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곱째 공주, 저승 서방님을 길들이다

일곱째 공주, 저승 서방님을 길들이다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10-06
By:  라온하제Updated just now
Language: Korea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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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고 싶으면, 저와 결혼하십시오." 아빠 병원비 벌다가 트럭에 치여 죽은 스물여덟, 눈떠보니 저승 관리국 민원실. 살릴 방법은 단 하나, 49일간 관문을 통과해 생명수를 얻는 것. 근데 조건이 하나 더 있단다. 냉미남 심사관 무장승과의 계약결혼. 500년째 웃음을 잃은 저승 조각상 팀장, 사원증 걸어주다 손끝 스치자 표정 관리 실패한다. 계약결혼으로 시작해 관문을 하나씩 넘을 때마다 깊어지는 로맨스와 손등에 뜨는 수상한 문양까지. 죽어서 시작된 오피스 로맨스, 이보다 더 웃프고 애틋할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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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apter 1

1화 죽었는데요, 오늘부터 출근이라뇨?

눈을 떴을 때 제일 먼저 든 생각은, '아 나 살았구나'였다.

그런데 아니었다.

천장부터가 이상했다. 병원 특유의 형광등 불빛이 아니라, 어딘가 낡고 오래된 사무용 조명이었다. 깜빡이는 것도 아니고 그냥 은은하게 밝은데, 묘하게 사람 기운을 쭉 빼놓는 색이었다. 바리는 몸을 일으키려다 말고 잠깐 멈칫했다. 몸이 이상하게 가벼웠다. 아픈 데가 하나도 없었다. 트럭에 치이는 순간까지 생생하게 기억나는데, 지금은 어깨도 안 아프고 다리도 멀쩡했다.

'어? 나 안 아파?'

발밑을 내려다보니 사고 났던 순간 신고 있던 낡은 운동화 그대로였다. 신발끈에 흙 좀 묻어있는 것까지 똑같았다. 다만 피 한 방울 안 묻어있다는 게 좀 소름이었지만.

주위를 둘러보니 여기는 딱 봐도 관공서였다. 파란색 플라스틱 의자가 열을 맞춰 늘어서 있고, 벽에는 큼지막한 전광판이 번호를 띄우고 있었다. 창구는 대여섯 개쯤 됐고, 그 위로 '친절 서비스 만족도 98%'라는 현수막이 걸려 있었다. 저 안쪽에서 "다음 번호 손님, 237번 손님" 하는 안내 방송이 울렸다.

'여기... 동사무소야?'

바리는 어리둥절한 채로 일어나 앞에 있던 창구로 다가갔다.

"저기요, 여기가... 어디예요?"

접수처 직원은 서류에서 눈도 안 떼고 대답했다.

"명부 관리국 민원실이요. 사망 접수처. 대기표는 저기 기계에서 뽑으시고요."

"사망... 접수처요?"

"네. 손님 방금 돌아가셨잖아요."

직원이 너무 아무렇지 않게 말해서 바리는 잠깐 멍해졌다. 죽었다는 말을 이렇게 사무적으로 듣게 될 줄은 몰랐다. 마치 택배 도착 안내처럼, 세탁물 찾아가라는 문자처럼.

"저, 정말 죽은 거예요? 확실해요?"

"확실하죠. 저희가 그런 걸로 실수할 리가요. 대기표 뽑고 앉아 계세요. 손님은 412번이시니까 좀 걸리실 거예요."

바리는 발권기 앞으로 걸어가 버튼을 눌렀다. 종이가 드르륵 소리를 내며 나왔다. 412. 숫자를 보고 있자니 헛웃음이 나왔다.

'와, 나 진짜 죽었는데, 여기 완전 동사무소잖아. 번호표까지 뽑아야 돼?'

자리에 앉아 멍하니 전광판을 쳐다보는데, 옆자리에 앉은 할머니가 말을 걸었다.

"학생, 몇 번이야?"

"어... 사백십이 번이요."

"아이고, 나는 오백 몇 번인데. 여기 원래 이렇게 오래 걸려. 나 벌써 두 시간째 앉아있어."

"두 시간이요? 저승도 대기 시간이 있어요?"

"그럼 있지. 요즘 사람이 얼마나 많이 죽는데. 명절 끝나고 나면 특히 더 밀려."

할머니는 아무렇지 않게 말하고는 다시 눈을 감았다. 바리는 그 옆에서 대기표를 손에 쥔 채 생각에 잠겼다. 아빠는, 아빠는 어떻게 됐을까. 마지막 기억은 병원비 마련하겠다고 밤샘 알바를 뛰고 나오던 길이었다. 신호등을 못 봤는지, 트럭이 갑자기 튀어나왔는지, 잘 기억도 안 났다. 그냥 순간적으로 몸이 붕 뜨는 느낌이 들었고, 그다음은 여기였다.

'수술은 잘 됐을까. 아니, 애초에 나 없이 수술비는 어떻게 낸 거지.'

생각이 거기 미치자 갑자기 목이 콱 막혔다. 눈물이 나려는 걸 꾹 참는데, 뒤에서 누군가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바리 씨, 맞으시죠."

돌아보니 검은 슈트를 딱 떨어지게 차려입은 남자가 서 있었다. 얼굴은 반칙이다 싶을 정도로 정교했는데, 표정은 하나도 없었다. 눈매는 날카롭고, 입매는 일자로 다물어져 있었다. 마네킹이 양복 입고 걸어 나온 줄 알았다.

"네, 근데... 누구세요? 저 아직 순서 안 됐는데요."

"관문통과심사팀, 무장승이오. 당신 건은 별도로 처리하오."

이름도 뭔가 심상치 않다 싶었는데, 남자는 대답도 안 기다리고 몸을 돌려 걷기 시작했다. 바리는 얼떨결에 대기표를 손에 쥔 채 뒤를 쫓았다.

'이름이 장승이야? 진짜로? 서 있는 것도 딱 장승같이 뻣뻣하게 서 있더니.'

속으로 실컷 놀리면서 따라간 곳은 널찍한 상담실이었다. 책상 위엔 서류 뭉치가 각 잡혀 쌓여 있었고, 벽에는 '관문통과심사팀'이라는 명패가 딱딱하게 걸려 있었다. 창밖으로는 회색빛 하늘이 끝없이 펼쳐져 있었는데, 구름인지 안개인지 모를 것들이 느릿하게 움직였다.

무장승은 자리에 앉으며 서류철 하나를 펼쳤다.

"앉으시오."

바리는 얼떨결에 맞은편 의자에 앉았다. 의자는 이상하게 딱딱했고, 책상 위 서류는 바리 이름으로 이미 잔뜩 채워져 있었다. 생년월일, 사망 경위, 심지어 어릴 적 살던 동네까지.

"이거... 저에 대해서 다 알고 계신 거예요?"

"명부 관리국은 모든 기록을 관리하오. 바리 씨 부친, 오구 씨. 현재 병원에서 생사를 넘나드는 중이오."

바리의 심장이 쿵 떨어졌다.

"네? 아빠가요? 아직... 아직 안 돌아가셨어요?"

"아직은. 하지만 오래 못 버티오. 심장 기능이 계속 떨어지고 있고, 수술비도 부족한 상태요."

"수술비가... 부족해요? 저 없이 어떻게 하고 있는데요."

"당신이 죽고 나서 남은 유일한 자산은 이백만 원 남짓. 필요한 수술비는 그 열 배가 넘소."

바리는 손끝이 저릿해지는 걸 느꼈다. 손톱이 손바닥을 파고들 정도로 주먹을 꽉 쥐었다.

"그럼... 저는 뭘 어떻게 해야 되는데요. 방법이 있으니까 이렇게 저 불러온 거잖아요."

무장승은 서류를 한 장 넘기며 담담하게 말했다.

"살릴 방법은 하나뿐이오."

"뭔데요, 그 방법."

"당신이 여기서 49일간 근무하며 마흔아홉 개 관문을 통과해 생명수를 얻어오는 것."

"...네?"

"근무. 취업. 알아듣기 쉽게 말하면 그렇소."

바리는 잠깐 자기 귀를 의심했다. 죽어서까지 취업 걱정을 해야 하나. 아니, 그것보다.

"저기요, 저 방금 죽었거든요? 근데 취업이요? 여기 이력서 안 받아도 되는 거 맞아요? 경력증명서는요? 자격증은요?"

"규정상 특별 채용이오. 정확히는, 임시직."

"저 이런 일 처음 해보는데 잘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고, 애초에 여기 업무가 뭔지도 모르잖아요."

"업무는 배우면 되오. 지금 중요한 건 그게 아니라—"

"아니, 잠깐만요. 진짜 이게 말이 되는 상황이에요? 죽었는데 취업이라니, 이거 완전 사기 아니에요? 무슨 저승 다단계 같은 거 아니에요?"

바리가 속사포처럼 쏟아내자 무장승은 처음으로 살짝 미간을 좁혔다.

"말이 많군."

"당연히 말이 많죠! 지금 제 인생, 아니 죽음 최대 갈림길에 서 있는데!"

"...끝까지 들으시오. 관문을 통과할 때마다 심사 점수가 쌓이고, 마흔아홉 관문을 모두 통과하면 생명수 한 병이 지급되오. 그걸 가지고 이승으로 돌아가면 부친을 살릴 수 있소."

바리는 숨을 몰아쉬며 진정하려 애썼다. 화낼 상황이 아니었다. 지금은 아빠를 살릴 방법을 찾는 게 우선이었다.

"...그럼 하면 되는 거죠? 그 마흔아홉 관문."

"하겠다는 거요?"

"당연하죠. 아빠 살릴 수 있다는데 뭘 망설여요."

무장승은 잠깐 바리를 빤히 쳐다봤다. 표정 변화는 여전히 없었지만, 뭔가 가늠하는 듯한 눈빛이었다.

"...알겠소."

그는 서류를 내밀었다. 이름, 생년월일, 사망 경위까지 이미 다 적혀 있는 계약서였다. 바리 것치고는 지나치게 완벽하게 준비돼 있어서 오히려 소름이 돋았다.

"여기 서명하시오. 그럼 오늘부로 명부 관리국 임시 직원 자격이 부여되고, 관문 통과 자격도 함께 주어지오."

바리는 펜을 받아 들었다. 손이 살짝 떨렸다. 아빠를 살릴 수 있다면. 그 말 한마디에 다른 건 다 필요 없었다.

서명란에 이름 석 자를 적고, 도장을 찍으려는 순간—

"잠깐."

무장승의 손이 불쑥 뻗어와 바리의 손목을 낚아챘다.

차가운 손끝이 손목에 닿는 순간 바리는 저도 모르게 숨을 멈췄다. 남자는 여전히 표정 하나 없었지만, 목소리에는 아까와는 다른 미묘한 긴장이 묻어 있었다.

"조건이 하나 더 있소."

"...조건이요? 아까는 그런 말 없었잖아요."

"규정을 다 설명하지 않았을 뿐이오."

바리는 손목을 살짝 빼려다가, 생각보다 힘이 세게 잡혀 있어서 포기했다. 이 남자, 손은 차가운데 잡는 힘은 이상하게 확고했다.

"뭔데요, 그 조건."

무장승은 그제야 손을 놓았다. 그리고 서류철 아래에서 다른 종이 한 장을 천천히 꺼냈다. 바리는 그 제목을 읽는 순간 눈이 튀어나올 뻔했다.

"이거... 설마..."

무장승은 여전히 표정 하나 바뀌지 않은 채로 담담하게 말했다.

"혼인관계증명원이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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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화 혼인신고서에 도장을 찍으라고요?
바리는 자기 손목을 잡았던 손을 내려다보다가, 다시 무장승을 올려다봤다."저기요. 지금 저한테 프러포즈하신 거예요? 이런 식으로?""프러포즈가 아니라 규정 안내요."무장승은 손목을 놓고는 서류철에서 새 종이 한 장을 꺼내 책상 위에 반듯하게 내려놨다. 바리는 그걸 받아 드는 순간 눈이 튀어나올 뻔했다.혼인관계증명원 (임시직 보증용)"자, 잠깐만요. 이거 완전 혼인신고서잖아요? 이름 칸에 제 이름이 벌써 적혀 있는데요?""당연하오. 대상자가 정해지면 자동으로 기입되는 방식이오.""제 동의도 없이요?""동의는 지금 구하고 있소."바리는 헛웃음이 나왔다. 이게 무슨 동의를 구하는 태도인지. 서류 벌써 다 채워놓고 도장만 찍으라는 게 어딜 봐서 동의를 구하는 거란 말인가."제가 왜 팀장님이랑 결혼을 해요? 우리 오늘 처음 봤는데?"무장승은 미동도 없이 대답했다."명부 관리국 규정 17조 3항. 임시직 신분으로 관문 통과 자격을 얻으려면 정직원 신분의 보증인이 필요하오. 보증인은 배우자 관계에 한함.""아니 그럼 다른 사람은요? 다른 정직원 아무나 보증 서주면 안 돼요? 저기 아까 접수처에 계셨던 분이라도.""안 되오. 보증인은 심사 담당자 본인이어야 하오. 그게 규정이오.""그럼 결국 팀장님밖에 없다는 거네요?""그렇소.""근데 이거, 진짜 이상하지 않아요? 왜 하필 결혼이에요? 그냥 서류 보증인이면 되잖아요, 도장이나 서명 정도로."무장승은 잠깐 말을 멈췄다. 바리는 그 짧은 침묵이 뭔가 이상하다고 느꼈다."...규정이 그렇소. 이유는 나도 모르오. 아니, 정확히는 알아도 지금 설명할 사항이 아니오.""뭐예요, 그거. 뭔가 숨기시는 것 같은데.""쓸데없는 생각 말고 서명이나 하시오."바리는 펜을 든 채로 한참을 무장승을 노려봤다. 저 표정 하나 없는 얼굴을 보고 있자니 이 사람이 지금 장난을 치는 건지, 아니면 원래 이런 인간인 건지 도무지 감이 안 왔다. 그런데 저기 아빠 얼굴이 자꾸 떠올랐다. 병원 침대에 누워서 마른기침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8-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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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화 팀장님, 저 오늘부로 팀장님 부인입니다.
첫 출근이라는 게 이렇게 살벌할 줄은 몰랐다.바리는 사원증을 목에 건 채 덕순을 따라 관문통과심사팀 사무실로 들어섰다. 파티션 너머로 직원들이 힐끔힐끔 쳐다보는 게 느껴졌다. 아니, 힐끔이 아니라 대놓고 쳐다보는 거였다. 심지어 몇몇은 자리에서 슬쩍 일어나기까지 했다."저, 저 사람이야? 팀장님 신부님?""어머 진짜 사람이네. 나는 또 소문인 줄 알았지.""근데 되게 평범하게 생기셨는데? 팀장님 취향이 저런 스타일이었어?"수군거림이 파도처럼 번지는 가운데, 뒤늦게 도착한 무장승이 성큼성큼 앞장서 걸었다. 그가 지나갈 때마다 직원들이 후다닥 자기 자리로 돌아가 모니터를 쳐다보는 척했다."자리는 저기요."무심하게 가리킨 자리엔 이미 명패까지 놓여 있었다. 바리 (임시직). 옆자리엔 서류 더미가 산처럼 쌓여 있고, 모니터엔 이미 업무 매뉴얼이 띄워져 있었다.'와, 준비성 봐. 진짜 결혼식보다 업무 준비를 더 열심히 했네.'바리가 자리에 앉기 무섭게 무장승이 서류 한 뭉치를 툭 내려놨다. 쿵, 소리가 날 정도로 두꺼운 뭉치였다."관문 통과 심사 절차서요. 오늘 안에 숙지하시오.""오늘 안에요? 이거 몇 페이진데요?""삼백이십 페이지.""...진심이세요?""내가 농담하는 걸로 보이오?"바리는 무장승의 얼굴을 빤히 쳐다봤다. 진짜 저 얼굴은 농담이라는 걸 할 수 있는 근육이 없는 것 같았다. 그래도 지지 않고 받아쳤다."팀장님, 저 오늘부로 팀장님 부인이잖아요. 남편이 아내한테 삼백이십 페이지를 하루 만에 외우라니 이거 가정폭력 아니에요?"순간 사무실이 조용해졌다. 옆자리 직원 하나가 숨죽여 웃음을 참는 소리가 들렸다. 누군가는 헛기침을 하며 딴청을 피웠다. 무장승의 눈썹이 아주 살짝, 정말 미세하게 움찔했다."...업무와 사생활은 구분하시오.""구분하고 계시잖아요. 지금 저한테 삼백이십 페이지 던지시는 거 보면요. 이게 무슨 업무예요, 이건 그냥 훈련소잖아요.""필요한 절차요.""필요한 절차치고는 좀 과하지 않아요? 저 어제까지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8-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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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화 저 코 안 골아요! 아마도
"방이 하나뿐이라고요?"바리는 문 앞에 선 채로 눈을 몇 번 깜빡였다. 잘못 들은 줄 알았다."그렇소."무장승은 아무렇지 않게 신발을 벗고 들어갔다. 바리는 얼떨떨한 얼굴로 그 뒤를 따라 들어섰다가, 거실 겸 방 하나로 이루어진 구조를 보고는 헛웃음이 나왔다. 침대는 하나, 그 옆에 놓인 낡은 소파 하나. 그게 전부였다. 부엌이라고 해봐야 싱크대 하나에 냉장고 하나, 책상 하나가 벽에 붙어 있는 정도였다."저기요, 이거 완전 원룸이잖아요? 신혼집 컨셉으로다가?""관리국 사택은 전부 이 규격이오. 임시직 배정 사택은 특히 더.""근데 팀장님은 여기서 원래 혼자 사셨던 거예요?""...그렇소. 500년째.""500년을 이 좁은 방에서요? 안 답답하셨어요?"무장승은 대답 없이 짐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그 침묵이 뭔가를 감추고 있는 것 같았지만, 바리는 더 캐묻지 않기로 했다. 오늘 하루만 해도 캐물을 게 너무 많았다."저는 소파에서 자면 되죠?""아니오. 소파는 내가 쓰겠소."무장승은 대답과 동시에 이미 서랍에서 이불을 꺼내고 있었다. 바리는 뭔가 말하려다 말고, 그냥 입을 다물었다. 이 남자, 이상하게 계속 자기가 손해 보는 쪽을 택했다. 아까 삼백이십 페이지 던질 때는 그렇게 매정하더니."팀장님, 진짜 괜찮으세요? 침대가 편할 텐데.""괜찮소. 신경 쓰지 마시오.""아니 근데 그러면 제가 마음이 불편하잖아요. 그냥 반씩 나눠 써요, 침대."바리가 무심코 던진 말에 무장승의 손이 이불을 개다 말고 딱 멈췄다. 정적이 잠깐 흘렀다."...그건 안 되오.""왜요?""규정 위반이오.""침대 나눠 쓰는 게 무슨 규정 위반이에요, 그건 또 무슨 조항인데요?""...풍기 문란 조항."바리는 그 말에 웃음이 터졌다."팀장님, 지금 저랑 저 서류상 부부거든요? 근데 풍기 문란이요? 그럼 애초에 결혼 자체가 풍기 문란 아니에요?"무장승은 대답할 말을 찾지 못한 듯 잠깐 굳어 있다가, 헛기침을 하며 다시 이불을 개기 시작했다. 귀가 살짝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8-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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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화 1관문: 재무팀 오해영 대리의 첫인상 심사
출근하자마자 무장승이 서류 한 장을 내밀었다."오늘부터 관문 통과 절차 시작이오. 첫 번째는 재무팀 심사.""재무팀이요? 저 돈 문제 있어요? 저 살아있을 때 카드값도 밀린 적 없는데.""생전 지출 내역 심사요. 살아있을 때 쓴 돈의 용처가 관문 통과 자격 판단 기준 중 하나요. 지출 패턴을 보고 그 사람이 어떻게 살았는지를 파악하는 거요.""그거 좀 무섭네요. 제 지출 내역 다 까발려진다는 거잖아요.""부끄러운 지출이 있소?""아니요, 근데 그냥... 사생활이잖아요, 그것도."무장승은 대답 없이 서류를 정리했다. 바리는 어쩐지 찜찜한 기분으로 재무팀을 향해 걸었다.문을 열고 들어서자, 안경을 치켜올리며 모니터에 코를 박고 있던 여자가 고개를 들었다. 책상 위엔 서류가 산더미처럼 쌓여 있었지만 하나같이 각이 딱딱 잡혀 있었다."바리 씨죠? 재무팀 오해영입니다. 여기 앉으세요."오해영 대리는 딱 봐도 깐깐함이 몸에 밴 사람이었다. 책상 위엔 각 잡힌 서류철, 색깔별로 분류된 포스트잇, 그리고 계산기 세 대가 나란히 놓여 있었다. 심지어 펜꽂이 안 펜들도 색깔 순서대로 정리돼 있었다."자, 생전 카드 내역 다 뽑아봤는데요. 여기 지출 항목마다 증빙 서류 필요해요. 영수증 없으면 관문 통과 불가입니다.""네? 저 죽은 지 며칠 됐는데 영수증을 어떻게 챙겨요? 그리고 저 지갑도 없거든요, 지금.""규정은 규정이에요. 저도 어쩔 수 없어요. 자, 여기 3월 12일자 지출, 백이십만 원. 이거 뭐죠?"바리는 내역을 들여다보다가 순간 목이 메었다. 그날은 아빠 응급 수술비를 급하게 마련하려고 적금을 깬 날이었다. 은행 창구 앞에서 손이 벌벌 떨렸던 기억이 생생하게 되살아났다."...아빠 수술비예요.""증빙은요?""병원 영수증이 있긴 한데, 지금 저한테 없잖아요. 죽었는데 영수증까지 챙기고 죽었어야 됐나요?"오해영 대리는 잠깐 말없이 화면을 스크롤했다. 지출 내역이 쭉 이어졌다. 편의점 삼각김밥, 아르바이트 교통비, 그리고 반복되는 병원비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8-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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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화 그 문양, 함부로 얘기하시면 안 돼요
점심시간, 바리는 식판도 안 들고 곧장 재무팀으로 향했다. 아까부터 손등이 자꾸 신경 쓰여서 밥이 넘어갈 것 같지 않았다."오해영 대리님, 저 아까 그거요."오해영 대리는 모니터에서 눈도 떼지 않은 채 손사래를 쳤다."아, 그 문양 얘기시죠? 별거 아니에요, 신경 쓰지 마세요.""근데 아까 표정이 별거 아닌 표정이 아니셨는데요. 저도 눈치 있거든요.""제가요? 아닌데요, 저 원래 표정이 좀 그래요. 놀라면 다 저래요."오해영 대리는 눈을 마주치지 않으려는 게 너무 티가 났다. 손가락이 마우스를 클릭하는 척하면서 실은 계속 같은 자리만 클릭하고 있었다. 바리는 책상에 손을 짚고 몸을 살짝 기울였다."대리님, 저 지금 진짜 궁금해서 그래요. 제 손등에서 빛난 거, 그거 뭐예요? 저 그거 보고 나서부터 계속 신경 쓰여서 아무것도 손에 안 잡혀요.""...그건 제 담당 구역이 아니라서요. 죄송한데 저 지금 마감이라.""마감이요? 아까는 여유 있어 보이셨는데.""갑자기 바빠졌어요. 재무팀이 원래 이래요, 바리 씨. 죄송해요."오해영 대리는 서둘러 모니터 뒤로 몸을 숨기듯 앉았다. 심지어 의자까지 살짝 돌려서 시선을 아예 차단해버렸다. 바리는 더 캐물으려다가, 어차피 여기서는 답이 안 나올 거란 걸 직감하고 발걸음을 돌렸다.'담당 구역이 아니다? 그럼 대체 누구 담당인데. 이렇게까지 피할 일이야?'사무실로 돌아오는 길, 마침 탕비실에서 커피를 타고 있던 덕순을 발견하고 바리가 다가갔다. 덕순이라면 뭐든 알고 있을 것 같았다. 사내 정보통이라고 자기 입으로 그랬으니까."덕순 씨, 저 뭐 하나만 물어봐도 돼요?""네네, 뭐든지요! 저 모르는 거 없어요, 여기서 5년 넘게 굴렀거든요.""제 손등에 떴던 그 문양 있잖아요. 그게 뭔지 알아요?"덕순의 손이 순간 멈칫했다. 커피 스틱을 뜯다 말고 눈동자가 흔들렸다. 그 반응이 오해영 대리보다 더 컸다."어, 그, 그게...""덕순 씨도 뭔가 알고 있는 눈치인데요? 표정이 딱 그래요.""아니 그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8-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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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화 저 사람, 팀장님 전 정혼자래요
"오랜만이네요, 장승 씨."그 한마디에 사무실 전체가 숨을 죽였다. 바리는 서류를 보는 척하면서도 곁눈질로 두 사람을 살폈다. 무장승은 자리에서 천천히 일어났다. 평소보다 동작이 딱딱하다는 걸, 바리는 알아챘다."인사팀장님. 무슨 일이십니까."목소리마저 평소보다 한 톤 낮았다. 존댓말을 쓰는 것도 처음 들었다. 바리는 그동안 무장승이 팀원들에게도, 자기한테도 하오체를 쓰는 걸 당연하게 여겼는데, 저 여자 앞에서는 태도가 완전히 달라져 있었다."별건 아니고요. 이번에 새로 들어온 임시직 인사평가 건 때문에 왔어요."여자는 그렇게 말하면서 시선을 슬쩍 바리 쪽으로 돌렸다. 눈이 마주치는 순간, 바리는 저도 모르게 등을 곧게 폈다. 위아래로 훑어보는 시선이 노골적이진 않았지만, 뭔가 재는 듯한 느낌이 확실하게 느껴졌다."이분이시구나. 얘기 많이 들었어요.""아, 네. 바리라고 합니다."바리는 자리에서 일어나 어색하게 고개를 숙였다. 여자는 그런 바리를 보며 살짝 미소 지었는데, 그 미소가 이상하게 냉기를 품고 있었다."인사팀장 길례예요. 반가워요.""네, 반갑습니다.""임시직 채용 규정상 배우자 보증인 건에 대해선 제가 서류로 검토하긴 했는데, 이렇게 실물로 보니까 느낌이 또 다르네요."느낌이 다르다는 말이 무슨 뜻인지, 바리는 정확히 짚어낼 수 없었다. 칭찬인지 아닌지 애매한 화법이었다. 길례는 다시 무장승 쪽으로 몸을 돌렸다."장승 씨, 잠깐 얘기 좀 할까요. 업무적으로.""...여기서 하시죠.""아니요, 잠깐이면 돼요. 자리 좀 옮기죠."길례는 대답도 기다리지 않고 몸을 돌려 회의실 쪽으로 걸어갔다. 무장승은 잠깐 그 자리에 서 있다가, 결국 뒤따라갔다. 그 뒷모습을 바리는 물끄러미 지켜봤다. 왜인지 모르게 가슴 한구석이 답답했다.두 사람이 사라지자마자 덕순이 바리 옆으로 슬금슬금 다가왔다. 눈치를 보며 목소리를 한껏 낮췄다."바리 씨, 저분 누군지 알아요?""인사팀장이라고 하셨잖아요.""그거 말고요. 저 두 분, 예전에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8-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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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화 질투 아니거든요, 그냥 궁금한 거에요
퇴근하고 관사로 돌아오는 길, 바리는 내내 말이 없었다.원래 같으면 오늘 있었던 일을 조잘조잘 떠들며 무장승을 놀렸을 텐데, 오늘은 이상하게 입이 안 떨어졌다. 낮에 들었던 얘기가 계속 머릿속을 맴돌았다. 500년 만의 최연소 팀장 커플. 사내에서 거의 기정사실처럼 돌았다는 정혼 얘기. 그리고 갑자기 쏙 들어갔다는 그 이유 모를 파혼.'내가 왜 이게 신경 쓰이는 거야.'바리는 몇 번이고 속으로 되뇌었지만, 자꾸만 낮에 봤던 길례의 미소가 떠올랐다. 위아래로 훑어보던 시선도, "이번 임시직은 좀 특이하네요"라던 그 의미심장한 말투도.관사 문을 열고 들어서면서도 바리는 평소와 다르게 조용했다. 신발을 벗고, 가방을 내려놓고, 아무 말 없이 침대에 걸터앉았다.무장승은 그 침묵을 눈치채지 못할 사람이 아니었다. 넥타이를 풀면서 슬쩍 바리 쪽을 살폈다."...오늘 무슨 일 있었소?""아니요, 아무 일도 없었는데요.""근데 왜 이렇게 조용하오.""원래 조용한 사람이거든요, 저."무장승은 그 말이 거짓말이라는 걸 딱 알아챈 눈치였다. 첫날부터 지금까지 바리가 조용했던 적은 단 한 번도 없었으니까. 그는 잠깐 서서 바리를 바라보다가, 조심스레 물었다."...혹시 아까 인사팀장 때문이오?"정곡을 찔린 바리는 순간 움찔했다. 그러다 오히려 발끈했다."아니거든요? 왜 그게 저랑 무슨 상관이에요?""...아까부터 계속 표정이 안 좋았소.""제 표정이 어때서요. 저 지금 완전 평소랑 똑같은데요."무장승은 대답하지 않고 그저 바리를 바라봤다. 그 시선이 너무 정확하게 속을 꿰뚫는 것 같아서, 바리는 오히려 더 방어적으로 나갔다."그냥 궁금해서 그래요. 두 분이 무슨 사이였는지.""...업무 외 사항이오.""거봐요, 또 그 소리. 팀장님은 맨날 그러시더라. 뭐 좀 물어보면 업무 외 사항, 규정 위반, 이런 말로 다 피해가시잖아요.""...알아서 뭐 하려고 그러오.""그냥 궁금해서요! 서류상 부부라도 저희 관계에 영향을 줄 수도 있는 거잖아요. 만약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8-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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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화 2관문: 시설팀 지하 창고의 비밀
시설팀 사무실은 이 시간에도 불이 환하게 켜져 있었다. 바리와 무장승이 도착하자, 안경을 코끝까지 내려 쓴 중년 남자가 서류를 흔들며 다가왔다."아이고, 두 분 오셨네요. 급하게 불러서 죄송합니다. 저희가 감사를 앞두고 있는데, 지하 창고 정리가 안 끝나서요.""감사요? 이 밤중에 감사가 있어요?""명부 관리국은 원래 새벽에 감사 도는 게 규정이라서요. 자, 사정은 이렇습니다."시설팀장은 두꺼운 서류철을 넘기며 설명했다."지하 3층 창고에 '미처리 인연 기록물'이라고, 오래전부터 정리가 안 된 서류들이 산더미처럼 쌓여 있어요. 원래는 정직원이 처리해야 하는데, 인력이 부족해서요. 마침 두 분이 2관문 대상자시니까, 이번 기회에 정리하시면서 관문 심사도 겸하시면 딱이겠다 싶어서.""저희가요? 이 밤중에 창고 정리를요?""네, 죄송하지만 오늘 안에 끝내야 감사에 통과해요. 두 분 힘 좀 써주세요."바리는 무장승을 슬쩍 쳐다봤다. 그는 별다른 표정 변화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알겠소. 위치 안내해주시오."지하 3층으로 내려가는 엘리베이터 안, 바리는 팔짱을 낀 채 투덜거렸다."이거 완전 야근 뺑뺑이잖아요. 죽어서도 야근을 해야 되나.""불만이오?""당연히 불만이죠. 근데 뭐, 규정이라니까 어쩌겠어요."엘리베이터 문이 열리자 서늘한 공기가 훅 끼쳤다. 지하 3층은 조명도 어둡고, 벽에는 곰팡이 자국까지 희미하게 보였다. 복도를 따라 한참 걸어 들어가자 육중한 철문이 나타났다. 문을 열자 먼지 쌓인 서류함이 천장까지 빼곡하게 들어찬 창고가 펼쳐졌다."...이걸 오늘 안에 다 하라고요?""불평해도 상황은 안 바뀌오. 시작합시다."두 사람은 각자 서류함을 하나씩 맡아 정리를 시작했다. 먼지가 풀풀 날리는 낡은 서류들을 하나씩 꺼내 분류하는 작업이었다. 처음엔 어색한 침묵이 흘렀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바리가 특유의 수다를 시작했다."근데 이 창고, 진짜 오래돼 보여요. 서류 날짜 보니까 몇백 년 전 것도 있는데요?""명부 관리국 역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8-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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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화 이 손, 놓지 마시오
어둠은 생각보다 오래 이어졌다.전기가 나간 지 얼마나 지났는지 감도 안 잡혔다. 시간이 어둠 속에서는 다르게 흐르는 것 같았다. 바리는 숨을 죽인 채, 자기 팔을 붙잡고 있는 손의 온도를 느끼고 있었다. 차가운 줄만 알았던 손끝이, 지금은 이상하게 뜨거웠다."...팀장님.""...말하시오.""이거 정전, 얼마나 갈까요?""...모르오. 시설팀에서 곧 처리할 거요."목소리가 평소보다 낮게 가라앉아 있었다. 바리는 그 목소리의 결이 어쩐지 낯설게 느껴졌다. 사무실에서 듣던 딱딱한 하오체와는 뭔가 달랐다. 더 조심스럽고, 더 흔들리는."팀장님, 손 좀 놓으셔도 될 것 같은데요. 이제 안 놀랐어요.""....""팀장님?"대답이 없었다. 손도 놓지 않았다. 바리는 어둠 속에서 눈을 몇 번 깜빡였다. 눈이 조금씩 어둠에 적응하면서, 희미하게나마 무장승의 윤곽이 보이기 시작했다. 그는 시선을 바리에게 고정한 채로, 뭔가 말하고 싶은데 말하지 못하는 사람처럼 입을 살짝 벌렸다가 다시 다물었다."...아까 그 서류."무장승이 먼저 입을 열었다."네. 그 서류가 왜요?""...예전에 본 적 있소."바리는 순간 숨을 멈췄다."본 적 있다고요? 언제요?""...오래전이오. 정확히 언제인지는 기억 안 나오. 그냥, 어딘가에서 스쳐 지나가듯 본 것 같소.""근데 왜 방금 전까진 모른다고 하셨어요?""...확신이 없었소. 지금도 확신은 없소."무장승의 목소리에 처음으로 흔들림이 묻어났다. 500년을 살아오면서 단 한 번도 감정을 겉으로 드러낸 적 없다는 사람이, 지금 이 어둠 속에서만큼은 조금씩 무너지고 있었다."팀장님, 저 진짜 무서운 거 하나만 물어봐도 돼요?""...말하시오.""저희, 원래 알던 사이였어요? 이번 생 말고, 그전에."한참 동안 답이 없었다. 침묵이 어둠보다 더 무겁게 내려앉았다. 바리는 그 침묵이 대답이라는 걸 직감했다."...그럴 수도 있소.""...그럴 수도 있다는 게 무슨 뜻이에요.""명부 관리국 기록은 완벽하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8-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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