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 남친이 새 사장으로 왔다

전 남친이 새 사장으로 왔다

last updateÚltima actualización : 2026-10-19
Por:  JinoActualizado ahor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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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년 전 말없이 떠난 전 남친이 새 사장으로 돌아왔다. 취임식에서 서로 모르는 척한 서윤과 도현. 이제 도현은 서윤의 팀 기획안을 직접 검토하겠다고 한다. 일로만 대하려는데, 작은 배려와 스치는 손끝이 자꾸 신경 쓰인다. 팀의 앞날까지 불안한 지금, 서윤은 일도 마음도 지킬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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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apítulo 1

1화. 모르는 사람

한서윤은 커피를 내려놓고 모니터를 봤다.

상품기획팀 공유 메일함에 전사 공지가 떠 있었다. ‘경영권 이전 및 신임 대표이사 취임 안내’. 날짜는 오늘이었다.

“야, 봤어?”

옆자리에서 오민재가 의자를 끌고 왔다. 서윤 쪽으로 모니터를 기울이며 같은 메일을 가리켰다.

“에이펙스캐피탈. 미국 투자사래. 대표가 직접 사장으로 온다는데.”

“읽었어.”

“근데 이름이 좀 낯익지 않아? 강도현. 어디서 들어본 적 있는데.”

마우스를 잡은 손가락이 멈췄다. 서윤은 손끝에 힘을 주었다가 풀었다. 민재는 눈치채지 못했다.

“흔한 이름이잖아.”

“그런가.”

민재는 고개를 갸웃하다가 자기 자리로 돌아갔다.

서윤은 메일을 다시 읽었다.

강도현.

3글자가 또렷했다. 32살. 미국에서 투자사를 운영하는 사람.

「동명이인이겠지.」

그런 사람이 세상에 1명만 있으란 법은 없었다. 그런데 마우스를 쥔 손이 차가워졌다. 커피에 손을 대려다 그만두었다.

7년이었다.

그동안 그 이름을 입 밖에 꺼내지 않았다. 누가 물어도, 혼자 있을 때도. 꺼내면 무너질까 봐서가 아니었다. 꺼낼 이유가 없다고 스스로를 설득했기 때문이다.

잘 됐다고 생각했다.

화면에 뜬 이름을 보기 전까지는.

“서윤 씨, 취임식 11시래요. 1층 로비에서.”

후배가 지나가며 말했다. 서윤은 고개를 끄덕였다. 커피를 1모금 마셨다.

미지근했다.

컵을 내려놓고도 손을 떼지 못했다.

◇

1층 로비는 사람들로 가득했다.

다온리빙 직원 200여 명이 거의 다 내려와 있었다. 구조조정 소문이 도는 터였다. 새 사장 얼굴이라도 보자는 분위기였다.

박 팀장이 팀원들을 앞쪽에 세우며 넥타이를 고쳐 맸다.

“자리 잡아, 자리. 앞에 서야 눈도장이라도 찍지.”

민재가 서윤 옆에 섰다.

“긴장돼?”

“왜 내가 긴장을 해.”

“아니, 그냥. 사장이 바뀌면 분위기도 바뀌잖아.”

서윤은 대답하지 않았다. 로비 정면을 봤다. 임시 단상 위에 마이크가 놓여 있었다. 옆에는 다온리빙 로고가 걸린 배너가 있었다.

엘리베이터 문이 열렸다.

비서로 보이는 여자가 먼저 나왔다. 뒤로 남자가 1명 걸어 나왔다.

검은 코트. 넥타이 없는 셔츠.

걸음이 빨랐다. 고개를 약간 숙이고 걷는 습관도 그대로였다.

서윤은 숨을 멈췄다.

동명이인이 아니었다.

강도현이었다.

7년 전보다 얼굴이 날카로워졌다. 턱선이 또렷했고 눈매는 차가웠다. 대학교 4학년 때 후드티 위에 패딩을 걸치고 정류장에서 버스를 기다리던 얼굴과는 달랐다.

그런데 왼발을 내딛을 때 어깨가 미세하게 기울었다.

서윤의 시선이 그 어깨에 머물렀다. 얼굴은 낯선데, 그런 작은 움직임은 알아볼 수 있었다.

「그대로네.」

생각하자마자 입술을 다물었다.

도현이 단상 앞에 섰다. 로비가 조용해졌다.

“강도현입니다. 오늘부터 다온리빙 대표이사를 맡게 됐습니다.”

목소리도 달라져 있었다. 낮고 단단했다.

예전에는 좀 더 부드러웠다. 서윤에게 말할 때는 특히.

서윤은 맞잡은 손을 내려다봤다. 손가락 사이가 축축했다. 고개를 들자 도현의 입술이 다시 움직였다.

“짧게 말씀드리겠습니다. 저는 이 회사를 살리러 왔습니다. 불필요한 것은 줄이고, 필요한 것에 집중하겠습니다. 여러분의 협조를 부탁드립니다.”

박수가 터졌다. 성의 없지는 않았지만 열광도 아니었다. ‘불필요한 것은 줄이고’가 무슨 뜻인지 모르는 사람은 없었다.

서윤은 박수를 치지 않았다. 모은 손을 그대로 두었다.

도현의 시선이 로비를 훑었다.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천천히.

서윤 위를 지나갔다.

멈추지 않았다.

서윤도 피하지 않았다. 도현의 눈을 마주할 때만 턱에 힘이 들어갔다. 들이마신 숨은 천천히 내보냈다.

「모르는 사람이야.」

7년 전에 아무 말 없이 사라진 사람은 아는 사람이 아니었다.

도현의 시선은 로비 끝까지 갔다가 정면으로 돌아왔다.

“각 팀 기획안을 이번 주 안에 제출해 주십시오. 제가 직접 검토하겠습니다.”

로비가 웅성거렸다.

박 팀장이 서윤을 돌아봤다. 기획안은 사실상 서윤이 쓰고 있었다. 서윤은 고개를 끄덕였다.

취임식은 그렇게 끝났다.

◇

사람들이 흩어지기 시작했다. 서윤은 엘리베이터 앞에서 버튼을 눌렀다.

“한서윤 대리.”

등 뒤에서 목소리가 들렸다.

서윤은 바로 돌아보지 못했다. 버튼에서 뗀 손끝이 허공에 잠깐 머물렀다.

누구인지 알았다. 그 목소리를 모를 리가 없었다.

천천히 몸을 돌렸다.

도현이 2걸음 뒤에 서 있었다.

가까이서 보니 눈 밑에 그림자가 있었다. 잠을 못 잔 얼굴이었다. 서윤은 그 눈 아래를 보다가 시선을 올렸다.

이 거리에서 도현을 보는 게 얼마 만인지 세고 싶지 않았다.

“기획안 제출 일정 관련해서 팀장님께 전달 부탁드립니다. 금요일까지입니다.”

사무적인 말투였다. 눈도 그랬다. 서윤의 이름을 부를 때 한 글자도 흔들리지 않았다.

서윤은 입 안쪽을 가볍게 눌렀다. 목소리를 고르고 대답했다.

“알겠습니다.”

도현과 같은 톤이었다.

말이 끊겼다.

1초. 2초.

서윤은 도현의 코트 깃으로 시선을 내리지 않으려 했다. 눈을 계속 보고 있자 숨 쉬는 소리까지 신경 쓰였다.

엘리베이터가 도착하는 소리가 났다.

도현이 먼저 시선을 거뒀다.

“수고하십시오.”

돌아서서 걸어갔다. 코트 자락이 흔들렸다. 서윤은 그 등을 봤다.

7년 전에도 이 사람은 등을 보여주고 갔다. 그때는 아무 말도 없었다.

엘리베이터 문이 열렸다.

서윤은 안으로 들어가 닫힘 버튼을 눌렀다. 문이 닫히는 동안 손을 내려다봤다.

떨리고 있었다.

손가락을 접어 주먹을 쥐었다. 손톱이 손바닥에 닿았다.

4층 버튼을 누르고 천장을 올려다봤다. 형광등 불빛이 하얗고 차가웠다.

「괜찮아.」

숨을 내쉬었다.

「모르는 사람이야.」

◇

자리에 돌아오자 민재가 물을 1잔 내밀었다.

“얼굴이 안 좋아.”

“원래 이런 얼굴이야.”

“아니, 평소보다 더. 밥 안 먹었지?”

서윤은 물을 받아 1모금 마셨다.

민재는 더 묻지 않았다. 물어볼 건 물어도 선을 넘지는 않았다. 서윤이 말하고 싶을 때까지 기다리는 사람이었다.

“기획안 금요일까지래.”

“금요일? 이번 주 금요일?”

“응.”

“미쳤다. 사흘밖에 안 남았는데.”

“있는 거 다듬으면 돼. 지난달에 정리해 둔 거 있잖아.”

민재가 한숨을 쉬었다.

“그건 그렇지만. 새 사장이 직접 본다며. 수준이 다를 텐데.”

서윤은 모니터를 켰다. 지난달에 만든 기획안 파일을 열었다. 반년 넘게 준비한 주방용품 신제품 라인업 제안서였다.

이걸 강도현이 본다.

키보드 위에 놓인 손가락이 멈췄다.

7년 전, 도현은 서윤의 시험 기간에 도서관 자리를 맡아주던 사람이었다. 발표를 준비할 때는 옆에서 타이머를 돌려주었다.

서윤의 일을 누구보다 응원하던 사람이었다.

이제는 평가하는 사람이 됐다.

서윤은 커서를 움직이지 않았다. 화면을 보고 있는데 로비에서 들었던 목소리가 자꾸 생각났다. ‘한서윤 대리.’ 이름 뒤에 붙은 말까지 낯설었다.

물컵을 잡았다가 놓았다.

「지금은 일이야.」

타이핑을 시작했다. 감정은 나중이었다. 7년 동안 그렇게 해왔다.

민재가 서랍을 열어 과자 봉지를 꺼냈다. 봉지 뜯는 소리가 키보드 소리 사이로 들렸다.

“이거라도 먹어. 부스러기 안 떨어지는 거야.”

서윤은 화면에서 눈을 떼지 않고 손을 내밀었다. 민재가 봉지를 쥐여 주려다 책상 빈 곳에 내려놓았다.

“손에 묻겠다. 여기 둘게.”

“고마워.”

서윤은 입력하던 문장을 마저 쓰고 과자를 집었다. 버터 냄새가 났다. 씹는 동안 표의 숫자를 다시 읽었다.

잘못 옮긴 판매량이 있었다. 원본 자료를 열어 고쳤다. 숫자가 맞아 들어가자 굳었던 어깨가 조금 내려갔다.

민재가 모니터 아래 붙은 메모지를 손가락으로 짚었다.

“지난달 자료는 공유 폴더에 있어.”

“찾았어.”

그제야 민재가 자기 의자를 당겼다.

서윤은 봉지 입구를 접어 물컵 옆에 놓았다. 손은 더 이상 차갑지 않았다. 그런데 키보드로 돌아가는 사이, 도현 앞에서 떨리던 손끝이 떠올랐다.

서윤은 손가락을 펴고 다시 문장을 썼다.

◇

저녁 8시. 사무실에는 서윤만 남아 있었다.

민재는 퇴근하며 “밥은 먹어”라고 했다. 박 팀장은 6시에 나갔다. 후배들은 7시쯤 하나둘 빠졌다.

서윤은 기획안을 고치고 있었다. 숫자와 시장 데이터를 확인하고 문구를 다듬었다.

집중하면 다른 생각은 나지 않았다.

집중하는 동안만큼은.

화장실을 다녀오는 길이었다. 복도 끝 창문 너머로 6층에 켜진 불이 보였다. 사장실이었다.

서윤은 걸음을 멈췄다.

불빛을 올려다보자 낮에 봤던 도현의 눈 밑이 떠올랐다. 피곤해 보이던 얼굴. 가까이 서고 나서야 보였던 흔적이었다.

「아직 있네.」

잠깐 더 보고 말았다.

「그래서 뭐.」

돌아서려는데 주머니 속 핸드폰이 울렸다.

모르는 번호였다. 서윤은 받지 않았다. 벨이 멈췄다가 다시 울렸다. 같은 번호였다.

전화를 받았다.

“한서윤 대리님, 사장실에서 찾으십니다.”

비서의 목소리였다.

“지금요?”

“네. 기획안 관련이라고 하셨습니다.”

서윤은 핸드폰을 내렸다. 화면에 시각이 떠 있었다.

오후 8시 14분.

기획안은 아직 제출 전이었다. 무슨 이야기를 하려는 건지 알 수 없었다.

서윤은 계단으로 갔다. 엘리베이터가 더 빨랐지만, 2분이 필요했다. 숨을 고를 2분.

올라가는 동안 입술을 다물었다. 숨이 가빠져서인지, 다시 마주할 생각 때문인지 가슴이 빠르게 움직였다.

6층 복도는 조용했다.

사장실 문 앞에 섰다. 불투명 유리 너머로 불빛이 새어 나왔다. 서윤은 문에 손을 가까이 댔다가 손가락을 가볍게 접었다.

노크를 했다.

“들어오세요.”

낮게 들리는 목소리에 손이 잠깐 멎었다.

문을 열었다.

도현이 책상 앞에 앉아 있었다. 재킷은 의자 등에 걸려 있었다. 셔츠 소매는 1번 접어 올린 상태였다. 책상 위에는 서류가 쌓여 있었다.

서윤은 문 앞에 섰다.

도현이 고개를 들었다.

시선이 마주쳤다.

로비에서와는 달랐다. 사이에 아무도 없었다. 200명의 직원도, 박 팀장도, 민재도.

서윤은 문에서 손을 뗐다. 손끝을 몸 옆에 붙이고 섰다.

도현의 접힌 소매 아래로 손목이 보였다. 서윤은 그쪽으로 내려가려는 시선을 다시 눈높이에 맞췄다.

「일 때문에 온 거야.」

도현이 먼저 입을 열었다.

“상품기획팀 기획안, 기존에 진행 중인 게 있다고 들었습니다.”

“네. 주방용품 신제품 라인업입니다.”

“방향을 미리 듣고 싶습니다. 금요일 전에 1번 브리핑해 줄 수 있습니까.”

완벽하게 사무적이었다.

서윤은 그 목소리에서 다른 뜻을 찾지 않으려 했다. 도현이 말을 마친 뒤에도 자신을 보고 있다는 것에 신경 쓰지 않으려 했다.

“일정 잡아 주시면 준비하겠습니다.”

“내일 오후 3시. 여기서.”

“알겠습니다.”

대답은 곧바로 나왔다.

다만 숨을 들이마시는 게 조금 늦었다. 도현 앞에서는 그런 작은 것까지 의식하게 됐다. 어깨를 움직이지 않으려고 얕게 숨을 쉬었다.

서윤은 고개를 숙여 인사했다. 시선을 내리니 책상 위에 놓인 도현의 손이 보였다.

더 보지 않고 돌아섰다.

“한 대리.”

걸음이 멈췄다.

등 뒤에서 들린 목소리는 아까보다 반 톤 낮았다. 서윤은 문 쪽으로 뻗으려던 손을 내렸다.

돌아보지 않으려 했다. 그런데 다음 말을 기다리는 동안 고개가 조금 움직였다.

“……아닙니다. 수고하세요.”

서윤은 끝내 돌아보지 않았다.

문을 잡은 손끝에 힘을 주었다. 닫히는 소리가 날 때까지 도현 쪽을 보지 않았다.

복도로 나와 걸음을 옮겼다.

무릎에 힘이 풀렸다. 벽에 손을 짚었다. 손바닥 아래로 차가운 벽면이 느껴졌다.

서윤은 고개를 숙였다. 숨을 내쉬어도 가슴이 쉽게 가라앉지 않았다.

아까 그 반 톤.

그건 사무적인 목소리가 아니었다.

이름을 부른 것도 아니었다. 한 대리. 낮에도 들었던 말이었다.

그런데 왜.

「기다리지 마.」

서윤은 눈을 감았다.

3초.

눈을 떴다. 벽에서 손을 떼고 손바닥을 내려다봤다. 차가운 감촉이 아직 남아 있었다.

「괜찮아.」

계단 쪽으로 몸을 돌렸다.

「모르는 사람이야.」

계단을 내려갔다. 4층 사무실로 돌아와 자리에 앉았다.

모니터에는 기획안이 그대로 떠 있었다.

서윤은 키보드 위에 손을 올렸다. 손끝이 제자리를 찾았다.

떨림은 멈춰 있었다.

(1화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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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화. 모르는 사람
한서윤은 커피를 내려놓고 모니터를 봤다.상품기획팀 공유 메일함에 전사 공지가 떠 있었다. ‘경영권 이전 및 신임 대표이사 취임 안내’. 날짜는 오늘이었다.“야, 봤어?”옆자리에서 오민재가 의자를 끌고 왔다. 서윤 쪽으로 모니터를 기울이며 같은 메일을 가리켰다.“에이펙스캐피탈. 미국 투자사래. 대표가 직접 사장으로 온다는데.”“읽었어.”“근데 이름이 좀 낯익지 않아? 강도현. 어디서 들어본 적 있는데.”마우스를 잡은 손가락이 멈췄다. 서윤은 손끝에 힘을 주었다가 풀었다. 민재는 눈치채지 못했다.“흔한 이름이잖아.”“그런가.”민재는 고개를 갸웃하다가 자기 자리로 돌아갔다.서윤은 메일을 다시 읽었다.강도현.3글자가 또렷했다. 32살. 미국에서 투자사를 운영하는 사람.「동명이인이겠지.」그런 사람이 세상에 1명만 있으란 법은 없었다. 그런데 마우스를 쥔 손이 차가워졌다. 커피에 손을 대려다 그만두었다.7년이었다.그동안 그 이름을 입 밖에 꺼내지 않았다. 누가 물어도, 혼자 있을 때도. 꺼내면 무너질까 봐서가 아니었다. 꺼낼 이유가 없다고 스스로를 설득했기 때문이다.잘 됐다고 생각했다.화면에 뜬 이름을 보기 전까지는.“서윤 씨, 취임식 11시래요. 1층 로비에서.”후배가 지나가며 말했다. 서윤은 고개를 끄덕였다. 커피를 1모금 마셨다.미지근했다.컵을 내려놓고도 손을 떼지 못했다.◇1층 로비는 사람들로 가득했다.다온리빙 직원 200여 명이 거의 다 내려와 있었다. 구조조정 소문이 도는 터였다. 새 사장 얼굴이라도 보자는 분위기였다.박 팀장이 팀원들을 앞쪽에 세우며 넥타이를 고쳐 맸다.“자리 잡아, 자리. 앞에 서야 눈도장이라도 찍지.”민재가 서윤 옆에 섰다.“긴장돼?”“왜 내가 긴장을 해.”“아니, 그냥. 사장이 바뀌면 분위기도 바뀌잖아.”서윤은 대답하지 않았다. 로비 정면을 봤다. 임시 단상 위에 마이크가 놓여 있었다. 옆에는 다온리빙 로고가 걸린 배너가 있었다.엘리베이터 문이 열렸다.비서로 보이는 여자가
last updateÚltima actualización : 2026-10-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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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화. 평가하는 사람
서윤은 마지막 표의 단위를 고쳤다.원과 천 원이 한 페이지 안에 섞여 있었다. 평소라면 하지 않았을 실수였다. 숫자를 다시 확인하고 저장 버튼을 눌렀다.핸드폰 화면이 켜졌다. 민재였다.[아직 회사야?]서윤은 짧게 답했다.[이제 가.][내일 보자. 뭐라도 먹고 자.]모니터를 껐다. 검은 화면에 얼굴이 비쳤다. 입술을 너무 세게 다물고 있었다.서윤은 입술에 힘을 풀었다. 그러자 어제 들었던 목소리가 더 또렷해졌다.가방을 챙기다 책상 한쪽의 메모를 봤다.내일 오후 세 시. 사장실.밑줄도 없었다. 그런데 그 문장만 눈에 들어왔다.한 대리.아닙니다.서윤은 메모 끝을 잡았다. 손가락 아래로 종이가 조금 휘었다.「그다음 말은 없었어.」메모를 뒤집었다. 끝내 하지 않은 말을 혼자 채워 넣는 버릇은 오래전에 그만뒀다. 답 없는 질문에 시간을 쓰면 해야 할 일을 못 했다.사무실 불을 끄고 나왔다.엘리베이터 앞에 섰다. 위쪽 표시등은 보지 않았다.◇다음 날 아침, 박 팀장은 서윤이 앉기도 전에 불렀다.“한 대리. 어제 사장실 갔다 왔다며?”가방 끈을 쥔 손에 힘이 들어갔다.“네. 기획안 방향을 미리 듣고 싶다고 하셨습니다.”“언제?”“오늘 오후 세 시입니다.”“오늘?”박 팀장이 책상 위 달력을 봤다. 금요일 칸에 빨간 동그라미가 쳐져 있었다.“제출은 금요일이라더니, 벌써 보자고 하네.”“중간 브리핑이라고 생각하고 준비하겠습니다.”“그래. 나도 같이 올라가야지. 자료 몇 부 뽑아.”서윤은 고개를 끄덕였다.박 팀장이 목소리를 낮췄다.“혹시 어제 다른 얘기는 없었어?”“없었습니다.”대답은 짧았다. 가방 끈을 놓는 데는 조금 더 걸렸다.“팀 인원이라든가. 업무 겹치는 부분이라든가.”“기획안 이야기만 하셨습니다.”박 팀장이 넥타이를 만졌다. 어제도 몇 번이나 봤던 동작이었다.“그래. 일단 잘 보여야지.”서윤은 대답하지 않고 자리로 돌아왔다.민재가 의자를 반쯤 돌리고 있었다.“오늘 발표야?”“브리핑.”“그게 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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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화. 빈칸의 가격
거래처 담당자는 네 번째 신호음이 울린 뒤 전화를 받았다.“한 대리님. 견적 때문에 전화하셨죠?”“네. 소량 생산 조건도 확인됐을까요?”“계산은 하고 있는데, 기존 견적하고 차이가 좀 납니다.”서윤은 새로 만든 비교표를 화면 한쪽으로 옮겼다.“어느 항목에서 차이가 나나요?”“금형 비용이요. 수량이 줄어도 처음 들어가는 비용은 같으니까요. 포장도 최소 주문 수량이 있고요.”“항목별로 나눠서 보내 주세요. 뚜껑 단품 포장은 별도 표로 부탁드립니다.”“내일 오전까지 드리겠습니다.”“확인되면 바로 연락 주세요.”통화를 마치자 민재가 의자를 돌렸다.“온대?”“내일 오전.”“표정 보니까 좋은 소식은 아닌데.”“단가가 올라갈 거라네.”“얼마나?”“받아 봐야 알아.”서윤은 빈칸에 ‘견적 회신 예정’이라고 적었다. 그 아래에는 ‘초기 비용’을 넣었다.판매량을 줄이면 부담도 줄 줄 알았다.하지만 수량과 상관없이 드는 돈이 있었다. 그것부터 확인해야 했다.◇3월 6일 오전 9시 17분, 견적서가 도착했다.서윤은 첨부 파일을 열었다. 수량이 적어질수록 개당 원가가 빠르게 올랐다.마지막 줄까지 읽고 다시 첫 줄로 돌아왔다.숫자는 그대로였다.민재가 옆에서 물었다.“왔어?”“응.”“어때?”서윤은 화면을 그쪽으로 조금 돌렸다.민재가 입을 다물었다. 잠시 뒤 자기 책상에서 계산기를 가져왔다.“이러면 지금 판매가로는 안 되겠는데.”“유통 수수료 넣으면 더 줄어.”“포장은?”“완성품은 왔어. 뚜껑 단품은 아직 확인 중.”서윤은 견적을 기존 계산표에 옮겼다. 소량 출시안의 예상 이익률이 바뀌었다.어제까지 비어 있던 칸이었다.숫자가 들어가니 더 오래 들여다보게 됐다.박 팀장이 다가왔다.“견적 받았어?”“네. 소량 생산 단가가 예상보다 높습니다.”박 팀장은 출력된 견적서를 받았다. 숫자 두 곳을 짚더니 넥타이를 당겼다.“그러니까 처음 계획대로 가자고 했잖아.”서윤은 입을 다물고 기다렸다.“품목도 늘리고 수량도 늘리면 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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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화. 이름이 적힌 제안서
민재는 화면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이거 팀장님도 봤을까?”“확인해 봐야 해.”“신규 투자 계획 재검토면 우리 기획안도 포함이겠지.”서윤은 비교표를 다시 열었다. 소량 출시안과 확대 출시안의 예상 손익을 봤다.어느 쪽이든 조건이 붙어 있었다. 팔려야 했다. 금형을 쓸 수 있어야 했다. 추가 수정도 크지 않아야 했다.메일에 한 줄을 더 썼다.기존 상품 손익과 신규 투자 비용을 구분해 검토했습니다.재무 자료를 첨부하고 전송을 눌렀다.민재가 의자를 조금 물렸다.“이제 어떻게 해?”“제출해야지.”“똑같이?”“빠진 게 있으면 채우고.”서윤은 밴드가 붙은 검지를 굽혔다. 끝이 조금 들떠 있었다. 손톱으로 누르자 다시 붙었다.“안 좋은 숫자도?”“우리만 못 본 척한다고 없어지지는 않잖아.”민재는 잠시 말이 없었다. 그러다 자기 자리로 돌아가 고객 문의 파일을 열었다.“그럼 난 원본 연결할게. 물어보면 바로 볼 수 있게.”“고마워.”“오늘은 밥 먹고 하자.”서윤은 시간을 확인했다. 늦었지만 구내식당 저녁 운영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응. 먹고 하자.”화면을 잠그기 전, 제안서 첫 장을 봤다.기획 담당 한서윤.자료 확인 항목에는 오민재의 이름이 있었다.서윤은 파일을 저장했다.◇3월 7일 아침, 박 팀장이 서윤을 불렀다.책상에는 전날 보낸 비교표가 놓여 있었다. 재무 자료는 그 아래에 반쯤 가려져 있었다.“이 표 어디까지 공유됐어?”“재무 자료 말씀하시는 겁니까?”“우리 팀 검토 대상이라는 거.”“민재 대리하고 같이 확인했습니다.”박 팀장은 넥타이 매듭을 고쳤다.“아직 결정된 건 아니야.”“네.”“괜히 팀 분위기 흔들리게 하지 말고.”서윤은 대답 대신 책상 위 제안서를 봤다. 첫 장 오른쪽 위에 붉은 물음표가 그려져 있었다.“최종안 확인 부탁드립니다. 오늘 제출해야 합니다.”박 팀장이 종이를 넘겼다.“이 손익분기 판매량, 그대로 넣을 거야?”“현재 견적 기준입니다.”“높잖아.”“그래서 확대 출시안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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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화. 같은 불편을 보는 눈
서윤은 참석자 칸 아래에 한 줄을 더 적었다.참관인도 제품 설명 전에는 개입 자제.민재가 화면을 보고 웃었다.“사장님한테도?”“그래야 같은 조건으로 보지.”“그 말은 네가 해.”“응.”서윤은 일정표를 저장했다. 월요일에 가져갈 물건을 떠올렸다. 용기 샘플. 관찰표. 마른 수건.도현에게 직접 말해야 했다. 설명하지 말고 기다려 달라고.서윤은 화면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일하는 건데, 뭐.」민재가 상자 안을 들여다봤다.“씻고 정리하는 과정도 보려면 기존 용기가 있어야 하지 않아?”“참여자들한테 평소 쓰는 걸 몇 개 가져와 달라고 하자. 뚜껑도 같이.”“우리 샘플이랑 비교하려고?”“일단 어떻게 쓰는지 보려고.”서윤은 안내문에 준비물을 추가했다. 번거로우면 가져오지 않아도 된다고 덧붙였다.그다음 관찰표의 첫 질문을 지웠다.뚜껑을 잃어버려 불편했던 적이 있습니까.빈칸을 넓혔다. 먼저 보고, 나중에 물을 생각이었다.◇3월 10일 아침, 서윤은 빌려 둔 공유 주방의 테이블을 닦았다.싱크대 옆에 수건을 펼쳤다. 같은 규격에 높이만 다른 용기를 놓고, 뚜껑은 따로 모았다.민재가 참여자 이름표를 내려놓았다.“다들 오신대. 한 분은 조금 일찍 가셔야 하고.”“그분부터 보자.”“물 마셨어?”“아직.”민재가 생수병을 밀어 줬다.“시작하면 또 안 마셔.”서윤은 병뚜껑을 열었다. 한 모금 마시고 내려놓자 출입문 쪽에서 발소리가 들렸다.도현이었다.검은 코트 아래로 짙은 회색 정장이 보였다. 고개를 조금 숙이고 들어온 도현이 테이블 앞에서 멈췄다.서윤은 생수병을 샘플에서 멀리 옮겼다. 병을 놓은 손은 바로 거두지 못했다.“오셨습니까.”“준비는 다 됐습니까?”가까이서 들으니 목소리가 낮았다. 서윤은 병에서 손을 뗐다.“네. 참여자분들 오시면 시작하겠습니다.”민재도 인사했다. 도현은 두 사람에게 고개를 끄덕였다. 코트를 벗어 벽 쪽 옷걸이에 걸었다.코트가 벗겨지자 정장 소매와 손목이 보였다. 서윤은 그 손이 테이블 끝의 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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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화. 명단에 오른 팀
박 팀장은 수화기를 귀에 댄 채 서윤을 봤다.“네. 지금 팀원들 있습니다.”민재가 내려놓은 샘플 상자를 책상 아래로 밀었다. 바닥을 긁는 소리가 났다.“내일 오전이요? 자료는 따로 보내 주시는 겁니까?”서윤은 관찰표를 내려놓았다. 종이 끝에 손가락이 걸렸다.박 팀장은 한동안 듣기만 했다. 넥타이 매듭을 만졌다가 수화기를 고쳐 잡았다.“알겠습니다.”전화가 끝났다. 박 팀장은 말이 없었다.서윤이 먼저 물었다.“무슨 자료를 준비하라고 합니까?”“기존 상품 실적하고 업무 분장표. 진행 중인 프로젝트 현황도.”민재가 고개를 들었다.“저희 팀 자료를요?”“검토할 팀들은 다 내라는 모양이야.”박 팀장은 자리로 돌아갔다. 앉고도 모니터를 켜지 않았다.서윤은 관찰표 위에 놓인 도현의 기록을 봤다.설명 전과 후. 시작과 종료.시간을 적은 글씨 사이로 손끝이 지나갔다. 어제 그가 용기를 받쳐 주던 손이 잠깐 떠올랐다. 서윤이 다 내려놓을 때까지 움직이지 않던 손.서윤은 종이 끝을 맞췄다.「지금은 자료야.」다른 자료와 함께 파일에 끼웠다.“민재야. 조사 영상은 원본 그대로 따로 저장해 줘.”“응. 편집본이랑 폴더 나눌게.”“기존 상품 문의도 기간별로 받을 수 있을까?”“얼마나?”“일단 자료부터 확인하자.”서윤은 의자를 당겼다.팀이 어디로 갈지는 알 수 없었다. 그래도 오늘 받은 자료를 잃어버릴 수는 없었다.파일을 닫기 전, 도현의 기록이 제대로 들어갔는지 한 번 더 봤다.◇3월 11일 오전, 사무실은 평소보다 조용했다.서윤이 컴퓨터를 켜자 민재가 말했다.“공지 아직 안 올라왔어.”“응.”서윤은 메일함을 열었다. 제조사의 회신과 조사 장소의 정산 안내가 먼저 보였다.그 아래에 인사팀 메일이 있었다.조직 운영 개선 검토 대상 및 자료 제출 안내.첨부 파일을 열었다. 상품기획팀 이름 옆에 검토 방향이 적혀 있었다.조직 통합 및 인원 조정 검토.기존 상품 수익성 및 신규 투자 적정성 검토.서윤은 두 문장을 다시 읽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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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화. 뚜껑 하나의 근거
서윤은 중단 조항 아래에 첫 문장을 적었다.신규 프로젝트 중단 시 기존 고객의 사용 불편은 해소되지 않음.한 번 읽고 문장 끝을 지웠다.틀린 말은 아니었다. 하지만 불편이 남는다고 해서 꼭 이 제품을 계속 만들어야 하는 건 아니었다.서윤은 확인할 항목을 붙였다. 기존 용기의 뚜껑을 바꿀 수 있는지. 교체가 안 된다는 안내 뒤에도 고객이 구매했는지. 신제품 말고 다른 방법은 얼마가 들고 얼마나 걸리는지.민재가 화면을 봤다.“새 제품 말고 뚜껑만 만드는 것도 비교하려고?”“응. 그걸로 해결되면 그쪽이 나을 수도 있으니까.”“기존 제품들은 규격이 다 달라.”“그래서 얼마나 다른지 확인해야 해.”민재는 책상 아래 상자에서 고객이 가져왔던 용기 사진을 꺼냈다. 몸체는 비슷했다. 뚜껑 안쪽 홈은 달랐다.“문의한 사람한테 맞는 뚜껑을 찾아 주는 것도 일이겠네.”“그 비용도 넣자.”서윤은 검토서에 줄을 더했다.계속 만들고 싶다는 말은 쓰지 않았다. 멈추면 해야 할 일을 적었다.◇3월 12일 오전, 고객관리 담당자가 자료를 보내 왔다.구매 이력이 확인된 고객과 확인되지 않은 고객이 나뉘어 있었다. 이후 구매가 없다고 해서 이탈로 볼 수는 없다는 설명도 있었다.민재가 옆자리에서 말했다.“어제 요청한 기간으로 맞췄어. 중복 문의는 따로 표시했고.”“교체 부품 주문은?”“다른 제품에서 실제로 판매한 건 있어. 우리 보관 용기는 문의만 있고.”“그럼 주문 수요로 묶으면 안 되겠다.”서윤은 표 제목을 ‘교체 부품 문의 현황’으로 고쳤다. 실제 판매된 부품의 주문 내역은 따로 붙였다.박 팀장이 커피를 들고 다가왔다.“중단 검토서는 어디까지 됐어?”“대안 비교 중입니다.”“우리는 계속해야 한다고 써야 하는 거 아니야?”“계속할 이유를 확인하려면 다른 방법도 봐야 합니다.”박 팀장은 커피를 내려놓았다.“다른 방법이 더 싸게 나오면?”“그럼 그 방법을 검토해야죠.”박 팀장의 손이 넥타이로 갔다.서윤은 화면을 돌렸다.“기존 용기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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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화. 출장 승인
출장 신청서의 첫 칸은 목적이었다.서윤은 ‘공용 뚜껑 체결부 수정 시험 참관’이라고 적었다. 제조사 일정표도 붙였다.시험은 3월 14일 오전. 회신은 3월 13일 오전까지였다.“내일 결정해서 모레 가는 거네.”민재가 옆에서 화면을 봤다.“응. 금형 상태는 확인됐고, 설비를 쓸 수 있는 시간이 그때래.”“누가 가?”“일단 담당자 한 명으로 올리려고.”서윤은 자기 이름과 출장 경비를 적었다. 시험 비용에서는 손을 멈췄다. 수정 범위에 따라 금액이 달라진다는 메일 때문이었다.금액 대신 ‘별도 견적 확인 중’이라고 썼다.“이대로 보여 주면 비용도 모르고 가냐고 하실 텐데.”“그래서 나눠 쓰려고.”현장 방문과 수정 시험 비용은 따로 승인받기로 했다. 서윤은 제조사에도 그 내용을 보냈다. 설비 예약은 내일 오전에 확정하되, 먼저 시험 범위별 비용을 알려 달라고 했다.메일을 보내고 나서야 어두워진 창밖이 보였다.민재가 책상 위 용기들을 상자에 넣었다.“내일 아침에 다시 보자. 지금 더 적으면 출장 목적에 사장님 설득까지 들어가겠다.”“팀장님부터야.”“그러니까 더 먹고 해야지.”민재가 빈 물병을 가리켰다.서윤은 신청서를 저장했다. 승인 칸은 아직 모두 비어 있었다.◇3월 13일 오전. 박 팀장은 신청서를 끝까지 읽기도 전에 내려놓았다.“이번 주는 미루자.”서윤은 책상 앞에 서 있었다.“제조사에 오전까지 답을 줘야 합니다.”“그쪽 사정에 우리가 맞출 필요는 없잖아. 출장비도 줄이라는 상황인데.”박 팀장이 넥타이 매듭을 만졌다.“영상으로 보면 안 돼? 수정한 거 보내 달라고 하고.”“샘플로 밀폐 여부는 확인할 수 있습니다. 다만 어디를 바꾸고 다시 시험할지는 현장에서 보는 편이 빠릅니다.”“빠른 것보다 돈이 문제야.”서윤은 뒤에 붙인 비교표를 앞으로 옮겼다.“그래서 비용을 나눴습니다.”표에는 현장 시험, 일정 연기, 프로젝트 중단이 적혀 있었다.박 팀장이 종이를 들었다.“중단은 왜 넣었어?”“현재 검토안에 있는 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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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화. 열리지 말아야 할 순간
“네. 지금 상태로 보관하겠습니다.”제조사 담당자의 대답을 듣고 서윤은 통화를 끝냈다. 영상은 뚜껑이 열린 장면에서 멈춰 있었다.도현이 휴대전화를 서윤 쪽으로 돌려놓았다. 화면을 짚던 손끝이 천천히 떨어졌다.“내일 첫 시험이 바뀌는 겁니까?”“순서를 바꾸겠습니다. 내용물을 넣고 닫힌 상태가 유지되는지 먼저 보겠습니다.”서윤은 시험표 맨 위에 낙하 시험을 적었다.“쉽게 열리는 이유부터 확인해야 합니다.”도현이 펜을 들었다. 서윤이 손을 옮기자 그제야 항목 옆에 짧게 표시했다. 두 펜 끝이 나란히 놓였다.“이동 전에 제조사에 전달해 주세요.”“네.”서윤은 파일을 닫았다. 안쪽 주머니에 든 밴드가 종이 사이로 조금 보였다.도현의 손은 이미 서류 쪽으로 물러나 있었다. 서윤은 파일 가장자리를 한 번 눌렀다.◇3월 14일 아침, 서윤은 공장으로 가는 차 안에서 시험표를 다시 읽었다.옆자리의 도현은 계약 자료를 보고 있었다. 종이를 넘기는 소리가 가까이서 났다.차가 굽은 길을 돌 때마다 두 사람 사이의 샘플 상자가 조금씩 움직였다.서윤이 상자를 붙잡았다.도현의 손도 그곳으로 왔다가 멈췄다. 서윤의 손끝과 닿기 직전이었다.“발밑에 놓을까요?”“괜찮습니다. 곧 도착하니까요.”도현은 손을 거뒀다. 서류도 무릎 위에 내려놓았다.서윤은 상자를 잡은 손에 괜히 힘을 더 줬다.「안 닿았는데.」“아침은 드셨습니까?”“먹었습니다.”빵 몇 입을 먹었다. 틀린 말은 아니었다.도현은 더 묻지 않았다. 대신 서윤 쪽 문 옆에 끼워져 있던 물병을 뺐다. 팔이 가까이 왔다가 상자 옆으로 내려갔다.“도착하면 바로 작업장으로 들어간다고 했습니다.”서윤은 물을 한 모금 마셨다.밴드는 출발 전에 붙였다. 병을 잡자 검지 옆면의 포장이 조금 당겼다. 서윤은 그 부분을 엄지로 눌렀다.도현의 시선이 잠깐 머물렀다.서윤이 손을 내려놓자 시선도 계약서로 내려갔다. 아무 말도 없었다.서윤은 물병을 상자 옆에 다시 놓았다. 병에서 손을 떼는 동안 도현의 옆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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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화. 남아 있는 습관
서윤은 방문 손잡이를 잡고 메시지를 다시 읽었다.직접 열어 봐야 한다고 했다. 사진도, 측정값도 없었다.복도 끝에서 도현이 휴대전화를 보고 있었다. 서윤은 문을 조금 더 열었다.“대표님.”도현이 고개를 들었다. 서윤을 보자 휴대전화를 쥔 손이 내려갔다.“제조사에서 연락이 왔습니다. 샘플은 나왔는데 내일 직접 열어 보라고 합니다.”“문제가 있다는 뜻입니까?”“아직은 모르겠습니다. 수치를 받아 보겠습니다.”도현의 시선이 서윤의 휴대전화에 닿았다. 가까이 오지는 않았다. 서윤은 화면을 내밀려던 손을 멈췄다.둘 사이에는 열린 문 하나만큼의 거리가 있었다.“확인되면 공유해 주세요.”낮은 목소리였다. 조용한 복도에서는 끝까지 또렷하게 들렸다.“네.”서윤은 객실로 들어왔다. 상자 위에 파일을 놓고, 외투도 벗지 않은 채 제조사 담당자에게 전화했다.“열 때 걸리는 겁니까?”“닫히는 건 괜찮습니다. 그런데 손으로 열기가 좀 뻑뻑합니다.”“측정은요?”“내일 오전에 하려고 합니다.”“지금 여러 번 열지는 말아 주세요. 처음 여는 샘플도 따로 남겨 두시고요.”통화를 마친 서윤은 시험표에 항목을 더했다. 낙하 뒤 닫힘 상태와 처음 여는 힘, 반복 사용 뒤 변화를 적었다. 도현에게도 내용을 보냈다.답은 곧 왔다.「내일 아침 식사 후 출발하겠습니다. 접수대 앞에서 뵙겠습니다.」서윤은 가방에서 충전기를 꺼냈다. 짧게 답하고 휴대전화를 뒤집었다.객실 벽 너머로 문 닫히는 소리가 났다.펜을 들던 손이 멈췄다. 복도에서 들었던 목소리가 아직 귀에 남아 있었다.「내일 또 보겠네.」당연한 일을 새삼 생각했다.서윤은 펜을 내려놓았다. 밴드 끝이 조금 들떠 있었다. 손끝으로 눌러 붙인 뒤 시험표를 다시 펼쳤다.◇3월 15일 아침, 시험실 작업대에 수정 샘플이 놓여 있었다.담당자가 뚜껑 가장자리를 짚었다.“걸리는 깊이를 늘렸습니다. 경사도 바꿨고요.”“어제 실패한 샘플과 표시를 다르게 해 주세요.”서윤은 샘플 번호를 확인했다. 도현은 작업대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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