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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화. 뚜껑 하나의 근거

Author: Jino
last update publish date: 2026-10-16 18:43:03

서윤은 중단 조항 아래에 첫 문장을 적었다.

신규 프로젝트 중단 시 기존 고객의 사용 불편은 해소되지 않음.

한 번 읽고 문장 끝을 지웠다.

틀린 말은 아니었다. 하지만 불편이 남는다고 해서 꼭 이 제품을 계속 만들어야 하는 건 아니었다.

서윤은 확인할 항목을 붙였다. 기존 용기의 뚜껑을 바꿀 수 있는지. 교체가 안 된다는 안내 뒤에도 고객이 구매했는지. 신제품 말고 다른 방법은 얼마가 들고 얼마나 걸리는지.

민재가 화면을 봤다.

“새 제품 말고 뚜껑만 만드는 것도 비교하려고?”

“응. 그걸로 해결되면 그쪽이 나을 수도 있으니까.”

“기존 제품들은 규격이 다 달라.”

“그래서 얼마나 다른지 확인해야 해.”

민재는 책상 아래 상자에서 고객이 가져왔던 용기 사진을 꺼냈다. 몸체는 비슷했다. 뚜껑 안쪽 홈은 달랐다.

“문의한 사람한테 맞는 뚜껑을 찾아 주는 것도 일이겠네.”

“그 비용도 넣자.”

서윤은 검토서에 줄을 더했다.

계속 만들고 싶다는 말은 쓰지 않았다. 멈추면 해야 할 일을 적었다.

◇

3월 12일 오전, 고객관리 담당자가 자료를 보내 왔다.

구매 이력이 확인된 고객과 확인되지 않은 고객이 나뉘어 있었다. 이후 구매가 없다고 해서 이탈로 볼 수는 없다는 설명도 있었다.

민재가 옆자리에서 말했다.

“어제 요청한 기간으로 맞췄어. 중복 문의는 따로 표시했고.”

“교체 부품 주문은?”

“다른 제품에서 실제로 판매한 건 있어. 우리 보관 용기는 문의만 있고.”

“그럼 주문 수요로 묶으면 안 되겠다.”

서윤은 표 제목을 ‘교체 부품 문의 현황’으로 고쳤다. 실제 판매된 부품의 주문 내역은 따로 붙였다.

박 팀장이 커피를 들고 다가왔다.

“중단 검토서는 어디까지 됐어?”

“대안 비교 중입니다.”

“우리는 계속해야 한다고 써야 하는 거 아니야?”

“계속할 이유를 확인하려면 다른 방법도 봐야 합니다.”

박 팀장은 커피를 내려놓았다.

“다른 방법이 더 싸게 나오면?”

“그럼 그 방법을 검토해야죠.”

박 팀장의 손이 넥타이로 갔다.

서윤은 화면을 돌렸다.

“기존 용기마다 뚜껑을 만들면 규격별 금형과 재고가 필요합니다. 공용 뚜껑을 쓰는 신제품은 초기 수정 비용이 들고요. 비용은 확인 중입니다.”

“우리가 이미 반년을 썼잖아.”

“진행 내역에 넣었습니다. 앞으로 쓸 비용은 따로 봐야 합니다.”

박 팀장은 표를 훑었다.

“그래도 이건 좀 약하지 않아? 고객이 불편하다는 얘기잖아.”

서윤은 사용자 조사 기록을 열었다.

“맞는 뚜껑을 찾는 데 시간이 걸렸습니다. 설명을 들은 뒤에는 같은 규격끼리 바로 바꿔 끼웠고요.”

“그래서 팔린다는 거야?”

“아직 구매는 확인하지 못했습니다.”

서윤은 말을 고르며 화면에서 손을 뗐다.

“대신 어떤 불편을 줄이는지는 확인했습니다. 다음 검증 전에 중단할지 판단해 달라는 겁니다.”

박 팀장은 한동안 말이 없었다.

민재가 덧붙였다.

“조사 영상도 해당 구간만 찾을 수 있게 표시했습니다. 원본은 그대로 있고요.”

“일단 나한테 보내. 읽어 볼게.”

박 팀장이 돌아간 뒤 민재는 의자를 당겼다.

“말하고 나면 기운 빠지지?”

서윤은 저장 버튼을 눌렀다.

“조금.”

민재가 자기 책상에 있던 물병을 건넸다.

“이건 확인 안 하고 마셔도 돼.”

서윤은 병뚜껑을 열었다. 잠깐 웃음이 났다.

◇

오후에 검토서를 제출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비서실에서 전화가 왔다.

“한 대리님. 대표님께서 사용성 기록을 함께 확인하고 싶다고 하십니다. 지금 올라오실 수 있을까요?”

서윤은 열어 둔 제조사 메일을 봤다. 금형 상태는 아직 확인 중이었다. 수정 방식에 대한 답도 오지 않았다.

“네. 자료 챙겨서 가겠습니다.”

민재가 고개를 들었다.

“검토서 때문에?”

“사용성 기록이 있대.”

“월요일 조사?”

“아직 모르겠어.”

서윤은 관찰표와 금형 수정안을 파일에 넣었다. 샘플 상자도 들려다가 내려놓았다.

사장실에는 이미 한 세트가 있었다.

그곳에 남긴 뒤로 한 번도 떠올리지 못한 샘플이었다.

파일을 잡은 손에 힘이 조금 들어갔다.

「그걸 보고 있었나.」

6층에 도착하자 비서가 문을 열어 줬다.

도현은 회의 테이블에 앉아 있었다. 용기와 뚜껑이 따로 놓여 있었다. 태블릿 옆에는 출력한 검토서가 있었다.

서윤은 그 자료부터 봤다. 도현의 손이 바로 옆에 놓여 있었다.

“앉으세요.”

목소리는 낮고 차분했다.

“샘플은 더 안 가져왔습니다.”

“이걸로 보겠습니다.”

서윤은 맞은편 의자를 당겼다. 파일을 내려놓고 나서야 도현을 봤다. 도현의 시선이 기다리고 있었다.

서윤은 먼저 눈을 내렸다.

도현이 종이 한 장을 건넸다.

서윤은 종이 끝을 잡았다. 도현이 손을 놓는 것을 보고 자기 쪽으로 당겼다.

날짜와 사용 조건이 적힌 표였다.

마른 손.

젖은 손.

빈 용기 적층.

내용물을 넣은 상태.

첫 줄에는 뚜껑을 열며 손을 몇 번 고쳐 잡았는지 적혀 있었다. 젖은 손으로는 손가락이 미끄러져 몸체를 눌렀다는 기록도 있었다.

서윤은 테이블 위 용기를 봤다.

작은 용기 안쪽에 물기가 남아 있었다.

시선이 그 옆에 놓인 도현의 손으로 옮겨 갔다. 이 손으로 용기를 잡고 뚜껑을 열었을 것이다.

“직접 해 보신 겁니까?”

“네.”

도현이 뚜껑을 들어 보였다.

“사용성 확인용으로 남겨 달라고 했으니까요.”

서윤은 종이를 잡은 손끝을 가만히 폈다.

단순히 생김새를 보려는 줄 알았다.

「정말 써 봤네.」

다음 칸을 읽었다. 높이가 다른 용기를 쌓았을 때 맨 위 용기의 위치가 조금씩 달라졌다. 완전히 닫힌 경우와 한쪽이 덜 닫힌 경우도 나눠 적혀 있었다.

“덜 닫힌 것도 시험하셨네요.”

“닫았다고 생각했는데 한쪽이 떠 있었습니다.”

“이 샘플은 마감이 양산품하고 다릅니다.”

“들었습니다. 그래서 제품 결함으로 확정하지는 않았습니다.”

도현은 기록 오른쪽 끝을 가리켰다.

조건 재확인 필요.

서윤은 그 글씨를 봤다. 종이 위에 머문 도현의 손끝도 잠깐 보였다.

좋다거나 나쁘다는 말은 없었다. 무엇을 했고 어디서 멈췄는지가 적혀 있었다.

서윤이 준비한 설명이 아니라, 직접 쓰면서 생긴 일을 보고 있었다.

서윤은 고개를 들었다.

도현은 재촉하지 않았다. 서윤이 다 읽을 때까지 그대로 기다리고 있었다.

눈이 마주쳤다. 서윤은 바로 피하지 못했다. 말을 꺼내려고 입술을 뗀 뒤에야 종이를 내려다봤다.

“젖은 손으로 여는 건 현장에서도 다시 봐야겠습니다.”

“월요일에는 여는 데 걸리는 시간을 따로 재지 않았습니까?”

“맞는 뚜껑을 찾고 끼우는 과정에 집중했습니다. 여는 동작은 영상에 있지만 손 상태까지 통제하지 않았고요.”

“그럼 비교 자료로 바로 쓰기는 어렵겠군요.”

“네. 관찰 사례로만 남기겠습니다.”

도현이 고개를 끄덕였다.

“검토서도 그렇게 작성하셨더군요.”

서윤의 손이 파일 위에서 멈췄다.

“어떤 부분 말씀하십니까?”

“구매가 확인되지 않은 고객을 이탈로 적지 않은 부분요.”

“확인된 건 문의 뒤의 안내 내용뿐입니다.”

“중단하면 그 안내는 계속 같습니까?”

“지금 상태로는 그렇습니다. 맞는 교체 뚜껑을 판매하지 않으니까요.”

“신제품을 만들면 기존 용기에도 쓸 수 있습니까?”

“아닙니다.”

서윤은 바로 답했다.

“기존 제품 전체와 호환되지는 않습니다. 새 라인업의 같은 규격 안에서 높이가 다른 용기끼리 공유하는 방식입니다.”

검토서의 대안 비교표를 펼쳤다. 종이 모서리가 파일에 걸렸다. 서윤은 손끝으로 눌러 펴며 말을 이었다.

“기존 고객의 불편을 당장 전부 해결한다고 적지는 않았습니다. 다만 새 용기를 사도 같은 문제가 반복되는 건 줄일 수 있습니다. 뚜껑을 별도로 공급하면 몸체를 계속 쓸 수도 있고요.”

도현은 표를 읽었다.

서윤은 말을 마친 뒤에도 종이 모서리를 누르고 있었다. 도현의 시선이 움직이는 곳을 따라가다 손을 거뒀다.

“별도 공급 비용은 아직 비어 있군요.”

“확인 중입니다. 그 비용과 성능 시험 결과를 받은 뒤 다시 판단해 달라고 요청했습니다.”

“어디까지 시험하면 계속할지 결정할 수 있습니까?”

서윤은 금형 수정안을 꺼냈다.

“밀폐 성능과 개폐력, 반복 사용 뒤 변형입니다. 하나라도 기준을 못 맞추면 추가 수정 비용을 봐야 합니다.”

도현이 뚜껑을 내려놓았다.

“열리는 힘도 그 시험에 포함시키세요.”

“네.”

서윤은 펜을 들었다. 도현의 기록을 수정안 옆에 놓았다.

직접 적은 글씨가 가까이 보였다. 서윤은 잠시 그 기록을 본 뒤 펜 끝을 내렸다.

◇

“어느 쪽이 잘 안 열렸습니까?”

서윤이 묻자 도현은 작은 용기를 앞으로 밀었다.

“이쪽입니다. 마른 손으로는 열었는데, 손에 물이 묻으면 잡는 위치를 바꿔야 했습니다.”

서윤은 뚜껑 가장자리를 눌렀다.

맞물리는 홈은 안쪽에 있었다. 손가락을 걸 수 있는 부분은 좁았다.

“이렇게 잡으셨습니까?”

“조금 더 안쪽이었습니다.”

도현이 용기 몸체를 잡았다.

서윤은 뚜껑에 걸었던 손가락을 옮겼다. 몸체를 잡은 도현의 손이 가까웠다. 손끝을 조금만 펴도 닿을 거리였다.

서윤은 뚜껑만 봤다.

당기자 한쪽이 들렸다. 반대쪽은 그대로 남았다.

“여기가 먼저 풀려야 하는데.”

서윤은 용기를 돌렸다.

도현도 그쪽을 보려 손을 옮겼다. 서윤의 손등에 도현의 손등이 닿았다.

짧은 접촉이었다.

손등의 온기가 먼저 느껴졌다. 서윤은 숨을 들이쉬다 멈췄다. 당기던 힘이 풀렸다.

들렸던 뚜껑이 다시 내려앉았다.

「왜 힘을 놓쳐.」

도현이 먼저 손을 뗐다.

“제가 잡고 있어서 보기 어렵겠네요.”

목소리는 아까와 다르지 않았다. 서윤은 그게 다행인지 아닌지 생각하지 않으려 했다.

도현은 용기를 내려놓고 의자를 조금 뒤로 뺐다.

서윤 앞에 빈자리가 생겼다. 가까이 있던 손도 멀어졌다.

서윤은 펜을 내려놓고 용기를 다시 들었다. 손등을 문지르고 싶었지만 그러지 않았다. 뚜껑 안쪽을 확인했다.

“몸체가 움직여서 그런 건 아닙니다.”

목소리는 평소대로 나왔다.

그제야 참았던 숨을 조금 내쉬었다.

“손가락이 걸리는 부분하고 체결부가 풀리는 위치를 같이 봐야 합니다.”

“세게 닫히면 덜 새는 것 아닙니까?”

“닫는 힘만 늘리면 열 때도 힘이 더 필요할 수 있습니다. 수정한 뒤 두 가지를 같이 확인해야 합니다.”

서윤은 가장자리 한 곳을 가리켰다.

“여기를 바꿨을 때 반대쪽이 어떻게 움직이는지도요.”

도현은 다가오지 않았다. 서윤이 용기를 돌려 보여 주자 그제야 시선을 낮췄다.

손을 뻗지 않고 눈으로만 확인했다.

서윤은 용기를 든 손에 힘을 조금 풀었다.

「이렇게까지 물러날 필요는 없는데.」

생각이 들자마자 뚜껑을 다시 봤다.

“기록에 남겨 주시겠습니까?”

“제조사에도 전달하겠습니다.”

서윤은 도현의 사용 기록에 표시했다.

젖은 손 조건 추가.

손가락 지지 위치 확인.

밀폐력과 개폐력 동시 검증.

펜 끝이 종이 위를 움직였다. 도현은 기다렸다.

서윤이 표시한 부분을 보여 주면 그곳만 봤다. 설명이 끝나기 전에 말을 끊지도 않았다.

서윤은 뚜껑을 들고 손가락이 걸리는 자리를 다시 짚었다. 도현의 시선이 그 손끝을 따라왔다.

조금 전에는 그 시선까지 신경 쓰였다. 지금은 설명을 이어 갈 수 있었다.

도현이 고개를 들 때마다 서윤도 얼굴을 봤다. 묻는 말이 끝나면 답했다. 목소리가 가까워져도 급히 눈을 내리지 않았다.

용기를 내려놓은 뒤에야 알았다.

한동안 도현의 얼굴을 피하지 않고 있었다.

서윤은 내려놓은 용기의 가장자리를 손끝으로 한 번 눌렀다. 이제 놓아도 되는데 손이 남아 있었다.

도현이 검토서를 덮었다.

“이 기록이 계속 진행할 근거가 될까요?”

서윤은 잠깐 생각했다.

“잘 안 열린다는 것만으로는 안 됩니다.”

“그럼요?”

짧은 물음이었다. 끝이 조금 낮아졌다.

서윤은 그 목소리를 듣고 나서 답했다.

“고쳐야 할 부분을 시험할 근거는 됩니다. 고칠 수 있는지는 시험해야 알고요.”

도현의 손이 닫힌 자료 위에 놓였다.

서윤은 그 손을 봤다가 시선을 올렸다.

“그렇게 정리해 주세요.”

서윤은 고개를 끄덕였다.

계속해도 된다는 약속은 아니었다.

그래도 해야 할 일은 아까보다 분명했다.

손등에 닿았던 감각은 아직 선명했다. 서윤은 자료를 모으며 손끝을 가지런히 맞췄다.

「일 얘기만 했는데.」

◇

4층으로 돌아오자 민재가 샘플 상자를 꺼내 놓고 있었다.

“뭘 봤어?”

“사장실에 남긴 샘플 사용 기록.”

“그걸 써 봤대?”

“응. 물도 넣고 쌓아 봤어.”

민재는 상자 속 용기를 들었다.

“이걸?”

“젖은 손으로 열 때 걸리는 부분이 있대. 우리도 조건 맞춰서 봐야겠어.”

서윤은 제조사에 보낼 메일을 열었다.

양산품과 다른 샘플에서 생긴 현상임을 적었다. 금형 수정으로 해결할 수 있는지, 손가락이 닿는 위치도 바꿔야 하는지 물었다.

민재가 뚜껑을 닫았다가 열었다.

“이건 잘 열리는데.”

“손에 물 묻혀서 다시 해 보자. 한 번으로 결론 내리지 말고.”

“알았어.”

서윤은 도현의 기록을 첨부했다. 현장 조사와 구분해 파일명을 정리하고 메일을 보냈다.

보내고 나서도 화면에 눈이 머물렀다.

젖은 손으로 용기를 잡던 도현이 떠올랐다. 서윤이 읽는 동안 기다리던 얼굴도 생각났다.

서윤은 손등을 책상 위에 내려놓았다. 차가운 감촉에 손끝을 폈다.

박 팀장이 자리에서 물었다.

“위에서는 뭐래?”

서윤은 고개를 들었다.

“성능 시험에 개폐력을 같이 넣으라고 했습니다.”

“계속하라는 뜻이야?”

“시험 결과를 보자는 뜻입니다.”

박 팀장은 입술을 눌렀다.

“시험도 돈인데.”

“금액과 일정 확인하겠습니다.”

대답을 마쳤을 때 전화가 울렸다.

제조사 담당자였다.

서윤은 바로 수화기를 들었다.

“네. 한서윤입니다.”

“보내 주신 기록 봤습니다. 손으로 잡는 위치까지 보려면 사진만으로는 어렵겠습니다.”

서윤은 메모장을 당겼다.

“현장에서 확인할 수 있을까요?”

“몸체 금형은 상태 확인했고요. 체결부 수정안은 시험 일정부터 잡아야 합니다.”

옆에서 민재가 용기를 내려놓았다.

담당자의 말이 이어졌다.

“이번 주 안에 공장으로 오실 수 있습니까?”

“이번 주 안이요?”

“시험 설비에 빈 시간이 생겼습니다. 놓치면 다음 일정은 다시 잡아야 합니다. 체결부를 어느 방향으로 바꿀지 현장에서 같이 보셔야 하고요.”

서윤은 책상 위 달력을 봤다.

3월 12일. 수요일이었다.

“가능한 시간을 메일로 보내 주세요. 시험 범위하고 비용도 함께 부탁드립니다.”

전화를 끊자 박 팀장이 다가왔다.

“공장에 오라고?”

“네. 이번 주 안에요.”

“자료로 먼저 하면 안 돼?”

서윤은 조금 전 표시한 종이를 봤다.

손가락 지지 위치.

체결부가 풀리는 순서.

도현이 잡아 준 몸체와 끝까지 열리지 않던 뚜껑이 떠올랐다. 사진에는 그 힘이 나오지 않았다.

“직접 봐야 할 것 같습니다.”

박 팀장은 달력을 보다가 넥타이를 만졌다.

“출장 승인부터 받아야 해. 지금 우리 팀 상황 알잖아.”

서윤은 메일함을 새로 고쳤다.

제조사의 일정표가 와 있었다. 회신 기한은 내일 오전까지였다.

서윤은 검토서 옆에 출장 신청 양식을 열었다.

그 옆에는 도현이 남긴 기록이 있었다. 서윤은 종이 끝을 가볍게 눌렀다.

멈추지 말아야 할 이유를 썼다.

이제는 그 이유를 확인하러 갈 수 있는지부터 결정해야 했다.

(7화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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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도현은 태블릿을 책상 위에 내려놓았다.빈 의자 뒤에 머물던 손이 천천히 내려갔다. 손끝이 의자에서 떨어지는 순간까지 서윤은 보고 있었다.“회사에 온 이유를 묻는 겁니까?”“둘을 다르게 대답할 거예요?”서윤은 책상 모서리에 손을 대지 않았다. 손을 뻗으면 다시 일 이야기로 돌아갈까 봐 망설였다. 손가락을 가볍게 접었다.도현이 입술을 열었다가 닫았다. 대답 전에 숨을 고르는 소리가 들렸다. 가까워서 들리는 소리였다.“다르게 대답해야 합니다.”“그럼 오늘은 됐어요.”서윤이 몸을 돌렸다. 도현은 붙잡지 않았다. 그런데도 등 뒤에 시선이 남아 있었다.서윤이 의자를 당기기 전에 도현이 다시 말했다.“대답을 피하려는 건 아닙니다.”아까보다 목소리가 낮았다.서윤은 돌아보지 않았다.“지금 못 하는 대답이면 준비해서 해요.”의자에 앉자 화면이 눈에 들어왔다. 아직 반품 비용표가 떠 있었다. 서윤은 글자를 읽으려 했다. 읽던 줄에서 눈이 멈췄다.도현의 손이 태블릿 위에 닿았다. 바로 집어 들지는 않았다. 화면 가장자리에 놓인 손끝이 가만히 있었다.“한 대리.”서윤은 화면을 본 채 기다렸다. 대답하면 목소리가 달라질까 봐 입을 다물었다.“업무가 끝난 뒤에 시간을 부탁해도 되겠습니까?”서윤은 그제야 도현을 봤다. 도현은 태블릿이 아니라 서윤을 보고 있었다.「업무가 끝난 뒤.」그 짧은 말이 자꾸 마음에 걸렸다.“목요일에 패널 시험이 잡히면, 결과부터 정리해야 해요.”“그 뒤라도 괜찮습니다.”도현은 재촉하지 않았다. 서윤이 답할 때까지 손도 움직이지 않았다.서윤은 고개를 작게 끄덕였다.그제야 도현이 태블릿을 가져갔다. 책상 위에서 손이 멀어졌다. 서윤은 시선을 화면으로 돌렸다.발소리가 사무실 밖으로 멀어지고 나서야 등받이에 등을 댔다. 짧게 참고 있던 숨이 나왔다.화면 아래로 빵 포장이 조금 나와 있었다.서윤은 남은 빵을 꺼냈다. 포장을 접는 손끝에 힘이 들어갔다.「무슨 대답을 하려고.」한 입을 먹고, 식어 버린 물을 마셨다. 목

  • 전 남친이 새 사장으로 왔다   12화. 밤의 두 자리

    서윤은 메일을 끝까지 읽고 4층 버튼을 눌렀다.엘리베이터 문이 닫혔다. 파일을 받친 손가락에 종이 모서리가 눌렸다.설문만으로는 안 된다는 말은 맞았다. 서윤도 그 말을 했었다.그런데도 화면에서 눈을 떼는 데 조금 걸렸다.사무실에 돌아오자 민재가 의자를 돌렸다.“어떻게 됐어?”“검토 일정은 그대로래.”“원가가 낮아져도?”“실제로 팔린 건 아니니까.”서윤은 파일을 내려놓고 메일을 전달했다. 민재가 화면을 아래로 내렸다.“그럼 지금 판매부터 하라는 거야?”“품질 확인이 남았어. 그 순서는 못 바꿔.”“우리가 할 수 있는 것부터 찾자.”민재가 빈 문서를 열었다.서윤도 의자에 앉았다. 손을 올렸지만 바로 글자를 치지는 못했다.메일에서 읽은 말이 아직 머릿속에 남아 있었다.「틀린 말은 아니야.」서윤은 문서 제목부터 적었다.고객 패널 시험안.◇3월 18일 아침, 서윤은 시험안 첫 장에서 구매 의향이라는 말을 지웠다.옆에 적었던 예상 주문도 지웠다.민재가 가방을 내려놓으며 화면을 봤다.“아예 안 물어보게?”“물어볼 거야. 그냥 사고 싶냐고만 묻지는 않고.”서윤은 빈 용기와 뚜껑을 책상 위에 놓았다. 종이 가격표도 옆에 세웠다.“제품을 써 보고, 가격을 보고, 자기 집에 가져갈 구성을 고르게 할 거야.”“안 고르는 것도 가능하게?”“응. 지금 쓰는 걸 계속 쓰겠다는 선택도 있어야 해.”민재는 뚜껑을 집었다가 내려놨다.“좋다고 해 놓고 가격 앞에서는 안 고를 수도 있겠네.”“그걸 봐야 해.”진행 순서는 간단히 정했다. 평소 쓰는 용기를 확인한 뒤 샘플과 가격을 보여 준다. 마지막에는 선택을 바꾸거나 모두 취소할 수 있게 했다.민재가 마지막 칸을 가리켰다.“여기서 결제는 안 받고?”“안 받아. 주문으로 기록하면 안 돼.”“그럼 매출 증거는 여전히 없네.”“맞아. 매출을 대신할 수는 없어.”서윤은 문서 맨 위에 적었다.비판매형 시험. 결제와 주문 접수는 진행하지 않음.선택한 구성과 구매를 포기한 이유는 따로

  • 전 남친이 새 사장으로 왔다   11화. 돌아온 견적

    서윤은 종이 끝을 쥔 손에서 힘을 뺐다.도현의 손이 바로 앞에 있었다. 서류를 건네면 손끝이 닿을 만큼 가까웠다.“여기 있습니다.”서윤은 흩어진 서류를 포갰다. 제목이 보인 종이를 따로 빼지도, 다시 들여다보지도 않았다.종이를 내미는 동안 도현은 손을 움직이지 않았다. 서윤이 끝을 놓은 뒤에야 받아 갔다.손끝은 닿지 않았다. 서윤은 빈손을 무릎 위로 내렸다.도현은 서류를 자료철 안에 넣었다.“감사합니다.”가까이서 들으니 목소리가 낮았다. 서윤은 대답 대신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차가 곧은 길로 들어섰다. 서윤은 무릎 위의 시험표를 내려다봤다. 마지막 줄까지 적었는데도 펜을 다시 꺼냈다.아버지 회사.알고 있던 이름 옆에 처음 보는 말이 붙어 있었다. 서윤이 모르는 도현의 시간이 그 자료철 안에 있었다.펜을 쥔 손가락을 고쳐 잡았다. 옆을 보면 도현의 얼굴부터 살필 것 같았다.「묻지 말자.」“한 대리.”펜 끝이 종이 위에서 멈췄다. 서윤은 고개만 조금 돌렸다.“파일 드리겠습니다.”도현이 빈 파일을 내밀었다. 파일 끝을 받으려던 서윤의 손이 잠깐 머뭇거렸다. 도현의 손가락이 접힌 부분을 잡고 있었다.서윤은 반대쪽을 받았다. 시험표를 끼우고 가방 안에 넣었다.“네.”묻지는 않았다.도현도 자료철을 닫았다. 좌석 사이에 놓였던 서류가 사라졌다. 두 사람의 손 사이에는 아무것도 없었다.서윤은 무릎 위에 손을 모았다. 도현의 소매 끝이 시야에 들어왔다. 고개를 돌리지 않아도 보이는 거리였다.숨을 천천히 내쉬었다.서윤은 창 쪽으로 몸을 조금 돌렸다.◇3월 17일 오전, 제조사에서 새 견적서가 도착했다.서윤은 외투를 의자에 걸치다 말고 앉았다. 첨부 파일은 수정 견적서와 포장 변경안이었다.옆자리 민재가 모니터 쪽으로 고개를 기울였다.“왔어?”“응. 포장 비용까지.”“드디어 빈칸 없어지겠네.”서윤은 견적서를 열었다.완성품은 2,000세트 생산 조건이었다. 기존 몸체 금형을 쓰고 뚜껑 체결부만 수정했다. 조립과 기본 포장은

  • 전 남친이 새 사장으로 왔다   10화. 남아 있는 습관

    서윤은 방문 손잡이를 잡고 메시지를 다시 읽었다.직접 열어 봐야 한다고 했다. 사진도, 측정값도 없었다.복도 끝에서 도현이 휴대전화를 보고 있었다. 서윤은 문을 조금 더 열었다.“대표님.”도현이 고개를 들었다. 서윤을 보자 휴대전화를 쥔 손이 내려갔다.“제조사에서 연락이 왔습니다. 샘플은 나왔는데 내일 직접 열어 보라고 합니다.”“문제가 있다는 뜻입니까?”“아직은 모르겠습니다. 수치를 받아 보겠습니다.”도현의 시선이 서윤의 휴대전화에 닿았다. 가까이 오지는 않았다. 서윤은 화면을 내밀려던 손을 멈췄다.둘 사이에는 열린 문 하나만큼의 거리가 있었다.“확인되면 공유해 주세요.”낮은 목소리였다. 조용한 복도에서는 끝까지 또렷하게 들렸다.“네.”서윤은 객실로 들어왔다. 상자 위에 파일을 놓고, 외투도 벗지 않은 채 제조사 담당자에게 전화했다.“열 때 걸리는 겁니까?”“닫히는 건 괜찮습니다. 그런데 손으로 열기가 좀 뻑뻑합니다.”“측정은요?”“내일 오전에 하려고 합니다.”“지금 여러 번 열지는 말아 주세요. 처음 여는 샘플도 따로 남겨 두시고요.”통화를 마친 서윤은 시험표에 항목을 더했다. 낙하 뒤 닫힘 상태와 처음 여는 힘, 반복 사용 뒤 변화를 적었다. 도현에게도 내용을 보냈다.답은 곧 왔다.「내일 아침 식사 후 출발하겠습니다. 접수대 앞에서 뵙겠습니다.」서윤은 가방에서 충전기를 꺼냈다. 짧게 답하고 휴대전화를 뒤집었다.객실 벽 너머로 문 닫히는 소리가 났다.펜을 들던 손이 멈췄다. 복도에서 들었던 목소리가 아직 귀에 남아 있었다.「내일 또 보겠네.」당연한 일을 새삼 생각했다.서윤은 펜을 내려놓았다. 밴드 끝이 조금 들떠 있었다. 손끝으로 눌러 붙인 뒤 시험표를 다시 펼쳤다.◇3월 15일 아침, 시험실 작업대에 수정 샘플이 놓여 있었다.담당자가 뚜껑 가장자리를 짚었다.“걸리는 깊이를 늘렸습니다. 경사도 바꿨고요.”“어제 실패한 샘플과 표시를 다르게 해 주세요.”서윤은 샘플 번호를 확인했다. 도현은 작업대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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