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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화. 열리지 말아야 할 순간

Author: Jino
last update publish date: 2026-10-16 18:43:22

“네. 지금 상태로 보관하겠습니다.”

제조사 담당자의 대답을 듣고 서윤은 통화를 끝냈다. 영상은 뚜껑이 열린 장면에서 멈춰 있었다.

도현이 휴대전화를 서윤 쪽으로 돌려놓았다. 화면을 짚던 손끝이 천천히 떨어졌다.

“내일 첫 시험이 바뀌는 겁니까?”

“순서를 바꾸겠습니다. 내용물을 넣고 닫힌 상태가 유지되는지 먼저 보겠습니다.”

서윤은 시험표 맨 위에 낙하 시험을 적었다.

“쉽게 열리는 이유부터 확인해야 합니다.”

도현이 펜을 들었다. 서윤이 손을 옮기자 그제야 항목 옆에 짧게 표시했다. 두 펜 끝이 나란히 놓였다.

“이동 전에 제조사에 전달해 주세요.”

“네.”

서윤은 파일을 닫았다. 안쪽 주머니에 든 밴드가 종이 사이로 조금 보였다.

도현의 손은 이미 서류 쪽으로 물러나 있었다. 서윤은 파일 가장자리를 한 번 눌렀다.

◇

3월 14일 아침, 서윤은 공장으로 가는 차 안에서 시험표를 다시 읽었다.

옆자리의 도현은 계약 자료를 보고 있었다. 종이를 넘기는 소리가 가까이서 났다.

차가 굽은 길을 돌 때마다 두 사람 사이의 샘플 상자가 조금씩 움직였다.

서윤이 상자를 붙잡았다.

도현의 손도 그곳으로 왔다가 멈췄다. 서윤의 손끝과 닿기 직전이었다.

“발밑에 놓을까요?”

“괜찮습니다. 곧 도착하니까요.”

도현은 손을 거뒀다. 서류도 무릎 위에 내려놓았다.

서윤은 상자를 잡은 손에 괜히 힘을 더 줬다.

「안 닿았는데.」

“아침은 드셨습니까?”

“먹었습니다.”

빵 몇 입을 먹었다. 틀린 말은 아니었다.

도현은 더 묻지 않았다. 대신 서윤 쪽 문 옆에 끼워져 있던 물병을 뺐다. 팔이 가까이 왔다가 상자 옆으로 내려갔다.

“도착하면 바로 작업장으로 들어간다고 했습니다.”

서윤은 물을 한 모금 마셨다.

밴드는 출발 전에 붙였다. 병을 잡자 검지 옆면의 포장이 조금 당겼다. 서윤은 그 부분을 엄지로 눌렀다.

도현의 시선이 잠깐 머물렀다.

서윤이 손을 내려놓자 시선도 계약서로 내려갔다. 아무 말도 없었다.

서윤은 물병을 상자 옆에 다시 놓았다. 병에서 손을 떼는 동안 도현의 옆얼굴이 보였다. 방금 전까지 자신을 보고 있던 눈은 글자를 따라 움직이고 있었다.

공장에 도착했을 때 담당자는 출입문 앞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오시느라 고생하셨습니다. 준비해 둔 샘플부터 보시죠.”

서윤은 차에서 상자를 꺼냈다.

담당자가 받으려고 했지만 도현이 먼저 손잡이를 잡았다. 서윤의 손이 빠질 때까지 상자를 당기지 않았다.

“어디로 가면 됩니까?”

“안쪽 시험실입니다.”

서윤은 파일을 챙겼다. 빈손이 된 손가락이 잠깐 굽었다가 펴졌다.

앞서 걷는 도현의 손에 상자가 들려 있었다. 서윤은 그 손을 보다 파일로 눈을 내렸다.

시험실 작업대에는 전날 영상에서 본 용기가 놓여 있었다. 담당자는 서윤이 가져온 샘플과 구분해 종이표를 붙였다.

“요청하신 대로 추가 수정은 안 했습니다.”

“닫힌 상태부터 확인하겠습니다.”

서윤은 용기 가장자리를 따라 손을 눌렀다. 네 귀퉁이가 모두 붙었다. 겉으로는 틈이 보이지 않았다.

“기준 샘플도 같은 조건으로 준비해 주세요.”

시험 담당 직원이 용기마다 정해진 무게의 내용물을 넣었다. 서윤은 시험표에 적힌 무게와 낙하 높이를 확인했다.

도현은 옆에서 기다렸다. 서윤이 고개를 끄덕이자 작업대로 시선을 돌렸다.

“먼저 바닥면부터요.”

직원이 용기를 들었다가 놓았다.

용기가 바닥에 닿으며 짧은 소리를 냈다. 뚜껑은 닫혀 있었다.

직원이 다시 용기를 들었다. 이번에는 모서리가 먼저 닿는 방향이었다.

소리가 달랐다.

뚜껑 한쪽이 들렸다. 안에 든 내용물이 시험대 바깥으로 흘렀다.

서윤은 펜을 멈췄다.

직원이 급히 용기를 집으려 했다.

“잠깐만요. 그대로 둬 주세요.”

직원의 손이 멎었다.

서윤은 허리를 숙였다. 열린 쪽의 체결부를 보되 손대지 않았다.

“이 상태부터 찍겠습니다.”

사진을 남긴 뒤 닫힌 쪽과 열린 쪽을 각각 확인했다. 몸체에는 눈에 띄는 깨짐이 없었다.

담당자가 입술을 눌렀다.

“이건 다시 닫으면 밀폐됩니다.”

“다시 닫히는 것과 떨어졌을 때 안 열리는 건 다릅니다.”

서윤은 시험표에 실패 항목을 적었다. 펜을 쥔 검지가 조금 뻣뻣했다.

“손상 영향이 섞이지 않게 남은 샘플로 같은 조건을 확인하겠습니다.”

두 번째 샘플도 모서리 쪽이 닿은 뒤 뚜껑이 벌어졌다.

서윤은 펜 뚜껑을 닫았다.

“어제 손으로 쉽게 열렸던 쪽과 위치가 같습니다.”

담당자는 용기를 돌려 봤다.

시험 직원이 종이표를 집다가 젖은 것을 발견했다. 새 표를 찾느라 주머니와 작업대 서랍을 번갈아 열었다.

서윤은 파일에서 남는 종이를 꺼냈다.

“여기에 옮겨 적으세요. 젖은 표는 버리지 말고 같이 두고요.”

“죄송합니다.”

“시험하다 쏟아진 겁니다. 기록만 안 섞이면 됩니다.”

직원의 어깨가 조금 내려갔다.

서윤은 사진 파일 이름을 보여 줬다.

“이 번호로 맞춰 주세요.”

직원이 종이에 번호를 적었다. 도현은 바닥으로 흘러내린 물을 피해 샘플 상자를 다른 작업대에 올려놓았다.

돌아온 도현이 서윤 옆에 섰다. 서윤은 펜을 다시 쥐었다. 고개를 들지 않아도 도현이 어디에 서 있는지 알았다.

아무도 통과라는 말을 하지 않았다.

◇

회의실에서 담당자가 도면을 펼쳤다.

“높이가 다른 몸체에 뚜껑을 같이 쓰려고 맞물리는 부분에 여유를 줬습니다.”

서윤은 도면 옆에 몸체 치수 기록을 놓았다.

“기존 몸체 금형은 재사용할 수 있다고 하셨죠.”

“네. 다만 뚜껑까지 공용으로 하려면 어렵습니다.”

담당자는 펜으로 품목별 칸을 나눴다.

“몸체마다 뚜껑을 따로 만들면 빨리 정리할 수 있습니다.”

“그러면 지금 확인하려는 불편을 해결하지 못합니다.”

“일단 성능이 나와야죠.”

“맞습니다. 그래서 성능을 낮추자는 게 아닙니다.”

서윤은 나눠진 칸 위에 손가락을 놓았다.

“높이는 달라도 입구 규격은 같습니다. 실제 치수 차이가 어디서 생겼는지 먼저 봐야 합니다.”

도현은 서윤의 손끝이 짚은 곳을 봤다. 말을 보태지 않았다.

서윤은 손가락을 조금 옮겼다. 밴드 끝이 종이에 걸리지 않게 손을 세웠다. 도현의 시선도 잠깐 따라왔다.

담당자가 금형 담당자를 불렀다.

잠시 뒤 들어온 직원은 치수 기록을 읽고 수정 샘플을 집었다. 뚜껑 안쪽을 살핀 뒤 도면 한쪽을 짚었다.

“이 부분을 깎아서 여는 힘을 낮췄습니다. 걸리는 깊이가 같이 줄었네요.”

“몸체 금형을 새로 만들지 않고 비교할 수 있을까요?”

“몸체는 그대로 두고 뚜껑 금형의 체결부를 바꾸는 쪽으로 볼 수 있습니다.”

“전체 규격을 다시 잡아야 합니까?”

“우선 시험용 부품을 바꿔 끼워 보죠. 결과가 나오면 정식 수정 범위를 정하고요.”

서윤은 빈 종이를 앞으로 당겼다.

기존 상태.

쉽게 열리도록 수정한 상태.

체결부를 다시 조정한 상태.

“같은 조건으로 비교해 주세요. 낙하를 통과해도 손으로 못 열면 안 됩니다.”

“한 번에 맞는다는 보장은 없습니다.”

“통과한 것으로 처리해 달라는 요청이 아닙니다.”

서윤이 담당자를 봤다.

“기존 금형으로 어디까지 가능한지 확인하자는 겁니다. 안 되면 안 되는 치수와 시험 결과를 남겨 주세요.”

담당자는 한동안 도면을 보다가 금형 직원에게 물었다.

“오늘 작업 가능합니까?”

“시험용 부품 가공은 가능합니다. 샘플 만드는 시간은 설비 쪽을 확인해야 합니다.”

그제야 도현이 계약 자료를 펼쳤다. 서류가 서윤의 종이에 닿지 않게 옆으로 비켜 놓았다.

“추가 작업에 들어가기 전에 비용 범위를 나누겠습니다.”

담당자의 시선이 도현에게 옮겨갔다.

“이번 수정은 별도 비용이 들어갑니다.”

“최초 견적에 포함된 수정과 시험은 기존 조건대로 정산하겠습니다. 추가 가공은 항목을 나눠 새 견적으로 주세요.”

“가공하다 범위가 더 커지면요?”

“다온리빙의 사전 승인이 필요합니다. 승인 없이 작업한 비용을 합산할 수는 없습니다.”

도현은 견적서의 해당 문장을 짚었다.

“기존 금형 사용 조건도 오늘 합의대로 남기겠습니다.”

담당자가 서윤 쪽을 봤다.

“대표님도 공용으로 계속 가는 게 맞다고 보시는 겁니까?”

도현은 서윤의 시험표를 담당자 앞으로 옮겼다.

“제품 판단은 한 대리가 합니다. 저는 요청한 시험에 필요한 비용과 계약 조건을 확인하겠습니다.”

서윤은 도면에서 눈을 들었다.

도현의 목소리는 높아지지 않았다. 시험표를 놓은 손도 바로 물러났다.

「내 판단이라고.」

도현은 이미 다음 서류를 넘기고 있었다. 서윤은 잠깐 그 손을 봤다. 자신이 적은 시험표를 앞으로 밀어 주던 손이었다.

서윤은 새 견적 요청란에 비교 시험 범위를 적었다. 수정할 곳과 확인할 항목만 쓰고 비용 칸은 비워 뒀다.

글씨 끝이 조금 올라갔다. 서윤은 펜을 고쳐 쥐었다.

◇

점심 뒤에는 금형을 보관한 작업장으로 이동했다.

담당자가 기존 몸체 금형의 관리표와 실제 상태를 보여 줬다. 서윤은 번호를 대조하고 사진을 남겼다.

“이 몸체로 시험 샘플을 만들 수 있는 거죠?”

“네. 보관 상태는 괜찮습니다.”

“수정 이력도 같이 보내 주세요.”

안쪽 설비가 움직이기 시작했다. 담당자의 마지막 말이 소리에 묻혔다.

서윤이 반걸음 가까이 갔다.

“어느 부분을 바꾸신다고요?”

담당자가 도면을 들어 보여 줬다. 서윤은 몸을 숙여 손가락이 가리키는 곳을 봤다.

그때 오른쪽 어깨에 도현의 어깨가 닿았다.

도현도 설명을 들으려고 가까이 선 참이었다.

옷감이 짧게 스쳤다. 서윤은 하려던 말을 멈췄다.

도현의 고개가 조금 돌아왔다. 가까이서 눈이 마주쳤다.

서윤은 숨을 들이쉬다 멈췄다. 도현의 눈이 이렇게 가까울 줄은 몰랐다.

“죄송합니다.”

소음 때문에 입 모양이 먼저 보였다. 뒤늦게 낮은 목소리가 들렸다.

도현이 발을 뒤로 옮겼다. 어깨가 떨어졌다.

서윤도 도면 쪽으로 몸을 돌렸다.

「설명부터 듣자.」

그런데 담당자의 설명이 다시 들리지 않았다. 소음만의 문제는 아니었다. 서윤은 도면을 짚은 손가락에 시선을 맞췄다.

도현이 작업장 벽 쪽을 가리켰다. 표시된 통로를 조금만 벗어나면 소음이 덜한 곳이었다.

“저쪽에서 설명을 이어가면 어떻겠습니까?”

담당자가 고개를 끄덕였다.

서윤은 먼저 걸었다. 도현은 한 걸음 뒤에서 따라왔다.

등 뒤에서 발소리가 났다. 서윤은 파일을 몸 가까이 붙였다.

조용한 곳에 도착하자 펜을 들었다. 적으려던 문장이 바로 떠오르지 않았다.

종이 한쪽에 짧은 선만 그어졌다.

서윤은 그 선을 내려다봤다. 도현은 옆에서 말없이 기다렸다.

“체결부 위치는 그대로 두는 겁니까?”

뒤늦게 질문이 나왔다.

담당자가 도면을 다시 펼쳤다.

“오늘은 걸리는 깊이와 경사부터 바꿔 보려고 합니다.”

서윤은 그 말을 적었다.

어깨가 닿았던 쪽의 옷소매를 당겨 정리했다. 잡은 옷감은 아무렇지 않았다. 손끝만 잠깐 멈췄다.

「이제 안 닿잖아.」

서윤은 펜을 다시 움직였다.

옆에서 도현이 도면 끝을 눌러 줬다. 종이가 말려 올라오지 않았다.

서윤의 손과 도현의 손 사이에 도면이 놓여 있었다. 도현은 손끝에만 힘을 주고 있었다.

이번에는 손이 닿지 않았다.

◇

오후가 길어졌다.

금형 부품의 가공은 끝났지만 샘플을 만들 설비가 비지 않았다. 담당자는 확인할 때마다 돌아와 시간을 고쳤다.

서윤은 그동안 민재가 보낸 고객 자료를 열었다.

휴대전화에 짧은 메시지가 함께 와 있었다.

「그쪽 시험은 어때?」

서윤은 답을 썼다.

「낙하에서 열렸어. 체결부 다시 조정하는 중.」

잠시 뒤 전화가 왔다.

“밥은 먹었어?”

“먹었어. 자료 받았고.”

“자료 말고 밥부터 물어본 건데.”

“둘 다 대답했잖아.”

민재가 짧게 웃었다.

“오늘 돌아오는 거지?”

서윤은 회의실 유리창 너머를 봤다. 담당자가 다른 직원과 일정표를 들여다보고 있었다.

“아직 모르겠어. 샘플이 늦어져.”

“팀장님께는 내가 상황 먼저 말씀드릴까?”

“내가 연락할게. 시험 기록만 정리해서 보내 줘.”

“알겠어. 원본은 남겨 둘게.”

통화를 끝내자 담당자가 들어왔다.

“죄송합니다. 오늘 늦게야 샘플을 만들 수 있겠습니다.”

서윤은 벽시계를 봤다.

“완성되면 바로 시험할 수 있나요?”

“제대로 식힌 뒤 봐야 합니다. 오늘 안에 마치기는 어렵습니다.”

도현이 서윤을 봤다. 서윤도 잠깐 눈을 맞췄다.

도현은 담당자에게 고개를 돌렸다.

“내일 오전에 이어서 확인할 수 있습니까?”

“준비해 두겠습니다.”

서윤은 시험표의 빈칸을 내려다봤다. 오늘은 열렸다는 사실만 확인했다. 새 샘플을 보지 않고 돌아가면 다시 보내 달라고 해야 했다.

“남겠습니다.”

도현은 곧바로 고개를 끄덕였다.

망설임이 없었다. 서윤은 시험표에서 손을 뗐다.

“출장 연장 승인부터 받으세요. 숙박은 비서실에 별도 객실로 요청하겠습니다.”

별도 객실이라는 말에 서윤은 짧게 숨을 내쉬었다. 당연한 말이었다.

「그럼 당연하지.」

서윤은 박 팀장에게 전화를 걸었다. 시험 실패와 추가 작업, 다음 날 확인할 항목을 간단히 보고했다.

박 팀장은 숙박비를 물었다.

“확인해서 문서에 추가하겠습니다.”

“내일까지 보면 결론은 나?”

“결과를 보장할 수는 없습니다. 비교 시험은 마치겠습니다.”

수화기 너머에서 잠깐 숨소리가 들렸다.

“그래. 다녀와서 한꺼번에 말하지 말고 내일 시험 끝나면 바로 연락해.”

“네.”

전화를 끊은 서윤은 출장 연장 사유를 적었다.

도현은 화면을 들여다보지 않았다. 서윤이 손을 멈춘 뒤에야 물었다.

“승인됐습니까?”

“네. 비용 넣어서 다시 올리겠습니다.”

“객실 확인되면 전달하겠습니다.”

서윤이 고개를 들었다. 도현의 시선이 기다리고 있었다.

업무 이야기는 끝났다. 그런데 먼저 눈을 내리는 일이 잠깐 늦어졌다.

서윤은 파일을 당겨 모았다. 도현도 자기 서류를 챙겼다. 종이가 접히지 않게 누르는 손길이 보였다.

서윤은 파일을 닫고 나서야 고개를 돌렸다.

◇

숙소 접수대에서 객실 열쇠를 따로 받았다.

서윤은 샘플 상자를 내려놓고 가방 끈을 고쳐 멨다. 손바닥에 손잡이 자국이 남아 있었다.

도현이 상자를 들어 줬다.

“문 앞까지만 옮기겠습니다.”

“제가 들 수 있습니다.”

도현은 상자를 다시 내밀지 않았다. 그렇다고 먼저 걸어가지도 않았다.

“옮겨도 되겠습니까?”

이번에는 목소리가 조금 낮았다.

서윤은 손바닥을 한번 폈다. 자국이 남은 곳이 당겼다.

도현은 대답을 기다렸다. 상자를 든 손은 그대로였다.

「이렇게 물으면.」

서윤은 손을 내렸다.

“네.”

복도에서 객실을 찾는 동안 말이 없었다.

상자는 도현이 들고 있었다. 서윤은 가방 끈을 잡았다. 끈을 고쳐 멜 필요는 없는데도 손을 놓지 않았다.

도현은 서윤의 걸음에 속도를 맞췄다. 시선은 객실 쪽에 두고 있었다.

서윤은 도현의 옆얼굴을 짧게 봤다. 고개가 돌아오기 전에 앞을 봤다.

도현은 서윤의 방문 옆에 상자를 내려놓았다. 파일을 위에 얹어도 흔들리지 않도록 방향을 바꿨다.

손잡이에서 손을 떼기 전 상자를 한 번 더 확인했다.

“내일 출발 시간은 문자로 보내겠습니다.”

“알겠습니다.”

서윤이 열쇠를 꽂았다.

도현이 가까이 서 있다는 걸 알고 있었다. 열쇠를 돌리는 손끝에 힘이 조금 들어갔다.

문이 열리자 도현은 뒤로 물러났다. 서윤이 들어갈 자리가 넓어졌다.

서윤은 문을 잡은 채 고개를 돌렸다. 도현은 돌아서고 있었다. 걸음은 빠르지 않았다.

서윤은 상자를 안으로 들여놓았다. 손잡이를 잡았던 손에 다시 자국이 눌렸다.

문을 닫으려다 복도 쪽을 한번 봤다.

도현은 자기 객실 앞에서 휴대전화를 꺼내고 있었다.

서윤의 시선이 그 손에 멈췄다.

「출발 시간인가.」

서윤도 가방 안의 휴대전화를 찾았다. 진동이 짧게 울렸다.

제조사 담당자의 메시지였다.

「수정 샘플 나왔습니다. 그런데 내일 직접 열어 보셔야겠습니다.」

(9화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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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도현은 태블릿을 책상 위에 내려놓았다.빈 의자 뒤에 머물던 손이 천천히 내려갔다. 손끝이 의자에서 떨어지는 순간까지 서윤은 보고 있었다.“회사에 온 이유를 묻는 겁니까?”“둘을 다르게 대답할 거예요?”서윤은 책상 모서리에 손을 대지 않았다. 손을 뻗으면 다시 일 이야기로 돌아갈까 봐 망설였다. 손가락을 가볍게 접었다.도현이 입술을 열었다가 닫았다. 대답 전에 숨을 고르는 소리가 들렸다. 가까워서 들리는 소리였다.“다르게 대답해야 합니다.”“그럼 오늘은 됐어요.”서윤이 몸을 돌렸다. 도현은 붙잡지 않았다. 그런데도 등 뒤에 시선이 남아 있었다.서윤이 의자를 당기기 전에 도현이 다시 말했다.“대답을 피하려는 건 아닙니다.”아까보다 목소리가 낮았다.서윤은 돌아보지 않았다.“지금 못 하는 대답이면 준비해서 해요.”의자에 앉자 화면이 눈에 들어왔다. 아직 반품 비용표가 떠 있었다. 서윤은 글자를 읽으려 했다. 읽던 줄에서 눈이 멈췄다.도현의 손이 태블릿 위에 닿았다. 바로 집어 들지는 않았다. 화면 가장자리에 놓인 손끝이 가만히 있었다.“한 대리.”서윤은 화면을 본 채 기다렸다. 대답하면 목소리가 달라질까 봐 입을 다물었다.“업무가 끝난 뒤에 시간을 부탁해도 되겠습니까?”서윤은 그제야 도현을 봤다. 도현은 태블릿이 아니라 서윤을 보고 있었다.「업무가 끝난 뒤.」그 짧은 말이 자꾸 마음에 걸렸다.“목요일에 패널 시험이 잡히면, 결과부터 정리해야 해요.”“그 뒤라도 괜찮습니다.”도현은 재촉하지 않았다. 서윤이 답할 때까지 손도 움직이지 않았다.서윤은 고개를 작게 끄덕였다.그제야 도현이 태블릿을 가져갔다. 책상 위에서 손이 멀어졌다. 서윤은 시선을 화면으로 돌렸다.발소리가 사무실 밖으로 멀어지고 나서야 등받이에 등을 댔다. 짧게 참고 있던 숨이 나왔다.화면 아래로 빵 포장이 조금 나와 있었다.서윤은 남은 빵을 꺼냈다. 포장을 접는 손끝에 힘이 들어갔다.「무슨 대답을 하려고.」한 입을 먹고, 식어 버린 물을 마셨다. 목

  • 전 남친이 새 사장으로 왔다   12화. 밤의 두 자리

    서윤은 메일을 끝까지 읽고 4층 버튼을 눌렀다.엘리베이터 문이 닫혔다. 파일을 받친 손가락에 종이 모서리가 눌렸다.설문만으로는 안 된다는 말은 맞았다. 서윤도 그 말을 했었다.그런데도 화면에서 눈을 떼는 데 조금 걸렸다.사무실에 돌아오자 민재가 의자를 돌렸다.“어떻게 됐어?”“검토 일정은 그대로래.”“원가가 낮아져도?”“실제로 팔린 건 아니니까.”서윤은 파일을 내려놓고 메일을 전달했다. 민재가 화면을 아래로 내렸다.“그럼 지금 판매부터 하라는 거야?”“품질 확인이 남았어. 그 순서는 못 바꿔.”“우리가 할 수 있는 것부터 찾자.”민재가 빈 문서를 열었다.서윤도 의자에 앉았다. 손을 올렸지만 바로 글자를 치지는 못했다.메일에서 읽은 말이 아직 머릿속에 남아 있었다.「틀린 말은 아니야.」서윤은 문서 제목부터 적었다.고객 패널 시험안.◇3월 18일 아침, 서윤은 시험안 첫 장에서 구매 의향이라는 말을 지웠다.옆에 적었던 예상 주문도 지웠다.민재가 가방을 내려놓으며 화면을 봤다.“아예 안 물어보게?”“물어볼 거야. 그냥 사고 싶냐고만 묻지는 않고.”서윤은 빈 용기와 뚜껑을 책상 위에 놓았다. 종이 가격표도 옆에 세웠다.“제품을 써 보고, 가격을 보고, 자기 집에 가져갈 구성을 고르게 할 거야.”“안 고르는 것도 가능하게?”“응. 지금 쓰는 걸 계속 쓰겠다는 선택도 있어야 해.”민재는 뚜껑을 집었다가 내려놨다.“좋다고 해 놓고 가격 앞에서는 안 고를 수도 있겠네.”“그걸 봐야 해.”진행 순서는 간단히 정했다. 평소 쓰는 용기를 확인한 뒤 샘플과 가격을 보여 준다. 마지막에는 선택을 바꾸거나 모두 취소할 수 있게 했다.민재가 마지막 칸을 가리켰다.“여기서 결제는 안 받고?”“안 받아. 주문으로 기록하면 안 돼.”“그럼 매출 증거는 여전히 없네.”“맞아. 매출을 대신할 수는 없어.”서윤은 문서 맨 위에 적었다.비판매형 시험. 결제와 주문 접수는 진행하지 않음.선택한 구성과 구매를 포기한 이유는 따로

  • 전 남친이 새 사장으로 왔다   11화. 돌아온 견적

    서윤은 종이 끝을 쥔 손에서 힘을 뺐다.도현의 손이 바로 앞에 있었다. 서류를 건네면 손끝이 닿을 만큼 가까웠다.“여기 있습니다.”서윤은 흩어진 서류를 포갰다. 제목이 보인 종이를 따로 빼지도, 다시 들여다보지도 않았다.종이를 내미는 동안 도현은 손을 움직이지 않았다. 서윤이 끝을 놓은 뒤에야 받아 갔다.손끝은 닿지 않았다. 서윤은 빈손을 무릎 위로 내렸다.도현은 서류를 자료철 안에 넣었다.“감사합니다.”가까이서 들으니 목소리가 낮았다. 서윤은 대답 대신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차가 곧은 길로 들어섰다. 서윤은 무릎 위의 시험표를 내려다봤다. 마지막 줄까지 적었는데도 펜을 다시 꺼냈다.아버지 회사.알고 있던 이름 옆에 처음 보는 말이 붙어 있었다. 서윤이 모르는 도현의 시간이 그 자료철 안에 있었다.펜을 쥔 손가락을 고쳐 잡았다. 옆을 보면 도현의 얼굴부터 살필 것 같았다.「묻지 말자.」“한 대리.”펜 끝이 종이 위에서 멈췄다. 서윤은 고개만 조금 돌렸다.“파일 드리겠습니다.”도현이 빈 파일을 내밀었다. 파일 끝을 받으려던 서윤의 손이 잠깐 머뭇거렸다. 도현의 손가락이 접힌 부분을 잡고 있었다.서윤은 반대쪽을 받았다. 시험표를 끼우고 가방 안에 넣었다.“네.”묻지는 않았다.도현도 자료철을 닫았다. 좌석 사이에 놓였던 서류가 사라졌다. 두 사람의 손 사이에는 아무것도 없었다.서윤은 무릎 위에 손을 모았다. 도현의 소매 끝이 시야에 들어왔다. 고개를 돌리지 않아도 보이는 거리였다.숨을 천천히 내쉬었다.서윤은 창 쪽으로 몸을 조금 돌렸다.◇3월 17일 오전, 제조사에서 새 견적서가 도착했다.서윤은 외투를 의자에 걸치다 말고 앉았다. 첨부 파일은 수정 견적서와 포장 변경안이었다.옆자리 민재가 모니터 쪽으로 고개를 기울였다.“왔어?”“응. 포장 비용까지.”“드디어 빈칸 없어지겠네.”서윤은 견적서를 열었다.완성품은 2,000세트 생산 조건이었다. 기존 몸체 금형을 쓰고 뚜껑 체결부만 수정했다. 조립과 기본 포장은

  • 전 남친이 새 사장으로 왔다   10화. 남아 있는 습관

    서윤은 방문 손잡이를 잡고 메시지를 다시 읽었다.직접 열어 봐야 한다고 했다. 사진도, 측정값도 없었다.복도 끝에서 도현이 휴대전화를 보고 있었다. 서윤은 문을 조금 더 열었다.“대표님.”도현이 고개를 들었다. 서윤을 보자 휴대전화를 쥔 손이 내려갔다.“제조사에서 연락이 왔습니다. 샘플은 나왔는데 내일 직접 열어 보라고 합니다.”“문제가 있다는 뜻입니까?”“아직은 모르겠습니다. 수치를 받아 보겠습니다.”도현의 시선이 서윤의 휴대전화에 닿았다. 가까이 오지는 않았다. 서윤은 화면을 내밀려던 손을 멈췄다.둘 사이에는 열린 문 하나만큼의 거리가 있었다.“확인되면 공유해 주세요.”낮은 목소리였다. 조용한 복도에서는 끝까지 또렷하게 들렸다.“네.”서윤은 객실로 들어왔다. 상자 위에 파일을 놓고, 외투도 벗지 않은 채 제조사 담당자에게 전화했다.“열 때 걸리는 겁니까?”“닫히는 건 괜찮습니다. 그런데 손으로 열기가 좀 뻑뻑합니다.”“측정은요?”“내일 오전에 하려고 합니다.”“지금 여러 번 열지는 말아 주세요. 처음 여는 샘플도 따로 남겨 두시고요.”통화를 마친 서윤은 시험표에 항목을 더했다. 낙하 뒤 닫힘 상태와 처음 여는 힘, 반복 사용 뒤 변화를 적었다. 도현에게도 내용을 보냈다.답은 곧 왔다.「내일 아침 식사 후 출발하겠습니다. 접수대 앞에서 뵙겠습니다.」서윤은 가방에서 충전기를 꺼냈다. 짧게 답하고 휴대전화를 뒤집었다.객실 벽 너머로 문 닫히는 소리가 났다.펜을 들던 손이 멈췄다. 복도에서 들었던 목소리가 아직 귀에 남아 있었다.「내일 또 보겠네.」당연한 일을 새삼 생각했다.서윤은 펜을 내려놓았다. 밴드 끝이 조금 들떠 있었다. 손끝으로 눌러 붙인 뒤 시험표를 다시 펼쳤다.◇3월 15일 아침, 시험실 작업대에 수정 샘플이 놓여 있었다.담당자가 뚜껑 가장자리를 짚었다.“걸리는 깊이를 늘렸습니다. 경사도 바꿨고요.”“어제 실패한 샘플과 표시를 다르게 해 주세요.”서윤은 샘플 번호를 확인했다. 도현은 작업대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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