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GIN출장 신청서의 첫 칸은 목적이었다.
서윤은 ‘공용 뚜껑 체결부 수정 시험 참관’이라고 적었다. 제조사 일정표도 붙였다.
시험은 3월 14일 오전. 회신은 3월 13일 오전까지였다.
“내일 결정해서 모레 가는 거네.”
민재가 옆에서 화면을 봤다.
“응. 금형 상태는 확인됐고, 설비를 쓸 수 있는 시간이 그때래.”
“누가 가?”
“일단 담당자 한 명으로 올리려고.”
서윤은 자기 이름과 출장 경비를 적었다. 시험 비용에서는 손을 멈췄다. 수정 범위에 따라 금액이 달라진다는 메일 때문이었다.
금액 대신 ‘별도 견적 확인 중’이라고 썼다.
“이대로 보여 주면 비용도 모르고 가냐고 하실 텐데.”
“그래서 나눠 쓰려고.”
현장 방문과 수정 시험 비용은 따로 승인받기로 했다. 서윤은 제조사에도 그 내용을 보냈다. 설비 예약은 내일 오전에 확정하되, 먼저 시험 범위별 비용을 알려 달라고 했다.
메일을 보내고 나서야 어두워진 창밖이 보였다.
민재가 책상 위 용기들을 상자에 넣었다.
“내일 아침에 다시 보자. 지금 더 적으면 출장 목적에 사장님 설득까지 들어가겠다.”
“팀장님부터야.”
“그러니까 더 먹고 해야지.”
민재가 빈 물병을 가리켰다.
서윤은 신청서를 저장했다. 승인 칸은 아직 모두 비어 있었다.
◇
3월 13일 오전. 박 팀장은 신청서를 끝까지 읽기도 전에 내려놓았다.
“이번 주는 미루자.”
서윤은 책상 앞에 서 있었다.
“제조사에 오전까지 답을 줘야 합니다.”
“그쪽 사정에 우리가 맞출 필요는 없잖아. 출장비도 줄이라는 상황인데.”
박 팀장이 넥타이 매듭을 만졌다.
“영상으로 보면 안 돼? 수정한 거 보내 달라고 하고.”
“샘플로 밀폐 여부는 확인할 수 있습니다. 다만 어디를 바꾸고 다시 시험할지는 현장에서 보는 편이 빠릅니다.”
“빠른 것보다 돈이 문제야.”
서윤은 뒤에 붙인 비교표를 앞으로 옮겼다.
“그래서 비용을 나눴습니다.”
표에는 현장 시험, 일정 연기, 프로젝트 중단이 적혀 있었다.
박 팀장이 종이를 들었다.
“중단은 왜 넣었어?”
“현재 검토안에 있는 선택지라서요.”
“출장 신청서에 이런 걸 붙이면 너무 크게 가는 거 아니야?”
“출장비만 보면 미루는 게 가장 쌉니다. 미룬 뒤에 드는 비용은 따로 봐야 합니다.”
서윤은 첫 칸을 짚었다.
“현장에서 수정 방향을 정하면 정해진 시간 안에 비교할 수 있습니다. 샘플을 받아 수정 요청을 하면 제작과 배송을 다시 해야 하고요.”
“그 비용은 얼마인데?”
“배송비는 확인했습니다. 추가 제작비는 수정 범위가 정해져야 나옵니다.”
서윤의 손이 다음 칸으로 옮겨 갔다.
“미루면 설비 일정도 다시 잡아야 합니다. 아직 다음 날짜는 못 받았습니다. 기다리는 동안 기획을 유지하면 추가 업무가 생깁니다. 중단하면 기존 제품의 교체 부품 대응을 검토해야 하고요.”
“그건 어차피 고객관리에서 하는 거잖아.”
“문의 응대는 합니다. 맞는 뚜껑을 팔 수 있는지는 금형과 재고를 확인해야 합니다. 담당 부서가 바뀌어도 그 일은 남습니다.”
박 팀장의 시선이 ‘확인 중’이라는 칸에 멈췄다.
“중단 비용을 크게 잡아서 출장 보내 달라는 건 아니고?”
“확정되지 않은 건 금액에 넣지 않았습니다.”
서윤은 잠깐 숨을 고른 뒤 말했다.
“출장 승인이 출시 결정은 아닙니다. 작은 범위로 시험한 뒤 더 수정할지, 멈출지 판단하려고 합니다.”
박 팀장은 첫 장을 다시 봤다.
“혼자 갈 거야?”
“고객 자료 요청이 계속 들어옵니다. 민재 대리는 본사에 남는 게 좋겠습니다.”
“시험 비용은?”
“방문 경비와 분리했습니다. 추가 작업은 견적을 받은 뒤 승인 요청하겠습니다.”
박 팀장이 펜을 들었다가 놓았다.
“가서 더 고쳐야 한다고 하면?”
“그 자리에서 발주하지 않겠습니다. 기준에 못 맞춘 항목과 비용을 받아 오겠습니다.”
그제야 승인 칸에 서명이 들어갔다.
“대표 결재까지 받아. 제조사에는 확정 전에 간다고 하지 말고.”
“네.”
서윤이 신청서를 챙기자 박 팀장이 불렀다.
“한 대리.”
“네.”
“시험 잘됐다는 말보다, 우리가 얼마를 더 써야 하는지 알아 와.”
서윤은 고개를 끄덕였다.
“둘 다 확인하겠습니다.”
◇
자리로 돌아오자 민재가 손을 내밀었다.
“살았어?”
서윤은 그 위에 신청서를 놓았다.
“팀장님 결재는 받았어.”
“대표 결재 남았네.”
“응. 비용표 다시 확인해 줘.”
민재가 의자를 당겨 표를 읽었다. 서윤은 제조사에 전화했다.
“한서윤입니다. 내일 오전 방문 건으로 연락드렸습니다.”
“결정되셨습니까?”
“최종 승인 중입니다. 오전 회신 기한 전에 다시 연락드리겠습니다. 먼저 시험 비용 자료를 확인하고 싶어서요.”
담당자가 전화를 잠시 내려놓았다가 돌아왔다.
“최초 수정과 재수정 범위를 나눠 보내 드리겠습니다. 재수정 금액은 현장에서 상태를 봐야 나옵니다.”
“추가 작업 전에는 견적과 저희 승인이 필요합니다.”
“알겠습니다.”
“현장에서 젖은 손 개폐 시험도 볼 수 있을까요?”
“조건을 정해서 오시면 준비하겠습니다.”
서윤은 도현의 사용 기록 옆에 항목을 적었다.
손 상태. 잡는 위치. 여는 힘. 닫힌 상태 확인.
도현이 직접 써 둔 기록이었다. 서윤의 눈이 그 글씨에 잠시 머물렀다. 펜을 쥔 손에 힘이 들어갔다가 풀렸다.
통화를 마치자 민재가 비교표를 돌려줬다.
“배송비에 샘플 회수 비용 빠졌어. 왕복이면 따로 들어간대.”
“확인해서 넣을게.”
“고객 자료는 내가 할게. 구매 이력 연결된 것부터 묶고, 교체 부품 문의도 구분해서.”
서윤은 민재를 봤다.
“현장에 같이 가는 게 편하긴 한데.”
“본사 비우면 둘 다 전화 받을 것 같아. 나는 여기서 자료 마무리할게.”
민재가 샘플 상자에서 작은 용기를 꺼냈다.
“대신 이건 가져가. 어제 젖은 손으로 다시 해 본 거 표시해 놨어.”
뚜껑 가장자리에 작은 스티커가 붙어 있었다. 손가락이 미끄러진 위치였다.
서윤은 안쪽 홈이 가려지지 않았는지 살폈다.
“시험할 때는 떼야겠다.”
“사진 찍어 놨어. 파일도 보낼게.”
민재가 휴대전화를 들다가 내려놓았다.
“서윤아.”
목소리가 조금 달랐다.
서윤은 파일에 꽂던 종이를 멈췄다.
“응?”
“출장 다녀오면 시간 좀 내줄래?”
“무슨 자료?”
“자료 말고.”
민재가 입술을 잠깐 눌렀다. 그러고는 서윤을 똑바로 봤다.
“업무 말고 할 얘기가 있어.”
서윤은 바로 대답하지 못했다.
민재가 먼저 웃었다.
“지금 말하라는 건 아니야. 내일 시험부터 잘 보고 와.”
“오래 걸리는 얘기야?”
“모르겠어. 아직 안 해 봐서.”
평소라면 받아쳤을 말이었다. 이번에는 웃음이 나오지 않았다.
민재가 상자 덮개를 닫았다.
“급한 일 아니니까 다녀와서.”
“응. 그때 얘기하자.”
민재가 고개를 끄덕였다.
서윤은 서류를 다시 맞췄다. 무엇을 물어야 할지 잠깐 생각했다. 하지만 민재는 이미 고객관리 파일을 열고 있었다.
그때 비서실에서 전화가 왔다.
“한 대리님. 출장 신청서 확인했습니다. 계약 관련 자료도 함께 가지고 올라오실 수 있을까요?”
◇
6층 회의 테이블에 신청서가 펼쳐져 있었다.
도현은 제조사의 기존 견적서를 보고 있었다. 서윤이 맞은편에 앉자 펜을 내려놓았다.
종이를 보던 눈이 서윤에게 올라왔다.
서윤은 파일 모서리를 맞춰 놓았다. 손끝에 힘이 조금 들어갔다.
“현장 방문과 시험 비용을 분리했군요.”
“추가 수정 범위가 정해지지 않았습니다. 출장 승인만으로 작업까지 진행하지 않으려고 합니다.”
“팀장님 의견도 같습니까?”
“추가 비용과 중단 기준을 확인해 오라고 하셨습니다.”
도현이 비교표를 넘겼다. 서윤은 그 손이 멈춘 칸을 따라 봤다.
“연기하면 설비 일정은 아직 없고요.”
“네. 이번 시간을 놓치면 다시 협의해야 합니다.”
“출장은 승인하겠습니다.”
서윤은 무릎 위에 둔 손을 조금 폈다. 짧게 숨이 나왔다.
도현이 말을 이었다.
“저도 동행합니다.”
펴던 손가락이 멈췄다.
“대표님께서요?”
목소리가 생각보다 조금 높았다. 서윤은 입술을 다물었다가 다시 풀었다.
도현은 견적서 아래쪽을 짚었다.
“수정 비용 부담과 금형 사용 조건을 제조사와 확인할 겁니다. 계약 담당자에게도 자료 검토를 요청했습니다.”
서윤은 그 손끝 아래의 문구를 봤다.
기존 금형 사용 조건 별도 협의.
“현장에서 수정 범위가 달라지면 비용 부담도 함께 정해야 합니다.”
“기술적인 수정 방향은 제조사와 제가 확인하겠습니다.”
“그렇게 하세요.”
도현이 첨부할 문서를 돌려줬다.
종이 끝이 서윤 앞에 닿았다. 서윤은 도현이 손을 뗀 뒤에야 문서를 집었다.
두 사람의 업무가 나뉘어 있었다. 서윤은 시험과 기술 검토를 맡았다. 도현은 계약 조건과 비용 부담을 협의했다. 추가 제작과 비용 집행은 따로 승인을 받아야 했다.
서윤은 담당자의 기술적 판단을 보장한 문장에서 눈을 멈췄다.
“기술 결정에 대표님이 참여하지 않는다는 뜻입니까?”
“현장에서 제 의견 때문에 시험 기준이 바뀌면 안 되니까요.”
도현의 목소리는 낮고 일정했다. 서윤이 문서에서 눈을 들었을 때도 도현은 서윤을 보고 있었다.
“기준에 못 미치면 다시 수정해야 할 수도 있습니다.”
“그때 필요한 비용을 판단하겠습니다. 통과 여부는 한 대리가 확인하고요.”
서윤은 문서를 다시 내려다봤다.
같이 간다는 말보다 이 문장이 먼저 남았다. 현장에서 무엇을 설명하고, 어디까지 결정할 수 있는지 분명했다.
문서를 누른 손끝에서 힘이 빠졌다.
「내가 판단하면 되는 거야.」
“제조사에도 이 내용으로 전달하겠습니다.”
“네. 양쪽 담당자가 알아야 합니다.”
도현이 승인 칸에 서명했다.
서윤은 펜이 움직이는 동안 기다렸다. 고개를 조금 숙인 도현의 셔츠 깃이 눈에 들어왔다. 곧 시선을 종이로 내렸다.
내일은 맞은편이 아니라 현장에 함께 있을 터였다.
그 생각에 무릎 위의 손을 한 번 쥐었다 폈다.
서윤은 준비한 시험 자료를 도현 앞으로 밀었다.
“어제 기록에 추가한 항목입니다. 개폐력은 손 상태와 잡는 위치를 구분해서 보려고 합니다.”
도현이 자료를 받으려 손을 내밀었다.
서윤은 종이를 놓으려다 멈췄다. 도현의 시선이 자료가 아닌 서윤의 검지에 닿아 있었다.
종이에 베였던 옆면이 드러나 있었다.
서윤은 손을 거뒀다. 아침에 씻다가 밴드가 떨어졌다. 다시 붙이지 못한 채였다. 벌어진 곳은 붙었지만 가장자리가 아직 붉었다.
도현은 아무 말 없이 일어났다.
서윤의 시선이 따라 올라갔다.
자료를 더 가져오려는 줄 알았다. 그런데 돌아온 도현의 손에는 밴드 하나가 들려 있었다.
지난번에 받은 것과 같은 크기였다.
도현은 자료 옆에 밴드를 놓았다. 손을 뗀 뒤에도 서윤은 그 자리를 보고 있었다.
“물로 시험할 때는 붙이는 게 낫겠습니다.”
아까보다 목소리가 조금 낮았다.
서윤은 밴드의 포장 끝을 봤다. 지난주 복도에서 내밀었던 손도 떠올랐다. 그때는 비서에게 받은 것이라고 했다.
이번에는 묻지 않았다.
“상처는 거의 나았습니다.”
“상처 가장자리가 벌어져 있어서요.”
서윤은 검지를 손바닥 쪽으로 조금 접었다. 도현이 알아볼 만큼 남아 있었나 싶었다.
「그 짧은 사이에 봤네.」
도현은 앉은 채 더 가까이 오지 않았다. 손도 다시 내밀지 않았다.
밴드는 서윤 쪽에 놓여 있었다. 가져가지 않아도 되는 거리였다.
서윤은 파일을 닫으려다 멈췄다. 검지 옆면이 파일에 닿기 직전이었다.
도현의 눈이 그 손에 잠시 머물렀다. 재촉하는 말은 없었다.
서윤이 먼저 고개를 들었다.
“감사합니다.”
목소리가 조금 작아졌다. 도현과 눈이 마주친 뒤에야 밴드의 포장 끝을 집었다.
얇은 포장이 손끝에 닿았다.
도현의 시선이 따라왔다가 자료로 내려갔다. 서윤도 뒤늦게 눈을 내렸다.
포장을 뜯지는 않았다. 파일 안쪽 주머니에 넣었다. 출장 중 물을 만질 일이 있으니 챙기는 게 맞았다.
「필요해서 챙기는 거야.」
그런데도 덮개는 바로 닫히지 않았다.
서윤은 밴드가 안쪽에 잘 들어갔는지 한 번 더 봤다. 손끝으로 주머니 끝을 누르고서야 파일을 닫았다.
도현은 기다렸다가 말했다.
“내일 이동 일정은 비서실에서 전달하겠습니다.”
서윤은 파일 위에 손을 얹었다.
“제조사에 방문 확정부터 알리겠습니다.”
휴대전화를 꺼내자 새 메일 알림이 보였다. 제조사 담당자가 보낸 메일이었다.
제목을 읽던 손이 멈췄다.
체결부 수정 시험 샘플 사전 확인 요청.
첨부 파일에 영상 표시가 붙어 있었다.
“제조사에서 자료가 왔습니다.”
도현이 고개를 들었다.
“비용 견적입니까?”
“시험용 샘플 영상입니다.”
서윤이 파일을 열었다.
작업대 위에 용기가 놓여 있었다. 담당자는 뚜껑 가장자리를 눌러 닫힌 상태를 보여 줬다. 네 귀퉁이가 모두 몸체에 붙어 있었다.
이어서 여는 동작이 나왔다.
손가락이 가장자리를 조금 들어 올렸다.
뚜껑이 바로 풀렸다.
서윤은 영상을 멈췄다. 재생 위치를 돌려 닫는 장면부터 다시 봤다.
도현이 물었다.
“어떤 상태입니까?”
“다 닫힌 걸 확인한 뒤 열었습니다.”
“잘 열리는 것 같은데요.”
서윤은 화면 아래의 설명을 읽었다.
“너무 쉽게 열립니다.”
개폐력 측정값이 임시 기준보다 낮았다. 담당자는 체결부 수정 뒤 밀폐 상태도 다시 확인해야 한다고 적었다.
서윤은 휴대전화를 테이블 가운데에 놓았다.
도현이 화면을 보려고 몸을 숙였다. 서윤도 해당 장면을 짚으려 손을 뻗었다.
도현의 손이 가까이 있었다.
손끝이 닿지는 않았다. 그런데도 서윤의 검지가 화면 위에서 잠깐 멈췄다. 고개를 돌리면 도현의 얼굴이 너무 가까울 것 같았다.
서윤은 눈을 화면에 둔 채 숨을 짧게 골랐다.
도현의 셔츠 소매가 시야 끝에 들어왔다. 조금 전에는 테이블 너머에 있던 손이었다.
「지금은 시험부터.」
서윤은 멈춘 장면을 짚었다.
“손으로 열기 쉬운 것과, 닫힌 채로 유지되는 건 따로 봐야 합니다.”
목소리는 제자리로 돌아왔다.
도현도 화면을 봤다. 서윤은 손을 거둬 담당자에게 전화를 걸었다.
연결음이 두 번 울렸다.
“영상 보셨습니까?”
“네. 닫힌 상태는 몇 번 확인하셨나요?”
“앞서 시험한 조건으로 다시 했는데 비슷하게 나옵니다.”
“내용물을 넣은 시험도 진행하셨습니까?”
수화기 너머가 잠깐 조용해졌다.
“그건 내일 현장에서 함께 보시려고 준비 중입니다.”
서윤은 열린 영상 옆에 시험 항목을 띄웠다.
밀폐 성능. 개폐력. 반복 사용 뒤 변형.
첫 항목 아래에 내용을 추가했다. 도현은 옆에서 화면을 보고 있었다. 가까워진 거리는 그대로였지만 서윤의 손은 더 이상 멈추지 않았다.
화면 속 뚜껑이 다시 가벼운 손끝에 풀렸다.
“내용물 넣은 상태부터 확인하겠습니다.”
서윤이 말했다.
“지금 샘플은 더 수정하지 말고 그대로 남겨 주세요.”
(8화 끝)
“월요일은 괜찮아.”서윤이 대답하자 민재가 가방 끈을 고쳐 잡았다.“저녁 먹으면서 얘기해도 되지?”“응. 어디로 갈까?”“너 자주 가는 데. 회사 뒤에 밥집.”“거긴 퇴근 시간에 사람 많잖아.”“안쪽 자리 있으면 앉고. 없으면 다른 데 가자.”평소 식사 약속을 잡을 때 하던 말이었다. 그런데 민재는 휴대전화를 꺼내지 않았다. 서윤을 한동안 보다가 고개를 끄덕였다.“월요일에 보자.”서윤도 고개를 끄덕였다.갈림길에서 민재가 먼저 손을 들었다. 서윤은 몇 걸음 가다가 돌아봤다. 민재는 아직 그 자리에 있었다.눈이 마주치자 민재가 다시 손을 들었다.서윤은 이번에는 돌아보지 않았다. 가방 끈을 잡고 그대로 걸었다.◇3월 24일, 서윤은 출근하자마자 제조사 메일을 확인했다.재시험 일정은 아직이었다. 승인된 비용 안에서 진행할 항목을 정리했다는 답만 와 있었다.민재가 옆자리에 가방을 내려놓았다.“답 왔어?”“일정은 오후에 준대.”“고객 자료는 오전에 다시 보낼게. 구매 이력 확인된 것만 먼저 묶었어.”“고마워.”민재는 자리에 앉았다. 서윤은 화면을 조금 당겼다. 두 사람 모두 금요일에 잡은 약속을 꺼내지 않았다.오전 회의가 끝나자 후배가 자료철을 안고 다가왔다.“대리님, 제가 지난주 조사 안내물을 추가 제작비에 넣었는데요.”서윤은 후배가 가리킨 항목을 봤다.&ld
“재시험을 빼면 수정한 조건을 확인할 수 없습니다.”서윤은 승인 메일 옆에 빈 문서를 띄웠다.전화 너머로 종이 넘기는 소리가 들렸다.“필수 시험과 추가 조사를 나눠서 보내 주시겠습니까?”“네. 비용이 이미 발생한 항목도 따로 적겠습니다.”“자료를 보내신다고 유지가 확정되는 건 아닙니다.”“알고 있습니다. 같은 항목이 두 번 삭감되지 않게 확인해 주세요.”통화가 끝났다.서윤은 첫 줄에 재시험이라고 적었다. 낙하와 개폐력, 높이가 다른 몸체에 같은 뚜껑을 끼우는 시험. 확인한 것과 남은 것을 나눴다.책상 한쪽에 조사실에서 가져온 샘플이 있었다.큰 몸체 안에서 작은 몸체 두 개를 꺼냈다. 높이는 달라도 입구는 같았다. 뚜껑을 바꿔 끼워도 손끝에 걸리는 감각은 달라지지 않았다.「필요한 것만 살 수 있으면.」기록지에 적힌 말을 다시 읽었다. 서윤은 큰 몸체를 상자에 넣었다.◇3월 21일 아침, 민재는 의자에 앉기도 전에 서윤의 책상을 봤다.“밤에 구성 바꿨어?”“아직 제안이야. 자주 쓰는 크기 두 개로 시작하려고.”서윤은 용기를 민재 쪽으로 밀었다.“규격은 같고 높이만 달라. 뚜껑도 서로 바꾸어 쓸 수 있어.”“단품보다 이쪽이 나아?”“각각 포장하면 처음 사는 가격은 내려가도 비용이 많이 붙어. 두 개를 묶는 안으로 견적 요청했어.”민재가 작은 몸체를 들었다.“구성이 줄어도 공용 뚜껑을 써 볼 수 있겠네.”“응. 나중에 필요한 높이를 더 살 수 있고.”“추가로 살 거라고 계산에 넣은 건 아니지?”서윤이 손익표를 돌렸다.“입문 구성만으로 계산했어. 추가 구매는 따로 검증해야 해.”민재는 고개를 끄덕이고 종이 봉투를 내려놓았다.“그럼 이것도 입문 구성.”작은 빵 두 개가 들어 있었다.서윤이 민재를 봤다.“커피만 마셨을 것 같아서.”“아직 물도 안 마셨어.”“더 심하네.”민재는 자기 자리에서 물병을 가져왔다. 서윤은 병을 받고 빵 하나를 꺼냈다.먹는 동안 제조사 회신이 왔다. 두 용기를 묶으면 재료비는 줄었다.
도현은 태블릿을 책상 위에 내려놓았다.빈 의자 뒤에 머물던 손이 천천히 내려갔다. 손끝이 의자에서 떨어지는 순간까지 서윤은 보고 있었다.“회사에 온 이유를 묻는 겁니까?”“둘을 다르게 대답할 거예요?”서윤은 책상 모서리에 손을 대지 않았다. 손을 뻗으면 다시 일 이야기로 돌아갈까 봐 망설였다. 손가락을 가볍게 접었다.도현이 입술을 열었다가 닫았다. 대답 전에 숨을 고르는 소리가 들렸다. 가까워서 들리는 소리였다.“다르게 대답해야 합니다.”“그럼 오늘은 됐어요.”서윤이 몸을 돌렸다. 도현은 붙잡지 않았다. 그런데도 등 뒤에 시선이 남아 있었다.서윤이 의자를 당기기 전에 도현이 다시 말했다.“대답을 피하려는 건 아닙니다.”아까보다 목소리가 낮았다.서윤은 돌아보지 않았다.“지금 못 하는 대답이면 준비해서 해요.”의자에 앉자 화면이 눈에 들어왔다. 아직 반품 비용표가 떠 있었다. 서윤은 글자를 읽으려 했다. 읽던 줄에서 눈이 멈췄다.도현의 손이 태블릿 위에 닿았다. 바로 집어 들지는 않았다. 화면 가장자리에 놓인 손끝이 가만히 있었다.“한 대리.”서윤은 화면을 본 채 기다렸다. 대답하면 목소리가 달라질까 봐 입을 다물었다.“업무가 끝난 뒤에 시간을 부탁해도 되겠습니까?”서윤은 그제야 도현을 봤다. 도현은 태블릿이 아니라 서윤을 보고 있었다.「업무가 끝난 뒤.」그 짧은 말이 자꾸 마음에 걸렸다.“목요일에 패널 시험이 잡히면, 결과부터 정리해야 해요.”“그 뒤라도 괜찮습니다.”도현은 재촉하지 않았다. 서윤이 답할 때까지 손도 움직이지 않았다.서윤은 고개를 작게 끄덕였다.그제야 도현이 태블릿을 가져갔다. 책상 위에서 손이 멀어졌다. 서윤은 시선을 화면으로 돌렸다.발소리가 사무실 밖으로 멀어지고 나서야 등받이에 등을 댔다. 짧게 참고 있던 숨이 나왔다.화면 아래로 빵 포장이 조금 나와 있었다.서윤은 남은 빵을 꺼냈다. 포장을 접는 손끝에 힘이 들어갔다.「무슨 대답을 하려고.」한 입을 먹고, 식어 버린 물을 마셨다. 목
서윤은 메일을 끝까지 읽고 4층 버튼을 눌렀다.엘리베이터 문이 닫혔다. 파일을 받친 손가락에 종이 모서리가 눌렸다.설문만으로는 안 된다는 말은 맞았다. 서윤도 그 말을 했었다.그런데도 화면에서 눈을 떼는 데 조금 걸렸다.사무실에 돌아오자 민재가 의자를 돌렸다.“어떻게 됐어?”“검토 일정은 그대로래.”“원가가 낮아져도?”“실제로 팔린 건 아니니까.”서윤은 파일을 내려놓고 메일을 전달했다. 민재가 화면을 아래로 내렸다.“그럼 지금 판매부터 하라는 거야?”“품질 확인이 남았어. 그 순서는 못 바꿔.”“우리가 할 수 있는 것부터 찾자.”민재가 빈 문서를 열었다.서윤도 의자에 앉았다. 손을 올렸지만 바로 글자를 치지는 못했다.메일에서 읽은 말이 아직 머릿속에 남아 있었다.「틀린 말은 아니야.」서윤은 문서 제목부터 적었다.고객 패널 시험안.◇3월 18일 아침, 서윤은 시험안 첫 장에서 구매 의향이라는 말을 지웠다.옆에 적었던 예상 주문도 지웠다.민재가 가방을 내려놓으며 화면을 봤다.“아예 안 물어보게?”“물어볼 거야. 그냥 사고 싶냐고만 묻지는 않고.”서윤은 빈 용기와 뚜껑을 책상 위에 놓았다. 종이 가격표도 옆에 세웠다.“제품을 써 보고, 가격을 보고, 자기 집에 가져갈 구성을 고르게 할 거야.”“안 고르는 것도 가능하게?”“응. 지금 쓰는 걸 계속 쓰겠다는 선택도 있어야 해.”민재는 뚜껑을 집었다가 내려놨다.“좋다고 해 놓고 가격 앞에서는 안 고를 수도 있겠네.”“그걸 봐야 해.”진행 순서는 간단히 정했다. 평소 쓰는 용기를 확인한 뒤 샘플과 가격을 보여 준다. 마지막에는 선택을 바꾸거나 모두 취소할 수 있게 했다.민재가 마지막 칸을 가리켰다.“여기서 결제는 안 받고?”“안 받아. 주문으로 기록하면 안 돼.”“그럼 매출 증거는 여전히 없네.”“맞아. 매출을 대신할 수는 없어.”서윤은 문서 맨 위에 적었다.비판매형 시험. 결제와 주문 접수는 진행하지 않음.선택한 구성과 구매를 포기한 이유는 따로
서윤은 종이 끝을 쥔 손에서 힘을 뺐다.도현의 손이 바로 앞에 있었다. 서류를 건네면 손끝이 닿을 만큼 가까웠다.“여기 있습니다.”서윤은 흩어진 서류를 포갰다. 제목이 보인 종이를 따로 빼지도, 다시 들여다보지도 않았다.종이를 내미는 동안 도현은 손을 움직이지 않았다. 서윤이 끝을 놓은 뒤에야 받아 갔다.손끝은 닿지 않았다. 서윤은 빈손을 무릎 위로 내렸다.도현은 서류를 자료철 안에 넣었다.“감사합니다.”가까이서 들으니 목소리가 낮았다. 서윤은 대답 대신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차가 곧은 길로 들어섰다. 서윤은 무릎 위의 시험표를 내려다봤다. 마지막 줄까지 적었는데도 펜을 다시 꺼냈다.아버지 회사.알고 있던 이름 옆에 처음 보는 말이 붙어 있었다. 서윤이 모르는 도현의 시간이 그 자료철 안에 있었다.펜을 쥔 손가락을 고쳐 잡았다. 옆을 보면 도현의 얼굴부터 살필 것 같았다.「묻지 말자.」“한 대리.”펜 끝이 종이 위에서 멈췄다. 서윤은 고개만 조금 돌렸다.“파일 드리겠습니다.”도현이 빈 파일을 내밀었다. 파일 끝을 받으려던 서윤의 손이 잠깐 머뭇거렸다. 도현의 손가락이 접힌 부분을 잡고 있었다.서윤은 반대쪽을 받았다. 시험표를 끼우고 가방 안에 넣었다.“네.”묻지는 않았다.도현도 자료철을 닫았다. 좌석 사이에 놓였던 서류가 사라졌다. 두 사람의 손 사이에는 아무것도 없었다.서윤은 무릎 위에 손을 모았다. 도현의 소매 끝이 시야에 들어왔다. 고개를 돌리지 않아도 보이는 거리였다.숨을 천천히 내쉬었다.서윤은 창 쪽으로 몸을 조금 돌렸다.◇3월 17일 오전, 제조사에서 새 견적서가 도착했다.서윤은 외투를 의자에 걸치다 말고 앉았다. 첨부 파일은 수정 견적서와 포장 변경안이었다.옆자리 민재가 모니터 쪽으로 고개를 기울였다.“왔어?”“응. 포장 비용까지.”“드디어 빈칸 없어지겠네.”서윤은 견적서를 열었다.완성품은 2,000세트 생산 조건이었다. 기존 몸체 금형을 쓰고 뚜껑 체결부만 수정했다. 조립과 기본 포장은
서윤은 방문 손잡이를 잡고 메시지를 다시 읽었다.직접 열어 봐야 한다고 했다. 사진도, 측정값도 없었다.복도 끝에서 도현이 휴대전화를 보고 있었다. 서윤은 문을 조금 더 열었다.“대표님.”도현이 고개를 들었다. 서윤을 보자 휴대전화를 쥔 손이 내려갔다.“제조사에서 연락이 왔습니다. 샘플은 나왔는데 내일 직접 열어 보라고 합니다.”“문제가 있다는 뜻입니까?”“아직은 모르겠습니다. 수치를 받아 보겠습니다.”도현의 시선이 서윤의 휴대전화에 닿았다. 가까이 오지는 않았다. 서윤은 화면을 내밀려던 손을 멈췄다.둘 사이에는 열린 문 하나만큼의 거리가 있었다.“확인되면 공유해 주세요.”낮은 목소리였다. 조용한 복도에서는 끝까지 또렷하게 들렸다.“네.”서윤은 객실로 들어왔다. 상자 위에 파일을 놓고, 외투도 벗지 않은 채 제조사 담당자에게 전화했다.“열 때 걸리는 겁니까?”“닫히는 건 괜찮습니다. 그런데 손으로 열기가 좀 뻑뻑합니다.”“측정은요?”“내일 오전에 하려고 합니다.”“지금 여러 번 열지는 말아 주세요. 처음 여는 샘플도 따로 남겨 두시고요.”통화를 마친 서윤은 시험표에 항목을 더했다. 낙하 뒤 닫힘 상태와 처음 여는 힘, 반복 사용 뒤 변화를 적었다. 도현에게도 내용을 보냈다.답은 곧 왔다.「내일 아침 식사 후 출발하겠습니다. 접수대 앞에서 뵙겠습니다.」서윤은 가방에서 충전기를 꺼냈다. 짧게 답하고 휴대전화를 뒤집었다.객실 벽 너머로 문 닫히는 소리가 났다.펜을 들던 손이 멈췄다. 복도에서 들었던 목소리가 아직 귀에 남아 있었다.「내일 또 보겠네.」당연한 일을 새삼 생각했다.서윤은 펜을 내려놓았다. 밴드 끝이 조금 들떠 있었다. 손끝으로 눌러 붙인 뒤 시험표를 다시 펼쳤다.◇3월 15일 아침, 시험실 작업대에 수정 샘플이 놓여 있었다.담당자가 뚜껑 가장자리를 짚었다.“걸리는 깊이를 늘렸습니다. 경사도 바꿨고요.”“어제 실패한 샘플과 표시를 다르게 해 주세요.”서윤은 샘플 번호를 확인했다. 도현은 작업대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