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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화. 이름이 적힌 제안서

Author: Jino
last update publish date: 2026-10-16 18:42:37

민재는 화면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이거 팀장님도 봤을까?”

“확인해 봐야 해.”

“신규 투자 계획 재검토면 우리 기획안도 포함이겠지.”

서윤은 비교표를 다시 열었다. 소량 출시안과 확대 출시안의 예상 손익을 봤다.

어느 쪽이든 조건이 붙어 있었다. 팔려야 했다. 금형을 쓸 수 있어야 했다. 추가 수정도 크지 않아야 했다.

메일에 한 줄을 더 썼다.

기존 상품 손익과 신규 투자 비용을 구분해 검토했습니다.

재무 자료를 첨부하고 전송을 눌렀다.

민재가 의자를 조금 물렸다.

“이제 어떻게 해?”

“제출해야지.”

“똑같이?”

“빠진 게 있으면 채우고.”

서윤은 밴드가 붙은 검지를 굽혔다. 끝이 조금 들떠 있었다. 손톱으로 누르자 다시 붙었다.

“안 좋은 숫자도?”

“우리만 못 본 척한다고 없어지지는 않잖아.”

민재는 잠시 말이 없었다. 그러다 자기 자리로 돌아가 고객 문의 파일을 열었다.

“그럼 난 원본 연결할게. 물어보면 바로 볼 수 있게.”

“고마워.”

“오늘은 밥 먹고 하자.”

서윤은 시간을 확인했다. 늦었지만 구내식당 저녁 운영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응. 먹고 하자.”

화면을 잠그기 전, 제안서 첫 장을 봤다.

기획 담당 한서윤.

자료 확인 항목에는 오민재의 이름이 있었다.

서윤은 파일을 저장했다.

◇

3월 7일 아침, 박 팀장이 서윤을 불렀다.

책상에는 전날 보낸 비교표가 놓여 있었다. 재무 자료는 그 아래에 반쯤 가려져 있었다.

“이 표 어디까지 공유됐어?”

“재무 자료 말씀하시는 겁니까?”

“우리 팀 검토 대상이라는 거.”

“민재 대리하고 같이 확인했습니다.”

박 팀장은 넥타이 매듭을 고쳤다.

“아직 결정된 건 아니야.”

“네.”

“괜히 팀 분위기 흔들리게 하지 말고.”

서윤은 대답 대신 책상 위 제안서를 봤다. 첫 장 오른쪽 위에 붉은 물음표가 그려져 있었다.

“최종안 확인 부탁드립니다. 오늘 제출해야 합니다.”

박 팀장이 종이를 넘겼다.

“이 손익분기 판매량, 그대로 넣을 거야?”

“현재 견적 기준입니다.”

“높잖아.”

“그래서 확대 출시안의 재고 부담을 같이 적었습니다.”

“소량은 이익이 적고, 많이 만들면 남을 수 있고. 읽는 사람이 뭘 고르겠어.”

“어느 쪽이든 확인해야 할 조건이 있습니다.”

그가 한 장을 더 넘겼다. 금형 수정 위험 항목에서 손이 멈췄다.

“추가 비용에 일정 지연까지. 너무 방어적으로 보이지 않아?”

“시험 전에는 빼기 어렵습니다.”

“한 대리.”

서윤이 고개를 들었다.

박 팀장은 목소리를 낮췄다.

“지금은 이 기획안 하나만 보는 게 아니야. 우리 팀이 앞으로 돈을 벌 수 있냐고 묻는 거라고.”

“알고 있습니다.”

“그러면 좀 자신 있게 써야지. 반년 준비했잖아.”

서윤은 제안서의 견적 근거를 짚었다.

“자신 있게 말씀드릴 수 있는 부분은 따로 적었습니다. 고객 불편과 공용 뚜껑의 필요성은 문의 원본으로 확인했습니다.”

“그것만으로 팔린다는 보장은 없잖아.”

“그래서 고객 검증을 제안했습니다.”

박 팀장이 입을 다물었다.

서윤은 손을 거두지 않았다. 밴드 아래에서 검지가 조금 당겼다.

“검증되지 않은 낙관으로 팀을 지킬 수는 없습니다.”

그의 시선이 밴드에 잠깐 닿았다. 곧 종이로 돌아갔다.

“안 될 가능성까지 우리가 먼저 말해야 하나.”

“물어봤을 때 답하지 못하는 것보다 낫습니다.”

침묵이 길어졌다. 서윤은 재촉하지 않았다.

박 팀장이 펜 뚜껑을 닫았다.

“고객 검증 일정은 잡을 수 있어?”

“기존 고객 대상 현장 조사를 먼저 진행할 수 있습니다. 장소와 참여자는 확인 중입니다.”

“언제?”

“다음 주 월요일로 요청해 뒀습니다.”

“너무 급하지 않아?”

“출시 판단 전에 확인하려면 빨리 시작해야 합니다.”

박 팀장이 제안서를 앞으로 밀었다.

“일정 확정되면 넣고 보내. 나도 참조하고.”

“네.”

서윤은 자료를 받아 들었다.

자리로 돌아가는데 밴드 끝이 종이에 걸렸다. 걸음을 멈추고 조심스럽게 떼었다.

종이는 찢어지지 않았다.

서윤은 들뜬 끝을 다시 눌렀다. 손가락을 편 채 자료를 고쳐 들었다.

◇

민재는 통화 중이었다. 서윤이 앉자 메모지를 들어 보였다.

월요일 오전. 장소 가능.

서윤은 고개를 끄덕이고 최종안을 열었다.

두 출시안의 비용과 재고 부담을 남겼다. 절감 예상액은 확정 견적과 구분했다. 시험 비용이 바뀔 수 있다는 점과, 아직 확인 중인 뚜껑 단품 포장 비용도 빼지 않았다.

민재가 전화를 끊었다.

“장소는 월요일 오전에 쓸 수 있어. 참여자들도 대부분 된대. 두 명은 점심 전에만 가능하고.”

“그럼 오전으로 맞추자.”

“샘플은 지금 있는 걸로?”

“응. 성능 시험이 아니라 사용하는 과정부터 볼 거야. 양산품이 아니라는 설명도 하고.”

민재가 메모했다.

“뚜껑 찾는 시간?”

“그것도. 씻고 정리하는 순서까지 보려고.”

“질문은?”

“먼저 하게 두고 나중에 물어보자. 우리가 불편하다고 정해 놓은 걸 답하게 만들면 안 되니까.”

민재는 고객 문의 집계 파일을 보내 줬다.

“원본 번호 연결했어. 같은 사람이 다시 문의한 것도 표시했고.”

“확인할게.”

민재가 숫자를 읽으면 서윤이 표와 맞췄다. 마지막 장까지 확인하자 민재가 물었다.

“작성자 이름은 그대로지?”

“응.”

“내 이름도?”

“네가 확인한 자료잖아.”

“괜히 같이 책임지는 것 같아서 빼려고 했는데.”

서윤이 민재를 봤다.

민재는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농담이야. 보내.”

서윤도 입꼬리를 조금 올렸다.

최종 파일을 저장했다. 박 팀장을 참조에 넣고 첨부 파일을 확인했다.

전송을 누른 뒤 시계를 봤다.

마감 전이었다.

“보냈어.”

민재가 의자 등받이에 몸을 기댔다.

“일단 하나 끝났네.”

서윤은 전송된 메일을 다시 열었다.

자기 이름이 적힌 제안서가 보였다. 이제는 마음대로 고칠 수 없었다.

마우스에서 손을 뗐다. 눌렀던 밴드 끝이 또 조금 올라와 있었다.

◇

오후에는 전사 메일이 도착했다.

신규 사업 및 제품 기획 추가 검토 기준.

발신자는 사장실이었다.

고객 문제의 근거와 필요한 비용, 아직 확인하지 못한 가정, 중단하거나 범위를 줄일 기준을 적도록 돼 있었다. 모든 팀에 같은 양식이 배포됐다.

박 팀장이 자기 자리에서 물었다.

“우리만 추가 자료 내라는 건 아니네?”

“네. 공통 기준입니다.”

“고객 검증도 다 하래?”

“방식은 기획 성격에 맞춰서 제출하게 돼 있습니다.”

잠시 뒤 별도 메일이 왔다.

상품기획팀에는 현장 조사 일정과 관찰 항목을 먼저 보내 달라는 요청이었다. 판매 예상치를 높이기 전에 실제 사용 과정부터 확인하라는 내용도 있었다.

서윤은 오전에 정리한 일정에 장소와 참여 인원, 샘플의 한계를 적어 보냈다.

민재가 모니터 너머로 물었다.

“또 고치래?”

“일정 먼저 달래.”

“그건 준비했네.”

“응.”

“뭐 하나 맞춰 놓으니까 바로 쓰이긴 한다.”

서윤은 첨부할 자료를 골랐다. 반년 동안 모은 고객 문의와 사용 사진에서 현장에 필요한 것만 남겼다.

그때 비서에게서 메신저가 왔다.

[최종안과 함께 전달하신 참고 자료철은 회수하셔도 됩니다. 대표님께서 필요한 부분은 확인하셨습니다.]

출력된 도면과 고객 문의 원본을 묶은 자료철이었다. 오전에 비서가 제안서 출력본과 함께 받아 갔다. 현장 조사에 가져갈 자료도 그 안에 있었다.

[지금 올라가겠습니다.]

답을 보내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자료 찾으러 다녀올게.”

민재가 손을 들었다.

“오면 질문지 같이 보자.”

◇

6층 비서 자리는 비어 있었다.

서윤은 잠시 기다렸다. 사장실 문이 열렸다.

문 안에 있던 도현의 시선이 서윤에게 닿았다.

“자료 회수하러 오셨습니까?”

“네.”

“들어오세요.”

서윤은 문턱에서 잠깐 멈췄다. 도현은 서윤이 들어올 만큼 비켜 서 있었다.

눈을 마주친 건 짧았다. 그런데 안으로 들어간 뒤에도 그 시선이 신경 쓰였다.

「자료만 가져가면 돼.」

회의 테이블 한쪽에 자료철이 놓여 있었다. 옆에는 지난 브리핑 때 남긴 용기 샘플이 있었다. 뚜껑은 몸체와 따로 놓여 있었다.

서윤은 샘플을 오래 보지 않았다.

“이 자료철 가져가면 될까요?”

“네. 고객 문의 원본은 뒤에 있습니다.”

가까이서 들으니 도현의 목소리는 문 앞에서보다 낮았다.

서윤은 표지를 열었다. 서류 순서는 그대로였다. 중간에 붙인 메모지 몇 장만 자리가 바뀌어 있었다.

손끝으로 종이를 넘겼다. 도현이 어느 부분을 봤는지 알 수는 없었다. 그래도 옮겨 붙은 메모지에서 눈이 잠깐 멈췄다.

도현은 책상으로 돌아가 인쇄된 종이 한 장을 집었다.

“조사 항목에 하나 더 확인할 게 있습니다.”

서윤은 자료철을 안고 기다렸다.

도현이 서랍을 열었다. 집게를 찾는 듯 손을 안쪽으로 넣었다.

서윤의 시선이 그 손을 따라갔다.

얕은 서랍 안에 봉투 한 장이 있었다.

흰 봉투였다. 붙이지 않은 덮개가 조금 들려 있었다. 앞면 한쪽에는 검은 펜으로 날짜가 적혀 있었다.

6월 12일.

서윤은 숨을 들이마시다 멈췄다.

자신의 생일이었다.

자료철을 받친 손가락이 굳었다. 눈을 떼려 했는데 숫자 끝까지 보고 말았다.

그 날짜만으로 누구의 것인지 알 수는 없었다. 다른 사람의 생일일 수도 있었다. 업무와 관련된 날짜일 수도 있었다.

그런데 글씨가 익숙했다.

숫자 2의 끝을 짧게 올리는 방식까지.

「아직도 저렇게 쓰네.」

도현의 손이 멈췄다.

서윤이 고개를 들었을 때 도현도 서윤을 보고 있었다.

시선을 피할 틈을 놓쳤다. 입술을 조금 벌렸다가 닫았다. 멈췄던 숨을 천천히 내쉬었다.

둘 사이에 말이 없었다.

도현은 봉투를 뒤집지 않았다. 다른 종이로 가리지도 않았다. 손을 빼고 서랍을 조용히 닫았다.

작은 마찰음이 났다.

서윤은 자료철을 더 세게 안았다. 종이 모서리가 팔 안쪽을 눌렀다. 그제야 자신이 얼마나 힘을 주고 있는지 알았다.

그래도 손을 풀지 못했다.

도현이 먼저 종이를 내밀었다.

“현장에서는 설명 전과 후를 구분해서 봐 주십시오.”

서윤은 바로 받지 못했다.

종이보다 도현의 손이 먼저 보였다. 서랍을 닫던 손이었다. 지금은 종이 끝을 가볍게 잡고 있었다.

도현은 기다렸다. 팔을 더 뻗지도, 받으라고 재촉하지도 않았다.

서윤이 뒤늦게 손을 내밀었다.

밴드가 붙은 검지로 종이를 짚었다. 도현의 손끝이 가까웠다. 조금만 잘못 잡아도 닿을 거리였다.

서윤이 종이를 잡자 도현이 놓았다.

닿지는 않았다.

그런데 서윤은 손을 거두는 순간까지 그 자리를 의식했다.

「안 닿았는데.」

“설명을 들은 뒤에만 편하게 쓸 수 있다면, 제품만으로 해결된 건 아니니까요.”

“네.”

대답이 조금 늦었다. 목소리도 생각보다 작았다.

서윤은 종이로 눈을 내렸다. 적힌 문장을 읽었다. 업무에 관한 내용이었다. 방금 본 날짜와는 관계가 없었다.

문장 끝에 시선을 고정했다. 도현을 다시 보면 또 말이 늦어질까 걱정됐다.

“관찰표에 나눠서 넣겠습니다.”

이번에는 끝까지 또렷하게 말했다.

“조사 뒤에 결과를 먼저 공유해 주세요. 기획안 수정은 그다음입니다.”

“알겠습니다.”

서윤은 종이를 자료철 앞에 끼웠다. 종이 끝이 잘 들어갔는데도 손끝으로 한 번 더 눌렀다.

눈이 다시 서랍 쪽으로 가려 했다.

서윤은 자료철을 내려다봤다.

묻고 싶었다.

왜 그 날짜가 적혀 있는지. 붙이지 않은 봉투는 무엇인지.

도현은 그 자리에 있었다. 지금 고개를 들고 물으면 들을 수 있는 거리였다.

서윤은 입술 안쪽에 힘을 줬다.

「내가 기대하는 답이면 어떡하지.」

그 답을 기다리는 자신을 들키고 싶지 않았다.

“자료는 확인했습니다. 내려가 보겠습니다.”

도현이 고개를 끄덕였다.

서윤은 문 쪽으로 몸을 돌렸다. 그때 도현이 한 걸음 움직였다.

서윤은 저도 모르게 멈췄다.

자료철을 안은 팔이 먼저 굳었다. 고개를 조금 돌리자 도현이 문 옆 상자로 손을 뻗고 있었다.

도현은 상자를 안쪽으로 옮겼다. 통로가 넓어졌다.

서윤은 그제야 발끝에 들어간 힘을 풀었다.

「왜 멈췄어.」

“조사 준비에 필요한 게 있으면 비서실로 요청하십시오.”

“네.”

서윤은 열린 문으로 걸어갔다. 도현이 비워 준 쪽으로 지나면서도 어깨를 조금 좁혔다.

가까워진 거리를 괜히 의식했다. 자료철을 고쳐 안으면 팔이 움직일 것 같아 그대로 붙들었다.

등 뒤에서 문이 닫혔다.

그때까지도 서윤은 자료철을 고쳐 안지 못했다.

◇

4층에 돌아오자 민재가 질문지를 내밀었다.

“여기. 답 정해 놓고 묻는 건 뺐어.”

서윤은 종이를 받았다.

“고마워.”

“왜 그래?”

서윤이 고개를 들었다.

민재의 눈이 자료철을 안은 팔에 닿았다.

“무겁게 들고 있네. 내려놔.”

“아.”

서윤은 책상 위에 자료철을 놓았다. 손바닥에 눌린 자국이 남아 있었다.

손을 펴자 뻣뻣했던 손가락이 조금 풀렸다. 밴드 끝은 들떠 있었다.

민재는 더 묻지 않았다.

“난 참여자 안내문 보낼게. 네가 질문지 보고 알려 줘.”

“응.”

서윤은 자리에 앉았다. 관찰표에 설명 전과 설명 후를 나누는 칸을 만들었다.

한 줄을 입력하고 멈췄다.

6월 12일.

날짜를 떠올리자 도현의 손도 함께 생각났다. 서랍 안에서 멈췄던 손. 종이를 건네고 조용히 놓던 손끝.

서윤은 화면을 조금 더 가까이 봤다.

아무것도 확인한 게 없었다. 봉투에 자기 이름이 적혀 있던 것도 아니었다.

「내 생일이라고 정하지 마.」

키보드에 손을 올렸다. 종이를 받을 때 가까웠던 손끝이 또 떠올랐다.

서윤은 검지를 굽혔다 폈다.

감정은 나중이었다.

내선 전화가 울렸다.

서윤은 수화기를 들었다.

“상품기획팀 한서윤입니다.”

“한 대리님, 비서실입니다. 월요일 현장 사용자 조사 건으로 연락드렸습니다.”

서윤은 일정표를 열었다.

“네. 오전 진행으로 안내드렸습니다.”

“대표님도 동행하실 예정입니다.”

마우스 위에서 손가락이 멈췄다.

“현장 조사에요?”

“네. 참관하십니다. 조사 진행은 계획하신 대로 하시면 됩니다. 이동 일정은 정리해서 보내 드리겠습니다.”

“알겠습니다.”

수화기를 내려놓았다. 손은 바로 떼지 못했다.

방금 사장실에서 들었던 낮은 목소리가 생각났다. 월요일에도 그 목소리를 가까이서 듣게 될까.

서윤은 수화기에서 손을 뗐다.

민재가 물었다.

“일정 바뀌었어?”

“아니.”

“그럼?”

서윤은 월요일 칸을 봤다. 오전에 적어 둔 자기 이름과 민재의 이름 아래에 참석자를 더해야 했다.

“사장님도 오신대.”

민재가 잠시 눈을 크게 떴다.

“직접?”

“응.”

서윤은 참석자 칸에 강도현을 입력했다.

손을 멈추고 화면을 봤다. 업무 일정에 이름을 적었다. 그런데 입력을 마친 뒤에도 눈을 떼기가 어려웠다.

같은 차를 타게 될지, 현장에서 얼마나 가까이 서게 될지 정해진 것은 없었다.

「조사하러 가는 거야.」

서윤은 마우스를 잡았다. 이름은 화면에 그대로 남아 있었다.

닫힌 서랍이 떠올랐다. 그 앞에서 마주쳤던 시선도.

월요일에는 서랍도, 책상도 두 사람 사이에 없을 터였다.

(4화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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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도현은 태블릿을 책상 위에 내려놓았다.빈 의자 뒤에 머물던 손이 천천히 내려갔다. 손끝이 의자에서 떨어지는 순간까지 서윤은 보고 있었다.“회사에 온 이유를 묻는 겁니까?”“둘을 다르게 대답할 거예요?”서윤은 책상 모서리에 손을 대지 않았다. 손을 뻗으면 다시 일 이야기로 돌아갈까 봐 망설였다. 손가락을 가볍게 접었다.도현이 입술을 열었다가 닫았다. 대답 전에 숨을 고르는 소리가 들렸다. 가까워서 들리는 소리였다.“다르게 대답해야 합니다.”“그럼 오늘은 됐어요.”서윤이 몸을 돌렸다. 도현은 붙잡지 않았다. 그런데도 등 뒤에 시선이 남아 있었다.서윤이 의자를 당기기 전에 도현이 다시 말했다.“대답을 피하려는 건 아닙니다.”아까보다 목소리가 낮았다.서윤은 돌아보지 않았다.“지금 못 하는 대답이면 준비해서 해요.”의자에 앉자 화면이 눈에 들어왔다. 아직 반품 비용표가 떠 있었다. 서윤은 글자를 읽으려 했다. 읽던 줄에서 눈이 멈췄다.도현의 손이 태블릿 위에 닿았다. 바로 집어 들지는 않았다. 화면 가장자리에 놓인 손끝이 가만히 있었다.“한 대리.”서윤은 화면을 본 채 기다렸다. 대답하면 목소리가 달라질까 봐 입을 다물었다.“업무가 끝난 뒤에 시간을 부탁해도 되겠습니까?”서윤은 그제야 도현을 봤다. 도현은 태블릿이 아니라 서윤을 보고 있었다.「업무가 끝난 뒤.」그 짧은 말이 자꾸 마음에 걸렸다.“목요일에 패널 시험이 잡히면, 결과부터 정리해야 해요.”“그 뒤라도 괜찮습니다.”도현은 재촉하지 않았다. 서윤이 답할 때까지 손도 움직이지 않았다.서윤은 고개를 작게 끄덕였다.그제야 도현이 태블릿을 가져갔다. 책상 위에서 손이 멀어졌다. 서윤은 시선을 화면으로 돌렸다.발소리가 사무실 밖으로 멀어지고 나서야 등받이에 등을 댔다. 짧게 참고 있던 숨이 나왔다.화면 아래로 빵 포장이 조금 나와 있었다.서윤은 남은 빵을 꺼냈다. 포장을 접는 손끝에 힘이 들어갔다.「무슨 대답을 하려고.」한 입을 먹고, 식어 버린 물을 마셨다. 목

  • 전 남친이 새 사장으로 왔다   12화. 밤의 두 자리

    서윤은 메일을 끝까지 읽고 4층 버튼을 눌렀다.엘리베이터 문이 닫혔다. 파일을 받친 손가락에 종이 모서리가 눌렸다.설문만으로는 안 된다는 말은 맞았다. 서윤도 그 말을 했었다.그런데도 화면에서 눈을 떼는 데 조금 걸렸다.사무실에 돌아오자 민재가 의자를 돌렸다.“어떻게 됐어?”“검토 일정은 그대로래.”“원가가 낮아져도?”“실제로 팔린 건 아니니까.”서윤은 파일을 내려놓고 메일을 전달했다. 민재가 화면을 아래로 내렸다.“그럼 지금 판매부터 하라는 거야?”“품질 확인이 남았어. 그 순서는 못 바꿔.”“우리가 할 수 있는 것부터 찾자.”민재가 빈 문서를 열었다.서윤도 의자에 앉았다. 손을 올렸지만 바로 글자를 치지는 못했다.메일에서 읽은 말이 아직 머릿속에 남아 있었다.「틀린 말은 아니야.」서윤은 문서 제목부터 적었다.고객 패널 시험안.◇3월 18일 아침, 서윤은 시험안 첫 장에서 구매 의향이라는 말을 지웠다.옆에 적었던 예상 주문도 지웠다.민재가 가방을 내려놓으며 화면을 봤다.“아예 안 물어보게?”“물어볼 거야. 그냥 사고 싶냐고만 묻지는 않고.”서윤은 빈 용기와 뚜껑을 책상 위에 놓았다. 종이 가격표도 옆에 세웠다.“제품을 써 보고, 가격을 보고, 자기 집에 가져갈 구성을 고르게 할 거야.”“안 고르는 것도 가능하게?”“응. 지금 쓰는 걸 계속 쓰겠다는 선택도 있어야 해.”민재는 뚜껑을 집었다가 내려놨다.“좋다고 해 놓고 가격 앞에서는 안 고를 수도 있겠네.”“그걸 봐야 해.”진행 순서는 간단히 정했다. 평소 쓰는 용기를 확인한 뒤 샘플과 가격을 보여 준다. 마지막에는 선택을 바꾸거나 모두 취소할 수 있게 했다.민재가 마지막 칸을 가리켰다.“여기서 결제는 안 받고?”“안 받아. 주문으로 기록하면 안 돼.”“그럼 매출 증거는 여전히 없네.”“맞아. 매출을 대신할 수는 없어.”서윤은 문서 맨 위에 적었다.비판매형 시험. 결제와 주문 접수는 진행하지 않음.선택한 구성과 구매를 포기한 이유는 따로

  • 전 남친이 새 사장으로 왔다   11화. 돌아온 견적

    서윤은 종이 끝을 쥔 손에서 힘을 뺐다.도현의 손이 바로 앞에 있었다. 서류를 건네면 손끝이 닿을 만큼 가까웠다.“여기 있습니다.”서윤은 흩어진 서류를 포갰다. 제목이 보인 종이를 따로 빼지도, 다시 들여다보지도 않았다.종이를 내미는 동안 도현은 손을 움직이지 않았다. 서윤이 끝을 놓은 뒤에야 받아 갔다.손끝은 닿지 않았다. 서윤은 빈손을 무릎 위로 내렸다.도현은 서류를 자료철 안에 넣었다.“감사합니다.”가까이서 들으니 목소리가 낮았다. 서윤은 대답 대신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차가 곧은 길로 들어섰다. 서윤은 무릎 위의 시험표를 내려다봤다. 마지막 줄까지 적었는데도 펜을 다시 꺼냈다.아버지 회사.알고 있던 이름 옆에 처음 보는 말이 붙어 있었다. 서윤이 모르는 도현의 시간이 그 자료철 안에 있었다.펜을 쥔 손가락을 고쳐 잡았다. 옆을 보면 도현의 얼굴부터 살필 것 같았다.「묻지 말자.」“한 대리.”펜 끝이 종이 위에서 멈췄다. 서윤은 고개만 조금 돌렸다.“파일 드리겠습니다.”도현이 빈 파일을 내밀었다. 파일 끝을 받으려던 서윤의 손이 잠깐 머뭇거렸다. 도현의 손가락이 접힌 부분을 잡고 있었다.서윤은 반대쪽을 받았다. 시험표를 끼우고 가방 안에 넣었다.“네.”묻지는 않았다.도현도 자료철을 닫았다. 좌석 사이에 놓였던 서류가 사라졌다. 두 사람의 손 사이에는 아무것도 없었다.서윤은 무릎 위에 손을 모았다. 도현의 소매 끝이 시야에 들어왔다. 고개를 돌리지 않아도 보이는 거리였다.숨을 천천히 내쉬었다.서윤은 창 쪽으로 몸을 조금 돌렸다.◇3월 17일 오전, 제조사에서 새 견적서가 도착했다.서윤은 외투를 의자에 걸치다 말고 앉았다. 첨부 파일은 수정 견적서와 포장 변경안이었다.옆자리 민재가 모니터 쪽으로 고개를 기울였다.“왔어?”“응. 포장 비용까지.”“드디어 빈칸 없어지겠네.”서윤은 견적서를 열었다.완성품은 2,000세트 생산 조건이었다. 기존 몸체 금형을 쓰고 뚜껑 체결부만 수정했다. 조립과 기본 포장은

  • 전 남친이 새 사장으로 왔다   10화. 남아 있는 습관

    서윤은 방문 손잡이를 잡고 메시지를 다시 읽었다.직접 열어 봐야 한다고 했다. 사진도, 측정값도 없었다.복도 끝에서 도현이 휴대전화를 보고 있었다. 서윤은 문을 조금 더 열었다.“대표님.”도현이 고개를 들었다. 서윤을 보자 휴대전화를 쥔 손이 내려갔다.“제조사에서 연락이 왔습니다. 샘플은 나왔는데 내일 직접 열어 보라고 합니다.”“문제가 있다는 뜻입니까?”“아직은 모르겠습니다. 수치를 받아 보겠습니다.”도현의 시선이 서윤의 휴대전화에 닿았다. 가까이 오지는 않았다. 서윤은 화면을 내밀려던 손을 멈췄다.둘 사이에는 열린 문 하나만큼의 거리가 있었다.“확인되면 공유해 주세요.”낮은 목소리였다. 조용한 복도에서는 끝까지 또렷하게 들렸다.“네.”서윤은 객실로 들어왔다. 상자 위에 파일을 놓고, 외투도 벗지 않은 채 제조사 담당자에게 전화했다.“열 때 걸리는 겁니까?”“닫히는 건 괜찮습니다. 그런데 손으로 열기가 좀 뻑뻑합니다.”“측정은요?”“내일 오전에 하려고 합니다.”“지금 여러 번 열지는 말아 주세요. 처음 여는 샘플도 따로 남겨 두시고요.”통화를 마친 서윤은 시험표에 항목을 더했다. 낙하 뒤 닫힘 상태와 처음 여는 힘, 반복 사용 뒤 변화를 적었다. 도현에게도 내용을 보냈다.답은 곧 왔다.「내일 아침 식사 후 출발하겠습니다. 접수대 앞에서 뵙겠습니다.」서윤은 가방에서 충전기를 꺼냈다. 짧게 답하고 휴대전화를 뒤집었다.객실 벽 너머로 문 닫히는 소리가 났다.펜을 들던 손이 멈췄다. 복도에서 들었던 목소리가 아직 귀에 남아 있었다.「내일 또 보겠네.」당연한 일을 새삼 생각했다.서윤은 펜을 내려놓았다. 밴드 끝이 조금 들떠 있었다. 손끝으로 눌러 붙인 뒤 시험표를 다시 펼쳤다.◇3월 15일 아침, 시험실 작업대에 수정 샘플이 놓여 있었다.담당자가 뚜껑 가장자리를 짚었다.“걸리는 깊이를 늘렸습니다. 경사도 바꿨고요.”“어제 실패한 샘플과 표시를 다르게 해 주세요.”서윤은 샘플 번호를 확인했다. 도현은 작업대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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