똑같이 처진 눈꼬리. 얼굴이 희미하게 투명했다. 손등 너머로 방석 무늬가 비쳐 보였다."...엄마?""응. 밥은 먹었어? 여기 오는 길이 멀었지?""어묵 먹었어요.""어묵이 밥이니.""국물도 마셨어요."해온의 눈이 크게 열렸다. 입술이 달싹거렸다. 그러다가 웃음인지 울음인지 모를 소리가 새어 나왔다. 바리는 그 소리를 듣자마자 달려갔다. 무릎을 꿇고 엄마를 껴안았다. 팔이 허공을 지나치지 않을까 겁이 났는데, 몸은 분명히 있었다. 가볍고 서늘했다. 겨울 빨래 같은 냄새가 났다."왜 이렇게 가벼워요.""실을 붙잡고 있으면 그래. 조금씩 닳거든.""실이요?""네 실."해온이 천장을 올려다보았다. 금빛 가닥이 바리의 머리 위로 길게 내려와 있었다. 그 가닥의 중간쯤에 은색 실 한 줄이 감겨 있었다. 해온의 손목에서 뻗어 나온 실이었다."끊어지지 않게 이십 년 동안 잡고 있었어. 놓으면 네 인연이 한꺼번에 풀려 버리니까. 그런데 요즘은 내 손이 먼저 닳아서...""엄마.""괜찮아. 놀라지 마. 네 실이 가늘어지는 건 네 잘못이 아니고, 내 잘못도 아니야."해온의 시선이 문가로 옮겨 갔다. 거기에는 무장승이 서 있었다. 정장 단추를 정확히 두 번 채운 채, 양손을 배 앞에 모으고, 허리를 정확히 사십오 도로 숙이고 있었다. 이마에 땀이 맺혀 있었다."....""....""...."일 분이 지났다. 해온은 가만히 기다렸다. 바리는 엄마 품에서 고개를 빼꼼 내밀고 그 광경을 구경했다. 이 사람이 국장의 가르침을 진짜로 지키고 있었다. 침묵을 못 견디는 게 무례한 거라고 했던 그 말을."...어머니."마침내 무장승이 입을 열었다. 목소리가 갈라져 있었다."따님과 같이 왔습니다."해온이 손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